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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5 00:40
***
그러니까, 소년 남망기는 가문끼리의 관계라든가 자질구레한 것들은 일단 다 제쳐 놓고 금자봉이란 사람 자체는 나름 괜찮게 보고 있었다. 사실 그녀를 아예 생판 모르는 것 또한 아니었기에. 아시다시피 남가에서는 매년 수학을 열지 않았나. 남망기는 작년 배례식 때 금자헌의 뒤에 조금 떨어져 서서 하인 대신 함을 들고 있던 금자봉을 기억한다. 그때 당시 단상 위에서 내려다보았던 긴 속눈썹이 수학 기간에 볼 수 있었던 그녀의 모습 전부였는데, 금자훈은 항상 금자헌과 어울려서 운심부지처의 이곳저곳을 제 집처럼 쏘아다닌 반면 금자봉은 늘 정규 수업 외 자유 시간에는 방 안에서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학당에서의 자리 또한 거리가 멀었고, 웬만해서 모두 빠지지 않는 수학의 마지막 날 연등식 때에도 풍한을 이유로 불참하였다. 하여 금자봉 말고도 달리 신경 써야 할 게 많았던 남망기는 점차 이 소녀의 인상을 서서히 잊어가고 있던 참이었다. 호기심은 그저 한때일 뿐 휘둘려선 안 되었으므로.
그러나 이 인상은 일 년 뒤 난릉 선부의 연회장에서 뒤집어졌다.
배례식 때 본 긴 속눈썹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귀빈들에게 검무를 한 수 선보이겠다, 오랜 재앙의 안개를 헤치고 나온 듯 수줍고도 눈부시게 웃던 금가 낭자는 지금 이 순간 다시는 없을 차가운 눈으로 남망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빗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일 만큼 경계 가득한 두 눈은 또다시 그녀의 인상을 뒤바꾸었다.
“묻겠습니다. 제 사촌동생인 금자헌과 운몽 강대낭자의 혼담이 한창 오고가는 중이거늘 이처럼 중한 상황에서 강공자를 넙죽 내어드리면 저희 금가의 체면은 어떻게 될 것 같으십니까?”
“저를 걸고 양 가문에 민폐 끼치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하겠습니다.”
한편 금자봉은 말 그대로 황당하기가 그지없었다.
“정말……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 같군요. 공자께서 지금 그 자리에 버티고 서 계신 것만으로 이미 민폐를 끼쳤습니다.”
금자헌과 강염리의 혼사, 본래 이것이 남망기의 앞을 막아선 본 목적이었으나 금자봉은 어느새 본전과 멀어져 필요 이상으로 남망기에게 경계심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었다. 물불 가리지 않고 진두해온 남망기가 강만음을 데려가기 위해 늘어놓은 무수한 억측 중 어느 한 가지가 금자봉의 신경을 건드려 놓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강만음은 선문 몰래 부정한 걸 사육하고 있습니다. 근래 채의진 벽령호에서 발견된 수괴의 사체가 그의 만행을―
벽령호 일을 그저 단순한 요괴의 짓이라 치부하였다.
그것만큼은 금자봉에게 참을 수 없는 한 가지였다.
벽령호 일을 포함하여서 스러진 것들은 어쨌든 전부 요마가 아니었던가. 본래 현문에서 도맡아 퇴치했어야 할 사악한 것들. 예를 차려서 인사를 올릴 줄 알게 된 그 무렵부터 첩자 생활로 여간해서는 못 볼 것까지 보고 자라온 금자봉에게 잘난 현문에서 제시하는 규율 따위 정말이지 방 안 먼지만도 못한 존재였다. 애당초 먼저 현문 선에서 그 요마들을 정리했으면 대왕께서 이런 의혹까지 받아가며 불편하게 나설 일도 없었다. 정화의 도를 따진답시고 단순히 검흔 하나만으로 또다시 사람을 대번에 사마외도라 몰아세우는 것 또한 질렸다.
거기에다가 뭐, 그 검흔은 자신만이 확인 가능하다? 이 허점투성이 주장을 도대체 누가 믿어주는지.
이래서 그늘을 모르고 곱게 자라신 도련님들은.
