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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1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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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리사이클이 탑건을 그만뒀다. 대외적으로는 개인적인 사정 때문이라고 했다. 그 개인적인 사정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 소식을 매버릭에게 전한 사람은 구스였다. 구스는 양팔을 날개를 푸덕거리는 것처럼 부산스럽게 흔들며 강의실로 매버릭을 찾아왔다.
“매버릭, 소식 들었어? 리사이클이 그만뒀대.”
“걔가 누군데?”
강의실의 비좁은 책상에 앉아 교재 귀퉁이에 낙서하느라 정신이 팔렸던 매버릭은 건성으로 대꾸했다. 바이퍼가 교전을 금지하는 바람에 꼼짝없이 강의실에 갇혀 낡디낡은 교본을 뒤적이며 이론을 완벽하게 습득하는 것이 매버릭이 징계를 대처하는 방법이었다.
“오, 제법 모양이 나오네?”
구스가 매버릭의 낙서를 힐끔 봤다. 매버릭은 귀퉁이를 한 손으로 고정하고 반대쪽 손으로 드르르 빠르게 책장을 넘겨 자신이 만든 조잡한 애니메이션을 구스에게 보여주었다. 애니메이션의 내용은 얼굴이 넙데데한 고양이가 영리한 다람쥐에게 골탕을 먹는다는 이야기였다.
“그치?”
매버릭이 우쭐거리면서 은근히 칭찬을 강요했다.
“너한테 이런 재능이 있을 줄이야.”
구스는 매버릭이 기대했던 대로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참, 근데 리사이클이 누구야?”
매버릭은 자신이 만든 애니메이션을 다시 빠르게 돌려보며, 여전히 감탄에 빠진 으스대는 얼굴로 물었다.
“왜, 얼마 전에 너한테 ‘야옹아, 우유줄까?’ 하면서 껄떡거린 놈.”
“아아, 그 자식.”
매버릭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잔뜩 열이 올랐던 구스는 예기치 못한 그의 반응에 그만 맥이 탁 풀렸다.
“……매버릭. 너 그 새끼 콜사인도 몰랐어?”
구스가 허탈한 목소리로 묻자, 매버릭은 교재를 탁탁 펼쳐 바르게 정리한 다음, 구스를 빤히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중요한 친구야?”
“이제는 아니지.”
구스는 매버릭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비행 금지를 당해서 의기소침하리라는 구스의 예상과 달리 매버릭은 그럭저럭 잘 지냈다. 남들이 출격하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고 그에게 허락된 이 비좁은 강의실에 갇혀 매일 자신의 오만하고 성급한 판단에 대한 반성문을 쓰고, 톰캣의 교본을 암기하며 낮을 보냈다.
살면서 요즘처럼 한가했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매버릭은 새삼 자신은 브레이크를 밟는 법을 몰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엔진이 과열되어 터져도, 타이어의 요철이 닳아 위험천만하게 미끄러져도, 사는 게 다 이처럼 녹록지 않다고 생각하며 멈추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다.
가와사키에서 내려와 남들처럼 걷게 되니 세상은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바이퍼의 징계를 받고, 처음에는 지루해서 미쳐버릴지도 모른다고 지레 겁을 먹었다. 하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생각보다 재밌는 일이 많았다.
불이 피어오르는 발원지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관조하는 태도를 고수하니 그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왔다. 이 꿈을 수십 번이나 꿨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꽤 신선한 경험이었다.
예를 들어 할리우드와 울프맨의 경우는 겉보기와는 달리 할리우드가 울프맨에게 잡혀 사는 무능력한 가장이다. 울프맨이 팔짱을 끼고 입을 꾹 다물면, 할리우드는 제자리에서 발만 동동 구르면서 가련한 눈으로 울프맨에게 무언가를 호소하지만, 결국 울프맨의 뜻을 꺾지 못하고 그가 하자는 대로 따르고 만다.
알고 보니, 할리우드에게는 아픈 여동생이 있었고 울프맨이 그녀의 수술비를 아무런 조건 없이 선뜻 내놓았다고 했다. 할리우드의 여동생은 자신에게도 친동생이나 마찬가지라면서 말이다. 두 사람을 수십 년 동안 알고 지냈지만,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매버릭은 자신이 주변에 참 무관심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치퍼와 선다운은 교과서에 실어도 될 법한 이상적인 팀이었다. 두 사람은 의견 충돌이 잦은 편이었지만, 항상 타협안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타협안을 이행하는 과정에서는 절대 반목하지 않고 한 몸인 것처럼 목표를 달성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바이퍼는 자신에게 제아무리 잘난 놈이라고 할지라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려고 했던 걸까. 실제로 매버릭은 자신의 대인관계가 이 나이가 되도록 협소하기 짝이 없으며, 사람을 대하는 방식 역시 미숙하다는 사실을 매일매일 깨닫는 중이었다.
애송이라고 무시했던 젊은 동기들이 지내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새로 알게 된 사실이 많았다. 물론 그들에게서 배울 점도 제법 많이 찾아냈다. 과연 동기들의 장점을 인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행에 옮길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남아 있긴 했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 보게 된 것은 아이스였다.
“아이스! 이번에도 제스터를 잡았다며?”
아이스가 강의실로 들어오자마자, 울프맨부터 시작해서 각자 자리에서 딴청을 피우던 동기들이 우르르 그에게 몰려들었다.
“그래. 어떻게 알았어?”
아이스는 특유의 점잖은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벌써 소문이 자자해. 제스터가 5분 만에 잡힌 건 처음이라고 말이야.”
“역시 이번에 수석은 너랑 슬라이더 차지가 되려나.”
울프맨과 할리우드는 아이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를 추켜세웠다.
“끝까지 가봐야 알지. 다들 만만한 상대가 아니잖아.”
아이스는 씩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면서 힐끔, 구석에 앉아 반성문을 끄적이는 매버릭을 훔쳐보았다. 아이스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매버릭은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매버릭은 자신의 눈에 띄지 말라는 아이스의 경고를 잘 따르는 중이었다. 아이스와 반목해서 자신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울프맨과 할리우드는 아이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꼭 숙제를 검사받는 유치원생처럼 초조해 보였다. 혹은 오늘 밤 황제에게 간택 받길 바라는 중국의 후궁처럼 안달이 난 것 같기도 했다. 그 모습에 매버릭은 속이 좀 메스꺼워졌다.
