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우든너붕붕 맥카이너붕붕
전편
- 벙어리인 건 맞아. 다른 건 다 괜찮아. 정신이 이상하다거나
- 금발의 기사님은 자신을 잭 로우든이라고 소개했어.
- 우편물이 오면 도라가 그것을 분류하여 백작이나 백작부인께
죄송하지만 그 날 중요한 일정이 있어서 날짜를 미뤄야겠다는 내용이었어. 정말 죄송하다면서. 그리고 그 날은 맥카이씨가 편한 날로 하셔도 된다고.
무슨 일정이 있는 걸까. 벙어리 허니 비가 무슨 중요한 일정이 있을 수 있는 걸까. 그러다 순간 떠오른 건 잭 로우든. 연회장 바깥에서 허니와 웃음을 주고 받고 있던 잭 로우든 말이야.
조지는 허니에 대한 의문스러움과 왠지 모를 답답함으로 도무지 책상 앞에 앉지 못 했어. 그렇게 서재 안을 서성거리다가 마침내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아 펜을 들었어. 간단한 인사말 뒤로 안부를 묻는 얘기도 없이 바로 하고자 하는 말을 적었지. 죄송해 할 필요 없다는 말도 덧붙일까 하다가 왠지 그 말은 쓰고 싶지 않았어.
그럼 그 날로부터 사흘 뒤에 뵙지요.
조금 명령조로 들릴 수도 있을까? 하지만 허니가 분명 조지에게 편한 날짜를 잡으라고 했는 걸. 그리고 조지는 두 사람이 파혼하기 전까지 어른들의 뜻에 따라 아주 가끔 허니를 만날 때마다 늘 이렇게 대해 왔는 걸. 허니는 그에 대해 한 번도 불평한 적 없고 말이야.
부디 더 미룰 일이 없길 바랍니다.
허니 양에게 물어볼 일이.. 조지는 이 말을 적다가 다시 새 편지지를 꺼냈어.
그럼 그 날로부터 사흘 뒤에 뵙지요.
부디 더 미룰 일이 없길 바랍니다.
정식으로 사과하겠다는 사람의 태도라고 볼 수는 없지. 조지는 길다면 긴 세월 허니를 봐왔으면서도 무슨 일에서든 허니에게 진심으로 사과 할 마음을 먹은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제 생각엔 페르세우스의 탄생부터 시작하기 보다는 가장 영웅적이었던 순간을 기점으로..”
신들의 이야기를 향한 로우든씨의 열정은 생각보다 대단하구나. 하고 허니는 생각했어. 그는 더불어 유학 중에 있었던 크고 작은 에피소드 역시 책에 싣고 싶어했는데 허니가 판단하기에도 신화에 대한 책은 여럿 있으니까 그 편이 다른 책들과의 차별점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잭은 이탈리아와 그리스에서 보았던, 신화를 주제로 한 여러 예술 작품에 대해서도 책에 담고 싶어 했어. 그거야말로 이 책의 핵심이라면서.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해주는 이야기들은 지루한 법이 없었지. 책으로 엮으면 정말 반응이 좋을 거야.
“비 양의 생각은 어때요?”
{ 편하게 부르셔도 돼요. 앞으로 함께 일할 거잖아요. }
“그럼 허니 역시 나를 잭이라고 불러줘요.”
허니는 이렇게 좋은 사람과 함께 책을 엮게 됐다는 게 믿기지 않았어. 심지어 잭은 책 내용에 대해 허니의 의견을 묻기까지 했어. 책의 방향성 등에 대해서 말이야.
{ 제 생각에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시작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어요. }
{ 이야기를 메두사의 시점으로 시작하는 거에요. 지금까지 많은 책들이 영웅을 중심으로 했잖아요. 그러니 조금 다른 방향을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그게 사람들에게 더 새롭게 와 닿지 않을까 해서요. }
잭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고민하는 듯 했어. 허니는 자신이 주제 넘은 말을 한 건 아닐까 후회하면서 그의 대답을 기다렸어. 지금이라도 신경 쓰지 마시라고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 죄송해요. 잭의 의견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그냥 제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었어요. }
“아니요, 허니. 아주 좋은 생각이에요. 역시 제 판단은 틀리지 않았네요. 허니와 함께 작업하기로 한 건 정말 잘한 선택이었어요.”
허니는 몸 둘 바를 몰라하다가 그만 얼굴이 새빨개지고 말았어.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일 거야. 잭은 좋은 사람이니까. 하지만 잭은 진심이었어. 허니의 관점은 독특했고 어쩌면 예리하기까지 한 의견이 아주 맘에 들었지.
“사실은..”
잭이 조금 뜸을 들이며 말했어.
“허니 양이 이제까지 한 번도 삽화책을 내 본 적이 없다는 게 놀랍기도 한 편, 제겐 참 행운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허니 양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말이에요.”
{ 과분한 칭찬이세요.. }
“아니요. 허니 양의 그림은 마땅히 더 큰 사랑을 받을 만 해요.”
아.. 정말 가슴 떨리는 말이야.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어. 내 그림이 사랑 받을 가치가 있다는 그런 생각. 상상도 한 적 없는 걸.
“그럼 책의 서문을 메두사의 이야기로 열어볼까요? 제 생각에는 메두사가 저주를 받기 전 이야기보다 페르세우스를 맞닥뜨리기 직전의 순간으로 시작해서 시점을 다시 메두사의 과거로..”
잭은 허니가 의도한 바를 잘 이해했고 딱 허니가 떠올린 방향에 대해 말했어. 이렇게 마음이 잘 맞을 수 있을까. 이제 겨우 두 번째 본 사람과 말이야. 문뜩 조지가 떠올랐어. 우린 어릴 적부터 알고 지냈는데.. 친하진 않았더라도 말이야. 자라나는 과정을 서로가 지켜 본 그런 사이였지. 당시 별로 말을 섞은 적도 없이 각자의 부모님 곁에서 허니는 쭈뼛거리며, 조지는 허니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서있을 뿐이었지만.
우리는 서로 살가웠던 적은 없었더래도 그렇게나 오래 알고 지냈는데. 그런데도 겨우 두 번 만난 낯선 신사 분이 꿰뚫어 본 허니 안의 무언가를 조지는 발견한 적도 찾아보려 한 적도 없었어. 허니는 두 사람에 대해 가만히 떠올리며 사람 사는 일은 참 알 수 없구나. 하고 생각했어.
>> 다과상을 사이에 두고 조지까지 말이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