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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제이크 세러신은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제이크 세러신를 만난 것은 촬영이 절반쯤 진행된 그의 새 영화 의 로케 촬영지인 미네소타에서 였다. 그의 트레일러는 상상한것 보다 단촐하고 심플했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위한 5개의 운동기구와 무게별 케틀벨과 덤벨이 완벽하게 구비된 별도의 트레일러가 따로 있긴 했다.) 미네소타의 겨울은 뉴욕의 그것보다 춥고 건조했다. 그러나 그는 전형적인 텍사스 남자치고는 날씨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드리스 반 노튼 특유의, 기하학적인 패턴의 화이트 셔츠에 늘씬한 다리를 도드라지게 하는 슬림 슬렉스를 입은 그는 편안해 보였다. 그렇지만, 아마도 텍사스 출신의 알파메일인 그의 페르소나가 소화하기에 이 드레시한 아웃핏이 F1 써킷에서 파이어 수트보다 편했을지에 대해서는 모두 의문을 제시할 것이다.
F1 레이서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썬더"에는 제작비 2억 달러가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이크 세러신은 전설적인 F1 레이서 '레이몬드 크루거'를 연기했다. 이 작품을 위해 1여 년 동안 레이서 드라이빙 트레이닝을 받은 그의 조각같은 몸은 파이어 수트를 완벽하게 소화했고 그의 근사한 웃음과 완벽한 치아는 뜨거운 써킷에서 그 진가를 더했다. 사실, 그가 연기한 레이몬드 크루거는 그의 직업이 영화배우가 아닌 F1 레이서라는 사실만 제외하고는 제이크 세러신과 똑같이 닮아 있다. 자신감있는 애티튜드와 대단한 여성 편력과 그 태양같이 밝은 이면의 그림자같은 어둠까지도.
이제 와 되돌려 보기에, 열여덟살에 성인 영화 커리어를 정식으로 시작한 이래, 제이크 세러신은 아주 신중하게 작품을 골라 온 것으로 보인다. 이미 스타덤에 오른 어떤 이들이 그러하듯이 대중의 입맛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세계에만 빠진다거나, 혹은 그 반대의 길로 미끄러지는 것과는 달리 그는 정확히 대중들이 무엇을 원하는 지 아는 듯하다. 그는 '가치'와 '예술성' 보다는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영화를 자신의 우선순위에 둔다. 그는 산업으로서, 사업으로서의 영화를 존중한다. "수백, 수천명이 한 작품을 만들죠. 전부는 아니지만 우리(배우들)은 우리가 하는 연기, 우리가 하는 선택에 그 사람들의 생업과 커리어가 달려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니까요." (중략)
느긋한 그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그는 '오프 듀티'를 강박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배우로 유명하다. 뉴욕이나 LA에 머물 때, 그는 종종 파파라치의 표적이 되곤 하지만, 그가 '오프'를 선언하고 숨어 버리면, 그를 찾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지는 모양이다. 때문에 옐로 페이퍼들은 그의 '휴가 사진'을 수만달러에 붙여 수배령을 내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서른 이후에 그가 도심 한가운데에 근사하게 입고, 완벽하게 웃으며, 무용수 처럼 걷는 것외의 모습으로는 그를 만난 적이 거의 없다.
그도 아마 여느 휴가철의 남자들이 그렇듯 수염이 듬성듬성 난 얼굴로 베이딩 수트를 입고 아주 느긋한 모습으로 휴가를 즐기고 있을 것이다. "전 제가 영화배우일 때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휴가를 보내는 나를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요? (who cares?)" 그는 소탈하고, 전혀 현실 감각이 없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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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크 세러신의 영화는 기대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 스스로 마저도 그러한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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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더"가 개봉한 첫 주, 제이크 세러신이 마주한 것은 비단 뉴욕타임즈의 날카로운 평론뿐이 아니었다. 로튼토마토와 imdb, 그리고 트위터까지... 모든 것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되었고 그것은 다시 제이크에게 돌아왔다. 그렇게 사람들이 제멋대로 떠들어대는 사이 제이크는 글로벌 프리미어를위해 호주, 일본, 런던, 로마와 파리, 그리고 LA같은 도시들을 다녔다. 매일 전문가들과 -때로는 더 날카로운- 아마추어들의 평론들은 쏟아졌고, 제이크는 어떤때는 전용기 안에서 또 어떤 때는 리무진에서, 그리고 어떤 때는 파티 따위에서 그 소식들을 다운로드 받았다.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봉 첫주에 손익분기점을 넘기면서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한다. 제이크는 관객을 만나는 자리를 곤혹스러워 했지만 늘 그렇듯 100년이나 그 일을 한 사람처럼 환호앞에 근사하게 웃고 손을 흔들었다. 예견된 성공앞에서 제이크는 생각한다, 그 영화를 본 사람이 많아질 수록 '썬더"가 '오스카'와는 거리가 먼 영화라는 사실이, 제이크 세러신이 '오스카'와는 거리가 먼 배우라는 사실이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점점 더 명확해 지고 있다고.
