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2936184
view 1204
2024.12.01 12:50
근데 그게 덱스의 집착때문인거...
https://hygall.com/611610016
밤은 짧았고, 정해진 시간 안에 해내야 할 일은 많았다. 덱스가 줄곧 타고 다녔던 검은 SUV 차량이, 그를 태우고 그걸 하사했던 원래 주인을 찾아, 밤을 가르며 유유히 달리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아 묵묵히 바깥을 보는 덱스의 운명은, 핸들을 잡은 M의 손에 이끌려가고 있었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지만, 대화는 없었다. 둘을 실은 차는 그들에게 익숙한 헬스 키친의 골목과는 비교도 안 될, 잘 닦인 도로를 달리다 부촌의 외곽 어느 집 앞에 멈춰섰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가정 주택이었고, 거실엔 불이 켜져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 쯔음부터 총구에 소음기를 끼워 맞추던 덱스는 차가 멈추자마자 소리 없이 내렸고, M도 시동을 끄고 그를 바로 따라 나선다. 저녁 시간을 막 넘긴 주택가는 앞으로 일어날 일과 어울리지 않게,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가로등을 최대한 피하며 검은 인영 두 구가 어둠에 몸을 맡겼다. 허락 받지 않은 남의 잔디밭을 서슴없이 가로 지르는 덱스와 달리, M은 미리 지시받은대로 마당에 놓여진 디딤돌만을 밟는다. 설치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돌들은 딱 보기에도 사용감이 많지 않았다. 둘은 곧장 현관문으로 향했다. 익명의 누군가가 미리 손을 봐둔 문을 M이 장비를 이용하여 열어버리자, 덱스가 제 집인것마냥 성큼성큼 들어간다. 갑자기 들이닥친 낯선 이들의 방문에, 거실 테이블에서 다정하게 티타임을 가지던 중년의 부부는 크게 놀랐다. 부부는 이 집의 주인이었고, 그들의 저녁 일정에 덱스와 M의 방문이 고려 되었을리가 없었다. 중년의 남자가 식은땀을 흘리며 덱스에게 누구냐고 물었지만 덱스는 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덱스의 손으로 향한다. 시커먼 총은 덱스가 그들이 두려워해야하는 존재라는 것을 각인시킨다. 여자는 덱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고, 그 눈빛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덱스가 그들의 가까운 곁까지 다가가 준비했던 총을 겨눌 때까지, M은 세 명이 모두 잘 보이는 현관 위치에서 대기를 한다. 현관 문에서 세 발자국. 그는 덱스가 모든 일을 끝마칠동안, 홀로 집 안에 설치된 CCTV에 잡히지 않는 유일한 사각지대에 머무른다. 그것이 M의 역할이었다. 여자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덱스에게 말을 걸었다. 차분한 척하고 있지만 속사포로 내뱉는 말이 얼마나 그녀가 절박한 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자신이 누구인지 알 것이라고 믿고 있었고,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남편은 그냥 보내줘요. 이 사람은 이 일과 아무 관련 없고, 조금만 시간을 준다면 내가 입단속을 확실히 시킬테니 문제 될.."
덱스의 검지 손가락이 여자의 말을 단호하게 끊어 냈다. 시선은 계속해서 여자와 맞춘 채,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남자의 관자놀이에 총알을 박아 넣음으로써 그녀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초면인 여자와 남자에게 악감정은 없었다. 덱스는 그저 지금 자신의 처지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었다. 찰나의 순간에 총구에서 요란하게 나온 금속이 제 남편의 머리를 관통하고 반대쪽 바닥에 박히는, 그 모든 과정을 곁눈질과 소리로 접한 여자가 눈을 질끈 감았다. 바람빠진 풍선처럼 천천히 숨이 빠져나가고, 이제 한낱 고깃덩어리가 된 남자의 몸뚱이는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부부가 작별 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남자에게 무자비한 죽음을 선사한 덱스의 눈에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는 덱스를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선택한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사랑하는 이를 지킬 수 있다는 착각이 깨지고,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고 만 여자의 몸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볼을 타고 투명한 후회과 분노가 흐르기 시작했다. 덱스가 이번엔 여자에게 총구를 겨눴다.
완수해야 할 임무의 첫 단계, 배신자를 처단할 것. 임무를 마무리하려면 배신자로 지목받은 이 여자를 죽여야만 했다.
*
여자는 이 바닥에서 윌슨 피스크가 뉴욕의 시장 자리를 탐내고 있다는 것을 제일 먼저 알아 챈 사람이었다. 뉴욕의 상원의원이었던 그녀는 피스크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았고, 그의 야욕을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를 저지할만한 사람들을 모으고 후원을 하기로 결심했다. 자신이 있었던만큼, 아주 과감한 수를 뒀다. 어찌보면 무모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피도 눈물도 없는 피스크에 대응하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힌 적이 있는 자들을 소집했다. 뒷 탈이 없도록, 꺼지지 않는 지옥불처럼 그를 계속해서 증오할만한 자들로 선별해냈다. 그녀는 자신이 곧, 정의라는 오만한 자세를 갖고 있었다. 악인들끼리 치고 받고 싸우기를 원했고, 상종조차 하기 싫은 범죄자들끼리그러다 자멸할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 그녀의 패인이었다. 결국 모두 같은 땅 위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망각했다. 피스크때문에 손에 피를 묻히고 거짓으로 눈과 귀와 입을 가린 자들이, 무엇때문에 망가진 삶을 되돌리고 살고 싶어 하는지를 그녀는 알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그녀의 안중에도 없었다.
