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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5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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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새파란 하늘 위로 높이 날아오른 공을 슬라이더의 거칠고 투박한 손이 힘껏 내리쳤다. 네트를 넘어간 공이 사선을 그리며 총알처럼 땅으로 내리꽂혔고, 모래가 부옇게 일어나며 ‘펑’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났다.
뿌연 먼지가 개이며 모래 위에 처박힌 매버릭의 볼품없는 모습이 드러났다. 매버릭은 비뚤어진 선글라스를 고쳐 쓰며 몸을 일으켰다. “매브, 괜찮아?”하고 구스가 달려와서 매버릭을 부축했다. 매버릭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네트 건너편을 노려보았다.
“이―호!”
점수를 내는 데 성공한 슬라이더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함성을 내질렀다. 아이스가 그에게 다가가 하이 파이브를 했다. 두 사람은 기세등등한 얼굴로 매버릭과 구스 쪽을 바라보며 산뜻한 미소를 던졌다. 슬라이더는 손으로 키스를 날리기까지 했다.
“어우, 저 입맛 떨어지는 놈.”
잔뜩 약이 오른 구스가 귀를 후비며 투덜거렸다. 매버릭은 대꾸하지 않고 씩씩거리며 숨을 골랐다. 햇볕에 시뻘겋게 달아오른 그의 상반신은 온통 모래투성이였다.
“매브.”
“…….”
“자기야, 화났어?”
“……응.”
“아유, 이 귀염둥이. 화 풀어.”
구스는 매버릭의 어깨를 팔로 감으며 나긋나긋한 말씨로 그를 어르고 달랬다. 매버릭은 손에 휘감은 끈을 다시 단단하게 동여맸다. 그리고 모래사장에 처박힌 공을 집어 들었다. 그는 새처럼 날아올랐다. 도드라진 갈비뼈가 물결처럼 흔들렸고 툭 튀어나온 날개뼈는 한껏 뒤로 젖혀졌다. 스치는 바람에 매버릭은 해방된 기분을 느꼈다. 꿈속의 꿈이었다.
1점 차이로 치열한 접전이 이어지던 배구 시합은 아이스와 슬라이더의 승리로 끝났다. 매버릭은 자신이 찰리를 만나러 중간에 떠나는 바람에 중단됐던 이 시합에 마침표를 찍었다. 57번 만에, 마침내.
비록 패배는 쓰라렸지만, 미완의 이야기를 완결지었다는 뿌듯함이 그 아픔을 상쇄했다. 매버릭에게 오늘 배구 시합은 단순한 시합이 아니었다. 되풀이되던 꿈에서 처음으로 뒤바뀐 사건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이번에는 구스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했다.
“얘들아!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우리가 이겼으니까, 오늘은 내가 한턱낼게.”
“그래, 좋아. 샤워부터 하고 먹으러 가자.”
승리의 기쁨에 슬라이더가 통 크게도 저녁을 사겠다고 제안했고, 매버릭은 흔쾌히 응했다. 그리고 벤치에 벗어놓은 티셔츠를 챙겼다. 슬라이더가 뒤쫓아 따라오며 찡그린 얼굴로 불만을 토했다.
“계집애처럼 왜 그래? 배고프단 말이야, 저녁 먹고 관사로 돌아가서 씻어. 내가 산다고 하잖아.”
“땀 흘려서 찝찝해.”
“그러게, 누가 이 날씨에 청바지 입고 배구를 하랬나.”
“네가 뭔 상관이야.”
매버릭은 툭 내뱉고는 곧바로 등을 돌려 건물 쪽을 향해 걸어갔다. “너희 안 씻을 거면 주차장에서 기다려라! 거기서 만나자!” 구스가 슬라이더와 아이스에게 외치면서 매버릭을 따라갔다.
“하여튼 저 고집불통!”
슬라이더는 구스와 함께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매버릭은 땀에 절어 들러붙은 청바지가 불편한지 오늘따라 유난히 씰룩거리며 걸었다. 슬라이더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감탄했다.
“이야, 매버릭 쟤 엉덩이가…….”
“…….”
“크흠.”
광대뼈를 찌르는 아이스의 따가운 시선에 슬라이더는 겸연쩍어하며 헛기침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히죽히죽 지어 보이며 아이스에게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아이스, 너 쟤한테 꼴리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너만 꼴리는 거 아니니까 안심해. 매버릭 쟤라면 할 수 있다는 애들이 줄을 섰다, 야.”
슬라이더는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고 거기다가 중지를 쑤셔 넣으며 들락날락했다. 슬라이더의 말대로 벤치에 앉아 경기를 구경하던 몇몇이 매버릭의 뒷모습을 뜨거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눈요깃거리 취급이군.’
아이스는 자신과 같은 증상을 보이는 동기들의 모습에 안심하기는커녕 더욱 불쾌해졌다. 총명하게 빛나던 동기들의 눈동자는 흐릿했고, 유쾌하고 믿음직스럽던 얼굴도 보기 흉했다. 그가 알던 동기들이 아니었다. 아이스는 자신도 저런 덜떨어진 모습으로 매버릭을 탐닉했는가 싶어서 가슴이 콱 죄어들었다.
“우리도 가서 씻자.”
슬라이더가 아이스에게 말했다.
“난 됐어.”
아이스는 힘없이 거절했다.
“왜? 쟤네 다 씻을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시간 아깝잖아.”
“난 관사에 돌아가서 씻을래.”
아이스는 매버릭을 훔쳐보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약 30분 뒤, 주차장에서 네 사람은 다시 만났다. 샤워를 마치고 나타난 구스와 매버릭은 패배의 아픔도 전부 씻겨 내려 상쾌한 모습이었다. 반면에 땡볕에서 하염없이 두 사람을 기다린 아이스와 슬라이더는 더위와 찝찝함에 찌들어 있었다.
“꼴 좀 봐라. 그러니까 너희도 씻지, 왜 안 씻었냐?”
“우린 이미 승리로 샤워했는데 뭘 또 씻어? 너희 같은 2등이나 패배의 때를 씻는 거야.”
구스가 킬킬거리며 놀리자 슬라이더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태연하게 받아쳤다.
“지저분한 놈. 네가 결혼한 게 신기하다.”
구스는 고약한 악취를 맡은 것처럼 코를 씰룩거렸다. 매버릭도 코를 잡아 비틀며 미간을 좁혔다. “냄새나.” 매버릭이 코맹맹이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말없이 담배를 뻑뻑 피우던 중인 아이스는 은근슬쩍 담배를 껐다.
“멍청이 구스, 너도 결혼했는데 이 몸이 왜 결혼을 못 하겠냐? 아무튼 우리가 먼저 출발할 테니까 놓치지 말고 잘 따라와라.”
슬라이더는 아이스와 어깨동무하며 주차한 차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아이스는 끈끈한 우정을 과시하려는 슬라이더의 마음을 외면하며 어깨를 앞으로 기울이고 어깨동무를 풀어버렸다. “야아, 톰…….” 슬라이더가 서운한 눈으로 아이스를 힐끔거리며 울먹이는 체했다. 그가 이러는 게 한두 번이 아니라 아이스는 무시하고 운전석에 올랐다.
“청바지에 이어 돌핀 팬츠라…….”
안전벨트를 매며 슬라이더가 매버릭의 옷차림에 대해서 중얼거렸다. 내도록 그를 무시하던 아이스는 매버릭 이야기에 차 키를 꽂다 말고 멈칫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매버릭 말하는 거야? 요즘 다들 저렇게 입고 다니던데.”
“유행이라서 그래. 끔찍한 유행이지. 다른 놈 불알 두 짝 툭 튀어나온 거랑 거시기 덜렁거리는 것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우웩.”
슬라이더는 팔을 뒤로 젖혀 뒤통수에 깍지를 끼며 구역질했다.
“유행…….”
아이스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무튼 저 자식 엉덩이는 진짜 끝내주네. 남자한테 달리긴 아까운 엉덩인데… 아이스, 매버릭한테 여동생이나 누나 있으면 너한테 소개해달라고 말해볼까?”
슬라이더는 사이드미러에 비친 매버릭을 힐끔 훔쳐보며 말했다.
“적당히 해, 슬라이더. 듣기 거북하다.”
