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족에게 있어 결혼은 의무이자 수단이었다. 아에몬드가 그걸 모를 만큼 무른 성정일 리 없었다. 다만 아에몬드가 분노한 이유는 그의 결혼이 수단으로서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이었다.
“어느 가문이요?”
“B. 리치의 공작이란다.”
“…흠.”
무려 타르가르옌과의 혼인이다. 하다못해 바라테온, 정 리치 지방의 권력이 필요했다면 티렐 가문정도는 되어야 이해타산이 맞는 거래였다. 그러나 알리센트가 선택한 것은 레드와인 함대의 여러 제독 중 한 명이라는 B 공작의 딸이었다. 그 터무니 없는 선택에 아에몬드는 잠시 그녀가 장남을 너무 편애한 나머지 그를 권력의 말판 위에서 아예 배제하려는 것인가 의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알리센트에게 그 정도의 비장한 뜻은 없었다. 그저 갈등이 첨예해질 수록 그녀의 편집증적인 불안도 극에 달했고, 때마침 그 옆에 그의 누이 헬라에나가 있었을 뿐이다. 정신 나간 누이는 어머니에게 ‘가장 평범한 곳에 평온이 있을 것’이라 조언했다. 어떤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는, 무시하는 것이 마땅한 헛소리에 알리센트의 연약한 마음은 흔들려버렸다. 그때 당시 그녀의 손에 들린 선택권이라고는 차남의 혼사 뿐이었고, 하여 오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예정되었던 바라테온의 여식이 아닌 허니 비와의 혼인을 추진했다. 녹색파의 많은 이들이 그랬듯이, 아에몬드도 그 날을 기점으로 제 어미를 이해해보려는 마음을 거두었다.
새 신부, 허니 B는 평화로운 남부지방에서 자란 귀족 여식답게 순진하고 맑은 구석이 있었다. 킹스랜딩의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말 몇 마디로 제 남편 될 사람이 약혼식과 결혼식을 생략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이해한다며 웃어보이는 소녀를 마주하고 나서야 알리센트는 어쩌면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눈앞의 아이는 아에몬드의 곁에 있기에는 너무나도 연약했다. 설탕으로 빚어낸 공예품은 겉보기에는 예쁘지만 작은 충격에 쉽게 무너지는 법이다. 마땅히 사랑으로 품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오래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상대는 아에몬드였다. 언뜻 보면 차가워 보여도 실상은 그 온도를 짐작하기 힘든 새파란 불이나 마찬가지였다. 알리센트는 저를 보며 예쁘게 웃는 허니가 자꾸만 녹아내릴 것만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그리고 알리센트의 직감은 그대로 현실이 되어 둘째 왕자의 결혼생활은 빠른 속도로 불행해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아에몬드가 헬라에나의 예언은 공상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일부러 허니에게 못되게 굴었더라면 냉대에 이유라도 찾을 수 있었을 것을. 그러나 전장의 최전선에 선 그는 제 아내에게 그 정도의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결혼 전과 다름없이 행동했고 결코 그럴 수 없는 허니는 레드 킵 깊은 곳에 마련된 신방에서 혼자서 조용히 말라갔다.
결혼을 위해 고향을 떠나온 그녀가 이 성 안에 정 붙일 곳이 마땅히 있을 리 없었다. 타르가르옌의 보수적인 가풍때문에 유모는 커녕 식솔 하나 데리고 올 수 없었으니. 그나마 그녀를 신경 써주는 듯 했던 알리센트도 흑색파와의 갈등이 깊어지자 새 가족을 전처럼 들여다보지 못했고,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허니는 제 왼손 약지에 끼워진 사파이어 반지를 어루만지는 시간이 늘었다. 결혼식을 생략한 대신 철왕좌 앞에서 짧은 맹세와 함께 나누어 끼웠던 이 반지만이 그녀가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 악몽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유일한 증거였으니까.
