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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8 10:34
찌질
솔직히 말하면, 결혼이란 것에 어떤 큰 의미를 부여한 편은 아니었다. 이 커다란 사회에 속해 그 곳의 관습을 받아먹고 자란 입장에서 사랑만으로 결혼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먼 나라의 구전설화 같을 뿐이었다. 한때는 그것이 무척 억울하기도 했으나, 머리가 조금 자란 후에는 그것이 내가 여지껏 누려온 것들에 대한 값이라면 아주 수지가 안 맞는 거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깔끔하게 포기했다. 어차피 내가 버티고 저항해봐야 결과는 달라지지 않으니까. 아무리 머리에 띠를 두르고 반혼인주의를 부르짖어도 결국엔 좋은 싫든 의지와는 상관 없이 잘빠진 턱시도 차림으로 식장에 설 것을 알았다. 그래서 깔끔하게 체념했다.
대신 내 손 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 것들에 최선을 다하려 노력했다. 어쩌면 수동적인 소심한 반항이었을지 모른다. 때로는 그것들이 아주 의외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중 하나가 군대였고, 또 하나가 너였다. 참 이상한 사람.
눈을 찌르듯 밝은 조명 아래에 이전에도 몇 번인가 앉은 적이 있다. 똑같은 자리, 똑같은 음식, 똑같은 대화. 난감했다. 기계로 찍어낸 듯 똑같은 패턴 사이에서 어떤 특별한 것을 찾아야 할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다 네 이름을 발견했다. 반짝거리는 것들은 잔뜩 달고온 주제에 내 얼굴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어두워지는 낯빛을 감추려 하지도 않은 채 자리에 앉는 모습이, 너무도 내가 알던 너라서 마음이 놓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이런 바보같은 상황에서 바보같은 얼굴로 바보같은 말을 토해내게 될 줄은 몰랐다. 넌 늘 나를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데려간다. 낯선 곳에서 내가 바라볼 데는 너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맙게도 너는 늘 내 눈이 닿는 곳에 있어주었다. 너의 집, 나의 집, 우리의 식탁, 식당의 테이블, 모래가 날리는... 잠깐, 어디까지 거슬러가는 거야.
- 아잉, 엘티...
눈을 반짝 뜨자 옆에서 레이가 몸을 꾸물거리며 콧소리가 잔뜩 섞인 목소리로 네이트를 부르고 있었다. 레이의 한쪽 손은 그의 손을 꼭 잡은, 아니 그의 손에 꼭 잡힌 채였다. 다른 한 팔엔 2호차의 꽃돼지 릴리가 매달려 있는, 다소 호모– 에로티끄한 삼각관계로도 볼 수 있을 모양새였다. 이런 그림에서 높은 확률로 네이트는 릴리와 결혼하고 뒤에서 레이와 바람을 피우는 개자식일 것이다.
- 여자친구 꿈이라도 꾸셨어용? 이 레이레이의 비단같은 손을 어찌나 조물대시는지 한 2분만 더 늦게 일어나셨으면 레이레이가 엘티의 순결을 홀라당 가져갈 뻔했다구용.
- 브롸, 벌써 아침입니까아흐아아함...
- 그래서, 우리 소대 제일 가는 호모새끼 둘을 양 옆에 끼고 주무신 소감이 어떻습니까?
네이트는 레이의 손을 놓아주고는 미안하다 사과했다. 얼마나 오래 쥐고 있었는지 손 마디가 똑딱거릴 정도였고, 릴리의 육덕진 가슴에 끼어있던 팔에는 짜르르 전기가 흘렀다.
- 나... 나 얼마나 잔 거지?
- 네 시간 조금 지났습니다. 아직 별다른 지시사항은 없으니 피곤하시면 좀 더 주무셔도 됩니다. 릴리야! 너는 어젯밤부터 내리 잤잖냐! 일어나라!!!
