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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9 21:42
1
4.
아침부터 날씨가 몹시 무더웠다. 강의실 공조기가 말썽이라, 주기장 한구석에 책상과 칠판을 갖추고 임시 강의실을 만들었다. 첫 모의전을 앞두고 임시 강의실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어제 펍에서는 세상 다신 없을 진실한 전우처럼 어깨동무하고 맥주병을 높이 들며 허세를 부려놓고서는, 날이 밝으니 다들 자신의 처지를 슬슬 실감하게 됐다.
모두가 전투기 조종사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들이었고, 자존심 또한 대단히 강했다. 스스로 자신이 최고라고 자신하는 이들은 바이퍼가 말한 명패에 반드시 자신의 이름을 걸리라는 포부를 가슴에 품었다. 그러니 어젯밤에는 온갖 무의미한 말을 지껄이며 즐겁게 어울렸던 이들이 이제부터는 단 하나의 성취를 두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사이가 됐다.
경쟁은 목표 의식을 고취하고 목표를 향해 나아갈 추진력이 된다. 한편으로 경쟁은 시지프스의 형벌이기도 하다. 막막함과 불안함을 등에 지고 하늘과 맞닿은 저 드높은 산의 정상으로 올라가는 과정이다.
그런 이유로 다들 어제와는 다른 삭막한 얼굴로 상대방을 견제하며 빈틈을 찾으려고 눈에 불을 밝혔다. 겉으로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새로 산 선글라스를 콧잔등에 느슨하게 걸치고 자신의 매력을 뽐내고 있었지만, 속은 바짝바짝 타는 중이었다.
주변 공기가 무거운 와중에 단 한 사람, 매버릭만은 그들과는 무관한 사람인 것처럼 전투기를 구경하며 한가하게 딴청을 피웠다.
“후아암―”
매버릭은 기지개를 켜며 크게 하품했다. 간밤에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다 보니 잠을 설친 탓에 졸렸다. 이번 꿈은 참 이상했다. 지금까지 꿨던 꿈은 건너뛰는 구간이 있어서 시간이 순식간에 흐를 때도 종종 있었고,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았다.
이번 꿈은 달랐다. 현실처럼 시간이 흘렀고, 현실처럼 몸과 마음이 지쳤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고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방전된 기계처럼 작동을 멈추고 말 것이다. 매버릭은 이 막대한 핸디캡 때문에 앞으로의 계획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뜯어고쳐야만 했다.
“매브, 피곤해?”
“응,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잤어.”
구스가 책상을 툭툭 치면서 묻자, 매버릭은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
“너! 생각 없다고 말하고서는 나 몰래 여자 만났구나?”
구스는 허랑방탕하게 여자와 놀아나는 매버릭을 상상하며 빙그레 웃었다. 매버릭은 반반한 얼굴 덕에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여자를 쉽게 꾀어냈고,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여자가 많았다.
매버릭이 웃기만 해도 여자들은 재밌어하면서 서슴없이 그의 어깨나 팔을 은근슬쩍 건드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향기를 맡고 다가온 여자들은 매버릭이 진지하게 만날 상대는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떠났다. 구스는 매버릭의 의도하지 않은 그의 장구한 여성 편력의 역사를 전부 지켜본 증인이었다.
“아니야. 어제 펍에서 너랑 헤어지고 곧바로 관사로 갔다니까? 진짜 잠을 설쳤어.”
매버릭은 딱 잘라 말했다. 구스는 못 믿겠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흘기며 “흐음, 그렇단 말이지…….”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매버릭은 그런 구스를 무시하며 뻐근한 어깨를 주물렀다.
그때, 제스터가 특유의 딱딱한 걸음걸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두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교탁 앞에 선 제스터는 그의 다부진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민간인 전문가들도 제군들을 교육하고 평가할 것이다. 적기에 관한 최고의 정보원이기 때문에 여기에 모신 것이다. 최고의 적임자 중 하나는 우리 기술자문그룹 대리인이다. 콜사인은 ‘찰리’다. 천체물리학 박사고, 민간 계약자라 경례할 필요는 없지만…….”
제스터가 뒷자리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인 구두 소리가 났다. 매버릭을 제외한 대원들이 일제히 그의 시선을 따라 몸을 돌렸다. 키가 크고 구불구불한 금발 머리의 여자가 두 개의 대열로 나뉜 책상 한복판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제스퍼 옆에 나란히 섰다.
“시작하시죠, 찰리.”
제스퍼가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찰리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우리는 F-5와 A-4를 미그기 대응 훈련에 쓸 것입니다.”
그녀는 곧바로 본론을 말했다. 몇몇 대원이 우아하고 지적인 그녀의 외모에 혹했는지 삐딱한 자세를 바로 하고 가장 자신 있는 얼굴 각도를 선보이며 찰리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시도했다.
“대부분 아시겠지만, F-5는 미그-28과 추력중량비가 다릅니다. 미그-28처럼 300노트 미만의 속도에서…….”
찰리는 가슴이 쓸쓸한 대원들의 절박한 구애를 깔끔하게 외면했다. 두어 명은 그녀가 만만하지 않은 여자라는 것을 직감하고 일찌감치 마음을 접었지만, 나머지는 오히려 자극을 받았는지 선글라스까지 벗고 눈을 반짝였다.