‘…저는 잘 지내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레드 킵은 명성만큼이나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함께 지내는 분들 모두 귀족의 품위를 아는 분들인 만큼 배울 점이 많,’
아버지에게 보낼 편지를 적던 허니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문득 그녀는 누구를 위해 이런 거짓말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제 아비가 그렇게 매정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출가한 딸의 편지 한 통에 울고 웃을 만큼 다감한 사람도 아닌데. 결국 이것은 스스로를 달래기 위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몇 번을 읽어보고 문장을 고쳐 써보아도 흉진 마음은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모든 것이 부질없다 느껴진 허니는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마저 그만두고 말았다.
…아에몬드가 환락가에 방문했다는 사실을 듣게 된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고립될 거라면 철저히 고립되는 게 나았으련만. 꼭 소문이란 제일 들어선 안 되는 이의 귀까지 닿는 법이었다. 하필이면 시종들이 저들끼리 떠드는 말을 가벼운 산책 후 방으로 돌아가던 허니가 들어버렸다. 정략 결혼으로 맞이한 신부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 정을 줬던 이에게 돌아간 거라고, 아랫 것들이 멋대로 살을 붙인 소문에 차마 화를 내지도 못했다. 진위를 논하자니 그녀가 아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그래서였다. 결혼 후 몇 달 만에 그 새 신부가 시종들에게 물어 물어 아에몬드의 방까지 당도한 것은.
“연락도 없이 여기까진 무슨 일이지.”
오랜만에 마주한 얼굴에 반가운 기색은 커녕 허례도 없이 건네진 냉대에 그녀는 당황했다. 그때까지도 제 남편 된 자에게 마땅한 사정이 있었으리라 이해하려 노력해서일까, 차가운 실체를 눈앞에 두니 오히려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은 허니 쪽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그녀도 물러날 수는 없었다. 조용한 방 안에서 매일매일 피가 마르는 삶을 사는 것은 지난한 자살과 진배 없었다. 그녀는 온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녀의 상식 선에서 남편이란 마땅히 그걸 베풀어야 하는 역할이었다.
“어떻, 어떻게 하면… 저를 봐주실래요?”
“…….”
“제가 무얼 해야지 저를 아내로 대해주시겠어요?”
허니가 간과한 것은 그날 아에몬드가 어떤 마음으로 환락가에 방문한 것인지, 그가 전쟁의 시발점이 된 것에 얼마나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지, 그러한 속내를 유일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앞에서 가족이라 믿었던 사람에게 어떠한 창피를 당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는 점 뿐이었다. 그리고 아에몬드는 제 입으로 친히 그러한 사정을 말해줄 만큼 다정한 사람이 결코 되지 못했다.
“불가능 해.”
“…네?”
“형식적인 부부관계가 아닌 존중을 바라는 것이라면 불가능하다 말했어. 내게 있어 그대는 어떤 가치도 없는 존재니.”
리치를 떠나기 전 허니의 아버지가 제 딸에게 그런 말을 하긴 했었다. 그녀의 남편될 자는 킹스랜딩에서도 손에 꼽게 뛰어난 무예 실력을 지녔다고. 그 말을 들을 당시에는 막연히 검을 잘 다루는가 싶었는데, 이제 보니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은 비단 무기를 쥐지 않아도 타고난 모양이었다. 하나 뿐인 눈동자도, 열린 입술 안에서 춤을 추고 있을 혀도 무엇 하나 날 서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제게는 어떤 기회도,”
“그대가 용 위에 오르지 않는 이상은.”
“…….”
“지금은 전쟁 중이야, 부인. 이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 만큼 순진하지 않길 바래.”
“…….”
“더 할 말이 없으면 방으로 돌아가.”
그리고 다음부터는 이런 문제로 방문하는 일이 없도록 해. 그것은 딱히 친절하지도 않은 축객령이었고, 허니에게는 거절한 권리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녀는 말 그대로 내쫓겼다. 그의 옷 시중을 드는 하녀들보다도 못한 존재처럼.