아이스는 쌀쌀하게 말하며 시동을 걸었다. 귓가에 슬라이더가 ‘매버릭 쟤라면 할 수 있다는 애들이 줄을 섰다.’라고 했던 말이 맴돌고, 머릿속에서는 매버릭을 끈적한 눈으로 훔쳐보던 동기들의 얼굴에 어지럽게 떠올랐다.
“것 참, 오늘따라 되게 매몰차게 구네. 알았어. 어디 보자…… 어떤 식당이 괜찮을까? 톰, 넌 뭐 먹고 싶어?”
“〈르 플랑부아양Le Flamboyant〉으로 가자.”
아이스가 말한 식당은 기지에서 차로 약 40분 떨어진 곳에 있는 프랑스 요리 식당이었다. 슬라이더가 가족들이 미라마로 오면 데리고 가려고 미리 점 찍어둔 곳이기도 했다.
“뭐? 거기 비싼 곳이잖아! 오늘 저녁은 내가 산다고 했단 말이야. 아이스 너야 집도 잘 살고, 처자식도 없으니 지갑 사정이 여유로울지 몰라도 난 아냐! 다이너에서 말라비틀어진 치즈버거를 사주는 것도 쪼들린다고!”
슬라이더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서 깍지를 풀고 열변을 토했다.
“내가 계산할게.”
“……비싼 거 먹어도 돼?”
“어, 네 맘대로 해.”
아이스는 무심한 말투로 대꾸하며 클러치 페달을 꾹 밟고, 기어 스틱을 1단으로 당겼다.
11.
르 플랑부아양은 환상 속 반딧불이가 무리 지어 춤추는 운치 있는 곳에 있었다. 대리석처럼 보이는 건물 외관은 흐릿한 주홍 불빛을 받아 황혼처럼 빛났고, 정원수가 바람에 나부끼는 소리가 실크 스카프처럼 잔잔하게 깔렸다.
“이야아아. 슬라이더, 네가 오늘 큰맘 먹었구나? 다시 봤다.”
화려한 실내 장식에 압도당한 구스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아, 실은 아이스가―”
슬라이더가 사실을 털어놓으려고 입을 여는 순간, 아이스가 그의 발을 살짝 걷어찼다.
‘왜? 말하지 마?’
슬라이더가 눈을 끔뻑이며 소리 없이 물었다. 아이스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슬라이더는 아이스가 대체 왜 그러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지만, 일단 그가 시키는대로 천연덕스럽게 거짓말했다.
“그래, 오늘은 내가 사는 거니까 먹고 싶은 거 맘껏 먹어라.”
“잘 먹을게.”
매버릭은 슬라이더의 어깨를 툭툭 치며 쾌활하게 인사했다.
‘슬라이더가 이런 데서 저녁 살 형편이 되나? 아이스면 몰라도 저 자식 오늘 너무 무리하는 것 같은데. 아, 신경 쓰여. 조만간 내가 한 끼 사줘야겠다.’
하지만 속으로는 내심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머리카락이 새빨갛고 깡마른 종업원이 네 사람을 후미진 자리로 안내했다. 네 사람 모두 강렬한 태양에 익어 온몸이 울긋불긋한 데다 편한 옷차림에 슬라이더와 아이스는 시큼한 땀 냄새까지 풍기고 있으니, 노골적으로 홀대한 것이었다. 아이스는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막상 당하고 나니 쓴웃음이 나왔다.
구스와 매버릭은 종업원의 홀대에 그리 연연하지 않았다. 구스는 물 밑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싸움을 신경 쓰는 건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매버릭은 예나 지금이나 그런 사회적인 신호에 대해서 잘 몰랐다. 아이스는 매버릭이 전투기 조종과 구스 외에는 무관심한 사람이라는 것이 이번만큼은 다행스러웠다.
“매브, 오늘은 이거 먹어보는 거 어때?”
메뉴판을 펼친 구스가 손으로 한곳을 집으며 입을 열었다. 매버릭은 구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몸을 숙였다. 그리고 구스가 펼친 페이지를 찾아 자신의 메뉴판을 뒤졌다.
“어떤 거?”
“농어 스테이크. 너 생선 요리는 많이 안 먹어봤잖아.”
“생선……. 농어 스테이크는 어떤 건데? 피쉬 앤 칩스 같은 거야?”
매버릭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물었다. 메뉴판에는 ‘농어를 그릴에 구워 신선한 토마토와 올리브의 향긋한 풍미가 돋보이는 비에르쥬 소스를 곁들인 요리’라는 멋을 부린 문장으로 적힌 알쏭달쏭한 설명이 실려 있었다.
10년 전에, 그러니까 꿈이 아니라 현실 속 시간으로 10년 전쯤에 매버릭은 아이스와 와인 소스를 곁들인 농어 요리를 먹어본 적은 있었다. 그때도 이곳과 비슷한 분위기의 프랑스 식당이었다. 아이스는 종종 매버릭을 이국적인 식당에 데리고 가서 저녁을 사주고는 했다. 아이스 덕분에 처음 먹어본 요리가 참 많았다.
“아냐, 아냐. 영국 놈들이나 먹는 그런 맛없는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스테이크라고.”
구스가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그도 농어 스테이크를 먹어 본 적은 없었다. 우쭐거리는 슬라이더가 밉살스러워서 그를 파산시킬 작정으로 꺼낸 말이었다.
“좋아, 도전해볼게.”
매버릭은 아이스와 먹었던 농어 스테이크를 떠올리며 말했다. 구스는 슬라이더가 절망하리란 생각에 입이 헤벌쭉 찢어졌다.
구스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매버릭의 메뉴판에는 가격이 나와 있지 않았다. 성질이 고약한 종업원이 불량한 청소년들처럼 돌핀 팬츠 차림으로 나타난 매버릭을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여자 손님에게 내는 가격표가 빠진 메뉴판을 줬기 때문이었다.
요즘에는 이런 ‘여성용 메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고, 1980년대에도 고급 식당에서 가격이 적히지 않은 메뉴판을 내놓았다가 고소당한 사례가 있었지만, 암암리에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매버릭은 ‘여성용 메뉴’의 존재를 몰랐고, 이 자리에 그 누구도 매버릭이 여성용 메뉴판을 받았다는 사실도 몰랐다. 매버릭이 농어 스테이크의 가격을 알았다면 다른 요리를 선택했겠지만, 그는 가격을 모르니 대수롭지 않게 구스가 권한대로 농어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야, 구스. 네가 무슨 매버릭 엄마냐? 뭘 그렇게까지 챙겨줘? 매버릭은 혼자서 메뉴도 못 고른대?”
슬라이더는 아이스가 오늘 저녁을 사겠다고 했으니, 가격을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그는 구스의 기대와 달리 반질반질한 얼굴을 앞으로 쑥 들이밀며 핀잔을 줬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갑작스러운 슬라이더의 말에 구스는 우물쭈물했다.
“말해도 돼, 구스. 대단한 일도 아닌걸.”
매버릭은 팔꿈치로 구스를 찌르면서 빙그레 웃었다. 그래도 구스는 마음이 편하지 않은지 삐뚤빼뚤한 앞니를 혀로 쓸며 망설였다.
“이런 걸 내가 말해도 될까 싶다.”
“난 네가 말해도 상관없는데. 네가 말하기 그러면 그냥 내가 직접 말할까?”
“응, 그게 맞는 것 같아.”
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문을 모르는 아이스와 슬라이더는 매버릭을 빤히 바라보며 그가 사정을 설명하기만을 기다렸다.
“입대하기 전에 거의 똑같은 것만 먹었거든. 로스트비프, 피넛버터 젤리 샌드위치, 냉동 피자, 비스킷, 오트밀, 토마토수프, 클램 차우더 수프, 치킨 수프, 시리얼, 써니사이드업……. 그런 거. 입대하고 나서 랍스터를 처음 먹어봤어.”
매버릭은 마치 남의 일을 얘기하는 것처럼, 그것도 누군가가 오늘 아침에 도넛을 사 먹었다는 지극히 일상적인 일을 얘기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가 너무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슬라이더는 비현실적이란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내가 사줬어.”
“맞아, 구스가 사줬어. 내 사정을 알고 구스가 여기저기 데려가줘서 새로운 걸 많이 먹어봤지.”
구스와 매버릭은 손뼉을 마주쳤다.
“그때 캐롤이랑 같이 먹었던 랍스터 맛있었지?”
구스가 씩 웃으며 물었다.
“진짜 맛있었어.”