7.
도쿄를 끝으로 장장 2주간의 월드프리미어가 끝나자마자, 제이크 세러신은 부름을 받고 워싱턴으로 향해야 했다. 전용기 안에서 빈 속에 샴페인을 반병이나 털어 넣었음에도 도무지 술에 취하지 않았다. 썬더의 로튼토마토 지수는 개봉 이후 전혀 올라갈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연두교서 8시 간 전.
워싱턴 힐튼 호텔, 프레지덴셜 스위트
"블랙 셔츠는 너무 영화 배우 같고 블루 셔츠는 거기 캐비닛 멤버처럼 보일거에요. 화이트 셔츠로 하되 타이는 안합니다. 할아버지가 보타이를 하고 등장하실텐데 거기 콤비처럼 보이고 싶진 않아요."
스타일리스트에게 주문을 늘어 놓고 난 제이크가 눈을 감자 깊게 가라앉은 눈두덩이가 드러났다. 빈속에 털어 넣은 샴페인은 뒤늦게 효능을 발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이크는 옷을 입어야 했다. 그것도 근사하면서도 소탈하게. 너무 '영화배우'처럼 싼 티가 나지 않으면서도 '전직 국방부 장관의 손주이자 현직 국무부 장관의 아들인 동시에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고 있는 영화배우'처럼 보이도록 말쑥하게.
연두교서가 끝난 이후, 전통적으로 대통령이 주최하는 리셉션은 '블루룸'에서 열린다. 블루룸은 스테이트 플로어에 위치한 넓은 공간으로 백악관은 다른 공간이 으례 그렇듯 고풍스러운 앤틱 집기들 그리고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푸른색 벽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리셉션, 그러니까 대통령이 주최하는 파티에는 매우 제한적이지만 또 매우 광범위한 부류의 사람들이 초대된다. 상,하원과 각 부처 장관을 포함한 행정부 주요 멤버들은 물론이고 때로는 그들의 자식이나, 앞으로 어떤 자리에 오르는 것을 약속 받은 사람들까지도.
지팡이를 집고 다니긴 했지만 앤써니 세러신은 그다지 노쇄한 남자가 아니었다. 아니, 노쇄함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남자였다. 그는 베타로는 처음으로 4성장군을 거쳐 국방부 장관에 오른 남자였다. 그러니까 손주의 에스코트 따위는 필요 없는 남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는 손주인 제이크 세러신을 대통령 리셉션 내내 당신 옆에 세워두어야 겠으니 세계 어디에서 영화배우 노릇을 하고 있던 간에 당장에 그를 잡아오라고 전용기를 내보냈다. 제이크는 순순히 끌려왔다. 제이크는 시니어에게는 온순한 녀석이었다. 영화배우가 된 것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조부의 뜻을 거스르는 법이 없었다. 문제는 그의 조부가 가장 못마땅해 하는 것이 손주의 직업이 영화배우라는 데에 있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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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대표 로버트 콜은 단신이지만 풍채가 좋은 베타 남자로 민주당 최초의 켄터키 주의 상원의원으로 5선을 한 남자다. 그는 로버트를 좋아했다. 로버트가 서른하나의 나이에 하원의원 출마를 결심했을 때, 빈약했던 당 내에서의 입지에도 불구하고 같은 이름의 콜이 그의 정치적 후원자를 자처한 덕분 로버트는 뉴욕주 하원의원으로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하원을 거쳐 상원의원에 출마할 것을 종용한 것도 그였다. 그는 로버트가 '최연소' 상원의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34살 78일의 나이로 로버트 플로이드는 민주당 최연소 상원의원으로 기록된다.
