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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9 04:46
토끼 이누이 주운 가루베
이어지는 세계관
(읽어두면 좋지만 안 읽어도 이해하는 데 크게 지장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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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친 덴 좀 어떠세요.”
쿄스케가 눈동자를 도륵도륵 굴렸다. 어쩐지 요스케를 바로 보기 힘들었다. 어른들의 발치에서 꼬물거리며 혼자 신발을 벗고 정리한 마유가 찹찹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튤립반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 쿄스케는 먼 산만 바라볼 뿐이었다.
“괘, 괜찮아요. 그렇게 심하게 다친 것도 아니고...”
“병원에 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던데요.”
“이 정도는 금방 나을 거예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쿄스케가 꼬물거리는 손놀림으로 앞치마를 만지작거렸다. 수순처럼 찾아온 적막이 꼭 어젯밤 같아 견디기 힘들었다. 요스케를 보면 그때의 손길이 떠올라 자꾸만 열이 올랐다. 괜히 힐끔거리며 문밖만 쳐다봤다. 한시라도 빨리 등원 버스가 도착했으면 좋겠는데, 아이들의 목소리는커녕 바퀴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저기.”
나지막한 요스케의 목소리에 쿄스케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마주한 시선이 어쩐지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어제는 미안합니다. 많이 놀라셨을 것 같은데.”
요스케의 말에 쿄스케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손사래를 쳤다.
“아뇨, 사과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 그거는 그냥... 그냥 실수였던 거잖아요. 그렇죠?”
“...아닙니다.”
“네?”
“실수, 아니라고요.”
쿄스케가 허공에서 흔들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마주한 눈이, 역시 평소와 달랐다.
“실수는 아니지만, 놀라게 한 건 사실이니까요. 그래서 사과한 겁니다. 실수라서 사과한 게 아니라.”
“아, 저기...”
“실수라고 생각하셨다면 좀 슬프네요. 제가 그렇게 가벼운 사람으로 보였나 싶어서.”
“그게 아니라...!”
문밖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내내 기다리던 등원 버스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요스케는 현관으로 달려오는 아이들을 보고선 몸을 뒤로 무르며 이만 가 보겠다고 말했다. 쿄스케는 아이들로 인해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 유치원을 나서는 요스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참으려고 해도 한숨이 푹푹 나왔다.
-
아슬아슬했던 그날 이후로도 두 사람의 관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쿄스케는 요스케를 볼 때마다 그 밤의 차 안에서 느꼈던 요스케의 손길과 숨결이 떠올라 때때로 혼자 몸을 흠칫 떨었지만, 쿄스케의 눈에 요스케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게 조금 밉다가도, 미워할 수 있는 처지인가 싶어 어떻게든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요스케는 그날의 일이 실수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일은 없었다. 어쩌면 실수가 아니기 때문에 더 조심하는 걸지도 몰랐다. 요스케는 다정한 사람이니까. 그래서 늘 질질 끌려다니고 있는 거라고.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고, 쿄스케는 생각했다. 가끔은 그날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때는 놀라지도 도망치지도 않을 거라고.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저 단순히 요스케가 이상형이라서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그를 좋아해서, 그래서 신경을 쓰고 있는 거라는 걸.
쿄스케는 이런 마음이 낯설었다. 숙제를 해치우듯 했던 첫사랑도, 사춘기 시절 친구들을 따라 해 본 짝사랑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그건 그저 남들이 다 하니까, 나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렇게 어중간한 마음으로 사랑도 아닌 무언가를 했을 뿐이었다. 그런 날들을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 없었는데. 사랑에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걸 쿄스케는 요스케를 만난 뒤에야 깨달았다.
종종 운전을 하는 요스케의 옆모습을 힐끔거렸다. 그럴 때마다 요스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실수가 아니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한 번도 그런 의문을 드러내 본 적 없었다.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다가가기에는 신경이 쓰이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특히 마유의 생각을 자주 했다. 맑게 웃는 얼굴로 선생님이 제일 좋다고 말하는 마유를 떠올릴 때마다, 이 관계에 변화가 생겼을 때 마유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이 됐다. 우리 쿄스케는 아빠 닮아서 겁이 너무 많아. 언젠가 이누이가 했던 말이 이 상황을 설명해 주는 것 같다고, 쿄스케는 생각했다.
그렇게 애매한 관계 속에서도 시간은 흘렀고, 계절은 봄에서 여름으로 향했다. 쿄스케의 실습이 끝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
튤립반으로 들어오자마자 신이 난 듯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인형 놀이를 하는 마유의 뒷모습이 보였다. 쿄스케는 웃는 얼굴로 마유의 옆에 앉았다.
“우리 마유, 오늘 왜 이렇게 신이 났을까?”
쿄스케의 물음에 마유가 콧노래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엄마 보는 날이에요!”
“엄마?”
“원래 유치원 안 가는 날에만 엄마가 마유 보러 왔는데, 오늘은 유치원 왔는데도 엄마가 마유 보러 온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엄마랑 아빠랑 마유랑 셋이서 맛있는 거 먹으러 갈 거예요!”
마유의 토끼 귀가 쫑긋거렸다. 쿄스케는 여전히 몸을 이리저리 흔드는 마유를 말없이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요스케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혼은 했어도 마유한테는 여전히 엄마니까요. 그 사람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지 마유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니까. 마유의 엄마가 시간이 될 때마다 마유를 보러 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저 좋은 엄마라고만 생각했는데, 오늘은 기분이 이상했다. 같이 저녁을 먹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일까. 아니면...
