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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2 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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ㅂㄱㅅㄷ / 2편 / 3편 / 4편



노부는 너무 작아서 품에 쏙 들어오는 작은 아기여우를 안고 일어서며 품 안의 작은 머리를 내려다봤다.

"스테이크 먹을까요? 괜찮아요?"

아기여우의 머리가 작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노부는 끄덕거리는 작은 머리통을 내려다보다가 옷장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노부는 출근할 때는 당연히 수트를 입고, 집에서 쉴 때는 편한 셔츠와 반바지를 주로 입지만 휴일에 외출하거나 할 때는 깔끔한 캐쥬얼 스타일의 옷도 종종 입었다. 마치다에게 그런 스타일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노부는 아이보리색의 셔츠와 연노란색 가디건, 베이지색 면바지를 골라서 침대 위에 차례대로 가지런히 올려놨다.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아니면 다른 옷 골라볼래요?"
"... 좋아요."

노부는 아직 뜯지 않은 새 속옷도 하나 꺼내서 침대 위에 올려놓은 옷 옆에 놓아주고 아기여우도 조심스럽게 옷 옆에 내려놔 주었다.

"그럼 옷 입고 나와요. 이렇게 순서대로 입으면 편할 거예요. 우리 형은 무조건 상의 다 입고 하의 입던데 난 반대 순서라서. 속옷, 바지, 셔츠, 가디건, 이런 순서가 편하더라. 마치다 상도 그냥 편한 순서대로 입어도 돼요."

마치다가 옷을 한 번도 못 입어보고 내내 목줄만 차고 지냈지는 알 수 없지만 옷에 그다지 친숙하지는 않은 것 같아서 괜히 오지랖을 부렸다. 그러자 속옷이 든 비닐을 앞발로 쿡쿡 눌러보고 있던 아기여우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부엌에서 저녁 준비하고 있을게요."
"고... 고마워요."
"뭘요."

노부는 방문에서 멀어져 부엌으로 들어오자마자 긴 한숨을 내쉬었다. 멀쩡한 사람한테 옷도 안 입히고 목줄만 채워놨다니. 대체 무슨 짓을 해 온 거야. 개새끼들이, 아니 개처럼 예쁜 동물과는 비교도 안 될 쓰레기들이지. 재활용도 안 될 쓰레기 놈들이. 평생 지옥불에 태워도 시원찮을 놈들.

노부는 분노를 가라앉히며 앞치마를 메고 스테이크감을 두 개 꺼내서 시즈닝을 하려다가 허브솔트와 올리브오일만 꺼낸 다음 바로 가니쉬용 재료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아스파라거스를 하나씩 두 개, 미니 양배추와 방울토마토, 파인애플과 마늘, 양송이버섯을 꺼내고 도마를 꺼내는데 문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자 역시 노부의 예상대로 차분한 색감의 가디건과 면바지가 잘 어울리는 마치다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느릿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잘 어울리네요. 정말 예뻐요."
"... 고마워요."
"진짜 예쁘다."

마치다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다가와서 고기와 채소들을 내려다봤다. 

"참, 시즈닝 미리 해 두려다가 마치다 상하고 같이 해 보려고 놔 뒀거든요. 어려운 건 아닌데 같이 해 볼래요? 시즈닝 진짜 별 거 아니에요. 허브솔트 착착 뿌려놓고 오일도 샥 발라놓으면 육질이 더 부드러워지고 풍미도 좋다고 하더라고요. 난 다들 하는 게 좋다니까 그냥 하는 건데."

노부가 새 앞치마를 꺼내 마치다의 허리에서 끈을 묶어주는 동안 내내 바짝 굳어 있던 마치다는 노부가 비닐장갑을 꺼내자 빨개진 얼굴로 머뭇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 비닐장갑을 하나씩 끼워주고 자기 손에도 직접 낀 노부는 키친타올을 뽑아 고기를 덮고 살짝살짝 눌렀다. 

"이렇게 먼저 핏물을 빼야 맛있대요."
"네."

마치다는 눈을 반짝거리며 노부가 하는 걸 유심히 보다가 금방 노부를 따라서 고기를 살살 누르며 핏물을 뺐다. 그 다음엔 허브솔트 병을 들어서 고기 위에 착착착 뿌리자 마치다도 허브솔트 병을 들고 조심스럽게 착착착. 올리오일도 조르륵. 마치다도 올리브오일을 조르륵. 그리고는 일회용 장갑을 낀 손으로 올리브오일을 고기 위에 슬슬 문지르기 시작했다. 

"올리브오일을 이렇게 넓게 펴 주세요."
"이렇게요?"
"네. 잘하네요. 손이 야무지네."

