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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4 00:09

원제: 이게 닦개인지 벤츠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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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좀 놔 봐, 놔 보라니까!”

위무선은 말 그대로 미친개처럼 길길이 날뛰었다. 평소답지 않게 뭐라 뭐라 열을 내면서 남망기의 멱살까지 추켜 쥐고 패악을 부렸다. 결국 벙쪄 있던 강만음이 나서서 그를 제지했지만― 이게 웬걸, 막아설 때마다 화를 부추긴 꼴이 되었다. 거기에다가 남망기도 이에 지지 않고 목에 핏대를 울컥 세웠다. 체면상 입만 고집스럽게 얌전히 다물고 있었을 뿐, 금방이라도 허리춤에서 피진을 뽑아들 것처럼 눈빛을 태웠다.

끝내 두 사람을 중재한 건 굉음과 함께 대청 바닥을 정확히 반으로 양단한 섭명결의 분신, 패하였다.

“지금부터 입을 연 놈, 그 머리를 날려주마. 이의 있나?”

값비싼 바닥뿐 아니라 두 사람의 물리적인 거리까지 두 쪽으로 갈라놓은 패하는 날이 아직도 퍼렇게 서 있었다.

“설령 있다 해도 뱉지 마라. 듣겠다고 한 말 아니니까.”

줄곧 침음하던 섭명결은 여전히 상석에 큰 몸을 비스듬하게 기대앉았다. 어떤 조금의 미동도 없이 오직 체내의 영력만으로 패하를 대청 바닥 한가운데 쐐기처럼 박아 넣었다. 패검도 아닌 묵직한 도를 직접 들지 않고 순수하게 영력만으로 운용한다는 건 상당한 수행을 필요로 한 일이었다.

그에 반하여 오래된 피로와 성가심 등, 여러 이유로 지긋지긋해진 섭명결은 땅이 꺼져라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금광선의 늙은 얼굴까지 봐 가면서 인력을 차출한 합동 조사는 연일 지지부진 늘어지지. 지금 제 눈앞 망아지들은 여기가 학당도 아니고 서로를 고발하겠다 아주 난리가 났지. 사마외도라, 말은 대단히 자극적이나 위무선까지 싸움에 낀 이상 더 이상 볼 것도 없었다. 흔하디흔한 애들 자존심 싸움이었다. 강공자 일은 희신이 좀 더 지켜보자 말한 이상 거기에서 깔끔하게 끝이었다. 보통 희신이 그리 말했던 일은 더 이상 몸을 키우지 않았으니까. 그럼 걱정할 필요 없었다.

섭명결은 오랜 지기 남희신을 누구보다 신뢰했다.
물론 그의 판단도 말이다.

섭명결은 냉큼 류관사를 부르려다가 일순 멈췄다. 이 애송이 놈들의 체면을 굳이 보호해 주겠답시고 대청에서 사람들을 죄다 몰아냈었다. 하여간 이 망아지 놈들을……. 상석에 몸을 꼬깃꼬깃 구겨 넣다시피 했던 섭명결이 일어나서 허리를 피자, 보는 이에게 주는 위협은 배가 되었다. 바로 뒤따라 날렵하게도 허공에 내지른 검지의 끝은 대청에 패하를 경계로 두고 선 세 사람에게 향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딱! 기다려라, 이 성가신 망아지 놈들아. 내가 자리를 비웠답시고 다시 소란을 일으킨다면 그때야말로 몸소 본보기를 보여주마. 약조하건대 너희 셋 다 성벽에 거꾸로 매달아주지. 알아들었어?”

섭명결은 살기등등하게 엄포를 놓고 밖을 나섰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대청으로 다시 돌아온 건, 뜻밖에도 웬 노인이었다. 비록 등은 조금 굽었지만 깊은 두 눈에 아직 총기가 서려 있었다.

“소인은 류청, 오늘 하루 공자들께서 머무르실 곳을 안배하도록 분부받은 관사이옵니다. 송구하오나 먼저 남가의 이공자부터 소인을 따라와주시지요.”

예고도 없는 퇴장에 문득 의아해진 남망기가 “종주께서는?” 묻자, 류청은 고개를 숙이고 또 “송구하오나…….” 운을 떼었다.

“종주의 일을 물으신다면 따로 전언을 남기셨는데, ‘잠이나 자고 열 좀 식혀라.’ 하시더군요. 세 분 모두에게 말입니다.”

