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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과의 재회는 영화처럼 아름답지 않았고, 소설처럼 애틋하지 않았다.

뭍에 나온 인어가 시리도록 푸른 바다를 그리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3.
이 작은 동네에선 늦은 밤에 갈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아무말 않고 제 차 앞에 서있는 브래들리를 지나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잠깐 앉을래? 허니의 물음에 브래들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허니는 뒤를 돌아 다시 바닷가로 향했다. 브래들리는 허니의 뒤를 따랐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멈춘 허니는 모래위에 다시 털썩 앉았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삐딱하게 내려다 보는 브래들리를 올려다 본 허니가 왜? 하며 되물었다.


“할 얘기가 있어서 그 앞에 있던거 아니야?”
“….”
“앉아, 목 아파.”


그제야 허니의 옆에 털썩 앉은 브래들리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먼 바다만 응시했다. 허니와 브래들리 사이에는 달빛과 파도소리가 잔잔히 흘렀다. 예전에도 이랬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허니는 달빛이 부서지는 바다를 보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


그 날 따라 허니는 기분이 나빴다. 으레 그 시기의 청소년들이 그러하듯 정확한 이유는 없었다. 세상만사가 짜증이 나고 화가 났다. 그래서 쉬는 시간에 학교 중정에서 만난 브래들리에게 같이 나갈래? 물었을때엔 자신이 항상 예스라는 답을 브래들리에게 주는 것처럼 그 역시도 허니에게 되돌려줄거라 생각했었기에 더 화가 났다.


“아, 오늘은 좀 그런데…. 이따가는 안ㄷ….”




거절의 뜻을 담은 브래들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니는 뒤로 돌아섰다. 하 씨, 하며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턴 브래들리가 뛰어서 허니의 앞을 막아섰다. 무슨 자존심 대결이라도 하듯이 둘은 가만히 서서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렇지만 결국 지게 되는것은 언제나 그렇듯 브래들리의 몫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술을 꽉 깨문 브래들리는 허니가 지나갈 수 있게 옆으로 몸을 틀었고, 허니는 그런 브래들리를 좀 더 보다가 가방으로 브래들리의 가슴팍을 퍽 밀치고는 당당하게 걸어나갔다. 윽, 야! 허니 비! 뒤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허니는 돌아보지 않고 가운데 손가락만 들어 보였다.

곧장 바다로 달려간 허니는 신경질적으로 가방을 모래 위에 던졌다. 씩씩 거리며 제 일기장을 꺼냈다. 씨발,씨발. 종이가 찢어질듯 아무렇게나 펜을 휘갈긴 허니는 그래도 분이 안풀린다는 듯 일기장을 바닥에 팽개치고는 소리를 질렀다. 근처에 사는 누군가는 나와볼법도 했지만, 창문으로 허니를 확인이라도 했는지 개 짖는 소리만 허니에게 답을 했다. 그래도 허니는 꽤나 속이 풀렸는지 모래위에 뒹구는 일기장을 대충 툭툭 털어 가방에 넣었다. 날은 덥고, 기분은 나아졌고, 바다가 눈 앞에 있었다. 허니는 언제나 눈 앞의 바다를 거절하는 법을 몰랐다.


해가 조금씩 내려 앉을 때 쯤에야 바다에서 나온 허니는 제 가방 옆에 앉아있는 브래들리를 발견했다. 브래들리도 허니를 발견 했는지 가볍게 한 손을 들어보였다. 그리고 반대 손엔 어김없이 허니의 일기장이 들려 있었다. 기분이 조금 풀렸던 허니의 얼굴엔 다시 짜증이 솟았다. 허니는 그냥 가방을 두고 갈까 생각도 했지만, 젖은 상태로 집에 들어갔다가는 최소 2주는 꼼짝없이 범블의 감시를 받으며 학교를 다녀야 할 것이 뻔했다. 하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허니가 머리를 꾹꾹 짜며 브래들리에게 다가섰다.


