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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4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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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남희신이 정원을 걷고 있으려니 부사가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고 있었다.
“출타하십니까?”
“예, 택무군.”
부사는 걸음을 멈추고 깍듯하게 절을 했다.
강징이 수진계를 주름잡고 있어도 그의 아랫사람들은 기강이 잘 잡혀 있었다. 난릉 금씨의 수사들처럼 세력을 믿고 거들먹거리는 일이 없었고, 오로지 강징에게 충성하며 그가 시키는 일에만 전력을 다했다. 
실상은 포악하지도 잔인하지도 않지만 냉정한 삼독성수는 두려운 주인이었다. 그런데 남희신이 가문에 들어온 후로는 확실히 온화해졌음이 느껴졌다. 그런 이유로 부사를 비롯한 운몽 강씨 사람들은 남희신에게 호의적이었다. 
“멀리 가시나봅니다.”
“네, 청하의 청담회에...”
그까지 말하고 부사는 말이 너무 많았다는 듯 대화를 끊더니 가버렸다.
남희신은 홀로 남아 멀어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상하게 생각했다.
...청담회라고? 그런데 부인은 가시지 않나?

집무실에 가 보아도 강징은 없었다.
몇몇 하녀들에게 물어가며 찾았더니 자신의 방에서 머리를 짚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부인?”
강징은 느슨하게 앉아 있다가 남희신의 목소리가 들리자 얼른 자세를 바로잡았다.
둔한 사람이 보아도 알 정도로 낯빛이 좋지 않았다.
“어디 아프십니까?”
강징은 다소 멍한 표정으로 입술을 열다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피곤한 것뿐이다. ...오늘은 혼자서 잘 테니 그리 알고 물러가거라.”
강징은 신경이 곤두서 있었으므로 남희신이 뭐라고 하면 당장 가시돋힌 말들이 쏟아져나올 기세였다. 
그러나 남희신은 잠시 바라보았을 뿐, 알겠다고 대답했다.





요즈음 강징은 매일 밤 남희신을 찾아와서 한 침상에 들었다.
남희신은 혼자서 누워 보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언제든 해시가 되어 침상에 몸을 누이면 기절하는 것처럼 빠르게 수면에 빠져들던 그였지만.
괜시리 옆자리를 더듬어 허전한 감정을 배로 느끼곤 한숨을 쉬었다.
자고 싶은 생각도, 자야 한다는 의무감도 없어 눈을 뜬 채 말똥말똥 검은 천장을 바라보며 얼마나 무미한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서서히 표정이 어두워져갔다.
아무래도 좋지 않아 보였던 강징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결국 이불을 걷어치우고 일어난 남희신은 오밤중임에도 습관적으로 의복을 정제한 뒤 문 밖을 나섰다.


