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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5 16:50
*
강만음이 돌아가고 난 뒤, 해가 질 때쯤 붕팔이 돌아와 식사를 차려주었다. 장에서 몸에 좋다는 건 이것저것 전부 사들고 와 저녁 식탁이 요란해졌다. 그런가 하면 정성이 가득한 식탁을 눈앞에 두고도 금자봉은 속이 메스꺼워 얼마 먹지 못할 것 같았다.
짧은 고민 끝에 닭고기 탕 한 그릇을 겨우 들었는데, 따뜻한 국물을 느리게 한 입 떠 마시며 강만음의 일을 생각했다. 그의 반지는 현재 소녀의 가슴옷자락 아래 있었다. 그의 말대로 줄에 반지를 꿰어 걸었고, 그의 말대로 이건 명실상부 법기였다. 단지 몸에 지녔을 뿐인데 들이마시는 숨부터 다르게 느껴졌다. 영력의 운용이 어느 정도 원활해지자 이만한 걸 감히 사례라고 받아도 될지 혼란해졌다. 필시 강력한 소재로 만든 법기이리라.
금자봉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더듬어 가슴팍의 반지를 찾았다. 법기라고는 하나 반지라는 건 외관상 어디까지나 장신구였다. 그러니까 금자봉은, 외간 남자에게 선물받은 장신구가 오늘 처음이었다. 그녀가 보통― 평범한 규중 소저였다면 공자의 선물에 날뛸 듯이 기뻐했을지 모르겠으나. 다소 여러 일을 겪은 지금, 금자봉은 마냥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그에게 또 빚을 하나 졌다. 게다가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성심껏 도왔음에도 그리 달가워하는 기색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화가 난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그와 마주친 모든 순간에 그는 대개 화가 나 있었다. 자신의 무엇이 그리도 못마땅했는지. 금자봉은 조금 씁쓸해진 입맛을 탕 국물로 적셨다.
다른 이를 투영해 보고 있냐는 말에 순순히 인정한다고 답했다. 이름 모를 아가씨 덕분에 자신은 지금껏 무사할 수 있던 것이다. 결국 금자봉은 몇 숟가락 들지 못하고 상을 물렸다.
마음이 조금 불편해졌다. 그뿐이었다.
*
달이 구름 뒤로 몸을 감춰 캄캄한 칠야, 몸이 재앙처럼 뜨거웠다.
금자봉은 열기를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뛰쳐나왔다. 저 발밑부터 머리끝까지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어서 물에 들어가야 했다. 분명 오래전에 빼앗기고 없는 심장이 다시금 뛰는 것 같았다. 산 채로 달궈지는 느낌에 더는 조금도 지체할 수 없어 발을 보채 물을 찾았다. 선부 어딘가 연못이 있다고 들었다. 물속으로 몸을 던져야만 살 수 있었다. 본능이었다. 금자봉은 그 귀한 연못을 본능처럼 바로 찾아냈다.
아아, 너무나 오랫동안 목이 말랐었다.
눈에 초점을 잃은 소녀는 머리부터 물에 들어간다. 바닥을 모르고 하릴없이 계속 아래로 가라앉는다. 좀 더 아래로, 깊이 더 깊이. 안타깝게도 얼마 깊지 않은 못 바닥에 다다랐을 때, 소녀의 가는 등허리에서 무언가 살갗을 무참히 찢어버리고 튀어나온다.
그것은 수백 년 산 나무로, 신령스러운 고목이었다.
물을 머금어 축축해진 나무의 뿌리가 땅바닥을 딛고 일어선다. 조그만 소녀의 몸에서 구불구불 질척질척, 불길하게 뒤틀리며 춤을 춘다. 마른 등 뒤로 문어발처럼 뿌리를 거느린 소녀는 못의 바닥이 보일 때까지 남은 물을 쭉쭉 빨아들인다. 아, 하지만 마셔도 마셔도…….
“부족하겠지. 아직 불완전한 몸이니까.”
소녀는 육중해진 뿌리를 겨우 움직여 뒤돌아본다. 어딘가 낯익은 사내였다. 그는 정각에 계속 앉아 있었던 것 같다. 소녀는 고개를 갸웃한다.
“이리 오거라. 그보다 깨끗한 물을 주마.”
오라구? 그 말에 소녀는 지체 없이 뿌리를 쾅쾅 굴러 사내의 바로 코앞까지 당도한다. 그가 부르면 응당 가야 한다고 느꼈다.
높이 떠 있던 소녀의 몸은 어느새 땅에 내려와 있다. 거대한 뿌리는 몸 속으로 전부 살뜰히 집어넣었다. 그저 가까이 있고 싶었다. 좀 더 가까이, 깊이 더 깊이. 기꺼이 무릎을 꿇어서 자신을 낮춘다. 물로 흥건해진 땅바닥에 엉덩이까지 찰싹 붙히고, 그 다음 사내의 다리에 얼굴을 기댄다. 소녀는 마치 애완견 같다.