몇 시간 전, 어스름한 빛이 들기 시작할 무렵. 내리 이틀을 깨어있어 정신마저 오락가락할 지경이었던 네이트는 장시간의 대기명령을 받은 후 살기 위해 흙바닥에 몸을 뉘였다. 그러자 곧 에스페라가 다가왔다.
- 엘티, 여기서 홀홀단신으로 주무시다간 홀홀단신으로 요단강 건너십니다. 저기 릴리 옆에 제가 참호 파 놨으니 거기 누우십쇼.
그리고는 마치 술 취한 아들래미를 끌고가듯 네이트의 팔을 잡아 끌어 따끈한 덩어리 옆에 붙여놓은 것이다. 저에게 들러붙는 이 돼지가 꽃돼지인지 흑돼지인지 분간할 새도 없이 가물가물 기억 위를 거닐던 중에 살짝 떠진 눈 사이로 들어온 까만색의 머리가 반가워서, 그냥 덥썩 그 손을 잡고 또 다시 잠에 빠져든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레이였다니. 무안하고 아쉬운 마음에 네이트는 몰래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덕분에 한층 더 얼간이같았던 지난 파병 때까지는 들춰보지 않을 수 있었으니 레이 녀석에게 고마워해야 할까.
다른 한쪽에서 그 광경을 구경하던 허니비는 아직까지 조금 뻣뻣한 손마디를 쭉 늘려 기지개나 켰다.
며칠 전, 네이트의 고해성사로 진실을 알게 된 허니비는 로벨을 붙잡고 시간이 어쩌고 거래가 어쩌고 하며 자신과 네이트의 어 홀 웨딩 스토리를 구구절절 풀어놓은 덕에 로벨과의 애착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간 혼자서 이리저리 고민하느라 머리깨나 아팠을 텐데도 불구하고 "허니, 너는 괜찮은 거야?" 라며 허니비의 안위를 먼저 생각해주는 로벨에 하마터면 제가 유부녀라는 사실도 잊은 채 무릎 꿇고 프로포즈를 갈길 뻔했다.
- 그럼 엘티랑은 화해한 거구나? 다행이다. 그동안 너무 축 쳐져 있어서 마음이 안좋았거든.
- 걱정시켜서 죄송해요.
- 아니야. 말해줘서 고마워. 털어놓을 상대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와도 돼.
진심이 담긴 따뜻한 말과 함께 로벨은 저보다도 더 고생했을 허니비의 등을 넓은 마음만큼이나 큰 손으로 도닥여주었다.
픽 중위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케이시 케이섬은 저기 있는 전차가 총 쏠 전차인지 총 못 쏠 전차인지 알아보라며 지랄에 지랄을 더했고, 결국 투투 환자들을 대신해 로벨의 분대원들이 수색에 나섰다. 발목 위까지 물이 찰랑대는 진흙탕을 지나던 도중, 허니비는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진흙 속에 코를 박고 죽을 위기는 피했으나 그 댓가로 발목을 삐끗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브라보들 사이에 창궐한 바이러스로 인해, 절뚝거리는 허니비를 부축해주던 스타이니는 올라오는 구토감을 이기지 못하고 그나마 마지막 남은 의리로 부상당한 동료를 저 멀리 던져주는 동시에 허리를 숙이고 한참을 웩웩댔다. 맨바닥에 머리를 때려박기 직전 에스페라가 간신히 겨드랑이를 잡아 일으켜준 덕에 뇌진탕은 면했으나, 그러기 무섭게 허니비도 웨엑– 전혀 듣기 좋을리가 없는 소리로 감사인사를 대신해야 했다. "이런 씨부럴!" 에스페라가 급하게 발을 치우며 소리쳤고, 브룬마이어에게 물을 먹여주던 샤핀은 전성기의 찰리 채플린이 살아돌아와도 이런 시퀀스는 못 뽑아냈을 거라며 낄낄댔다. 그 모든 촌극을 지켜보는 소대장의 심정은 참으로... 착잡하기만 했다.
