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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5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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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번째 마그네타



아이스와 헤어지고 나서 매버릭은 곧바로 구스를 찾았다. 비행 점검 전에 다시 보자고 약속했지만, 구스가 거기 있을 리 없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구스는 제시간에 약속한 장소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이 세상에는 구스의 흥미를 유발하는 것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갓 구운 빵 냄새, 모카 포트의 그윽한 커피 향기, 히아신스 향기, 유달리 크게 부푸는 풍선껌, 그 모든 것이 구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구스는 전투기 외에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심한 매버릭과는 정반대의 성향이었다. 두 사람은 대체 우리가 왜 친해졌는지 모르겠다며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지만, 남들이 보기에 그들만큼 사고를 칠 때 이심전심으로 통하고,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는 사람도 없었다.

구스를 찾는 방법은 쉽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 유난히 웃음소리가 큰 곳, 얼핏 들으면 심각한 내용인 것 같지만, 막상 자세히 들어보면 두어 시간만 지나도 잊어버릴 실없는 대화의 주고받음이 끊이지 않는 곳, 다시 말해서 행복한 사람들이 행복한 이야기를 나누는 곳을 찾으면 된다.

차양을 내린 야외 흡연 구역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있었다. 사람들 위로 정수리 하나가 쑥 삐져나온 것이 보였다. 길쭉한 두상은 자세히 보지 않아도 구스가 분명했다. 매버릭은 빠른 걸음으로 사람들을 비집고 나아갔다. 담배 연기 때문에 속이 좀 메스꺼웠지만, 구스 앞에서 얼굴을 찌푸리고 싶지 않아서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한창 재밌는 얘기 중이었는지 구스의 얼굴은 시뻘겠고, 그의 따스한 눈동자는 늦가을의 오후처럼 빛나고 있었다. 매버릭이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대원들은 여자 얘기에 한창이었다. 

모두 자신이 잘난 맛에 사는 한창때의 청년들이었다. 미인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어젯밤 펍에서 만난 금발 머리 여자가 끝내주더라, 아니다, 자기는 그 옆에 있던 브루넷에 귀엽고 건강해 보이는 여자가 마음에 든다는 둥 너도나도 자신들이 말하는 여자의 실체를 까맣게 잊은 채 환상 속의 여자를 떠들어대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구스는 다른 사람들이 이상형을 들먹일 때 혼자서 올곧게 캐롤 얘기를 하며 거룩한 결혼 서약을 지켰다. 아무리 봐도 캐롤보다 예쁜 여자는 없었다며 자랑을 하는 바람에 몇 명의 눈총을 샀지만, 구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매버릭에게는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캐롤에게 구스가 한눈을 팔더라며 일러바치지 않아도 됐으니까 말이다.

“구스! 한참 찾았잖아.”

매버릭이 따지듯이 말하며 구스에게 다가갔다.

“벌써 얘기 끝났어? 매브, 너 요즘 시원찮은 것 같다?”

구스는 개의치 않고 매버릭의 양쪽 어깨를 감싸며 능청스레 말했다. “관심 없대도.”하고 매버릭이 손을 치우며 인상을 굳히자 구스의 눈이 당장에라도 쏟아질 것처럼 커졌다. “그 민간인 교관, 네 취향 아냐?” 구스는 크게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는 매버릭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정말 그가 맞는지, 아니면 그의 얼굴을 한 유령인지 확인하려고 했다.

“여기 들어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매버릭은 온몸을 비틀어 구스의 길쭉한 손가락 덫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구스는 매버릭을 놓친 게 아쉬워서 손가락을 부르르 떨면서 퉁명스레 되물었다.

“그래서?”
“연애할 여유 없어. 첫날에 바이퍼가 명패를 보여줬잖아. 내 목표는 수석이라고. 아, 참. 우리의 목표는 수석이야.”

매버릭은 서둘러 목표를 ‘우리’라고 정정했다.

“이야, 우리 매브가 이제 정신 차렸구나?”

구스는 보기 좋게 정리한 콧수염을 훔치며 눈물을 글썽거리는 체했다. 장난기 섞인 말투였지만, 여자까지 마다하고 성실하게 훈련에 임하겠다는 매버릭의 의욕 넘치는 모습에 정말 감동한 듯했다. 