매버릭은 턱을 괸 채 발끝을 까딱거리며 찰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탐색하는 듯한 찰리의 시선이 잠깐 매버릭에게 고정됐다. 매버릭은 습관처럼 한쪽 눈을 찡그렸다. 찰리의 표정이 약간 부드러워졌고, 그것을 의식한 몇몇 대원이 매버릭을 힐끔거리며 그를 견제했다.
찰리는 언제나 멋진 여자다. 매버릭은 그녀의 목소리를 잠자리 동화 삼아 공상에 빠졌다. 곧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그는 별다른 뜻 없이 크게 하품했다. 찰리는 미그기에 관한 설명을 멈추고 매버릭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실례합니다, 대위.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찰리가 매버릭을 지목하자 이번에는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 쏠렸다. 매버릭은 얼른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조금 전의 부드러운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찰 리가 차가운 눈으로 매버릭을 응시했다. 그녀 매버릭이 민간인인데다 여자인 자신을 무시해서 딴청을 부렸다고 오해하는 듯했다.
‘매버릭, 인마!’
구스가 눈을 부라리며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렸다. 그는 매버릭을 쪼아댈 것처럼 몸을 들썩거렸다.
‘미안해, 구스. 나도 모르게 그만.’
매버릭은 멋쩍은 마음에 뺨을 긁적거렸다.
“대위.”
찰리가 명백한 경고의 뜻을 담은 어조로 매버릭을 불렀다. 매버릭은 자세를 바로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다음 입을 열었다.
“미그기에 관한 데이터가 정확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부정확하죠?”
“이 친구와 저는.”
매버릭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우리는 미그-28이 –4G의 속도로 급강하하는 걸 봤습니다.”
매버릭은 첫날부터 자신 때문에 덩달아 눈총을 산 구스에게 미안한 마음에, 그리고 지금껏 매번 자신이 미그기를 쫓아냈다며 으스대는 바람에 섭섭해했던 구스를 위해 이번에는 ‘우리’라고 말했다.
“어디서 봤죠?”
“그건 기밀입니다.”
“뭐라고요?”
찰리는 기가 막혀 웃었다.
“기밀 사항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매버릭은 정중하게 말했다.
“대위, 나는 일급 비밀 접근 권한이 있어요. 국방부는 내가 일급 비밀을 당신보다 많이 알도록 해주죠.”
찰리는 허리에 손을 얹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매버릭의 콧등을 때렸다. 하지만 매버릭은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이번 경우에는 제가 더 많이 아는 듯하네요.”
“그럼 대위, 말해봐요. 정확히 어디서 미그기를 봤죠?”
찰리가 왼쪽 눈썹을 치켜뜨며 신문하듯이 물었다.
“우리는…….”
“고마워.”
매버릭이 자신을 힐끔거리며 입을 열자 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버릭은 자신에게 쏟아진 적대적인 시선을 의식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모두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경계심과 시기심, 그리고 투쟁심이 느껴졌다. ‘다들 젊네.’ 매버릭은 의욕이 넘치는 그들이 부담스러웠다.
“우리는 미그기가 구름을 통과할 때 6시 방향에 있다가…… 놈의 위로 올라갔어요.”
매버릭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바로 위로 올라갔는데 상대를 어떻게 봤나요?”
“배면 미행을 했거든요.”
매버릭은 두 손을 ‘X’자 모양으로 교차하며 쾌활하게 말했다.
“개소리.”
그 순간 아이스가 헛기침하며 뱉어낸 조롱에 사방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구스는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얼굴로 조롱의 진원지를 찾았다. 아이스의 옆에 앉은 슬라이더가 구스에게 아는 체하며 능글맞은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매버릭은 아이스가 앉은 자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선글라스 아래 가려진 아이스의 눈은 아마도 승리에 도취해 멋들어지게 휘어졌을 것이다. 흐린 하늘처럼 근사한 회색 눈동자. 매버릭은 그 눈동자가 자신을 친근하게 응시하던 지난 시절이 떠올라 미소 지었다.
‘매버릭 저 자식, 날 비웃은 건가?’
아이스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새카만 선글라스 아래에는 매버릭이 기대하던 서글서글한 눈빛은 없었다. 아이스는 추억을 더듬으며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은 매버릭이 자신을 비웃었다고 오해했다. 경쟁심에 불타서 유치하게 면박을 줬다고 말이다. 그는 주먹 쥔 손을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책상 아래로 감췄다. 속이 뒤틀리는 불쾌한 감각에 아이스는 이를 갈았다. 누군가에게 무력한 어린아이가 된 듯한 기분을 느낀 건 난생 처음이었다.
“아니야, 정말이야. 진짜 끝내줬다고. 기체를 뒤집었지.”
주변의 웃음이 끊이질 않자, 억울한 마음에 구스가 씩씩거리며 항변했다.
“4G 속도로 움직이며 미그기와 마주친 채 배면 미행을 했다고요?”
찰리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매버릭에게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거리는 얼마나 됐죠?”
“2m 정도 됐나?”
매버릭이 구스에게 물었다.
“1.5m 정도였을 겁니다.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사진도 찍었죠.”
구스가 매버릭을 대신해서 찰리에게 말했다.
“예, 아주 가까웠어요. 1.5m 정도였을 겁니다.”