- 허니, 괜찮아?
네이트는 담요와 물을 챙겨 허니비에게 갔다. 맨발로 험비 보닛 위에 누워있던 허니비는 인사는 커녕 손가락이나 겨우 까딱이는 상태였지만, 곧 발을 만지는 손길에 파득거리며 몸을 일으키려다 그 반동 때문인지 그대로 토악질을 했다. 다행히 네이트가 재빠르게 봉투를 받쳐주어서 아닌 밤중에 나뒹구는 토사물로 바지적삼 다 적시시는 추태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는 얌전히 누워 건네주는 물이나 받아마시고 덮어주는 담요나 끌어안고 있었다. 네이트는 허니비의 발목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 냄새 장난 아닐 텐데.
- 괜찮아. 참을만 해.
- 근데 왜 엘티가 오셨습니까? 닥이 저는 잊어버렸대요?
- 걱정돼서 왔다, 왜. 나는 안 반가워?
- 누가 안 반갑다 했습니까?
- 아플거야. 조금만 참아.
네이트가 압박을 위해 힘을 주어 붕대를 감기 시작하자, 발목에서부터 올라오는 통증에 허니비는 그 좋아하는 말대꾸도 못하고 이를 악물어야 했다. 네이트는 빠르고 꼼꼼하게 테이핑을 마친 후 어디서 구해왔는지 뽀송한 새 양말까지 야무지게 신겨주고는 잠깐 사이에 온 몸의 진이 다 빠진듯한 허니비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주었다.
- 오늘따라 친절하시네요.
- 나 원래 친절해.
- 저한테는 안 그러셨잖아요.
- 그래서 지금 이렇게 땅을 치고 후회하는 중이잖아.
- 아직 멀었습니다.
- 앞으로 백 번이고 이백 번이고 더 착해질테니까, 얼른 낫기나 해. 네 남편 가슴 찢어진다.
- 또 그놈의 남편 놀음입니까?
- 응. 이번엔 좀 오래 해보려고. 그러니까 너도 협조해 줘.
- 한마디를 안 져...
고개를 저으며 피실피실 웃는 허니비를 따라 웃던 네이트는 뭐라 더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다, 조금 있다 다시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얼마 안가 진짜로 자신을 잊어버렸는지 다소 미안한 표정을 한 닥과 스타이니를 대신해 온 티에 의해 허니비는 다른 환자들 옆에 눕혀졌다. 닥은 붕대가 감긴 발목을 이리저리 돌려보다 네이트의 솜씨가 썩 나쁘지는 않았는지 별 말 없이 다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무언가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아주 확신이 없는 말투로 물었다.
- 야,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너 엘티랑 사귀냐?
- ... 갑자기요?
- 그치? 네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지? 잊어버려라.
- 사귀는 건 아니고, 엘티한테 꼬셔지고 있습니다.
- 너... 많이 아프구나. 자라.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있네..." 하고 중얼거리며 멀어지는 닥을 보면서 이걸 좋아해야 할지 기분 나빠해야 할지 영 갈피를 못잡고 멍청하게 있던 와중, 웃음을 참느라 기묘한 표정의 로벨을 본 허니비가 참지 못하고 "브라이언 저 개새..." 라며 욕을 내뱉자 옆에서 비몽사몽으로 골골대던 브룬마이어가 대뜸 "응? 왜 불러?" 하고 대답하는 바람에, 결국 로벨은 소리도 못 내고 어깨만 들썩이며 꺼이꺼이 울고 말았다.