참고로 시간은 아직 훤한 대낮이었다. 류청이 먼저 남망기더러 가시라는 듯 길을 터주자, 남망기는 이 비이성적인 상태로 더는 위무선과 대화하고 싶지 않았었기에 굴욕적이긴 하나 얌전히 따라나섰다. 평정을 되찾은 남망기가 순순히 길을 떠나고 난 뒤, 침묵 속에서 먼저 말문을 연 건 구태여 따로 생각할 필요 없이 위무선이었다.

“너 진짜 큰일날 뻔했어!”

강만음은 이미 예상한 듯 귀를 막았다. “목청 낮춰라. 귀 떨어진다.”

위무선은 곧 강만음에게 달려들어서 눈앞의 몸을 마치 시장판 떡 주무르듯 마구잡이로 주물러댔다. 몇 차례의 요란한 주무름 끝에 의외로 멀쩡하다는 게 확인되자, 위무선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돌리며 멀찍이 섰다.

“아주 튼튼하네. 좋아, 좋아. 역시 이래야 운몽 강씨지.”
“어깨에서 손.”
“어이쿠, 실수. 너무 기뻐서 조금 들떴네. 쌀쌀맞은 것도 여전하고!”

강만음은 그게 낯설었다. 허니에게서 느꼈던 이질적 감각과 또다른 종류의 무언가였다. 어찌 보면 위무선 때문에 계획한 일이 망쳐졌다고 볼 수 있으나, 지금만큼은 별로 탓하고 싶지 않았다. 가족의 정을 겉핥기 식으로 흉내낼 줄만 알던 칠흑의 용에게 이 기묘한 감각의 해석은 난제 중에서도 난제였다. 거기에다가 따지고 보면 일을 완전히 망쳤다고도 볼 수 없었다. 위무선이 무턱대고 벌컥 뛰어든 덕을 톡톡히 봤다고 해야 할지, 사마외도로 오인받은 일을 정정하는 걸 넘어서서 섭명결에게 그저 단순히 ‘잠이나 자고 열 좀 식히면 해결되는 일’ 정도로 취급받았으니까.

마치 누군가 일부러 등을 떠민 것처럼, 너무나도 시기적절하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강만음의 눈이 달라졌다.

붉게 물들어 본색을 드러낸 용의 눈이 표적을 정확히 겨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강씨 소년의 본체는 의심 많고 욕심 많은 악룡. 본래 창천의 검이었으나 그 하늘에게서 버림받아 인세의 밑바닥, 요괴의 소굴에까지 떨어져 셀 수도 없이 많은 살육의 죄를 짓고 또 지은 무기수였다. 의심은 귀중한 생존 본능, 생이 다하는 마지막까지 결코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감각이었다. 티끌만한 것 하나까지도 의심하고 또 파고들어야 살아남았다.

“오늘 이 자리, 네 힘으로 온 게 아니로군.”

강만음이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서자, 대청의 공기가 삽시에 한층 무겁게 가라앉았다. 놀란 위무선은 가련하게 딸꾹 울었다.

“무……슨 뜻일까? 우리 지금 사이 좋아야 할 때 아니었어?”
“글쎄, 네놈이 더 잘 알 텐데.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아하, 아하하. 아무래도 잘 모르겠는데…….”

대청 바깥은 분명 화창한 대낮이었다. 그런가 하면 대청 안쪽은 어째서인지 강만음이 위무선에게로 한 발자국씩 다가갈수록 두 사람이 발 딛고 서 있는 공간 자체가 태풍 속으로 끌려 들어가듯이 밤처럼 어두워졌다. 허공에 핀 강만음의 손이 이상하게도 그럴 리 없는데 푸줏간 갈고리 같았다.

“불어라, 위무선. 어떤 종자가 감히 널 도와주었지?”

그때 위무선은 생각했다. 맙소사, 금낭자. 이 아선을 도와주세요.

