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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6 00:14
근데 그게 덱스의 집착때문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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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포인덱스터.
자신의 이름을 벤자민이 아닌 '덱스'라고 소개하는 그는, 주위의 평판이 무난하게 좋은 남자였다. 그는 모든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항상 적정선을 지켰고, 규칙에 대한 이해가 빠르고 실행 능력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가 살면서 거쳐온 집단과 직장 동료들 대부분은 성실하고 깔끔한 사람이라고 칭찬했지만, 누구도 그와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다. 이상하게 느끼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걸 기이하다고 느낄만큼 관심을 갖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칸막이가 잘 나뉘어져 있는 수납장처럼, 그의 내면엔 사람들이 그와의 관계에서 얻어갈 것들이 확실하게 분류되어 있었고, 언제나 딱 필요한 만큼씩만 채워져 있었다. 적당히 나눠주고, 적당히 얻는다. 그리고 다시 채워 넣는다. 이 과정은 그에 의해 매일, 매시간, 매분, 매초 반복되었다.
가끔 인간보다 정밀하게 조율된 기계에 가까워 보이는 그의 모습은, 아일린 머서라는 이름을 가진 박사의 작품이기도 했다. 선천적으로 감정과 욕구가 조절되지 않는 뇌를 가지고 태어난 덱스는, 화목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라다 부모를 일찍 여의는 바람에 유년시절부터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성향을 갖게 되었다. 자신의 내면조차 전혀 제어하지 못하는 덱스에게, 신은 무슨 생각인지 과분한 능력을 내렸다. 목표물을 아주 정확하고 세밀하게 맞추는 능력. 명중 확률이 거의 100%에 수렴하는 경이로운 그의 능력은, 뒤틀린 성향 탓에 누군가에겐 재앙이 되었다. 신의 저주를 가진 작은 남자 아이. 세상에서 배척받고 격리당해야만 하는 소년. 그를 올바르게 이끌어줄 어른의 필요성을 느낀 머서 박사는 스스로 그 역할을 자처했고, 동정과 연민, 사랑으로 그를 품었다. 그녀는 걸어다니는 시한폭탄인 덱스에게 안전장치를 달고, 타이머를 연장했다. 사람들 틈에 섞여 살아갈 기회를 주었다. 덕분에 타인의 감정에 공감할 수 없는 천성을 괴로워 하는 것 대신, 덱스는 잘 배워둔 알고리즘에 따라 적정한 시기와 장소에 학습한 결과물을 제시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덱스가 배운 모든 행동들은 그를 인간 사회 속, 제일 외진 경계에서 자리 잡게 만들었다. 머서 박사는 정말 옳은 일을 한 것일까? 불특정 다수에게 고통을 선사할 수도 있는 위험한 남자가 그녀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 가장자리에서 숨을 쉴 자격을 얻었다.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인생에서, 죽는 순간까지 쳇바퀴 굴리듯 정해진 페이스를 유지해야만 하는 그의 삶은 몇 명의 목숨이 위협될만큼 가치가 있을까?
덱스는 다행히도 머서 박사의 훈련을 잘 받아 들였고, 좋은 성과를 냈다. 머리가 좋았고, 인정과 사랑이 필요했던 탓에 그녀가 죽은 후에도 제법 안정적으로 사회의 일원의 역할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그에게도 종종 위기가 찾아 왔다. 위험한 인물인만큼 지나치게 틀에 가두어져 있는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좋게 보지 않는 자들은 언제 어디에나 있었다. 관심은 없어도 관찰력이 뛰어나 그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했다. 다수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 질서라는 틀에 갇혀, 바깥 세상 대신 정해진 틀만을 제 세상으로 여기는 걸 그들이 알 리가 없었다. 분명 조금 별나보이고 재미없는 사람이긴 했다. 잘난 외모, 예쁜 미소와 상관없이 인간 관계에서 마이너스되는 요소들을 많이 가진 남자였고, 보통은 그것이 상쇄되어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지만 가끔 어려움이 있었다. 특이한 사람 취급을 받는 것 대신, 소름끼치고 이상하다며 사람과 집단에서 외면받는 상황들은 고민을 나눌 사람도, 지켜줄 사람도 없는 덱스에게 버거울 때가 많았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잘 이겨내기도 했지만, 그의 병적인 자기중심적 사고가 타인에게 피해를 줄 때도 있었다. 안정적인 궤도를 이탈할 위기마다 덱스는 머서 박사의 테이프를 들으며 그녀가 말한 '북극성'의 존재를 되새겼다. 그도 결국엔 삶에 욕심이 있던 한낱 인간이었기에, 남들과 다른 방어기제를 성처럼 쌓아 올렸다. 머서 박사를 신뢰하는 만큼, 삶에 욕심을 가진 만큼 그녀가 말한 북극성에 대한 그의 기대감도 커져만갔다. 자신을 인도해 줄 북극성의 역할을 할 사람을 찾을 때까지, 계속해서 질서 위에 자신의 삶을 쌓는 것은 덱스의 의무였다.
