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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0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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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되돌렸다고 상황이 반복되는 건 아니었다. 실패한 작전은 새로운 작전을 짜야했고 새로운 작전지를 파악하고 새로운 훈련을 익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 아무리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센티넬이라 하더라도 현재의 미래는 알 수 없었다. 과거가 된 시간들로 추측하는 게 다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행맨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르겠다는 거다. 

행맨이 루스터를 데려간 술집은 둘이 자주가던 단골집이었다. 이곳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루스터였다. 사람들과 곧잘 어울려 목청 높혀 노래를 부르는 수탉과 거리가 먼 곳처럼 보였으나 "사실 이런 곳을 더 좋아해." 라며 쑥쓰러운듯 볼을 긁던 모습이 생생했다. 이젠 행맨만 간직한 기억이지만. 때문에 루스터가 이곳에 오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구석진 곳에 앉은 루스터를 세번째 발견했을 때 행맨은 자신이 실수를 하나 더 했음을 깨달았다. 행맨은 내가 먼저 왔으니 너는 오지 말라고 유치하게 굴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친근히 인사할 수도 없으니 그냥 루스터를 모른 척 했다. 파장은 안정 됐지만 자신을 경계하는 걸 아는 루스터는 행맨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 앉곤 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별 일은 아니었다. "전에 같은 제복을 입고 오셨더라구요. 일행이세요?" 라고 묻는 바텐더가 있었지만 행동에 나서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별 일은 어느 순간 찾아왔다. 그날도 들어오자마자 루스터가 있을 법한 테이블을 흘겨본 행맨은 평소처럼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루스터가 다른 사람과 앉아있었다. 어두운 조명 탓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팀원이 아닌 건 확실했다. "여기 데려온 거 너뿐이야." 라는 상기된 목소리가 뒤따랐다. 행맨은 그들의 대화가 들릴만큼 가까우면서도 너무 티 나지 않는 적당한 거리에 자리했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크지 않은 노랫소리 사이로 드문드문 대화가 들렸다. 정확한 대화 내용을 알 순 없었으나 그들이 처음 만난 사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이름 모를 이가 루스터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 또한. 행맨이 다시 눈을 흘겼다. 기분 탓인지 처음 봤을 때보다 거리감이 줄어든 것 같았다. 행맨은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억지로 틀었다. 목이 타는 것 같아 아까부터 가득 채운 술잔을 들이부었다. 이게 행맨이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말했듯이 행맨이 모든 걸 아는 게 아니었다. 시간을 되돌릴 때마다 새로운 일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번엔 '아무 사이 아닌 둘'이었고 거기서 파생된 새로운 상황은 어떤 거든 생길 수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행맨은 큰 충격을 받았다.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도 루스터의 마음이 자신을 떠난 적 없었기 때문에.

얼마 못 있고 자리를 박차고 나온 그날 자신이 있었던 걸 모르는 건지 아님 알고도 모르는 척 하는 건지 기지에서 만나는 루스터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평소와 다름 없이 "좋은 아침." 이라며 인사해왔고 문제 없이 훈련을 받은 후 적정 거리에 앉아 방사 가이딩을 흘렸다. 사실상 이건 행맨이 바라던 상황이었다. 그가 말한 '깔끔한 사이'지 않던가. 그러나 행맨은 자주 집중력을 잃었다. 한 번은 루스터에게 무슨 일 있냐며 걱정을 사기도 했다. 아무 일 아니라고 적당히 둘러댔지만 행맨 스스로도 적응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날 이후로 술집 근처는 얼씬도 안했다. 혹시나 그런 상황을 다시 맞닥뜨린다면 자신이 어떻게 반응할지 행맨 자신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행맨이 할 수 있는 건 전처럼 파장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조절하고 감정을 숨기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흔들릴 때면 한가지 생각을 되뇌였다. 과거를 반복할 순 없다는 생각을. 