매버릭은 자랑을 늘어놓는 구스에게 맞장구쳤다. 그도 자랑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진 멋졌지.”
구스는 감탄사를 터뜨렸다. 두 사람은 미그기 조종사에게 한 방 먹여준 끝내주는 기억을 떠올리며,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만의 천국을 비행하기 시작했다.
“대위.”
찰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서 뭘 했죠?”
그녀는 신이 나서 몸을 들썩이는 두 사람은 한심하다는 듯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매버릭의 기억보다 더 차가운 눈빛이었다. ‘어제 만나지 않아서 그런가?’ 자신을 대하는 찰리의 태도가 사뭇 달라 당황한 매버릭은 구스의 옷소매를 슬쩍 잡아당기며 도움을 청했다. 구스는 흠흠 헛기침한 다음 제법 그럴듯한 단어를 내뱉었다.
“소통.”
“소통이요.”
매버릭은 얼른 구스의 말을 되풀이했다. 그런 다음 살짝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외교 관계를 유지했죠. ……그쪽에 야유를 보냈죠.”
매버릭의 말에 찰리의 얼굴이 더 싸늘하게 굳었다.
“손가락 욕 있잖아요.”
구스가 가운뎃손가락을 세우며 설명을 덧붙였다.
“나도 무슨 뜻인지 알아요.”
찰리는 한숨을 참지 못했다.
“저도 이런 제가 싫어요. 죄송합니다.”
구스는 손가락을 도로 접으며 우물쭈물했다. 다시 주변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실례했습니다.” 구스는 눈을 내리깔며 다시 사과했다. 찰리는 빛나는 미소로 그의 사과를 받았다. 그리고 이지적인 새파란 눈동자를 빛내며 매버릭에게 말했다.
“바로 당신이었군요.”
“그렇습니다.”
자신을 향한 찰리의 눈빛이 흥미로움으로 바뀌자, 매버릭은 내심 안도했다. 이번 꿈에서는 찰리와 사귈 마음이 없다고 해서, 그녀와 서먹하게 지내고 싶은 건 아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찰리 역시 자신에게는 그리운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제군들, 이제 날 시간이다. 이번 훈련의 최저 고도는 3,050m고 그 아래에서는 교전 금지다.”
시간을 확인한 제스퍼가 주변을 환기했다. 대원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서둘러!”
제스퍼가 외쳤다. 찰리와 시선을 주고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매버릭은 뒤통수가 따끔거리는 느낌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매버릭은 선글라스 아래 감춰진 그의 눈동자가 그립고 궁금했다. 매버릭이 인사라도 할 생각에 아이스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데, 그는 먼저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대위!”
복도에서 찰리가 큰소리로 매버릭을 불렀다. 구스와 잡담을 나누며 훈련장으로 향하던 매버릭은 움찔하며 걸음을 멈췄다. 이곳에서 또다시 찰리와 마주치는 것은 자신의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우리 자기, 오늘따라 더 멋지네.”
뒤따라 제자리에 선 구스는 매버릭의 옷깃을 빳빳하게 세워주며 찰리와 잘해 보라는 뜻으로 미소를 지었다. 매버릭은 고개를 내저으며 정색했다.
“아니야, 그냥 여기 있어.”
“이따 보자.”
매버릭이 간절한 눈길로 구스를 바라보며 그를 붙잡았지만, 그는 이미 결심을 굳힌 이후였다. 구스는 말없이 응원의 뜻으로 매버릭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매버릭이 평생 그리워하던 손길이었다. 꿈에서야 다시 만날 수 있는 손이었다. 마음이 약해진 매버릭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비행 점검 전에 다시 보자.”
멀어지는 구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매버릭은 생각에 잠겼다. 정말 운명을 거스르는 건 불가능한 건가? 어젯밤 펍에서 찰리와의 첫 만남을 피했지만, 그녀와의 인연은 어떤 식으로든 이어지려는 모양이었다.
찰리는 넓은 보폭으로 시원스레 매버릭에게 다가왔다. 매버릭 앞에 선 그녀는 자신감에 넘쳤으며 활기찼다.
“대위, 잠깐 대화 나눌 수 있을까요?”
찰리가 입을 열었다. 이번 꿈에서는 아까 강의실에서 만난 것이 첫 만남이었으니, 매버릭이 기억하는 불꽃 튀는 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미그기에 관해 궁금한 점이 더 있으십니까?”
“네, 맞아요. 부탁이 있어요. 언젠가 미그기 얘기를 좀 더 들었으면 하는데요.”
매버릭이 정중한 말씨로 묻자, 찰리는 주저하지 않고 시원스레 본론을 꺼냈다.
“일급 비밀 접근 권한이 있으시니까, 그걸 읽어보시면 되죠.”
매버릭은 찰리에게 선을 그었다. 찰리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턱을 비스듬히 들며 입을 열었다.
“난 생생한 목격담을 원해요.”
“아까 말씀드렸던 게 전부입니다.”
“대위. 내가 민간인 신분이라서 그러는 건가요, 아니면 여자라서 그러는 건가요?”
