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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7 20:21
그 고되다는 폐관수련을 어린 나이에 마치고 나온 강씨 차남은, 잔치 내내 떠들썩한 가문 사람들과는 다르게 시종일관 무거운 입을 고수했다. 얇은 눈썹에 살구 같은 눈, 예리함이 묻어나는 준수한 외모는 뭇 소녀들의 뺨을 빨갛게 물들였으나 이것도 잠시. 강만음은 만인에게 서리처럼 냉담했다. 어떤 꽃에도 날 선 눈빛을 흔들리지 아니하며 다부진 두 손을 얌전히 뒷짐 진 채 다소 마른, 그러나 너른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있었다.
그는 흡사 폭설에도 무너지지 않는 가시나무처럼, 굳건한 듯 위태롭게 서 있었다.
대대로 종주의 자리는 딸이 아닌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이었다. 고소 남씨 남익은 아주 드문 예외로, 이로써 미래 운몽 강씨의 종주는 더 이상 유약한 장녀 강염리가 아닌 차남 강만음임이 분명해졌다. 오늘 잔치는 이를 세상 밖으로 널리 알리기 위한 회심의 포석이었던 것이다. 그런 한편 병약한 몸으로 여태껏 무리해서 계승 수업을 받아왔던 대사저 강염리의 심정은 과연 어떠할지.
동생 대신 입에 썩 잘 맞지 않는 독한 술을 몇 잔이나 연거푸 들이킨 금가의 어느 여식은, 띵한 머리를 식히기 위해 많고 많은 것 중 감히 그녀의 심정을 헤아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의 확연히 다른 듯 어쩐지 비슷한 환경 때문이었다.
직계 장녀, 계승 서열, 그 외에도 많은 것이.
금자봉의 창백했던 두 뺨은 어느새 연지를 덧바른 듯 붉어지고, 눈꼬리는 보기 좋게 아래로 휘어 그 자태는 방금 피어난 작약이었다. 그러나 한 떨기 작약은 이런 모습이 숙부에게 혹여 민폐가 될 수도 있음을 능히 알아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소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의 위치와 주제를 잘 알아 늘 신중하게 처신했다. 불필요한 진심은 누구도 쉬이 볼 수 없도록 마음속 저편 아래 깊숙이 묻어 두고. 불쌍하게도 때로는 이런 철저한 면이 스스로를 가두기도 했다.
그러하여, 능력 밖의 상대를 우연히 만나면 지나치게 긴장했다. 바로 지금처럼.
“그쪽 길이 아닙니다.”
회장으로 들어설 때, 예의상 인사 한 번 나눈 것을 제외하고 말 한 마디 섞어본 적 없는 상대가 소녀의 몇 걸음 뒤에 서 있었다. 금자봉은 취기 덕에 몇 곱절은 긴장한 채 돌아서서 마주했다.
“잠시 숨을 돌리실 생각이라면, 제가 안내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한겨울의 마른 가시나무 같은 인상의 소년이었다. 깊은 바다에 가라앉은 듯 차분한 눈빛은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탐색의 빛으로 가득 차 있는데, 기묘하게 그 안에서 큰 불길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소년의 이름 석 자는 강만음, 오늘 연회의 주인공이 되시겠다. 이 자리가 아니라면 더더욱 소녀와 만날 일 없는 귀빈이었다.
“그러지 않으셔도, 제가.”
“보아하니 조용히 쉴 곳이 필요한 게 아니었습니까? 편히 제 말을 들으시지요. 모친께서는 아무리 잔치가 열려도 외부인이 내부까지 들어와 돌아다니는 걸 싫어하시니, 낭자에게도 나쁘지 않은 선택지처럼 보입니다만.”
강만음이 담담하게 우부인을 언급하자 금자봉은 지레 겁을 먹어 뭐라도 훔쳐 먹은 듯 딸꾹질을 한다.
“저, 저는 그렇게, 깊이 들어오지는 않았는데.”
말은 되는 대로 막 내뱉었지만 정말 만의 하나, 우부인에게 책을 잡히면 뭐라 변명할 여지 없이 회장의 숙부에게도 곧바로 소식이 닿을 게 분명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머릿속은 누가 불 위에 올려놓기라도 한 것처럼 보글보글. 한꺼번에 들이닥친 너무 많은 정보에 소녀는 바로 며칠 전 심장이 뽑혀 나갔는데도 온몸이 피로 끓는 듯 매우 얼떨떨하다.
초조함과 긴장으로 얼굴 위에 새빨갛게 꽃을 피운 작약 소녀를 현실로 돌려놓은 건, 얼음같이 차가운 누군가의 손이었다.
“아, 낭자께서 넘어지실 듯하여.”