“그래도 뭐, 말은 고맙다. 듣기 좋네.”
아이스가 울프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울프맨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선택받지 못한 할리우드는 반대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참, 할리. 일전에 내가 소개해준 의사는 어때? 줄리아가 마음에 든대?”하고 아이스가 할리우드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할리우드는 순식간에 복권에 당첨된 사람처럼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다.
곧 다른 사람들도 아이스에게 그가 묻지도 않은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이스는 기억력이 대단히 뛰어났다. 남들은 한 번 듣고 잊어버릴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기억했고, 그가 사소한 일을 언급할 때마다 상대방은 감동에 겨워 아이스를 숭배하듯이 우러러보았다.
“대장 납셨네, 아주.”
구스가 비아냥거렸다.
“그러게.”
매버릭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조금 전부터 동기들을 방패 삼아 계속 아이스를 훔쳐보는 중이었다. 관심에 목이 마른 이들이 너도나도 손을 들며 나선 덕분에 아이스는 자신을 보지 못했고, 그래서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아이스가 사람들을 상대하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반성문을 쓰는 것보다는 확실히 재밌는 일이었다. 저런 게 ‘남자들’의 세상인가 싶었다.
“아이스가 남들을 되게 잘 통솔한다. 그치?”
“으엉?”
구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처음에는 매버릭이 비꼬는 줄 알았다. 그러나 자신이 아는 매버릭은 비꼬는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구스는 긴가민가한 마음에 매버릭을 유심히 보았다. 오늘따라 매버릭은 유난히 해맑았다.
“잘 챙긴다고 표현해야 하나? 아니야, 챙긴다는 말은 약해. 관리한다, 통솔한다, 통제한다. 이런 표현이 더 잘 어울려. 아무튼 사람 다루는 데 능숙하네.”
매버릭은 자문자답을 이어갔다. 구스는 매버릭의 말에 질색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심지어 징그러운 벌레가 자신의 팔을 타고 올라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진저리를 치며 팔을 마구 털었다.
‘근데 모두에게 저렇게 친절하고 세심했던 거야? 나한테만 그런 줄 알았는데. 어떻게 저러고 살아? 혼자 하루를 48시간 쓰며 사나. 저러니까 암 걸렸지.’
매버릭은 뺨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항상 바쁜 아이스. 언제나 일에 치여 정신없어 보이던 아이스. 물 한잔 느긋하게 마실 여유도 없는 남자가 자신이 불러내면 만사 제쳐두고 달려오고, 자신이 늑장을 부려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게 참 좋았다. 근데 이제 보니 꼭 자신에게만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뭐, 아이스한테 서운하다고 해서 토라진 아이처럼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 때까지 등 돌리고 있을 마음은 없었다. 당장 급한 건 오늘 저녁 식사를 어디서 해결하느냐는 것이었다.
“있지, 울프맨.”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매버릭은 울프맨이 이 근처 식당은 꿰고 있다고 들어서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어? 매버릭. 하하, 너 아직 여기 있었구나.”
울프맨은 어색하게 웃었다.
“응.”
매버릭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울프맨의 태도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그는 괜히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왜 그래?”하고 입을 열던 매버릭은 조금 전까지 시끌벅적하던 주변이 조용해진 것을 알아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말없이 주변을 살폈다. 하나같이 엉성하게 그린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아, 다들 아이스 눈치를 보는구나.’
매버릭은 군말 없이 뒤로 물러났다. 이번에는 모두와 잘 지낸다고 생각했는데, 아이스가 복병이었다. 동기들이 하루아침에 손바닥 뒤집듯이 자신을 등진 게 서운하긴 했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애당초 자신의 평판은 그리 좋지 못했고 모두가 꺼리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다. 울프맨만 하더라도 구스가 사고로 죽고 난 이후에야 자신에게 동정심을 느꼈는지 허물없이 다가왔다.
그런 자신과 비교하자면 아이스는 모두에게 호감을 사는 남자였고, 평판이 좋은 데다 실력도 탁월한 우수한 파일럿이었다. 그러니까 가슴으로는 서운해도 머리로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구스를 잃고 모두와 잘 지내는 것과 구스를 지키고 모두와 소원하게 지내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당연히 후자다. 매버릭은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사람들과 원만하게 어울리는 일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이다. 남들 이목을 신경 쓸 힘으로 이번 꿈에서는 어떻게 구스를 살릴지 고민하는 게 더 나았다.
다만 구스는 매버릭처럼 웃어넘기지 못했다.
“너희 사람 세워두고 뭔 개짓거리 하냐?”
“됐어. 신경 쓰지 마, 구스.”
매버릭은 당장이라도 난동을 부릴 기세로 언성을 높이는 구스를 겨우 뜯어말렸다. 어째 이번 꿈에서는 자신보다 구스가 더 소란을 일으키는 것 같다.
“매버릭. 우리 아이스랑 슬라이더 사물함에 개똥 집어넣자.”
지저분한 다이너에서 저녁을 먹던 중에 구스가 결연하게 제안했다. 그는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그들에게 단단히 앙심을 품었다. 구스는 한번 화가 나면 누구도 말리지 못하는 남자였다. 원수를 지옥까지 쫓아갈 남자이기도 했다.
“오…….”
찰리를 만나지 않으니 시간이 남아돌고, 비행 이론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따로 공부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를 몰아서 보거나 유튜브 쇼츠를 보면서 시간을 때우지도 못하니 지루함에 미치기 직전이었던 매버릭은 흔쾌히 응했다.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은 저녁 식사를 계산하고 다이너를 나와, 개똥을 찾으려고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이스터에그처럼 곳곳에 숨어있던 개똥이 막상 찾을 때는 보이지 않았다. 대안으로 쓰레기통을 뒤져 음식물 쓰레기를 구했다.
