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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6 21:27
1편


*

 

“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톰 카잔스키 시니어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찻잔은 이미 오래 전에 식었지만 아무도 입을 대지 않아 그대로였다. 리처는 몽고메리를 데리고 저택에 들어왔던 날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태도로 찻잔에 담긴 스푼을 빙글빙글 돌렸다.

 

“결정하는 건 접니다.”
 

“몽고메리는 제 동생입니다.”
 

“10년간 얼굴 본 적 없는 동생 아닙니까.”

 

몽고메리는 10년 전 박사 과정 중 훌쩍 떠났다. 주변인들의 말로는 지도교수를 따라 갔다던데, 어딜 뭐하러 간건지는 아무도 몰랐다. 동생의 흔적을 쫓는 사이 시니어는 서너 살 먹은 아이를 둔 채 이혼을 했으며 망명자인 클라우스 대령의 거취를 떠맡았다.
 

연락이 온 건 겨우 몇 년 전이다. 일방적인 전화였다. 묻고 싶었던 말을 한꺼번에 쏟아냈지만 제대로 돌아온 말이라곤 주소 하나였다. 그는 동생의 존재를 인지하던 순간부터 언제나 동생에게 물렀다. 요구한 대로 음식이나 실험 장비를 주소로 보내는 일이 몇 달에 한 번씩 이어졌다. 그나마도 해를 거듭하며 점점 양이 줄었다. 주소로 가 본 적도 있으나 선착장 가까이에 있던 집은 사람이 드나든 흔적만 있었다. 무슨 일이냐는 거듭된 질문에도 몽고메리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편지에 답장이 오는 일도 없었다.
 

시니어는 늘 몽고메리가 먼저 전화를 끊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걸 끊으면 앞으로 몽고메리를 영영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동생과 알게 된 지 겨우 몇년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당신만큼은 모르겠지만, 당신이 모르는 부분은 압니다.”

 

리처는 높낮이도 억양도 없이 말했다. 사람의 몸에 남은 버릇에서 행적을 읽기 마련인데 이 남자에게선 도무지 찾을 실마리가 없다. 시니어는 그가 스스로를 잭 리처라고 소개한 뒤로 몇 군데 연락을 넣었지만 수확은 없었다. 문서로만 남은 군 기록과 이어지지 않는 사건들이 리처를 설명하는 전부였다. 시니어가 명백하게 아는 사실은 겨우 몇 주 전 의식불명의 몽고메리를 데리고 무작정 저택으로 찾아왔다는 것 뿐이다. 리처는 연락도 없이 저택을 나갔다 들어오고 저택에 있는 대부분의 시간은 몽고메리의 곁에서 보냈다. 차려둔 식사도 마다했고 내준 옷도 입지 않았다. 마치 자신만의 규칙에 얽매여 사는 사람처럼 보였다.

 

“평생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알고 온 겁니다.”
 

“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제 동생이랑 무슨 사이길래…….”

 

리처는 얼굴을 감싸며 무너지는 시니어를 가만히 지켜봤다.
 

사람들은 리처에게 말수가 적다고 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할 필요 없는 말을 삼키다보면 할 수 있는 말이 고작이라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고, 리처는 언젠가 말했었다. 몽고메리는 그 말을 듣고 기분이 괜찮아보였다.

 

“당신 말은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서 좋네요.”
 

“시비 거는 거야?”
 

“사람들이 숨긴 말뜻을 파악하는 건 너무 힘들다구요.”
 

“니가 무신경한 사람이라 그런 거겠지.”
 

그럴 지도. 몽고메리는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고개를 돌리는 옆얼굴이 좀 쓸쓸해 리처는 개를 걷어찬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상처 주려던 건 아니었어. 그렇게 말해야 했었는데 하지 못했다. 리처가 드물게 후회하는 일 중 하나였다.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아무 사이도 아닌데 왜-”
 

“무슨 사이인지 알아야겠어서 말입니다.”