줄리 반스는 처음으로 덱스가 자신의 북극성이라고 생각했던 여성이었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그녀는 칠흑같이 어두운 덱스의 인생에 내린 유일한 한 줄기 빛이자, 희망이었다. 덱스는 매일 그 빛을 올려다 보았다. 그녀를 향한 그의 열망과 기대는 손가락질을 받을 정도로 아주 많이 뒤틀려 있었지만, 덱스가 사람들의 관심 밖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비정상적인 행동을 감춰 주었다. 방식이 잘못 되었지만 이대로만 가면 순탄했을 지도 모를 인생이었다. 하지만 그가 성장한만큼, 저주같은 그의 능력도 함께 몸집이 커져 있었다. 그의 불안정성과 능력은 기어이 문제를 불러 일으켰고, 그를 견뎌내기엔 줄리는 너무나도 평범하고 연약한 사람이었다. 기질적으로 상대방을 이상화하여 쉽게 믿다가도 순식간에 평가절하하며 혼자 상처받기를 반복하는 덱스는, 그렇게 일련의 사건과 줄리로 인해 담금질하는 쇳덩이처럼 감내해야 할 죄가 늘어났다. 그의 남은 인생은 결국 머서 박사의 노력이 무의미하게, 예견된 대로 악인으로서의 최후를 맞이할 줄로만 알았다. 허니 비를 만나기 전까지는.
*
한 번 드러난 그의 능력과 진가는, 희귀하고 쓸모가 많은 만큼 탐내고 이용하고 싶어하는 사람 또한 많았다. 그는 인간적으로 볼품없는 남자였지만, 비범한 능력만큼은 값어치가 높았다. 머서 박사가 제시하지 않은 길 위에서, 덱스는 허니를 만났다. 참으로 이상한 여자였다. 이성적으로 호감을 느낄만한 외모와 별개로, 풍기는 분위기와 행동들이 덱스에게 너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원래 이성과 교류가 없던 그가, 감옥에 수감된 동안 더더욱 이성을 접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걸까? 아니면 전투상황때문에 치솟은 호르몬 때문이었을까? 말로는 자세히 설명할 수 없었지만 덱스는 그런 시시한 이유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녀에게 끌리게 만드는 묘한 무언가가 있었다. 변덕스럽고 극단적이며, 자제력이 없는 그는 불나방처럼 아무런 저항없이 그녀의 이끌림을 따라갔다.
그녀의 곁에서 훔쳐본 결과, 덱스는 자신의 무모한 행동들이 온전히 허니 탓이라고 결론 지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만난 모든 사람 중 가장 거대하고 밝게 빛나는 항성같은 여자였다.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끌려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 어떠한 빛도 받지 못하고 이상하게 궤도를 그리는 자신과 달리, 스스로 빛을 내며 모든 것을 무한히 끌어당기는 그녀를 완벽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내는 빛을 받는 범위까지 들어가고 싶다는 덱스의 욕망은, 허니 역시 그가 가진 중력을 거스를 수 없게 만들었다. 탄탄대로가 약속된 그녀의 인생은 덱스가 침범하며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그와 엮이자마자 처참하게 부숴져 버린 줄리와 달리, 강하고 힘이 있던 허니는 몇 번의 고비도 무사히 넘겨내고도 건재했다. 두 사람은 상대를 먼저 끌어 당기기도, 또는 휘말리기도 하며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갔다. 허니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덱스와 너무 가까운 사이가 되어 있었다.
덱스는 허니가 정말 좋았다. 그녀 앞에선 가면을 쓸 필요도, 쓸 일도 없었다. 타인에게 솔직해져 본 적이 없었기에 제 속마음을 다 털어놓진 못해도, 이렇게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려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곁이 너무나 편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만의 공간이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없는 자택으로 가는 것이 싫었고, 옆에 있는 시간을 늘리고 싶었다. 말 없이 그녀의 집에서 자고 가는 횟수가 늘었지만, 허니는 비난하지 않고 그가 지내는 데에 문제가 없도록 그의 살림을 늘렸다.
그녀가 일이 없으면 아침잠의 여운을 길게 갖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였다. 날이 밝자 살짝 열린 커튼 사이로 채광이 좋은 침실엔 얕은 빛줄기가 쏟아졌다. 덱스는 제 눈으로 쏟아지는 빛줄기에 잠이 깼다. 무조건 정해진 이른 시간에 일어나던 그는, 이제 허니와 함께 아침잠을 즐기는 여유가 생겼다. 그녀와 함께 지내며 오랫동안 잘 지켜왔던 습관 하나를 잃어버렸지만, 예전처럼 일이 어긋나면 불안하거나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햇빛에 의해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그답지 않게 귀찮음과 나른함을 느끼며 가만히 자신처럼 전라의 상태로 같은 이불 속, 옆에 누운 여인의 모습을 바라봤다. 허니가 아무리 뒤척여도 햇빛이 그녀의 단잠을 방해할 것 같진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본래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그였다면, 왜 햇빛이 저의 잠을 방해하는지 불만을 가졌을텐데 말이다. 무표정으로 세상 모르고 자는 그녀의 얼굴을 관찰한다. 홀린듯이 이불 속에 숨겨진 손을 꺼내 자신보다 훨씬 짙은 머리칼을 쓸어넘겨 봤다. 그 손길에 곧 깨어날 것 같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자, 덱스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그의 예상처럼 허니는 얼마 안 있다가 부시시한 모습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은 그녀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왠지 모르게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사람처럼 그의 가슴이 쿵쾅거린다. 허니는 별 말없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쪽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자신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스러워하는 그녀의 의중을 알아 차렸다. 덱스는 실눈을 떠 그녀의 뒷태를 감상했다. 밤새 자신이 가르고 들어간 볼륨있는 엉덩이와 통통한 허벅지 위로, 잘 뻗은 등이 보였다. 허니는 커튼을 꼼꼼히 치더니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와 그의 곁에 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깊게 잠에 빠진 그녀의 숨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그녀의 가슴께를 보며, 덱스는 잠이 달아나고 낯설고 이상한 감정에 휘말린다. 자신이 아는 선에서 표현할 수 없는 감정. 이전에 줄리에게도 비슷한 기분을 느낀 적은 있었지만, 그것보다 더 뿌리치기 힘들고 심장의 모든 세포를 강하고 복잡하게 옭아 맨 느낌이었다.