그 다음엔 칭찬에 발그레해지고 따끈따끈해진 마치다와 가니쉬용 재료를 준비했다. 써는 건 위험하니까 노부가 하고 재료 씻는 걸 맡겼더니 마치다는 꼼꼼하게 재료를 씻어 주었다. 노부가 마치다의 스테이크를 정성스럽게 굽고 레스팅을 착착 시작한 다음 마치다에게 노부의 스테이크를 구워달라고 했더니 마치다도 집중해서 열심히 스테이크를 구운 다음 지켜본대로 레스팅을 시작했다. 그 기름에 가니쉬 재료들도 차르륵 쏟아붓고 지글지글 굽굽 볶볶! 노부는 요리를 잘하지만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혼자 먹는 데 뭐 그리 열심히 굽고 볶고 찌고 하나 싶어서 내내 닭가슴살이나 데워서 먹곤 했는데, 아기여우가 집에 들어오면서 아기여우에게 먹일 음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요리가 즐거워졌다. 

그리고 알고 보니 그 아기여우가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는 수인이라 마치다와 같이 나란히 서서 요리를 하니 별 거 아닌 이야기에도 웃음이 나오고 요리를 하다가 팔꿈치가 부딪쳐도 웃음이 나왔다. 

그날의 스테이크는 대성공이었다. 이전까지는 아기여우의 몸집이 워낙 작은 만큼 나트륨이 과하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굽기만 해 줬는데 허브솔트를 뿌려서 열심히 시즈닝도 해 준 데다가 가니쉬로 올려준 채소에도 소금을 솔솔 뿌려 줬더니 무척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마치다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연신 코를 찡긋거리는 게 누가 봐도 기쁜 얼굴이라 미차다의 암울했을 과거가 계속 떠올라서 심란한 와중에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식후에 후식으로 딸기가 예쁘게 올라가 있는 치즈케이크를 내 줬을 때였다. 마치다가 눈만 깜박거리고 있어서 단 건 취향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었다.

"달콤한 거 안 좋아해요?"
"단 거요?"
"네."
"좋아할... 좋아하는..."

마치다는 달콤한 디저트를 먹어 볼 기회가 별로 없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노부가 한 번 먹어 보라고, 근처에 있는 베이커리인데 케이크가 무척 인기라고 말하며 먼저 포크로 제 앞의 케이크를 조금 잘라서 입에 넣자, 눈치를 보던 마치다도 노부를 따라서 포크로 케이크를 잘라서 입에 넣더니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그 예쁜 표정을 보면서 노부가 슬픈 예감을 하고 있을 때, 그 슬픈 예감이 맞다는 걸 확인해주는 말이 들렸다. 

"이런 거 처음 먹어 봐요. 너무 부드럽고 맛있어..."
"마음에 듭니까?"
"네, 진짜 맛있어요."

케이크를 자주 사 줘야겠다. 많이많이. 나중엔 고작 케이크 정도에 눈이 휘둥그레해지지 않을 정도로 많이.

도도하고 건방지게 앉아 있는 아기여우한테 케이크를 갖다 주면 케이크 너무 많이 먹어서 이제 물렸기 때문에 생각없다고 말하게 될 정도로 많이.





노부는 식사 후에 욕조에 물을 받아주고 빨아둔 노부의 잠옷을 꺼내 줬다. 

"마치다 상으로 자고 싶으면 이 잠옷 입고 자면 됩니다. '아가'로 자고 싶으면 아가로 자도 괜찮고요."

노부가 말을 하는 동안 가만가만 잠옷을 쓸어보고 있던 마치다는 보들보들한 잠옷의 촉감이 정말 마음에 들었는지 욕실에 들어가기 전부터 뺨이 발그레해진 채로 작게 말했다. 

"그... 그럼 '마치다 상'으로..."
"그래요. 물은 따뜻하게 받아놨어요."

노부가 마치다를 데리고 욕실에 들어가서 물속에 손을 넣어보자 옆에서 같이 손을 넣어본 마치다는 처음에 잠깐 놀랐다가 다시 천천히 손을 넣고 몽글몽글한 표정을 지었다. 물이 따뜻해서 기분이 좋은 듯했다. 

"너무 뜨겁진 않아요?"
"네, 따뜻해요."

노부는 바디클렌저와 샤워퍼프, 샴푸와 린스, 비누, 새 칫솔과 치약까지 순서대로 가지런히 꺼내놓고 마치다에게도 하나하나 설명해 줬지만, 마치다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바디클렌저와 샴푸, 린스를 순서대로 천천히 가리켰다. 

"바디클...렌... 샴푸... 린...요?"

노부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바디클렌저와 샤워퍼프, 샴푸, 린스를 가르쳐 줬지만 마치다가 바디클렌저나 샴푸, 린스라는 말 자체를 모르는 것 같아서 사실 좀 당황했다. 당연히 티를 안 내려고 했지만 당황스러움이 드러났는지 마치다가 새빨개진 얼굴로 허둥지둥하며 중얼거렸다. 

