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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4 01:18
근데 그게 덱스의 집착때문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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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콘크리트에 부딪히는 발소리가 벽을 타고 불규칙적으로 울린다.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되고 있는지 모를 비명과 총성을 뒤로하고 빠르게 계단을 올라오는 자들의 무게감 있는 발걸음은, 건물 전체에 압박감을 전염병처럼 퍼뜨렸다. M은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창백해진 팀원들의 얼굴을 훑었다. 모두들 침묵 속에서 각자의 숨소리를 억누르려 애쓰고 있었지만, 그들의 손은 떨림을 숨기지 못한 채 총만 꽉 쥐고 있었다. 천국행 티켓이라 믿어 모든 것을 담보로 했던 선택이 한낱 종이 쪼가리만도 못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진,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이젠 그런 여유조차 과분한 상황이었다.
분위기는 이미 덱스와 그의 여자에게 유리하게 넘어갔다. M은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철두철미한 그도 이젠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살아온 인생을 통틀어서 이토록 무력한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 어떤 행동이 더 그들에게 값어치 있을 선택인지 학습 되었을 리 없었다.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동요하고 있단 사실이 그를 압박한다. 허니의 주장이 정말 믿음직스러운 이야기인지는 굳이 따져볼 필요도 없었다. 이미 모든 상황이 그들의 멱살을 잡고 얼마나 불리한 상황인지 그녀 대신 증명해보이고 있었고, 피스크는 자비라는 미덕과 거리가 먼 사람이기에 실패를 용서 할 리 없었다. 더불어서 약속되지 않은 일들의 연속 또한 그 증거였다. 여자와 덱스를 당장 잡아다 처단한다 할지라도 누군가는 피를 흘릴 것이고, 그렇게 한들 지금 이 암울한 상황이 좋은 방향으로 전개된단 보장도 없었다. 발 아래, 저 멀리서 들리는 불길한 소리들은 누구에 의한 것이며, 누굴 향한 것일까?
M은 생각과 감상을 방해하는 시큰한 통증을 따라 고개를 내렸고, 붉게 젖은 셔츠 소매를 내려다 보았다. 조용히 다친 팔로 주먹을 쥐었다 놓는 것을 몇 번 반복했다. 그의 동작에 전완근과 손등에는 핏줄이 서기 시작했다. 핏줄들은 열린 상처로 계속해서 소중한 그의 혈액을 몸 밖으로 운반하고 토해낸다. 모든 것이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놓친 총을 줍고 장전 상태를 재점검했다.
이의 없으면 다들 준비해. M은 단 한 마디로 박쥐처럼 다시 피스크에게 등을 돌리는 한이 있어도, 쉽게 죽어줄 의향이 없다는 것을 표현했다. 목적이 있는 생존 본능은 그를 가득 채운 분노만큼이나 강했기에, 이 축축한 폐허를 지금 당장 묫자리로 쓰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오늘 일어난 이 모든 일을 망친 주범이 덱스와 허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일단 살아남은 뒤 방법을 다시 찾으면 된다고 생각하려 애썼다. 그 역시 덱스처럼 삶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를 가진 인간은 전혀 아니었지만, 생존에 미약한 애착을 갖게 만드는 존재가 극단적인 상황을 피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다행히 자리를 함께 한 그의 팀원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모두 엄폐를 하며, 총을 어깨에 견착하고 일제히 계단 쪽을 바라 보았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문다. M은 이 발악이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오길 바랐다.
계단을 올라오던 무장 인원들은 2열로 나뉘어 벽과 난간에 몸을 바짝 대고 걸었다. 언제든 사격할 준비가 된 자세였다. 이들 역시 피스크에게 약속받은 상황과 다른 현실에 적잖이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분명 점잖게 타겟들과 적선하고, 적당히 어울려주다 무장 해제 시킨 뒤 전원 사살하면 되는 간단한 임무였다. 1층에 망을 보는 자들이 있었던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중간층에서 잠시 발목이 잡히는 일이 있었다.
어둠 속에 무언가가 있었다.