피스크의 앞 길을 망치는 조건으로 M과 덱스의 뒤를 봐주고, 금전적으로 지원해주던 사람. 어찌보면 허니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은인같은 사람이었지만 그 은혜는 이제와서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피스크는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영악했고, 강해져 있었다. 그가 굴리는 모든 주사위들은 시에서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그녀조차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몸집이 커져있었다. 의원은 자신이 결성한 조직이 위험에 처하자 서둘러 발을 뺐지만, 이미 이 도시의 왕이 나서 친히 그녀에게 낙인을 찍은 뒤였다. M과 덱스가 의원을 찾아온 이유는, 단순히 그녀가 자신들의 손을 놓아서가 아니었다. 그녀의 종이었던 그들은, 이제 낙인을 쫓아 찾아 온 사형집행인이 되었다. 때론 소중한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 정의를 등져야 할 때가 있었고,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피스크는 덱스와 그의 일당들이 누구의 후원을 받는지 집요하게 알아냈고, 실체를 찾았을 때부터 그에게 어울리는 판을 짜기 시작했다. 때론 누군가가 뿌리째 뽑혀야 하는 잡초가 되어야 하고, 희생당하며 모두에게 모범을 보여야 했다. 시작은 피스크의 철학이었다. 의원의 시신과 명성은, 그녀가 가지고 놀던 쓰레기들과 함께 묻어줄 예정이다. 그동안 자신을 꽤나 골탕 먹인 것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그녀가 유종의 미를 거두고 뼈저리게 느낄 수 있도록. 덱스를 선두로 한 이 모든 상황은 그녀의 자택에 있는 CCTV에 여실히 담길 것이고, 피스크는 내일 아침이 밝으면 FBI에게 그걸 넘길 계획이었다.
CCTV의 사각지대, 족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설치된 조형물과 잠긴 문을 여는 것까지. 뉴욕 불레틴은 상원 의원 부부의 암살을 덱스의 단독 범행인 것처럼 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욕을 채우기 위해 그의 탈옥을 도운 의원은, 결국 통제불능의 괴물의 손에 죽었다고 역사에 이름을 남길 것이다. 이 땅에서 피스크를 배신한 자는 죗값을 치뤄야만 했다.
여자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사랑하는 이를 죽인 살인자를 올려다보는 눈빛엔 혐오와 분노, 원망과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눈빛이 죄책감따윌 심어주길 바랐지만, 타인의 감정에 둔감한 덱스에겐 턱없이 부족했다. 여자는 현관 앞에 서 있는 M과 자신 앞에 서 있는 덱스를 번갈아 보았다. 자신이 과거에 행한 일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눈 앞에서 잃은 것처럼, 모두 피스크에게 굴복한 죗값을 받게 될 것이며 결국 파멸에 이를 것이라고. 쓰러진 남편의 시체를 무릎에 뉘이고 차갑게 굳어가는 손을 맞잡은 여자는, 저주에 가까운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남편과 똑같은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다. 겹친 채로 쓰러져 있는 부부의 시체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던 덱스는 M의 뭐라 하기도 전에 자리를 떴다. 의원의 말이 거슬렸지만 그들의 죽음이 안타깝진 않았다. 자신의 북극성을 지켜내기 위해선 이 방법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뿐이다. 차를 타고 다시 원래 있던 건물로 돌아올 때까지, 두 사람은 여전히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덱스와 M, 모두 지금의 몸부림은 파멸을 잠시 늦출 뿐,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절대 아님을 이성적으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이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이들을 담보로 한, 이 종속을 풀 수 없었다. 한 쪽의 희생으로 이 악순환의 고리를 깰 수 있었지만, 제 것이 소중한만큼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다. 애초에 그들에게 주워진 선택지는 없었다. 양심은 침묵했고, 이미 망가진 마음 위에 얹어진 또 하나의 죄는 이제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
벤자민 포인덱스터는 오늘 밤, 뉴욕 시장 후보 연설 현장에서 누군가의 암살을 노린다.
맷과 캐런이 지난 몇 달간 포인덱스터를 추격하고 그와 충돌하며 얻은 정보 중 하나였다. 그가 탈옥한 이후 지나간 모든 길엔 죽음이 전리품처럼 남았고, 희생자들의 피로 새로운 길이 이어졌다. 언제나 말썽이던 피스크가 차기 뉴욕 시장으로서 기대를 받는 중이라, 대중들의 시선을 인식한걸까? 그가 의외로 잠잠한 반면에, 모든 사건에 포인덱스터, 그가 연루되어 있었다.