덱스는 그 날 이후로 허니가 잠들면 종종 잘 닫힌 커튼을 조금씩 열어두는 기이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허니는 아침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꿋꿋하게 커튼을 닫았다. 평화로운 그녀의 아침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을 햇빛을, 아침에 침대를 나서기 싫어하는 그녀가 자신만을 위해 커튼을 닫아주는 행위가 너무 좋았다. 이상하고 음침한 행동이었지만 그만두기엔 너무 달콤한 배려였다. 덱스가 속절없이 허니에게 더 빠져들게 된 날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덱스의 기행을 알게 된 허니는 굳이 그를 추궁하거나 이유를 묻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날 확실히 닫은 커튼이 자꾸 열리는 것이 이상했고, 둘 뿐인 이 집 안에서 그런 일을 할 사람은 덱스뿐이었다. 햇빛을 맞으며 일어나는 것이 그의 루틴인지를 고민하던 허니는, 어쩌다 일찍 깬 날 그가 제 뺨과 머리를 몰래 쓰다듬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확신할 순 없었지만 커튼을 닫는 자신의 행위를 그가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덱스가 허니를 보며 했던 생각처럼, 참으로 이상한 남자라는 생각을 그녀 역시 하게 되었다. 언젠가 들킬거란 생각을 아예 안하는걸까? 커튼을 열고 잠에 든 덱스를 확인한 뒤, 다시 꼼꼼히 커튼을 닫고 잠든 허니 덕에,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뜬 덱스가 곤란해졌다. 그의 하루를 기분좋게 만드는 배려를 볼 수 없는 날이라는 생각이 그를 순식간에 우울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누운 방향을 바라보고 자고있는 그녀를 보며, 또 다른 욕망이 가슴에 피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이 아쉬움을 상쇄시키기 위해, 잠든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싶었다.
덱스는 한참을 안절부절하다 미친듯이 뛰는 심장조차 전혀 갈무리하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허니에게 입을 맞췄다. 도둑질하듯 그녀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덮는다. 혹여 떨리는 호흡이 그녀의 잠을 깨울까봐, 그녀에게 행여 이 모습을 들킬까봐 숨조차 쉬지 못하고 소심하게 행한다. 허니를 향한 이 폭발적이고 출처도 모르는 마음은 매일매일 꾸준히 덜어내도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덱스가 입술을 떼자 감겨있던 허니의 눈이 살며시 떠지고, 그녀와 눈이 마주친 덱스는 심장이 멎는 걸 느낀다. 갑자기 자신의 욕망을 그녀가 더럽게 여기고 끔찍히 할 것이라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그를 침식시켰다. 흔들리는 동공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덱스에게, 잠에서 막 깬 허니가 나른하게 미소 지으며 좋은 아침, 덱스. 라고 인사했고, 이번엔 덱스의 심장이 미친듯이 펌프질하기 시작한다. 이미 그들은 수차례 몸을 섞고 체액을 나누며 진득하게 혀까지 섞은 사이였고, 그렇기에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이 행위가 아무렇지 않은 허니에 반해, 덱스만이 첫사랑을 하는 소년처럼 어색하게 굴고 있었다. 그는 왜 허락없이 멋대로 입을 맞추냐고 타박하지 않는 그녀가 너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허니는 특이한 방식으로 안정감을 제공하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야 덱스도 겨우 웃으며 그녀에게 맞인사를 한다. 좋은 아침, 허니.
그 뒤로 덱스는 몰래 커튼을 여는 행위 대신, 허니와 아침 인사를 나누며 입을 맞추고 가끔 여전히 잠에 취한 상태로 그녀와 정사를 치루기도 했다. 두 사람은 점점 연인의 모습을 갖췄다. 시린 심연에 사는 덱스에게 따스한 온기와 빛을 전해 주지만, 억지로 뭍으로 끌어 올리지 않는 사람. 그가 필요로 할 때 조용히 양지에서 내려와, 옆 자리에 가만히 앉아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 허니 비는 그런 사람이었다. 머서 박사가 살아 생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이 여성은, 상처 투성이에 문제점으로 똘똘 뭉친 벤자민 포인덱스터까지 포용해버렸다. 제 아무리 물이 가득 담긴 컵이라해도, 농도 짙은 검은 잉크 한 방울이 떨어지면 더럽혀 질 수 밖에 없다. 그 검은 액체를 받아내고도 제 모습을 유지하는, 바다같은 여자. 어떻게 보면 덱스에게 아주 필요한 사람이었다. 덱스는 계속해서 허니에게 녹아들었다. 하지만 그의 문제는 그가 과거에 저지른 일들과 엮인 관계들 탓에 더 이상 개인적인 일로 끝나지 않았다. 일평생 느껴본 적 없는 만족감과 행복이 그의 경계심을 무뎌지게 만들었고, 지난 날의 과오는 이제 댓가로 그가 제물로 그녀를 바치길 원했다.