하늘 위, 확인 무전 이후로 침묵이 흘렀다. 오늘은 익숙하지 않을테니 간단한 비행만 진행하겠다는 명령에 경계할 적군도, 미사일을 쏴야할 조준점도 없었다. 하지만 행맨은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할 수 없었다. 뒤에서 어색하게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행맨이 잡고 있던 조종간에 힘을 줬다. 언젠가 복좌기에 함께 타면 웃기겠다는 농담을 한 적 있지만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 지난 실패를 돌이켜보면 시도할만한 작전인 건 맞았다. 암만 능력 좋은 행맨이라 하더라도 다른 전투기에 탄 루스터까지 데리고 시간을 되돌아 갈 순 없으니 말이다.

"뒤에 앉는 건 어색하네."

행맨 뒤통수를 보며 루스터가 말했다. 행맨이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자 자신 말을 씹은 거라 오해한 루스터가 두서없이 말했다. 내 목숨은 니 거니까 잘하라는 둥, 가이드라 조종석에 못 앉게 하는 건 부당하다는 둥. 그러는 사이 행맨은 단 한마디도 받아치지 않았다. 이젠 루스터도 입을 닫았다. 언젠가 루스터가 기겁했던 독단적인 비행법에도 토달지 않았다. "내가 니 뒤에 타는 날이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못된 버릇 싹 다 고쳐줄테니까." 하며 유쾌하게 웃던 목소리가 아련히 멀어졌다. 

다음날도 복좌기에 올라탔다. 아예 복좌기로 고정된 건 아니었지만 시간이 될 때 최대한 익숙해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인 것 같았다. 쾌청한 하늘은 여전히 고요했다. 오늘은 단순 비행만이 아니라 전투가 있을 예정이었다. 루스터는 적군을 살피면서 행맨의 눈치도 같이 살폈다. 행맨과 단둘이 있는 시간은 좀처럼 생기지 않으니 루스터에게 지금 이 시간은 기회였다. 

"넌 나한테 궁금한 거 없어?"

루스터는 오늘도 동그랗고 어두운 색 헬맷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너 전에⋯."

행맨이 겨우 입을 열었을 때 단좌기가 나타나 대화를 방해했다. 속으로 욕을 삼킨 루스터가 신속하게 단좌기의 위치를 알렸다. 군더더기 없는 행맨 대답과 함께 둘을 태운 전투기가 단좌기를 쫓았다. 적군을 격추하고 오늘 훈련을 마치겠다는 무전 이후 행맨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루스터는 지나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전투기에서 내리는 행맨을 붙잡았다.

"아까 하려던 말 뭐였어?" 

내리쬐는 햇빛에 찡그린 눈 사이로 보이는 행맨의 녹안이 루스터를 빤히 쳐다봤다. 긴장한 루스터가 침을 삼켰다.

"아까 전에, 하고 말하다 말았잖아."

한참 말이 없던 루스터에게 머물던 녹안이 시선을 떠났다.

"아무것도 아니야."

허무한 행맨 대답에 맥이 풀린 루스터 손에 힘이 빠졌다. 붙잡혀 있던 팔뚝을 내려다보던 행맨이 "오늘은 가이딩 해줄 필요 없어. 수고했다." 며 멀어졌다. 스마트 워치에 뜬 수치는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행맨 말대로 가이딩이 필요한 정도는 아니었다. 루스터는 놓친 기회 자락을 붙잡고 여러 가능성을 유추했다. 하지만 '전에'라는 짧은 말로 유추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전이라면 너무 많은 순간이 있었고 행맨에겐 더더욱 많은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루스터는 긴 한숨을 쉬었다. 열릴 기미가 안 보이는 마음을 두들기 전에 저 굳게 닫힌 입부터 열어야 할텐데.