맷은 포인덱스터가 벌인 일들에 골머리를 앓으면서도, 실종된 허니의 안위를 심히 걱정하고 있었다. 그녀의 실종이 포인덱스터와 연관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고, 적극적으로 그녀가 포인덱스터를 멀리 하도록, 좀 더 과감히 뜯어말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에게 죄책감을 가중시켰다. 늘 그렇듯 헬스 키친에서 일어난 이 모든 일들에 석연찮은 부분이 있었지만, 음모를 거둬내고 진실을 또렷하게 보고자 한 자리에 가만히 있을 시간은 없었다. 맷이 직접 포인덱스터를 저지하기 위해 떠난 자리에서, 캐런은 근래 헬스 키친에서 일어난 사건들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의 정체를 찾고자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모든 일들이 마치 누군가가 정성을 들여 짠 시나리오처럼, 미리 준비된 퍼즐 조각을 그저 맞는 자리에 배치하는 것처럼 정렬되고 있다는 느낌을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다. 경찰과 FBI, 뉴욕의 모든 언론들이 누군가의 체스 말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그 정도의 권력이 있는 자는 윌슨 피스크밖에 없었지만, 그가 포인덱스터와 힘을 합칠리가 없다는 사실이 판단을 흐려 놓는다. 둘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그들의 과거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피스크는 자신을 죽이고 싶어하는 적을 그냥 두는 법이 없었고, 포인덱스터 역시 자신을 이용하고 질서정연했던 그의 삶을 망가뜨린 자를 도울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잘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사이좋게 돌아가고 있었다.
캐런은 뚝심있게 피스크를 의심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알았고, 결국 포인덱스터가 벌이는 모든 난장판으로 득을 얻을 유일한 인간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 땅의 모든 혼란은 그에게 시작되었다는 사실과, 그녀의 예리한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피스크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언론들을 집중 조사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이상한 영상을 얻었다. 뉴욕 불레틴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원의 일상을 담은 영상. 평범하기 짝이 없는 어린 신입의 브이로그 영상이었지만, 구석에 찍힌 누군가의 PC 모니터에 떠 있는 기사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그 모습이, 캐런의 눈에는 보였다. 소란스러운 사람들을 신경쓰지 않은 채 기사 작성에 열중하는 남자가 있었다. 자리의 주인은 피스크에 대해 긍정적인 기사를 자주 내던 기자였고, 캐런이 영상을 최대 배율로 확대해보자 그가 작업하던 끔찍한 기사가 보이기 시작했다. 모니터에는 뉴욕을 대표하는 상원 의원의 죽음과 그녀를 죽인 포인덱스터의 탈옥과 죽음에 대한 내용이 A부터 Z까지 실려 있다는 1면의 속보였다. 몇 주전에 업로드 된 영상에서 내일 날짜가 찍혀있는 모습을 본 캐런은 정체모를 불길함을 느끼며, 기사 속 주인공인 상원 의원의 집으로 다급히 찾아갔다. 부유한 동네라 그런지 사이렌 울리는 것이 일상인 아랫 동네와 다르게,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그녀의 차를 지나치는 맞은편의 검은 SUV 한 대를 제외하고, 거리를 지나다니는 차조차 없었다. 그녀는 폭풍전야를 맞이 한 것 같은 자신의 느낌이 기우이길 바라며 속도를 냈다.
의원의 집 앞에 도착한 캐런이 옷 매무새를 다듬고 예의를 차리며 현관의 초인종을 눌렀으나,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집 안과 달리 아무런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무심코 돌린 손잡이를 따라 문이 너무나 쉽게 열리자 그녀는 뒷 목의 솜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낀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아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몇 걸음 가지 않아 안쪽에서 바깥 쪽으로 향하는 붉은 발자국이 보였다. 좀 더 깊숙히 들어가자 거실 한복판에 쓰러져 있는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시뻘건 피가 바닥에 흥건히 고여있었고, 발자국은 그들로부터 시작되어있었다.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지를뻔한 그녀는, 그들을 해한 자가 아직 같은 공간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본능에 간신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고작 몇 초밖에 안되는 침묵이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고, 이 곳에 살아 숨쉬는 사람이 저 혼자라는 것이 확실해지자, 그제서야 죄스럽게 안도감을 느낀다. 캐런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경찰에 신고를 했다. 두서없이 상황을 설명하다, 자신의 신상을 묻는 질문에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이 정신을 차렸다. 최초 신고인의 전화답게 아주 당연한 질문 절차였지만, 이 말도 안되는 상황때문인지 본능이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재차 말을 거는 수화기 너머의 경찰을 무시한 캐런은, 급하게 전화를 끊고 차에 올라탔다. 마치 대단한 예언의 서마냥 미리 준비된 기사를 좀 더 보기 위해, 영상을 다시 재생시켰다. 그녀가 손짓으로 되돌린 시간을 따라, 다시 문제의 자리에 앉은 사람은 영상 찍는 이를 신경쓰지 않고 성실하게도 기사를 작성하고 있었다. 촬영자가 산만하게 카메라를 흔드는 덕에 자세한 내용은 보이지 않았지만, 큰 제목과 일부 내용을 어렵게나마 유추할 수 있었다.