고전을 면치 못하던 그들은 피스크의 불호령이 떨어질 때까지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들을 당당하게 만들어야 하는 악마의 쇠붙이조차 소용없어 보였다.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였지만, 피스크의 손에 목이 달아나기 전에 주어진 일을 마쳐야만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미확인 대상보다 실체가 확실한 피스크가 훨씬 더 두려운 존재였기에 그들은 팀을 나눴고, 그 중 일부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위로 올라왔다.
M은 피스크가 보낸 피라미들이 몇 명인지 알지 못했지만, 먼저 공격해야만 승산이 있을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시야 싸움은 당연히 저지대보다 고지대가 훨씬 유리했으며, 저들의 무장 수준을 모르니 계단에서부터 틀어 막아 그들의 움직임과 무기 사용을 최대한 제한하기로 했다. 선발대의 정수리가 몇 보이기 시작하자, M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적당하다고 판단된 타이밍에 사격 지시를 내렸다.
그의 신호 하나에 찢어지는 굉음과 함께 먼지와 섬광이 공간을 뒤덮는다. 위층과 아래층의 경계선, 계단은 순식간에 전장의 한가운데로 변했다. 지옥불에 달궈진 것 같은 뜨거운 탄피가 차가운 돌바닥을 구르는 소리따윈 쉽게 묻혀 버렸다. 피스크의 악마들은 갑작스러운 급습에 잠시 우왕좌왕하다가 이내 대열을 다듬고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거센 대응 사격이 시작 되었고, 아래에서 날아온 불길은 윗층을 할퀴기 시작했다. 아까의 라이브 방송보다 더한 지옥이 그들이 밟고 있는 땅에 도래했다.
적의 공격은 예상치를 훨씬 뛰어넘는 화력이었다. 시작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으나 그 뜻이 허공을 가르는 작은 쇳조각으로 인해 강제로 멈춘 자들은 양쪽에서 하나 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수적으로나 장비적으로나, 압도적으로 상대가 훨씬 우세했기에 바닥에 굴러다니는 탄피의 수가 늘어날수록, 그리고 교전이 길어질수록 M의 일행이 불리했다. 눈도 감지 못하고 맥없이 쓰러지는 동료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한 M은 이성을 잃고 무리하게 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 곳에서 제 인생의 막이 내리고 있단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이성은 판단을 흐리기 쉽상이고, 흐려진 판단은 일을 그르친다. 튀는 파편에 다시 놓친 총을 집는 사이, 어느새 그가 엄폐한 기둥 옆으로 돌아온 적의 모습에 M의 심장이 잠시 멎었다. 상대가 총을 뽑는 순간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진다. 눈 앞의 적보다 한참 늦었다는 것을 알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죽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은 없음을 온 몸으로 느끼며 총을 다시 잡으려 했다. 그동안의 일들과 인생, 끝까지 자신이 지키고 싶었던 소중한 존재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찰나의 짧은 순간동안 M은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길게 늘어진 카세트 테이프의 노랫소리처럼 뒤늦은 후회와 바람들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이제와서 의미없는 일인 것을 알지만 신이 저를 가엾게 여겨 기회를 주기까지 바랐다. 절망적인 상황의 연속으로 진작에 믿는 것을 관뒀고 그를 아는 이들이 들으면 비웃을 일이었지만, 지금이라도 하늘의 누군가가 제 기도를 한 번만 들어주길 감히 바랐다. 피스크에게 굴복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는 단순히 스스로의 욕심으로 살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자신이 없으면 돌봐줄 사람 하나 없는 그 불쌍한 영혼에 대한 집착과 애정이 계속해서 그가 머리를 조아리고 비굴하게 살도록 만들었다. 살면서 이토록 간절한 적이 있었던가? 그답지 않게 무의미한 잡념까지 갖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와 가까운 거리에서,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려던 남자는 별안간 벽에서 튕긴 탄환에 의해 보호되지 않은 턱이 뚫리며 주저 앉았다. M은 넋이 나간 상태로 총알이 날아왔을 방향을 쳐다보았고, 그 곳에는 당연하게도 덱스가 있었다.