구스와 매버릭은 음식물 쓰레기가 든 두 개의 비닐봉지를 보물처럼 소중하게 들고 해군 기지로 향했다. 무슨 용건이냐며 가로막는 보초병에게 구스는 깜빡하고 아내의 사진이 든 지갑을 두고 왔다는 핑계를 대고, 끝내주는 금발 미녀와 소개해주겠다고 슬쩍 찔렀다. 보초병은 아내의 사진이라는 가슴 먹먹한 핑계에는 시큰둥하다가 금발 미녀 얘기를 듣자마자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병신…….’
매버릭은 속으로 보초병을 욕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몸이 젊어지니까 덩달아 마음속에 화가 많아진 것 같다. 사소한 일에도 울컥했다. 꿈이 아니라 정말 젊은 시절 자신이라면 보초병에게 분명 시비를 걸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살금살금 라커룸에 숨어들었다. 구스가 가지고 온 손전등으로 주변을 비췄다. 손전등 불빛이 물결처럼 벽과 바닥에 일렁거렸다. 매버릭은 어쩐지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밤중에 라커룸에 온 건 처음이네?’
매버릭은 낮과는 전혀 다른 공간처럼 느껴지는 라커룸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번 꿈은 여러모로 색다르다. 5분 뒤의 미래도 예측할 수 없었다. 자신의 의도와는 상황이 다르게 흘러갔다. 하루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브레이크가 고장이 난 전차에 탄 것만 같았다. 짜릿한 불안감에 하루하루 흥분됐다.
“정의의 심판을 받아라, 이 쓰레기들아.”
구스가 그렇게 말하며 아이스와 슬라이더의 사물함을 순식간에 열었다.
아이스의 사물함은 숨이 막힐 정도로 질서정연했다. 선글라스 케이스, 빗, 세면도구가 전부 정면을 보고 있었다. 슬라이더의 사물함에 먹다 만 과자 봉지와 찌그러진 음료수 캔, 아직도 축축한 껌, 자질구레한 쓰레기들이 가득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매브, 네가 아이스 맡을래?” 구스가 물었다. 매버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코코넛 향기가 나는 걸 쓰는구나.’
아이스의 사물함에 가지고 온 쓰레기를 넣던 매버릭은 면도용 크림 포장지에 그려진 코코넛 그림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푸른 하늘처럼 청량한 아이스의 체취 속에 은은하게 감돌던 달콤한 냄새의 정체를 드디어 알게 됐다.
“구스, 생각이 바뀌었어. 하지 말자.”
매버릭은 아이스의 사물함을 도로 닫았다. 선선한 자정의 비밀을 알게 되니 아무래도 좋았다.
“여기까지 와서?”
“응.”
“후환이 두려워서 그래?”
“어…… 그런 건 아닌데, 아무튼 하지 말자.”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구스가 진지하게 물었다.
“후회 안 해. 이딴 유치한 짓 하면 그걸 더 후회할 것 같아.”
매버릭은 시원스레 대답했다. 구스의 콧수염이 씰룩거렸다. ‘아차.’ 자신이 말실수한 것을 깨달은 매버릭은 서둘러 궁색한 변명을 둘러댔다.
“아, 그, 그러니까 네 생각이 유치하단 건 아니야. 넌 날 위해서 그런 거잖아. 아이스랑 슬라이더가 날 괴롭히니까 화가 나서 그런 거니까, 어, 그러니까…… 넌 우정을 중요하게 여겨서 그런 거고, 나는 단지, 나는. 아무튼 그냥 갑자기 하기 싫어졌어. 이런 방법 말고 정정당당하게 그 새끼들 콧대를 짓뭉개줄래. 그게 너한테도 좋을 것 같아.”
“매버릭.”
구스의 양파를 썰 때처럼 코끝이 찡해졌다. 다행히 매버릭의 변명이 제대로 먹혔다. 그는 비닐봉지를 내던지고 매버릭을 와락 껴안았다.
“언제 이렇게 컸냐, 인마. 너, 왜 갑자기 어른이 된 거야? 응?”
“뭐라는 거야? 내가 술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된 게 언젠데.”
매버릭은 볼멘목소리로 대꾸하며 눈을 가늘게 흘겼다. 그냥 막연하게 아이스라면 자신을 믿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원래대로 자신의 단 하나뿐인 윙맨이 되어주리라는 막연한 희망이 있었다.
9.
오후, 주기장, 매버릭은 쪼그려 앉은 채 더위와 싸우며 바닥에 나뭇가지로 화풀이하고 있었다.
“내가 요즘 애들처럼 스마트폰 중독이었다니.”
매버릭은 흐리멍덩한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빅토리아 시대 요리 만드는 채널에 새로운 거 올라왔으려나.”
그는 꿈속으로 들어오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유튜브 채널이 그리웠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앤 불린의 초상화를 닮은 여자가 영국을 동경하는 미국인들의 환상을 채워주는 채널이었다.
“허브 넣은 버터 만드는 거 보다 말았는데. 다 보고 잠들걸. 마지막에 어떻게 됐을까…… 너무 궁금해.”
그때,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무더위 때문인지 디지털 기기 금단 증상 때문인지 모르겠다. 매버릭은 비틀거리면서 중심을 잡았다. 눈앞이 깜깜했다. 목덜미가 타는 것처럼 쓰라렸다. 태양의 공격은 무자비하고 집요했다. 매버릭을 난도질하는 날카로운 빛의 창끝을 누군가의 그림자가 막았다.
“미첼, 왜 그러고 있어.”
아이스였다.
“네 눈에 띄지 말라며.”
매버릭은 뾰로통하게 말했다.
“오늘 날씨 덥지.”
“응, 덥네.”
“마셔.”
아이스는 매버릭에게 무심한 말투로 음료수 캔을 내밀었다. 펩시콜라였다.
“고마워.”
매버릭은 얼떨결에 아이스가 내민 음료수 캔을 받았다. 다이어트 콜라가 아닌 게 아쉬웠다. 30대 중반쯤부터였나, 체중 관리에 더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는 쭉 다이어트 콜라만 마셨다. 50대가 되고 나서는 아예 콜라를 끊었고, 정 못 참겠으면 제로 콜라를 마셨다.