그러한 탓에 금자봉이 머릿속에서 내린 남망기의 평가는 이제 밑바닥 중 가장 밑바닥을 기고 있었다. 대왕의 행적을 부정한 요괴의 짓이라 주장하는 것도 모자라서 강공자를 또 사마외도라 몰아가다니. 그의 억측을 정정하기도 싫었거니와 대왕의 일을 함부로 발설할 수 없었다. 대왕은 이미 상처로 고된 몸이었기에 이대로 탐문과 추격이 계속된다면 언젠가 그 손이 닿고 말 터. 하여 금자봉은 제 선에서 이 일을 끝내고 싶었다. 또 강공자에게 갚아야 할 것도 있었고.
남망기 그가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로 나오겠다면 금자봉 또한 그러지 못할 이유라고는 없지 않은가.
“……아아, 그렇군요. 소녀, 이제 알겠습니다.”
금자봉은 깊이 쓰고 있던 우산을 별안간 들어올려 방금 전까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난 두연청의 회동에서 보인 미소를 재차 입가에 걸어 얼굴이 봄날의 꽃처럼 피었다.
“그러니까 남이공자께서 이 야심한 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금린대까지 바삐 찾아오신 그 이유가 바로 저 때문이라니요.”
어딘가에서 오래된 기왓장 하나가 번개를 맞은 듯 으지직 하고 갈라졌으며, 비를 맞고 있던 남망기는 찰나였지만 눈을 깜빡이는 일조차도 잊어버렸다. 줄곧 곁에서 두 사람의 긴 공방전을 듣고 있던 문지기는 제 두 귀를 의심했다. 그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오직 한 사람, 금자봉만이 태연하게 생글거리며 가늘고 흰 섬섬옥수의 검지 손가락으로 남망기 손에 아직까지 들려 있는 통행 옥패를 정확히 가리켰다.
“더구나 남가의 옥패를 마음의 증표로 주시겠다니. 부끄러워라. 저 또한 당장이라도 명쾌한 답을 드리고 싶지만 지금 들고 계신 그 옥패는 어디까지나 택무군의 것. 송구하오나 감히 받지는 못하겠군요. 그러하여도 오늘의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문지기가 증인을 서 줄 터이니, 혹여 소녀가 공자의 마음을 저버리지는 않을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그러니까 즉, 이 자리에서 정녕 물러나지 않겠다면 사람들 귀에 아주아주 오래도록 남을 추문을 기꺼이 만들어 주겠노라는 협박이었다. 어쨌든 그 대단하신 옥면수사 남이공자 아니신가. 야심한 밤에 난릉에까지 친히 온 것도 남망기였고 멋대로 택무군 옥패를 들고 온 것 또한 남망기였다. 가감 없이 사실만 그대로 전하더라도 오해받는 건 단 한 사람뿐. 금자봉 그녀가 해명해야 할 건 없었다.
명성이라면 조금 붙겠지. 현재 공자방 서열 이순위 옥면수사의 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꾄 여자라는데.
남망기가 제 아무리 남녀 간의 일에 무심할지언정 지금 금자봉이 교태롭게 전달하는 말 하나하나는 분명하고도 매우 똑똑히 알아들었다.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거짓말하는 모습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대의가 눈앞에 있는데도 가문의 이득을 지키느라 이렇게까지 추한 방식을 자진하여서 선택하다니. 남문으로 점점 가까워질 때 멀리에서 금자봉 그녀를 단숨에 알아본 자신이 후회되었다. 빗줄기 사이로 맡아진 새벽 풀 내음과 아담한 키를 알아보고서 설마 그녀일까, 아주 조금 들떴던 게 멍청이 같았다.
“후회하실 겁니다, 금낭자.”
“선택하는 건 공자이신데 이 소녀가 후회하고 말 게 어디 있나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시는군요.”
옥패를 쥔 남망기의 손에 힘이 꽤 억세게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금자봉은 이제 남망기가 더 이상 멋대로 버티지 않으리라는 걸 깨닫고서 태연하게도 웃어 보였다.
“어렵사리 먼 길 오셨는데, 조심해서 살펴 가시지요.”
무릎을 한 번 접었다가 다시 일어나서 예를 올리자 이에 남망기는 침전되지 않는 얼음못 같이 투명한 금빛 눈으로 잠시 금자봉을 집요하게 노려보다가 곧 어검하여 길을 떠났다.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는 행동이었다. 금자봉은 남망기가 떠난 방향을 똑같이 질기게 노려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깟 대의도 명예 앞에서 이렇게 간단히 와르르 무너지거늘.
