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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7 01:23
첫사랑과의 재회는 영화처럼 아름답지 않았고, 소설처럼 애틋하지 않았다.
2.
브래들리가 결혼을 했다. 허니는 자꾸만 떠오르는 브래들리와 앨리의 모습에 정신없이 차를 몰아 집에 도착했다. 어떻게 도착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멍한 표정으로 현관에 들어서자 늦은 시간까지 소파에 앉아 TV를 보던 미스터 비가 저녁은 먹었냐며 허니에게 말을 건넸다. 그제야 조금 정신을 차린 허니가 네. 먼저 올라갈게요. 하고 대답했다. 2층에 다다르자 1층에서 미스터 비가 방으로 들어가는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정신이 없어 연락을 못했던 허니의 귀가를 기다렸던 것 같았다. 내일은 연락을 미리 드려야겠다. 지쳐버린 허니는 바닥에 옷가지를 대충 던지고는 소파에 몸을 뉘였다.
소파에 누워 핸드폰의 홀드 버튼을 눌렀다 떼며 화면을 껐다가 켜길 반복하던 허니는 이내 자신이 무얼 망설였는지를 깨닫고는 핸드폰을 침대위로 던졌다. 비겁하게도 이제와서야 브래들리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그렇지만 허니는 SNS 계정도 없었을 뿐 더러, 번호도 자주 바꾸는 바람에 연락을 이어오는 사람은 손에 꼽았다. 브래들리와의 접점은 이미 진작에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냥 SNS좀 할 걸. 고향 친구들이랑 연락도 좀 하고. 아니, 하다못해 범블이랑은 계속 연락 할 걸. 그럼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을건데. 그럼 평생 죽을 때 까지 다신 집에 돌아오지 않았을건데.
하지만 이미 소용 없는 일이었다. 허니는 쉴 곳이 필요했고, 알고 있던 곳에선 쉴 수 없었다. 브래들리의 결혼 소식을 들었더라도 허니는 별 다른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
한동안 바깥 출입을 하지 않은 허니는 오히려 많은 것을 알아냈다. 이웃이자 동창인 수잔은 틈 날 때마다 허니의 집에 방문하여 지난 13년간의 공백을 어느정도 메꾸어 주었다. 얼마나 많은 동창들이 이 곳에 남아있고 떠났는지, 다들 무얼하고 사는지, 자신의 삶은 어떻게 흘러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두서없이 터져나왔다. 수잔은 정리가 되지 않는 말들과 주제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어느날인가부터 졸업앨범을 들고 왔다. 사실 얼굴이 가물가물 하여 제대로 맞장구 치기가 어려웠던 허니에게도 꽤나 괜찮은 방법이었다.
“어머, 허니 이거봐. 애슐리 이때는 젖살이 통통했네. 너무 귀엽다.”
“애슐리는 아직 이 동네에 살아?”
“아니, 진작에 나갔지. 학비만 모아서 바로 나갔어. 그래도 간간히 놀러는 왔었는데 몇 년 전에 부모님도 이혼하시고 동네를 떠나셔서 그런지 안본지 꽤 됐지. 어머, 그 옆에 애덤 좀 봐! 푸하하!”
깔깔 웃으며 애덤을 가리킨 수잔이 너무 웃겨서 눈물이 다 난다는 듯이 눈가를 훔쳤다. 허니, 애덤 기억나지? 왜~ 우리 집에 자주 놀러와서 맨날 그 치어리더부 리즈한테 까였다고 징징 거렸는데, 기억 안나? 지금 보니까 까일만 한데? 푸하하. 다시 한 번 배를 잡고 웃는 수잔에 허니는 곱슬머리에 중간정도 되는 주근깨 많은 얼굴을 떠올렸다. 그때 아마 울어서 코 끝이 빨갰나, 아니면 햇볕에 그을려서 그랬나. 허니는 머리를 긁적였다.
“얘는 그래서 지금 뭐하는데?”
“애덤? 뭐, 지금 일하고 있겠지?”
애덤은 궁금하지도 않다는 듯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앨범을 넘긴 수잔은 눈에 띄는 얼굴을 손가락으로 딱 가리켰다. 어머, 브래들리 봐. 이 때도 잘생겼네. 아직 앳된 얼굴의 브래들리는 지금 허니로선 상상이 되질 않는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맞다, 허니 너랑 브래들리랑 친했잖아.”
“…그랬나?”
“뭘 그랬나야-! 너 지금 도시 살다 왔다고 재는거야? 동네 미남은 이제 그저 그렇다 이거야? 브래들리는 아직 여기 사는데, 너 연락은 해봤어?”
“아….”
