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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7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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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커먼 연기가 자꾸만 눈 앞을 가렸다.
소매를 크게 휘둘러 영력을 뿌려도 조금 물러났다 무섭도록 엉켜드는지라, 강징은 포기하고 감각을 곤두세워 한발 한발 나아갔다.
검고 희뿌연 어둠 아닌 어둠 속에서, 다시 화살비가 쏟아져내렸다.
거의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음습한 공격이어도 삼독성수를 해하기에는 어림도 없었지만. 
강징이 휘두른 검이 닿기도 전에 쨍쨍 소리가 나도록 얻어맞은 화살들이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강징은 가늘게 눈을 뜨며 앞에 선 그림자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말려도 앞장을 서서 길을 뚫어나가던 남희신이 굳게 서 있었고, 그가 내뿌린 일검의 여파로 잠시 동안 이 부근의 공간만 얼어붙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천신제는 대대로 고소 남씨가 주관해 온 신성한 의식이었다.
그것을 기산 온씨가 패악을 부리며 빼앗으려 하던 시절이 있었고, 그로부터 사일지정으로 이어지는 동안에는 아예 제를 지내지 못했다.
기산 온씨가 무너진 후에도 그 패정이 그대로 운몽 강씨로 이어지나 싶은 불안감에 어수선한 시간이 약 십년 정도 흘렀다.
그러다 얼마 전, 강징은 무명의 호소문을 한 통 받았다.
천신제를 지내지 않으니 연해 가뭄이 드는 거라고 제발 굽어살펴 달라는 내용이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혀 있는 편지였다.
옛날부터 강징은 천신제 따위의 미신은 믿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수진계에서는 중요한 의식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사람들이 멋대로의 생각으로 기가 죽어 지내느라 하고 싶어도 못 하는 것도 알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튼 제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질 않았고,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나서서 독려해 줄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민간인들이 제를 믿고 있고, 그로 인해 불안해한다면 다른 문제였다.
그래서 얼마 후 고소 남씨 사람들을 만났을 때 강징은 무뚝뚝한 말투로 천신제를 지낼 준비를 하라고 말했다.
케케묵은 제사 따위가 세력 구도에 영향을 미칠 리는 없으니 허락해도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강징은 내심 다른 감정 때문에 심란한 기분이 들었다.
다름이 아니라, 아슬아슬하게 느껴지는 현재의 모든 일들이 그냥 사일지정 이전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희망없는 바램이었다.





제를 지내는 산도 고소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제를 지내야 하는 날짜가 촉박했기 때문에 고소 남씨는 서둘러 준비를 마쳤다.
천신제 날이 되자, 산 아래에는 새벽부터 모이기 시작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예식에 대한 예의로 사람들은 길다란 돌계단과 험한 산길을 걸어서 올라갔다.
강징은 운몽 강씨가 제를 주도하는 고소 남씨의 바로 뒤에 따라가도록 했고, 그것만이 기존 관습이 어떻든간에 양보하지 않았던 한가지였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치곤 엄숙하게 산을 오르며, 강징은 혼자만의 불안감을 냉한 얼굴 뒤로 감추었다.
강징은 어디를 가든 음철을 몸에서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천신제를 지내는 산은 양기가 무척 강하여 음철과 부딪히면 극히 불안정한 상태에 빠지기 때문에 가져올 수가 없었다.
어쨌든 천신제는 수선인들 사이에서도 매우 신성한 의식이라, 이 곳에서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스스로가 지닌 힘만으로도 두렵지 않은 강징은 이따금씩 무척 적의에 가득한 시선을 주변에 던졌고, 그와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뜨끔하며 얼른 피하곤 했다. 
그런데,
천만뜻밖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다.