찰리가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직설적으로 물었다. 매버릭은 잠깐 침묵하며 말을 아꼈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함재 전투기 여성 조종사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때도 시기상조이니, 정치적 의도가 다분하니 말이 많았다. 그런 시대였으니 찰리가 얼마나 많은 벽에 부딪혀왔을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양쪽 다 아닙니다. 단지 남들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뿐입니다. 정식으로 당시 현장에 대한 보고를 요청하신다면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매버릭은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알았어요. 그렇게 하죠.”
그의 말이 일리 있었으므로 찰리는 흔쾌히 수락했다. 교관인 자신이 대원 중 하나와 사석에서 만나면 뒷말이 나올 수도 있었다. 그녀는 다시 미소를 되찾았고, 매버릭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됐다. 첫인상으로는 제 잘난 맛에 취해 사는 흔한 애송이 줄로만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진중한 면이 있었다.
“이만 가 봐요, 대위.”
찰리가 다시 말했다. 매버릭은 자신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호의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다음 자리를 떴다.
5.
아이스는 공중전화가 설치된 2층 복도의 난간에 걸터앉아 시곗줄을 끌렀다가 채우기를 반복했다. 겉으로는 평소처럼 여유로운 모습이었지만, 호흡이 거칠고 빨랐다. 시계를 매만지는 손길도 점차 초조함에 빨라졌고, 긴장한 탓에 축축하게 땀이 배어 나와 자꾸만 손이 미끄러졌다.
계단을 오르는 성마른 발소리가 들렸다. 아이스는 계속 시계를 매만지며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전날 맡았던 향기가 희미하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칙칙한 주변 풍경이 목가적인 정경으로 바뀌는 마법 같은 기적이 일어났다. 아이스는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발소리의 주인공이 매버릭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매버릭.”
아이스는 자기 자신도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의 풍랑을 감추고자, 시곗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매버릭은 지나치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아이스는 가뿐하게 난간에서 내려와, 매버릭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궁금한 게 있는데.”
아이스가 떠보듯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그는 여전히 시계를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고정한 상태였다. 무슨 까닭에서인지 매버릭을 똑바로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초조하고 답답한 기분도 가라앉지 않았다. 매버릭은 두 손을 모으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를 듣고 아이스는 마음을 다잡았다.
“네가 미그기와 기행을 부리는 동안, 쿠거는 누가 엄호했지?”
마침내 아이스가 고개를 들고 매버릭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아이스의 시선은 날카로웠다.
“나는.”
매버릭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제는 안다. 이날의 아이스가 단지 치기 어린 마음만으로 자신을 돌려세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매버릭은 미세하게 흔들리는 아이스의 눈동자를 보고, 그가 진심으로 쿠거를 염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있잖아, 카잔스키. 나는.”
단 하나뿐인 윙맨에게 새삼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감출 필요는 없다. 아직 서른 살도 되지 않은 젊은 대위인 아이스가 자신과 그 사이에 있었던 특별한 순간을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매버릭은 톰 “아이스맨” 카잔스키라는 남자를 자기 자신보다 더 신뢰했고, 그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은 없었다.
“항상 생각보다 몸이 앞서 나가.”
“무슨 뜻이지?”
아이스가 미간을 좁히며 무뚝뚝하게 물었다. 매버릭은 손을 풀고 한결 편한 자세로 말을 이었다.
“너는 기행이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어.”
“…….”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사람은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잖아? 난 종종 무모한 짓을 저지르곤 해. 그게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야.”
매버릭은 속마음을 털어놓은 것이 쑥스러워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입가를 매만지며 한없이 친근한 눈으로 아이스를 올려다보았다. 어떠한 의심도 아집도 질투도 없는 그저 맑고 무구한 눈동자를 맞닥뜨린 아이스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고, 매버릭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두려웠어?”
아이스의 목소리에 온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미그기와 마주쳤을 때?”
“응.”
“어땠을 것 같아?”
매버릭은 씩 웃더니, 말을 돌렸다. 아이스를 골려주고 싶은 마음에 그의 호기심을 잔뜩 불러일으키고 발을 뺄 작정이었다. 아마 아이스라면 오늘 밤, 잠도 못 자고 답을 알아내느라 끙끙거릴 것이다.
“참, 쿠거는 별문제 없었어. 쿠거가 어떤 놈인지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잖아.”
“너.”
아이스는 무심코 매버릭에게 손을 뻗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도로 내려놓았다.
“어?”
매버릭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이스는 실수를 저지를까 봐,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뭐야, 웃기는 놈. 그럼 난 먼저 간다.”
매버릭은 눈을 가늘게 흘기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더니, 조금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훌쩍 자리를 떴다.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아이스는 참았던 숨을 급하게 몰아쉬었다. 얼굴이 후끈거려서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보다 더 뜨거운 것은 피가 쏠려 욱신거리는 다리 사이였다.
아이스는 절망적인 심정에 입을 틀어막았다. 어제는 술기운 때문에 발기해버린 줄 알았다. 게다가 근처에 눈이 돌아갈 정도로 매력적인 여자도 많았다. 그래서 취기도 올랐겠다, 매버릭과 말로 공방을 주고받아 승부욕이 끓어오른 김에 때마침 이상형에 가까운 여자가 지나가서 분노와 성적인 흥분을 구분하지 못하는 몸이 제멋대로 반응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대체 뭐지? 왜?’
매버릭의 의도와는 달랐지만 결과적으로 아이스는 오늘 밤, 잠을 이루지 못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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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매브
아이스맨
매버릭
열세 번째 마그네타
4.