아무 말 없는 쿄스케를 마유가 힐끔 쳐다봤다. 어쩐지 선생님의 얼굴이 시무룩해 보였다. 마유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쿄스케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마유 오늘은 선생님이랑 같이 밥 못 먹어요... 그치만 내일부터는 또 선생님이랑 같이 밥 먹을 거니까 슬퍼하지 마요!”
마유가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자기 나름대로 선생님을 달래기 위해 최선을 다 하는 모양새였다. 그 상냥한 마음씨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쿄스케는 입가에 미소를 단 채 마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마유, 엄마 왔는데~”
튤립반 밖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유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튤립반 밖으로 나갔다. 쿄스케는 마유의 가방을 손에 든 채 마유의 뒤를 따랐다. 현관에 쪼그려 앉아 팔을 벌리고 있는 여자를 향해 우다다 달려간 마유가 그의 품에 폭삭 안겼다. 머리 위로 쫑긋한 토끼 귀와 동그란 눈이 누가 봐도 마유의 엄마였다. 쿄스케는 조심스럽게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혹시 쿄스케 선생님 아니세요?”
쿄스케가 말을 걸기도 전에 여자가 마유를 안아 들며 물었다. 쿄스케가 눈을 깜빡였다.
“네, 그런데요...”
“마유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우리 마유가 엄청 좋아한다고.”
마유 엄마 타치바나 유코예요. 유코가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쿄스케는 그 손을 어정쩡하게 잡았다.
“선생님 덕분에 마유가 새 유치원에 적응하기 쉬웠다고 마유 아빠도 그러더라고요. 우리 마유 잘 챙겨 주셔서 감사해요.”
“아... 아니에요. 제가 할 일을 한 것뿐인데요.”
“괜찮다면 같이 식사하러 가실래요? 마유랑 마유 아빠랑 종종 같이 식사하신다고 들었거든요.”
갑작스러운 유코의 제안에 쿄스케가 손끝을 꼼지락거렸다. 거절하기도, 승낙하기도 어려운 제안이었다. 마유는 좋아! 유코의 말에 이미 신이 난 마유가 허공에서 다리를 흔들었다. 쿄스케가 조용히 고민을 하는 사이 유코의 뒤로 요스케가 다가왔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선생님한테 같이 식사하러 가자고 제안 드렸어. 괜찮지?”
“선생님 불편하시게.”
“평소에 자주 같이 식사한다며. 설마 나 때문에 불편하다는 말은 아니지?”
“넌 쓸데없는 데 눈치가 빠르더라.”
“말 참 예쁘게 해요, 하여튼.”
요스케와 유코가 농담 같은 말을 주고받았다. 그런 두 사람을 쿄스케는 가만히 지켜봤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요스케와 유코는 잘 어울렸다. 이혼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누가 봐도 사이좋은 부부, 단란한 가족으로 보일 만큼. 그게 쿄스케는 버거웠다. 자신은 결코 저 사이에 낄 수 없을 것 같았다. 결혼을 해도 남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고, 이혼을 해도 친구처럼 지내는 사람들이 있다던데,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어땠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가까운 사이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는 것. 그게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임을 쿄스케는 깨달았다.
“저는 괜찮아요. 가족 분들 식사하시는 데 제가 끼면 불편해 하실 수도 있으니까...”
“불편하지는 않은,”
“아, 저 일이 남아서 먼저 들어가 볼게요. 조심히 가세요. 마유도 안녕~ 내일 봐요.”
마유에게 손을 흔들어 준 쿄스케가 황급히 걸음을 옮겨 튤립반 안으로 들어갔다. 어쩐지 허둥지둥하는 쿄스케의 뒷모습에 유코가 요스케를 힐끔 쳐다봤다. 요스케의 시선은 쿄스케가 들어간 튤립반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인 유코가 마유를 안은 채 유치원 밖으로 나섰다. 뭐가 잘 안 되나 보네.
-
“오늘부터는 같이 저녁 못 먹을 것 같아요.”
유치원에 들어서자마자 들려온 쿄스케의 말에 요스케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움찔거렸다. 그저 말 한마디 한 것뿐이면서 뭔가를 잘못한 사람처럼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쿄스케가 요스케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코가 유치원에 온 날부터 이상해진 쿄스케의 태도 또한.
“아무래도 마유랑 계속 같이 있다 보면 다른 원생들이랑 차별 대우를 하기도 쉽고, 학부모님이랑 너무 자주 만나는 것도 안 좋구요. 그리고 또...”
“마유 엄마 때문에 그런 거라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요스케가 말했다. 저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 떤 쿄스케가 요스케를 바라봤다. 요스케의 얼굴이 전에 없을 만큼 단호했다.
“어차피 이혼한 사이고, 둘 사이에 남은 감정 같은 건 없으니까요. 지금은 단지 친구처럼 지낼 뿐입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신경 쓰실 건,”
“그런 말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쿄스케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요스케를 보고 있으면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두 손으로 앞치마를 꾹 쥔 채 요스케의 시선을 애써 피했다.
“마유 아버님이랑 저는 그저 학부모랑 교사일 뿐인걸요. 그런 사적인 얘기까지 제가 알 필요는 없구요.”
“...학부모랑 교사요.”
“게다가 실습 기간도 얼마 안 남았고, 남은 기간 동안 아이들을 잘 챙기는 데 전념하고 싶어요. 그러니 저녁 약속은 더 이상 없는 걸로 해 주세요.”
때마침 문밖으로 등원 버스가 도착하는 게 보였다. 쿄스케는 버스에서 내려 현관으로 달려오는 아이들을 향해 인사했다. 절대로 자신에게 눈길을 주지 않을 것처럼 구는 쿄스케를 보며 요스케는 어떤 말도 행동도 하지 못했다.
마치아카 요스케쿄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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