영웅의 몰락, 사이코패스 범죄자를 도운 자경단의 최후.
윌슨 피스크의 주장, 증명되었나? 차기 뉴욕 시장 후보의 천리안.
경찰과 미 연방수사국, 데어데블 사살.
더 이상 커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캐런의 눈이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시작은 알 수 없지만 모든 것이 처음부터 치밀하게 준비되어 온 함정이었다. 맷이 위험하단걸 그에게 알려야만 했다. 캐런은 조수석으로 휴대 전화를 내팽개치고 시동을 걸었다. 그가 포인덱스터를 막기 위해 어디로 향했는지 아는 그녀는, 문제의 장소로 차를 몰았다. 그녀의 신고를 받고 길을 올라오는 것 같던 경찰차 한 대가 그녀의 차를 지나쳐 가는 듯 하더니, 이내 U턴을 하며 조용히 쫓아오기 시작했다. 핸들을 꽉 쥔 두 손에 땀이 고이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하얀 손이 핏기가 가시고 더 하얗게 질렸다. 사이렌도 켜지 않고 추격해오는 자들에게 이상함을 느낀 캐런은, 운전대를 더 강하게 쥐며 악셀을 밟기 시작했다.
*
덱스는 총을 겨눈 채로 자신을 둘러싼 남자들 앞에서 조용히 총기를 점검하고 조립하기 시작했다. 군대에서 저격수로 지내며 몸에 익혔던 대로 준비를 마친다. 각잡힌 자세로 스코프를 들여다 보았다. 덱스와 달리 아직 준비가 한창인 연설 장소의 단상은, 나무와 온갖 장애물들로 가려져 있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절대 불가능한 임무였다. 덱스는 자신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자들이 왜 이 장소와 자신을 택했는지 그제서야 납득이 갔고, 자신에게 이 정도의 무대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다. 원하던 원치 않던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허니의 안전을 위해, 자신은 그 기대에 부응을 해야만 했다. M은 피스크의 지시대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같은 덱스에게 총알을 단 한 발만 제공했고, 덱스는 굳이 이유를 묻지 않은 채 그걸 아무렇지 않게 받았다. 성인 남성의 손가락 두 마디만한 차가운 탄환은 백발백중시키는 덱스의 능력을 상징함과 동시에, 실패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는 피스크의 뜻이 담겨있었다. 다시 스코프로 목표가 설 장소를 바라보며 머릿 속으로 계산을 끝마친 덱스는, 말 없이 건조한 표정으로 탄창에 한 발의 실탄을 장전했다. 언제나 목표를 맞추는 것에 자신이 있던 덱스처럼, 그가 명중시키지 못 할거란 불신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작전 시간까지 잠시 휴식을 취하던 덱스는 최대한 생각을 비우려고 노력했다. 그저 한 시라도 빨리 자신의 북극성을 무사한 상태로 보고 싶었고, 그녀를 품에 가둬서 향을 맡고 안정을 되찾고 싶었다. 그의 세상에서 신경 안정제 대신 만성의 불안과 환청을 잠재울 수 있는 건 허니밖에 없었다. 허니를 곁에 앉힌 이후로 안정제가 필요 없어진 덱스였기에, 그녀와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수록 감정이 요동치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덱스의 뇌는 목적 달성을 위해 오로지 허니만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모든 상황이 불편했지만 그의 두개골 안에 든 컨트롤 타워는, 부정적인 부산물들을 억누르려 애를 썼다. 지금처럼 실수를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상황에 임시 방편으로 그녀를 떠올리는 것을, 덱스의 몸은 태초부터 그렇게 설계된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M은 계속해서 자세를 뒤척이는 덱스를 바라보다 미리 준비한 신경 안정제를 건넸다. 받아. 덱스는 그가 자신을 걱정해서가 아닌, 임무를 망치지 말라는 의미에서 보이는 행동인 걸 알고 있었다. 익숙한 약통을 잠시 뚫어져라 쳐다보던 덱스는 필요 없다며 이내 그의 손길을 무시했고, 그 때문에 M의 얼굴이 잠시 구겨졌다.
M과 피스크, 덱스. 조금씩 달랐지만 이들에게는 통제 속에서 안정과 쾌감을 느낀다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역시 기질적으로 통제광인 M의 입장에서, 허니의 손길을 탄 덱스가 자신의 통제와 예측을 벗어날 때마다 심기가 거슬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덱스는 어서 임무를 끝내고 어떻게든 허니를 만나러 갈 생각 뿐이었고, M 역시 덱스의 생각을 읽고 있었다. 이 불쾌하기 짝이 없는 임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덱스가 죽어야만 완벽해진다. 그렇기에 덱스는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 이 곳에서 죽어야만 했으며, 덱스는 감히 그런 상상조차 하면 안됐다. 어떠한 변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게 설명했음에도 살아서 허니를 볼 생각을 하는 덱스가 지독하게도 거슬리는 M이었다. 자신이 지키는 불쌍하고 가여운 영혼을 위해, 벤자민 포인덱스터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줘야만 했다. 이 충동적이고 위험한 남자가 어디로 튈 지 몰랐기에 M의 속만 하염없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묘한 불길함이 그가 딛고 서 있는 바닥에서부터 올라왔지만 애써 무시한다. 운명의 신이 있다면, 덱스가 아닌 제 편이어야만 했다.