금자봉은 문지기가 서 있었던 방향으로 부드럽게 몸을 틀었다. 조그만 주머니 하나가 어느새 손에 덩그러니 들려 있었는데, 문지기의 눈이 주머니에 닿자 금자봉은 곧 그에게 던져 주었다. 허겁지겁 이를 열어보니 과연 적지 않은 돈이 그득 담겨 있었다. 늘 평화로운 금린대에서 제일 고역인 야간 시간대 문지기들은 어디까지나 고용된 일꾼에 불과하여, 당장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이 급선무인 자들에게 입단속은 섭섭하지 않게 몇 푼 쥐어주면 충분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은 기억에 남겨 두지도 말거라.”
비가 섞인 밤바람을 쐬어 지쳤는지 낯이 어두워진 금자봉은 곧 문지기를 두고 떠나갔다.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길이 이어지는 대로 떠나는 무목적의 밤 산책이었다. 사실 그녀는 지금 지붕을 걷고 계시는 어느 누구와 마찬가지로 어제와 오늘 다 제대로 잠들지 못하여 그닥 좋지 못한 상태였다. 그만큼이나 피곤했기에 설마 누군가 지붕 위에서 저를 따라오는 것까지는 감히 상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연 이틀 내내 꿈을 꾸었다. 기이하게도 단 한 사람만을 계속해서 만났었는데, 꿈에서 깨 벌떡 일어나면 꼭 기억 속에서 얼굴만이 뜯겨나간 듯 아무리 떠올려 보아도 생각나지 않고 그대로 텅 비어 있었다.
아쉬운 점을 남겨 두어야 다음해 또 오고 싶어지지.
금자봉 자신은 그이를 오라버니라 호칭했지만 월존과 대왕이라는 이름 또한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랬다, 대왕.
순수하게도 오직 그녀를 위해 명산을 그대로 들어서 옮겨와 드넓은 정원을 지어주었고, 그녀가 먼저 손을 감아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결코 놓아주지 않았거니와, 산책할 때면 거대한 장신의 몸으로 키 작은 그녀의 뒤에 서서 땋은 머리를 어루만지길 좋아했으며, 돌아갈 때면 언제나 매번 그녀를 마치 꽃다발처럼 소중히 안아 올리던…… 대왕. 그 꿈이 전생의 기억 중 일부라는 건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었다. 오라버니라 호칭했지만 혈연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도. 남매란 이름의 거짓된 관계여야만 대왕의 곁에 머무를 수가 있다는 것도.
허니란 이름의 요괴는 위대한 대왕을 아주 먼 옛날 오래전부터 연모해왔다. 그를 가만 보고 있노라면 기쁘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저렸다. 연모하게 된 계기는 끝내 모를지언정 마음만큼은 뼈저리게도 느껴졌기에 주제 넘게 감히 사랑이라 말할 수밖에 없는 커다란 아픔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죄다 처참하게 으스러질 만큼 무척 커다랗고 또 커다란 이 무구한 마음의 무게를 긴긴 세월 도대체 어떻게 견뎌왔을까. 전생의 자신은 아무리 품을 크게 벌리고 벌려도 기어이 끝끝내 품어지지 않는 바다를 품고자 했다.
뭍의 생명이 감히 바다를 품으려 했다.
그 무게에 짓눌려 익사할 줄도 모르고.
그러니 깨어 있어야 했다. 깨어 있어야 고통을 그나마 잊었다. 그새 빗줄기는 연약해져 걷고자 하면 얼마든 걸을 수 있었다.
지상에서는 금씨 소녀가 지붕에서는 타락의 용이 걷고 있었다. 만약 달빛이 내렸더라면 용의 거대한 그림자 속에 소녀의 몸이 머리끝까지 완연하게도 잠겼으리라. 용의 그늘은 언제나 항상 그래왔듯이 하해와 같이 소녀를 깊이 품었으리라. 그의 바다는 먼 옛날부터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었기에.
***
금가와 강가의 혼례는 내년 일월에 가장 길일을 정하여 천천히 올리기로 약조되었다. 금광선은 입이 찢어져라 기뻐했는데, 정작 당사자인 강염리는 누구보다도 침착하여서 이를 지켜보던 금자봉은 양심이란 게 탈 수 있다면 아주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운몽 강씨는 꼬박 사흘을 머무르다가 길을 떠났다. 사흘이란 기간 동안 우연찮게 강만음과 단 둘이서 마주치는 일이 있었는데, 그는 일전의 미약 사건은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그저 평범하게 예를 차려서 인사하고는 먼저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때 금자봉은 떠나가는 강만음의 등을 한참이고 넋이 나간 듯 바라보았다.