그는 로버트를 보자마자 살이 빠졌다면서, 의원은 자고로 두툼한 밸리(뱃살)에서 그 권위가 시작되는 법이라며 농담을 던졌다. 로버트는 그렇잖아도 배가 고파 핑거푸드를 몇개 집어 먹고 싶었지만 콜은 그를 데리고 다니면서 여기저기에 인사를 시켰다. 그는 '최연소 상원의원'이었으므로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그의 얼굴은 몰라도 이름은 잘 알았다.
로버트 콜은 다섯걸음 정도 거리에 백발이 성성하고 날카로워 보이는 노인과, 젊고 건강하며 이 방에서 가장 근사한 남자가 같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로버트 플로이드에게 속삭였다. 로버트 콜은 민주당에 잔뼈가 굵은 남자였지만 공화당과도 스킨쉽이 좋은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세러신이라네."
로버트는 두리번거리다가 손에 들고 있던 탄산수를 들이키며 말했다.
"국무부 장관님이요? 저기 대통령님과 같이 계신데요?"
"아니, 그 아버지와 아들 말이야."
"아. 영화배우요."
로버트는 그제야 방의 반대편, 여기 와 있는 다른 남자들보다 훨씬 캐주얼한 노타이 수트 차림으로 늙었지만 정정한 노인과 함께 서 있는 사내를 보았다. 제이크 세러신. 영화배우, 그 조부는 국방부 장관을 지내고, 아버지는 현직 국무부장관이다. 그를 모르는 사람은 세상에, 최소한 미국에 많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저 노인네, 아주 악명이 자자한 양반이라네. 아직도 당신 아들을 움직여 행정부에 참견을 한다나."
날카로운 인상의 노인이 이쪽을 쳐다보자마자, 로버트 콜의 표정은 단번에 유순하게 흩어졌다.
"오랜 만에 뵙습니다 장관님."
그리곤 로버트를 데리고 빠르게 제이크 세러신과 앤써니 세러신이 있는 곳을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딱딱한 표정이었지만 앤써니 세러신은 로버트 콜의 손을 맞잡고 몇번 강하게 흔들었다.
"뉴욕주의 로버트 플로이드 의원입니다."
"안녕하세요 장관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가만히 장식인양 조부의 한발짝 뒤에 서 있던 제이크 세러신이 로버트 플로이드가 하는 말을 전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근사하게 손질된 눈썹을 들어 올리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로버트는 덕분에 앤드류 세러신과 악수를 하는 동안 웃음을 참으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 잘생긴 알파 영화배우를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처음이라 로버트는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로버트는 인상적인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입에서 나온 말은
"저 어렸을 때 '스케이드보드 클럽'을 좋아했어요."
제이크는 12살 부터 15살이 될 때까지 거의 3년동안 디즈니 채널의 '스케이드보드 클럽'에 출연했는데, 사실 그 시절을 인생에서 지우고 싶다. 그가 맞은 역할은 항상 스프레이로 머리를 리젠트 스타일로 고정하고 다니는 스케이드보드 클럽의 리더격인 남자애였다. 건방지고 제멋대로인 전형적인 '불리'들 사이에서 제 헤어스타일과 소매가 찢어진 체크무늬 셔츠에 가죽 라이더 재킷 베스트를 덧입는 전형적인 스타일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걸 제이크 캐릭터의 이름을 따서 네이썬룩 이라고 불렀다.
"제발 절 기억하다고 하지 말아주세요." 제이크는 조금 겸손하게, 그러나 진심으로 말했다.
"기억 하고 말고요! 네이썬!"
로버트는 손을 모으고 소리 쳤다. 파티가 소란스럽긴 했지만 주변의 몇몇은 로버트의 말을 듣고 돌아 보았다가 제이크를 발견했다. 제이크는 저를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두루 시선을 던지며, 남들 앞에서 으례 나오는 근사한 미소를 던졌다. 이로써 이 귀여운 '최연소 상원의원'은 제 지역구의 표 하나를 잃었다.