루스터는 이곳에 오기 전에 들었던 행맨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첫인사가 시비인 경우가 다반사고 무례하다고 지적해도 "그게 사실인 걸 어쩌겠어?" 라며 재수 없게 군다고 했다. 그럼에도 미워할 수 없는 건 매력적인 미소를 가졌기 때문이란 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항상 자신감에 차있으며 제멋대로인 태도에 건방지고 얄미워서 그렇지 똑같이 삐딱한 시선으로 보면 담백하고 꽤 좋은 동료라는 조금 괴상한 소문. 자로 잰듯 깔끔한 비행법과 툭 치기만 해도 한 페이지 첫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줄줄 읊는 비상한 머리만 봐도 제멋대로에 자신감에 차 있는 건 맞는 말 같았다. 그의 몸에 배인 행동이 건방지다고 해석될 여지도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괴리감이 들었다. 누군가 "행맨은 소문대로야?" 라고 묻는다면 루스터는 "글쎄⋯." 라고 답할 것이다. 어쩌면 가까운 사람에게만 보이는 모습일까. 자신은 이미 구질구질하고 너덜한 사람이기에 보이지 않는 모습인 걸까.

루스터는 복잡한 심정에 저녁 산책을 나섰다. 원래라면 최근 자주 가는 술집에 갔겠지만 자신도 자주 온다며 의도 다분하게 팔뚝을 쓸던 사람을 만난 이후로 근처도 얼씬하지 않았다. 신청한 선곡이 마음에 든다며 자리에 앉은 상대는 예의상 몇 번 말을 맞춰준 것 뿐인데 부담스럽게 굴었다. 그 자리엔 행맨도 있었고 행맨은 보통 때보다 이르게 술집을 나섰다. 어쩌면 다른 사람과 가깝게 있는 루스터를 봤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좋다고 고백까지 하더니 가이드 본분도 안 지키고 괴롭히는 사람이 다른 곳에선 한눈 팔고 있으니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제가 생각해도 머저리가 따로 없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변명할 타이밍이 없었을 뿐더러 사실 변명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행맨이 감정 없는 표정으로 "그래서 뭐?" 라고 한다면 루스터는 할 말 없었다. 

발이 닿는대로 걷다보니 익숙한 공원이 나왔다. 술집 이전에 자주 오던 곳이었다. 루스터가 입구에 가장 가까운 벤치에 앉았다. 상념에 빠져있기를 한참 누군가 루스터에게 아는 체 해왔다. 술집에서 만난 사람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몸을 뒤로 물린 루스터가 어색하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했다. 상대는 해맑게 웃으며 옆에 앉았다. "사실 브래드쇼 씨 생각나서 퇴근하고 와봤어요. 전에 여기 자주 오신다고 해서." 라는 꽤나 도발적인 말이 뒤를 이었다. 

"요새는 통 안 오시던데 무슨 일 있으세요?"

차마 그쪽 피하려고요, 라고 할 수 없는 루스터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요새 조금 바빠서요." 라고 답했다. 상대가 눈을 접어 웃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한 잔 하실래요?" 

루스터는 이번에도 실례가 되지 않게 곧 돌아가봐야 할 것 같아 안될 것 같다, 고 말했다. 

"안그래도 지금 돌아가려던 참이었거든요."

루스터가 몸을 일으켰다. 상대가 따라 일어났다. 똑부러져 보이는 상대가 루스터의 뜻을 못 알아들을리 없었다. 그럼에도 상대는 전혀 타격 없다는 듯이 "그럼 정류장까지 데려다주세요." 라는 앙큼한 말을 내뱉었다. 우선은 "알겠어요." 라고 수긍한 루스터는 상대가 떠나기 전에 정중히 거절 의사를 밝혀야겠다고 다짐했다. 루스터는 조잘조잘 떠드는 상대 말을 흘려들으며 문득 행맨에게 자신도 이런 모습일까 조금 두려운 생각을 했다. 얼마 안 가 드디어 정류장에 도착했다. 루스터가 상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는 버스가 곧 온다며 아쉬운을 토로했다. 상대 말대로 타이밍 좋게 곧바로 버스가 도착했다. 루스터는 아까부터 정리한 거절 의사를 밝히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상대가 더 빨랐다. 상대는 늘게 늘어선 줄 탓에 잠깐 생긴 틈을 놓치지 않고 루스터 손을 잡았다.

"다음에도 만날 수 있을까요?"

이런 상황은 미처 생각지 못한 루스터가 뭐라고 답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일 때였다.

"⋯루스터?"

행맨이 나타났다.

"행맨?"
"여기서 뭐해?"