"거기서는 수인형일 때 비눗물에 담갔다가 꺼내서 물만 뿌려줘서... 여우일 때도 막 꼼꼼하게 씻겨준 건 여기 와서 씻을 때가 처음이라서..."

원래 있던 곳의 이야기를 하기만 해도 덜덜 떨던 마치다가 떨지도 않고 다급하게 이야기를 하는 게 두려움을 잊어서가 아니라 이 상황과 자신의 무지가 너무 창피해서 그런 것 같아서 노부는 얼른 말을 이었다. 

"괜찮아요. 그럼 같이 씼을까요? 둘이 같이 씻으면 손 안 닿는 곳을 서로 씻겨주기도 하고 좋잖아요."

노부는 부끄러움으로 볼이 빨개진 채 눈을 데록데록 굴리고 있는 마치다의 손을 살짝 쥐었다 

"오늘 많이 놀라기도 했으니까 같이 느긋하게 목욕하고 자요."
"네, 네."

마치다가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열심히 끄덕여서 노부는 옷을 벗고 허리에 수건을 감은 채 욕조 옆에 앉았다. 마치다도 얼른 옷을 벗고 노부처럼 수건을 감으려다 잘 안 묶이는지 낑낑대길래 수건도 감아주고 욕조 옆에 앉혀놓고 뜨거운 물을 천천히 부어 주었다. 

"있어보이게 바디클렌저라고 해도 그냥 물비누예요. 물로 된 비누. 이걸 퍼프에다가 이렇게 쿡쿡 눌러서 짜고 퍼프를 또 꾹꾹 눌러주면 거품이 나거든요. 그때 몸을 문지르면 돼요. 이렇게."

노부가 스펀지에다 바디클렌저를 짜서 거품을 내고 마치다의 손등을 문질러주자, 마치다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과 팔, 등을 노부가 부드럽게 문질러주고 다리는 직접 문질러보겠느냐고 하자, 마치다는 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정성스럽게 다리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노부가 장난스럽게 노부의 등도 문질러줄 수 있냐고 하자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부지런히 스펀지로 노부의 등을 문질러주기도 했다.

그리고 같이 욕조에 들어가 앉아서는 가벼운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까지 노부의 집에 와서 먹은 것 중에 뭐가 제일 맛있었는지. 오늘 스테이크의 간이 너무 세지는 않았는지, 닭고기와 오리고기 중엔 뭐가 더 마음에 들었는지, 마음에 안 드는 과일이나 채소는 없었는지 그런 것들. 마치다를 괴롭게 하고 슬프게 했을 과거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려다 보니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먹을 것 이야기밖에 없었지만 마치다는 뭐가 좋았고 맛있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열심히 말해줬다. 소고기가 정말 맛있고 새우를 먹었을 때는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과일은 바나나가 달콤해서 제일 맛있었다 등등. 그리고 노부는 그 정보들을 머릿속에 꼭꼭 새겨 놓았다. 

마치다는 이전에 아기여우로만 지낼 때도 노부가 목욕을 하고 나오면 냄새가 좋은지 꼭 옆에서 맴돌면서 냄새를 맡거나 노부의 품 속으로 뛰어들어오곤 했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노부에게서 나는 샴푸나 바디클렌저 냄새가 좋은 모양이었다. 마치다는 둘 다 잠옷을 입은 후에 노부의 잠옷자락을 잡고 노부의 뒤에 바짝 붙어서 따라오고 있었다.

이제 자기한테서도 같은 냄새가 날 텐데 여전히 노부에게서 풍기는 향이 그리 좋은지.

원래 노부는 마치다가 편안하게 잘 수 있도록 손님방을 내주려고 했지만 노부의 잠옷 상의 자락을 붙잡고 따라오는 마치다가 귀여워서 같이 침대로 올라갔다. 침대 위, 노부의 자리 옆에 올려놨던 아기여우용 방석은 내려놓고 마치다용 베개를 놓아주자 마치다는 배시시 웃으며 노부를 마주보고 누웠다. 

"잘 자요, 마치다 상."

노부가 마치다의 몸 위로 이불을 덮어주며 속삭이자 마치다는 고개를 끄덕이며 또 배시시 웃었다. 

"잘 자요."





다음 날 노부가 눈을 뜬 건 조그맣고 따뜻한 뭔가가 입술을 핥았기 때문이었다. 수인이란 걸 들키고는 아침에 노부를 깨워주기는커녕 방석에 얼굴을 콕 박고 기운없이 누워 있기만 했었는데. 노부가 눈을 번쩍 뜨자 아기여우가 예전처럼 뒷다리로 노부의 가슴을 단단히 짚고 앞발을 노부의 뺨에 올린 채로 입술을 핥고 있었다. 

정이 고프고 마음이 여린 노부의 아기여우가 다시 노부에게 마음을 활짝 열어준 모양이었다. 어쩐지 울고 싶어졌다. 





노부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