시간이 조금 지난 새벽, 홀로 환자들을 돌보느라 지친 닥도 한구석에 몸을 구겨 누웠고 눈을 뜨고 있는 것 자체가 노동이었던 병자들은 이미 자장자장 잘도 자고 있었다. 몸이 아파서인지, 나쁜 꿈이라도 꾸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자는 허니비의 눈썹을 조심스럽게 매만져주던 네이트는 평소보다 좀 더 뜨거운 이마를 짚어 열을 확인하기도 했다. 시원한 손이 기분 좋았는지 한층 풀어진 얼굴로 새근대던 허니비가 눈도 뜨지 않은 그대로 네이트의 이름을 부르자, 이마에 얹어진 손이 화들짝 놀라는게 느껴져 웃음이 나왔다. 허니비는 네이트의 손을 조금 아래로 내려 감은 눈 위를 덮었다.
- 네잇. 그때 네잇이 손 잡고 잔 거, 그거 저 맞아요.
- 그랬어?
- 네. 제가 거기서 자다가 나갈때 레이레이를 그쪽으로 떼굴떼굴 굴렸어요. 그래서 레이가 거기 누운거예요.
- 그렇구나.
다소 횡설수설 대는 게 반은 잠꼬대로 하는 말이 분명해서, 네이트는 가만히 웃으며 대꾸를 이어갔다. 습관인지 모르게 살짝 살짝 움직이는 눈썹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 근데 왜 말 안해줬어.
- 그냥... 어리둥절해 하는게 귀여워서요.
- 내가? 귀여워?
- 아니... 엘티는... 귀여운건... 릴리.
- 릴리...? 나는?
- ...... 돼지...
- ...?
의문의 한마디를 끝으로 허니비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허니비가 귀여웠다던 어리둥절한 상태로 남겨진 네이트는 잠시 "돼지"의 말뜻을 되짚어보다 포기하고 어깨 아래로 내려간 담요나 꼼꼼히 여며주었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검지와 중지를 제 입술에 한 번, 허니비의 이마에 한 번 갖다댄 후 자리로 돌아갔다.
- 마이크, 나 뚱뚱해?
- ... 중위님이요?
- 아니지...?
- 아닙니다.
젠킬 스탘 중위님너붕붕 네잇너붕붕 돼지?너붕붕? 구애
솔직히 말하면, 결혼이란 것에 어떤 큰 의미를 부여한 편은 아니었다. 이 커다란 사회에 속해 그 곳의 관습을 받아먹고 자란 입장에서 사랑만으로 결혼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먼 나라의 구전설화 같을 뿐이었다. 한때는 그것이 무척 억울하기도 했으나, 머리가 조금 자란 후에는 그것이 내가 여지껏 누려온 것들에 대한 값이라면 아주 수지가 안 맞는 거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깔끔하게 포기했다. 어차피 내가 버티고 저항해봐야 결과는 달라지지 않으니까. 아무리 머리에 띠를 두르고 반혼인주의를 부르짖어도 결국엔 좋은 싫든 의지와는 상관 없이 잘빠진 턱시도 차림으로 식장에 설 것을 알았다. 그래서 깔끔하게 체념했다.
대신 내 손 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 것들에 최선을 다하려 노력했다. 어쩌면 수동적인 소심한 반항이었을지 모른다. 때로는 그것들이 아주 의외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중 하나가 군대였고, 또 하나가 너였다. 참 이상한 사람.
눈을 찌르듯 밝은 조명 아래에 이전에도 몇 번인가 앉은 적이 있다. 똑같은 자리, 똑같은 음식, 똑같은 대화. 난감했다. 기계로 찍어낸 듯 똑같은 패턴 사이에서 어떤 특별한 것을 찾아야 할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다 네 이름을 발견했다. 반짝거리는 것들은 잔뜩 달고온 주제에 내 얼굴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어두워지는 낯빛을 감추려 하지도 않은 채 자리에 앉는 모습이, 너무도 내가 알던 너라서 마음이 놓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이런 바보같은 상황에서 바보같은 얼굴로 바보같은 말을 토해내게 될 줄은 몰랐다. 넌 늘 나를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데려간다. 낯선 곳에서 내가 바라볼 데는 너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맙게도 너는 늘 내 눈이 닿는 곳에 있어주었다. 너의 집, 나의 집, 우리의 식탁, 식당의 테이블, 모래가 날리는... 잠깐, 어디까지 거슬러가는 거야.