정말 이렇게 놓아준다고? 어떤 협박도, 보복도 없이?
그녀로서는 당최 이해할 수 없었으나, 강공자께서 이대로 묻으시겠다면 금자봉 또한 따르지 않을 이유라고는 없었으므로 따로 이 이상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어느 날 그가 자신을 이용하더라도 감내해야 할 부분이었다. 어쨌든 죄는 죄였으니까.
한편 금광선은 통쾌한 척 금자봉에게 비단 몇 필을 하사했는데 중대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었다. 금자봉은 또 얼굴의 빛을 극단 배우처럼 유연하게 갈아끼우고 함을 받들며 조소인지 미소인지 분간할 수 없는 쓰디쓴 웃음을 가늘게 띄웠다. 비단이라는 게 생각보다 가볍지 않다는 건 원래 잘 알고 있었지만 어째선지 그날따라 꼭 천근만근처럼 무거웠다.
본래 비단을 하사받으면 옷의 자수는 늘 가문의 상징을 따라서 금성설랑의 수를 맡기던 그녀였으나, 전생을 기억해 낸 이후로 화려하기만 한 금성설랑 대신 눈처럼 흰 치자꽃과 짙은 주황의 계화꽃에게 절로 마음이 기울어졌다. 하여 붕팔은 아가씨의 명을 받아들어 자수방에다가 이번에는 후자의 수를 곱게 놓아달라 부탁했고, 간만의 색다른 제안에 수낭 박씨는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붕팔이 다시 돌아온 그때 홀로 후원을 돌보고 있었던 금자봉은 마당 한편에 조금 있으면 꽃을 터트릴 계화꽃 나무를 발견했다. 신기하게도 나무는 딱 한 그루였는데 제법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자랐는지 키가 무척 커서 고개를 꽤 들어올려야 꽃봉오리를 볼 수 있었다.
분명 자신이 심지 않았고 워낙 구석의 자리인지라 언제부터 이 자리에 계속 있었는지 잘 모르겠으나, 오늘 하루만 버텨준다면 내일이라도 꽃봉오리가 세상 밖으로 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것 같았다.
금자봉은 문득 머리끝을 만지작댔다.
머리를 포도 덩굴처럼 길게 땋아 내려 이 계화꽃을 함께 엮으면, 대왕께서 그 향기를 맡고 돌아오실까.
금자봉은 그리 형편 좋게 일이 풀리지 않으리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막연한 기대를 품었다. 허나 대왕은 그녀의 곁을 떠난 지 벌써 오래였기에 찾아가는 건 누구도 아닌 오로지 그녀여야만 했다. 직접 찾아내어 무엇보다 가장 먼저 한 가지를 묻고 싶었으므로.
왜 자신을 모른 척했는지.
그것도 장장 십 년이 넘는 세월이었다. 매정하게도 이름 한 번 알려주지 않아 평생을 그저 환상이라고 여길 뻔했다. 다시 태어난 자신을 이 세상에서 어찌 찾아냈는지 또한 대왕께 묻고 싶었다. 어떻게, 그리고 도대체 왜. 그러니까 왜, 모든 게 전부 ‘그러니까 왜’. 나는 당신께 도대체 무슨 의미였기에.
속이 복잡해진 금자봉은 대왕의 일을 잠깐이라도 잊어보고자 그대로 계화꽃 나무 아래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오늘은 비가 내리지 않아 잠시 쉬어가기에 적당한 그늘이었다. 지금 이 후원은 본래 먼저 돌아가신 어머니의 소유였는데 부러 하인을 아무도 두지 않아 금린대에서 비교적 숨통이 트이는 공간이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에도 이 후원으로 숨어 엉엉 울었다. 당시 그녀는 다섯이었고 동생 금자훈은 아직까지 죽음이라는 개념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저 누나가 우는 게 보기 안쓰러웠고 잘은 모르겠지만 어쩐지 조금 서러워 눈물 콧물 질질 흘려가며 우는 그녀를 개의치 않으며 조용히 꼭 안아주었다.