*
허니가 목적지 부근에 도착했을 땐, 이미 후보들의 기조 연설이 막 시작된 상태였다. 멀리서부터 건물에 인접한 차의 형태를 본 그녀는, 일부러 타고 온 차를 멀리 대고 도보로 접근했다. 주차되어 있는 택배 회사의 로고가 새겨진 흰색 밴과 덱스의 차량 근처를 기웃거리는 몇 명의 남자들이, 허니의 판단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녀는 소리를 낮추고 헤일리가 알려준, 오래되어 잊혀진 통로로 덱스가 있을 건물에 잠입했다. 발소리를 죽이며 인기척이 있는 층을 찾아 계속해서 올라간다. 사방에 깔린 유리조각과 돌가루들이 신발과 마찰되며 내는 소리만이, 습기가 벽을 타고 흐르는 음침한 건물 속에서 그녀와 함께 한다. 모든 감각을 곤두세우고 금속이 맞부딪히는 소리와 빛이 새어나오는 곳으로 다가가니 덱스, 그가 그 곳에 있었다.
육중한 저격총을 창가에 걸친 채, 그 곁에 앉아있는 덱스 주변으로, 불과 몇 시간 전에 봤던 사내들이 포진해 있었다. 덱스를 제외한 모두가 무장을 한 상태였고, 그들은 방탄복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한정적인 총알로 적들을 확실하게 제거하기 위해선 신중하게 머리를 노려야 성공 확률이 올라간다는 이야기였다. 허니는 그들의 장비를 옮겼을 보관함이 적재되어 있는 곳으로 몸을 숨기고, 가지고 있는 탄환의 수를 세었다. 혼자 대치할 경우, 아랫층에 있는 인원들이 올라오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인당 두 발씩 발포할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덱스만은 아무런 보호장비를 착용하고 있지 않았기에, 그를 보호하기 위해선 섣불리 나서서는 안됐다.
공간의 한 쪽엔 수 많은 모니터가 연설 현장을 생중계하는 채널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떠들썩한 현장의 분위기와 대조적으로, 이 곳의 사람들은 숨을 죽이며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같은 상황을 두고 현장의 사람들에겐 선택의 순간이었지만, 이들에겐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었다. 모니터 속 일부 시민들은 자리에 있지도 않은 윌슨 피스크의 얼굴을 그린 피켓을 들며 그를 지지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계속해서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는 M을 살피며, 허니는 이들이 암살하려는 인물을 추측하며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단시간에 공격하기엔 장비의 수준이 너무 차이가 났다. 그 때문에 시간을 끌기엔 한계가 있으니 정확한 타이밍이 필요했다. 덱스처럼 보호구가 없는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주변 기물들을 최대한 활용해 몸을 숨겨야 한다. 허니는 자리를 옮겨가며 숨을 만한 곳들을 미리 익히기 시작했다. 저들을 모두 제압하기 위해선 피날레에 등장할 피스크의 사병들이 제격이었지만 허니는 그들의 등장을 미리 알고 있을 뿐, 그들을 억지로 불러낼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했다. 덱스의 손에 불필요한 피가 묻는 것을 막고, 이 빌어먹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어떻게든 암살 시도를 막아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이 덱스를 이용해야 하고 타겟을 제거해야 한다면, 분명 그를 함부로 해하지는 못할거란 확신이 들었다. 어쩌면 그의 능력을 빌리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허니는 덱스를 먼저 말려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연설을 마친 한 후보가 내려가고, 또 다른 후보가 단상을 올라왔다. 언론의 평은 그리 좋지 않았지만, 남들과 다른 시민들의 환호성을 이끌어내던 그 후보는, 인사를 하고 관중을 진정시키는 데에만 꽤 긴 시간을 소요했다. M은 덱스에게 신호를 줬고, 덱스는 자세를 잡고 스코프를 들여다 보았다. 미리 계산해둔 총알의 궤적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후보의 머리와 일치했다. 덱스가 방아쇠를 당길 것 같은 기미가 보이자, 허니는 상자들에 몸을 숨기고 덱스의 근처에 있는 남자들을 조준했다. 빠른 시간안에 확실하게. 최대한 많이 제압하여 분위기를 흔들어놔야만 했다.