상,하의원에서 두 정당이 첨예하게 현안을 다투는 날카로운 의회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연두교서에서는 총 131번의 기립박수가 터져나왔다. FOX가 예측한 것보다 39번이 많은 숫자였고, 뉴욕타임즈의 예측보다도 18번이 많은 숫자였다. 도널트 트럼프보다는 3번이 많고, 바락 오바마보다는 21번이 적은 숫자. 파티의 호스트 -그러니까 대통령- 의 기분은 좋아보였다. 그는 영부인과 춤을 췄고 공화당 대표와도 한 곡을 췄다. 별로 흥미로운 그림은 아니었다. 대통령이 파티장의 여자들과 춤을 추는 동안, 국무장관, 그러니까 제이크의 아버지인 테일러 세러신은 파티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상대해야 했다. 그의 아내는 바하마에 머물고 있어 그는 혼자 리셉션에 참석했다. 그는 제이크에게 네가 여기엔 왠일이냐며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30여 명의 스태프들을 이끌고 돌아다니는 제 아들을, 그것도 요즘 새 영화 때문에 투어가 있다고 들었는데 여기까지 불러들일 수 있는 사람이 또 누가 있겠는가. 앤써니 세러신에게는 아들인 테일러에게도 그랬던 것 처럼 손주인 제이크에게도 그 만의 고유한 '계획'이 있었다. (아직도 그 계획이 완전히 폐지 된건 아니지만) 그런 제이크에게 영화배우의 길을 열어 준 것은 그의 아내이자 제이크의 어머니의 역할이 컸다. 그것이 시아버지인 앤써니 세러신의 공분을 산 것은 당연하다. 그의 아내가 일년의 반 이상을 바하마에서 보내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하지만 테일러 세러신이 보기에 둘은 사실 정확히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파티는 무르익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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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플로이드는 스물다섯살 하원의원 보좌관 인턴으로 처음 정무직을 시작한 이래 매년 일년의 120일 이상을 워싱턴에서 살고 있지만, 그에게 워싱턴의 겨울은 언제나 견디기 어려운 것 중에 하나다. 같은 캘리포니아 출신인 브래들리는 눈이 많은 뉴욕의 겨울을 더 고약하다고 투덜대지만, 워싱턴의 바람과 건조함은 늘 그를 위축시켰다.
밀도가 높은 방의 공기에 질식할 듯 해서 테라스로 잠깐 바깥 공기나 쐬자던 생각은 나온지 오분이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다시 나온 길을 되돌아 들어가려던 찰나, 침울하지만 무게 있는 목소리가 그를 가로 막았다.
"대체 이유가 뭐냐고"
그냥 일단은... 제작사에서 다른 옵션을 찾아보자는 의견이 나온것 같아.
로버트는 엿들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영화배우 답게 그의 발성은 훌륭하고 음성적으로 잘 정돈되어 있어 쉽게 들렸다. 더군다나 그들은 고작해야 2피트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얼어붙은 워싱턴의 공기는 쉽게 공명했다. 로버트는 추위에 제 이가 서로 부닥기며 소리를 내게 하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제이비, 내가 지금 당장 파라마운트 회장 비서실에 전화해? 정말로 제작사가 그런 얘길 했는지 내 귀로 확인해?"
제이크. 진정해
"그래, 내가 진정할 수 있게 제대로 다 얘기 해봐, 오디션을 세번이나 봤어, 그리고도 반 년을 기다렸고. 우리 이거 때문에 작품을 세개나 거절했어. 그리고도 내가 아니라는 이유가 대체 뭔데?"
제이크의 남성적인 목소리가 격양되어 떨리는 듯 들렸다. 로버트는 숨을 죽였다. 이렇게 된 이상 그가 통화를 끝내기를 기다렸다가 그가 다시 블루룸으로 돌아간 다음에 들어갈 셈으로 몸을 움츠렸다.
제이크... 이런 때도 있는거야. 우리 많이 겪었잖아. 우리 좀 쉬면서 천천히 다음 작품을...
"... 썬더 때문에 그래?"
제이크
제이크의 목소리가 다소 격양되어 대체로 낮은 톤이던 목소리가 튀어올랐다.
"썬더를 보고 나니 감독이 도저히 나한텐 그 역을 못주겠대?"