*
덱스가 지금 이 순간 느끼는 끔찍한 상실감과 후회의 기원은, 배신당했다는 오해로 허니에게 총을 겨눴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녀가 제공했던 거의 무한에 가까운 안정감과 배려만큼, 배신감은 증오와 분노를 불러 부정적인 감정에 약한 덱스의 눈을 멀게 만들었다. 이미 수도 없이 외면받고 이용당했던 삶이었지만 타인에겐 내 비추지 않았던, 전례없는 원망이 불공평하게 그녀에게만 쏟아져 내렸다. 허니를 향한 덱스의 부정적인 감정들은 딱 일대일로 치환되었지만, 한참 전부터 그의 세상이 되어버린 그녀였기에 감정의 크기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그녀가 자신에게 특별한만큼, 자신 역시 그녀에게 특별하길 바라는 욕심이 있었다. 그녀의 애정이 얼마나 순수한가에 대해 생각 해보진 않았지만, 다른 것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자신을 가차없이 버린 그녀를 용서할 수 없었다. 덱스는 자신이 힘든만큼 허니 역시 고통받고, 다른 사람과 절대 행복해질 수 없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힘이 닿는데까지 그녀가 지금의 행동을 뼈저리게 후회하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모든 숨이 칼날처럼 그녀의 속을 찢길 바랐고, 그녀 앞에 펼쳐질 길이 가시밭길이길 바랐다. 얼마나 구차하고 못난 꼴인지 알았으나 도저히 참을 수도, 참을 생각도 없었다. 허니는 지금까지 자신을 지나쳐 간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거짓된 관심과 사랑을 주어 무장해제 시켰고, 나약하고 멍청하게 만든 악랄한 여자였다. 그렇기에 당연하게 그녀만큼은 이래선 안됐고, 자신을 이리 만든 책임을 져야만 했다. 하자가 있는 것을 알고 자신을 선택한 그녀였으니 이 정도 욕심은 부려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은 허니는 자기밖에 모르는 덱스의 머릿속에서 극악무도한 악인이 되었다. 남은 평생을 고통 속에 살도록, 제 곁에 있는 것이 고통이라면 감히 떠나지도 못하게 만들고 망가뜨릴 생각만을 하던 덱스였다. 어떻게 해야 그녀의 모든 것을 부숴버릴 수 있을지만 궁리하며 시간을 보냈었다. 그녀 이전에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본 적도, 해본 적 없던 남자는 오해에 사로잡혀 뒤틀린 정신세계만큼이나 파괴적이고 가혹하게 굴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난 모든 것들은, 오만했던만큼 빠르게 추락한다. 허니를 향한 덱스의 감정과 생각, 행동들도 그랬다. 진실은 너무 값지고 고통스러웠으며, 무거웠다. 거대한 음모로 인한 후폭풍을 덱스 혼자 감당하기엔 그의 자아가 너무 불안정했고 성숙하지 못했다. 자신이 착각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동안 허니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배은망덕하게 그녀가 보여준 진심과 사랑을 욕보이며 그녀를 힐난했음을 깨달았을 때, 덱스는 지금까지 겪어본 적 없던 수치심을 느꼈다. 그녀를 미워한게 너무 죄스러웠고, 상황을 다시 올바르게 되돌리고 그녀를 붙잡을 기회가 더 이상 없을 것만 같다는 불안은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지나온 모든 판단과 행동이 다시금 날카로운 비수로 돌아와 그의 정신을 찔러댔다. 목숨을 걸고 자신을 구하려 했던 그녀를 하찮은 의심과 미움으로 밀쳐냈다는 사실에, 덱스는 정말 산채로 심장이 도려내지는 것만 같았다. 자비를 베풀어 줄 그녀의 부재는 너무나 큰 타격이었기에 어느 순간부터 단순한 실수였고, 착각이었다는 말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천성적이고 병적인 이기심으로 상황의 탓을 하며 책임과 현실을 회피해보기도 했지만, 그건 그 나름대로 이성적으로 충분한 납득이 되지 않아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속죄해야만 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미워해도 그녀만큼은 제발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고통에 몸부림 치던 어느 날, 허니 역시 부모처럼 자신을 떠난 것 아닐까란 의문까지 그의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그 생각은 취약한 그의 정신을 갉아 먹으며 그날 밤 악몽까지 꾸게 만들었다.
