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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3 23:44
뇌를 후벼파는 두통과 함께 잠에서 깬다. 눈과 뇌를 잇는 뼈 부분이 시큰거리며 아팠다. 마지막 기억이 애매하다. 그는 낑낑대며 머리를 감싼 채 뭐든 떠올리려 했다. 눈물 나는 고통 끝에 그는 제 이름을 기억해냈다. 몽고메리. 그리고, 성은 뭐였지?

나이, 직업, 주소, 날짜, 뇌손상이 의심되는 환자에게 할 법한 질문을 던졌지만 제대로 말할 수 있는 게 없다. 이윽고 앉아 있다는 당연한 사실만 깨닫자 사람보다 뼈와 살로 빚어진 덩어리가 된 기분이었다. 다소 비참하고 치욕스러웠다.

대답할 수 없는 걸 죄다 외면하고 주위나 살폈다. 칙칙한 형광등 몇 개가 공간을 비춘다. 옅은 파스텔 톤의 벽에 몸을 지탱할 손잡이들이 길게 붙었고 액자나 식물따위도 없이 온 풍경이 삭막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무언가 쓰거나 읽거나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알아듣지 못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사람도 있었고 더러는 손에 말랑한 장난감 따위를 든 채 멍청하게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단추나 지퍼가 없고 고무줄이 헐렁한 환자복 같은 걸 입고 있었다. 놀랍게도 몽고메리도 같은 꼴이었다.

그걸 깨닫자 몸이 좀 굳었다. 긴장한 채 주위를 따라 눈을 굴리는데 옆에 누가 앉아 있었다.


“섬 같은데서 왕국 하나 만들어 놓을 줄 알았는데.”


말을 거는 행동이 너무 당연해서 몽고메리는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가죽 재킷에 푸른색 캡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방을 채운 환자나 복도에 선 가드 중 어떤 카테고리에도 들어가지 않는 모습이다. 남자는 이 공간에 뚝 떨어진 이물질같았는데 그런 것 치곤 주변의 누구도 남자를 제지하지 않았다. 오직 몽고메리만 기묘하게 꺼끌거리는 위화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저 아세요?”

“몽고메리.”


남자는 스스럼없이 손을 들어 몽고메리의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툭 쳤다. 퍼스널 스페이스 따위를 좆까는 대담한 행동에 절로 불쾌해졌다.


“저랑 아는 사이냐고요.”

“잘 안다고 생각했지.”

“왜 말 걸어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자는 전혀 상처받지 않은 얼굴이다. 저 얼굴에서 다른 감정을 읽을 수나 싶을만큼 건조했다. 어쩐지 그게 배알꼴렸다. 몽고메리는 대놓고 남자를 무시한 채 텔레비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촌스러운 세트장을 배경으로 한 토크쇼가 나오고 있었다.


…맞습니다, 원래는 군사 목적으로 사용하던 기계였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무의식 속에 중요한 요소를 심는다면, 그걸 외부의 자극이 아닌 제 자신의 것이라 여기는 법입니다. 그게 500장 짜리 전투기 교본이라면 현실에서 힘들게 공부할 필요도 없이 체득하게 되는 겁니다…


“널 데리러 왔어.”


남자는 표정만큼이나 단조로운 목소리로 툭 말했다. 명찰을 건드리듯 가볍지만 군더더기없이 담백하게, 마치 이렇게만 말해온 사람처럼.


“그럼 데려가줘요.”

“여긴 네가 왔잖아. 떠나는 것도 너만 할 수 있어.”

“멍멍.”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대화가 익숙하다는 듯 남자는 말한다.


“그래, 개소리같겠지.”


그런 뜻인건 또 어떻게 알았지. 몽고메리는 남자가 좀 궁금해졌다. 아쉽게도 그는 명찰을 달고 있지 않아 보이는 부분으로만 추론해야 했다. 모자 아래로 비죽 나온 머리칼은 까맣고 짧았다. 가죽 재킷이 팽팽하게 감싼 어깨는 근육으로 단단히 빚은 것 같았고 손가락은 군데군데 흉이 졌다. 손을 많이, 그것도 험하게 쓰는 직업일테지. 군복을 입은 모습을 떠올렸는데 이상하게 어울리듯 어울리지 않았다. 몽고메리는 몇 가지 몸을 쓰는 직업을 세며 남자에게 옷을 입혀봤지만 도무지 잘 맞는 게 없었다. 마치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유령 같았다.


미간을 찡그린 채 위아래를 훑자 남자는 시선을 온전히 받아냈다. 이건 더 이상했다. 몽고메리가 마주하는 사람들은 이 정도 응시하면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돌리는데 남자는 그게 하루의 일과인 마냥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누군데요.”

“알고 있잖아.”

“기억 안나는데요.”

“거 봐.”


남자는 그제야 희미하게 웃었다. 웃을 줄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는데 제법 잘 어울렸다.


“모르는 게 아니라 기억나지 않는 거잖아.”







*






정신병동,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왜 하필 이런 곳에 있냐는 질문에 몽고메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스스로도 왜 여기 있는지 몰랐다. 거기엔 어떻게 왔는지 모른다는 말도 있었다. 건물이 있으면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이 있을 텐데 그냥 뚝 떨어진 것처럼 기억이 끊겼다.

