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우든너붕붕 맥카이너붕붕
전편
- 벙어리인 건 맞아. 다른 건 다 괜찮아. 정신이 이상하다거나
- 금발의 기사님은 자신을 잭 로우든이라고 소개했어.
- 우편물이 오면 도라가 그것을 분류하여 백작이나 백작부인께
- 조지는 답장으로 받은 편지를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곱씹었어.
응접실 안이 그렇게 썰렁하게 느껴질 수 없었어. 그런데 생각해보면 조지가 입을 연다고 해서 분위기가 더 나아질 것 같지도 않아.
허니는 이 저택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마차 안에서 멀리 모습만 보고도 괜히 혼자 움츠러 들었어. 어렸을 때는 종종 방문했었지. 어른들은 잘해주셨지만 그닥 좋은 기억은 없던 것 같아. 있으면 그저 외롭기만 했어.
응접실에서 허니를 기다리던 조지는 흠 잡을 데 없고 군더더기 없는 매너로 허니를 맞이했지만 그 모습이 허니의 기분을 나아지게 하진 못 했어. 더 풀이 죽기만 했지. 로우든 가의 저택에 먼저 다녀와서 그런 걸 지도 몰라. 두 분 다 깔끔한 매너를 갖추셨지만 사소한 행동 하나 표정 하나 마다 달랐으니까.
“차가 식겠습니다.”
허니는 흘끔흘끔 조지의 눈치를 보면서 괜히 입술을 말아 물었어. 만져도 되는 걸까.
“어디 불편하십니까?”
허니는 고개를 저었어. 여전히 조지의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 한 채로.
어릴 적에, 그러니까 아주 어릴 적은 아니고 둘 다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나. 허니가 부모님을 따라 맥카이 가에 왔을 때 다과상에 있던 찻잔을 깨뜨린 적이 있었어. 어른들은 괜찮다고 하셨지만 조지는 그런 허니를 보며 인상을 쓸 뿐이었지. 한창 남의 시선에 예민했던 시기에 약혼자의 그런 차가운 눈길 한 번은 오래도록 가슴에 콕 박혀있었어.
쨍그랑!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더니 결국 깨뜨려 먹고 말았구나. 허니는 급히 의자에서 나와 깨진 찻잔 조각들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어.
“됐습니다.”
화가 난 걸까 아니면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까. 조지는 말투로도 표정으로도 그 속내를 읽기가 참 어려워. 어렸을 땐 그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자라면서 점점 더 그랬던 것 같아. 허니는 조지를 한 번 깨진 조각들을 한 번 보다가 다시 조각들을 줍기로 했어.
“하..”
꼭 그 때 같아. 깨진 찻잔. 인상을 쓰는 조지. 들릴 듯 말 듯 조용한 한숨소리도. 허니는 눈물이 맺히려는 걸 억지로 참아냈어.
조지는 허니를 혼자 내버려두고 응접실에서 나가버렸어. 그렇게 조지가 등을 돌리고 문 밖으로 아예 나가버리고 나자 참았던 눈물이 굵은 방울로 하염 없이 뚝뚝 떨어지는 거야.
나는 바보야..
아마 새 찻잔을 가지러 가는 거겠지. 사람을 부를 수도 있었겠지만 이런 바보랑은 한 시도 같이 있기 싫어서 나가버린 거야. 허니는 생각했어.
허니는 조지가 돌아오는 대로 인사를 하고 집으로 가버려야 하나 아니면 집사 브라운씨에게 대신 인사를 전해달라고 하고 가버릴까 고민했어. 찻잔까지 깨버린 마당에 인사까지 대신 전하는 무례를 범하고 싶진 않은데.. 그렇다면 하인들에게 물어 물어서 조지를 따라가 사과를 해야할까. 허니는 그렇게 깨진 조각들 앞에 주저 앉은 채로 소리 없이 울며 어깨를 떨었어.
허니가 제 탓을 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있는 동안 조지가 다시 응접실로 돌아왔어.
“…?”
손에는 가루약이 담긴 작은 약병과 깨끗한 천이 들려있었어. 허니는 그제서야 손가락 끝에 상처가 났음을 알아챘어. 너무 놀라고 창피해서 알아차릴 새도 없었어. 그렇다면 저 약은 아마 상처에 올리는 약일 텐데 그걸 다른 사람도 아닌 조지가 직접 들고 왔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어.
“조금 아플 겁니다.”
상처는 크지 않았지만 알고 나니 꽤 쓰라려서 조지가 약을 올리려는 차에 자신도 모르게 손을 쓱 빼버렸어.
그 때. 그 때도 조지는 허니를 두고 가버렸는데.. 어른들은 괜찮다고 허니를 달래주고 있을 때 조지는 허니를 보고 짜증이라도 난 듯 눈살을 찌푸리고서 그곳을 벗어나버렸어. 허니는 조지가 다시 돌아오는 걸 보지 못 한 채로 그대로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고. 조지는 화가 많이 났고 바보 같은 나랑 있기 싫었을 거야. 허니는 그런 생각을 하며 마차에 올랐었지.
“허니.”