매버릭은 팔짱을 끼고 의자에 느슨하게 등을 기댔다.
“매버릭, 네 얘기 사실이야? 정말 그런 것만 먹고 살았다고?”
슬라이더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응.”
“왜? 넌 입맛 까다로운 놈도 아니잖아.”
“부모님이 내가 어릴 때 돌아가셔서 위탁가정에서 지냈거든.”
그 말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어, 쟤네 심각해졌네. 이럴 의도는 없었는데… 난 괜찮은데 말이야.’
매버릭의 눈동자가 가파르게 흔들렸다. 아이스와 슬라이더는 서로 심각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그에게 건넬 위로의 말을 궁리했다. 매버릭은 두 사람의 연민이 필요하지 않았고, 부담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미 까마득한 오래전 일 때문에 괴롭지도 않았다. 현재 매버릭의 시점에서 배고프고 서러웠던 과거는 이미 반세기 전의 일이었다.
“캠벨 수프가 날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매버릭은 고민 끝에 어설픈 농담을 던졌다.
“매버릭, 캠벨 사를 고소해라. 네가 캠벨 수프만 먹고 커서 키가 그것밖에 안 자란 거야.”
다행히도 슬라이더가 잽싸게 매버릭의 농담을 받아쳤다. 슬라이더의 말에 발끈한 매버릭이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야!”
“그 위탁가정 보호자도 고소해. 아동학대다.”
슬라이더는 턱을 매만지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실없는 행동에 싸늘했던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졌다. 무표정한 얼굴로 굳어있던 아이스의 입꼬리도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매버릭은 겉으로는 슬라이더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화를 내면서도 속으로는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즐거운 분위기 속에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식당 밖으로 나왔다. 모두 부른 배만큼이나 마음이 풍족했고, 바깥은 낮 동안의 열기가 식어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눈꺼풀을 간질이며 졸음을 불러일으켰다. 매버릭은 기지개를 쭉 켜며 크게 하품했다. 오늘은 현실에 두고 온 0과 1의 유산을 그리워하지 않고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매버릭.”
아이스가 불쑥 매버릭을 불렀다. 매버릭은 팔을 내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또 속을 알 수 없는 불편한 얼굴로 아이스가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즐겁게 대화를 나누다가 왜 돌변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왜?”
“차에 타. 관사까지 데려다줄게.”
“나 바이크 타고 왔는데?”
“그러니까 데려다줄게.”
아이스의 말에 차로 향하던 슬라이더는 우뚝 멈춰 섰고, 구스와 매버릭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스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차분한 어조는 사람들을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었지만, 이 순간은 아니었다.
“음, 오늘 우리가 이겼는데 저녁 식사는 슬라이더가 샀으니까 관사까지 데려다주는 건 내가 할게. 내가 너한테 배구 한판 붙자고 제안하기도 했고.”
“매버릭, 아이스가 지금 뭔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넌센스 퀴즈 같은 아이스의 말에 구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도 몰라.”
매버릭은 어깨를 으쓱했다.
“매너잖아.”
아이스는 궁색하게 덧붙였다. 내뱉고 나서 그는 후회했다. 기껏 생각해낸 이유가 억지스러웠다.
“그런 매너가 있었나?”
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몰라.”
매버릭은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가자.”
판단력을 상실한 아이스는 무턱대고 매버릭을 재촉했다.
“내 바이크는 어떡하고?”
“슬라이더가 있잖아.”
“나더러 매버릭 바이크를 운전하라고?”
슬라이더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구스는?”
“슬라이더가 바래다줄 거야.”
매버릭이 다시 묻자, 아이스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아이스, 날 버리는 거냐?”
“네가 혼자서 집도 못 찾아갈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뜻이 아니잖아!”
슬라이더는 두 팔을 힘껏 올렸다가 내리며 왼발을 땅에 굴렀다.
“이게 지금 무슨 일이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구스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가 생각하기에 지금 벌어진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은 모두가 자신과 매버릭을 골탕 먹이려고 짜고 치는 판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이스가 저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릴 리가 없었다.
구스는 음험한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린 채 숨어있는 동료들을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살펴봐도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반딧불이의 희미한 불빛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얼른 돌아가고 싶은데. 지금 가면 바로 뻗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여기서 더 미적거리면 잠이 깰 것 같은데. 그럼 또 보다만 쇼츠가 생각나서 못 잘 것 같은데. 맞아, HBO에서 그 드라마 다음 시즌 곧 나온다고 했지. 언제였더라? 그것도 보고 싶네.’
충분한 수면과 금단 증상으로부터의 해방이 절실했던 매버릭은 이 상황을 직접 정리하기로 했다.
“이렇게 하자. 슬라이더, 네가 아이스 차로 구스를 관사까지 데려다줘. 아이스는 내가 바이크로 데려다줄게.”
매버릭은 빠른 말씨로 말했다.
“미첼, 내가 널 데려다주는—”
아이스가 입을 열며 사소한 걸 따지려고 들자, 매버릭은 단호하게 그를 가리켰다.
“조용히 해, 카잔스키 대위.”
매버릭의 박력에 놀란 아이스는 얼떨결에 뒷걸음질 치며 입을 다물었다.
“자기야, 복잡하게 뭘 그렇게까지 하냐? 그냥 원래대로 하면 되잖아.”
구스는 매버릭의 팔짱을 끼고 그를 구석으로 데리고 가면서 작게 속삭였다. 매버릭은 발끝에 힘을 주며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텼다.
“구스, 오늘은 슬라이더랑 돌아가. 내일 아침에는 평소처럼 데리러 갈게.”
“매버릭, 아이스 저 자식 우리 몰래 술이라도 마신 게 분명해. 술 취해서 주정 부리는 거야. 주정뱅이 말 듣고 갈라서자고?”
구스가 경악하며 팔짱을 풀고, 새된 목소리로 물었다.
“아냐, 쟤 한 모금도 안 마셨어. 맨정신에 저러는 거야.”
“그럼 더 안되지! 맨정신에 저러는 건데! 널 미친놈이랑 가게 할 순 없어!”
“아무래도 나랑 대화하고 싶어서 저러는 것 같은데, 이참에 아이스랑 ‘대화’ 좀 해볼게.”
아이스가 이상하게 굴긴 했지만, 미친놈은 아닌데……. 매버릭은 마음속으로 아이스를 변호하며 구스를 설득했다.
“아아.”
구스는 일전에 매버릭과 나눴던 대화가 생각이 났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잘 지내보려고 노력하던 매버릭의 모습도 떠올랐다. 이참에 아이스가 매버릭에 대한 오해를 풀고, 편견을 깬다면 매버릭은 남들과 더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돌려 아이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이스는 철로 만든 조형물처럼 서 있었다. 그의 주변만 겨울처럼 냉랭했다.
“알았어.”
구스는 크게 마음먹고 매버릭을 보내주기로 했다.
“가자, 아이스.”
매버릭은 손을 까딱거리며 아이스를 불렀다.
“슬라이더, 여기 차 키.”
“어…… 알았어.”
슬라이더는 아이스가 던진 차 키를 받아들고,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터덜터덜 차로 향했다. 구스는 껑충한 다리로 순식간에 그를 따라잡아 함께 아이스의 차에 탔다.
매버릭은 바이크에 시동을 걸고 발을 까딱거렸다. 아이스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첼.”
“참고로 난 헬멧 같은 거 안 쓰고 다닌다.”
“알고 있어.”
아이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얘기가 잘 통하네.”
매버릭은 피식 웃으며 액셀러레이터를 콱 밟았다. 폭발적인 속도에 몸이 앞으로 쏠린 아이스는 엉겁결에 매버릭의 어깨에 코를 찧고 말았다. 보기에 단단한 그의 어깨는 생각보다 더 좁았고, 뼈가 잗다랬다. 자라다 만 것처럼. 아니면 아직 자라는 중인 것처럼.
“미첼, 속도 줄여.”
매버릭은 전투기를 조종하는 것만큼이나 바이크를 난폭하게 몰았고, 아이스는 그에게 속도를 줄이라고 열 번째이나 부탁했다. 매버릭이 귓등으로도 말을 듣지 않아, 부탁하는 횟수를 거듭하면서 처음에는 완곡했던 아이스의 어조는 점점 더 완고해지고 명령조로 바뀌고 있었다.