꿈 속의 허니는 덱스가 제일 보고싶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를 마주치자마자 끔찍하고 징그럽게 여기며 손가락질 하기 시작했다. 무슨 염치로 여기까지 쫓아오고, 자신 앞에 나타난거냐는 잔인한 말에 덱스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만회할 기회를 달라며 잘못했다고 빌었다. 상대의 동정심을 자극해 본 적은 있어도, 태어나서 이렇게 진심으로 간절하고 비굴하게 굴었던 적이 없었다. 그녀는 덱스가 아무리 처절하게 매달리고 무릎 꿇어도 그의 곁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덱스는 허니를 붙잡아 쓰러뜨리고, 그 위에 올라타 두 손으로 결박했다. 더 이상 그녀없이 살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 자신의 곁을 떠나려는 행위는 죽으라는 말과 다름 없었다.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말, 단 한 마디면 충분했다. 거짓으로라도 모두 장난이었다고 한다면 당장 관둘 생각이 있었다. 정말 순하고 착하게, 그녀의 입맛에 맞게 굴테니 제발 그런 모진 말은 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했다. 서럽게 우는 덱스의 눈물이 허니의 얼굴 위로 떨어졌지만, 오히려 더럽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 젓는 그녀의 행동이,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계속해서 절규에 가까운 저주의 말을 퍼붓던 허니는 더 격렬하게 발악하기 시작했다. 다른 이에게 가겠다고, 자신과 같은 하늘 아래에 있는 것도 싫다 말한다. 어떻게든 그녀를 붙잡고 싶었던 꿈 속의 덱스는, 결국 모난 인성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녀의 입을 막고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손톱을 세워 덱스의 손과 팔을 긁던 행위, 미친듯이 치던 발길질이, 모두 멈췄다. 당황한 덱스가 이름을 연신 불렀지만 허니는 축 늘어져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팔로 다급하게 그녀를 품에 끌어 안고 흔들었다. 해하려는 생각은 없었고, 그저 나쁜 말을 더 이상 하지 못하도록 겁만 줄 생각이었다. 덱스가 소박하게 좋아하던 심장 박동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결국 제 손으로 그녀의 숨통을 끊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자 품에 안은 그녀의 육신도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깜짝 놀란 덱스는 그대로 잠에서 깼고, 푸른 어둠 속에서 홀로 식은 땀을 흘리고 눈물에 젖은 채, 제 방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현실에서도, 꿈 속에서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인 것처럼, 허니는 없었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고, 입에서 터져 나오는 숨소리마저 낯설고 거칠었다. 방 안은 고요했지만, 그의 머릿속은 폭풍처럼 요동쳤다. 그녀의 모든 표정, 모든 몸짓, 그의 손에서 뻗어나간 모든 어리석음의 기억들이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를 휘감았다. 뭐라도 해야만 했다. 더 이상은 안된다. 당장 허니가 필요했다. 덱스는 땀으로 젖은 몸 위에 옷을 대충 걸쳐입고 차키를 챙겼다. 모두가 잠에 빠진 새벽 내내 허니와 다녔던 길거리를 전전했다. 그녀와 방문했던 모든 상점은 불이 꺼지고 문이 닫혀 있었지만 덱스는 포기하지 못하고 한참을 서성였다. 자신이 사랑한 여자는 실존했던 것이 분명한데 자꾸만 그녀의 존재가 환상처럼 느껴졌다. 환청이 들리고 불안이 가속된다. 덱스는 헬스 키친 길거리 그 어디에서도 그녀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억지로 받아 들이고 나서야 집으로 겨우 발걸음을 돌렸다. 쉬지 않고 내내 울고 있던 그는 추위에 떠는 사람처럼 몸의 떨림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정말 잘못했다고,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중얼거리며 문 너머에 허니가 있길 바라며 모든 방문을 열기 시작했다. 문을 열 때마다 사람의 정이라곤 조금도 없는 이 공간엔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강제로 되새겼고, 가슴의 통증을 이 악물고 이겨내야 했다. 방 안의 모든 것이 그를 비난하는 것 같았다. 호흡을 가쁘게 쉬던 덱스는 욕실 문까지 열고 난 뒤에 주저 앉았다. 설령 허니를 찾는다해도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단이 없었다. 줄리나 다른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불쌍한 자신의 모습을 보이면 그녀가 받아줄까? 자신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말하던 꿈 속의 허니가 계속해서 떠올랐고, 그 말을 다시 들었다간 미칠 것만 같았다. 덱스는 바닥을 기며 옷장과 서랍을 뒤졌고 허니의 옷을 손에 잡히는대로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익숙한 옷에서 다 사라져 가는 옅은 그녀의 체향을 맡은 뒤에야 과하게 비정상적으로 뛰던 심장 박동이 아주 조금 누그러졌다. 자신이 가진 그 어떤 사물과 능력으로 그녀의 마음을 되돌려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을 마구 내리쳤다. 덱스는 자신이 내뱉었던 말, 했던 행동들을 끝없이 곱씹으며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그녀를 포함한, 모든 것을 망친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직감하자 허니의 빈자리가 너무도 공허하고 아프게 느껴졌다.