‘젊으니까 아직 혈당 걱정 안 해도 되고, 더 먹어도 살은 덜 찌니까 한 캔 정도는 마셔도 되겠지. 그리고 아이스가 모처럼 마음 썼는데 무시할 순 없잖아. 그래, 사람 성의가 있지.’
매버릭은 고민 끝에 캔을 따고 한 모금 마셨다. 오랜만에 마신 설탕의 단맛은 환상적이었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였다.
아이스가 소리 없이 매버릭 옆에 쪼그려 앉았다.
“담배 피우러 나온 거야?”
“아니.”
매버릭의 질문에 아이스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럼?”
“너 찾으러 나왔어.”
“어…… 벌써 시간이 다 됐나?”
“아니.”
“그럼 왜?”
매버릭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물었다.
‘속눈썹이 참 길다.’
그 순간 아이스의 머릿속에 번개가 내리쳤다.
‘더위라도 먹었나. 평소에는 사나워 보이는데 오늘은 좀 멍해 보이네.’
그는 매버릭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설마 나 때문에 안에서 못 쉬고 밖에서 이러고 있는 건가?’
또다시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럼 나 때문에 더위를 먹은 건가.’
아이스가 책임감과 죄책감에 오락가락하는 동안,
‘24시간짜리 벽난로 영상 보고 싶어.’
매버릭은 밤마다 틀어놓고 잠들던 벽난로 영상이 그리워했다.
‘모짜렐라 치즈 쭈욱 늘어나는 쇼츠 보고 싶어.’
그리고 스마트폰 금단 증세에 시달렸다.
‘파우더 섞는 쇼츠도……. 보라색이랑 파란색 파우더…….’
몸에서 땀이 줄줄 흐르고, 손이 허전하고, 뒤통수가 간질간질하고, 가뜩이나 짜증이 나는데 눈치 없이 요란하게 우는 매미 때문에 매버릭은 더 짜증이 났다. “아유, 진짜.” 그는 참지 못하고 팍 성질을 내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미첼, 매미 소리를 싫어해?”
아이스가 물었다.
“응.”
매버릭은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슬라이더한테 워크맨이 있는데, 네가 원한다면 슬쩍할게.”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듣기 싫은 소리가 날 때 노래를 들으면 견디기 수월할 거야.”
“괜찮아.”
아이스의 제안을 매몰차게 거절한 매버릭은 입천장을 혀끝으로 가볍게 쓴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슬라이더 물건은…….”
“더러워?”
아이스가 툭 내뱉었다.
“말이 좀 심하다.”
매버릭의 콧잔등에 주름이 잡혔다.
“그럼 왜 슬라이더한테 거리를 두지?”
“먼저 시비 걸고 거리를 둔 건 너희잖아.”
갑작스레 정곡을 파고드는 아이스의 질문에 매버릭은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니, 매버릭. 넌 슬라이더와 나 말고도 모두에게 거리를 두잖아.”
아이스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난 모두와 잘 지내고 있었어. 카잔스키, 너 하나 빼고. 너랑 사이가 틀어지고 나서 다른 사람들이랑도 데면데면해졌지만, 어쨌든 잘 지냈다고.”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지.”
아이스는 단호하게 확신했다.
“내가 보기에 넌 구스 외에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어. 그러니까 원만하게 지낼 수 있지. 애당초 너한테 다른 사람들은 무의미하니까. 그래서 남들이 너한테 무슨 말을 해도, 무슨 짓을 해도 아무렇지 않은 거야.”
“…….”
“매버릭, 넌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처럼 보여. 마치 이곳에 속하지 않은 사람 같아.”
매버릭은 움찔했다.
‘예리한 놈.’
그는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에 아이스에게 사실 이건 내 꿈에 불과하고, 난 이 꿈을 벌써 57번째 꾸고 있다고 털어놓으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쩌면 아이스가 매번 구스를 구하는 데 실패한 자신을 가엾게 여겨서 그 불행한 날, 아무 핑계나 대고 출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을 것이다.
구스는 자신의 힘으로 살릴 것이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무게 잡고 무슨 얘기를 하려나 했더니, 내가 살면서 들은 말 중에 제일 어처구니없는 말이다. 평소에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살기에 뜬금없이 이딴 말을 늘어놓는 거야? 아, 그래! 종일 내 생각만 했나 봐?”
“그래, 맞아.”
매버릭이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거리자 아이스는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놀란 매버릭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
“요즘 네 생각을 많이 해.”
“왜?”
“네가 어떤 인간인지 알고 싶었거든.”
아이스의 뺨이 긴장과 초조함으로 씰룩거렸다. 툭 튀어나온 그의 울대뼈가 풍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가파르게 흔들렸다. 매버릭은 아이스가 한밤중에 찾아왔던 그 날과 똑같은 설렘에 당황스러웠다. 아이스와 자신이 왜 이딴 간질간질한 말장난을 하게 된 걸까.
“네가 보기에 난 어떤 사람인데?”
매버릭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모르겠다.”
“좀 더 생각해 봐, 그럼.”
“그러지.”
아이스는 무겁게 한숨을 토했다.
“아무튼 매버릭.”
“……또 뭐.”
“내 말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싶으면 이따 수업 끝나고 구스랑 해변으로 나와라. 배구 한판 하자. 네가 진심으로 남들과 어울리고 있다는 걸 보여줘.”
“너랑 배구 한다고 그게 증명이 돼?”
매버릭이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적어도 나는 네 말을 믿을 수 있겠지.”
아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버릭은 말없이 아이스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아이스는 근사한 동작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긴 다음, 슬쩍 매버릭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아이스의 뺨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매버릭은 자신의 어깨를 감싸는 축축한 애정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이따 보자.”
역광을 받은 아이스의 얼굴이 더없이 기분 좋아 보였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환상의 섬을 발견한 모험가처럼.
“저 자식은 대체 날 좋아하는 거야, 싫어하는 거야? 도무지 모르겠네.”
아이스가 자리를 뜨고난 후, 매버릭은 구시렁거리며 펩시 캔을 손으로 찌그러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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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열세 번째 마그네타
8.