“뭐야, 카잔스키. 겨우 이 정도로 겁먹었어?”
“사고 나, 속도 줄여.”
아이스는 빠르게 부서지는 주변의 사물을 노려보며 애써 화를 삼켰다.
“겁먹었냐고.”
매버릭은 새카맣게 탄 아이스의 속도 모르고 마냥 즐거워했다.
“속도 줄여.”
아이스는 차갑게 말했다. 매버릭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다. 오랜 경험으로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니, 추위에 노출된 것처럼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몽환적인 시간에서는 아이스와 자신이 같은 계급인 대위지만, 현실에서는 아이스가 자신의 상관으로 지낸 시간이 더 길었다. 매버릭은 아이스의 명령을 따르는 게 더 익숙했다.
“……아, 성가신 놈. 알았어.”
매버릭은 마지못해 속도를 줄였다.
이제야 주변의 사물과 찬란한 불빛이 아이스의 시야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어제도, 그제도, 일주일 전에도 무심하게 스쳤던 낡은 건물과 칠이 벗겨진 예민한 아스팔트 도로, 느슨하게 휜 가드레일이 특별하게 보였다. 바람결에 매버릭의 샴푸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아이스는 그 향기에 취해 무심코 매버릭을 불렀다.
“미첼.”
“아, 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그 바지 남들 앞에서 입지 마라.”
신경질적인 매버릭의 반응에 울컥한 아이스도 덩달아 퉁명스럽게 쏘아붙이고 말았다. ‘이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아이스는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당황해서 삐질삐질 땀이 쏟아졌다.
“너 그딴 식으로 말하는 거 데이트 폭력이야. 나한텐 상관없는데, 여자들한텐 그러지 마라.”
“데이트 폭력이라고?”
매버릭의 차가운 힐난이 아이스의 가슴속에 선선하게 맺혔다.
“남이 뭘 입던 네가 뭔데 참견이야. 강요하지 마. 넌 보면 남을 조종하려고 들더라.”
매버릭이 별다른 뜻 없이 꺼낸 말에 아이스는 섬뜩함을 느꼈다. 뺨을 타고 흐르던 땀이 차갑게 식었다. 매버릭처럼 자신을 꿰뚫어 본 사람은 난생처음이었다. 은밀한 즐거움이자 본성을 들킨 아이스는 자신의 견고한 요새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공격적인 태도로 돌변했다.
“미첼, 사람들이 네 엉덩이 훔쳐보는 걸 즐겨?”
“씨발, 카잔스키 너 내려.”
아이스가 방어이자 공격으로 내뱉은 말에 매버릭은 이성이 뚝 끊어졌다.
“뭐라고?”
“내리라고.”
매버릭은 갓길에 거칠게 바이크를 세우고, 아이스의 멱살을 잡아채 그를 끌어냈다.
“나더러 관사까지 어떻게 가라고?”
아이스가 입을 열었다.
“걸어서 가든지 택시 잡든지, 지나가는 차 잡든지 네가 알아서 가.”
매버릭은 미간을 한껏 좁히며 성난 눈으로 아이스를 노려보았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그의 눈동자가 아이스에게 선정적으로 다가왔다. 보석처럼 아름다운 불꽃처럼 보였다.
아이스는 매버릭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 외에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었고, 보드카 한 병을 단번에 마신 것처럼 몽롱해졌다. 그는 몸에 힘이 풀려서 그만 비틀거리고 말았다.
매버릭은 논리적인 이유를 들먹이며 자신을 몰아세우리라 예상했던 아이스가 잠자코 있자, 의아해졌다. ‘저 새끼가 왜 저러고 있지? 내가 너무 세게 밀었나?’ 아이스가 머리라도 다친 줄 알고 그에게 손을 뻗던 매버릭은 멈칫했다.
‘근데 여기 외진 데다 어두워서 위험하긴 하겠다.’
세상은 칠흑처럼 어두웠고,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만약에 오늘 아이스가 죽어버리면 구스를 무사히 살려내도 후일에 자신을 지켜 줄 든든한 뒷배가 사라지고 만다. 그러면 스스로 제독들의 쓴소리를 감당하며 그들의 독처럼 뜨겁고 쓰라린 처분을 삼켜야만 한다. ……아이스도 살아야만 했다.
“……아니면 입 다물고 얌전히 내 뒤에 타던가.”
매버릭은 바이크에 올라타며 일부러 시큰둥하게 말했다. 아이스는 잠깐 주변을 살폈다. 이미 주변은 새카만 어둠에 물들었고, 지나가는 차는 이기적으로 헤드라이트를 쏘아대고 있었다. 수상쩍은 번호판도 보였다.
“미첼, 어떤 옷을 입는지는 네가 선택할 권리라고 생각해. 조금 전에는 내가 실언했다. 미안하다.”
판단을 마친 아이스는 매버릭의 뒤에 앉으며 건조하게 사과했다.
“와, 이건 좀 색다른데.”
매버릭은 웃음이 터져 나와 머리를 흔들었다. 문득 그때 생각이 났다. 구스가 죽고 파일럿을 관두려고 라커룸에서 짐을 챙기던 날, 아이스가 자신을 불러세우고 구스의 일은 유감이라고 위로했던 그 날. 아이스도 자신처럼 떨고 있었다. 그의 단단한 턱이, 조심스레 말을 걸어오는 입술이 파르르 떨리던 모습이 기억 속에 선명했다. 생각해 보면 그날부터 아이스를 다시 봤던 것 같다. 그리고 그를 의식하게 됐다. 그의 표정, 말투, 호흡, 뒷모습을.
그리고 매버릭은 마음속으로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만약에 톰 “아이스맨” 카잔스키 사령관이 다른 바지를 입으라고 ‘명령’했다면? 그에게 감히 반박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즉시 갈아입었을 것이다.
“사과받아줄게. 하지만 명심해. 다음은 없어.”
하지만 그건 현실이고, 이건 꿈이니까. 매버릭은 여전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믿었다. 꿈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행복할 리 없으니까.
“어, 알았다.”
아이스는 고개를 숙였다.
다시 가와사키가 아스팔트 위를 미끄러졌다. 탄력을 받은 바퀴는 숨바꼭질하는 것처럼 도로 위를 요리조리 쏘다녔다. 두 사람은 우주로 향하는 탐사선처럼 어제와는 다른 오늘 밤을 비행했다. 이 순간은 아이스에게 매버릭의 체취로, 매버릭에게는 아이스의 숨소리로 가슴속에 새겨졌다.
“그런데 매버릭, 아까 내가 말실수한 걸 데이트 폭력이라고 했잖아.”
아이스는 신선한 공포와 감흥을 불러일으켰던 매버릭의 말을 곱씹으며 입을 열었다.
“응.”
“그럼 우리 데이트하는 건가?”
“도로 내릴래?”
매버릭은 매몰차게 쏘아붙이며 바이크를 우측으로 기울였다.
“아니.”
아이스는 짤막하게 대꾸하며 매버릭의 허리를 자신의 팔로 휘감았다. 매버릭은 아이스가 도로 위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자신의 허리를 붙잡는 줄로만 알았다. 매버릭의 허리는 딱 아이스가 상상했던 대로 납작하고 가늘었다.
“매브.”
“또 왜. 개소리 지껄이면 진짜 버리고 간다.”
매버릭이 험악하게 말했다.
“오늘 농어 스테이크 맛있었어?”
아이스는 다정한 음성으로 물었다. ‘아.’ 순간 매버릭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정말 오래간만에 들어본 아이스의 따뜻한 목소리였다. 그가 투병하며 목소리를 잃어버린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진짜 진짜 맛있었어! 더 주문하고 싶었는데 슬라이더 사정 생각해서 참았어.”
매버릭은 눈물이 날 정도로 기쁜 마음에 잔뜩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그럼 조만간 나랑 또 먹으러 갈래?”
아이스는 매버릭의 높다랗고 천진한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응? 뭐라고? 바람 소리 때문에 못 들었어.”
“내가 저녁 살게, 오늘 갔던 식당 또 가자.”
“아냐, 괜찮아. 오늘 슬라이더가 돈 너무 많이 썼으니까 내일은 내가 살게.”
“내일?”
“응, 진짜 맛있더라. 또 먹을래.”
먹먹한 밤하늘 위에 홀연히 나타난 별똥별이 초록빛 획을 그으며 지상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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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열세 번째 마그네타
10.