이름을 부르는 단호한 목소리에 허니는 주춤 거리며 다시 손을 내밀었어.
“이런 상황에서 하려던 말이 아닌데.”
조용히 상처를 봐주던 조지가 말했어.
“파혼 일은 미안했습니다. 하지만 이혼보다는 낫겠죠.”
억지로라도 결혼을 강행하게 되면 조지는 이혼까지 할 생각이었구나. 오늘은 정말 모든 게 엉망이야. 여기까지 와서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어..
“직접 얼굴을 보고 사과하지 못 한 것도 미안합니다만 파혼 이후 당분간은 나를 보고 싶지 않았을 테죠.”
조지는 허니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으켜주었어. 의자를 다시 빼주었고 허니가 자리를 잡고 나서야 사람을 불러 깨진 조각들을 치우게 했어.
“어차피 파혼까지 저지른 무뢰한이 되버린 김에 한 가지 충고를 해도 되겠습니까.”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허니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어.
“로우든 가는 왕실의 친척입니다. 그것도 꽤 머지 않은. 알고 계시겠지만.”
그 말에도 허니는 고개를 끄덕였어.
“지금이야 유학길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정계 일에 관심이 없겠지만 곧 집안 어른들의 뜻을 따르게 될 겁니다. 제가 그렇듯이요.”
허니는 수첩을 꺼내 로우든씨가 책을 펴낼 계획이 있음을 말해주려 했지만 조지는 그런 허니를 기다려주지 않고 말을 이었어.
“정치인의 아내는 정치인 못지 않게 사람들의 주목을 받습니다. 그 자리가 막중할 수록 더욱 그렇죠. 왕실의 가까운 친척이기까지 하니 더 많은 이목을 끌겠지요. 모든 행보에 대해서 말입니다.”
허니는 조지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 것 같았어. 백작 가여도 정계에 대단한 힘을 발휘하는 집안도 아니고, 하나있는 딸은 벙어리이기까지 한 집안과 왕가 친척의 혼약이 말이 되겠느냐는 거겠지. 허니는 로우든씨와 자신은 그런 사이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지만.. 로우든씨는 몰라도 자신은 그런 마음이 조금도 없는 것은 아니라서 그저 묵묵히 듣기만 할 뿐이었어.
“정치인의 아내에게는 요구되는 의무가 참 많습니다. 특히 더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아주 많은 이들이 기대하고 있지요. 그 남편 몫의 청렴함까지 다 해야 손가락질이나 겨우 면할 자리입니다. 그럼에도 그 노고를 알아주는 이는 거의 없지요. 아내의 정숙함과 높은 도덕성에 대한 칭찬은 으레 그 남편에게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이로 인해 정신적으로 심약해지신 분들도 심심찮게 있고요.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 정치인만큼 능숙해야 하고 알량한 정치싸움에도 밀리지 않아야 합니다. 이 모든 걸 해내려면 냉정할 줄도 알아야 하고 필요할 땐 무자비해질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겨우 숨통 트일 내 자리를 보전할 수 있겠죠.”
너에게는 그럴 만한 인내심도 끈기도 없겠지. 조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어. 적어도 허니는 그렇게 생각했어.
“모든 귀족이 그런 고성과 견제가 오가는 정계에 직접 뛰어들지는 않지 않습니까. 이게 제가 허니 양에게 드리는 충고입니다. 허니 양의 앞으로의 인생을 좀 더.. 편안하게 해 줄 그런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세요. 물론 로우든 씨와 그런 사이가 아니라는 건 압니다. 그러니 주제 넘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소리라 손가락질 하셔도 됩니다. 저를 저주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조지의 말은 거기까지 였어. 곧 식사시간이 되어 조지가 함께 들자고 권했어. 여기서 더 들어야 할 말이 있는 걸까. 하지만 이만하면 허니는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충분히 피곤하고 충분히..속상해. 결국 해야 할 일이 있다면서 작별 인사를 건네고 그곳을 떠났어.
허니는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보았어. 그리고 괜히 그림을 한장씩 훑어보았지. 그림을 보면서 로우든씨를 생각했지. 그러다 꾸중을 들은 듯 마음이 아려오던 대화아닌 대화를 떠올리다가 문뜩 조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어. 허니를 맞이하며 안부인사처럼 건네던 말. 요즘도 그림을 종종 그리느냐고. 그 때.. 고개만 끄덕일 게 아니라 그림을 보여줘야 했을까.
“허니는요?”
“조지? 손에 그건 뭐니?”
“약이랑 붕대요.”
“오, 조지. 허니는 백작님 부부와 함께 좀 전에 집으로 돌아갔단다.”
“상처는 어떡하고요?”
“겁을 잔뜩 먹어서 어른들 누구도 손도 못 대게 하기에 백작부인이 손수건으로 감싸주셨지. 인사를 못 해서 아쉽겠구나. 어디서 뭘 하고 있었길래 불러도 대답도 없고.”
“..열쇠를 찾느라요.”
“열쇠?”
“약장이 잠겨있어서요.”
“상처를 돌보는 일이라면 사람을 부르면 돼. 네가 직접 챙길 필요는 없어.”
“..저도 알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