행맨이 인상을 찌푸렸다. 당황한 루스터가 되물었다.

"너야말로 여기서 뭐해?"
"잠깐 어디 갔다 오느랴⋯."

행맨 말 끝이 흐려졌다. 상대가 잡은 손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아챈 루스터가 반사적으로 손을 뺐다. 상대는 멋쩍은 듯 웃더니 이만 가보겠다며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가 출발하자 북적이던 사람들이 사라져 정류장엔 두 사람만 남았다.

"데이트 방해해서 미안해. 나 먼저 간다."
"잠깐, 행맨⋯!"

루스터가 행맨을 붙잡았다. 며칠 전 그를 잡았던 것처럼. 행맨은 굳은 표정 그대로 루스터를 돌아봤다. 니가 무슨 할 말이 더 있어?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순간 루스터가 두려워하던 "그래서 뭐?" 라고 말하는 상상 속 행맨과 겹쳐졌다. 루스터는 용기를 냈다.

"니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데이트 그런 거 아니고 그 사람이 일방적으로⋯!"
"손 잡고 있던 건 뭔데."
"그것도 그 사람이 일방적으로 잡은 거야."

눈썹이 들썩였다. 그게 변명이 되냐? 는 것 같았다. 

"정말 오해야. 전에 술집에서 봤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도 적당히 말만 맞춘 거였고 이번에도 우연히 마주친 거야."
"⋯"
"다신 만날 일 없을 거야. 애초에 연락처도 없어. 아는 건 이름 밖에 없어. 정말이야."

루스터는 절박했다. 행맨 입에서 그래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는 말만 나오지 않았으면 했다.

"⋯알겠어."

마치 용서 받은듯 루스터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믿어줘서 고마워." 라는 말에 행맨은 피식 웃고 말았다. "고마울 것 까지야." 라고 가벼운 말을 뒤로 행맨이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루스터도 뒤따랐다. 딱 한발짝 떨어져서 걸었다. 퇴근하는 차량 불빛이 멀어지고 점차 한적해졌다. 가로등 불빛에 늘어진 행맨 그림자를 밟으며 루스터는 행맨 뒷모습에 익숙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강의실에 앉아 훔쳐보던 깔끔한 뒷목이나 술집 어두운 조명 아래서 보던 쓸쓸한 어깨. 최근 복좌기를 타면서 헬맷 뒷통수까지 보게 됐으니 더욱 그랬다. 그러다 행맨이 돌연 우뚝 섰다.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 행맨이 "언제까지 뒤에 있을 거야?" 라고 물었다. 소름 끼치니까 옆으로 와, 라는 말에 루스터는 재빨리 나란히 걸었다. 관사와 가까워지면서 가로수가 많아졌다. 아른거리는 그림자와 조금 어두워진 거리에 루스터는 조금 전 공원 일을 떠올렸다. 갑자기 행맨을 만나는 바람에 더는 만날 수 없다고 말하진 못했지만 자신은 완강한 거절 의사를 표하려 했다. 그런데 행맨은 왜 자신을 깔끔하게 거절하지 않은 걸까. 행맨스럽지 않게.

"행맨."

루스터는 다시 한 번 용기를 냈다.

"왜 날 거절하지 않았어?"

행맨이 오, 이런 세상에, 하고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왜 거절하지 않았냐고? 내가 거절 한 적이 없을 것 같아? 내가 거절 하자 넌 전출 갔어. 날 두고 떠났다고."
"내가 그랬다고?"
"그래. 니가 그랬어, 망할 브래들리 브래드쇼. 가이드 잃은 센티넬이 어떤 기분인지 알아? 아, 아니지. 그땐 가이드한테 버림 받은 센티넬이었지."

루스터가 발을 멈췄다. 한걸음 더 걸은 행맨이 루스터에게 몸을 틀었다. 루스터는 과거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 고백 거절 당했다고 모든 걸 내팽겨치고 전출을 갔을리가 없었다. 심지어 작전 중에? 루스터는 인상을 잔뜩 구겼다.

"대체 왜 그랬대?"
"나중에 그때도 기억나면 알거야."