- 아잉, 엘티...
눈을 반짝 뜨자 옆에서 레이가 몸을 꾸물거리며 콧소리가 잔뜩 섞인 목소리로 네이트를 부르고 있었다. 레이의 한쪽 손은 그의 손을 꼭 잡은, 아니 그의 손에 꼭 잡힌 채였다. 다른 한 팔엔 2호차의 꽃돼지 릴리가 매달려 있는, 다소 호모– 에로티끄한 삼각관계로도 볼 수 있을 모양새였다. 이런 그림에서 높은 확률로 네이트는 릴리와 결혼하고 뒤에서 레이와 바람을 피우는 개자식일 것이다.
- 여자친구 꿈이라도 꾸셨어용? 이 레이레이의 비단같은 손을 어찌나 조물대시는지 한 2분만 더 늦게 일어나셨으면 레이레이가 엘티의 순결을 홀라당 가져갈 뻔했다구용.
- 브롸, 벌써 아침입니까아흐아아함...
- 그래서, 우리 소대 제일 가는 호모새끼 둘을 양 옆에 끼고 주무신 소감이 어떻습니까?
네이트는 레이의 손을 놓아주고는 미안하다 사과했다. 얼마나 오래 쥐고 있었는지 손 마디가 똑딱거릴 정도였고, 릴리의 육덕진 가슴에 끼어있던 팔에는 짜르르 전기가 흘렀다.
- 나... 나 얼마나 잔 거지?
- 네 시간 조금 지났습니다. 아직 별다른 지시사항은 없으니 피곤하시면 좀 더 주무셔도 됩니다. 릴리야! 너는 어젯밤부터 내리 잤잖냐! 일어나라!!!
몇 시간 전, 어스름한 빛이 들기 시작할 무렵. 내리 이틀을 깨어있어 정신마저 오락가락할 지경이었던 네이트는 장시간의 대기명령을 받은 후 살기 위해 흙바닥에 몸을 뉘였다. 그러자 곧 에스페라가 다가왔다.
- 엘티, 여기서 홀홀단신으로 주무시다간 홀홀단신으로 요단강 건너십니다. 저기 릴리 옆에 제가 참호 파 놨으니 거기 누우십쇼.
그리고는 마치 술 취한 아들래미를 끌고가듯 네이트의 팔을 잡아 끌어 따끈한 덩어리 옆에 붙여놓은 것이다. 저에게 들러붙는 이 돼지가 꽃돼지인지 흑돼지인지 분간할 새도 없이 가물가물 기억 위를 거닐던 중에 살짝 떠진 눈 사이로 들어온 까만색의 머리가 반가워서, 그냥 덥썩 그 손을 잡고 또 다시 잠에 빠져든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레이였다니. 무안하고 아쉬운 마음에 네이트는 몰래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덕분에 한층 더 얼간이같았던 지난 파병 때까지는 들춰보지 않을 수 있었으니 레이 녀석에게 고마워해야 할까.
다른 한쪽에서 그 광경을 구경하던 허니비는 아직까지 조금 뻣뻣한 손마디를 쭉 늘려 기지개나 켰다.
며칠 전, 네이트의 고해성사로 진실을 알게 된 허니비는 로벨을 붙잡고 시간이 어쩌고 거래가 어쩌고 하며 자신과 네이트의 어 홀 웨딩 스토리를 구구절절 풀어놓은 덕에 로벨과의 애착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간 혼자서 이리저리 고민하느라 머리깨나 아팠을 텐데도 불구하고 "허니, 너는 괜찮은 거야?" 라며 허니비의 안위를 먼저 생각해주는 로벨에 하마터면 제가 유부녀라는 사실도 잊은 채 무릎 꿇고 프로포즈를 갈길 뻔했다.