며칠 동안 밤낮 없이 고통과 후회에 절여지며 극에 치달은 덱스의 정신은 결국 생존 본능에 의해 합리화를 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섞일 수 없을 때마다 그가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그만의 방식. 어떻게든 속죄할 기회를 만들 동안은, 자신의 곁을 떠날 때가 되면 알려주겠다는 그녀의 말을 믿으며 인내하고 버틸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야만 아무런 언질없이 사라진 그녀가 자신을 꼴도 보기 싫을만큼 미워서 떠난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난공불락의 철옹성같던 그의 내면을 함락시킨 것도 허니였고, 다시 재건을 하는 것도 그녀였다. 상황이 자신의 통제에서 이탈하고 타인과의 마찰이 있을 때마다 폭발했던 공격성은 고개를 들 여유가 없었다. 덱스는 매일 거울을 보며 허니에게 어떻게 사죄하고, 그녀의 마음을 어떻게 돌려야 할 지를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그녀의 아량으로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마냥 굴었던 과거의 자신이 싫었다. 허니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도 그녀의 인정을 살 값을 치룰 수 없을거란 생각이 종종 그의 숨을 막히게 했다. 목 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했다. 아쉽고 절박한 쪽은 자신이었기에 그녀를 향한 충성심을 보여 엉망진창인 자신을 다시 받아주길 빌어야만 했다. 맹목적인 믿음과 충성심으로라도 허니의 분노를 잠재우고 싶었다. 처음에는 절절한 구애에 가까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에게 전할 메세지는 점점 처량해져갔다. 그리움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고, 매일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던 덱스는,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포기할 수 없던 수컷의 자리를 내려 놓아서라도 허니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닌, 남에게 전하는 목소리라도 훔쳐 듣고 싶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녀가 자신의 존재를 몰랐던 어둠 속으로 돌아가, 몸을 숨기고 멀리서 바라보던 시절로 돌아가더라도 이젠 만족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허니를 다시 찾고 마주했을 때, 덱스는 암담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를 지키던 자들이 피를 흘리고 누워 있었고,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다. 제 앞에는 한 번도 단호하게 자신을 거절한 적 없던 그녀가 무서운 표정을 짓고 어린 여자 요원을 지키고 있었다. 요원을 처리하려고 든 총이 그녀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안 덱스는 과거 그녀를 쏜 멍청한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패닉에 빠졌다.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녀를 아프게 했던 과거 자신의 모습이, 통제 하에 일으킨 일인지 아닌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팔에 입은 총상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허니의 입에서 듣기 싫은 말이 나올까봐 겁이 나기 시작했다. 예전에 허니의 가슴을 피로 물들게 만들고 난 뒤, 그녀가 지은 오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한 오해로 신뢰가 깨져버린 얼굴. 어떻게든 자신이 절대 그녀를 해하려던 것이 아님을 먼저 알려야 했다. 총을 서둘러 바닥에 내려놓은 덱스가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가자 허니가 뒷걸음질 치며 그와의 거리를 유지했다. 덱스는 서 있는 바닥이 무너지고, 몸이 추락하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그녀가 자신을 거부한다는 생각이 그를 지배한다. 그럴 리가 없다며 움직이지 않는 입꼬리를 애써 올리며, 다시 한 걸음 다가갔지만 사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그동안 억지로 짓누르던 불안이 사실이고, 현실이 되었다는 생각에 덱스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때문에 그녀가 자신을 거부한다. 무릎까지 꿇은 덱스는 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제발 버리지 말아달라고 사정하고 싶었으나 허니의 이름조차 간신히 부르짖는 입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자신에게 등을 돌려 부상당한 요원에게 가버리는 허니의 모습에 덱스는 숨도 쉬지 못했다.
더 이상 살기 싫었다. 끔찍한 자기 혐오와 허무감이 덱스의 어깨를 누른다.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내려놓겠다고 약속했던 감정과 생각들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밝게 빛나는 허니가 더 이상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현실에서,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주는 꼴을 도저히 볼 수 없었다. 내려 놓았던 총을 다시 집어 제 머리에 쏘려고 했지만 지나치게 우는 바람에 일어난 과호흡 증상이 그의 몸을 그러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오로지 죽기 위해, 도와주는 이 없이 홀로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을 때 별안간 앞에서 큰 언성이 들렸다. 덱스는 고개를 들 수 없어 소리에 집중하려 했다. 부상당한 요원이 무어라 소리 지르고 있었고, 허니도 중얼거렸지만 제대로 알아들을 순 없었다. 악을 쓰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고, 이내 바닥을 바라보는 그의 시야에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들었을 때, 그가 그토록 보고싶었던 허니가 덱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 몸을 섞었던 그 날처럼, 그녀가 돌아와 그의 앞에 다시 섰다.
허니는 무릎을 꿇고 덱스에게 설 수 있겠냐고 물었다. 고작 몇 마디 질문을 한 것이 좋았다. 자신의 팔을 잡은 그녀의 손길이 좋았고 제 앞에 그녀가 시선을 맞춰준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덱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허니가 그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옷깃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덱스는 별 말 없이 허니를 따라 나섰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차안에서 듣는 경찰과 FBI의 다급한 무전들이, 그녀가 가진 모든 특권과 행복을 포기하고 선택한 것이 자신이라는 현실을 되뇌어 줄 때마다 머리가 어지러울정도로 만족감을 느낀다. 어렵게 만회한 기회를 더 이상 놓치지 않으리. 그녀와 자신의 세계는 이제 단 하나의 길로 묶여 있다. 제 숨과 선택을 모두 허니에게 일임하고, 평생 허니를 숭배하고 쫓기로 했다.
M이 그런 덱스의 눈 앞에서 허니를 데려갔을 때, 그의 분노는 그녀를 제외한 만물에게 향했다. 결국 그녀가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은 것은 그 때문이었고, 그런 불미스러운 일 하나 막지 못한 자신이 혐오스러울 수 밖에 없는 상태였다. 덱스가 죽고 싶은 이유는 허니였지만, 반대로 살고 싶은 이유 역시 허니뿐이었다. 그녀도 어느 순간부터는 그걸 인정하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제 덱스와 서로 같은 마음을 나누는 그녀는 제 몸을 소중히 해야 그 역시 행복할 것을 알았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엔 기어코 그러지 못했다. 그 곳엔 사랑하는 남자가 계속 행복하게 살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더 이상 아프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정신이 충분히 검토하여 이상적인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몸이 먼저 튀어나간 데엔 그런 이유가 있었다. 이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었을까? 아니, 아마 허니는 덱스를 사랑하는 여자로서 최선의 선택을 내렸을 지도 모른다.