“첫째, 내 분명 기억하기론 연등회 일로 너는 아직 근신 기간이다. 지나가는 길에 들렀다고 둘러대기엔 불가능하지. 그리고 둘째, 만약 몰래 나온 것이라면 그 운몽에서 이 청하까지 밤을 지새우며 어검해도 족히 사흘은 꼬박 걸린다.”
“아니 뭐, 사람을 막, 그렇게.”
“전송부, 아니면 전송술? 뭐 좋아. 어쨌든 둘 중 하나는 필시 썼겠지. 그만큼이나 너는 내 소식에 마음이 강하게 동했어. 내 소식을 전달한 상대는 네가 움직일 것이라 확신한 것이고. 참으로 치밀해, 아주 거슬리도록 말이야.”
“하,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너는 위기에서 벗어났지, 그리고 나는 네가 무사해서 한시름 덜었지. 이게 바로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그러니까 왜.” 강만음은 이제 위무선을 바닥에 철퍽 넘어뜨렸다.

곧 대청 안 눅눅한 공기가 높이 치켜든 턱부터 빳빳한 등까지 무엇 하나 쉽사리 굽힐 줄 모르고 꼿꼿이 선 불굴의 강만음을 피륙처럼 휘감은 채 격렬하고 음산하게 회오리쳤다.

“똑똑히 들어라, 위무선. 네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으니 인생의 지혜를 담아서 경고 하나 해주마. 이 땅에서 순수한 호의란 죽고 나서 지옥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저승에서나 찾을 수 있다. 그 외의 것들은 다 같잖은 속임수지. 이제 네놈이 뭘 놓쳤는지 조금 보이나? 너는 부친의 명을 어겼고, 나는 그자에게 내 발목을 잡힌 것이나 마찬가지다. 언제든지 나를 찾아와서 이 성가신 일을 은혜처럼 들먹이겠지. 만약 값을 치르지 않으면 또다른 이에게 내 일을 멋대로 떠벌려 오늘보다 더 성가시도록 일을 도모할지도 모르고. 네가 덥석 물은 일은 바로 그런 것이다.”

“듣고 보니까 꽤 날카롭네…….”
“그러니 어서 밝혀라. 당장 오늘 밤이라도 찾아내서 입막음하게. 어차피 섭가 인간이겠지.”
“뭐어? 너, 너, 너, 죽이겠다는 말을 어떻게 그리 쉽게 해!”
“혀를 뽑으면 죽인 건 아니라 볼 수 있다.”

그게 그거 아냐? 위무선은 한 마디로 죽을 맛이었다.

“하― 강징. 아니야, 아니야. 차분히 다시 생각해 보자. 금낭자 혀를 뽑아서 뭘 어쩌려고 그래. 그건 아무래도 숨기기가.”
“뭐?”
“응? 숨기기 어려울 거라고. 상대도 바보는 아니니까 혀를 뽑혀도 글을 써 고발할 수 있잖아.”
“말고 그 앞에, 중간 문장을 다시 말해라.”

일순 공기가 얼어붙었다.

“……맙소사, 결국 내 입으로 다 불어버렸네. 금낭자에게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입 다물겠다고 약조했는데.”

다시 한 번 언급된 이름에 강만음의 눈이 잠시 철렁 흔들렸으나, 아주 짧았던 지라 누구도 보지 못했다. 한편 위무선은 포기한 듯 바닥에 편히 누워서 두 팔을 활짝 폈다.

“모르겠다아― 네가 정 혀를 뽑겠다니까 말해야겠어. 그래, 네가 방금 들었듯이 나를 도와준 건 금낭자야. 앞으로 우리 사돈지간이 될 난릉 금씨의 자봉 낭자. 전서를 날려 네 소식을 알려준 것부터 전송술로 내 몸뚱아리를 이 부정세에 옮겨준 것까지 전부 다, 그 마음씨 고운 낭자라고요.”

대청 천장은 어느새 맑게 개어 있었고, 강만음의 눈은 악룡에서 다시 인간의 검은 것으로 되돌아왔다.