넓고 새하얀 대리석 탁자 위에 제식이 가득히 놓였고, 커다란 향정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는 곧게 올라 하늘까지 닿을 듯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장을 차리고 고요하게 서서 제를 올리는 순간에는 강징도 엄숙한 감정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그 때 갑자기 수상한 연기가 사방에서 피어오르더니 꽝꽝 폭발하는 굉음으로 산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순식간에 사방은 검은 연기로 꽉 차버렸고, 거기에 시커먼 화살비까지 쏟아져내리자 사방은 금세 사람들의 비명 소리로 생지옥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굉음이 마구 터지는 바람에 미처 화살비를 피하지 못한 강징이 치를 떨며 팔뚝에 박힌 화살을 뽑아 내던져버렸다. 
갑자기 천국에서 지옥으로 화한듯한 변화를 겪었지만 강징은 빠르게도 침착함을 되찾았고, 오히려 이런 상황이 친숙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강징은 얼른 소리를 질러 운몽 강씨 수사들을 가까이 끌어모았고, 냉정하게 경계심을 일깨웠다.
덕분에 이 다음의 공격-검은 안개가 퍼진 가운데 복면을 쓴 괴한들이 쏟아져나와 덤벼들었을 때 충분히 대응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괴한들은 금단을 맺었거나, 최소한 그 정도 수준에 준하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거침없이 덤벼들었다.
이건 도대체 어느 가문의 공작인가? 강징은 빈틈없이 공격에 맞서며 이를 갈았다. 
“부인!”
그 때 대열의 뒤쪽에 있던 남희신이 달려오며 외치는 소리가 들리자 강징은 갑자기 뒤꼭지가 서늘해지며 잠시 잊고 있던 그의 존재를 깨달았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상념은 천신제, 고소 남씨, 그리고 고소 남씨 출신인 남희신이었다.
강징은 주춤하며 뒤로 발을 물렸다. 그런 채로 사고가 멈추어버리자, 정면에서 검을 쥐고 달려오는 남희신 외에는 마치 시간이 멈추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옆에서 튀어나온 괴한들이 한꺼번에 남희신에게 달라드는 모습을 보자 강징은 저도 모르게 다급한 소리를 질렀다.
“택무군을 보호하라!”
그 후에는 도무지 정신을 하나로 모을 수 없는 사건의 연속이었다.
강징과 측근들이 미처 달려가기도 전에 남희신이 재빠르게 괴한들을 처치해버렸다. 우아하면서도 신속한 쾌검으로 삭월이 뿌리는 빛이 흐릿한 안개 속에서 환영같은 춤을 추었다.
“부인!”
마침내 강징에게 도달한 남희신이 그의 팔을 꼭 잡았다. 강징은 아직도 멍하게 그를 쳐다보며 바로 등 뒤에서 날아오는 검도 느끼지 못했고, 그것을 사납게 검을 휘두른 남희신이 튕겨내었다.
“어서 이 곳을 떠나야 합니다!”
남희신이 외치는 소리를 들은 강징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행을 불러들여 제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걸핏하면 화살이 쏟아졌으므로 섣불리 날아오를 수는 없었다. 주위에서 어지럽게 후퇴하는 사람들도 한결같이 검을 쥐고 방어하며 아래로 내달리고 있었다.
넓은 제장을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자 위험은 더욱 예측불가하게 변해갔다.
사방이 숲과 덤불이었고, 폭탄이며 화살이 어디서부터 날아들지도 알 수 없었다.
“잠깐!”
또 한 차례 쏟아지는 화살비를 막아낸 후, 팔을 잡는 강징을 돌아보며 남희신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부인, 어서...”
“쉿!”
강징이 인상을 찌푸리며 경고하자 남희신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봐야 사방에서 울리는 소음은 막을 수 없었지만, 침묵한 채 귀를 쫑긋 세우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부인...!”
별안간 강징이 떠밀어내듯 방향을 돌려 숲 속으로 튀어들어가자 깜짝 놀란 남희신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거침없이 뛰어가는 강징을 따라잡기 힘들어 덤불을 헤치며 부르는데, 마치 어디선가 보고 있기라도 했던 듯 절묘하게 날아드는 화살들이 강징의 뒤로 쏟아져내렸다.
남희신은 전신으로 그의 뒤를 막아서듯 돌아서서 미친듯이 팔을 휘둘렀다.