리사이클이 탑건을 그만뒀다. 대외적으로는 개인적인 사정 때문이라고 했다. 그 개인적인 사정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 소식을 매버릭에게 전한 사람은 구스였다. 구스는 양팔을 날개를 푸덕거리는 것처럼 부산스럽게 흔들며 강의실로 매버릭을 찾아왔다.
“매버릭, 소식 들었어? 리사이클이 그만뒀대.”
“걔가 누군데?”
강의실의 비좁은 책상에 앉아 교재 귀퉁이에 낙서하느라 정신이 팔렸던 매버릭은 건성으로 대꾸했다. 바이퍼가 교전을 금지하는 바람에 꼼짝없이 강의실에 갇혀 낡디낡은 교본을 뒤적이며 이론을 완벽하게 습득하는 것이 매버릭이 징계를 대처하는 방법이었다.
“오, 제법 모양이 나오네?”
구스가 매버릭의 낙서를 힐끔 봤다. 매버릭은 귀퉁이를 한 손으로 고정하고 반대쪽 손으로 드르르 빠르게 책장을 넘겨 자신이 만든 조잡한 애니메이션을 구스에게 보여주었다. 애니메이션의 내용은 얼굴이 넙데데한 고양이가 영리한 다람쥐에게 골탕을 먹는다는 이야기였다.
“그치?”
매버릭이 우쭐거리면서 은근히 칭찬을 강요했다.
“너한테 이런 재능이 있을 줄이야.”
구스는 매버릭이 기대했던 대로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참, 근데 리사이클이 누구야?”
매버릭은 자신이 만든 애니메이션을 다시 빠르게 돌려보며, 여전히 감탄에 빠진 으스대는 얼굴로 물었다.
“왜, 얼마 전에 너한테 ‘야옹아, 우유줄까?’ 하면서 껄떡거린 놈.”
“아아, 그 자식.”
매버릭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잔뜩 열이 올랐던 구스는 예기치 못한 그의 반응에 그만 맥이 탁 풀렸다.
“……매버릭. 너 그 새끼 콜사인도 몰랐어?”
구스가 허탈한 목소리로 묻자, 매버릭은 교재를 탁탁 펼쳐 바르게 정리한 다음, 구스를 빤히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중요한 친구야?”
“이제는 아니지.”
구스는 매버릭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비행 금지를 당해서 의기소침하리라는 구스의 예상과 달리 매버릭은 그럭저럭 잘 지냈다. 남들이 출격하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고 그에게 허락된 이 비좁은 강의실에 갇혀 매일 자신의 오만하고 성급한 판단에 대한 반성문을 쓰고, 톰캣의 교본을 암기하며 낮을 보냈다.
살면서 요즘처럼 한가했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매버릭은 새삼 자신은 브레이크를 밟는 법을 몰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엔진이 과열되어 터져도, 타이어의 요철이 닳아 위험천만하게 미끄러져도, 사는 게 다 이처럼 녹록지 않다고 생각하며 멈추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다.
가와사키에서 내려와 남들처럼 걷게 되니 세상은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바이퍼의 징계를 받고, 처음에는 지루해서 미쳐버릴지도 모른다고 지레 겁을 먹었다. 하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생각보다 재밌는 일이 많았다.
불이 피어오르는 발원지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관조하는 태도를 고수하니 그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왔다. 이 꿈을 수십 번이나 꿨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꽤 신선한 경험이었다.
예를 들어 할리우드와 울프맨의 경우는 겉보기와는 달리 할리우드가 울프맨에게 잡혀 사는 무능력한 가장이다. 울프맨이 팔짱을 끼고 입을 꾹 다물면, 할리우드는 제자리에서 발만 동동 구르면서 가련한 눈으로 울프맨에게 무언가를 호소하지만, 결국 울프맨의 뜻을 꺾지 못하고 그가 하자는 대로 따르고 만다.
알고 보니, 할리우드에게는 아픈 여동생이 있었고 울프맨이 그녀의 수술비를 아무런 조건 없이 선뜻 내놓았다고 했다. 할리우드의 여동생은 자신에게도 친동생이나 마찬가지라면서 말이다. 두 사람을 수십 년 동안 알고 지냈지만,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매버릭은 자신이 주변에 참 무관심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치퍼와 선다운은 교과서에 실어도 될 법한 이상적인 팀이었다. 두 사람은 의견 충돌이 잦은 편이었지만, 항상 타협안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타협안을 이행하는 과정에서는 절대 반목하지 않고 한 몸인 것처럼 목표를 달성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바이퍼는 자신에게 제아무리 잘난 놈이라고 할지라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려고 했던 걸까. 실제로 매버릭은 자신의 대인관계가 이 나이가 되도록 협소하기 짝이 없으며, 사람을 대하는 방식 역시 미숙하다는 사실을 매일매일 깨닫는 중이었다.
애송이라고 무시했던 젊은 동기들이 지내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새로 알게 된 사실이 많았다. 물론 그들에게서 배울 점도 제법 많이 찾아냈다. 과연 동기들의 장점을 인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행에 옮길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남아 있긴 했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 보게 된 것은 아이스였다.
“아이스! 이번에도 제스터를 잡았다며?”
아이스가 강의실로 들어오자마자, 울프맨부터 시작해서 각자 자리에서 딴청을 피우던 동기들이 우르르 그에게 몰려들었다.
“그래. 어떻게 알았어?”
아이스는 특유의 점잖은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벌써 소문이 자자해. 제스터가 5분 만에 잡힌 건 처음이라고 말이야.”
“역시 이번에 수석은 너랑 슬라이더 차지가 되려나.”
울프맨과 할리우드는 아이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를 추켜세웠다.
“끝까지 가봐야 알지. 다들 만만한 상대가 아니잖아.”
아이스는 씩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면서 힐끔, 구석에 앉아 반성문을 끄적이는 매버릭을 훔쳐보았다. 아이스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매버릭은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매버릭은 자신의 눈에 띄지 말라는 아이스의 경고를 잘 따르는 중이었다. 아이스와 반목해서 자신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울프맨과 할리우드는 아이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꼭 숙제를 검사받는 유치원생처럼 초조해 보였다. 혹은 오늘 밤 황제에게 간택 받길 바라는 중국의 후궁처럼 안달이 난 것 같기도 했다. 그 모습에 매버릭은 속이 좀 메스꺼워졌다.