“듣자하니까 섭가와 금가 사이에 일이 있어서 먼저 와 있었는데, 불의를 보고 도저히 가만 지나치지 못 하겠다더라. 자기는 네가 오해받는 걸 한두 번 본 게 아니라면서 너의 결백을 굳게 믿는대. 내 생각에는 도량도 넓지, 기개도 있지. 의리 하나 끝내주는 낭자인데, 아직도 혀 뽑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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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술, 그 이름만 듣기엔 꽤 편리한 이동 수단처럼 여겨지지만 실상 영력의 소모가 상당한 상급자 술법이었다. 편리에 취해 한 번 쓰면 최소 사나흘은 꼼짝 못 했다. 하여 술법의 반작용으로 몸에서 거의 절반의 피를 게워 낸 듯 몽롱해진 금자봉은 안 그래도 성치 못한 상태였기에 지금 이 순간 더욱 여실히 대가를 치르는 중이었다. 이미 창백한 걸 넘어서서 퍼렇게 질린 안색에 놀란 붕팔이 방 안을 겨울철 한증막처럼 펄펄 끓도록 데워주기는 했지만, 그뿐. 금자봉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건 기운을 보충할 영약이었다. 섭가 의원의 도움을 받고자 한다면 당연 받을 수도 있었으나, 영약의 힘을 빌려서까지 회복해야 할 사정이라는 게 알려졌다가 쓸데없이 적봉존에게 책잡히는 건 사양이었다.

이만큼이나 조심하는데, 이상하여라. 강공자에겐 그럴 수 없어.

소녀는 이제 침상에 누워 온몸을 공처럼 둥글게 말고 있었다. 여종은 따로 보약을 지어 오겠다면서 떠난 지 벌써 오래였는데 아직도 소식이 묘연했다.

그래선 안 될 것 같다는 게 맞겠지, 아마……. 정말 이상해.

열에 짓눌려 눈이 서서히 감기던 찰나, 밖에서 누군가 묵직하게 ‘똑똑’ 하고 문을 두드렸다. 눈이 저절로 번쩍 뜨였다.

겨우 고개를 든 금자봉이 “붕팔이니? 열려 있으니까 예는 차리지 말고 그냥 편히 들어오렴.” 말해봤지만, 문 너머의 상대는 그 말을 들었음에도 한 번 더 ‘똑똑’ 두드려왔다. 피식 웃어 넘긴 금자봉은 가까스로 문에 다다라서 찬 문고리를 그러쥐었다.

손에 든 게 너무 많아 문을 열지도 못 하겠다는 걸까, 하기야 어찌나 파닥파닥 뛰며 내 몸을 걱정하던지. “너도 너구나. 뭘 그렇게 사서 돌아온 거―”

그러나 소녀가 나서서 먼저 문을 열어줄 때까지 아무 말 없이 가만 있었던 상대는, 여종이 아니라 한 소년이었다. 이를 악 물어 힘이 바짝 들어간 턱, 서리처럼 얼어붙어 예리함이 묻어나는 눈. 그 두 눈으로 곧 있으면 말라비틀어져 쓰러질 것 같은 기색이 역력한 소녀를 불만스럽게 내려보았다.

“만족합니까? 몸을 그렇게 망쳐 놓고도.” 평소와 달리 육중한 흑단 도포를 입은 강공자였다. 어쩐지 또, 화가 나 보였다. 

금자봉은 두봉 대신 꽁꽁 두르고 있었던 이불을 바닥에 전부 내려뜨린 채 예를 차려 인사를 올렸다. “위공자께서 그 자리에 제때 도착하신 모양이군요. 무사하신 것 같아 참으로 다행입니다.” 금자봉은 꼭 잘못한 것처럼 고개를 푹 수그렸다. 분명 언젠가 들키리라곤 예상했지만 바로 하루 만에 찾아올 줄 몰랐었기에.

“주제 넘게 참견했다는 건 인정합니다. 제게 도움은 받고 싶지 않으셨겠지요.”
“되었고, 잠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머릿속으로 한참 말을 고르고 있었던 금씨 소녀는 그때 비로소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당황한 눈과 성급한 눈이 좁디좁은 허공에 얽히자, 강씨 소년은 바로 그 즉시 고개를 돌려서 두 눈을 팍 내리깔았다. 그와 동시에 잇새로 나직이 새어 나온 한숨 소리를 듣고 있자니 어째서인지 안심되었다. 표정도 한결 누그러져 보기 편안했다. 

“……낭자 성격에, 이대로 저와 함께 서 있다가 지나가는 다른 이에게 오해받으면 곤란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다시 이불을 주워 금자봉에게 둘러주었다. “전송술 때문에 체내의 영력을 과도히 쓰셨을 텐데, 실은 그 때문에 온 것이니 경계를 거두어 주십시오. 저도 마음이 급했습니다.” 

강만음에게 다시 이불을 넘겨받은 금자봉은 그를 정중히 안으로 안내했다.