- 그럼 엘티랑은 화해한 거구나? 다행이다. 그동안 너무 축 쳐져 있어서 마음이 안좋았거든.
- 걱정시켜서 죄송해요.
- 아니야. 말해줘서 고마워. 털어놓을 상대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와도 돼.
진심이 담긴 따뜻한 말과 함께 로벨은 저보다도 더 고생했을 허니비의 등을 넓은 마음만큼이나 큰 손으로 도닥여주었다.
픽 중위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케이시 케이섬은 저기 있는 전차가 총 쏠 전차인지 총 못 쏠 전차인지 알아보라며 지랄에 지랄을 더했고, 결국 투투 환자들을 대신해 로벨의 분대원들이 수색에 나섰다. 발목 위까지 물이 찰랑대는 진흙탕을 지나던 도중, 허니비는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진흙 속에 코를 박고 죽을 위기는 피했으나 그 댓가로 발목을 삐끗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브라보들 사이에 창궐한 바이러스로 인해, 절뚝거리는 허니비를 부축해주던 스타이니는 올라오는 구토감을 이기지 못하고 그나마 마지막 남은 의리로 부상당한 동료를 저 멀리 던져주는 동시에 허리를 숙이고 한참을 웩웩댔다. 맨바닥에 머리를 때려박기 직전 에스페라가 간신히 겨드랑이를 잡아 일으켜준 덕에 뇌진탕은 면했으나, 그러기 무섭게 허니비도 웨엑– 전혀 듣기 좋을리가 없는 소리로 감사인사를 대신해야 했다. "이런 씨부럴!" 에스페라가 급하게 발을 치우며 소리쳤고, 브룬마이어에게 물을 먹여주던 샤핀은 전성기의 찰리 채플린이 살아돌아와도 이런 시퀀스는 못 뽑아냈을 거라며 낄낄댔다. 그 모든 촌극을 지켜보는 소대장의 심정은 참으로... 착잡하기만 했다.
- 허니, 괜찮아?
네이트는 담요와 물을 챙겨 허니비에게 갔다. 맨발로 험비 보닛 위에 누워있던 허니비는 인사는 커녕 손가락이나 겨우 까딱이는 상태였지만, 곧 발을 만지는 손길에 파득거리며 몸을 일으키려다 그 반동 때문인지 그대로 토악질을 했다. 다행히 네이트가 재빠르게 봉투를 받쳐주어서 아닌 밤중에 나뒹구는 토사물로 바지적삼 다 적시시는 추태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는 얌전히 누워 건네주는 물이나 받아마시고 덮어주는 담요나 끌어안고 있었다. 네이트는 허니비의 발목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 냄새 장난 아닐 텐데.
- 괜찮아. 참을만 해.
- 근데 왜 엘티가 오셨습니까? 닥이 저는 잊어버렸대요?
- 걱정돼서 왔다, 왜. 나는 안 반가워?
- 누가 안 반갑다 했습니까?
- 아플거야. 조금만 참아.
네이트가 압박을 위해 힘을 주어 붕대를 감기 시작하자, 발목에서부터 올라오는 통증에 허니비는 그 좋아하는 말대꾸도 못하고 이를 악물어야 했다. 네이트는 빠르고 꼼꼼하게 테이핑을 마친 후 어디서 구해왔는지 뽀송한 새 양말까지 야무지게 신겨주고는 잠깐 사이에 온 몸의 진이 다 빠진듯한 허니비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주었다.
- 오늘따라 친절하시네요.
- 나 원래 친절해.
- 저한테는 안 그러셨잖아요.
- 그래서 지금 이렇게 땅을 치고 후회하는 중이잖아.
- 아직 멀었습니다.
- 앞으로 백 번이고 이백 번이고 더 착해질테니까, 얼른 낫기나 해. 네 남편 가슴 찢어진다.