제이크는 상대의 답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몸을 숨기려는 노력이 무색하게도, 로버트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돌아선 제이크 세러신과 마주쳤다.
"미안해요. 들으려던건 아니었어요."
제이크는 고개를 기울이고 팬츠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었다. 코가 빨개졌네. 그는 죄책감이 가득한 어린애같은 -실제로 반은 그렇다- 로버트 플로이드 '상원의원'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실내에서 퍼져 나오는 오렌지빛 조명이 번져 얼굴 윤곽의 반을 물들이고 있다.
"괜찮습니다. 의원님."
"..."
제이크의 말에도 동그마한 듯 유순한 얼굴은 미안함을 숨기지 못한다. 그래서,
"영화배우에겐 늘 생기는 일이에요."
"..."
제이크는 웃었다. 로버트는 그 웃음이 얼어버린 강의 거칠은 표면같다고 생각했다. 매마르고 곧 깨어질듯 위태로우면서도 결코 사람을 허락하지 않는.
"그럼 실례했어요. 추운데 들어가시죠."
제이크는 로버트에게 안으로 들어가자며 손을 내밀었다. 고개를 들어 조명 아래 드러난 로버트의 얼굴을 보며 제이크는 다시 생각했다. 볼도 빨갛네. 제이크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방금 자신에게 일어난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당혹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이 저 얼굴에 희석될 줄이야. 로버트가 순순히 돌아서려하길래, 제이크는 그 뒤를 따르려는 참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다. 로버트는 문득 뭔가 생각난 듯 다시 고개를 돌리고 안경 너머 눈을 올려 뜬 채 제이크를 보고 입을 열었다.
"이번 주말에 혹시 시간돼요?"
설마 데이크 신청인가? 여기서?
데이트를 신청하기에 어떤 면으로도 적절하지 않은 순간에, 호감보다는 오히려 적의나 비웃음으로 들려 마땅한 그 물음이 그러나 제이크에게는 의도된 무례함으로도, 조롱으로도 들리지 않았다. 자신은 방금 인생에서 거의 가장 좌절스러운 순간을 생판 남에게 들켰다. 아마도 이 귀여운 생물은 제이크가 겪는 종류의 좌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상원의원과의 데이트라, 기분전환이 될 수도 있지. 최근에 거의 바닥을 친 자신감과 자존감을 보상받아 보는 것도 좋을거야. 제이크는 좀 더 말 해 보라는 듯이 턱을 당겨 고개를 약간 숙이고 로버트 플로이드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뉴욕에 계시다고 들었어요. 이번주에 뉴욕에 돌아가시면 혹시 브루클린에 오시겠어요? 농구 경기가 있어요."
농구? 제이크는 다시 의아함을 얼굴에 띄웠다.
"기분 전환 정도는 되실거에요."
로버트는 유순하지만 또 한 편 자기 확신에 찬 얼굴로 제이크에게 말했다.
//
아무튼 반년이나 제이크를 기다리게 했던 작품의 캐스팅이 완전히 무산되고, 그에게는 강제된 여유가 생겼다. 뉴욕에 돌아오고 나서도 제이크는 로버트 플로이드의 청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트레드밀을 타거나 묵혀 두었던 차기작 시나리오를 뒤적이며 소일거리를 하는 동안 문득 문득 어둠속에서 오렛지빛 조명에 물든 추위를 숨기지 못하는 바알간 볼을 한 얼굴은 어쩐지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서른 후반을 바라본다지만 순둥한 얼굴을 한 상원의원. 그의 입에서 나온, 어쩐지 결연한 '기분 전환'이라는 구실. 그 장소가 브루클린 공립 스포츠 센터라는 것 까지. 어느 것 하나 도무지 제이크에게는 일어남직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주말, 그래서 제이크는 90년대 컨버터블 재규어를 타고 브루클린 브릿지를 건넜다. 제이크에게 브루클린 브릿지를 건너게 한 사람은 이제까지 기억하는 한 없었는데, 그래서 인지 얼어붙은 풍광 마저 신선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포드나 혼다 어코드, 현대 차등이 즐비한 주차장에 빈티지 카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 제이크의 존재도 마찬가지 였다. 힐끔힐끔 저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가리고 선글라스를 낀 채로 경기장에 들어섰을 때, 제이크는 왜 로버트가 그토록 결연하게 '기분 전환'에 대해서 말했는지 깨달았다. 그 '전환'이라는 것이 결코 제이크가 생각한 방향이 아니라는 사실도.