 

시니어가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 리처는 스푼을 찻잔 옆에 내려놨다. 지독하리만치 확고한 눈빛이다. 시니어는 이런 눈을 한 사람을 한 명 안다. 그 남자에게 이긴 적이 없었다. 그러니 리처에게도 어떤 회유나 협박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걸 깨닫자 얕은 한숨이 나온다. 리처는 그게 결론이라는 양 자리에서 일어나 몽고메리가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




 

터너가 구해다준 장비는 리처에게 익숙했다. 아주 예전의 일이다. 꿈을 꾸는 동안 무의식에 침투해 개념을 심는다는 말은 CIA에서 진행하던 어느 세뇌 실험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결과적으로 실험은 흐지부지되고 남은 자료들이 전부 사물함 한 칸에 처박혔다는 사실도 비슷했다. 리처가 실험을 기억하고 있는 건 그도 참여자 중 하나였다는 단순한 이유다. 거기서 무엇을 심었는지 리처는 아직도 알 수 없다. 무의식이란 본래 그랬다. 외부의 자극과 내면의 신념은 뿌리처럼 뒤엉켜 근간을 찾기 어려울 거라고, 실험에 참가하면서부터 인지한 사실이다.
 

리처는 실패한 실험체라는 처지에 순응했다. 규칙 몇 가지를 무시하고 스스로만 믿는 삶이 실험에 산물인지 본인의 선택인지 헤아려 본 적도 없다. 유령처럼 사는 건 나쁘지 않았다. 그는 본디 고독한 인간이었다. 몽고메리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부정하려 들겠지만 리처가 관찰한 몽고메리는 늘 타인에 굶주렸다. 사랑, 관심, 경계, 힐난, 혐오, 시선의 따스함에 관계없이 그저 뭐든 받고 싶어 못 견뎌했다. 뻔히 맞을 걸 알면서도 선넘는 말을 던졌고 싫어할 법한 행동을 골라 했다. 그건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다리를 걷어차는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리처는 몇 번 욕지거리와 주먹으로 반응하다, 결국 가장 좋은 방법은 무시하는 것이라 결론지었다. 놀랍게도 처음엔 효과가 좋았다. 일부러 상처를 꾹꾹 눌러도 인상만 쓸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몽고메리는 적잖이 당황하기까지 했다. 뒤이어 씩씩대며 혼자 방을 빙글빙글 돌아다니다 결국 얌전히 앉아 마저 드레싱을 했다. 리처는 속으로 같잖다고 생각했다.
 

그런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건 얼마 가지 못했다. 몽고메리는 리처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미친놈이었다. 커피를 받아 마시던 리처를 보고 히죽히죽 웃길래 또 아침부터 약이나 빨았나, 그런 생각이나 했다. 얼마 되지 않아 몸이 좀 나른해졌고 그때야 이 미친놈이 커피에 약을 탄 걸 알았다. 리처가 굳어오는 입으로 욕을 씹자 몽고메리는 또 무어라 중얼중얼 거리며 리처를 부축해 소파에 뉘였다.

 

“내 몸에 허튼 짓 하면 죽여 버린다.”
 

“그러시던가요.”

 

리처는 아득해지는 시야 너머로 몽고메리가 말한 수인 연구 따위를 떠올리며 기절했다.
 

깨어난 리처의 품에 몽고메리가 안겨 있었다. 좁아터진 소파에 몸을 잔뜩 구긴 채였다. 리처는 몽롱한 정신으로 제 얼굴과 몸을 더듬었지만 어떤 생채기도 없었다. 그게 다였다. 영락없이 동물 따위로 개조될 줄 알았건만 겨우 뒤엉켜 자는 거라니.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놈이었다.
 

갈비뼈가 부러질만큼 얻어맞은 뒤로도 몽고메리는 리처가 눈을 붙이기만 하면 품을 파고들었다. 얕은 잠이 버릇된 리처는 몸이 가깝게 닿을 때면 그를 밀쳐버렸지만 그것도 한두번이었다. 정말 잠만 잔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론 그냥 내버려뒀다. 아마 리처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믿지 못할 사실이겠지만 리처는 그러기로 했다.

 

“니가 애냐.”
 

“적절한 온기는 수면을 유도하거든요. 책도 안 읽었어요?”
 

“말이나 못하면.”