“그래도 뭐, 말은 고맙다. 듣기 좋네.”
아이스가 울프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울프맨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선택받지 못한 할리우드는 반대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참, 할리. 일전에 내가 소개해준 의사는 어때? 줄리아가 마음에 든대?”하고 아이스가 할리우드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할리우드는 순식간에 복권에 당첨된 사람처럼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다.
곧 다른 사람들도 아이스에게 그가 묻지도 않은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이스는 기억력이 대단히 뛰어났다. 남들은 한 번 듣고 잊어버릴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기억했고, 그가 사소한 일을 언급할 때마다 상대방은 감동에 겨워 아이스를 숭배하듯이 우러러보았다.
“대장 납셨네, 아주.”
구스가 비아냥거렸다.
“그러게.”
매버릭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조금 전부터 동기들을 방패 삼아 계속 아이스를 훔쳐보는 중이었다. 관심에 목이 마른 이들이 너도나도 손을 들며 나선 덕분에 아이스는 자신을 보지 못했고, 그래서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아이스가 사람들을 상대하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반성문을 쓰는 것보다는 확실히 재밌는 일이었다. 저런 게 ‘남자들’의 세상인가 싶었다.
“아이스가 남들을 되게 잘 통솔한다. 그치?”
“으엉?”
구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처음에는 매버릭이 비꼬는 줄 알았다. 그러나 자신이 아는 매버릭은 비꼬는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구스는 긴가민가한 마음에 매버릭을 유심히 보았다. 오늘따라 매버릭은 유난히 해맑았다.
“잘 챙긴다고 표현해야 하나? 아니야, 챙긴다는 말은 약해. 관리한다, 통솔한다, 통제한다. 이런 표현이 더 잘 어울려. 아무튼 사람 다루는 데 능숙하네.”
매버릭은 자문자답을 이어갔다. 구스는 매버릭의 말에 질색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심지어 징그러운 벌레가 자신의 팔을 타고 올라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진저리를 치며 팔을 마구 털었다.
‘근데 모두에게 저렇게 친절하고 세심했던 거야? 나한테만 그런 줄 알았는데. 어떻게 저러고 살아? 혼자 하루를 48시간 쓰며 사나. 저러니까 암 걸렸지.’
매버릭은 뺨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항상 바쁜 아이스. 언제나 일에 치여 정신없어 보이던 아이스. 물 한잔 느긋하게 마실 여유도 없는 남자가 자신이 불러내면 만사 제쳐두고 달려오고, 자신이 늑장을 부려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게 참 좋았다. 근데 이제 보니 꼭 자신에게만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뭐, 아이스한테 서운하다고 해서 토라진 아이처럼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 때까지 등 돌리고 있을 마음은 없었다. 당장 급한 건 오늘 저녁 식사를 어디서 해결하느냐는 것이었다.
“있지, 울프맨.”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매버릭은 울프맨이 이 근처 식당은 꿰고 있다고 들어서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어? 매버릭. 하하, 너 아직 여기 있었구나.”
울프맨은 어색하게 웃었다.
“응.”
매버릭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울프맨의 태도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그는 괜히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왜 그래?”하고 입을 열던 매버릭은 조금 전까지 시끌벅적하던 주변이 조용해진 것을 알아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말없이 주변을 살폈다. 하나같이 엉성하게 그린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아, 다들 아이스 눈치를 보는구나.’
매버릭은 군말 없이 뒤로 물러났다. 이번에는 모두와 잘 지낸다고 생각했는데, 아이스가 복병이었다. 동기들이 하루아침에 손바닥 뒤집듯이 자신을 등진 게 서운하긴 했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애당초 자신의 평판은 그리 좋지 못했고 모두가 꺼리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다. 울프맨만 하더라도 구스가 사고로 죽고 난 이후에야 자신에게 동정심을 느꼈는지 허물없이 다가왔다.
그런 자신과 비교하자면 아이스는 모두에게 호감을 사는 남자였고, 평판이 좋은 데다 실력도 탁월한 우수한 파일럿이었다. 그러니까 가슴으로는 서운해도 머리로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구스를 잃고 모두와 잘 지내는 것과 구스를 지키고 모두와 소원하게 지내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당연히 후자다. 매버릭은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사람들과 원만하게 어울리는 일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이다. 남들 이목을 신경 쓸 힘으로 이번 꿈에서는 어떻게 구스를 살릴지 고민하는 게 더 나았다.
다만 구스는 매버릭처럼 웃어넘기지 못했다.
“너희 사람 세워두고 뭔 개짓거리 하냐?”
“됐어. 신경 쓰지 마, 구스.”
매버릭은 당장이라도 난동을 부릴 기세로 언성을 높이는 구스를 겨우 뜯어말렸다. 어째 이번 꿈에서는 자신보다 구스가 더 소란을 일으키는 것 같다.
* * *
“매버릭. 우리 아이스랑 슬라이더 사물함에 개똥 집어넣자.”
지저분한 다이너에서 저녁을 먹던 중에 구스가 결연하게 제안했다. 그는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그들에게 단단히 앙심을 품었다. 구스는 한번 화가 나면 누구도 말리지 못하는 남자였다. 원수를 지옥까지 쫓아갈 남자이기도 했다.
“오…….”
찰리를 만나지 않으니 시간이 남아돌고, 비행 이론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따로 공부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를 몰아서 보거나 유튜브 쇼츠를 보면서 시간을 때우지도 못하니 지루함에 미치기 직전이었던 매버릭은 흔쾌히 응했다.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은 저녁 식사를 계산하고 다이너를 나와, 개똥을 찾으려고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이스터에그처럼 곳곳에 숨어있던 개똥이 막상 찾을 때는 보이지 않았다. 대안으로 쓰레기통을 뒤져 음식물 쓰레기를 구했다.