방으로 돌아가는 내내 그녀의 귓가에는 차가운 목소리가 얼음처럼 들러붙었다. 그대가 용 위에 오르지 않는 이상은. 그 말은 조소에 가까운 거절이나 마찬가지였다. 타르가르옌 혈통도 아닌 그녀가 용을 다룰 수 있을 리 없으니.
그래서였나. 내가 타르가르옌이 아니라서. 그 정도 가치가 없어서 제 가족들에게 보여주는 만큼의 다정함도 허락되지 않는 것인가. 허니는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되물었다. 그러나 그녀가 내릴 수 있는 답은 아무것도 없었다.
홀로 지내는 신방 앞에 다다른 허니는 그 안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 붉은 벽돌로 짜올려진 성 안 어느 곳 하나 자신이 마음 편히 발 들일 곳이 되지 못했다. 그녀는 리치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갈 수단도, 명분도 없었다. 그녀가 돌아간다 한들 아버지가 반겨줄 지도 의문이었다. 아에몬드 말마따나 지금은 전쟁 중이었고,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답장이 오는 기간은 갈수록 길어졌다. 고향의 가족들에게도 그녀의 존재가 걸림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녀를 끝도 없는 자학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만들었다.
정처없이 걸었다. 아니 도망쳤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렸다. 말 그대로 허니는 발길 닿는대로 내달려 레드 킵을 벗어났다. 누군가의 눈에 거슬리기라도 할까 숨죽여 가끔씩 다녀오던 산책은 어쩌면 그녀도 모르게 탈출을 준비하던 나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익숙한 길을 따라 심장이 터질 듯이 부풀어오를 때까지 뛰고 또 뛰었다. 아에몬드의 냉대에서 벗어나려는 듯이, 의무라는 이름의 족쇄를 벗어던지려는 듯이.
그러나 한밤 중의 아에곤의 언덕은 그녀에게 자유를 선사하기에는 너무나도 좁았다. 얼마 못 가 허니는 언덕의 경계에 다다랐다. 가파른 경사의 아래로 고개를 숙이면 무저갱과 같은 검은 바닷물이 절벽에 부딪혀 부서지는 광경만이 보였다. 그 살풍경한 경치에 죽음을 떠올린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떨어질까. 내가 여기서 죽는다한들 누구도 슬퍼하지 않을 것 같은데.
충동적이었다. 그러나 손익을 따져볼만큼 이성적이기도 했다. 스스로를 갉아먹는 고통에서 헤어나오는 대가로 잠깐의 고통만 감수하면 된다니, 그녀가 죽음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녀가 죽는다고 해서 아에몬드가 어떠한 상실감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제 가문에게도 아쉬운 소리를 할 지언정 근간이 흔들릴 정도의 불이익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 이 정도 자유는 누려도 괜찮잖아. 허니는 몇 달 만에 진심으로 웃으며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녀를 스치고 지나가는 칼바람이 그저 시원하게 느껴졌다. 눈물이 나는 것은 본능적인 두려움 때문일 뿐이고, 곧 닥칠 영원한 고요에 비하면 터무니 없이 작은 슬픔일 뿐이라고. 그렇게 마지막까지 허니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러나 그날 밤 아에곤의 언덕 아래에서는 누군가의 뼈가 으스러지는 끔찍한 소리같은 것은 들려오지 않았다. 둔탁한 파열음과 단말마같은 짧은 비명은 바닷바람에 묻혀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죽기를 희망했던 새 신부는 어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어찌나 따뜻하고 안락하던지, 허니는 정신을 차린 직후 그녀가 마침내 지옥에 당도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허나 그녀는 죽지 않았다. 그녀를 감싼 어둠은 지옥도 밤도 아니었다.
그것은 가장 어두운 그림자로 지어진 성채와도 같은…
용이었다.
다음편 https://hygall.com/605941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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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팍팍한 둘째 왕자님이 모질게 굴었다가 후회하는 걸 보고 싶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빌드업이 길어.....
아무튼 업보 착실히 쌓는 아에몬드가 보고싶다
아에몬드너붕붕
유첼너붕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