*
비교가 안 될 화력을 가진 무장 세력을 소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이 곳에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남자가 있었다. 덱스는 근처에서 쓰러진 옛 동료의 총을 집어 각도를 재고, 사격하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공간까지 투시하는 능력따윈 없었지만, 계단을 걸어 올라오며 보았던 주변 환경들과 이미 바닥에 누워있는 적들의 장비 상태를 떠올리며 총알이 파고 들 급소의 위치를 계산한다. 그의 존재는 불변의 열세인 상황을 뒤집고 있었다. 덱스는 적의 수를 줄이는 것에 집중하며 허니가 있는 위치로 가까이 다가갔다. 자신의 여자에게 닿기 위해선 한 명당 한 발로도 충분했다. 그에게 이 불쾌한 상황을 서둘러 타도하고 자신의 북극성을 안전한 장소로 옮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다. 마치 박자를 타듯 각잡힌 깔끔한 총성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눈치 챈 허니는, 직접 보지 않아도 덱스가 점점 자신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의 덕에 총알 세례가 조금은 잠잠해지자, 허니도 남아 있는 권총의 탄환을 센 뒤 총격전에 가담했다. 피스크의 군대는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내렸다. 저들 중에 선량한 요원이나 한 때 동료였던 자들이 섞여 있을 지 모른다는 걱정이 허니의 마음을 잠시 무겁게 만들었지만, 지금 상황에 자비와 동정심은 사치였다. 여전히 생명에는 경중이 없다 생각해도 그녀 역시 마음 속에서 덱스보다 우위에 두고 싶은 존재는 없었기에, 흔들리는 마음의 고삐를 잡으려 애썼다. 처음 죄를 짓는 것은 어려워도, 한 번 지은 죄를 번복하는 것은 너무나 쉬웠다. 덱스의 곁에 남아있기 위해 양심과 죄책감을 버려야만 한다면, 그녀는 이제 기꺼이 그러기로 마음 먹었다. 허니를 만나고 덱스에게 변화가 생긴 것처럼, 그녀 역시 작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상황이 정리되었을 땐 매캐한 화약 냄새만큼 비릿하고 불쾌한 피냄새가 주위에 진동했다. 따뜻한 숨이 증발된 몸뚱이들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고, 깔끔하게 명이 끊어지지 않은 자들의 죽어가는 신음은 곳곳에서 작게 들리다 이내 그친다. 땅 아래의 소음은 언젠가부터 들리지 않았다. 마지막 적의 인기척이 사그러들자 덱스는 허니가 있는 곳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탄창을 교체하던 허니는 제 앞에 드리우는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고, 물기를 머금은 새빨간 눈으로 넋을 나간 채 자신을 바라보는 덱스와 눈이 마주쳤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단숨에 자신을 끌어안는 그의 품에 갇혀 버렸고, 드러난 목덜미로 뜨거운 숨을 여실히 느낀다. 그 숨 사이에는 오래된 두려움과 안도가 섞여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아도 그가 얼마나 안심하고 저때문에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지 맞닿은 가슴과 등을 끌어안은 팔로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제 자리로 돌아온 것 같았고 잠시동안 평온을 느껴본다. 허니도 그를 마주 안았고, 조용히 한 손을 들어 덱스의 뒷통수를 쓰다듬었다. 무탈하게 자신의 남자를 되찾은 것에 감사함을 느끼다가,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수 많은 시체들을 보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제부터 덱스만을 생각하며 타인을 지우겠다고 결심했지만, 그녀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대립되는 선택이었다. 직접 마주하는 죄악에 완벽히 무뎌지기 위해선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덱스가 자신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음을 알기에, 자신 역시 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이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덱스는 웃고 있었다. 허니도 이 상황에 만족하며 그와 눈을 맞추려던 순간, 그녀는 허름한 이 공간을 공유하며 정 반대편에 서 있는 형체를 보고 말았다. 피를 뒤집어 쓰고 새빨간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악마. 허니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
인간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이 있다.