소녀는 더 이상 소년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의 냉기가 손목을 덮은 옷감을 뚫고 피부 위로 선명하게 덮쳐온다. 자신은 확실히 취했다, 그것도 꽤 많이. 얼마 보지도 않은 사람이 이상하게도 제법 낯익었으니 말이다. 금자봉은 제 모습이 상대에게 과연 어찌 보일지는 생각 않고 고개를 몇 번 갸웃대다, ‘아무래도 제가 취했긴 취했나 보군요.’ 자조한 뒤 길 안내를 부탁했다. 오묘하게 기분 좋았던 그의 냉기가 서서히 멀어진다. 두 사람의 가까웠던 거리 또한 제자리로 돌아온다.
소년이 몇 걸음 앞서 가면 소녀가 그대로 뒤따랐다. 걷는 동안 대화는 한 마디 없었다.
그런데 소년은 소매 아래 무엇 하나 잡히지 않는 텅 빈 손을 몇 번이고 쥐었다 피기를 반복했는데, 기이하게도 그와 동시에 뱀처럼 눈이 가늘어졌다. 단순히 비슷하다는 묘사가 아니라 실제로 동공까지 세로로 길어져 뒤따라오는 금가 여식을 힐끔 볼 때도 있었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소녀는 이를 알지 못했다.
그는 어딘가 모르게…… 사람 같지 않았다.
***
칠흑같이 어두운 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던 정적 속을 순간 날카롭게 가로지른 누군가의 비명. 정확히 십칠 년 전 모든 걸 내려놓고 행방이 묘연해진 요왕은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도 귀애하는 누이에게 다시 한 번 평화로운 삶을 되돌려주기 위해 또 다른 이의 생명을 끝내고 있었다. 그의 한 손을 흥건히 적신 물기는 바로 지난날 저를 따른 무수한 요괴들의 피, 그리고 남은 한 손에서 빛나는 건 한때 누이의 심장이었던 구체. 잃어버린 생명력을 메꾸려면 무엇이든 채워 넣어야만 한다. 말 그대로 무엇이든.
누이는 이 모든 걸 몰라도 된다. 아니지, 몰라야 한다, 그래. 그 애가 알았다가는 분명 화를 낼 테니.
망월은 먼 하늘에서 이 지상까지 천 년 가까이 살아온 생에 무엇도 쉬이 포용할 줄을 몰랐다. 원하는 걸 가지는 건 잘 알아도 받아들이는 걸 몰랐으니 포기 또한 모르는 게 당연했다. 한 번 더러워진 흰 비단은 두 번 다시 깨끗해지지 않는다. 그저 매일 하나씩 더해지는 얼룩에 익숙해져갈 뿐.
저, 다시 태어난다면 오라버니와 정말 피로 이어진 남매가 되고 싶어요. 요괴는 한 번 해봤으니까 되도록 싸울 일 없는 인간이 괜찮겠네요.
이미 오래전 멎은 단비를 언제까지나 잊지 못하고 그리워할 뿐.
물론 그자들 사이에서도 작은 다툼은 매일 있지만, 인간은 약자끼리도 힘을 모으면 충분히 살 수 있대요. 놀랍지 않나요? 그런 세상에서는 오라버니도 더 이상 나서서 싸울 필요 없이, 저하고 둘이서 지내면 돼요.
대왕, 서쪽 늪지의 패배자들이 또 다시 전쟁을 도모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어찌할까요? 이대로라면 압도되는 건 순간입니다. 대왕은 우리 중 누구보다 강대한 힘을 갖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만월, 네가 이 창생을 올바르게 수호하기 위해서는 인간계로 내려가 그들이 평생 품는 칠정이라는 걸 몸소 겪고 이해해야 한다. 인간 또한 네가 지켜야 할 대상이고 곧 너 자신이다. 창생과 우리는 불가분의 한 몸이야.
허니에게 망월의 마음이 기우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구한 그녀에게는 힘의 우위를 증명할 필요가 없었고, 지긋지긋한 수호의 사명을 잠깐이나마 잊을 수 있었다. 망월은 요괴 중 누구보다 힘이 있기에 죽이고 싶지 않아도 결국 나서야 했다. 죽이지 않으면 반대로 당했다. 요괴란 것들은 힘으로 찍어 눌러야 말을 들었다. 언제까지나 하늘에 머무를 줄 알았던 시절, 자신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은 창생을 지켜야 하므로 평생을 지내온 보금자리에서 쫓겨나야 했다. 그 어떤 해명의 기회 한 번 없이 곧 추방당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도구였다는 뜻이다. 의도대로 잘 움직여주지 않아 버려진 칼.
강하지 않아도 되었고, 지키지 않아도 되었던 상대는 허니뿐이었다. 지상에서 가장 낮고 더러운 곳, 진창에서 기어나온 그녀보다 순수한 건 이 세상에 부재했다. 허니와 나눈 모든 순간이 기적이었다. 그게 영원할 줄 알았던 게 실수였을까.
월 오라버니, 꽃이 폈어요.
그 이름으로 저를 정답게 부르던 이는, 이제 자신을 그저 대왕이라고 건조히 부른다. 대왕.