그러게, 왜 그랬어? 라고 되물을 거라 생각한 행맨은 의외로 순순히 과거의 루스터를 이해했다. 비밀리에 진행되는 극소수 작전이었기에 한 사람이라도 빠진다면 타격이 컸을 것이다. 거기에 매칭도 아닌, 잠깐. 설마, 하는 생각이 루스터 머릿속을 스쳤다.

"설마 매칭이었어, 우리?"
"⋯그랬던 적도 있었지. 그런데 그땐 아니었어. 다행히도."

매칭이었던 적은 대체 언제였으면 어떻게 맺게 됐는지 묻기 전에 이해하기 힘든 자신에 대해 캐묻는 게 우선이었다. 루스터가 한 발자국 앞으로 갔다. 다시 행맨과 나란히 섰다. 

"나 진짜 개새끼였잖아."

행맨 얼굴에 웃음기가 스며들었다.

"어. 존나 개새끼였지."
"그런 정신 머리 나간 새끼 왜 가만히 뒀어?"

행맨이 어깨를 들썩이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루스터도 따라 걸었다.

"그땐 나도 존나 개새끼였거든."
"지금보다 더?"
"지금은 엄청난 나이스 가이라고 생각하는데? 젠틀맨 그 자체잖아."

루스터는 행맨이 농담할 때 이런 표정으로 능청을 떠는 구나, 생각했다.

"대체 우린 어떻게 사귀게 된 거야?"
"말했잖아. 니가 먼저 고백했다고."

행맨 양심이 불쑥 튀어나왔지만 따지고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행맨은 양심을 잘 달랬다.

"그러니까 어쩌다가 그런 일이 벌어진 거냐고. 처음 시작 말이야. 니가 말하는 부작용 잔여물의 시작점."
"말하자면 긴데⋯."

행맨이 엄지로 관사를 가리켰다. 어느새 관사 앞이었다.

"보다시피 다 와서 말이야."

행맨은 뒤이어 "내가 말한 깔끔한 사이로 지내자는 건 아직 유효해. 이 야심한 밤에 너랑 단둘이 벤치에 오손도손 앉아 속닥거리고 싶진 않다는 뜻이지." 재수없고 제멋대로에 건방진 그리고 기타 등등. 루스터는 소문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문대로야?" 라고 묻는다면 "그런 것 같기도⋯." 라고 할 만큼 말이다. 그리고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근사한 미소도. 어이없어 하는 루스터 표정을 보고 즐거운 듯 웃던 행맨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좋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해서 말해줄게." 라고 자비를 베풀었다. 

"우리가 이 작전으로 처음 알게 된 건 동일해. 그때 우린 맞는 구석이라곤 없었어. 지금보다 더."
"심각했네."
"그런데 니가 나한테 반했어. 그리고 고백했지. 끝이야."
"중간에 생략된 게 너무 많지 않아?"
"자세히 말해준다고 한 적 없잖아. 아주 간단히 요약해준다고 했지."
"예전의 나는 대체 어떤 모습을 보고 반한 거야?"

행맨은 그건 지금 너도 답을 알고 있어. 라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현재 루스터의 마음을 지난 날의 흔적, 허황된 감정이라고 매도 했지만 그건 사실 루스터의 감정을 속이기 위해서였다. 아마 루스터는 자신을 좋아하게 됐을 때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건 몇 번이고 같은 이유였고 변하지 않았다. 지금은 자신이 한 말에 휘둘려 혼란스러워 할테지만. 그러나 모든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다. 감정의 흔적이 남은 건 사실인 것 같았다. 첫 고백은 작전의 마지막 쯤이었으나 시간을 거듭할수록 고백하는 시기가 앞당겨졌으니 말이다.

"내가 좀 완벽해? 반하는 게 당연하지. 이상할 거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야."
"그래, 내가 졌다."

루스터는 뭐 이런 새끼가 다있냐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지만 부정적인 표현이 아니라는 걸 행맨은 잘 알고 있었다. 행맨은 이제 올라가보겠다고 했다. 루스터는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오늘 어디 갔다왔냐는 질문은 미뤄두고 조심히 가라고 했다. 행맨이 가던 걸음을 되돌아 "전부터 궁금했는데 어째서 고작 계단 올라가는 걸로 조심해야 하는 거야?" 라고 물었다. 루스터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게 좋아하는 마음이잖아."