카페에서 만났다는 얘기를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는 사이에 수잔은 또 다시 무언가 떠오른 듯 연신 박수를 치며 옛 이야기를 술술 꺼냈다. 학교 다닐때, 너랑 브래들리랑 진짜 그때 아무일도 없었어? 브래들리랑 친하게 지낸 여자는 허니 뿐이었잖아. 그래서 허니 덕분에 브래들리랑 얘기도 좀 하고, 가끔이지만 최근까지도 얼굴도 보고 그랬는데. 물론, 그 싹바가지 몰리 기집애가 브래들리 좋아해서 너 괴롭혔지만. 아 맞다, 몰리! 그 기집애! 뒷장에 있나? 어딨어. 아, 여깄네. 요,요,요 기집애. 얘 결국에 너 대학 가고 나서 브래들리한테 들이댔다가 대차게 까이고 어디 동네 바깥에서 허우대 멀쩡해보이는 남자랑 결혼했거든. 아마 지금은 옆동네 살 걸?
수잔의 손 끝에 닿은 예쁘장한 여자의 얼굴을 보니 허니는 자신을 집요하게 괴롭히던 얼굴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져서 기분이 이상했다. 이게 추억보정인가? 나 괴롭혔던 그 얼굴은 기억도 안나고 그냥 되게 어리다. 허니의 맹한 말에 수잔이 허니의 팔뚝을 찰싹 때렸다.
“이게 또, 정신 못차리고! 실제로 보면 그런 말 쏙 들어간다, 너?”
은근히 매운 수잔의 손길에 허니는 인상을 찌푸리며 팔뚝을 쓱쓱 쓸었다. 너무도 익숙하고도 아득한 기분이었다.
**
학생의 본분이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라면, 허니는 그리 반듯한 학생은 아니었다. 어딘가에 속박되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해서 그런지, 자주 수업시간에 바깥에 나와 있었다. 가끔은 학교를 빼먹기도 했는데, 딱히 비행을 일삼는 일은 하지 않았다. 허니는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자신의 얼굴이 이럴 땐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날은 이상하게 날씨가 좋았다. 여름날이 언제나 그랬지만, 특히나 더 좋았다. 학교로 향하던 발걸음을 바닷가로 옮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가 각자의 일을 하러 떠난 작은 동네의 해변가는 모두가 볼 수 있는 허니만의 비밀 공간과 같았다. 백사장에 아무렇게나 책가방을 던진 허니는 티셔츠와 바지를 훌훌 벗고는 속옷 차림으로 바닷가에 뛰어들었다. 파도 위에서 허니는 자유를 알았다.
한참을 파도 위에 누워있던 허니는 조금은 파래진 입술로 다시 백사장으로 나왔다. 그리고, 제 옷가지와 가방 옆에 앉아있던 남자는 허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누구지? 의아한 얼굴을 한 허니는 남자에게 손 인사를 돌려주었다. 그러자 남자는 제 옆에 놓인 허니의 바지와 티셔츠를 양 손에 쥐고 흔들어댔다. 뭐하는거야? 깜짝 놀란 허니는 후다닥 뛰어 남자의 손에 나부끼는 제 옷을 낚아챘다.
“인어인 줄 알았네.”
“인어? 세이렌이 아니라?”
“노래는 못들어서 말야.”
남자는 어깨를 으쓱 하며 대답했다. 아, 맞다. 기다리는 동안 심심해서 네 책 좀 읽었어. 모래가 묻은 책을 들어보이는 남자에 허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땠어? 허니는 남자는 자리에 없는 양 낚아챈 티셔츠로 몸에 남은 물기들을 쓱쓱 닦아내며 물었다. 무슨 글자인지도 감도 안 잡히던데. 살면서 인어의 비밀 하나쯤은 알고 싶었는데 말야. 남자는 꽤나 아쉬운 듯 대답했다.
“일기장인거 알면서도 그걸 읽었어? 생긴거랑 다르게 음침한 구석이 있네, 너.”
“내가 여자애의 일기를 읽었다면 음침한거겠지만, 이건 인어의 비밀이 담긴 고대의 책인줄 알았다고.”
능글맞은 남자에 허니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바지를 입었다. 가방에 잘 넣어놔, 인어의 저주가 있기 전에. 대충 옷을 다 꿰어 입은 허니가 젖은 긴 머리를 꾹꾹 짜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 허니의 행동에 남자가 큭큭 웃으며 가방에 일기장을 넣어 들었다. 자, 여기. 허니에게 돌려주려는 듯 가방을 내밀었던 남자는 이내 다시 제 쪽으로 가방을 끌어당겼다. 그제야 허니는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이 곳에 살면서 푸른눈의 사람들은 많이 봤지만 이토록 시리도록 푸른 눈은 처음이었다.
“난 브래들리라고 하는데, 넌?”
“….”
“아무리 인어라도 이름은 있을 거 아냐?”
“허니 비.”
“좋네, 허니.”
오늘, 나랑 놀자. 브래들리는 씩 웃으며 허니에게 손을 내밀었다. 허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망설임 없이 그 손을 잡았다.
**
브래들리와 허니가 친해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허니는 자유를 갈망했고, 브래들리는 그 자유를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많은 것은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학교를 빠지고 우연히 만나야만 이어졌다. 어느날은 동네의 얕은 언덕이었고, 어느날은 공원의 한 구석이었고, 어느날은 브래들리의 다락방이기도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 같은 학교에 다닌 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복도 캐비넷 앞에서 마주쳤을때였다. 그 날 이후로 둘의 대화는 끊이질 않았다.