매버릭은 속이 따끔거렸다. 구스는 결혼도 했고, 자식도 있으니 이제 자기 차례라는 이유로 그를 두고 여자랑 슬그머니 자리를 비웠던 지난날이 머릿속에 빠르게 스쳤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신이 마음에 든 여자와 잘 풀리지 않아 실의에 빠져 술에 취할 때마다, 자신을 업고 관사로 데리고 가는 것은 언제나 구스의 몫이었다. 상관에게 된통 혼이 날 때면 자신을 두둔해주고 뒤치다꺼리를 하는 사람도 구스였다. 그에 비해 자신은 구스를 위해 무엇 하나 희생한 게 없었다.

‘이번에는 구스, 정말 너만 생각할 거야. 꼭 널 행복하게 해줄게.’

86년의 경이로운 여름으로 돌아와서 그런가, 몸은 더없이 가뿐하고 의욕은 넘쳤으며 찰리는 여전히 매력적으로 보였다. 기억의 낡은 서랍 속에 보관한 이 시절의 모습보다 훨씬. 하지만 이번 꿈에서는 그녀와 만나지 않을 것이다.

흔들리지 말자. 매버릭은 얼굴을 부르르 털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까는 당황스러웠지만 제법 어른스럽게 대처했던 것 같다. 찰리도 불쾌해하지 않는 듯했고, 이대로 계속 신중하게 찰리를 대한다면 연애 감정이 아닌 서로 동등한 관계의 신뢰를 쌓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봐 매버릭, 정말 미그기 조종사한테 엿을 날렸냐?”

헐리우드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 매버릭에게 불쑥 말을 걸었다. 그는 호기심 가득한 눈을 반짝이며 매버릭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물론이지. 구스가 사진도 찍었다고 했잖아. 보여줄까?”

매버릭은 헐리우드가 자신의 영역에 침입하는 것이 달갑지는 않았으나, 여유를 잃지 않고 그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헐리우드가 도리어 당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이야, 좋아! 기대할게.”
“내일 가지고 올게.”
“매버릭, 미그기 조종사한테 가운뎃손가락 세울 배짱은 어디서 나온 거야?”

울프맨이 대화에 끼어들며 매버릭에게 물었다. 헐리우드만 상대하고 자리를 뜰 생각이었던 매버릭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러웠으나, 곧 침착해졌다.

“곤경에 빠지면 고양이도 사자처럼 사나워지는 법이지.”
“오, 맞는 말이야. 사자보다 용감한 귀여운 야옹아, 이리 오렴.”

울프맨은 고양이의 턱 밑을 긁어주는 시늉을 하며 매버릭에게 이죽거렸다.

“지금 나더러 야옹이라고 했어?”

매버릭이 발끈해서 되물었다.

“응, 야옹아. 쓰다듬어줄게.”
“미친놈, 가만 안 둔다.”
“으하하! 약이 잔뜩 올랐네!”

울프맨은 배를 잡고 웃었다. 매버릭은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 울프맨의 농담을 재밌어하며 웃고 있었다. “이 야옹이는 브래드쇼 집안의 야옹입니다. 주인이 있어요!”하고 구스가 매버릭의 어깨를 잡으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그도 울프맨의 농담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다행이다. 이런 유치한 농담이 얘네 수준에 맞나 봐.’

매버릭은 한시름 덜었다. 50대 후반, 비극과 희극을 두루 겪은 노련한 베테랑 파일럿의 시선으로 보면 86년도의 탑건 동기들은 의욕만 넘치는 땀 냄새 나는 애송이들에 불과했다. 하지만 매버릭은 평생 또래와 자연스레 어울리며 같은 향수를 간직할만한 경험이 거의 없었으므로, 연륜만으로는 이들을 대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어린애들이 자신의 외모를 농담거리 삼는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며 귀여워한다고 해서 저 친구들이 미그기를 격추하는 빛나는 순간을 가로채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구스가 즐거워하니 괜찮다.

“야옹아, 우유줄까?”

하지만 자신의 바지춤을 잡고 성행위를 하듯이 허리를 들썩거리며 선을 넘는 경우는 예외였다. 유쾌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지고, 모두의 시선이 질 나쁜 농담을 던진 대원에게 쏠렸다. 그는 농담을 던진 것인지, 진심으로 매버릭을 추행할 의도였는지 모호한 태도를 보이며 코를 훔쳤다.

‘저 자식 콜사인이 뭐였지?’

매버릭은 자신을 희롱한 동기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얼굴도 이름도 가물가물한 놈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86년도에 저런 놈이 있었나 싶었다.

“부모님께 손자 안겨드리고 싶으면 그 더러운 거 치우는 게 좋을 거야.”

매버릭이 무표정한 얼굴로 경고하자 놈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움찔했다. 하지만 이대로 순순히 물러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매버릭에게 성큼성큼 다가서며 그를 자신의 팔에 가두려고 했다.