한편 사내는 바짓가랑이가 젖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품속에서 호리병을 하나 꺼내든다. 뚜껑을 열어 그대로 소녀의 머리 위로 콸콸 붓는다. 영약이었다. 아무리 부어도 부어도 그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소녀는 그 물을 단비처럼 받아들인다. 젖을수록 생기가 넘친다. 소녀가 앉아 있던 자리에 새싹이 푸릇푸릇 움튼다.
소녀는 이제 사내의 무릎을 베고 있다. 눈을 꼭 감고 입가엔 웃음이 방글방글 넘쳐흐른다. 열이 식은 소녀는 사내의 곁이 좋았다. 시원하고도 안심되었다. 뺨에 닿는 옷감은 너무나 부드러웠다.
사내는 호리병의 입구를 틀어막는다. 나머지 빈 손, 검고 긴 용종의 발톱이 허공에서 사시나무 떨듯 파르르 떨다가 소녀의 뺨에 조심스럽게 톡 닿는다. 간신히 혈색을 회복한 장밋빛 뺨을 금방이라도 베어버릴 듯 발톱 끝이 날카롭게 섰다. 그러나 사내는 위협할 생각이라곤 전혀 없었다. 오히려 보호에 가까웠다. 그렇다, 보호해야만 한다.
아직 불완전한 형태였다. 죽어가던 인간의 심장에 요괴의 피를 욱여넣었다. 심장은 다행히 제자리를 찾아갔으나, 소녀의 몸은 이제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으며, 그렇다 해서 요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사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다. 죽는 것을 허락하지 못해 괴이한 몸으로 만들었다. 사내는 그늘진 눈으로 소녀를 지그시 내려다본다.
긴 머리를 포도 덩굴처럼 땋아 내렸다. 공자는 제게서 다른 이를 투영해 보고 계시는군요. 머릿속에서 그 말이 떠나가지 않는다.
사내는 푹 젖어 축축해진 소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린다. 불완전하게나마 살아 있었다. 이 생에 소녀가 그 앞에서 어떤 모습이 되든, 살아 있기만 한다면 그 외 나머지 다른 건 전부 상관없었다. 백 년 전부터 그래야 했다. 소녀는 사내의 손에 몸을 편히 맡기고 뺨을 부빈다. 늘 그래왔듯.
*
다음날 아침, 침상에서 깬 금자봉은 아직 덜 뜬 눈을 꿈뻑대며 무의식적으로 목걸이부터 더듬더듬 찾기 시작했다. 간밤에 깊게 잠들어 몸은 편안했는데, 가슴께가 이상하리만치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그저 잠결의 착각이리라. 그러나 아무리 만지고 만져도 손끝에 느껴지는 건 질깃한 가죽끈뿐이었다. 비로소 소녀 금자봉은 벌떡 일어났다.
맙소사, 반지가 사라졌다!
*
강만음은 날이 밝자마자 떠날 채비를 전부 마쳤다. 위무선은 아직 꿈나라를 헤매는 중이었으나 두들겨 패서 데려가면 될 일이었다. 강만음은 옷매무새를 구김살 없이 다듬다가 우뚝 멈춰 선다. 어젯밤 자신의 무릎 위에서 애교 부리던 누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뿐만이랴. 손바닥 위로 보드랍게 뭉개지던 살결. 강만음은 자신도 모르게 피고 있던 손을 다시 쥔다.
누이의 몸을 으스러지도록 끌어안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그리 할 수 있었다. 깊고 깊은 첩첩산중 구중궁궐에 숨겨 그저 하루하루 먹고 자는 것만이 그 애의 유일한 걱정거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 할 수 없었다.
강만음은 숨을 고르고자 밖에 나섰다. 아직 찬 공기를 피부로 생생히 느끼며 눈을 감는다.
금씨 여자의 태에 누이를 잉태시킬 때 스스로 맹세하지 않았나. 네게 자유를 주겠노라고. 네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해 보라고. 네 마음이 따르는 그 길을 나도 뒤따라 가겠노라고. 용은 누이에게 맹세했다. 두 번 다시는 감히 네 말에 역정 내지 않을 테니, 뭐든 그래그래 고개를 끄덕일 테니 살아가기만 해 달라고. 그렇게 빌었다. 울부짖었다.
그때 그 애도 울부짖었다.
- 아니에요, 정말 아닙니다! 제가 인간을 숨겨 첩으로 삼았다니요. 남첩이라뇨! 월 오라버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게 성 주변을 헤매는 꼴이 안쓰러워서 잠시 거두었을 뿐입니다. 부탁드려요. 그저 가여운 아이입니다. 아이라고요!
그러나 태의는 누이에게 맥이 잡힌다고 아뢰었다. 힘찬 활맥이.
거짓이었다. 결정적으로 서쪽 늪의 대군이 물밀듯 쳐들어올 때 혼란한 틈을 타 묘연해진 태의의 행방. 적들에게 속은 것이었다. 배신감으로 눈이 가려져 그 애 뱃속에 있지도 않은 씨를 모독하고 증오했다. 그 애가 보는 앞에서 인간 사내아이를 죄 갈기갈기 찢어 죽였다. 후사를 보기엔 아직 어린 열넷이었다. 창백히 질려 넋을 잃은 그 애더러 어서 썩 꺼지라고, 잘못한 걸 깨달을 때까지 돌아오지 말라 일갈했다. 그때 누이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나, 그때 허니는.