개중에 한 발이라도 그에게 닿을까 싶어 이를 악물고 영력을 쏟아붓는 귀에 아이 우는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커지더니 숫제 귓속을 터뜨려버릴 것 같이 가까워지자 남희신은 극렬한 긴장감이 폭발하며 미치도록 가슴이 죄어들었다.
“가자.”
신경줄이 너무 팽팽해져 끊어져버릴것만 같은 때,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와서 돌아보니 어느새 작은 아이를 품에 안은 강징이 서 있었다.
강징은 잠시 얼이 빠진 듯 바라보고만 서 있는 남희신이 지나치게 긴장을 하다 못해 충격을 받은 것을 깨닫고, 땀이 흘러내린 하얀 뺨을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걱정 말거라. 얼른 가자꾸나.”
남희신은 천천히 숨을 토하며 새삼스럽게 강징을 훑어보았다. 두려운지 낯선 강징의 품 속으로 파고드는 아이의 울음소리도 간신히 평범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난리통을 뚫고 산 아래로 내려오자 검은 연기가 걷히고 우군이 늘어나며 겨우 안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더이상 화살비가 쏟아지지 않았고 아래쪽에는 적들도 보이지 않음에도 급습을 당해 불안해진 사람들은 크게 무리를 지은 채 안쪽에서는 다친 사람들을 구제하고 밖으로는 한껏 경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익숙치 못한 험한 지형을 빌려 기습을 했을 뿐, 넓은 평지에서는 손쓸 도리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강징은 무리에 섞이는 대신 수하들을 불러서 낙오된 자가 없는지 살펴보았다. 
연기 때문에 목이 따가웠고, 뒤늦게 화살을 맞은 팔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와, 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소리에 품에 안은 아이를 들여다보니 사람 많은 곳에 다다라 마음자리가 바뀌었는지 이번에는 아이가 강징을 밀어내며 울어대었다.
어린 조카도 안아줄 기회가 별로 없었던 강징은 난감해하며 어색하게 아이를 추스렸다. 아이가 더욱 발버둥을 치는 바람에 하마터면 놓칠뻔한 강징은 간신히 아이의 뒷덜미를 붙잡으며 순간적으로 심해지는 팔의 통증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문득 주변의 공기가 이상하게 느껴서 고개를 들어 보니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이 편에 몰려 있었다.
숨이 넘어가도록 울고 있는 아이, 그리고 그 아이를 한 손에 움켜쥐다시피 하고 있는 강징.
아이를 지키느라 다친 손으로 검을 휘두른 팔은 피에 푹 절어 있었다.
한 손으로는 물건처럼 아이를 붙들고, 다른 손은 피칠갑이 된 자신이 어떻게 비치는 건지, 저를 향한 눈들 속에 담겨진 혐오감과 경악, 두려움을 통해 똑똑하게 전해져왔다.
사람들은 이 습격이 삼독성수가 벌인 짓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는 것이었다.
군중들의 의심에 가득찬 마음, 적개심과 부딪힌 강징은 당황했다.
그러나 흔들리는 눈동자의 안에서 새파랗게 일어나는 심지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그는 일각도 되지 않아 평정심을 되찾았다.
“이건 어느 멍청이의 아이냐?”
구름떼처럼 모인 사람들이 비정상적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 가운데 강징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러자 사람들 속에서 한 남자가 냉큼 튀어나오더니 무릎을 꿇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강징은 눈살을 찌푸리며 냅다 그에게 아이를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돌아가자는 말도 없이 그가 돌아서자, 자색 장포를 걸친 한 무리의 사람들도 그와 같이 등을 돌리고 일제히 날아올랐다.
“부인...”
다만 남희신만이, 무언가 오해가 가득한 분위기를 뒤로 하고 떠나 버리는 강징을 선뜻 따라가지 못하고 안타깝게 불렀다.
여전히 고요한 가운데 아이의 울음 소리와, 무수하게 쓰다듬어 달래는 남자의 목소리만 들려왔다.