제 성도, 이유도, 아직까지 오늘 날짜도 모르는 것 치곤 몽고메리는 체계에 꽤 순응적으로 굴었다. 비슷한 시간에 일어났고 오후엔 정원에서 볕을 쬐고 가끔 의사에게 불려가 이런저런 말들을 들었다. 대부분 기분에 관한 것이었다. 몽고메리는 모든 질문에 잘 모르겠다는 애매한 말만 했는데 의사는 그게 당연하다는 듯 차트에 글을 몇 줄 쓰고 말았다. 두어 문장정도만 이어지는 말들을 상담으로 부를 수 있겠냐마는, 의사는 늘 이번 상담은 여기까지만 하자는 말로 몽고메리를 내보냈다. 그리고 다시 식사, 산책, 약을 먹고, 로비에 앉아 멍청하게 텔레비전을 보는 일상. 텔레비전에서는 늘 같은 토크쇼가 나왔다.


…하지만 피험자 중 몇몇의 무의식은 상당히 강한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큰 사고나 어린 시절의 학대같은 트라우마가 원인입니다. 그런 피험자의 무의식을 파고드는 방법은 둘 중 하나입니다. 트라우마를 자극하지 않는 수준의 얕은 요소만 심거나, 아예 트라우마라는 방어기제를 깨부수거나…


남자는 몽고메리의 일상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상담을 받는 의사 곁에 팔짱을 끼고 서 있거나 산책을 하는 몽고메리 뒤를 천천히 따라 걸었다. 아무도 그를 신경쓰지 않는다는 점이 이상했지만 몽고메리는 이 비이성적인 병동에 순응하듯 남자의 존재에도 익숙해졌다.

그렇다고 그가 편한 상대라는 건 아니었다. 견디다 못한 몽고메리는 그의 이름과 나이를 비롯한 몇 가지 상식적인 질문이란 걸 하긴 했다. 얼마 가지는 못했다. 남자의 모든 대답은 몽고메리가 무언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전제했다. 그게 말이 되나 싶었다. 몽고메리는 여전히 아무것도 몰랐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요?”

“네가 들여보내 줬으니까.”

“또 개소리네.”


1인실 병동 안에서 남자는 몽고메리가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자는 모습을 훤히 내보였단 사실에 울컥 화가 치솟았다. 몽고메리는 화풀이를 하듯 남자를 지나쳐 약봉투를 집어들었다.


“그건 뭐야.”

“보면 몰라요? 약이에요.”

“왜 먹는데?”


몽고메리는 대답 대신 손바닥에 약을 올려 수를 셌다. 하얗고 납작한 약들 일고여덟 개가 손바닥을 굴렀다.


“왜 먹는지 아냐고.”

“아프니까 먹겠죠.”


짜증스러운 대꾸에도 흔들림이 없다. 그는 침묵을 지키며 몽고메리의 눈을 똑바로 마주봤다. 초록색 눈 가운데에 피어난 해바라기가 묘하게 집요하고… 슬펐다. 몽고메리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이건 정신신경용제에요. 신경에 전달되는 양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죠. 항우울제라고 생각하면 되고요. 이 조그만 건 안정제랑 수면제고, 역할은 어지간하게 멍청하지 않는 이상 말 안해도 알거라 믿어요. 이건 비타민 결핍이랑 관련된 거고. 이 길쭉한 건 진통제.”

“잘 아네.”

“의사니까요.”


몽고메리는 말을 하다 잠깐 멈췄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는 의사였다. 남이 열어주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좁은 방에 앉아 약이나 세고 있는 의사. 대체 언제부터? 머리가 다시 아팠다.

남자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몽고메리는 기세에 눌려 얌전히 약을 내줬다.


“내가 너라면 안 먹을 거야.”

“당신이 뭔데요.”

“말했잖아. 널 데리고 가고 싶은 사람이라고.”

“그게 약 안 먹는 거랑 무슨 상관이냐구요.”


남자는 뒷말 없이 문을 열고 성큼성큼 나가버렸다. 몽고메리는 멍청하게 서 있다, 황급히 닫힌 문을 당겼다. 문은 밖에서 잠겨 열 수 없었다. 괜히 몇 번 쾅쾅 쳤으나 돌아오는 건 조용히 하라는 가드의 말 뿐이었다.






*






그날 밤 몽고메리는 남은 약을 창문 밖으로 몽땅 버렸다. 남자의 말을 따르는 것 같아 좀 짜증났지만, 약이 컴컴한 밤공기를 헤치며 떨어지는 모습은 꽤 보기 좋았다.

기묘하게 말짱해진 머리는 아주 오랜만에 꿈을 꿨다. 꿈 속에서 몽고메리는 모기에게 목덜미를 훤히 뜯기며 비가 오는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 우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곳이었다. 근처에 물이 있는지 사방이 습기 때문에 축축하고 불쾌했다. 어쩐지 거기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





모티브는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 영화에서 따옴
다음편

리처몽고메리리처
아이스매브아이스 크오
2023.04.05 15:13
ㅇㅇ
분위기 미쳤다ㅠㅠㅠㅠㅠㅠㅠ 센세 어나더로 돌아오실 거죠 기다릴게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a739]
2023.04.06 09:25
ㅇㅇ
모바일
미쳤다 센세ㅜㅜㅜㅜㅜㅜㅜㅜ유령처럼 홀연히 나타나서 수수께끼같은 말만 툭툭 시니컬하게 던지는게 진짜 원작리처같고 존좋이야ㅜㅜㅜㅜㅜ제발 어나더로 돌아와줘
[Code: edf6]
2023.04.06 19:30
ㅇㅇ
모바일
미치따 미치따 분의기 뭔데 메리 왜 거기있냐
[Code: 2ce3]
2023.04.06 21:40
ㅇㅇ
모바일
대작..대작이다..이.분위기 뭐야...ㅠㅠㅠ
[Code: a544]
2023.04.07 20:37
ㅇㅇ
헐 센세 혹시 모티브 무슨 영화인지 알수 잇을까오..
[Code: 9103]
2023.04.07 20:37
ㅇㅇ
분위기 미쳤다ㅠㅠ
[Code: 9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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