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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색파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 아에몬드가 이를 확신한 것은 룩스레스트에서 라에니스가 전사한 직후였다.
흑색파에게 있어 라에니스의 상실은 앞으로의 내전의 승패가 크게 기울 만큼 중요한 문제였다. 그들은 어떻게든 이 위기를 대처해야만 했다. 장기전으로 끌고 가봤자 좋을 게 없을 테니, 내부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모든 동맹군을 끌어모아 킹스랜딩을 치러 올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드래곤스톤은 며칠이 지나도록 잠잠했다. 오랫동안 가문을 위해 헌신했던 라에니스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믿을 구석이 있든, 아니면 그 믿을만한 구석을 만들기 위해서든— 그들은 시간을 끌고 있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볼 수밖에.
“부디 내 이복누이께서 이번에도 다분히 충동적이고 위험한 선택을 해주면 좋겠는데.”
카니발을 상징하는 듯한 검은 말을 드리프트마크에 내려놓으며 아에몬드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때 회의소의 문이 열리며 시종 하나가 들어왔다.
“폐, 폐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아에곤의 상태를 보러가야겠다며 아에몬드가 의원들을 물리자 크리스톤이 그의 뒤를 따라 회의소를 나섰다. 뒤따라오는 발걸음에 의도가 있음을 알아챈 아에몬드가 조용히 뒤를 돌아 크리스톤을 바라보았다. 의도를 묻는 듯한 눈빛을 받은 크리스톤은 조금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신 겁니까? 섭정비의 마음을 돌리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
“원하는 것을 주었지.”
아에몬드가 여상하게 대답했다. 크리스톤이 그들의 일에 관심을 보이는 건 탐탁지 않았으나, 그가 이리 궁금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할 수 있으니 그리 했다 말하는 아에몬드조차도 허니가 이리도 순순히 누그러질 줄은 몰랐으니.
아에몬드에게 허니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다만 처음에는 이해하려는 노력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녀를 알기 쉬운 인간이라 여겼다. 귀족 가문의 여식 주제에 결혼이니 사랑이니 하는 환상을 품었던 것만 봐도 그녀가 평생을 얼마나 어려움 없이 곱게 자랐는지 짐작할 수 있었으니. 그런 사람이 평생을 함께할 거라 믿었던 상대에게 가치가 없다느니 하는 소리를 들었으니 무너지는 것도 당연했다.
허나 그녀는 그 모욕을 당하고도 그에게 돌아왔다. 마치 그에게서 인정받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표인 것처럼, 흑단같은 머리카락과 눈으로는 결코 품을 수 없을 가치있는 것과 함께. 그때부터였다.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의 결이 달라진 건.
룩스레스트의 하늘 위에서 필사적으로 멜레이스에게 맞서는 그녀를 보았을 때, 아에몬드는 크리스톤이 무엇을 우려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공포와 불안에 질린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본인이 참전을 권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에몬드는 그녀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고작 몇 개월, 그마저도 결혼 이전에는 이 세상에 서로가 존재하는지도 몰랐을 그런 인연을 위해서 이런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정말 가능하단 말인가?
사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아에몬드는 그녀의 행동을 제 사랑을 증명해보이려는 철없는 영애의 치기라든가 제 감정에 취한 어리석은 이의 판단정도로 치부하려 했다. 그러나 그토록 그의 애정을 갈구한다는 여인이 아에곤을 죽여선 안 된다며 그의 앞을 막아섰을 때에는 그녀의 진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과 존중을 원한다는 그녀의 말과 행동은 너무나도 모순적이었다. 좀처럼 아에몬드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흘러가질 않았다. 제 인정을 받고 싶다면서 어째서 제 명령을 거부하는 것인가. 허니가 제 마음을 증명해보려 처절하게 노력하면 노력할 수록 아에몬드에게 그것은 미지의, 버겁고도 위험한 것으로만 느껴졌다. 그의 세상에서 그런 일방적인 애정이나 헌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정말 내게 주어진 것인가 보다하며 그가 받아들이기라도 하면 결코 돌려줄 수 없을만큼 커다란 대가를 요구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찾아간 그날 밤, 그녀가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을 때에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그럴 목적으로 방문한 것이었다지만 아에몬드는 허니의 뺨에 손을 갖다 대면서도 그녀가 정녕 바라는 것이 이게 맞는지 확신하지 못했으니까. 자기가 이딴 급조된 애정을 받자고, 당신과 웃기지도 않는 역할놀이를 하자고 그런 생고생을 하는 건 줄 아냐며 그녀가 역정을 내더라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동안의 외로움이 그녀를 나약하게 만든 탓인지, 아니면 또 무슨 이해할 수 없는 이유때문인지는 몰라도 허니는 그를 받아들였다. 그 눈이 열락에 잠기는 걸 보면서 아에몬드는 뒤틀린 속이 비로소 가라앉는 걸 느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이 고작 이런 것이라면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으니까. 겨우 제 몸뚱이를 내어주는 정도에 그녀가 만족한다면, 언제 그녀가 본색을 드러낼지 모른다며 의심하고 경계할 필요 없이 그 마음을 계속 곁에 묶어둘 수 있을 테니까.