정말 모든 걸 잊고 싶었던 거라면, 그래,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렇게라도 잊어서 외려 다행이었다. 망월 자신을 기억한다는 건 그날의 참상도 기억한다는 뜻이었으니, 잊을 만도 했다. 그런데 염치없게도 곁에 남고는 싶어 꾸며낸 게 이 강만음이란 신분이었다. 늘 떳떳하게 설 수 있는 깨끗하고 흰 가면. 천 년 가까이 모아온 힘의 반을 희생해 이 수진계의 모든 인간을 세뇌시켰다. 자신은 진실로 강만음이었다, 우씨 여자가 그렇게 낳고 싶어한 아들.
망월은 그새 강만음으로 돌아와 피로 흥건히 젖은 의복을 새로 갈아입었다. 심장이었던 구체는 고운 백옥 반지가 되어 그의 오른손 엄지에 자리 잡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생명을 이 반지 안에 담아야 할지, 이는 망월도 알지 못했다. 한때 모든 요괴들의 왕이었던 타락한 용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을 지켜줄 생각이 없었다. 그저 피 한 방울까지 철저하게 이용할 뿐. 편하게 인간을 죽일 수도 있었으나 지금 신분을 유지하려면 무엇보다도 신중히 움직여야만 했다.
망월, 아니 강만음이 피가 묻은 의복 위로 손을 가볍게 한 번 내젓자 옷가지는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진다.
***
난릉, 금린대 지하 장서실.
금자봉이 심장을 빼앗긴 지 어느덧 몇 주째. 곧 있으면 아마 한 달. 고생을 무릅쓰고 고서까지 봤지만 인간을 죽이지 않고 심장만 뺏어간다는 요괴의 이야기는 이 장서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심장 쯤이야 없어도 꽤 살 만 하다는 게 소녀의 지난 감상이었다. 책을 읽다 지친 금자봉은 여전히 제 암살범의 단서 또한 발견하지 못해 여러모로 날 선 상태였다. 지난 암살이 실패로 돌아갔으니 다시 시도할 법도 한데, 범인은 그간 어떤 기색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고민 끝에 장서실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온 금자봉은 오늘 방문하기로 예정된 손님을 위해 다과를 준비하러 터벅터벅 나선다.
고소 남씨와 청하 섭씨에서 귀빈이 찾아온다고 했었다. 고소와 난릉, 그리고 청하. 이 세 지역은 땅이 가까워 만약 어느 가문에게 일이 생기면 종주끼리 모여 대책을 토의했다. 왜냐하면 한 지역의 피해는 곧 다른 지역으로도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괜찮은 상생 방식이었다. 달리 보면, 오대 선문 세가 중 남은 두 가문을 엄연히 배척하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이에 관심 없는 금자봉은 다과에 장식할 꽃 따위를 고르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권세 흐름을 읽는 멍청한 짓은 생각하지도 않는다. 설령 생각하여도, 그것은 머릿속에만 잠시 있을 뿐. 금자봉은 탐욕스러운 제 숙부에게 지금보다 더 쓸모 있는 장기말로 여겨지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대로 무능력하게 여겨지다가 적당히 좋은 집안에 시집 보내주기를.
아…… 그러고 보니, 이제 시집은 갈 수 없나.
스스로를 자조한 뒤 꽃잎들을 한 바구니 가득 담아 부엌으로 향하는데, 멀리에서 귀빈들이 하나둘씩 도착하는 게 보인다.
가장 먼저 도착한 건 고소 남씨의 택무군으로, 제 남동생과 수사 몇을 대동했는데 특유의 온화하고 우아한 분위기로 지켜보는 많은 이들을 감화시켰다. 그의 뒤에 선 사람이 동생이라는 건 사실 처음 보지만 얼굴만으로 알았다. 무엇보다 똑 닮았으니까. 그 다음으로 도착한 이는 청하 섭씨의 패왕 적봉존. 그는 예전부터 많은 사람들을 대동하고 다니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았다. 섭명결은 늘 최소한의 인원만을 동반하고 회담에 나타났다, 오늘 또한 마찬가지.
입구에서 귀빈들을 맞이하는 건 언제나 금광요의 몫이었다. 숙부의 또 다른 피붙이, 정확히 말해 떳떳지 못한 사생아였다.
하지만 저 애는 그 많은 사생아 중에서 가장 운이 좋은 편이지. 숙부가 기방에서 본가까지 데려온 최초의 자식이니까.
그래봤자 금광요도 금광선이 부려먹기 좋은 수발 중 하나였으나, 저 자리가 과연 어디까지 출세길을 열어줄지 그건 모르는 일. 금자봉이 바라본 금광요는 늘 노력하는 부류였다.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져도 악착같이 다시 올라왔으니 그 고집은 가히 높이 살 만했다.
금자봉은 멈춰 섰던 발걸음을 닦달하여 부엌으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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