 

기나긴 유령 생활 중 누군가와 살결을 맞대고 자는 건 너무 어색해 한동안 잠을 설쳤다. 그럴 때마다 리처는 홀로 깨 제 품에 웅크린 몽고메리의 얼굴을 봤다. 왜 몽고메리에게만 유독 나약하게 구는지 알 수 없어 이유라도 찾고 싶었다. 나른한 표정은 여전했고 혼자 자른 것 같은 머리칼이나 얼룩덜룩하게 탄 목덜미도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나마 봐줄 만 한 건 잠들어 있는 동안엔 입은 다문다는 거다. 그 꼴이 얌전해 자기도 모르게 머리칼을 쓸었다. 손끝에 커다란 흉터가 만져졌다. 일자로 죽 뻗은 모양이 영락없는 수술 자국이라 기분만 심란해졌다.





*



 

 

톰 카잔스키 시니어가 내준 방은 너무 크고 넓었다. 그래서인지 웅크린 채 잠든 몸이 작고 외로워보였다. 리처는 그 언젠가처럼 몽고메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새 손가락 사이에 걸릴 만큼 길게 자랐다. 여전히 흉터가 만져졌다. 언제 어떻게의 일인지 물어본 적이 없어 짚을만한 이유도 없었다. 어쩌면 이제 알게 되겠지. 그는 익숙하게 기계를 꺼내 연결하고, 잠시 망설이다 몽고메리를 바라보며 곁에 누웠다. 리처가 먼저 얼굴을 맞대고 누운 건 처음이다. 아마 몽고메리가 봤더라면 감추지도 못하고 웃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리처는 몽고메리의 무의식으로 향했다.





*




 

무의식의 산물은 대부분 기억에 근거했다. 몽고메리가 만든 세상 역시 과거의 흔적이어야 했다. 리처가 과거에 대해 이야기해주지 않은 만큼 몽고메리도 제 과거를 단절된 문장으로만 말했다. 그의 성이 카잔스키라는 사실도 멋대로 문서를 뒤져 알아낸 것이다. 솔직히 느닷없이 펼쳐진 병동에 리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리처의 혼란스러움과 아무 관계 없이 몽고메리는 이곳을 제 집처럼 대했다. 모든 행동이 몸에 익은 듯 익숙했다. 그는 유일한 변수인 리처를 혼잣말을 할 쓰레기통 정도로 여겼다. 이 벤치는 오후 2시부터 햇볕이 잘 들어요, 가끔 운이 좋으면 여기서 비행기를 볼 수도 있고요. 3층에 약 제조실이랑 치료실이 있고. 수요일마다 요거트가 나오니까 식당에 빨리 가야 해요. 아니면 못 받아서.
 

리처는 ‘그래’나 ‘응’ 정도로만 대꾸했다. 몽고메리의 말과 행동이 앳되 보여 마음이 영 복잡했다. 하루이틀 지낸 정도로 알만한 사실들이 아니라 더 그랬다. 적어도 몇 개월은, 어쩌면 몇 년일지도. 대체 어떤 과거가 무의식을 병동 위에 세운 건지 리처는 짐작할 수도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몽고메리는 어느 때처럼 로비에 머무르며 멍한 눈으로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었다.

 

…트라우마로 무장된 방어기제는 여러분의 생각보다 강합니다. 일종의 근간이라 설명할 수 있겠네요. 다시말해 그 사람이 자란 뿌리라 완전히 떼어낼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트라우마를 깨부수려면 당사자를 부정해야 한다는 기묘한 이중성이 생기지요. 이 때문에 실험은 종료되었습니다. 당사자를 깨부순 뒤에 무언가를 심어봤자, 현실의 당사자는 빈 껍데기가 되어 있을 테니까요…

 

“너 뭐 더 기억나는 거 없냐.”
 

“아 없다니까 그러네.”

 

터너는 무의식을 깊게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 잠에 든 상태로도 실패한 실험인데, 의식불명이면 더 심할 겁니다. 까딱하면 선배도 평생 못 일어날 수 있어요. 하지만 터너는 잭 리처가 타고난 반동분자이자 실험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이리저리 쑤셔본 것만으론 알 수 있는 게 부족해 리처는 가장 빠른 길을 택했다.