강징의 침소로 가는 동안 순찰을 돌던 수사들이 스쳐지나갔다.
수사들은 밤중에 나돌아다니는 남희신을 본 적이 없어 이상해했지만 그냥 지나쳐갔다. 강징은 소년 낭군을 꽤나 총애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상대가 누가 되었든, 그들의 주인은 암살을 당할 정도로 녹록한 인물이 아니었다.
목적지에 가까워지며 남희신은 설핏 눈을 가늘게 떴다.
기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걸음을 재촉하는 동안 소리는 점점 더 크고 분명해졌다.
“부인?”
남희신이 문을 두드리자 소리가 잠시 멎더니 다음 순간에는 아주 숨이 넘어갈 듯 급박해졌다.
놀란 남희신은 허락도 받지 않고 문을 밀치고 들어가며 눈이 커다래졌다.
마룻바닥에 엎어진 강징이 가슴을 부여잡고 심한 기침을 쏟아내는데, 손에 쥔 영견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부인!” 
남희신은 급히 달려가 강징의 손을 잡고 등을 끌어안았다.
강징은 왜 왔느냐, 오지 말라고 했지 않느냐는 듯 나무라는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지만 그것도 길지 못했다. 다시 고개를 숙인 그는 오랫동안 내장이 튀어나올 듯이 기침을 하며 괴로워했다.
남희신은 강징의 입에서 피가 섞인 침이 튀는 것을 질린 얼굴로 바라보며 등을 두들겨 주었다.
마침내 숨이 넘어갈 듯한 폭풍이 다 지나가자, 강징은 떨리는 손으로 영견을 펼쳐 깨끗한 부분을 찾아서 입가를 닦았다.
“부인...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야렵에서 부상이라도 입으셨습니까?”
“아니다...”
강징은 목이 너무 아파 목소리가 다 쉬어 나왔다. 진이 다 빠져버려 얼른 침상으로 올라가 쓰러지고만 싶었다.
하지만 강하게 끌어안은 남희신이 놓아주지 않았다.
“...”
강징은 그의 얼굴을 쳐다본 뒤 적당히 얼버무려 넘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온약한에게 당한 상처 때문이다...”
한숨과 함께 체념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끔 이렇게 발작하곤 하지.”
남희신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 동안 강징은 입가를 마저 깨끗하게 훔쳤다.
강징이 누우려는 걸 깨달은 남희신이 꿈에서 깨어난 듯 얼른 부축했다. 침상에 앉히고, 영견을 치우려 하자 대뜸 강징이 그것을 빼앗더니 서랍 속에다 쑤셔넣었다.
남희신은 의아해하다가 그의 머리를 받치고 조심스럽게 눕혔다. 
“운심부지처에 뛰어난 의술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을 청해 보지요.”
강징은 그의 손을 거절하지 않고 있었지만, 남희신이 그렇게 말을 하자마자 도로 일어나 앉았다.
“절대로 이 사실을 고소 남씨에 발설하면 안 된다.”
무척 지친 상태임에도 독기가 서린 눈빛이 남희신을 쏘아보았다.
금방 죽을 것처럼 피를 쏟던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여느때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차갑고 강한 태도가 돌아와 있었다.
그 때가 되어서야 남희신은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침상은 물론이며, 강징의 하얀 침의에도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겠습니다.”
남희신은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나 목소리에 어딘지 서글픈 느낌이 묻어나와서였을까. 강징은 금방 누그러들며 잠시 쏘아보았던 일마저 미안해졌다.
“치명적인 건 아니다. 기침 조금 하고 나면 멀쩡해지니까.”
남희신은 그지없이 순종적인 태도로 눈을 내리깔고는 토를 달지 않았다. 
그러자 강징은 마음이 더 불편했다. 그래서 촛불을 모조리 꺼버리고는 휙하니 돌아누워버렸다.
갑자기 혼자가 된 듯, 불안하며 시큰시큰 불쾌한 감정이 가슴 가득 몰아쳤다. 
남희신이 등 뒤로 누우며 든든한 팔이 몸을 감싸주는 걸 느끼고서야 겨우 마음이 가라앉으며 편안해졌다.
남희신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부드럽고 따뜻하게 강징을 안아주는 채, 가끔씩 그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다음날이 되자 강징은 말한대로 멀쩡한 모습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한참 후, 집무실에서 남희신이 불쑥 의서를 사 달라는 청을 했다.
강징은 뭐라고 말하려다 그만 손을 내저으며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남희신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강징도 다시 일을 하는 척을 했지만 슬그머니 눈이 돌아가며 남희신이 앉은 쪽을 향했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는 이 약점을 숨기기 위해 가문의 의술사에게도 보인 적이 없었고, 발작할 것 같으면 하인들조차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의술사를 못 들이게 하니 제가 직접 치료하기라도 하려고?
피식, 웃음이 터졌다.
정말 나를 부인으로 아는가.
꽤 오랜만에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는.
그러나 전과는 다르게, 쓰라리면서도 달콤한 감정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