“오늘은 나 없이도 바닷 속 친구들이랑 잘 놀았어?”
“…일기장 보지 말라고 적어놨지, 내가.”
“아, 이거 영어였어? 너무 괴발개발이라 못 알아봤어.”


누가봐도 영어로 쓰인 부분을 가리키며 씩 웃은 브래들리가 제 품에 있던 수건을 허니에게 건넸다. 춥잖아, 받아. 제게 내밀어진 수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허니가 짜증내듯이 낚아채서 몸을 대충 닦았다. 오늘은 좀 많이 열받았나봐, 일기장 한 바닥이 다 욕인거 같던데. 옷을 꿰어입는 허니의 등 뒤로 브래들리가 큭큭 웃으며 일기장을 넘겼다. 옷을 다 입은 허니는 가방을 사이에 두고 브래들리 옆에 털썩 앉았다. 허니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재미가 없어졌는지 브래들리는 다시 허니의 일기장을 가방에 넣었다. 아무말이 없는 둘 사이를 검붉어진 하늘과 조금은 거칠어진 파도소리가 가득 채웠다.

두 사람은 허니의 머리가 퍼석하게 마를 때 까지 아무말 않고 있어도 어색함이 없었다. 말로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게 있었고, 공유하는게 있었다. 그 시절의 둘은 그랬다.


*


허니는 그 때의 서로를 떠올리며 지금 이 상황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길 바랬다. 아무말도 않는 이 순간에 무언가 말을 덧붙이려고 한다면 결국엔 둘 사이가 예전과는 달라졌음을 인정하는 것 같았다. 허니는, 모든게 바뀌어도 브래들리만은 바뀌질 않았으면 했다. 그 모든것을 버리고 떠나온것도, 먼저 바뀌었던것이 자신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시간은 흘렀고 모든것은 바뀌기 마련이었다. 길다면 길었던 정적을 깬 것은 브래들리였다.


“…잘, 지냈어?”
“어, 뭐. 보다시피. 소문 안났어? 나 인생 망해서 들어왔다고 소문 났을건데.”
“딱히. 난 소문 잘 몰라서.”
“하긴, 넌 옛날부터 그랬지. 주변에 관심 없었잖아.”


옛 생각이라도 나는 듯 푸스스 웃는 허니에 브래들리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정적이 깨졌으니 둘 사이에서 말을 이어 가는것은 허니였다. 여기도 진짜 오랜만이다. 옛날 같았으면 진작에 바다에 뛰어드는건데. 너스레를 떠는 허니에 브래들리는 대답도 않고 바닥에 시선을 두고 손가락으로 모래를 휘저었다.


“나 여깄는건 어떻게 알았어?”
“…그냥.”
“하긴, 이 동네에 마땅히 갈 만한 장소가 없긴 하지. 내 차가 워낙 눈에 띄기도 하고.”


고개짓으로 자신의 차를 가리킨 허니가 다시 브래들리를 바라보았다. 겨우 잘 지냈냐는 말 하려고 그렇게 내 차 옆에서 기다린건 아닐거고. 가볍게 웃음을 지은 허니와 눈이 마주친 브래들리는 다시 바닥으로 눈을 돌렸다. 그냥, 궁금했어. 뭐 하고 살았는지. 가볍게 숨을 내 쉰 브래들리는 이내 허니와 다시 눈을 마주했다.


“내가 찾아가면 문전박대 당할게 뻔했고.”
“….”
“그렇다고 허니 네가 우리집에 올 것도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너랑 만날 곳이 카페 뿐일건데, 거긴 앨리가 있어서 불편하기도 하고.”