새파란 하늘 위로 높이 날아오른 공을 슬라이더의 거칠고 투박한 손이 힘껏 내리쳤다. 네트를 넘어간 공이 사선을 그리며 총알처럼 땅으로 내리꽂혔고, 모래가 부옇게 일어나며 ‘펑’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났다.
뿌연 먼지가 개이며 모래 위에 처박힌 매버릭의 볼품없는 모습이 드러났다. 매버릭은 비뚤어진 선글라스를 고쳐 쓰며 몸을 일으켰다. “매브, 괜찮아?”하고 구스가 달려와서 매버릭을 부축했다. 매버릭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네트 건너편을 노려보았다.
“이―호!”
점수를 내는 데 성공한 슬라이더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함성을 내질렀다. 아이스가 그에게 다가가 하이 파이브를 했다. 두 사람은 기세등등한 얼굴로 매버릭과 구스 쪽을 바라보며 산뜻한 미소를 던졌다. 슬라이더는 손으로 키스를 날리기까지 했다.
“어우, 저 입맛 떨어지는 놈.”
잔뜩 약이 오른 구스가 귀를 후비며 투덜거렸다. 매버릭은 대꾸하지 않고 씩씩거리며 숨을 골랐다. 햇볕에 시뻘겋게 달아오른 그의 상반신은 온통 모래투성이였다.
“매브.”
“…….”
“자기야, 화났어?”
“……응.”
“아유, 이 귀염둥이. 화 풀어.”
구스는 매버릭의 어깨를 팔로 감으며 나긋나긋한 말씨로 그를 어르고 달랬다. 매버릭은 손에 휘감은 끈을 다시 단단하게 동여맸다. 그리고 모래사장에 처박힌 공을 집어 들었다. 그는 새처럼 날아올랐다. 도드라진 갈비뼈가 물결처럼 흔들렸고 툭 튀어나온 날개뼈는 한껏 뒤로 젖혀졌다. 스치는 바람에 매버릭은 해방된 기분을 느꼈다. 꿈속의 꿈이었다.
1점 차이로 치열한 접전이 이어지던 배구 시합은 아이스와 슬라이더의 승리로 끝났다. 매버릭은 자신이 찰리를 만나러 중간에 떠나는 바람에 중단됐던 이 시합에 마침표를 찍었다. 57번 만에, 마침내.
비록 패배는 쓰라렸지만, 미완의 이야기를 완결지었다는 뿌듯함이 그 아픔을 상쇄했다. 매버릭에게 오늘 배구 시합은 단순한 시합이 아니었다. 되풀이되던 꿈에서 처음으로 뒤바뀐 사건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이번에는 구스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했다.
“얘들아!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우리가 이겼으니까, 오늘은 내가 한턱낼게.”
“그래, 좋아. 샤워부터 하고 먹으러 가자.”
승리의 기쁨에 슬라이더가 통 크게도 저녁을 사겠다고 제안했고, 매버릭은 흔쾌히 응했다. 그리고 벤치에 벗어놓은 티셔츠를 챙겼다. 슬라이더가 뒤쫓아 따라오며 찡그린 얼굴로 불만을 토했다.
“계집애처럼 왜 그래? 배고프단 말이야, 저녁 먹고 관사로 돌아가서 씻어. 내가 산다고 하잖아.”
“땀 흘려서 찝찝해.”
“그러게, 누가 이 날씨에 청바지 입고 배구를 하랬나.”
“네가 뭔 상관이야.”
매버릭은 툭 내뱉고는 곧바로 등을 돌려 건물 쪽을 향해 걸어갔다. “너희 안 씻을 거면 주차장에서 기다려라! 거기서 만나자!” 구스가 슬라이더와 아이스에게 외치면서 매버릭을 따라갔다.
“하여튼 저 고집불통!”
슬라이더는 구스와 함께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매버릭은 땀에 절어 들러붙은 청바지가 불편한지 오늘따라 유난히 씰룩거리며 걸었다. 슬라이더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감탄했다.
“이야, 매버릭 쟤 엉덩이가…….”
“…….”
“크흠.”
광대뼈를 찌르는 아이스의 따가운 시선에 슬라이더는 겸연쩍어하며 헛기침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히죽히죽 지어 보이며 아이스에게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아이스, 너 쟤한테 꼴리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너만 꼴리는 거 아니니까 안심해. 매버릭 쟤라면 할 수 있다는 애들이 줄을 섰다, 야.”
슬라이더는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고 거기다가 중지를 쑤셔 넣으며 들락날락했다. 슬라이더의 말대로 벤치에 앉아 경기를 구경하던 몇몇이 매버릭의 뒷모습을 뜨거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눈요깃거리 취급이군.’
아이스는 자신과 같은 증상을 보이는 동기들의 모습에 안심하기는커녕 더욱 불쾌해졌다. 총명하게 빛나던 동기들의 눈동자는 흐릿했고, 유쾌하고 믿음직스럽던 얼굴도 보기 흉했다. 그가 알던 동기들이 아니었다. 아이스는 자신도 저런 덜떨어진 모습으로 매버릭을 탐닉했는가 싶어서 가슴이 콱 죄어들었다.
“우리도 가서 씻자.”
슬라이더가 아이스에게 말했다.
“난 됐어.”
아이스는 힘없이 거절했다.
“왜? 쟤네 다 씻을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시간 아깝잖아.”
“난 관사에 돌아가서 씻을래.”
아이스는 매버릭을 훔쳐보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 * *
약 30분 뒤, 주차장에서 네 사람은 다시 만났다. 샤워를 마치고 나타난 구스와 매버릭은 패배의 아픔도 전부 씻겨 내려 상쾌한 모습이었다. 반면에 땡볕에서 하염없이 두 사람을 기다린 아이스와 슬라이더는 더위와 찝찝함에 찌들어 있었다.
“꼴 좀 봐라. 그러니까 너희도 씻지, 왜 안 씻었냐?”
“우린 이미 승리로 샤워했는데 뭘 또 씻어? 너희 같은 2등이나 패배의 때를 씻는 거야.”
구스가 킬킬거리며 놀리자 슬라이더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태연하게 받아쳤다.
“지저분한 놈. 네가 결혼한 게 신기하다.”
구스는 고약한 악취를 맡은 것처럼 코를 씰룩거렸다. 매버릭도 코를 잡아 비틀며 미간을 좁혔다. “냄새나.” 매버릭이 코맹맹이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말없이 담배를 뻑뻑 피우던 중인 아이스는 은근슬쩍 담배를 껐다.
“멍청이 구스, 너도 결혼했는데 이 몸이 왜 결혼을 못 하겠냐? 아무튼 우리가 먼저 출발할 테니까 놓치지 말고 잘 따라와라.”
슬라이더는 아이스와 어깨동무하며 주차한 차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아이스는 끈끈한 우정을 과시하려는 슬라이더의 마음을 외면하며 어깨를 앞으로 기울이고 어깨동무를 풀어버렸다. “야아, 톰…….” 슬라이더가 서운한 눈으로 아이스를 힐끔거리며 울먹이는 체했다. 그가 이러는 게 한두 번이 아니라 아이스는 무시하고 운전석에 올랐다.
“청바지에 이어 돌핀 팬츠라…….”
안전벨트를 매며 슬라이더가 매버릭의 옷차림에 대해서 중얼거렸다. 내도록 그를 무시하던 아이스는 매버릭 이야기에 차 키를 꽂다 말고 멈칫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매버릭 말하는 거야? 요즘 다들 저렇게 입고 다니던데.”
“유행이라서 그래. 끔찍한 유행이지. 다른 놈 불알 두 짝 툭 튀어나온 거랑 거시기 덜렁거리는 것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우웩.”
슬라이더는 팔을 뒤로 젖혀 뒤통수에 깍지를 끼며 구역질했다.
“유행…….”
아이스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무튼 저 자식 엉덩이는 진짜 끝내주네. 남자한테 달리긴 아까운 엉덩인데… 아이스, 매버릭한테 여동생이나 누나 있으면 너한테 소개해달라고 말해볼까?”
슬라이더는 사이드미러에 비친 매버릭을 힐끔 훔쳐보며 말했다.
“적당히 해, 슬라이더. 듣기 거북하다.”