가장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는 두 명을 찍은 허니는, 망설임없이 그들의 머리를 노렸다. 허공을 울리는 총성 두 발에, 방금까지 멀쩡하게 서 있던 남자 둘이 고꾸라지자 내부는 순식간에 혼란스러워졌다. 허니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다시 우왕좌왕하는 남자들을 조준한다. 그녀가 한 명을 더 쓰러뜨리자, 그제서야 총구에서 뿜어져나오는 불길을 감지한 M이, 침입자의 위치를 파악하고 사내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계속해서 민첩하게 자리를 옮기는 허니가 한 발 빨랐고, 허니는 몇 명을 더 제압한 뒤 덱스에게 소리쳐 자신이 왔음을 알리며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말라고 외친다. 불청객의 정체를 알게 된 M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지기 시작한 반면에, 덱스의 입꼬리는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
허니의 등장과 함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M에게는 좋지 않은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예정되었던 것보다 후보의 연설이 짧게 끝났다. 자신이 암살당할 위기에 놓였다는 소식을 미리 접한 후보는 계획보다 빠르게 연설을 마치며 내려가려 하고 있었고, 그 진실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둘 뿐이었다.
덱스가 노리는 후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던 맷은 며칠동안 깊은 고민 끝에 사람을 추려 냈고, 한 밤중에 마스크를 쓰고 찾아가 그에게 경고를 전했다. 최근 언론매체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어둠 속에서 정의를 구현하는 맷의 이면을 헐뜯기 시작했다. 모든 자경단원들이 손가락질을 면치 못했지만, 십자가에 내걸린 그의 신처럼 데어데블이 제일 핍박받고 있었다. 그 비난들은 도시의 낮에도 영향을 주고 있었고, 차기 시장 후보들 중 대다수가 그 생각에 동의한다는 것을 맷도 알고 있었다. 점점 그의 행동에는 제약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선의로 행동하는 것조차 문제가 될 가능성이 다분했지만 신념적으로 누군가의 위기를 못 본 척 할 수 없었기에, 맷은 거부당할 위험을 안고 후보를 찾아갔었다.
후보는 자신의 서재에 침입한 헬스 키친의 악마를 보고 놀란 와중에, 순찰을 도는 수행원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그를 지켜주었다. 자신의 목숨이 달려있다는 말 때문이 아니었다. 후보는 헬스 키친의 악마에게 신뢰와 존중, 연민을 가진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맷은 그런 그의 행동에 이야기가 통할 것을 직감하고 안도할 수 있었다. 두 남자는 달빛까지 피하며 잠시 대화를 나눴다. 그는 대중들의 지지를 받는 만큼이나 정치에 진심이었던 사람이었다. 자신이 선 자리는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에게 질 수 없다는 의지를 보이던 그는 먼저 맷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연설을 완전히 포기하면 그것이야말로 누군가에게 득이 되는 상황일 것이며, 이 사태를 야기한 죄인을 영영 잡기 어려울 것이라는 그의 말은, 맷을 설득시키기 충분했다. 후보는 스피치 시간을 줄이는 대신, 밤의 수호자가 잡으려는 자의 미끼가 되겠노라고 말했다.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맡기는 행동으로, 그는 시민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묵묵히 정의를 행하는 영웅에게 격려를 보냈다.
작은 물줄기가 강을 이루고 강이 흘러 바다가 되듯, 과거의 모든 시간들이 한데 엉켜 지금과 같은 상황을 빚어냈다. 다행히 맷이 예측한 후보는 이번 작전의 타겟이 맞았고, 예상을 뛰어넘는 악재의 연속에 M의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불어나는 눈덩이처럼 상황은 점점 그에게 좋지 않은 쪽으로만 전개되어 그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안정을 되찾기 위해 스스로 찬 목줄이, 교수대의 밧줄같이 느껴졌다. 허니가 고군분투하는 동안 M은 이성은 빠르게 바닥나고 있었다. 그는 가까이 있는 덱스에게 총을 겨누며 어서 발포하라고 소리쳤으나, 애초에 죽음이 두려워 그들을 따랐던 것이 아닌 덱스에게 그런 협박이 먹힐리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여자만을 믿으며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귓가를 때리던 심장 고동조차 조용해졌다. 허니가 뛰어난 요원인 것을 알았고, 믿었기에 시간을 버는 것이 그녀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인 것을 알아 차렸다. 덱스에게 M이 자신을 섣불리 쏠 수 없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허니가 같은 공간에 있으니 더 이상 그들의 장단을 맞춰줄 이유가 없었다. 그가 믿는 것은 오직 그녀뿐이었다. 덱스가 아예 스코프에서 눈을 떼려던 순간, 수많은 사람들 속, 어떤 한 사람이 그의 눈에 띄었다. 후드를 푹 뒤집어 쓴 채 단상을 바라보며 멈춰있는 사람들의 행렬을 헤치며 올라가는 자를, 덱스의 육감이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 후보는 경호원들의 안내를 안전히 퇴장하는듯 했고, 이내 눈길이 가던 자도 그들을 따라 덱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덱스는 잠시 무엇을 생각하더니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었다.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여 잠시 길이 막힌 후보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식은땀을 훔치고 있었다. 패기롭게 말했지만 일반 사람에 그치지 않았던 그도,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에 평정을 찾기 어려웠다. 그는 생존 본능에 의해 사람들을 둘러보다 살벌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잘못 본 것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마치 이 넓은 광장에 그와 자신뿐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온 몸의 감각이 본능적으로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자연스럽지만 빠르게 장소를 떠나려는 후보와 단 몇 미터를 앞두고, 덱스가 지켜보던 자는 품에서 총을 꺼내 후보에게 겨눴다. 총을 쥔 모양새와 기세는 아마추어가 절대 아니었으며, 장님이 아닌 이상 못 맞추기가 더 어려운 상황이었다. 실시간으로 경악하는 후보의 눈에 맞은편 남자의 얼굴이 비친다. 악의가 가득한 눈빛이 그를 쏘아본다. 잠시 후 어디서 들린 것인지 모를, 공기를 찢는 총성에 M과 허니를 포함한 모두가 숨을 멈췄다. 온 세상이 잠시 멈춘 듯 하더니, 이어서 광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귀가 찢어지게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비명과 광기, 두 발 달린 지성체의 동물적인 생존 본능의 모습이 모니터를 가득 채운다. 모두가 하던 것을 멈추고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메라맨들은 혼비백산으로 도망치는 시민들에게 치이고 넘어져 바닥을 찍기도 하며, 지옥도를 연상시키는 연설 현장을 담아내고 있었다.