한데 어느새 자라고 보니 그 옛날의 모습과 다르게 지금 금자훈이 무엇보다 좋아하고 또 즐겨하는 건 종목과 상관 없이 무조건 겨루기였다. 말투는 뒷골목 건달처럼 경박스럽고 틈만 나면 다른 방계들과 다투는 게 일상이었지만 검이 아니라 주먹을 들어 다툴 때에는 대개 금자봉 때문이었다. 금자훈은 스스로도 다혈질인 걸 잘 알아 이 기운을 해소하고자 정정당당한 방식으로써 남과 겨루길 좋아했는데, 그가 검 대신 굳게 쥔 주먹을 들 때에는 분명 상대가 겁대가리 없이 금자봉을 모욕하고 난 다음이었다. 문득 금자봉은 어렸을 적 오른쪽 눈이 밤탱이처럼 퉁퉁 부어서 돌아왔던 어린 금자훈을 떠올려냈다.
아홉, 정확히 그쯤이었다.
그 자식들이 너더러 무슨…… 됐어, 이깟 얘기 들어서 뭐 하냐? 귀 더러워져.
어린 금자훈은 코를 훌쩍 들이키면서 그대로 아픔을 삼켰다.
찰나의 시간이지만 한때 후계자라고 받들어지던 아이였는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니 찬밥보다도 못한 찬밥 신세가 되었다.
금자봉은 금자훈보다 머리가 조금 잘 굴러갔기에 이 위험천만한 소굴 속에서 두 사람을 지켜내려면 숙부에게 그녀의 쓸모를 반드시 증명해야만 했다. 하여 증명하고 또 증명해 그 결과로 마침내 오늘날 이 지경까지 다다랐다면 믿어지는가. 그리워하는 사람 하나 찾으러 나서지 못하고 그저 고여 있기만 한 이 모습을 친히 보시라. 금자봉은 모든 게 단순히 잘해보고자 한 일이었는데 어찌하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지 생각했다.
강대낭자의 마음을 팔아 받은 비단은 유려하고도 아름다웠다.
그녀의 마음을 팔게 한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대왕의 일을 잠깐이라도 잊어보고자 다른 생각을 꺼내봤지만 애석하게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금자봉은 이제 양 무릎의 사이로 고개를 푹 묻었다. 한데 그녀가 기대고 있던 계화꽃 나무의 탐스러운 꽃봉오리가 어쩐 일인지 차츰 천천히 열리는 것 같다가 어느새 활짝 피었다. 마치 금자봉 그녀에게서 양질의 양분을 흡수한 듯 만개한 기세가 대단했다. 후원을 좌우로 둘러보면 이 꽃나무뿐 아니라 곳곳의 화초가 어디선가 생명력을 얻어 팔다리를 우렁차게도 하늘 높이 폈다. 이와 정반대로 금자봉은 갑작스럽게 피곤해졌다. 후원에서 잠드는 건 동생 금자훈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었으나 오늘만큼은 제멋대로 행동하고 싶어 눈을 감았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께서 내린 명으로 금자봉을 찾던 금광요는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후원의 그녀를 발견했지만, 손댈 수 없는 미인도처럼 달게 잠들어 조용히 못 본 척 외면하고 이번에는 금자훈을 찾아 길을 나섰다.
“아버지께서 자봉 그 애를 찾으시는데, 혹시 오늘 따로 본 적 있어? 특별히 어딜 나갔다고는 못 들었는데 영 보이지 않아서 말이야.”
수사 한 명을 붙들어 한창 검을 맞부딪치는 중이었던 금자훈은 재빠르게 곧 ‘여기 서 있어.’ 말을 던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손에 금자봉을 마치 짐짝처럼 대롱대롱 든 채 돌아왔다.
“자고 있었네. 찾아왔으니 그 다음은 네가 알아서 해.”
금자훈은 아직 검을 들던 여운이 남아 있었는지 숨을 식식댔다.
그리고 동생 손아귀에서 우당탕 떨어진 금자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무릎을 툭툭 털어서 일어나 금세 금광요와 길을 함께했다.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빛을 빼앗겨 어두워지는 긴 회랑에서 성별 다른 두 명의 아요는 익숙하게 가장 안쪽으로 걸어가면서 한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같이 불리는 건 또 상당히 오랜만인데.”
“그렇지. 보통 아버지께서 너와 나를 따로 부르시니.”
“……으음, 느낌이 좋지 않은걸.”
여담이지만 불길한 일을 감지하는 금자봉의 촉은 상당히 꽤 좋은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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