아이스는 쌀쌀하게 말하며 시동을 걸었다. 귓가에 슬라이더가 ‘매버릭 쟤라면 할 수 있다는 애들이 줄을 섰다.’라고 했던 말이 맴돌고, 머릿속에서는 매버릭을 끈적한 눈으로 훔쳐보던 동기들의 얼굴에 어지럽게 떠올랐다.
“것 참, 오늘따라 되게 매몰차게 구네. 알았어. 어디 보자…… 어떤 식당이 괜찮을까? 톰, 넌 뭐 먹고 싶어?”
“〈르 플랑부아양Le Flamboyant〉으로 가자.”
아이스가 말한 식당은 기지에서 차로 약 40분 떨어진 곳에 있는 프랑스 요리 식당이었다. 슬라이더가 가족들이 미라마로 오면 데리고 가려고 미리 점 찍어둔 곳이기도 했다.
“뭐? 거기 비싼 곳이잖아! 오늘 저녁은 내가 산다고 했단 말이야. 아이스 너야 집도 잘 살고, 처자식도 없으니 지갑 사정이 여유로울지 몰라도 난 아냐! 다이너에서 말라비틀어진 치즈버거를 사주는 것도 쪼들린다고!”
슬라이더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서 깍지를 풀고 열변을 토했다.
“내가 계산할게.”
“……비싼 거 먹어도 돼?”
“어, 네 맘대로 해.”
아이스는 무심한 말투로 대꾸하며 클러치 페달을 꾹 밟고, 기어 스틱을 1단으로 당겼다.
11.
르 플랑부아양은 환상 속 반딧불이가 무리 지어 춤추는 운치 있는 곳에 있었다. 대리석처럼 보이는 건물 외관은 흐릿한 주홍 불빛을 받아 황혼처럼 빛났고, 정원수가 바람에 나부끼는 소리가 실크 스카프처럼 잔잔하게 깔렸다.
“이야아아. 슬라이더, 네가 오늘 큰맘 먹었구나? 다시 봤다.”
화려한 실내 장식에 압도당한 구스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아, 실은 아이스가―”
슬라이더가 사실을 털어놓으려고 입을 여는 순간, 아이스가 그의 발을 살짝 걷어찼다.
‘왜? 말하지 마?’
슬라이더가 눈을 끔뻑이며 소리 없이 물었다. 아이스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슬라이더는 아이스가 대체 왜 그러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지만, 일단 그가 시키는대로 천연덕스럽게 거짓말했다.
“그래, 오늘은 내가 사는 거니까 먹고 싶은 거 맘껏 먹어라.”
“잘 먹을게.”
매버릭은 슬라이더의 어깨를 툭툭 치며 쾌활하게 인사했다.
‘슬라이더가 이런 데서 저녁 살 형편이 되나? 아이스면 몰라도 저 자식 오늘 너무 무리하는 것 같은데. 아, 신경 쓰여. 조만간 내가 한 끼 사줘야겠다.’
하지만 속으로는 내심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머리카락이 새빨갛고 깡마른 종업원이 네 사람을 후미진 자리로 안내했다. 네 사람 모두 강렬한 태양에 익어 온몸이 울긋불긋한 데다 편한 옷차림에 슬라이더와 아이스는 시큼한 땀 냄새까지 풍기고 있으니, 노골적으로 홀대한 것이었다. 아이스는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막상 당하고 나니 쓴웃음이 나왔다.
구스와 매버릭은 종업원의 홀대에 그리 연연하지 않았다. 구스는 물 밑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싸움을 신경 쓰는 건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매버릭은 예나 지금이나 그런 사회적인 신호에 대해서 잘 몰랐다. 아이스는 매버릭이 전투기 조종과 구스 외에는 무관심한 사람이라는 것이 이번만큼은 다행스러웠다.
“매브, 오늘은 이거 먹어보는 거 어때?”
메뉴판을 펼친 구스가 손으로 한곳을 집으며 입을 열었다. 매버릭은 구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몸을 숙였다. 그리고 구스가 펼친 페이지를 찾아 자신의 메뉴판을 뒤졌다.
“어떤 거?”
“농어 스테이크. 너 생선 요리는 많이 안 먹어봤잖아.”
“생선……. 농어 스테이크는 어떤 건데? 피쉬 앤 칩스 같은 거야?”
매버릭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물었다. 메뉴판에는 ‘농어를 그릴에 구워 신선한 토마토와 올리브의 향긋한 풍미가 돋보이는 비에르쥬 소스를 곁들인 요리’라는 멋을 부린 문장으로 적힌 알쏭달쏭한 설명이 실려 있었다.
10년 전에, 그러니까 꿈이 아니라 현실 속 시간으로 10년 전쯤에 매버릭은 아이스와 와인 소스를 곁들인 농어 요리를 먹어본 적은 있었다. 그때도 이곳과 비슷한 분위기의 프랑스 식당이었다. 아이스는 종종 매버릭을 이국적인 식당에 데리고 가서 저녁을 사주고는 했다. 아이스 덕분에 처음 먹어본 요리가 참 많았다.
“아냐, 아냐. 영국 놈들이나 먹는 그런 맛없는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스테이크라고.”
구스가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그도 농어 스테이크를 먹어 본 적은 없었다. 우쭐거리는 슬라이더가 밉살스러워서 그를 파산시킬 작정으로 꺼낸 말이었다.
“좋아, 도전해볼게.”
매버릭은 아이스와 먹었던 농어 스테이크를 떠올리며 말했다. 구스는 슬라이더가 절망하리란 생각에 입이 헤벌쭉 찢어졌다.
구스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매버릭의 메뉴판에는 가격이 나와 있지 않았다. 성질이 고약한 종업원이 불량한 청소년들처럼 돌핀 팬츠 차림으로 나타난 매버릭을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여자 손님에게 내는 가격표가 빠진 메뉴판을 줬기 때문이었다.
요즘에는 이런 ‘여성용 메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고, 1980년대에도 고급 식당에서 가격이 적히지 않은 메뉴판을 내놓았다가 고소당한 사례가 있었지만, 암암리에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매버릭은 ‘여성용 메뉴’의 존재를 몰랐고, 이 자리에 그 누구도 매버릭이 여성용 메뉴판을 받았다는 사실도 몰랐다. 매버릭이 농어 스테이크의 가격을 알았다면 다른 요리를 선택했겠지만, 그는 가격을 모르니 대수롭지 않게 구스가 권한대로 농어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야, 구스. 네가 무슨 매버릭 엄마냐? 뭘 그렇게까지 챙겨줘? 매버릭은 혼자서 메뉴도 못 고른대?”
슬라이더는 아이스가 오늘 저녁을 사겠다고 했으니, 가격을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그는 구스의 기대와 달리 반질반질한 얼굴을 앞으로 쑥 들이밀며 핀잔을 줬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갑작스러운 슬라이더의 말에 구스는 우물쭈물했다.
“말해도 돼, 구스. 대단한 일도 아닌걸.”
매버릭은 팔꿈치로 구스를 찌르면서 빙그레 웃었다. 그래도 구스는 마음이 편하지 않은지 삐뚤빼뚤한 앞니를 혀로 쓸며 망설였다.
“이런 걸 내가 말해도 될까 싶다.”
“난 네가 말해도 상관없는데. 네가 말하기 그러면 그냥 내가 직접 말할까?”
“응, 그게 맞는 것 같아.”
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문을 모르는 아이스와 슬라이더는 매버릭을 빤히 바라보며 그가 사정을 설명하기만을 기다렸다.
“입대하기 전에 거의 똑같은 것만 먹었거든. 로스트비프, 피넛버터 젤리 샌드위치, 냉동 피자, 비스킷, 오트밀, 토마토수프, 클램 차우더 수프, 치킨 수프, 시리얼, 써니사이드업……. 그런 거. 입대하고 나서 랍스터를 처음 먹어봤어.”
매버릭은 마치 남의 일을 얘기하는 것처럼, 그것도 누군가가 오늘 아침에 도넛을 사 먹었다는 지극히 일상적인 일을 얘기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가 너무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슬라이더는 비현실적이란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내가 사줬어.”
“맞아, 구스가 사줬어. 내 사정을 알고 구스가 여기저기 데려가줘서 새로운 걸 많이 먹어봤지.”
구스와 매버릭은 손뼉을 마주쳤다.
“그때 캐롤이랑 같이 먹었던 랍스터 맛있었지?”
구스가 씩 웃으며 물었다.