금자봉이 머무르는 방은 크기로 따지면 객실 중에서 가장 넓었지만, 특별히 장식이랄 게 없는 간소한 양식이었다. 그녀의 평소 취향이 반영된 것이었다. 한편 아무리 힘이 들어도 몸에 이불을 둘둘 싸매고 대화를 나누는 건 예의에 어긋난지라, 금자봉은 이불 대신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두봉을 꺼내 입었다. 두봉의 끈뿐만 아니라 풀린 머리까지 새로 묶고, 간략하게 몸단장을 마친 금자봉은 가림막을 넘어 객실 한편에서 기다리는 강만음에게 되돌아갔다.   

“마침 찻잎이 전부 떨어져 면구스럽게 되었습니다. 늘 부리던 아이를 장으로 보내줬는데, 어디서 길을 헤매고 있는지 선부로 돌아올 생각을 안 하는군요.”

금자봉은 긴 비단결 머리를 여름철 담벼락에 걸린 덩굴처럼 곱게 하나로 땋아 내렸다. 어차피 상대가 가고 나면 다시 침상에 누울 것이라 순전히 편의상 땋아 내린 것이었는데, 기분 탓인지 모르겠으나 강만음의 날카로운 눈이 다름 아닌 그녀의 머리에 그대로 꽂힌 것 같았다. “―저어, 강공자?”

소녀의 부름에 소년은 화들짝 놀랐다. “말씀하세요.” 그러고 곧 말을 고쳤다. “아, 드릴 말씀은 전부 다 제 쪽에 있군요. 죄송합니다.”

“천천히 하세요. 오늘은 섭종주께서 분부하신 일이 없는지라 괜찮습니다.” 

침착하게 답한 금자봉은 차가 없으니 향을 피웠다. 향로의 뚜껑을 닫고 나서 탁자 한가운데 올려놓자, 강만음은 조금 녹아내린 눈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일단 그 일은 감사합니다. 감사하지만…… 다음부터는 앞뒤 재지 않고 무모하게 낭자의 몸을 내던지지 말아주십시오. 연등회 일로 낭자가 제게 은혜를 갚고자 한다는 건 잘 알겠으나, 제 일은 온전히 제게 닥친 상황이므로 어떻게든 할 수 있습니다. 허나 낭자의 몸은 세상에 오직 하나이지 않습니까. 몸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은혜를 갚아야 한다면 차라리 애당초 없던 것으로 치겠습니다.”

향에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한 소년의 두 눈은 곧 바다가 되어서 고요하게 넘실거렸다. “한 번 어긋난 몸의 상태는 돌이키기가 매우 어려우니 말입니다.”

얼핏 듣기엔 퍽 사려 깊은 말이었으나, 소녀는 이미 오래전 그런 허황된 말에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전부 깔끔히 잊어버렸다. 

“공자는 제게서 다른 이를 투영해 보고 계시는군요.” 놓아버렸다고 해야 할까. 누군가의 바로 발밑에서 납작 엎드려 살아가기엔 필요 없는 것들이었기에. “소녀의 말이 지나치게 솔직했을까요?”

탁자 가까이 앉아 있었던 강만음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뒤로 슬금 물러났다. 그러자 얼굴을 반으로 가르듯 응달이 짙게 졌다. “정녕 그렇게 보이십니까.”

“시시비비를 가리자 한 건 아니지만, 예. 그렇습니다.”
“낭자께서 그리 확고하게 말씀한다면 저야 더 할 말이 없군요. 인정합니다.”
“……제게 기분이 상하셨나요?”

“제가 기분이 상하고 말 게 어디 있겠습니까, 감히요.”
“하지만 안색이 조금 그래 보이셔서요.”

강만음은 이제 완연하게 그늘 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늘 속에서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을 때, 소년은 어느새 꽉 쥐고 있었던 주먹을 펴 보였다.

그것은 월백색 옥반지로, “법기입니다.” 한때 소녀의 심장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반지의 형태이지만 심장 가까이, 줄에 걸어서 목에 두르고 다니십시오. 낭자의 모든 걸 충실히 보조할 겁니다. 가능하다면…… 희망이오나, 낭자의 몸에서 떼어 놓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지금 같은 상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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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를 많이 넣고 싶었다...(개인적 욕심) 제목도 계속 생각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 딱 생각남ㅎ 느리고 질긴 글을 늘 끝까지 읽어줘서 코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