여전히 자신의 성격을 기억하는 브래들리의 말에 웃음이 머물렀던 허니의 얼굴이 카페 이야기가 나오자 살짝 굳어졌다. 맞다, 얘 결혼했지 참. 종잡을 수 없는 허니의 마음에 다시 짜증이 솟아 올랐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왜 궁금한데?”
“….”
“날 좋아해서 라고 말할거면 큰일날 소리고, 우리가 친구라고 하기엔 내가 너무 썅년이었는데. 취향이 아직도 고약한가봐?”


허니가 비릿하게 웃으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허니의 말에 브래들리는 제 입술을 한 번 깨물더니 숨을 조금 거칠고 길게 내뱉었다. 허니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브래들리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허니를 올려다보았다.


“살아온 이야기를 나눌 사이는 이제 아닌 것 같다, 우리.”
“….”
“나는 얼마가 더 될진 몰라도 한동안 동네에 있을거야. 내 차는 어디서 봐도 눈에 띄니까 니가 알아서 피해. 뭐, 마주치게 되면 인사는 할게. 그렇지만 이렇게 밤 늦게 찾아오진 마. 인생 망해서 돌아온 주제에 유부남까지 꾀어내는 쓰레기까지 될 생각은 없으니까.”
“…허니 비.”
“여기 더 있고 싶으면 있어, 난 갈거니까.”


…가지마. 브래들리는 짙은 남색의 절박한 눈으로 허니의 손 잡았다. 하지만 허니는 그 손에 더 이상 잡혀줄 수 없었다. 미안한데, 인생이 망했다고 불륜까지 갈 생각은 없어서. 다음엔 우연히라도 마주치지 말자. 이 좁은 동네에서 가능할 진 모르겠지만. 브래들리의 손을 가볍게 떨쳐낸 허니가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


브래들리와의 만남 이후로 허니는 또 다시 방안에 틀어 박혀있었다. 이유없는 칩거에 허니의 부모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집 문을 두드린 수잔을 눈짓으로 환영한 미세스 비에 수잔이 가볍게 목례를 했다. 허니는 아직도 방에만 있어요? 수잔의 물음에 미세스 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가볼게요.


“허니.”
“….”
“당장 문 열라는건 아닌데, 얼굴 보고 얘기 하고 싶어.”
“….”
“…그럼, 그냥 문 닫힌채로 말할게. 이번주 토요일에 내 약혼 파티가 있어.”


그러자 방 안쪽에서 우당탕 소리가 나면서 문이 벌컥 열렸다. 축하해, 수잔. 퉁퉁부은 눈에 버석한 피부로 나온 허니의 모습에 수잔은 오, 이런. 허니. 하며 허니의 양 볼을 손으로 감쌌다. 내 약혼 축하를 이런 몰골의 사람에게 받은건 처음이야. 수잔의 장난스런 말에 허니가 민망한 듯 웃었다. 그럼 잠깐 거실에 내려가 있을래? 금방 씻고 옷만 갈아입고 나갈게. 허니의 말에 수잔이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와, 할 말이 많아.

1층으로 내려오자 자신의 딸이 밖으로 나와줄지 궁금했던 미세스 비가 수잔에게 다가갔고, 수잔은 고개를 끄덕였다. 10분 뒤에 씻고 내려온대요. 수잔의 말에 미세스 비가 안도의 한숨을 내 쉬며 수잔을 꼭 껴안았다. 10분이 좀 지나고 나니 아까보다 나은 몰골의 허니가 내려왔다. 미안, 다시 한 번 축하해! 허니의 진심어린 말에 수잔이 활짝 웃었다.


“근데, 상대는 누구야? 나도 아는 사람이야?”
“그게 말이지…. 듣고 놀라지 마.”
“아, 당연하지. 나 이래봬도 산전수전 다 겪고 왔다고.”
“소리 지르지도 않기.”
“알겠어.”
“소리 지르면- 무슨일이 있더라도 내 파티에 참여해주는거야, 알겠지?”
“아 알았대두. 그래서, 누군데?”