아침부터 날씨가 몹시 무더웠다. 강의실 공조기가 말썽이라, 주기장 한구석에 책상과 칠판을 갖추고 임시 강의실을 만들었다. 첫 모의전을 앞두고 임시 강의실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어제 펍에서는 세상 다신 없을 진실한 전우처럼 어깨동무하고 맥주병을 높이 들며 허세를 부려놓고서는, 날이 밝으니 다들 자신의 처지를 슬슬 실감하게 됐다.
모두가 전투기 조종사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들이었고, 자존심 또한 대단히 강했다. 스스로 자신이 최고라고 자신하는 이들은 바이퍼가 말한 명패에 반드시 자신의 이름을 걸리라는 포부를 가슴에 품었다. 그러니 어젯밤에는 온갖 무의미한 말을 지껄이며 즐겁게 어울렸던 이들이 이제부터는 단 하나의 성취를 두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사이가 됐다.
경쟁은 목표 의식을 고취하고 목표를 향해 나아갈 추진력이 된다. 한편으로 경쟁은 시지프스의 형벌이기도 하다. 막막함과 불안함을 등에 지고 하늘과 맞닿은 저 드높은 산의 정상으로 올라가는 과정이다.
그런 이유로 다들 어제와는 다른 삭막한 얼굴로 상대방을 견제하며 빈틈을 찾으려고 눈에 불을 밝혔다. 겉으로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새로 산 선글라스를 콧잔등에 느슨하게 걸치고 자신의 매력을 뽐내고 있었지만, 속은 바짝바짝 타는 중이었다.
주변 공기가 무거운 와중에 단 한 사람, 매버릭만은 그들과는 무관한 사람인 것처럼 전투기를 구경하며 한가하게 딴청을 피웠다.
“후아암―”
매버릭은 기지개를 켜며 크게 하품했다. 간밤에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다 보니 잠을 설친 탓에 졸렸다. 이번 꿈은 참 이상했다. 지금까지 꿨던 꿈은 건너뛰는 구간이 있어서 시간이 순식간에 흐를 때도 종종 있었고,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았다.
이번 꿈은 달랐다. 현실처럼 시간이 흘렀고, 현실처럼 몸과 마음이 지쳤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고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방전된 기계처럼 작동을 멈추고 말 것이다. 매버릭은 이 막대한 핸디캡 때문에 앞으로의 계획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뜯어고쳐야만 했다.
“매브, 피곤해?”
“응,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잤어.”
구스가 책상을 툭툭 치면서 묻자, 매버릭은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
“너! 생각 없다고 말하고서는 나 몰래 여자 만났구나?”
구스는 허랑방탕하게 여자와 놀아나는 매버릭을 상상하며 빙그레 웃었다. 매버릭은 반반한 얼굴 덕에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여자를 쉽게 꾀어냈고,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여자가 많았다.
매버릭이 웃기만 해도 여자들은 재밌어하면서 서슴없이 그의 어깨나 팔을 은근슬쩍 건드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향기를 맡고 다가온 여자들은 매버릭이 진지하게 만날 상대는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떠났다. 구스는 매버릭의 의도하지 않은 그의 장구한 여성 편력의 역사를 전부 지켜본 증인이었다.
“아니야. 어제 펍에서 너랑 헤어지고 곧바로 관사로 갔다니까? 진짜 잠을 설쳤어.”
매버릭은 딱 잘라 말했다. 구스는 못 믿겠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흘기며 “흐음, 그렇단 말이지…….”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매버릭은 그런 구스를 무시하며 뻐근한 어깨를 주물렀다.
그때, 제스터가 특유의 딱딱한 걸음걸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두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교탁 앞에 선 제스터는 그의 다부진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민간인 전문가들도 제군들을 교육하고 평가할 것이다. 적기에 관한 최고의 정보원이기 때문에 여기에 모신 것이다. 최고의 적임자 중 하나는 우리 기술자문그룹 대리인이다. 콜사인은 ‘찰리’다. 천체물리학 박사고, 민간 계약자라 경례할 필요는 없지만…….”
제스터가 뒷자리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인 구두 소리가 났다. 매버릭을 제외한 대원들이 일제히 그의 시선을 따라 몸을 돌렸다. 키가 크고 구불구불한 금발 머리의 여자가 두 개의 대열로 나뉜 책상 한복판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제스퍼 옆에 나란히 섰다.
“시작하시죠, 찰리.”
제스퍼가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찰리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우리는 F-5와 A-4를 미그기 대응 훈련에 쓸 것입니다.”
그녀는 곧바로 본론을 말했다. 몇몇 대원이 우아하고 지적인 그녀의 외모에 혹했는지 삐딱한 자세를 바로 하고 가장 자신 있는 얼굴 각도를 선보이며 찰리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시도했다.
“대부분 아시겠지만, F-5는 미그-28과 추력중량비가 다릅니다. 미그-28처럼 300노트 미만의 속도에서…….”
찰리는 가슴이 쓸쓸한 대원들의 절박한 구애를 깔끔하게 외면했다. 두어 명은 그녀가 만만하지 않은 여자라는 것을 직감하고 일찌감치 마음을 접었지만, 나머지는 오히려 자극을 받았는지 선글라스까지 벗고 눈을 반짝였다.