구스와 매버릭은 음식물 쓰레기가 든 두 개의 비닐봉지를 보물처럼 소중하게 들고 해군 기지로 향했다. 무슨 용건이냐며 가로막는 보초병에게 구스는 깜빡하고 아내의 사진이 든 지갑을 두고 왔다는 핑계를 대고, 끝내주는 금발 미녀와 소개해주겠다고 슬쩍 찔렀다. 보초병은 아내의 사진이라는 가슴 먹먹한 핑계에는 시큰둥하다가 금발 미녀 얘기를 듣자마자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병신…….’
매버릭은 속으로 보초병을 욕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몸이 젊어지니까 덩달아 마음속에 화가 많아진 것 같다. 사소한 일에도 울컥했다. 꿈이 아니라 정말 젊은 시절 자신이라면 보초병에게 분명 시비를 걸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살금살금 라커룸에 숨어들었다. 구스가 가지고 온 손전등으로 주변을 비췄다. 손전등 불빛이 물결처럼 벽과 바닥에 일렁거렸다. 매버릭은 어쩐지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밤중에 라커룸에 온 건 처음이네?’
매버릭은 낮과는 전혀 다른 공간처럼 느껴지는 라커룸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번 꿈은 여러모로 색다르다. 5분 뒤의 미래도 예측할 수 없었다. 자신의 의도와는 상황이 다르게 흘러갔다. 하루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브레이크가 고장이 난 전차에 탄 것만 같았다. 짜릿한 불안감에 하루하루 흥분됐다.
“정의의 심판을 받아라, 이 쓰레기들아.”
구스가 그렇게 말하며 아이스와 슬라이더의 사물함을 순식간에 열었다.
아이스의 사물함은 숨이 막힐 정도로 질서정연했다. 선글라스 케이스, 빗, 세면도구가 전부 정면을 보고 있었다. 슬라이더의 사물함에 먹다 만 과자 봉지와 찌그러진 음료수 캔, 아직도 축축한 껌, 자질구레한 쓰레기들이 가득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매브, 네가 아이스 맡을래?” 구스가 물었다. 매버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코코넛 향기가 나는 걸 쓰는구나.’
아이스의 사물함에 가지고 온 쓰레기를 넣던 매버릭은 면도용 크림 포장지에 그려진 코코넛 그림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푸른 하늘처럼 청량한 아이스의 체취 속에 은은하게 감돌던 달콤한 냄새의 정체를 드디어 알게 됐다.
“구스, 생각이 바뀌었어. 하지 말자.”
매버릭은 아이스의 사물함을 도로 닫았다. 선선한 자정의 비밀을 알게 되니 아무래도 좋았다.
“여기까지 와서?”
“응.”
“후환이 두려워서 그래?”
“어…… 그런 건 아닌데, 아무튼 하지 말자.”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구스가 진지하게 물었다.
“후회 안 해. 이딴 유치한 짓 하면 그걸 더 후회할 것 같아.”
매버릭은 시원스레 대답했다. 구스의 콧수염이 씰룩거렸다. ‘아차.’ 자신이 말실수한 것을 깨달은 매버릭은 서둘러 궁색한 변명을 둘러댔다.
“아, 그, 그러니까 네 생각이 유치하단 건 아니야. 넌 날 위해서 그런 거잖아. 아이스랑 슬라이더가 날 괴롭히니까 화가 나서 그런 거니까, 어, 그러니까…… 넌 우정을 중요하게 여겨서 그런 거고, 나는 단지, 나는. 아무튼 그냥 갑자기 하기 싫어졌어. 이런 방법 말고 정정당당하게 그 새끼들 콧대를 짓뭉개줄래. 그게 너한테도 좋을 것 같아.”
“매버릭.”
구스의 양파를 썰 때처럼 코끝이 찡해졌다. 다행히 매버릭의 변명이 제대로 먹혔다. 그는 비닐봉지를 내던지고 매버릭을 와락 껴안았다.
“언제 이렇게 컸냐, 인마. 너, 왜 갑자기 어른이 된 거야? 응?”
“뭐라는 거야? 내가 술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된 게 언젠데.”
매버릭은 볼멘목소리로 대꾸하며 눈을 가늘게 흘겼다. 그냥 막연하게 아이스라면 자신을 믿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원래대로 자신의 단 하나뿐인 윙맨이 되어주리라는 막연한 희망이 있었다.
9.
오후, 주기장, 매버릭은 쪼그려 앉은 채 더위와 싸우며 바닥에 나뭇가지로 화풀이하고 있었다.
“내가 요즘 애들처럼 스마트폰 중독이었다니.”
매버릭은 흐리멍덩한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빅토리아 시대 요리 만드는 채널에 새로운 거 올라왔으려나.”
그는 꿈속으로 들어오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유튜브 채널이 그리웠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앤 불린의 초상화를 닮은 여자가 영국을 동경하는 미국인들의 환상을 채워주는 채널이었다.
“허브 넣은 버터 만드는 거 보다 말았는데. 다 보고 잠들걸. 마지막에 어떻게 됐을까…… 너무 궁금해.”
그때,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무더위 때문인지 디지털 기기 금단 증상 때문인지 모르겠다. 매버릭은 비틀거리면서 중심을 잡았다. 눈앞이 깜깜했다. 목덜미가 타는 것처럼 쓰라렸다. 태양의 공격은 무자비하고 집요했다. 매버릭을 난도질하는 날카로운 빛의 창끝을 누군가의 그림자가 막았다.
“미첼, 왜 그러고 있어.”
아이스였다.
“네 눈에 띄지 말라며.”
매버릭은 뾰로통하게 말했다.
“오늘 날씨 덥지.”
“응, 덥네.”
“마셔.”
아이스는 매버릭에게 무심한 말투로 음료수 캔을 내밀었다. 펩시콜라였다.
“고마워.”
매버릭은 얼떨결에 아이스가 내민 음료수 캔을 받았다. 다이어트 콜라가 아닌 게 아쉬웠다. 30대 중반쯤부터였나, 체중 관리에 더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는 쭉 다이어트 콜라만 마셨다. 50대가 되고 나서는 아예 콜라를 끊었고, 정 못 참겠으면 제로 콜라를 마셨다.