“야! 우리 집 야옹이한테 뭐 하는 짓이야? 이 씹새끼가 정도를 모르네!”

구스가 놈의 어깨를 밀치면서 화를 냈다.

“농담 좀 한 거로 왜 그래?”

놈은 도리어 큰소리를 쳤다.

“이 씨발놈이! 지금 말 다 했어?”
“인마, 장난친 거라니까!”

길길이 날뛰는 구스의 기세에 밀린 남자는 쭈뼛거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너는 이딴 걸 장난이라고 하냐?” 제대로 끓어오른 구스의 분노는 좀처럼 식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어디선가 들려오는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모두가 우왕좌왕하며 소리가 난 방향을 찾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이스였다. 저 멀리서 아이스와 슬라이더가 걸어오고 있었다. 매버릭은 심각한 얼굴로 다가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꼭 자경단처럼 보여서 웃음이 나왔다.

“구스, 무슨 일이야?”
“이 새끼가, 글쎄―”

가까이 다가온 아이스가 다시 묻자, 구스는 소매까지 걷어붙이며 그에게 상황을 설명하려다가 매버릭에게 제지당했다.

‘구스, 하지 마.’

매버릭은 고개를 내저으며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렸다.

“뭘 하지 마?”

구스는 매버릭의 손을 뿌리치며 언성을 높였다.

“우리 늦었어, 빨리 가자.”

매버릭은 아예 구스의 등을 떠밀면서 그를 말렸다. “놔! 매버릭, 이거 놔!” 구스가 그의 콜사인처럼 오두방정을 떨며 꽥꽥거렸다.

‘제발 진정해, 구스. 여기서 아이스가 날 도와주면 애들이나 좋아하는 하이틴 로맨스 영화 꼴이 나서 더 우스꽝스러워진단 말이야. 나도 이 나이에 체면이 있지, 죽어도 안 돼.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아니, 죽는 건 싫어. 하여튼 안 돼. 이딴 일로 아이스한테 신세 지기 싫어.’

매버릭은 차마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속으로 삼켰다. 그는 매버릭을 추행한 놈과 끝을 보겠다며 버티는 구스를 간신히 들불이 치솟아 오르는 구덩이에서 데리고 나왔다.

“무슨 일인데 구스가 저렇게 난리야?”

슬라이더가 별일이라는 듯이 다른 동기들에게 물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자초지종을 말하지 못했다. 다들 켕기는 구석이 있는지 초조한 눈으로 서로를 힐끔거릴 뿐이었다.

“리사이클.”

아이스는 조금 전까지 구스가 윽박질렀던 남자를 조용히 불렀다. 매버릭은 기억하지 못하는 이름이었지만, 아이스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으며 꽤 오랫동안 기억하는 콜사인이었다. 사생활이 난잡하고 언행이 더러워서 재활용도 못 할 쓰레기라는 뜻으로 리사이클이라 불리는 조종사였다.

“오늘 끝나고 잠깐 나 좀 보자.”

아이스는 리사이클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리사이클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대답도 하지 않고 자신의 RIO와 함께 허둥지둥 자리를 떴다. 다른 조종사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르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매버릭 그 자식 의외네.”

주변이 조용해지자, 슬라이더는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만 아는 놈인 줄 알았는데, 남들이랑 제법 잘 지내잖아.” 
“그래.”

아이스는 일부러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뭐, 어째 남자들만 득시글거리는 지옥에 혼자 덜렁 떨어진 가련한 여자 같긴 하다만. 쿨다운이랑 머지는 매버릭을 무슨 치어리더 숭배하듯이 보고 있었잖아. 예쁘장하게 생긴 것도 힘든 일이군.”

슬라이더는 아까 멀찍이서 보았던 매버릭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다른 조종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부끄러워하며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매버릭이 수줍어할수록 그의 주변의 사람들은 더 즐거워 보였다. 그 모습이 슬라이더에게 유독 인상적이었다. 확실히 그 쩔쩔매는 모습은 입이 썼다.

“우리 생각보다 매버릭이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슬라이더가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매버릭이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진 않아.”

아이스도 조금 전 매버릭의 모습을 떠올리며 착잡해졌다.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물론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렇다고 나쁜 놈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
“그럼 뭔데?”

슬라이더가 흥미로움에 눈을 빛냈다. 아이스는 고민하는 듯 혀를 차더니, 말을 돌렸다.

“우리도 그만 가서 점검하자.”
“벌써? 우리 차례는 나중이잖아.”
“미리 가는 게 좋겠어.”