*
덱스는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서 식어가는 허니의 몸을 끌어안고 애원하듯이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흘러나오는 피의 양이 너무 많은 것 같아 그녀의 상처를 힘껏 눌렀다. 큰 소리내서 미안해, 너무 놀라서 그랬어. 화 안났으니 제발 눈 좀 떠봐, 허니. 내가 다 잘못했어. 아무 말이라도, 아무 반응이라도 좋으니 그녀가 움직이고 소리내길 간절히 바랐다. 계속해서 흔드는 그의 손길에 힘없이 그녀의 손이 바닥에 툭하고 떨어지자, 그의 이성이 사라지고 모든 감각이 폭발했다. 억지로 누르던 불안이 머리 위로 터져 주변 공기를 가득 채웠다. 눈앞에 벌어진 상황이 현실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그러고도 몇 초가 더 걸렸다. 오장육부가 찢기는 듯한 고통과 함께, 뼛속 깊이 깃든 무력감에 휩싸였다. 그는 그녀를 지키겠다고 다짐했던 자신을 떠올렸다. 그 다짐이 지금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졌는지 깨달으며 그의 가슴은 한없이 무거워졌다. 빠질듯한 눈에서 물을 쏟아내며 덱스는 짐승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사람에게서 난다고 믿기 어려운 소리가 그의 가슴에서부터 올라와 벌린 입에서 터져 나온다.
고통, 분노, 슬픔, 상실감, 후회, 불안, 무력감, 외로움, 한탄, 증오, 혐오, 경멸, 불만, 억울함, 공포, 두려움, 거부감, 역겨움, 죄의식, 자책, 수치심, 혼란, 좌절, 패배감, 절망.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이 그를 채찍질하여 할퀴고, 짓눌러서 멍이 들고 부러지게 만든다. 그의 영혼을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갈아버렸다. 그의 정신을 파괴하고 있었다. 언어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오열하는 덱스는 이제 허니의 이름도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코 끝으로 그녀의 뺨을 건드려 본다. 가끔 잠이 든 얼굴에 덱스가 얼굴을 부벼대면 보는 사람까지 기분 좋아지는 미소를 띄우며 눈을 뜨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의 잠을 깨우고자 이리 씨끄럽게 절규하는 덱스에도 불구하고, 허니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허니가 토해냈던 선혈은 그녀의 입가에 말라 붙었다. 그 붉은 흔적이 마치 자신이 저지른 죄악의 증거처럼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는 무엇을 위해 여태 살았는가? 질서를 쌓고 엄격한 규율 아래 살았던 것은 다 그녀를 죽이기 위함이었을까? 모든 기억이 그의 머리를 헤집고 지나갔다. 그녀가 자신을 위해 했던 희생들, 자신을 믿어주던 그 눈빛, 그리고 그 믿음을 배신한 자신의 무자비함. 그는 그녀를 오해했고, 그녀에게 총을 겨눴다. 그녀가 쓰러질 때 느꼈던 그 순간의 찰나, 그리고 그녀가 살아 돌아와 자신을 용서하던 그 눈부신 순간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을 용서했지만, 그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덱스는 스스로를 심판관이자 처형자로 만들며, 그녀를 잃게 한 자신을 끝없이 비난했다. 모두 끝났다. 마침 허니의 몸을 끌어안고 있는 덱스에게 다가오는 인기척이 있었다. 이젠 다 어찌되어도 상관 없었다. 한참을 정신없이 괴로워하던 덱스는, 제 앞에 선 두 명을 올려다 보았다.
그 곳엔 말문이 막힌 데어데블과 캐런이 서 있었다.