매버릭은 턱을 괸 채 발끝을 까딱거리며 찰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탐색하는 듯한 찰리의 시선이 잠깐 매버릭에게 고정됐다. 매버릭은 습관처럼 한쪽 눈을 찡그렸다. 찰리의 표정이 약간 부드러워졌고, 그것을 의식한 몇몇 대원이 매버릭을 힐끔거리며 그를 견제했다.
찰리는 언제나 멋진 여자다. 매버릭은 그녀의 목소리를 잠자리 동화 삼아 공상에 빠졌다. 곧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그는 별다른 뜻 없이 크게 하품했다. 찰리는 미그기에 관한 설명을 멈추고 매버릭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실례합니다, 대위.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찰리가 매버릭을 지목하자 이번에는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 쏠렸다. 매버릭은 얼른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조금 전의 부드러운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찰 리가 차가운 눈으로 매버릭을 응시했다. 그녀 매버릭이 민간인인데다 여자인 자신을 무시해서 딴청을 부렸다고 오해하는 듯했다.
‘매버릭, 인마!’
구스가 눈을 부라리며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렸다. 그는 매버릭을 쪼아댈 것처럼 몸을 들썩거렸다.
‘미안해, 구스. 나도 모르게 그만.’
매버릭은 멋쩍은 마음에 뺨을 긁적거렸다.
“대위.”
찰리가 명백한 경고의 뜻을 담은 어조로 매버릭을 불렀다. 매버릭은 자세를 바로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다음 입을 열었다.
“미그기에 관한 데이터가 정확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부정확하죠?”
“이 친구와 저는.”
매버릭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우리는 미그-28이 –4G의 속도로 급강하하는 걸 봤습니다.”
매버릭은 첫날부터 자신 때문에 덩달아 눈총을 산 구스에게 미안한 마음에, 그리고 지금껏 매번 자신이 미그기를 쫓아냈다며 으스대는 바람에 섭섭해했던 구스를 위해 이번에는 ‘우리’라고 말했다.
“어디서 봤죠?”
“그건 기밀입니다.”
“뭐라고요?”
찰리는 기가 막혀 웃었다.
“기밀 사항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매버릭은 정중하게 말했다.
“대위, 나는 일급 비밀 접근 권한이 있어요. 국방부는 내가 일급 비밀을 당신보다 많이 알도록 해주죠.”
찰리는 허리에 손을 얹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매버릭의 콧등을 때렸다. 하지만 매버릭은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이번 경우에는 제가 더 많이 아는 듯하네요.”
“그럼 대위, 말해봐요. 정확히 어디서 미그기를 봤죠?”
찰리가 왼쪽 눈썹을 치켜뜨며 신문하듯이 물었다.
“우리는…….”
“고마워.”
매버릭이 자신을 힐끔거리며 입을 열자 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버릭은 자신에게 쏟아진 적대적인 시선을 의식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모두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경계심과 시기심, 그리고 투쟁심이 느껴졌다. ‘다들 젊네.’ 매버릭은 의욕이 넘치는 그들이 부담스러웠다.
“우리는 미그기가 구름을 통과할 때 6시 방향에 있다가…… 놈의 위로 올라갔어요.”
매버릭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바로 위로 올라갔는데 상대를 어떻게 봤나요?”
“배면 미행을 했거든요.”
매버릭은 두 손을 ‘X’자 모양으로 교차하며 쾌활하게 말했다.
“개소리.”
그 순간 아이스가 헛기침하며 뱉어낸 조롱에 사방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구스는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얼굴로 조롱의 진원지를 찾았다. 아이스의 옆에 앉은 슬라이더가 구스에게 아는 체하며 능글맞은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매버릭은 아이스가 앉은 자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선글라스 아래 가려진 아이스의 눈은 아마도 승리에 도취해 멋들어지게 휘어졌을 것이다. 흐린 하늘처럼 근사한 회색 눈동자. 매버릭은 그 눈동자가 자신을 친근하게 응시하던 지난 시절이 떠올라 미소 지었다.
‘매버릭 저 자식, 날 비웃은 건가?’
아이스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새카만 선글라스 아래에는 매버릭이 기대하던 서글서글한 눈빛은 없었다. 아이스는 추억을 더듬으며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은 매버릭이 자신을 비웃었다고 오해했다. 경쟁심에 불타서 유치하게 면박을 줬다고 말이다. 그는 주먹 쥔 손을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책상 아래로 감췄다. 속이 뒤틀리는 불쾌한 감각에 아이스는 이를 갈았다. 누군가에게 무력한 어린아이가 된 듯한 기분을 느낀 건 난생 처음이었다.
“아니야, 정말이야. 진짜 끝내줬다고. 기체를 뒤집었지.”
주변의 웃음이 끊이질 않자, 억울한 마음에 구스가 씩씩거리며 항변했다.
“4G 속도로 움직이며 미그기와 마주친 채 배면 미행을 했다고요?”
찰리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매버릭에게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거리는 얼마나 됐죠?”
“2m 정도 됐나?”
매버릭이 구스에게 물었다.
“1.5m 정도였을 겁니다.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사진도 찍었죠.”
구스가 매버릭을 대신해서 찰리에게 말했다.
“예, 아주 가까웠어요. 1.5m 정도였을 겁니다.”