미래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고, 누군가의 작은 선택이 인류와 사회라는 거대한 집단에서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 모르기에, 모든 인간은 평생동안 온 힘을 다해서 고민하고 선택해야 하는 암묵적인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떤 이는 이를 근거로 선택이 곧 책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사상은 우리 모두가 살아있는 동안 자유로움 속에서도 막중한 책임감을 인식하며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 낼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정말 선택이란게 언제나 존재하는 것일까? 모든 선택이 공평한 출발선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데도, 자유와 책임을 논하며 나눠 가질 수 있을까? 선택이 없는 선택을, 우리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으며, 최상의 선택이란 건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일까? 선택의 기회에 대해 잠시 생각하던 M은 끝없는 공허함에 빠져들었다. 마지막을 목전에 둔 순간까지도, 그가 원하던 신의 가호는 여기에 없었다. 어쩌면 겨우 목숨을 부지한 것이 정말 신의 뜻일수도 있는 노릇이었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연장시킨 존재가 구차하게 기도 드린 신이나 다른 사람도 아닌 벤자민 포인덱스터라는 사실에, 창백했던 그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안도감과 감사함대신 주체할 수 없을만큼 비뚤어진 분노와 치욕이 그에게 차오른다. 알량한 감정들은 마구 날뛰며 그가 죽는 것보다 살아있는 것을 더 끔찍하게 여기게 만들었다.
덱스가 보낸 탄환은 그를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M도 알았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 꽉막힌 남자는 오로지 제 여자에게 가해지는 모든 위협을 뿌리채 없애려는 목적 뿐이었고, 마침 타이밍 좋게 그 덕에 M이 살았을 뿐이었지만, 그 사실조차도 M에게는 너무나 불쾌하게 다가왔다. 인간으로서 덱스의 가치를 폄하하고, 그의 희생으로 다수의 평화를 도모하고 영웅이 되려던 M은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가진 것을 모두 잃은 부랑자 신세가 되었을 뿐. 너무나도 비참한 결말이었고, 스스로 무엇 하나 만족스러운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이 한심하고 실망스러웠다. 차라리 인생이 선택지로 위장된 필연이라고 믿는 편이 덜 괴로울 것 같았다. 방법은 과격했지만 그 역시 남들처럼 사랑하는 이와 행복한 미래를 꿈꿨다.
M은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하게 만드는 희망을 깨뜨린 자들에게 분노하는 자신의 모습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제 여자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덱스처럼, 자신도 더 이상 참지 않을 예정이었다. 그는 인생을 제어할 능력을 잃은 데에서 오는 모욕감과 열등감은 애써 외면하며, 비정상적으로 튀는 증오를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천국이라면,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어야 했다. 죽음도 피해간, 저 너머에 느껴지는 인기척은 자신이 증오하는 한 쌍의 연인이리라. M은 힘이 빠진 팔에 억지로 의지를 주입시키며 총을 고쳐 잡고, 한참 주저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와 함께 온 몸을 도는 모든 질투와 역겨움을 담아,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위해 그들을 지옥으로 끌어 내리고 말 것이라고 다짐한다. 익숙한 뒷모습의 주인이 보였고, 그 어깨 너머에 있는 까만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멀쩡한 다른 팔로, 총을 든 손을 지탱하며 조준했다. 그 모든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하던 여자의 눈이 커지는 모습은 오히려 그의 행동을 서두르게 만들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을 때, 총알의 궤적이 뚫은 것은 덱스의 등이 아닌, 허니의 가슴이었다.
너무나 긴급한 상황 전개에 자신의 남자를 지켜야 한다는 보호본능이 발동했고, 영문도 모르고 행복을 만끽하던 덱스를 돌려 세우고, 그를 아프게 하려는 미움을 몸으로 대신 받아냈다. 한 번 겪어본 비슷한 일이었지만 전혀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에 숨이 턱 끝에서 막혔고, 그와 동시에 몸을 역류한 피가 입을 통해 터져 나왔다. 저 멀리 있는 미묘한 표정의 남자와 괴로움에 물든 덱스의 표정을 번갈아 보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려 했지만, 몸의 상태는 그러지 못했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를 가득 채우는 것은, 방금까지 들이마셨던 쾨쾨한 공기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통제력의 조각도 직접 부숴버려 놓고, M은 자신이 기어코 벌린 일에 잠시 몸을 떨었다. 지극히 상식적인 기회를 주었지만 되려 자신이 사랑을 지킬 기회를 뺏어간 여자가, 덱스를 대신해 자신이 쏜 총을 맞았다. 복수의 순서조차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화가 났지만, 화풀이 해야할 대상이 자신을 죽일듯이 노려보고 있는 와중에 탄이 바닥났다는 현실에 당황했다. 분노에 눈이 멀어 덱스가 온 우주에서 제일 소중히 여기는 여자에게 해를 입혔다고, 뒷 일을 계산하지 않은 불찰이 일으켰다. 그는 그제서야 덱스의 분노를 샀다는 것이 내심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절대 가라앉지 않을거라 생각했던 흥분이 빠르게 사그라들기 시작하자 오한이 들면서 등골을 타고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그 감촉은 그대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만든다. M을 긴장하게 만든, 격분한 덱스의 눈초리는 그의 여자가 다시 피를 토해내자 그에게서 거둬졌다.