“진짜 맛있었어.”
매버릭은 팔짱을 끼고 의자에 느슨하게 등을 기댔다.
“매버릭, 네 얘기 사실이야? 정말 그런 것만 먹고 살았다고?”
슬라이더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응.”
“왜? 넌 입맛 까다로운 놈도 아니잖아.”
“부모님이 내가 어릴 때 돌아가셔서 위탁가정에서 지냈거든.”
그 말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어, 쟤네 심각해졌네. 이럴 의도는 없었는데… 난 괜찮은데 말이야.’
매버릭의 눈동자가 가파르게 흔들렸다. 아이스와 슬라이더는 서로 심각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그에게 건넬 위로의 말을 궁리했다. 매버릭은 두 사람의 연민이 필요하지 않았고, 부담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미 까마득한 오래전 일 때문에 괴롭지도 않았다. 현재 매버릭의 시점에서 배고프고 서러웠던 과거는 이미 반세기 전의 일이었다.
“캠벨 수프가 날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매버릭은 고민 끝에 어설픈 농담을 던졌다.
“매버릭, 캠벨 사를 고소해라. 네가 캠벨 수프만 먹고 커서 키가 그것밖에 안 자란 거야.”
다행히도 슬라이더가 잽싸게 매버릭의 농담을 받아쳤다. 슬라이더의 말에 발끈한 매버릭이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야!”
“그 위탁가정 보호자도 고소해. 아동학대다.”
슬라이더는 턱을 매만지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실없는 행동에 싸늘했던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졌다. 무표정한 얼굴로 굳어있던 아이스의 입꼬리도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매버릭은 겉으로는 슬라이더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화를 내면서도 속으로는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 * *
즐거운 분위기 속에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식당 밖으로 나왔다. 모두 부른 배만큼이나 마음이 풍족했고, 바깥은 낮 동안의 열기가 식어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눈꺼풀을 간질이며 졸음을 불러일으켰다. 매버릭은 기지개를 쭉 켜며 크게 하품했다. 오늘은 현실에 두고 온 0과 1의 유산을 그리워하지 않고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매버릭.”
아이스가 불쑥 매버릭을 불렀다. 매버릭은 팔을 내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또 속을 알 수 없는 불편한 얼굴로 아이스가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즐겁게 대화를 나누다가 왜 돌변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왜?”
“차에 타. 관사까지 데려다줄게.”
“나 바이크 타고 왔는데?”
“그러니까 데려다줄게.”
아이스의 말에 차로 향하던 슬라이더는 우뚝 멈춰 섰고, 구스와 매버릭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스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차분한 어조는 사람들을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었지만, 이 순간은 아니었다.
“음, 오늘 우리가 이겼는데 저녁 식사는 슬라이더가 샀으니까 관사까지 데려다주는 건 내가 할게. 내가 너한테 배구 한판 붙자고 제안하기도 했고.”
“매버릭, 아이스가 지금 뭔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넌센스 퀴즈 같은 아이스의 말에 구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도 몰라.”
매버릭은 어깨를 으쓱했다.
“매너잖아.”
아이스는 궁색하게 덧붙였다. 내뱉고 나서 그는 후회했다. 기껏 생각해낸 이유가 억지스러웠다.
“그런 매너가 있었나?”
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몰라.”
매버릭은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가자.”
판단력을 상실한 아이스는 무턱대고 매버릭을 재촉했다.
“내 바이크는 어떡하고?”
“슬라이더가 있잖아.”
“나더러 매버릭 바이크를 운전하라고?”
슬라이더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구스는?”
“슬라이더가 바래다줄 거야.”
매버릭이 다시 묻자, 아이스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아이스, 날 버리는 거냐?”
“네가 혼자서 집도 못 찾아갈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뜻이 아니잖아!”
슬라이더는 두 팔을 힘껏 올렸다가 내리며 왼발을 땅에 굴렀다.
“이게 지금 무슨 일이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구스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가 생각하기에 지금 벌어진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은 모두가 자신과 매버릭을 골탕 먹이려고 짜고 치는 판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이스가 저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릴 리가 없었다.
구스는 음험한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린 채 숨어있는 동료들을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살펴봐도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반딧불이의 희미한 불빛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얼른 돌아가고 싶은데. 지금 가면 바로 뻗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여기서 더 미적거리면 잠이 깰 것 같은데. 그럼 또 보다만 쇼츠가 생각나서 못 잘 것 같은데. 맞아, HBO에서 그 드라마 다음 시즌 곧 나온다고 했지. 언제였더라? 그것도 보고 싶네.’
충분한 수면과 금단 증상으로부터의 해방이 절실했던 매버릭은 이 상황을 직접 정리하기로 했다.
“이렇게 하자. 슬라이더, 네가 아이스 차로 구스를 관사까지 데려다줘. 아이스는 내가 바이크로 데려다줄게.”
매버릭은 빠른 말씨로 말했다.
“미첼, 내가 널 데려다주는—”
아이스가 입을 열며 사소한 걸 따지려고 들자, 매버릭은 단호하게 그를 가리켰다.
“조용히 해, 카잔스키 대위.”
매버릭의 박력에 놀란 아이스는 얼떨결에 뒷걸음질 치며 입을 다물었다.
“자기야, 복잡하게 뭘 그렇게까지 하냐? 그냥 원래대로 하면 되잖아.”
구스는 매버릭의 팔짱을 끼고 그를 구석으로 데리고 가면서 작게 속삭였다. 매버릭은 발끝에 힘을 주며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텼다.
“구스, 오늘은 슬라이더랑 돌아가. 내일 아침에는 평소처럼 데리러 갈게.”
“매버릭, 아이스 저 자식 우리 몰래 술이라도 마신 게 분명해. 술 취해서 주정 부리는 거야. 주정뱅이 말 듣고 갈라서자고?”
구스가 경악하며 팔짱을 풀고, 새된 목소리로 물었다.
“아냐, 쟤 한 모금도 안 마셨어. 맨정신에 저러는 거야.”
“그럼 더 안되지! 맨정신에 저러는 건데! 널 미친놈이랑 가게 할 순 없어!”
“아무래도 나랑 대화하고 싶어서 저러는 것 같은데, 이참에 아이스랑 ‘대화’ 좀 해볼게.”
아이스가 이상하게 굴긴 했지만, 미친놈은 아닌데……. 매버릭은 마음속으로 아이스를 변호하며 구스를 설득했다.
“아아.”
구스는 일전에 매버릭과 나눴던 대화가 생각이 났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잘 지내보려고 노력하던 매버릭의 모습도 떠올랐다. 이참에 아이스가 매버릭에 대한 오해를 풀고, 편견을 깬다면 매버릭은 남들과 더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돌려 아이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이스는 철로 만든 조형물처럼 서 있었다. 그의 주변만 겨울처럼 냉랭했다.
“알았어.”
구스는 크게 마음먹고 매버릭을 보내주기로 했다.
“가자, 아이스.”
매버릭은 손을 까딱거리며 아이스를 불렀다.
“슬라이더, 여기 차 키.”
“어…… 알았어.”
슬라이더는 아이스가 던진 차 키를 받아들고,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터덜터덜 차로 향했다. 구스는 껑충한 다리로 순식간에 그를 따라잡아 함께 아이스의 차에 탔다.
매버릭은 바이크에 시동을 걸고 발을 까딱거렸다. 아이스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첼.”
“참고로 난 헬멧 같은 거 안 쓰고 다닌다.”
“알고 있어.”
아이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얘기가 잘 통하네.”
매버릭은 피식 웃으며 액셀러레이터를 콱 밟았다. 폭발적인 속도에 몸이 앞으로 쏠린 아이스는 엉겁결에 매버릭의 어깨에 코를 찧고 말았다. 보기에 단단한 그의 어깨는 생각보다 더 좁았고, 뼈가 잗다랬다. 자라다 만 것처럼. 아니면 아직 자라는 중인 것처럼.
* * *
“미첼, 속도 줄여.”
매버릭은 전투기를 조종하는 것만큼이나 바이크를 난폭하게 몰았고, 아이스는 그에게 속도를 줄이라고 열 번째이나 부탁했다. 매버릭이 귓등으로도 말을 듣지 않아, 부탁하는 횟수를 거듭하면서 처음에는 완곡했던 아이스의 어조는 점점 더 완고해지고 명령조로 바뀌고 있었다.