자꾸만 뜸을 들이는 수잔에 허니는 참을성 없이 보챘다. 애덤이야. 수잔의 말에 허니는 뭐?! 하며 본 중에 가장 크게 소리를 질렀다. 오예! 방금 소리 지른거 맞지? 미세스 비, 들으셨죠? 너 무조건 이번주 토요일에 우리 파티에 참여 하는거야, 알았지? 수잔의 신난 목소리와는 별개로 허니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 그, 그 애덤? 그, 곱슬머리 주근깨 징징이?”
“어우, 야, 그래도 내 약혼자인데 너무 말이 심한거 아냐? 뭐, 틀린말은 아니지만. 푸하하.”


깔깔 웃는 수잔에 허니는 멍하게 중얼거렸다. 그 애덤이라니…. 걔 완전 네 장난감이었잖아…. 애덤 뭐 어디 아픈거 아니지…? 협박으로 만나는건 아니지…? 허니의 말에 수잔이 다시 한 번 깔깔 웃었다.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와서 물어봐. 이번주 토요일, 우리집이야! 어딘진 알지?


*


토요일 아침부터 약속 했으니까 꼭 와야한다는 수잔의 성화에 허니는 가기도 전에 벌써 지친 기분이었다. 그래도 어느 때 보다도 맑은 날에 기분은 좋았다. 모든 것이 수잔을 위해 준비된 것 같았다. 가서 축하만 하고 바로 올게요. 집을 나서는 허니에 미스터 비가 됐으니까 누구라도 만나고 와도 괜찮아! 하며 말을 덧붙였다. 범블도 초대를 받았던건지, 빨간색 비틀을 타고 나타나는 것 보단 자신이랑 가는게 눈에 덜 띌거라는 핑계를 대며 -수잔이 부탁했을게 뻔했다.- 허니를 데리러 왔다.


“너는, 진짜 수잔한테 잘해라.”
“…알아.”
“너 없을때 나한테도 엄청 잘해줬어.”
“그럼 니가 내 몫까지 잘해.”
“미친새끼.”


범블의 잔소리에 허니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낮은 건물들이 허니의 뒤로 빠르게 사라져갔다. 워낙 사교성이 좋고 아는사람이 많은 수잔과 애덤이라 그런지, 파티장인 수잔의 집이 가까워 질 수록 도로변에 세워진 차들이 많아졌다. 여기서 내려서 걸어갈까? 범블의 말에 허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니는 오랜만에 입은 깔끔한 원피스에 높은 구두가 어색했다. 야, 나 좀 오바 한거 같지 않냐? 허니의 말에 범블이 이제와서?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집 가서 옷 갈아 입고 나올까?”
“지랄을 한다, 지랄을 해. 개소리 말고 빨리 와라. 지금 가도 늦어.”
“나 구두 진짜 오랜만이란말야. 결혼식 때도 안 신었던거 같은데.”


허니의 말에 범블이 걸음을 멈췄다. 넌 그런 말이 아무렇지도 않냐? 상처를 받은듯 한 얼굴을 한 범블에 허니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내가 결혼한것도 사실이고 이혼한것도 사실인데 왜 니가 상처를 받아, 미친놈아. 그래, 니 말대로 개소리 말고 가자. 말은 거칠게 했지만 내심 신경이 쓰인 허니가 범블의 팔짱을 꼈다. 난 진짜 괜찮아서 그랬어. 오늘 수잔이랑 애덤 축하해주러 온거니까 표정 풀고 잘 놀다가 가자. 허니의 말에 범블이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잔의 집 앞엔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온 사람들이 애덤과의 약혼을 축하하며 집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정신없이 사람들과 인사하던 수잔은 허니와 범블을 발견하더니 꺄! 하며 둘을 반겼다. 어머, 이게 무슨일이야! 허니! 너무 예쁘다! 나 말고 네가 약혼 해도 되겠는데? 수잔의 수선에 허니가 범블의 다리를 툭 찼다. 내가 옷 갈아 입고 온다고 그랬지. 두 남매가 투닥거리거나 말거나 수잔은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의 연인인 애덤을 찾기 시작했다. 아, 저깄다. 애덤! 애덤! 수잔의 하이톤에 애덤이 뒤를 돌아보았다. 