M은 자신의 행동은 절대 비겁한 짓이 아니며, 덱스가 주제넘게 운이 좋다고 속으로 질타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 무기가 없던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덱스가 심적으로 얼마나 큰 고통을 받을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덱스와 허니 또한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었고, 그 곁에 살고 싶어했을거란 사실을 끝까지 부정한다. 그들은 자신과 다르다. 계속해서 덱스와 허니를 파렴치하고 무자비한 악인으로 마음에 새겨 넣는다. 이건 그들이 응당 받아야 할 댓가보다 훨씬 가벼운 처벌이라 생각하며 비굴하게 자리를 피했다. 자신의 사랑을 모욕한 덱스와 허니에게 어울리는 가혹한 결말이 있길 진심으로 바라는 M의 손은, 그가 건물 밖으로 나갈 때까지도 파르르 떨렸다.
허니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끌어 당기는 덱스의 품에 쓰러졌다. 그의 어깨에 겨우 손을 올리고 시선을 맞추려 했지만, 몸에 힘이 도통 들어가지 않아 고꾸라졌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느끼지 못한, 차원이 다른 불안함과 공포가 흉부에서부터 싸하게 퍼져나간다. 앞으로 무슨 변화가 제 몸에서 일어날 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온 몸의 감각이 아득히 멀어지며 낯설어지기 시작했고, 몽롱해지는 정신을 애써 가다 듬으려 노력했다. 이 다음 내 뱉는 말이 인생의 마지막 문장이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자 다급한 마음까지 들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을 한 번도 염두에 둔 적 없었으니, 당연히 대비되어 있을 리도 없었다. 아직 덱스에게 할 말도 많았고, 해주고 싶은 말도 많았지만 숨이 한정되어 있다는 생각이 그녀에게 너무 큰 부담이 되었다. 날숨대신 진홍빛 액체를 뱉는 허니를 안은 덱스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허니는 손을 들어 건조한 그의 뺨에 얹었다.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덱스의 눈에서 흘러 넘친 액체가 그녀의 손에 막혀 방향을 틀었다.
"미안해, 끝까지 같이 가려했는데.. 그러지 못할 것 같아.."
마치 이별을 고하는 것만 같은 의미심장한 허니의 말에, 덱스가 이성을 잃고 무슨 말이냐며 언성을 높였다. 호흡이 어려워 말이 부자연스럽게 끊겼고, 입에 넘실대는 피때문에 발음이 뭉개졌다. 이명이 들리던 귀는 어느새 먹먹해져 점점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청각이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덱스의 목소리를 좀 더 듣지 못하는 현실이 더 아프고 괴롭게 다가왔다. 허니는 계속해서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며 덱스의 눈물을 닦아냈다. 모든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그에게 집중한다. 이 순간 그녀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였다. 자신의 남자가 무사히 행복해 지는 것. 그녀는 고통스럽게 피를 계속 토해내면서도 덱스에게 나가는 길을 각인 시킨다. 그 곳에 그를 도울 자신의 친구가 있을거란 말도 빼먹지 않았다. 그렇게 가진 호흡을 모두 낭비하면서 그에게 무사히 빠져나가라고 신신당부했다. 허니의 동작과 말이 점점 느려지다 마치 잠에 드는 것처럼 그녀가 눈을 감자 덱스도 숨을 쉬는 법을 까먹었다. 허니?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대며 이름을 불렀지만 그녀는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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