 

“네 성은 카잔스키야. 더 기억해봐.”

 

그 말에 몽고메리와 리처만 둔 채 세상이 잠깐 멈췄다.

 

“…형이 있어요.”
 

“형?”
 

“형이 오늘 온다고 했어요.”

 

말을 마치자 주위가 빙글빙글 돌았다. 창 밖에 날씨가 시시각각 바뀌더니 이내 비가 심하게 쏟아졌다. 로비를 배회하던 환자들은 어느새 자리에 앉아 환자복을 입지 않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했다. 그들의 맞은편에도 누군가 앉았다. 우산이 별 소용이 없었는지 어깨와 종아리가 흠뻑 젖은 채였다.
 

몽고메리의 무의식 속 톰 카잔스키 시니어는 리처가 본 얼굴보다 훨씬 어렸다. 리처는 코트깃 사이의 제복을 보고 저택에 있던 해군사관학교 사진들을 떠올렸다. 그 즈음의 기억이겠거니 한다.
 

리처는 일부러 한 발 물러나 둘을 구경했다. 둘의 말투는 리처가 기억하는 것보다 다정했다. 그들은 얕게 키들거리기도, 어떤 말은 조금 울먹였고, 부서질 것처럼 서로의 손을 꽉 붙들었다. 뺨을 쓰다듬는 형의 표정과 손길을 가만히 받아내는 동생은 절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리처는 착잡하게 입술을 쓸었다. 어떤 사건이 지금의 몽고메리와 시니어를 만든 건지 몰라 가슴이 서늘했다.

 

“형한테 뭘 준 거야?”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시니어와 대화한 몽고메리의 표정이 조금 들떠 보였다.

 

“약이요.”
 

“버렸다며.”
 

“훔쳤죠. 무슨 약인지도 다 아는데.”
 

“그걸로 뭐 하려고.”

 

몽고메리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리처가 가끔 약속하지도 않은 날짜에 돌아오면 짓는 미소였다. 제가 웃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한쪽 귀퉁이가 삐걱대는 모양이 그때와 같았다. 그 표정이 사그라들기도 전에 몽고메리의 뒤로 커다란 달력이 하나 생겼다. 무의식의 시간대는 마지막 주 목요일에 빨간 동그라미를 그렸다.

 

“형이 절 구할 거에요.”







*




터너가 말하는 장비는 모두가 아는 그 영화 모티브.

리처몽고메리리처
약 시니어슈슈시니어
아이스매브아이스 크오


다음편
2023.04.06 21:3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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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의 공감하는듯 덤덤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몽고메리가 너무 외로워 보인다 ㅠㅠㅠㅠㅠㅠ서로에겐 서로가 진짜 꼭 필요할것같아 ㅠㅠㅠㅠㅠ
[Code: fcf3]
2023.04.06 21:4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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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한데 뭔가 뜨거운 느낌? ㅠㅠㅠ말로 표현이 안되는데 그저 분위기가 미쳤어요 ㅠㅠㅠㅠㅠㅠㅠ 제발..센세 제발 억나더 ㅠㅠㅠㅠㅠ
[Code: a544]
2023.04.06 22:0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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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제발 이대로 가시면 안되는거 아시죠? ㅠㅠ 진짜 몽고메리리처 서로가 절실하다ㅠ
[Code: 752c]
2023.04.06 22:1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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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속에 형이랑은 왤케 애절하냐 몬티야ㅠㅠㅠ 형이 구해줄거래ㅠㅠㅠㅠ 얼른일어나ㅠㅠㅠ
[Code: 1bf9]
2023.04.07 08:0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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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티야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분위기 진짜 미쳤어
[Code: da0a]
2023.04.08 12:1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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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 편 보는 것 같이 생생하게 장면들이 눈앞에 그려진다ㅜㅜ 리처센세 제발 메리 구해주세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도 알려주세요 센세ㅜㅜ
[Code: 8b57]
2023.04.08 19:3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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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숨도 못쉬고 읽었네 센세 이거 꼭 영화로 만들어주세요ㅜㅜ
[Code: dee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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