남희신은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 것처럼 사람들을 돌아보았지만, 싸늘한 눈들은 똑같은 감정을 담고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결국 어검을 하여 강징의 뒤를 따라잡으면서도 남희신은 몇 번이나 멀어져가는 사람떼를 내려다보았다. 
넓디 넓은 평원에 서 있는 사람들의 무리. 그들과 강징의 사이에 놓인 벽을 남희신은 난생 처음으로 느낀 것이었다.
이제까지 남희신은 대외적인 강징의 위치에 대해 그가 어떤 고고한 강자라는 인상을 가졌을 뿐으로, 수진계의 권력구도나 그 정점에 강징이 있다는 사실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알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이미 남희신은 강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충격이었다.
흉악한 사건이 터지자마자 사람들이 한결같이 강징을 의심한다는 사실, 그 정도로 그를 두려워할 뿐 아니라 무척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이.
강징은 무척이나 무서운 기세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이를 악물고 쫓아가며, 남희신의 얼굴에는 마치 제가 당한 일인듯 억울하고 안타까워하는 감정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도대체, 왜?
나의 부인이 이런 사건을 일으킬 리 없으며,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째서 아무도 모른단 말인가?...




연화오로 돌아오자마자 강징은 의자에 앉기도 전에 사람들을 소집하여 이 일을 철저히 조사하도록 명했다.
천신제의 산으로 보낼 사람들을 먼저 물색하고, 그 다음 고소 남씨를 감시하기 위한 사람을 보내려던 강징은 남희신이 들어오자 입을 다물었다.
남희신은 평소 이까지 들어오지 않는 수많은 수사들을 보아도 관심이 없는 듯 강징에게 다가가 더운물이 든 세숫대야와 약재도구들을 내려놓았다.
마치 두 눈에 강징밖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의 옷을 벗기려던 남희신이 멈칫하며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잠시 나가주십시오.”
조금 전까지 천신제의 사고에 대해 지시를 받던 집무실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심각했다. 그런데 다른 때라면 뒤로 물러나 책만 읽던 남희신이 축객령을 내리자 당황한 사람들이 강징을 쳐다보았다.
“......”
그러나 강징이 고개를 돌리며 나가라는 듯 손을 내젓자, 충실한 사람들은 얼른 머리를 숙이고 속속들이 밖으로 빠져나갔다.
강징이 나가라고 한 이상 다시 들어올 리도 없건만, 남희신은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문에 빗장을 걸고 돌아왔다.
강징은 말없이 남희신이 하는대로 내버려두었다. 다만 피에 젖어 상처에 달라붙은 옷자락이 당겨질 때에만 움찔하며 동요했을 뿐. 그러자 남희신은 더운 물을 적신 수건을 대었다 떼었다 하며 무척 조심스럽게 벗겨내었다.
그동안 강징은 유심히 그를 살펴보았다. 남희신은 상처에만 집중하는 듯 말도 하지 않고 온통 주의가 그쪽에 쏠려 있었다. 마치 강징을 조금이라도 아프게 했다간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지나칠 정도로 조심을 했다.
무슨 약을 썼는지는 몰라도 뜨끈한 약물이 배인 천으로 여러번 닦아 내자 불에 지져지는 듯하던 통증이 가라앉으며 욱신욱신한 느낌만 남았다.
“부인, 상처를 압박하면 좋지 않으니 이대로 쉬는 것이 좋겠습니다.”
일을 하려면 사람을 보아야 하고, 그러려면 드러난 팔을 옷으로 가려야 하니 경고하는 소리였다.
아직 고소 남씨로 사람을 보내야 할 일이 남아 있었지만, 강징은 한숨을 쉬며 그러마고 대답했다. 어차피 몰래 저지른 일인 걸, 조사가 하루쯤 늦어진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집무실에서 침소까지 가는 길에 사람을 물려두는 것도, 걸어가는 강징의 어깨 위에 가볍게 망토를 덮어 감싸주는 일도 강징은 아무 말 없이 받아들였다.
미리 준비해 두었는지 방에 도착하자마자 가져오는 죽 한사발도 군말없이 삼켰고, 잠자리를 보아 주자 그대로 누웠다.