“애덤! 허니가 왔어! 빨리 와! 인사 해야지!”


허니는 지난날의 애덤의 얼굴을 떠올리며 서서히 다가오는 남자를 봤다. 기억보다 훨씬 큰 키에 잘 만든 몸이 낯설었지만 곱슬머리에 주근깨는 여전했다. 세상에- 애덤, 너 맞아? 허니의 반응에 애덤이 깔깔 웃었다. 웃음소리를 들으니 애덤이 맞았다.


“오랜만이다, 허니 비. 수잔한테 얘기는 전해 들었어. 이제 집에 왔다며? 앞으로 자주 보자.”
“그래, 안 그래도 나도 묻고 싶은게 많아. 너 협박 당하는거 아닌가 궁금했거든.”
“푸하하, 여전히 엉뚱하구나. 너.”


허니의 말에 애덤이 크게 웃었다. 약혼 축하해, 잘 살아. 잘 살겠지만. 허니의 진심어린 축하에 수잔과 애덤이 동시에 허니를 꼭 껴안았다. 두 사람과 찐한 포옹을 나눈 허니는 그들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가 봐, 주인공이 여기에만 있으면 되겠어? 두 사람을 떠나보낸 허니는 제 옆에 있던 범블의 다리를 다시 한 번 찼다. 너도 니 친구들이랑 놀다가 알아서 가라. 허니의 말에 범블이 너 집은 어떻게 가게? 하고 물었다. 안되면 여기서 자고라도 갈테니까 꺼져라 걍. 허니의 말에 범블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보이고는 허니의 곁을 떠났다.

이제야 한숨 돌린 허니가 테이블에 놓인 샴페인 잔을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삼삼오오 모여 두 사람의 새 출발을 축하하는 모습을 보니 자신의 결혼식 파티가 생각이 나서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 좋은 날에 왜 그런 생각을 해. 허니는 신경질적으로 샴페인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여름날의 열기 때문인지 허니는 평소보다도 취기가 빨리 오른게 느껴졌다.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텐데, 이대로 있다간 파티를 제대로 즐기지도 못할게 뻔했다. 허니는 조용히 뒷마당에 있을 벤치를 떠올리며 자리를 옮겼다.


“와아- 여긴 하나도 안 변했네.”


브래들리가 없었던 때에도 허니는 학교를 자주 빠지곤 했는데, 그럴 때 마다 수잔이 없는 수잔의 집 뒷마당 벤치에 누워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을 세며 푸른 하늘을 마주하곤 했었다. 지금은 옷때문에라도 그때처럼 누워있을 순 없었지만, 여전한 풍경에 허니는 마음이 가라 앉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와 잔잔한 노래소리, 그리고 바람에 살랑살랑 부딪히는 나뭇잎 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렸다. 술기운이 올라와 온갖 소리들이 점점 아득해지고 허니의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


잠깐 눈을 감은 줄 알았는데, 어느새 잠이 들었던건지 허니는 살짝 삐뚤어진 시선으로 눈을 떴다. 옆에서 누군가가 받쳐주고 있었나? 잘 뜨이지도 않는 눈을 억지로 꿈뻑이며 고개를 돌리니 멀끔하게 차려입은 브래들리가 있었다. 뭐야, 이거 아직 꿈인가. 허니는 눈을 비비려다가 이내 화장했음을 깨닫고 두어번 더 눈을 깜빡였다. 눈이 아파? 브래들리의 목소리에 허니는 이게 꿈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니가 왜 여깄어?”
“애덤이 초대해서.”
“당연히 그랬겠지. 그거 말고, 왜 이 뒷마당에 있냐고.”
“….”