- 또 그놈의 남편 놀음입니까?
- 응. 이번엔 좀 오래 해보려고. 그러니까 너도 협조해 줘.
- 한마디를 안 져...
고개를 저으며 피실피실 웃는 허니비를 따라 웃던 네이트는 뭐라 더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다, 조금 있다 다시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얼마 안가 진짜로 자신을 잊어버렸는지 다소 미안한 표정을 한 닥과 스타이니를 대신해 온 티에 의해 허니비는 다른 환자들 옆에 눕혀졌다. 닥은 붕대가 감긴 발목을 이리저리 돌려보다 네이트의 솜씨가 썩 나쁘지는 않았는지 별 말 없이 다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무언가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아주 확신이 없는 말투로 물었다.
- 야,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너 엘티랑 사귀냐?
- ... 갑자기요?
- 그치? 네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지? 잊어버려라.
- 사귀는 건 아니고, 엘티한테 꼬셔지고 있습니다.
- 너... 많이 아프구나. 자라.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있네..." 하고 중얼거리며 멀어지는 닥을 보면서 이걸 좋아해야 할지 기분 나빠해야 할지 영 갈피를 못잡고 멍청하게 있던 와중, 웃음을 참느라 기묘한 표정의 로벨을 본 허니비가 참지 못하고 "브라이언 저 개새..." 라며 욕을 내뱉자 옆에서 비몽사몽으로 골골대던 브룬마이어가 대뜸 "응? 왜 불러?" 하고 대답하는 바람에, 결국 로벨은 소리도 못 내고 어깨만 들썩이며 꺼이꺼이 울고 말았다.
시간이 조금 지난 새벽, 홀로 환자들을 돌보느라 지친 닥도 한구석에 몸을 구겨 누웠고 눈을 뜨고 있는 것 자체가 노동이었던 병자들은 이미 자장자장 잘도 자고 있었다. 몸이 아파서인지, 나쁜 꿈이라도 꾸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자는 허니비의 눈썹을 조심스럽게 매만져주던 네이트는 평소보다 좀 더 뜨거운 이마를 짚어 열을 확인하기도 했다. 시원한 손이 기분 좋았는지 한층 풀어진 얼굴로 새근대던 허니비가 눈도 뜨지 않은 그대로 네이트의 이름을 부르자, 이마에 얹어진 손이 화들짝 놀라는게 느껴져 웃음이 나왔다. 허니비는 네이트의 손을 조금 아래로 내려 감은 눈 위를 덮었다.
- 네잇. 그때 네잇이 손 잡고 잔 거, 그거 저 맞아요.
- 그랬어?
- 네. 제가 거기서 자다가 나갈때 레이레이를 그쪽으로 떼굴떼굴 굴렸어요. 그래서 레이가 거기 누운거예요.
- 그렇구나.
다소 횡설수설 대는 게 반은 잠꼬대로 하는 말이 분명해서, 네이트는 가만히 웃으며 대꾸를 이어갔다. 습관인지 모르게 살짝 살짝 움직이는 눈썹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 근데 왜 말 안해줬어.
- 그냥... 어리둥절해 하는게 귀여워서요.
- 내가? 귀여워?
- 아니... 엘티는... 귀여운건... 릴리.
- 릴리...? 나는?
- ...... 돼지...
- ...?
의문의 한마디를 끝으로 허니비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허니비가 귀여웠다던 어리둥절한 상태로 남겨진 네이트는 잠시 "돼지"의 말뜻을 되짚어보다 포기하고 어깨 아래로 내려간 담요나 꼼꼼히 여며주었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검지와 중지를 제 입술에 한 번, 허니비의 이마에 한 번 갖다댄 후 자리로 돌아갔다.
- 마이크, 나 뚱뚱해?
- ... 중위님이요?
- 아니지...?
- 아닙니다.
젠킬 스탘 중위님너붕붕 네잇너붕붕 돼지?너붕붕? 구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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