“혹시 열이 오르거나 아프시면, 저를 깨우셔야 합니다.”
염려스럽게 당부하는 말에도 강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무척 끌어안고 싶을 텐데, 상처 때문이겠지만 남희신은 얌전하게 옆에 누웠다.
촛불이 꺼지자 방은 괴괴한 침묵에 감싸였다.
강징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눈을 뜬 채, 곁자리에 누운 남희신을 의식하며 생각하고 있었다.
사색의 내용은 고소 남씨나, 남희신에 대한 의심이 아니었다.
강징은 아까 앞을 지키고 위험을 헤치고 나가던 남희신의 실력을 곱씹어보고 있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린 녀석이 어쩌면 그렇게 강한 건지?...
만약 고소 남씨의 수사들이 죄다 그처럼 강하다면...? 그런 힘을 숨기고 있다면.
사건 사고와 권력 다툼에 예민한 강징의 머릿속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그런 위협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어쩌면, 고소 남씨는 생각보다 강한 저력을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위험한 사건을 겪은 밤, 남희신은 강징의 곁에 누워 눈을 감았지만 오래도록 잠이 들지 못했다.
하지만 강징은 그보다도 훨씬 오랫동안 깨어 있었다.
한밤중이 지날 때까지 몇 시진이고 기다리고 있다가 일어나, 잠든 남희신이 깨지 못하도록 살짝 혈도를 눌렀다. 그리고는 조심조심 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다소 망측한 짓 같다고 느꼈지만, 이내 옷깃을 열자마자 보이는 상처에 숨을 삼켰다. 고요하게 잠든 얼굴 아래, 옷깃으로 간신히 감춰졌던 상처가 목덜미에서 가슴팍까지 길게 그어져 있었다. 이미 스스로 치료를 한 듯 핏자국도 없고 은은한 약향이 번지고 있었다. 이어서 강징은 떨리는 손으로 팔도 벗기고, 민망함을 꾹 참고 하의도 끌어내려 보았다. 그리하여 팔, 옆구리, 종아리 등지에서 아슬아슬해 보이는 상처를 몇 개나 발견했다.
괴한들의 실력은 대단한 수준이 아니었지만, 화살비의 위력만은 무시못할 정도였기 때문에 강징조차 팔뚝을 꿰뚫리고 말았다. 그러니 남희신이 미리 알고 갑옷이라도 걸치지 않았던 이상은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강징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짚었다.
이로써 이 일이 고소 남씨의 공작이었든 아니든, 남희신만은 무고하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었다.
그러나 강징은 그 사실을 기뻐해야 마땅한데도 기쁘지 않았다.
혈도를 눌러 두었기 때문에 결코 깨어날 리 없다는 안도감에 기대어, 강징은 남희신의 침의를 입혀준 다음 가만히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전쟁터와 다름없는 위협을 헤쳐나가며 필사적으로 지켜주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기억은 계속해서 거슬러올라가듯 가까운 과거로부터 더듬어갔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낯선 시장터에서 깜찍한 선물을 사려고 방황했을 모습. 그리 애를 쓰고도 강징이 맘에 들어하지 않는 것 같자 서운한 빛도 없이 치워버리며 바라보던 눈빛.
과거는 자꾸자꾸 이어졌다.
저 아닌 사람에게 안겼다고 화를 내던 모습은 지금과 비슷하지만, 기억에 따라 불쑥 마르고 작아진 모습이 나타났다.
감히 부인을 모욕했다며 서슬이 퍼래졌던 소년, 애어른처럼 강징의 몸을 걱정하고 나무라던 소년이 붉은 혼례복을 입고 강징의 앞에 앉아 있었다.
-부인.
맑은 눈의 소년이 서슴없이 부르며 웃음지었다.
삼독성수로 이름난 자신이 무섭지도 않은지, 운심부지처에서의 첫만남부터 똑바로 쳐다보던 두 눈을 이제와 마음 속에서 떠올리곤 마주하고 마주하다.
강징은 그만 왈칵 눈물이 어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