잠시 뒤 속보라는 안내와 함께, 누군가가 쓰러진 모습이 화면에 떴다.
머리가 터진 채 바닥에 엎어진 남자의 손엔 총이 들려 있었고, 자막에는 그를 테러리스트라고 지칭하고 있었다. M은 고개를 돌려 덱스를 바라봤다. 싸한 화약 냄새와 함께 총구에서 나는 연기는, 방금 전 묵직한 총성을 낸 탄이 덱스가 쏜 것임을 알리고 있었다.
*
자택에서 방송을 보고 있던 피스크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손에 쥐고 있던 위스키 잔을 단숨에 깨뜨렸다. 그의 경쟁자가 혼이 반쯤 나간 표정으로, 화면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었다. 피스크는 다 잡은 먹잇감이 차를 타고 현장을 벗어나는 모습을 무력하게 바라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완벽하게 어그러진 계획에 분노한 그는 소리를 지르며 주변 물건을 모조리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덱스의 손에 숨이 끊어진 남자는 피스크의 작품이었다. 그는 자신의 기준에 나약한 구석이 있던 M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고, 통제하기 까다로운 포인덱스터가 변덕을 부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다 해도 일을 바르게 처리할 사람을 보험으로 하나 두길 원했다. 이번 암살은 귀찮은 자들을 처리하기 위함의 목적도 있었지만, 자신의 위대한 계획에 아주 중요한 초석이 될 예정이었다. 분명 자신이 하사한 지시가 포인덱스터의 능력으로 어려운 임무가 아닌 것을 알았으나, 경쟁자가 무사히 단상을 내려가고 있음에도 아무런 일이 없자 피스크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불량품들의 행동은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가 미리 준비한 병력들은 후보가 연설을 마침과 동시에 무조건 건물에 진입하도록 사전에 명을 받은 상태였고, 아마 수 분내로 포인덱스터와 M을 정리할 것이었다. 일이 어찌되건 피스크는 M과 덱스에게 여유부릴 시간을 줄 생각이 없었다. 생중계를 보며 피스크는 남들에게 뺏은 여유를 만끽했다. 포인덱스터와 M처럼, 피스크에게 목줄을 뺏긴 다른 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송을 통해 그가 있는 공간에 서라운드로 총성이 울리자, 피스크의 입꼬리가 하늘로 향했다. 혼란에 빠진 헬스 키친의 모습을 보며 앞으로 자신이 선사할 미래가 기대되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는 발전이 있을 수 없었지만, 단기적인 고통과 혼란이라면 궁극적으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용인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는 이 도시에 질서가 필요하고, 그 질서는 자신만이 가져다 줄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모든게 정말 완벽할 뻔 했던 밤이었지만, 잠시 후 뜬 몇 글자의 자막이 그의 기분을 헬스 키친 하수구보다 더 깊은 나락으로 처 박았다. 피스크는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이 포인덱스터의 짓인 걸 알아차렸다. 뭔가 잘못 되어도 대단히 잘못되었다. 이미 처리반이 도착해서 포인덱스터 일행의 숨을 끊었어야 했을 터. 하늘도 모르게 숨긴 자신의 계획을 망칠만큼의 여유가 포인덱스터에게 남아 있다는 것은, 그들 역시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피스크는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들어 처리반의 리더에게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무슨 사유로 꾸물거리는 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세운 완벽한 질서를 거부하는 모든 것들을, 갈기갈기 찢고 싶었다.