아이스는 말을 아꼈다. 매버릭 때문에 자꾸만 화가 났다. 매버릭을 떠올리면 자꾸만 가슴이 뜨거워졌다. 매버릭을 생각하면……. 아이스는 그만 혀를 깨물고 말았다. 



6.


“구스, 아까 오는 길에 카잔스키를 만났어. 복도에서 날 기다리고 있더라.”

매버릭은 아직도 잔뜩 화가 난 구스를 달랠 겸, 화제를 바꿀 겸 기체를 점검하러 가던 길에 아이스 얘기를 꺼냈다. 그 말을 듣자마자 구스가 성난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질겁하며 펄쩍 뛰었다.

“뭐라고? 매버릭, 어째 얌전하게 지낸다더니 너 나 몰래 무슨 짓 했어?”
“아니, 아무 짓도 안 했어. 왜 그렇게 생각해?”

매버릭이 억울한 마음에 따졌다. 구스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와, 미치겠다. 아무래도 너, 카잔스키 그 자식한테 찍힌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뜻이야?”
“네가 마음에 안 든다고 선포한 것 같다고. 여기 있는 친구들은 거의 다 카잔스키 사람이거든?”
“해사 출신이라서 그런가, 인맥이 많네.”

심각한 구스와는 달리 매버릭은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이 무렵에 아이스가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긴 건 사실이고, 그렇다고 자신이 딱히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 아이스는 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닫고 먼저 다가올 것이다. 구스가 무사하다는 전제하에도 그가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지는 미지수였지만.

“해사 출신이 아닌 사람도 있어. 그냥 아이스맨이 원래 그래. 어디를 가나 자기가 대장이 돼야 성이 풀리는 놈들 있잖아.”

구스가 말을 이었다. ‘그건 사실이긴 하지.’ 매버릭은 속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잔스키한테 찍히면 골치 아파지는데…… 친구야, 날 생각해서라도 아이스한테 오해가 있다면 풀고 잘 지내보자고 말 좀 걸면 안 될까?”

구스는 매버릭의 양어깨를 감싸며 조심스레 말했다.

“아이스가 그렇게 무서워?”

매버릭은 구스가 이렇게까지 심각한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다. 매버릭에게 아이스는 산타클로스 같은 존재였다. 원하는 게 있으면 무엇이든 이루어주고, 보기 싫은 사람이 생기면 안 보고도 살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존재. 아주 가끔 아이스에게서 이질감을 느낄 때가 있긴 했지만, 곧 그의 세심한 배려에 그 떨떠름도 잊어버리고는 했다.

“어. 진짜 내가 살면서 만난 인간 중 제일 지독한 놈이야. 장담하는데 그 자식은 못 해도 별 세 개는 단다. 어쩌면 사령관이 될지도 모르지. 자존심만 더럽게 센 순진한 조종사들이랑 달리, 걔는 성공을 위해선 자존심도 굽힐 줄 아는 놈이거든. 우리 중에 출세할 가능성이 있는 건 아이스뿐이야.”
“음, 그 말은 동의해.”

매버릭은 더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나중에 아이스가 정말 사령관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구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흐으으으…… 앞길이 막막하구먼. 슬라이더도 조심해라. 그 자식이 아이스의 개다. 아이스가 맘에 안 드는 놈을 지목하면 슬라이더가 나서서 제 발로 관둘 때까지 동기 사이에 진솔한 대화를 시도하거든.”

다행스럽게도 구스는 걱정이 앞서 매버릭이 웃는 것을 보지 못했다.

“고등학생도 아니고, 유치하게 괴롭힌다는 거야? 슬라이더가 그 정도로 최악일 줄은 몰랐는데.”

매버릭은 시치미를 잡아떼며 물었다. 슬라이더는 지금도 당장 자기 선에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몹시 덥고 찰리와는 잘되지 않아 짜증이 났던 날, 언제나처럼 비아냥거리며 시비를 걸어오던 슬라이더에게 화풀이했던 기억이 있다. 냄새난다고 쏘아붙였을 때 그 얼굴이란. 나중에야 알게 됐는데, 그날 슬라이더는 몹시 상심했다고 한다.

“아니, 괴롭히는 건 아냐.”

구스는 손을 내저었다.

“이 길이 만만치 않은 길이라는 걸 깨닫게 해주는 것뿐이야. 근데 그 자식이 덩치가 좋잖아. 그게 좀 위협적이거든.”
“아, 그렇구나.”
“그리고 자기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잖아.”
“그래, 일단 알았어. 조만간 아이스랑 얘기 좀 해볼게.”

매버릭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 진짜?”