돌아오는 답 없이 서있던 행맨이 약하게 웃었다.

"그래, 너도 조심히 들어가." 

행맨의 뒷모습이 멀어졌다. 루스터는 그게 과연 예의상 같은 말을 한 것인지 지난 시간의 잔여물로 습관적으로 나온 말이었을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 날 밤이 한여름 밤의 꿈이었다는 듯이 다음날 행맨은 평소대로 돌아와있었다. 그때처럼 능청 떨며 농담도 하지 않았고 장난스럽게 웃던 얼굴도 보여주지 않았다. 타이밍 좋게 새롭게 추가된 명령대로 두 사람은 각자 단좌기에 올라타야 했다. 루스터는 누군가에게 기회를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루스터행맨
2023.08.20 22:4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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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제까지 시간 돌리는 이야기들과는 다르게 행맨이 자기가 시간 돌렸다는 걸 숨기지도 않고, 간혹가다 과거의 미래? 도 조금씩 흘려주는데 미친 긴장감... ㅠㅠ
[Code: 8fb7]
2023.08.20 23:0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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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알지도 못하는데 왜이렇게 아련하지ㅠㅠㅠ 루스터가 전에 떠난 것도 이유가 있었을텐데... 그리고 조심히 가라고 하는 루스터가 너무 다정해서 슬퍼ㅠㅠ
[Code: cb98]
2023.08.20 23:0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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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터도 혼란스럽고 조바심나고 쓸쓸할텐데 행맨도 속내는 별반 다르지 않은것 같아...그도 그럴게 시간을 돌리며 몇번이고 다시 사랑받았고 행맨 역시 그런 루스터를 사랑했었잖아 지금도 아마 그럴거고ㅠㅠㅠㅠㅠ어떻게 이제 와서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될 수 있겠어 맴찢ㅠㅠㅠㅠ
[Code: 2b9c]
2023.08.20 23:1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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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하나씩 얘기하는데 왜케 내가 다 아련하지…울망ㅠ 재미써 센세 존잼이야
[Code: 11d5]
2023.08.20 23:5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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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터는 누군가에게 기회를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이게 되게 안타깝다ㅠㅠ
[Code: 3451]
2023.08.20 23:5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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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막힐 정도로 좋아 시간을 몇번이나 되돌려도 과거는 조금씩 바뀌니 작전에 긴장감을 놓을 수 없고 루스터와의 관계도 조금은 바뀌는구나 매칭이었다가 아니었다가..그래도 감정은 항상 같았는데 루스터 마음이 자신을 떠난 적은 없어서 충격받는거 역시 행맨도 아직 마음이 남아있다는거겠지??? 근데 왜 거절하는걸까 얼마나 개같이 헤어졌길래ㅠㅠ 감정이 그대로고 반하는 이유도 같으니까 결국 결말도 같을거라 생각하는걸까 이번에도 그렇게 될까ㅠㅠ 하지만 고작 계단 올라가는 것도 조심히 하라는 애틋하고 소중한 마음인데ㅠㅠ
[Code: 7151]
2023.08.21 00:1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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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너도 조심히 가??? 행맨도 루스터 좋아하는 맘 있다 이거 아님?ㅠㅠ 루스터가 다른 사람 만나는 것 같으니까 기분 나빠 하는 것도 그렇고, 행맨...ㅠㅠ 자기도 마음 못 털었으면서 루스터 밀어내려 하는 거 넘 가슴 아파ㅠㅠ
[Code: 5233]
2023.08.21 02:3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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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ㅠㅠㅠㅠㅠㅠ
[Code: 8ec5]
2023.08.21 09:1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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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좋아하게 되면 루스터가 행맨을 위해 희생하려고 들기 때문인걸까... 둘을 대못방에 가두고싶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 웨때무니야 행맨ㅠㅠㅠㅠㅠㅠ
[Code: 5ef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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