*
소리 한 번 질러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상황에서, 난데없이 바람을 가르는 총성과 함께 후보의 얼굴에 괴한의 피가 튀었다. 아주 조금만 더 늦었다면 그는 본인의 피로 물든 얼굴을 가질 뻔 했다. 덱스의 시야에서 후보와 괴한의 위치는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덱스는 주변 지형지물과 괴한의 키를 고려해 탄을 도탄시켜 명중시켰다. 너무 당연하게도, 덱스가 해내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자신의 생명줄이라 믿었던 탄환이 다른 이를 살리는데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M은, 머리 끝까지 열을 받으며 눈에 살기가 돌기 시작했다. 사랑에 미쳐버린 문제투성이 정신병자의 변덕으로 그동안 자신이 겪은 그 모든 고생과 수모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고, 고심해서 세운 계획은 손을 쓸 수도 없게 틀어졌다는 사실이 광기로 변해 그를 장악한다. 그는 신념과 양심을 버린 대가가 아무것도 쥐지 못한 빈 손 뿐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자신의 노력과 자비를 허상으로 만든 덱스와 그의 여자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스러웠다. 활화산같이 폭발하는 분노가 그의 몸의 주도권을 뺏는다. 동시에 또 다른 자가 같은 목표를 노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전파를 타고 최후가 적나라하게 생중계되고 있는 저 자는, 누구의 꼭두각시인가? 화면에 잡힌 누군가의 실패작이, 곧 제 미래같이만 느껴졌다. 너도 곧 이렇게 최후를 맞이하리라고 선포하는 것만 같았다. 모든 판을 짜고 제시했던 피스크는, 이 일에 대한 그 어떠한 변수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저 남자의 존재도 귀띔해주지 않았다. 그는 그저 모든 것이 문제 없이 이행될 것이고 보상과 안식을 약속했었다. 피스크도 저 남자의 존재를 몰랐을까? 이 도시의 일거수 일투족을 아는 그 사람이?
원래 뱀같은 눈에 흰자가 더 보일 정도로 험상궂게 찡그린 M의 표정은 펴질 줄을 몰랐다. 그의 생각과 불안이 뒤섞이기 시작할 때, 별안간 텅 빈 계단을 타고 저 멀리 아랫층에서부터 총성이 울렸다. 한 발도 아닌 여러발이.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 주변이 술렁거렸다. 1층에 대기시킨 인력에게 무전을 했지만 답이 오지 않았다. 절대 권력이라고 믿고 굴복한 힘으로부터 약속받지 않은 상황만이, 그들의 눈 앞에 전개되고 있었다. 허니 역시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쩌면 피스크의 군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무하게 모니터를 바라보던 M은 서슬이 퍼런 눈으로 덱스에게 총을 겨눴다. 결국 아무것도 통제하지도 못하고, 바꾸지도 못한 자신에 대한 실망, 그리고 다시 안정적으로 정해진 궤도를 돌 예정이었던 자신의 인생을 망쳐버린 덱스에 대한 원망을. 모든 것들이 이젠 제 옆에 있는 덱스에게 향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다. 벤자민 포인덱스터는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어야만 한다. 자신을 위해.
허니는 몸을 숨기는 와중에 덱스에게 총을 겨눈 M을 망설이지 않고 쐈다. 다급한 상황만큼 총알은 빗겨 맞았고, M의 팔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의 행동을 저지하기엔 충분했다. 뜨거움을 느낀 M이 총을 놓치자 덱스는 허니가 준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재빨리 그와 거리를 두며 기둥 뒤로 몸을 숨긴다. 같은 공간에 있는 허니의 존재를 체감할 때마다 공허했던 덱스의 눈에 초점과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허니 역시 무사히 몸을 숨기고 허공에 외쳤다. 어차피 피스크는 임무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여기 있는 모두를 죽일 계획이었다고. 그녀의 외침에 분위기는 더욱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말에 힘을 실어주듯, 출처를 알 수 없는 총성과 시멘트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래에서부터 전해지는 소란이 불붙은 그들의 불안에 기름을 붓는다. 바로 아랫층까지 따라 올라온 발소리는 당연하게도 한 둘의 것이 아니었다. 종말, 모두의 종말이 다가온다.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이들을 벌하기 위해, 지옥에서 친히 올라온 악마들이 바로 발 밑에 있다.
윌스니너붕붕 믣 데어데블 불스아이
https://hygall.com/614366472
[Code: b69a]
- tumblr_4bd4b38464e5f5173e5b9a8969ed78b2_d21b6f63_640.webp(3.43MB)
- tumblr_6bd502d21d5a29c8f40adfed11b2a41c_c293c11d_540.webp(5.51MB)
- tumblr_448db3d6bcc1e344b9f1cb1ef680a340_4e72f7d2_540.gif(2.97MB)
- tumblr_aef5a287eb2bbf704b0d16da00be9b93_ef78d2fa_400.webp(2.83MB)
- 68747470733a2f2f73332e616d617a6f6e6177732e636f6d2f776174747061642d6d656469612d736572766963652f53746f7279496d6167652f4b78354468614e4a7150784273413d3d2d3137362e313439626232383161343530376466383339343336373637393035362e.gif(425.2KB)
- kingpin-498-x-308-gif-4zjnt3k3v8j6nw3r.gif(2.47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