‘젊으니까 아직 혈당 걱정 안 해도 되고, 더 먹어도 살은 덜 찌니까 한 캔 정도는 마셔도 되겠지. 그리고 아이스가 모처럼 마음 썼는데 무시할 순 없잖아. 그래, 사람 성의가 있지.’
매버릭은 고민 끝에 캔을 따고 한 모금 마셨다. 오랜만에 마신 설탕의 단맛은 환상적이었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였다.
아이스가 소리 없이 매버릭 옆에 쪼그려 앉았다.
“담배 피우러 나온 거야?”
“아니.”
매버릭의 질문에 아이스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럼?”
“너 찾으러 나왔어.”
“어…… 벌써 시간이 다 됐나?”
“아니.”
“그럼 왜?”
매버릭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물었다.
‘속눈썹이 참 길다.’
그 순간 아이스의 머릿속에 번개가 내리쳤다.
‘더위라도 먹었나. 평소에는 사나워 보이는데 오늘은 좀 멍해 보이네.’
그는 매버릭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설마 나 때문에 안에서 못 쉬고 밖에서 이러고 있는 건가?’
또다시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럼 나 때문에 더위를 먹은 건가.’
아이스가 책임감과 죄책감에 오락가락하는 동안,
‘24시간짜리 벽난로 영상 보고 싶어.’
매버릭은 밤마다 틀어놓고 잠들던 벽난로 영상이 그리워했다.
‘모짜렐라 치즈 쭈욱 늘어나는 쇼츠 보고 싶어.’
그리고 스마트폰 금단 증세에 시달렸다.
‘파우더 섞는 쇼츠도……. 보라색이랑 파란색 파우더…….’
몸에서 땀이 줄줄 흐르고, 손이 허전하고, 뒤통수가 간질간질하고, 가뜩이나 짜증이 나는데 눈치 없이 요란하게 우는 매미 때문에 매버릭은 더 짜증이 났다. “아유, 진짜.” 그는 참지 못하고 팍 성질을 내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미첼, 매미 소리를 싫어해?”
아이스가 물었다.
“응.”
매버릭은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슬라이더한테 워크맨이 있는데, 네가 원한다면 슬쩍할게.”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듣기 싫은 소리가 날 때 노래를 들으면 견디기 수월할 거야.”
“괜찮아.”
아이스의 제안을 매몰차게 거절한 매버릭은 입천장을 혀끝으로 가볍게 쓴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슬라이더 물건은…….”
“더러워?”
아이스가 툭 내뱉었다.
“말이 좀 심하다.”
매버릭의 콧잔등에 주름이 잡혔다.
“그럼 왜 슬라이더한테 거리를 두지?”
“먼저 시비 걸고 거리를 둔 건 너희잖아.”
갑작스레 정곡을 파고드는 아이스의 질문에 매버릭은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니, 매버릭. 넌 슬라이더와 나 말고도 모두에게 거리를 두잖아.”
아이스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난 모두와 잘 지내고 있었어. 카잔스키, 너 하나 빼고. 너랑 사이가 틀어지고 나서 다른 사람들이랑도 데면데면해졌지만, 어쨌든 잘 지냈다고.”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지.”
아이스는 단호하게 확신했다.
“내가 보기에 넌 구스 외에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어. 그러니까 원만하게 지낼 수 있지. 애당초 너한테 다른 사람들은 무의미하니까. 그래서 남들이 너한테 무슨 말을 해도, 무슨 짓을 해도 아무렇지 않은 거야.”
“…….”
“매버릭, 넌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처럼 보여. 마치 이곳에 속하지 않은 사람 같아.”
매버릭은 움찔했다.
‘예리한 놈.’
그는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에 아이스에게 사실 이건 내 꿈에 불과하고, 난 이 꿈을 벌써 57번째 꾸고 있다고 털어놓으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쩌면 아이스가 매번 구스를 구하는 데 실패한 자신을 가엾게 여겨서 그 불행한 날, 아무 핑계나 대고 출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을 것이다.
구스는 자신의 힘으로 살릴 것이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무게 잡고 무슨 얘기를 하려나 했더니, 내가 살면서 들은 말 중에 제일 어처구니없는 말이다. 평소에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살기에 뜬금없이 이딴 말을 늘어놓는 거야? 아, 그래! 종일 내 생각만 했나 봐?”
“그래, 맞아.”
매버릭이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거리자 아이스는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놀란 매버릭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
“요즘 네 생각을 많이 해.”
“왜?”
“네가 어떤 인간인지 알고 싶었거든.”
아이스의 뺨이 긴장과 초조함으로 씰룩거렸다. 툭 튀어나온 그의 울대뼈가 풍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가파르게 흔들렸다. 매버릭은 아이스가 한밤중에 찾아왔던 그 날과 똑같은 설렘에 당황스러웠다. 아이스와 자신이 왜 이딴 간질간질한 말장난을 하게 된 걸까.
“네가 보기에 난 어떤 사람인데?”
매버릭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모르겠다.”
“좀 더 생각해 봐, 그럼.”
“그러지.”
아이스는 무겁게 한숨을 토했다.
“아무튼 매버릭.”
“……또 뭐.”
“내 말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싶으면 이따 수업 끝나고 구스랑 해변으로 나와라. 배구 한판 하자. 네가 진심으로 남들과 어울리고 있다는 걸 보여줘.”
“너랑 배구 한다고 그게 증명이 돼?”
매버릭이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적어도 나는 네 말을 믿을 수 있겠지.”
아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버릭은 말없이 아이스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아이스는 근사한 동작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긴 다음, 슬쩍 매버릭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아이스의 뺨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매버릭은 자신의 어깨를 감싸는 축축한 애정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이따 보자.”
역광을 받은 아이스의 얼굴이 더없이 기분 좋아 보였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환상의 섬을 발견한 모험가처럼.
“저 자식은 대체 날 좋아하는 거야, 싫어하는 거야? 도무지 모르겠네.”
아이스가 자리를 뜨고난 후, 매버릭은 구시렁거리며 펩시 캔을 손으로 찌그러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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