학교 생활에 큰 관심이 없던 허니는 브래들리가 학교에서 잘생긴 얼굴로 유명했다는 사실을 제 옆에 앉은 수잔 덕분에 알게 되었다. 쟤가 그렇게 유명해? 갑자기 학교에 있는지도 몰랐던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도 모를 여자애를 학교에서 얼굴로 유명한 남자애가 와서 친한척을 하게 되면 갖가지 부작용이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그 때 부터 허니의 캐비넷엔 온갖 저주가 담긴 편지가 쏟아져 내렸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 곳은 허니의 발을 묶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으니까.
허니는 가끔씩 자신의 욕이 한가득 담긴 편지를 브래들리에게 전해주곤 했는데, 브래들리가 미안해하는 모습이 꽤나 웃겼기 때문이었다. 너, 하나도 안 미안한 얼굴로 미안한 목소리만 내면 다야? 허니의 말에 브래들리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웃음을 참고 있는것이 분명했다.
“이거 봐, 나보고 까만 머리에 찢어진 눈의 마녀야 당장 브래들리 옆에서 떨어지래.”
“쟤들이 뭘 모르네. 넌 마녀가 아니라 인어잖아.”
“…이 편지 니가 쓴거지? 너 글씨 써봐. 흘려서 한번 써봐.”
허니의 성화에 브래들리가 큭큭 웃으며 턴테이블의 바늘을 올렸다. 좁은 다락방에 잔잔한 재즈의 선율이 가득 찼다. 다락방 한켠에 가득한 LP판은 대체로 브래들리의 아버지의 취미였다고 했다. 허니는 본 적도 없는 브래들리의 아버지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이런 음악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분명히 멋있을거야. 허니의 말에 브래들리는 그냥 웃었다.
누워서 다락방의 천장을 바라보던 허니가 자세를 틀어 브래들리를 향했다. 한 20년 뒤에 우리는 뭐 하고 있을까? 허니의 말에 브래들리도 자세를 고쳐 허니를 바라보며 누웠다. 20년? 너무 먼 얘기 아니야?
“그러니까 생각해보자는거지. 그 때면 난 아마- 꽤나 멋진 커리어 우먼이지 않을까?”
“그래? 넌 그 쯤이면 다시 바다로 돌아가야하는거 아냐? 인어가 그렇게 오래 뭍에서 살아도 돼?”
“우씨, 진지하게 생각 안해?”
주먹을 들어보이는 허니에 브래들리가 큭큭 웃으며 제 손으로 허니의 주먹을 덮어 쥐었다. 음, 나는 아마 지금처럼 너랑 잘 지내면서 이렇게 노래도 듣고 바다로 수영도 다니고 그러지 않을까? 아마 애도 한 둘 있을거야. 아니면 너한테 홀려서 결국엔 바다에 뛰어들지도 모르지.
아니, 넌 절대로 바다에 뛰어들 수 없지. 네가 바다인데. 내가 너한테 뛰어들면 모를까. 허니는 차마 전하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켰다. 마주한 브래들리의 푸르른 눈이 한층 더 깊어졌다.
*
노을이 지는 바닷가는 붉은 태양을 삼키느라 자신마저 붉게 물들였다. 어린시절처럼 바다속으로 뛰어들기엔 허니는 너무 어른이었다. 가만히 모래를 쓸어가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앉아있으니 옛날 생각이 새록새록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집으로 돌아오지 말걸. 그냥 또 다른 새로운 곳에서 시작할걸. 나는 무슨 생각으로 이 곳으로 다시 돌아온걸까.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물어도 나오질 않는 답이었다.
붉은 해를 다 삼키고 난 바다는 속이 다 타버린 것인지 새까맣게 변해버렸다. 아무리 여름이라도 얇은 옷으로 오랜시간 바닷가에 앉아 있기엔 꽤나 싸늘했다. 시간이 꽤 지났음을 깨달은 허니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차를 세워둔 곳 까지는 거리가 꽤 됐다. 발걸음에 맞춰 파도소리가 천천히 닿았다가 멀어졌다를 반복했다.
허니의 차가 가까워지니 누군가가 그 옆에 서 있는것이 보였다. 키나 덩치로 봐서는 수잔은 아닌게 분명했다. 범블인가. 빛이 드물어 살짝 인상을 쓰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차로 다가가니 무슨 표정인지 모를 브래들리가 서있었다.
“….”
“….”
친했던 그 때에 늘 그랬듯, 둘은 아무말도 없이 서로를 마주했다. 달빛에 비춘 브래들리의 눈은 바다와 똑같이 어두웠다. 아니, 더 파랬던가. 허니는 그제야 자신이 왜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는지를 깨달았다.
뭍에 나온 인어가 시리도록 푸른 바다를 그리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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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꾸너붕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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