구스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매버릭을 도로 세웠다.

“응.”

매버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스를 두들겨 패는 게 아니라 대화를 나누겠다고?”

구스의 콧잔등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매버릭은 그의 등을 가볍게 툭 쳤다.

“내가 아이스를 왜 때려?” 
“그야…….”

구스의 울대뼈가 꿀렁거렸다. 매버릭은 한 번 꽂힌 일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성격이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확실한 건 아이스와 매버릭의 갈등이 심해지면 둘 중 하나는 그 잘난 콧대가 박살이 나서 코피를 질질 흘리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저절로 그려진다는 사실이었다.

“뭐가 불만인지 이유를 알면 되잖아. 내 잘못이면 고치겠다고 하면 되고, 카잔스키가 괜히 시비를 거는 거면 앞으로 무시하면 그만이고. 카잔스키가 먼저 대화하자는 사람까지 배척할 놈 같진 않아.”

매버릭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구스는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 됐다. 그리고 매버릭을 와락 끌어안더니, 그의 뒤통수를 손으로 감쌌다.

“매버릭, 고맙다.”
“갑자기?”
“실은 여기 오면서 걱정했거든.”

구스의 먹먹한 목소리에 매버릭의 가슴 속 웅덩이 위로, 옅은 무지개가 떠올랐다. 매버릭은 떨리는 손으로 구스의 팔을 붙잡았다. 마지막으로 이 팔을 붙잡았던 그 날을 조금 전처럼 기억한다. 이 따뜻한 몸이 바닷물에 휩쓸려 싸늘하게 식어가던 그 순간을. 더는 피가 돌지 않아 딱딱하게 굳어가던 그 순간을. 추억 속에 영원히 반복되는 그 순간을.

“뭘?”

덜컥 두려워진 매버릭의 얼굴이 흐려졌다.

“넌 나 말고는 아무하고도 어울리지 않으니까, 여기서도 겉돌 줄 알았어.”
“…….”
“매브, 너한테 문제가 있다는 말은 아니야. 난 단지…… 그냥 지켜보면서 안타까웠던 거지. 남들이 널 오해하는 게 말이야.”

구스는 포옹을 풀었다.

“구스.”

매버릭은 구스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남들이 널 욕하면 화가 나기도 하고. 넌 그런 사람이 아닌데, 다들 화풀이할 먹잇감 찾는 데 혈안이 돼서는 네가 아무리 찔러도 늘 반응이 시큰둥하니까 더 열을 올리잖아.”

구스는 자신의 머리를 긁적거리며 멋쩍게 웃었다. 숙연해진 매버릭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남들이 나한테 뭐라고 해도 정말 아무렇지 않아서 그랬어.”
“내가 속이 상해서 그런다.”
“네가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줄 미처 몰랐어. 미안해.”
“됐어, 미안할 일 아니야.”

구스는 매버릭의 얼굴에 대고 손가락을 딱 튕겼다. 매버릭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구스의 익살스러운 미소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버릭이 멍하니 눈만 깜빡거리자, 구스는 시선을 자신의 코끝으로 모았다. 그리고 뺨에 바람을 가득 채우며 우스꽝스럽게 부풀렸다. 

“멍청이, 이딴 건 루스…… 아니, 브래들리한테나 해. 멍청이 구스.”

매버릭은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

“너만 할까? 아무튼! 여기서는 네가 남들이랑 잘 지내려고 시도하는 것 같아서 보기 좋다.”
“긴장해, 친구야. 방심하고 있다가는 남한테 나 뺏긴다?”

구스의 말에 매버릭도 장난을 치듯이 받아쳤다. “와아.” 구스는 매버릭의 뻔뻔한 태도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들으라는 듯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 다 컸으니 인제 그만 독립할 때도 됐잖아!”
“구스 네가 평생 나 책임진다며?”
“난 캐롤이랑 브래들리만 해도 벅차거든? 제발 누가 너 떠맡겠다고 나섰으면 좋겠다. 그게 내 소원이다, 소원.”
“그래? 내 소원은.”

매버릭은 웃다 말고 말을 멈췄다.

“네 소원은 뭔데?”

구스가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갑자기 생각이 안 난다. 나중에 생각나면 말해줄게.”

매버릭은 서둘러 말을 돌렸다.

내 소원은, 내 소원은 구스……. 너한테 다시 시간이 흘렀으면 좋겠어. 네가 서른 살이 되고, 마흔 살이 되고, 브래들리가 어른이 되는 걸 지켜보고, 캐롤의 마지막을 지켜주고… 그렇게 나처럼 나이가 들어가는 걸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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