매버릭은 자랑을 늘어놓는 구스에게 맞장구쳤다. 그도 자랑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진 멋졌지.”
구스는 감탄사를 터뜨렸다. 두 사람은 미그기 조종사에게 한 방 먹여준 끝내주는 기억을 떠올리며,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만의 천국을 비행하기 시작했다.
“대위.”
찰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서 뭘 했죠?”
그녀는 신이 나서 몸을 들썩이는 두 사람은 한심하다는 듯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매버릭의 기억보다 더 차가운 눈빛이었다. ‘어제 만나지 않아서 그런가?’ 자신을 대하는 찰리의 태도가 사뭇 달라 당황한 매버릭은 구스의 옷소매를 슬쩍 잡아당기며 도움을 청했다. 구스는 흠흠 헛기침한 다음 제법 그럴듯한 단어를 내뱉었다.
“소통.”
“소통이요.”
매버릭은 얼른 구스의 말을 되풀이했다. 그런 다음 살짝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외교 관계를 유지했죠. ……그쪽에 야유를 보냈죠.”
매버릭의 말에 찰리의 얼굴이 더 싸늘하게 굳었다.
“손가락 욕 있잖아요.”
구스가 가운뎃손가락을 세우며 설명을 덧붙였다.
“나도 무슨 뜻인지 알아요.”
찰리는 한숨을 참지 못했다.
“저도 이런 제가 싫어요. 죄송합니다.”
구스는 손가락을 도로 접으며 우물쭈물했다. 다시 주변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실례했습니다.” 구스는 눈을 내리깔며 다시 사과했다. 찰리는 빛나는 미소로 그의 사과를 받았다. 그리고 이지적인 새파란 눈동자를 빛내며 매버릭에게 말했다.
“바로 당신이었군요.”
“그렇습니다.”
자신을 향한 찰리의 눈빛이 흥미로움으로 바뀌자, 매버릭은 내심 안도했다. 이번 꿈에서는 찰리와 사귈 마음이 없다고 해서, 그녀와 서먹하게 지내고 싶은 건 아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찰리 역시 자신에게는 그리운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제군들, 이제 날 시간이다. 이번 훈련의 최저 고도는 3,050m고 그 아래에서는 교전 금지다.”
시간을 확인한 제스퍼가 주변을 환기했다. 대원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서둘러!”
제스퍼가 외쳤다. 찰리와 시선을 주고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매버릭은 뒤통수가 따끔거리는 느낌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매버릭은 선글라스 아래 감춰진 그의 눈동자가 그립고 궁금했다. 매버릭이 인사라도 할 생각에 아이스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데, 그는 먼저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 * *
“대위!”
복도에서 찰리가 큰소리로 매버릭을 불렀다. 구스와 잡담을 나누며 훈련장으로 향하던 매버릭은 움찔하며 걸음을 멈췄다. 이곳에서 또다시 찰리와 마주치는 것은 자신의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우리 자기, 오늘따라 더 멋지네.”
뒤따라 제자리에 선 구스는 매버릭의 옷깃을 빳빳하게 세워주며 찰리와 잘해 보라는 뜻으로 미소를 지었다. 매버릭은 고개를 내저으며 정색했다.
“아니야, 그냥 여기 있어.”
“이따 보자.”
매버릭이 간절한 눈길로 구스를 바라보며 그를 붙잡았지만, 그는 이미 결심을 굳힌 이후였다. 구스는 말없이 응원의 뜻으로 매버릭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매버릭이 평생 그리워하던 손길이었다. 꿈에서야 다시 만날 수 있는 손이었다. 마음이 약해진 매버릭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비행 점검 전에 다시 보자.”
멀어지는 구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매버릭은 생각에 잠겼다. 정말 운명을 거스르는 건 불가능한 건가? 어젯밤 펍에서 찰리와의 첫 만남을 피했지만, 그녀와의 인연은 어떤 식으로든 이어지려는 모양이었다.
찰리는 넓은 보폭으로 시원스레 매버릭에게 다가왔다. 매버릭 앞에 선 그녀는 자신감에 넘쳤으며 활기찼다.
“대위, 잠깐 대화 나눌 수 있을까요?”
찰리가 입을 열었다. 이번 꿈에서는 아까 강의실에서 만난 것이 첫 만남이었으니, 매버릭이 기억하는 불꽃 튀는 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미그기에 관해 궁금한 점이 더 있으십니까?”
“네, 맞아요. 부탁이 있어요. 언젠가 미그기 얘기를 좀 더 들었으면 하는데요.”
매버릭이 정중한 말씨로 묻자, 찰리는 주저하지 않고 시원스레 본론을 꺼냈다.
“일급 비밀 접근 권한이 있으시니까, 그걸 읽어보시면 되죠.”
매버릭은 찰리에게 선을 그었다. 찰리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턱을 비스듬히 들며 입을 열었다.
“난 생생한 목격담을 원해요.”
“아까 말씀드렸던 게 전부입니다.”
“대위. 내가 민간인 신분이라서 그러는 건가요, 아니면 여자라서 그러는 건가요?”