“뭐야, 카잔스키. 겨우 이 정도로 겁먹었어?”
“사고 나, 속도 줄여.”
아이스는 빠르게 부서지는 주변의 사물을 노려보며 애써 화를 삼켰다.
“겁먹었냐고.”
매버릭은 새카맣게 탄 아이스의 속도 모르고 마냥 즐거워했다.
“속도 줄여.”
아이스는 차갑게 말했다. 매버릭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다. 오랜 경험으로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니, 추위에 노출된 것처럼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몽환적인 시간에서는 아이스와 자신이 같은 계급인 대위지만, 현실에서는 아이스가 자신의 상관으로 지낸 시간이 더 길었다. 매버릭은 아이스의 명령을 따르는 게 더 익숙했다.
“……아, 성가신 놈. 알았어.”
매버릭은 마지못해 속도를 줄였다.
이제야 주변의 사물과 찬란한 불빛이 아이스의 시야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어제도, 그제도, 일주일 전에도 무심하게 스쳤던 낡은 건물과 칠이 벗겨진 예민한 아스팔트 도로, 느슨하게 휜 가드레일이 특별하게 보였다. 바람결에 매버릭의 샴푸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아이스는 그 향기에 취해 무심코 매버릭을 불렀다.
“미첼.”
“아, 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그 바지 남들 앞에서 입지 마라.”
신경질적인 매버릭의 반응에 울컥한 아이스도 덩달아 퉁명스럽게 쏘아붙이고 말았다. ‘이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아이스는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당황해서 삐질삐질 땀이 쏟아졌다.
“너 그딴 식으로 말하는 거 데이트 폭력이야. 나한텐 상관없는데, 여자들한텐 그러지 마라.”
“데이트 폭력이라고?”
매버릭의 차가운 힐난이 아이스의 가슴속에 선선하게 맺혔다.
“남이 뭘 입던 네가 뭔데 참견이야. 강요하지 마. 넌 보면 남을 조종하려고 들더라.”
매버릭이 별다른 뜻 없이 꺼낸 말에 아이스는 섬뜩함을 느꼈다. 뺨을 타고 흐르던 땀이 차갑게 식었다. 매버릭처럼 자신을 꿰뚫어 본 사람은 난생처음이었다. 은밀한 즐거움이자 본성을 들킨 아이스는 자신의 견고한 요새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공격적인 태도로 돌변했다.
“미첼, 사람들이 네 엉덩이 훔쳐보는 걸 즐겨?”
“씨발, 카잔스키 너 내려.”
아이스가 방어이자 공격으로 내뱉은 말에 매버릭은 이성이 뚝 끊어졌다.
“뭐라고?”
“내리라고.”
매버릭은 갓길에 거칠게 바이크를 세우고, 아이스의 멱살을 잡아채 그를 끌어냈다.
“나더러 관사까지 어떻게 가라고?”
아이스가 입을 열었다.
“걸어서 가든지 택시 잡든지, 지나가는 차 잡든지 네가 알아서 가.”
매버릭은 미간을 한껏 좁히며 성난 눈으로 아이스를 노려보았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그의 눈동자가 아이스에게 선정적으로 다가왔다. 보석처럼 아름다운 불꽃처럼 보였다.
아이스는 매버릭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 외에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었고, 보드카 한 병을 단번에 마신 것처럼 몽롱해졌다. 그는 몸에 힘이 풀려서 그만 비틀거리고 말았다.
매버릭은 논리적인 이유를 들먹이며 자신을 몰아세우리라 예상했던 아이스가 잠자코 있자, 의아해졌다. ‘저 새끼가 왜 저러고 있지? 내가 너무 세게 밀었나?’ 아이스가 머리라도 다친 줄 알고 그에게 손을 뻗던 매버릭은 멈칫했다.
‘근데 여기 외진 데다 어두워서 위험하긴 하겠다.’
세상은 칠흑처럼 어두웠고,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만약에 오늘 아이스가 죽어버리면 구스를 무사히 살려내도 후일에 자신을 지켜 줄 든든한 뒷배가 사라지고 만다. 그러면 스스로 제독들의 쓴소리를 감당하며 그들의 독처럼 뜨겁고 쓰라린 처분을 삼켜야만 한다. ……아이스도 살아야만 했다.
“……아니면 입 다물고 얌전히 내 뒤에 타던가.”
매버릭은 바이크에 올라타며 일부러 시큰둥하게 말했다. 아이스는 잠깐 주변을 살폈다. 이미 주변은 새카만 어둠에 물들었고, 지나가는 차는 이기적으로 헤드라이트를 쏘아대고 있었다. 수상쩍은 번호판도 보였다.
“미첼, 어떤 옷을 입는지는 네가 선택할 권리라고 생각해. 조금 전에는 내가 실언했다. 미안하다.”
판단을 마친 아이스는 매버릭의 뒤에 앉으며 건조하게 사과했다.
“와, 이건 좀 색다른데.”
매버릭은 웃음이 터져 나와 머리를 흔들었다. 문득 그때 생각이 났다. 구스가 죽고 파일럿을 관두려고 라커룸에서 짐을 챙기던 날, 아이스가 자신을 불러세우고 구스의 일은 유감이라고 위로했던 그 날. 아이스도 자신처럼 떨고 있었다. 그의 단단한 턱이, 조심스레 말을 걸어오는 입술이 파르르 떨리던 모습이 기억 속에 선명했다. 생각해 보면 그날부터 아이스를 다시 봤던 것 같다. 그리고 그를 의식하게 됐다. 그의 표정, 말투, 호흡, 뒷모습을.
그리고 매버릭은 마음속으로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만약에 톰 “아이스맨” 카잔스키 사령관이 다른 바지를 입으라고 ‘명령’했다면? 그에게 감히 반박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즉시 갈아입었을 것이다.
“사과받아줄게. 하지만 명심해. 다음은 없어.”
하지만 그건 현실이고, 이건 꿈이니까. 매버릭은 여전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믿었다. 꿈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행복할 리 없으니까.
“어, 알았다.”
아이스는 고개를 숙였다.
다시 가와사키가 아스팔트 위를 미끄러졌다. 탄력을 받은 바퀴는 숨바꼭질하는 것처럼 도로 위를 요리조리 쏘다녔다. 두 사람은 우주로 향하는 탐사선처럼 어제와는 다른 오늘 밤을 비행했다. 이 순간은 아이스에게 매버릭의 체취로, 매버릭에게는 아이스의 숨소리로 가슴속에 새겨졌다.
“그런데 매버릭, 아까 내가 말실수한 걸 데이트 폭력이라고 했잖아.”
아이스는 신선한 공포와 감흥을 불러일으켰던 매버릭의 말을 곱씹으며 입을 열었다.
“응.”
“그럼 우리 데이트하는 건가?”
“도로 내릴래?”
매버릭은 매몰차게 쏘아붙이며 바이크를 우측으로 기울였다.
“아니.”
아이스는 짤막하게 대꾸하며 매버릭의 허리를 자신의 팔로 휘감았다. 매버릭은 아이스가 도로 위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자신의 허리를 붙잡는 줄로만 알았다. 매버릭의 허리는 딱 아이스가 상상했던 대로 납작하고 가늘었다.
“매브.”
“또 왜. 개소리 지껄이면 진짜 버리고 간다.”
매버릭이 험악하게 말했다.
“오늘 농어 스테이크 맛있었어?”
아이스는 다정한 음성으로 물었다. ‘아.’ 순간 매버릭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정말 오래간만에 들어본 아이스의 따뜻한 목소리였다. 그가 투병하며 목소리를 잃어버린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진짜 진짜 맛있었어! 더 주문하고 싶었는데 슬라이더 사정 생각해서 참았어.”
매버릭은 눈물이 날 정도로 기쁜 마음에 잔뜩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그럼 조만간 나랑 또 먹으러 갈래?”
아이스는 매버릭의 높다랗고 천진한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응? 뭐라고? 바람 소리 때문에 못 들었어.”
“내가 저녁 살게, 오늘 갔던 식당 또 가자.”
“아냐, 괜찮아. 오늘 슬라이더가 돈 너무 많이 썼으니까 내일은 내가 살게.”
“내일?”
“응, 진짜 맛있더라. 또 먹을래.”
먹먹한 밤하늘 위에 홀연히 나타난 별똥별이 초록빛 획을 그으며 지상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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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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