약속할게요.
당신 뜻대로 하겠다고.
이 세상 모두가 당신을 등진다고 하더라도, 나는 결코 당신을 배신하지 않을 거예요.
…맹세를 바란 것은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아에몬드는 충분히 순종적인 아내를 품안에 넣고서도 확신을 바랐다. 소리내어 말한다 한들 불변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직접 말하기를 명했다. 그리고 허니는 이번에도 그의 아집에 순순히 따라주었다. 눈물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감히 충성을 약속하는 모습에 아에몬드는 문득 궁금해졌다. 누구도 그에게 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맹목적인 헌신을, 그녀라면 줄 수 있을까?
크리스톤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어진 아에몬드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냐고 묻지 않는 그의 현명함에 만족한 듯, 아에몬드가 작게 미소지었다.
“내가 타르가르옌의 검이듯, 그녀는 나의 방패가 되겠지.”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두꺼운 커튼으로 창을 죄다 가려둔 아에곤의 침실은 어둑했다. 거침없이 침대가로 걸어가 제 형의 처참한 몰골을 확인한 아에몬드가 작게 혀를 찼다.
“이래서야 살아있는 게 고통이겠군.”
감상인지 조롱인지 모를 말에 아에곤이 눈을 굴려 그를 바라보았다. 안대에 가려지지 않은 아에몬드의 한쪽 눈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왕의 시선을 마주했다.
잠깐의 정적 후 먼저 시선을 거둔 건 아에몬이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려 하자 아에몬드는 오히려 발걸음을 떼 형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 나십니까?”
흐윽. 흐느낌인지 숨넘김인지 모를 소리가 아에곤의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아에몬드는 그런 아에곤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그의 속내를 읽어내기라도 하려는 양.
사실 아에곤의 반쯤 익은 머릿속이 무슨 생각을 할지는 그렇게 오래 공을 들이지 않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본디 야망이랄 게 없던 사내였다. 왕이 될 자질이 부족하다는 건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을 테니,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한다 하더라도 감히 아에몬드에게 책임을 묻진 못할 것이었다. 레드 킵이 아무리 아에곤을 방만하게 키웠다고 한들, 언제 죽을 줄 모르는 왕과 전쟁을 촉발한 친족살해자 왕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가신들이 후자를 고를 거라는 걸 모를 만큼 그가 멍청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나 애초에 아에몬드가 궁금한 것은 산송장이나 마찬가지인 형의 입지 따위가 아니었다. 그가 형에게 그날의 일을 기억하느냐 물었던 것은 그가 허니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그들의 본의야 어쨌든 간에 결과적으로 둘째왕자의 처가 왕의 몸을 해치는 데 영향을 끼쳤고, 그것은 아에몬드를 물고 늘어질 유일한 방법이 될 수도 있으니.
“…아니,”
“…….”
“아무, 것도. 기억 안 나. 정말이야.”
역시 큰일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순진하다. 표정 하나 숨기지 못하는 형을 내려다보며 아에몬드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녀에게 고마워하셔야겠군요.”
“어...?”
의문스러운 아에곤의 얼굴을 보며 아에몬드가 미소지었다.
“허니 말입니다. 내 아내. 그녀가 추락한 형을 감싸지 않았더라면…”
일부러 끝맺지 않은 말의 뒷부분을 짐작한 아에곤의 눈에 두려움이 서렸다. 그 반응에 아에몬드가 즐거운 듯 웃더니 조금 더 침대에 붙어서서 몸을 기울였다.
형이 무사히 깨어나서 진심으로 기뻐. 그렇게 말하며 아에몬드가 아에곤의 이마에 키스했다.
회의소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던 아에몬드가 문득 멈춰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온 세상이 화마에 잠긴 듯 눈 닿는 모든 곳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통렬한 빛에 눈이 시릴 법도 하건만 아에몬드의 눈은 꽤 오랫동안 고요한 하늘을 응시했다. 그에게 돌아와야 할 사람을 좇느라고.
그러나 하늘이 이토록 잠잠한 것을 보면 곧바로는 돌아오지 못할 모양이었다. 다시 걸음을 옮기면서도, 아에몬드의 머릿속은 입밖으로 꺼내지 못할 물음들을 자꾸만 만들어냈다.
지금도 그대는 내게 이토록 헌신하는데, 내가 만약 그대가 바라는 남편처럼 굴어준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저녁식사를 함께 하자고 한다면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저 손에 쥔 것을 잘 활용하기 위해 품을 들이는 것뿐이다. 아에몬드는 뻗어나가는 생각을 정리하듯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회의소의 문이 열리기 직전, 시종에게 그의 침실에 2인분의 식사를 따로 준비하라 명령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밤은 물론이고 하루, 이틀이 지날 때까지도 그의 아내는 레드 킵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다음편 https://hygall.com/606403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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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에몬드너붕붕
유첼너붕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