대답을 않는 브래들리에 허니는 입을 닫았다. 그러고 보니 제 무릎에 브래들리의 겉옷이 덮혀있었다. 게다가 어깨 한쪽이 눌려있는걸 보니 편히 잘 수 있었던 것도 브래들리 덕분인데 고맙다는 말은 커녕 왜 왔냐고 다그치기만 하는 제가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고마워, 덕분에 잘 잤어. 허니의 말에 브래들리가 씩 웃었다. 오늘 예쁘다, 허니. 브래들리의 말에 허니는 다시 술기운이 오르는 듯 얼굴에 열이 올랐다. 


“로켓! 어머, 허니씨도 있었네요! 이제 선언 하고 축사 시작한다는데, 같이 가요!”


갑자기 멀리서 손을 흔들며 오는 앨리에 허니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얼른 제 무릎에 올려진 옷을 주인에게 던지듯이 돌려주었다. 아, 앨리. 고마워요. 허니가 어색하게 웃으며 엉거주춤 일어나는 것을 보던 앨리는 빨리빨리, 좋은 자리 다 빠진다구요. 하며 허니와 브래들리에게 다가와 손을 이끌었다. 발랄하게 달려와 허니와 브래들리를 양 쪽에 끼고 종종 걸음으로 걷는 앨리에게서 브래들리와 비슷한 향이 났다. 

작은 체구에서 이런 힘이 어떻게 나오는건지 허니는 속절없이 앨리의 손에 끌려서 파티장으로 다시 돌아갔다. 앨리의 발걸음에 맞추다 보니 자꾸만 구두에 뒷꿈치가 쓸렸다. 오랜만에 신은 구두라는 걸 알려줬어야 했나. 허니는 즐겁게 흩날리는 브루넷의 머리칼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집 앞으로 가자 언제 이렇게 테이블 세팅이 다 되었는지, 하나 둘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저기 앞에 가서 앉자. 앨리는 브래들리를 이끌었고, 허니는 아, 저는 동생이랑 앉을게요. 하며 뒤에 자리한 범블을 가리켰다. 아, 그럴래요? 그럼 식 끝나고 다시 봐요. 아쉬운 듯 허니의 팔을 놓아주는 앨리의 말에 허니가 고개를 끄덕이고 범블의 옆자리에 가 앉았다.


“뭐냐? 앞에 안 앉아?”
“어.”
“브래들리 있어서 그렇지?”
“이 새끼는 너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 이름을 막 불러? 유교의 나라에서 와놓고는 싸가지가 없어.”
“지는. 너나 잘해.”


시끄러. 입 닫아. 허니는 옆에서 브래들리가 어쩌구 저쩌구 하며 꿍얼거리는 범블의 입을 제 손가락으로 틀어 막았다. 앞자리에 앉은 앨리와 브래들리의 뒷모습이 허니의 시선에 걸렸다. 서로 이야기를 하느라 마주한 시선에 따스함이 느껴졌다. 시리기만 한 줄 알았던 푸른 바다같은 눈에 온기가 담겨 있었다. 

허니는 괜스레 발 끝으로 땅을 툭툭 쳤다. 그 여파로 구두에 쓸린 뒷꿈치가 아려왔다. 허니가 인어라면 브래들리와 앨리는 자신을 구해준 왕자와 이웃나라 공주였다. 그 동화의 끝이 어땠더라. 인어가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던가, 아니면 인어가 왕자랑 결혼을 했던가. 허니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동화의 마지막을 떠올리려고 했다. 그렇지만 사실, 어느쪽이어도 상관이 없었다. 

허니는 브래들리라는 바다에 다시 뛰어들 수 없었고, 뛰어들 자신도 없었다. 자신은 동화속의 인어가 아니었고, 그는 더이상 허니만의 바다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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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꾸너붕붕 맞다... 왜이리 늘어지는지는 나도 몰라...
로켓너붕붕

읽어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