찰리가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직설적으로 물었다. 매버릭은 잠깐 침묵하며 말을 아꼈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함재 전투기 여성 조종사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때도 시기상조이니, 정치적 의도가 다분하니 말이 많았다. 그런 시대였으니 찰리가 얼마나 많은 벽에 부딪혀왔을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양쪽 다 아닙니다. 단지 남들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뿐입니다. 정식으로 당시 현장에 대한 보고를 요청하신다면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매버릭은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알았어요. 그렇게 하죠.”
그의 말이 일리 있었으므로 찰리는 흔쾌히 수락했다. 교관인 자신이 대원 중 하나와 사석에서 만나면 뒷말이 나올 수도 있었다. 그녀는 다시 미소를 되찾았고, 매버릭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됐다. 첫인상으로는 제 잘난 맛에 취해 사는 흔한 애송이 줄로만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진중한 면이 있었다.
“이만 가 봐요, 대위.”
찰리가 다시 말했다. 매버릭은 자신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호의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다음 자리를 떴다.
5.
아이스는 공중전화가 설치된 2층 복도의 난간에 걸터앉아 시곗줄을 끌렀다가 채우기를 반복했다. 겉으로는 평소처럼 여유로운 모습이었지만, 호흡이 거칠고 빨랐다. 시계를 매만지는 손길도 점차 초조함에 빨라졌고, 긴장한 탓에 축축하게 땀이 배어 나와 자꾸만 손이 미끄러졌다.
계단을 오르는 성마른 발소리가 들렸다. 아이스는 계속 시계를 매만지며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전날 맡았던 향기가 희미하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칙칙한 주변 풍경이 목가적인 정경으로 바뀌는 마법 같은 기적이 일어났다. 아이스는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발소리의 주인공이 매버릭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매버릭.”
아이스는 자기 자신도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의 풍랑을 감추고자, 시곗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매버릭은 지나치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아이스는 가뿐하게 난간에서 내려와, 매버릭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궁금한 게 있는데.”
아이스가 떠보듯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그는 여전히 시계를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고정한 상태였다. 무슨 까닭에서인지 매버릭을 똑바로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초조하고 답답한 기분도 가라앉지 않았다. 매버릭은 두 손을 모으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를 듣고 아이스는 마음을 다잡았다.
“네가 미그기와 기행을 부리는 동안, 쿠거는 누가 엄호했지?”
마침내 아이스가 고개를 들고 매버릭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아이스의 시선은 날카로웠다.
“나는.”
매버릭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제는 안다. 이날의 아이스가 단지 치기 어린 마음만으로 자신을 돌려세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매버릭은 미세하게 흔들리는 아이스의 눈동자를 보고, 그가 진심으로 쿠거를 염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있잖아, 카잔스키. 나는.”
단 하나뿐인 윙맨에게 새삼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감출 필요는 없다. 아직 서른 살도 되지 않은 젊은 대위인 아이스가 자신과 그 사이에 있었던 특별한 순간을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매버릭은 톰 “아이스맨” 카잔스키라는 남자를 자기 자신보다 더 신뢰했고, 그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은 없었다.
“항상 생각보다 몸이 앞서 나가.”
“무슨 뜻이지?”
아이스가 미간을 좁히며 무뚝뚝하게 물었다. 매버릭은 손을 풀고 한결 편한 자세로 말을 이었다.
“너는 기행이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어.”
“…….”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사람은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잖아? 난 종종 무모한 짓을 저지르곤 해. 그게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야.”
매버릭은 속마음을 털어놓은 것이 쑥스러워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입가를 매만지며 한없이 친근한 눈으로 아이스를 올려다보았다. 어떠한 의심도 아집도 질투도 없는 그저 맑고 무구한 눈동자를 맞닥뜨린 아이스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고, 매버릭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두려웠어?”
아이스의 목소리에 온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미그기와 마주쳤을 때?”
“응.”
“어땠을 것 같아?”
매버릭은 씩 웃더니, 말을 돌렸다. 아이스를 골려주고 싶은 마음에 그의 호기심을 잔뜩 불러일으키고 발을 뺄 작정이었다. 아마 아이스라면 오늘 밤, 잠도 못 자고 답을 알아내느라 끙끙거릴 것이다.
“참, 쿠거는 별문제 없었어. 쿠거가 어떤 놈인지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잖아.”
“너.”
아이스는 무심코 매버릭에게 손을 뻗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도로 내려놓았다.
“어?”
매버릭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이스는 실수를 저지를까 봐,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뭐야, 웃기는 놈. 그럼 난 먼저 간다.”
매버릭은 눈을 가늘게 흘기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더니, 조금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훌쩍 자리를 떴다.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아이스는 참았던 숨을 급하게 몰아쉬었다. 얼굴이 후끈거려서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보다 더 뜨거운 것은 피가 쏠려 욱신거리는 다리 사이였다.
아이스는 절망적인 심정에 입을 틀어막았다. 어제는 술기운 때문에 발기해버린 줄 알았다. 게다가 근처에 눈이 돌아갈 정도로 매력적인 여자도 많았다. 그래서 취기도 올랐겠다, 매버릭과 말로 공방을 주고받아 승부욕이 끓어오른 김에 때마침 이상형에 가까운 여자가 지나가서 분노와 성적인 흥분을 구분하지 못하는 몸이 제멋대로 반응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대체 뭐지? 왜?’
매버릭의 의도와는 달랐지만 결과적으로 아이스는 오늘 밤, 잠을 이루지 못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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