*
허니가 덱스와 접선하기 전, 맷은 마스크를 쓰고 정의를 수호하는 자경단의 자격으로 아랫층에 도착했다. 1층의 감시자들을 피해 조용히 올라가던 그는, 중간층정도 올라갔을 때 건물 밖에 FBI와 경찰들이 도착한 것을 알게 되었다. 긍정적인 상황 전개를 기대하던 그는, 조용히 1층에 있던 포인덱스터의 일행들과 요원들의 대화를 훔쳐 들었다. 분명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이였으나 뭔가 문제가 있어 보였다. 무장을 했지만 제대로 힘써보지 못하고 쓰러지는 괴한들에 맷은 불길함을 직감한다. 이윽고 총성과 함께 머리 위에서 예상치 못했지만, 익숙하고 그리운 목소리가 신의 계시처럼 들려 왔다. 허니 비, 그녀의 목소리였다. 마지막 만남에서 자신에게 보여준, 사랑하는 남자를 지켜내겠다던 결연한 그녀의 의지가 그녀를 이 곳까지 이끈 모양이었다. 맷은 허니의 몇 마디를 듣고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포인덱스터는 지금 원치 않은 상황에 처해있고 이 모든 상황은 윌슨 피스크가 계획하고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자들이 피스크가 보낸, 적대적인 사신들이라는 것까지. 맷은 잠시 고민하다 숨을 길게 내쉬었다. 자신을 포함하여 이 건물에 있는 모든 사람은 죄인이었으나, 지금 상황에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선 순위가 필요했다. 그는 위에 있을 허니에게 존경과 신뢰를 보내며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피스크가 무엇을 꾀하는 지는 몰라도, 그가 더 큰 이득을 보기 전에 훼방을 놓아야만 했다. 허니가 선을 행하는 것에 대해선 자신과 같은 뜻임을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던 피스크의 악마들은, 어둠을 망토처럼 뒤집어 쓴 붉은 육신의 악마에게 발목을 잡혔다. 심리적, 그리고 물리적 공포에 그들이 사로잡힐 때, 낮이나 밤이나 어둠과 함께하는 헬스 키친의 악마에겐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황은 예상보다 빠르게 역전되었다. 제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진 맷이라 해도 적의 숫자는 너무 많았고, 권력의 맛과 거기서 오는 두려움에 떠밀려 이 곳을 찾아온 그들에게는, 불살주의인 맷보다 사람의 목숨을 파리보듯이 하는 그들의 왕이 더 무서운 존재였다. 피스크의 불호령에 일부는 위를 향해 올라갔고, 맷을 두려워 하던 자들은 정신을 차리고 덤벼들기 시작했다. 잠시 후 다방면에서 건물을 흔들어 대는 미친듯한 총소리와 길게 지속되는 전투가 맷을 지치게 만들었다. 수십명 중 마지막까지 버티던 두 명의 남자가 맷에게 함께 달려들었고, 그들 손에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누군가 소총으로 그들에게 죽음으로 선사하고 그를 지켜냈다. 비틀거리며 땅을 간신히 지지하는 맷의 이름을 부르며, 캐런이 뛰어왔다. 추격자를 따돌리고 늦지 않게 겨우 등장한 그녀 덕에 목숨을 건진 맷은 그녀가 자신때문에 이 위험한 곳을 찾아왔다는 사실이 아찔하게 느껴졌다. 캐런은 맷에게 전말을 고했다. 모든 것이 피스크의 계략이었다. 상황이 종료됨에 안도감을 느끼며 숨을 고르는 것도 잠시, 조용하던 윗 층에서 외발의 총소리가 들렸고, 건물 밖에선 맷이 제압한 자들과 같은 차를 타고 온 자들이 더 들이닥치는 소리가 들렸다.
피스크는 오늘의 계획에 진심으로 사활을 건 것 같았다. 맷과 포인덱스터의 머리를 직접 가지고 오라고 명한 그는, 추가 병력을 보내 일을 확실히 처리할 것을 명했다. 늑골과 팔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어 전면전이 불가한 맷은 하는 수 없이 캐런을 데리고 윗층으로 올라간다. 이 곳에 어울리지 않는, 소름끼치는 짐승의 포효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다가갔고, 그 곳에서 포인덱스터를 대신 총을 맞은 허니와, 이성을 잃은 포인덱스터를 마주했다.
덱스는 맷과 캐런을 보자마자 무릎으로 기듯이 다가가 그들에게 애원하듯이 빌었다. 허니를 제발 살려달라며 애걸복걸하는 그의 모습은 이미 그를 알고 있는 그들에게 너무나 이질적이고 기괴해 보였다. 오만함과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뭐든지 다 하겠다며 비굴하고 애처롭게 구는 그의 모습에, 캐런이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물러서며 거리를 두자 덱스는 더 큰 절망의 구렁텅이에 던져졌다. 이미 허니의 몸 속을 파고든 죽음을 맷과 캐런이 어떻게 할 수는 없었고, 덱스의 만행을 생각해도 그들의 반응은 지극히 당연했다. 덱스 역시 자신이 그들에게 한 짓을 모두 기억한다. 이제와서 그들에게 미안하거나 죄스럽진 않았다. 그런 부분에서 덱스는 여전히 덱스다웠다. 다만 자신의 과거가 허니에게 피해만 끼치고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에게 큰 충격과 고통을 주었을 뿐이다. 덱스는 다시 허니의 몸을 끌어안고 녹아내리듯이 그녀에게 파묻혔다. 자신의 동료, 원수, 능력과 성향, 과거, 심지어 자신의 존재까지도.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이 그녀를 병들게 하고 아프게 하다못해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 사실을 덱스는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은 허니에게 있어 너무나도 병적이고 쓸모없는 남자였다.
맷은 제 발 앞에 쉽게 조아리는 덱스에게 반응하지 않으며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완벽하게 무너져 내린 이 남자에게 더 이상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것이 보였다. 그 모습에 오래 전, 덱스를 영원히 수리 불가한 '깨진 잔'에 비유한 자신에게 허니가 한 말이 생각났다.
"밑이 깨진 잔은 깊은 물 속에 담그면 물을 가득 채울 수 있어요. 바닷속에 모두 담궈버리면 밑이 깨진 잔도, 다른 잔들과 똑같아 지겠죠."
그녀가 맞았다. 절대 깨지지 않을 것만 같던, 수십년간 쌓아온 그의 모든 것들이 허니로 인해 쉽게 박살났다. 광기와 혐오의 나선, 덱스가 그 끝없는 나선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사랑이었다.
윌스니너붕붕 믣 데어데블 불스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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