- 아니라고 말씀드렸어요……. 전 정말로 그런 적 없다고…….
물기 어린 작약향. 익숙한 향에 강만음은 눈을 뜬다.
허니가 그에게 오고 있다. 지금은 금가의 성을 빌린 그의 누이다. 간밤에 반지가 사라진 일 때문이리라. 예나 지금이나 쓸데없이 성실하기는. 강만음이 먼저 금자봉을 찾아나선다.
*
“법기를 잃어버렸다고요.”
금자봉은 차마 얼굴 보고 답할 수 없어 고개만 끄덕끄덕 흔든다. 부끄러웠다. 반면 강만음은 평온하다. 평온할수록 금자봉은 낯을 못 들겠다.
“몸은 이제 괜찮아졌고요?” 한 번 더 고개를 끄덕끄덕.
“제 실수로 공자의 물건을 잃어버렸으니 이걸 어찌 보상해드려야 좋을까요.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설마 또 은혜를 갚겠다 그 말입니까.”
“이번에는 은혜라기보다 빚이라고 말해야겠지요.”
공자의 법기, 분명 귀한 것이었을 텐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어물어물 더듬었다. 살면서 정말 이렇게까지 난처한 적은 얼마 없었다. 거기에다가 어제 하필 그런 이야기를 들어버려서 미안함은 배로 불어났다.
“미안해하는 건 알겠는데, 고개 드세요. 무슨 말을 못 하겠습니다.”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소탈하게 내뱉은 한숨. 부끄러워서 귀가 시뻘개진 금자봉은 상대의 말에 땅바닥으로 밀어넣었던 고개를 어렵사리 천천히 들어올린다.
- 고개 들어라. 네 주제에 뭘 잘했다고 이리 벌벌 떨지?
금자봉은 귀를 의심했다. 반사적으로 파르르 떨린 귀, 뻣뻣하게 굳어버린 목. 그와 자신의 관계에 형성될 수 없는 명령조였다. 강만음이란 사람은 그렇게, 그런 마음 아픈 말투로 자신을 겁박하지 않는다. 그러나 환청은 겁에 질린 그녀의 몸을 매개 삼아 흘러들어온다.
- 인간을 숨긴 것만으로도 이미 중죄다. 그 하잘것없는 마음가짐. 버리라고 그토록 누누이 말했는데도 버리지 않아 결국 이런 일이 벌어졌지. 나는 널 안다. 넌 약하고 무르지, 그래서 누구에게든 쉽게 네 곁을 내어주고 품을 허락한다. 이실직고해라. 내어주고 내어주다 끝내 네 몸까지 허락했느냐?
바람이 분다. 소녀의 몸을 얼어붙게 만든 목소리 위로 사내의 평온한 목소리가 덧씌워진다.
“낭자가 법기를 잃어버린 게 아니라 법기 스스로 그 역할을 다한 것뿐입니다. 병자의 몸을 치료하고 부서진 것이죠. 본래 몸의 회복을 도우는 보조 도구에 불과했으니 부서지더라도 이상한 게 아닙니다. 낭자가 잘못한 게 아니에요. 그러니, 빚이니 어떻게든 갚겠다느니 그런 소리 하지 마십시오.”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피 냄새가 콧속을 찌르고, 등허리는 곧 터질 것 같다. 초점 없이 커다랗게 뜬 눈, 그 눈과 마주한 사내의 얼굴이 굳는다. “금낭자, 제 말 들리십니까?”
소녀는 갈증을 느꼈다. 등허리가, 등 안쪽이, 살이 터질 것 같다.
- 이 불결하고, 어리석은 것!
환청이 아니라 기억이다. 이 목소리는, 대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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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자봉은 강만음을 거의 밀치다시피 지나쳐 처소로 돌아갔다. 돌아오자마자 피를 울컥 토했고, 붕팔은 경악하며 상전의 몸을 떠받들었다. “아파, 아픈데. 어디가 아픈지 모르겠어. 그분께서 나를 버리셨어. 그 사람이 나를, 날 싫어해.” 두서없이 쏟아내는 말은 울음소리에 집어삼켜져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다. 붕팔에게는 그저 아프다는 신음밖에. “버리신 거야. 대왕께서 나를 버리셨어…….” 처소의 문 너머, 허리를 꼿꼿하게 핀 사내에게는 듣지 못한 그날의 설움이.
사내는 잠시 생각하다가, 방음술을 걸고 떠나갔다.
몸이 돌아오니 떠나 있던 혼의 기억이 하나둘씩 돌아오고 있다. 아마 요괴의 피가 섞였기 때문이리라. 누이는 지금 인간의 몸을 빌려서 다시 태어났을 뿐, 혼은 요괴의 것 그대로였으니. 준수한 외모의 사내는 쓰게 웃었다. 뜻대로 되는 게 하나 없다. 하기야 언제는 뜻대로 되는 게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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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빵 늦어버림...;;; 上/下로 나눈 건 분량이 적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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