휠체어에 탄 소년들은 농구 경기를 위해서 특별히 설계된 구조의 휠체어에 앉아서 익숙하게 휠을 돌리다가 볼을 드리블 하기를 반복했다. 휠체어들은 일사분란하게 공을 따라 움직이고, 농구경기에서 으례 들리는 농구화가 코트위를 문지르면서 들리는 날카로운 마찰음 대신에, 휠체어가 코트를 구르는 고른 소리가 들렸다. 오래 입어 색이 다소 바란 푸른빛의 폴로셔츠를 입은 로버트 플로이드는 코트사이드에 앉아서 금방이라도 코트로 뛰어나갈 듯 사나워져 있는 소년을 붙들고 열심히 작전을 설명하는 중이었다. 제이크는 저도 모르게 선글라스를 벗고 그것을 가만히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드러난 제이크 세러신의 얼굴을 보고 수근대거나 저들끼리 떠들어 댔다. 로버트는 아마도 이 코트에서 가장 늦게 제이크를 등장을 깨달은 것 같다. 그러고도 소년을 코트로 돌려 보낸 후에야 그는 다소 열성적으로 제이크에게 손을 흔들며 그를 코트쪽으로 이끌었다.
"진짜 오실줄 몰랐어요."
농구공을 들고 제이크에게 다가오면서 로버트가 해사하게 웃었다. 벌써 땀에 제법 젖은 듯, 파티에서 말쑥히 손질해 넘겼던 것과는 달리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굽슬거리며 이마 위를 덮어 그를 더 앳되어 보이게 했다.
제이크는 그에게서 희미한 산탈향이 나는 것을 느꼈다. 로버트는 제이크의 등장에 어린애처럼 신이 나서 경기에 대해서 설명했다. 제이크는 그것을 건성으로 들으면서 로버트와 어깨를 붙였다. 저와 어깨의 높이는 같지만 그 부피감은 확실히 다르다. 폴로셔츠 소매 아래로 드러난 늘씬한 팔을 들어 코트위 선수들을 가리키며 그 기량을 자랑하는 사이, 제이크는 로버트의 목을 덮고 있는 굽슬거리는 브루넷 머리카락의 끄트머리를 보았다. 자그맣게 꼬리를 만든 꼭지 끝이 꼭 어린아이의 그것 같다. 그 목덜미에 코를 묻으면 아마도 이 희미한 산탈향이 진하게 나겠지. 제이크는 혀로 입술을 축이면서 생각한다.
이건 데이트 신청이 아니다. 제이크는 문득 거기에 아쉬움을 느끼는 스스로를 깨닫고 여전히 설명에 열중인 로버트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허탈히 웃었다.
경기가 무르익을 무렵 로버트와 제이크는 코트 사이드의 낮고 작은 플라스틱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제이크는 종국에서야 정말로 순순하게 경기를 즐겼다. 볼이 바스켓에 도달했다가 링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다시 코트 위로 떨어지자 안타깝게 탄성을 흘렸다. 로버트는 박수와 환호를 반복하는 제이크를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때론 완벽이 핸디캡이 될 수도 있어요. 제이크."
코트쪽을 바라보며 로버트 플로이드가 나즈막히 말했다. 제이크는 그를 돌아보았다.
"우리는 그걸 너무 늦게 깨달을 때가 있죠."
매끈한 이마를 지나, 끝이 동그마한 콧날, 둔덕같은 볼과 꼬리가 올라간 입술, 희미한 산탈향. 색이 옅은 눈동자와 약간 핑크빛을 띄는 오밀조밀한 모양의 귀까지-
서로 공을 갖겠다고 연호하는 선수들의 호령과, 그들을 응원하는 환호와 박수, 공이 코트위를 튕겨져 나가면서 나는 파열음, 의미없는 탄식, 모든 소리들이 그렇게 희미해진다.
제이크는 용기를 내어 무릎 위에 놓인 로버트의 손을 잡았다. 손은 예상보다는 컸고 생각보다는 따뜻했다.
제이크는 그렇게 사랑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