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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02:53

- 노잼& ㅅㅅㅊ 주의
- 커플링이나 탑텀구분을 의도하고 있진 않은데 나붕이 남훈동준파서 ㅌㅈ적 해석이 기초적으로 깔려 있을 수 있음
- 펄럭패치 주의, 작중 배경 푸산(오사카 아님), 어색한 남동방언 주의
- 90년대 초반의 펄럭의 문화 및 시대상을 기초로 쪽본의 시대상이 일부 섞여있음
- 타싸에 올린 적 있음
※ 학교폭력에 대한 직·간접적인 묘사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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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번! 공을 어디에 던지는 거냐! 정신 똑바로 못 차릴래?"
 

동준의 손을 벗어난 공이 또다시 림대를 맞고 허공으로 튕겨 나간다. 동시에 신임 감독의 쩌렁쩌렁한 불호령이 동준의 귓전을 때렸다. 벌써 세 번째 였다. 

요즘 유독 실수가 잦았다. 아무리 진작에 예선 탈락한, 이름이 뭐였더라. 영신인지 영산인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이미 3패로 전국대회 본선은 물 건너간 학교와의 연습경기였다 해도, 오늘 동준이 보여 준 경기력은 윈터컵을 준비하는 삼학년 답지 못한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공이 튕겨 나간 건 세 번째였지만 어이없게 타이밍을 놓친 리바운드는 슛보다 배는 더 많았다. 
 

"풍전! 선수 교체!"
 

문제는 동준의 슬럼프가 비단 오늘만의 일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집중력이 떨어졌다고 욕먹길 여러 번, 딴 생각 한다고 혼나기는 또 십 수번. 씩씩거리며 거친 숨만 내뱉는 동준의 옆에서 성호보다 큰 2학년 센터가 살살 눈치를 살피며 굳어가길 잠시. 마침내 꺼내 든 교체 카드에 동준은 초라하게 벤치로 돌아가고 만다. 벤치로 돌아와 땀범벅이 된 머리 위로 수건을 뒤집어쓰자 날숨과 함께 흔들리는 수건 너머로 대룡의 걱정스러운 듯한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게 보였다. 최악이었다. 벤치에서 홀로 손바닥에 얼굴을 묻던 동준은 결국 얼굴 사이로 고개를 파묻어버린다.  
 

그날 이후 동준은 도저히 경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남훈의 희멀건 배를 뒤덮은 울긋불긋한 자국. 공을 잡을 때마다 흐릿하게 수명을 다해가던 형광등 밑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던 그 멍투성이의 배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공을 쳐낼 때도, 달릴 때도, 시도 때도 없이 늘어진 테이프가 걸려 브라운관에 반복해서 재생되듯이 남훈의 잔상이 눈을 감아도 계속되었다.  


 

*


 

모르는 놈은 저나 대룡 따위를 보고 풍전의 미친개 취급을 했지만 풍전에서 가장 돌아있는 똘개이 새끼는 남훈이라고 동준은 늘 생각했다. 침착하고 냉정한 주장은 개뿔, 머릿속에 생각은 남들 배는 많은 주제에 한 번 꼭지가 돌면 옆은 돌아보지 못하는 것도 또 남훈이다. 형제만큼이나, 혹은 형제보다 가까운 사이인 만큼 남훈이 모르는 것 조차 동준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 만큼은 남훈의 속을 전혀 모르겠다. 어디선가 쌈박질이라도 하고 다니는 건지, 입시한다고, 약대간다고 농구고 농구부고 마치 일 없다는 듯이 모른 척에 교실에서도 집 앞에서도 저한테까지 데면데면하게 굴더니 한밤중에 온 몸 가득 멍을 달고 자길 만났다. 어쩌면 쌈박질하고 다니는 걸 감추기 위해 오랜만에 제게 농구를 하자고 청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렇게, 마치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군 걸까. 
 

남훈은 멍 자국에 합당한 변명을 만들어 줘야 했던 게다. 몸에 남은 흔적은 지워지질 않으니 아주머니가 걱정하지 않도록, 아저씨께서 혹시 아들이 한눈팔까 염려하지 않도록 가짜로라도 명분을 그려 덧씌웠어야 했던 게다. 먼저 제게 농구를 하자고 한 걸 기껍게 생각한 자신이 한순간에 바보 멍청이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남훈이 직접 자신을 바보 멍청이로 만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더 열 받는 것은 그날 이후로 잠시 풀린 것 같던 찝찝한 기분이 다시 돌아왔다는 거다. 그러니 연습에서도, 예선 경기에서도 죽 쑤기가 일쑤였다. 영중은 그런 동준을 보고 잠시 슬럼프가 온 거라고 했고, 신임 감독은  역시나 대학 선발은 커녕 이 계절까지 윈터컵에 목매는 삼학년 다운 경기력이라고 평가했다. 얕잡아보는 그 시선에 속에서 천불이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는데 그저 그런 꼬락서니가 사실이라 붙일 말도 없었다. 대룡마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며 자기는 햄을 믿는다고 말을 건넸을 때, 동준은 주제에 제법 주장 티를 내는 대룡이 기특하면서도 참 쪽팔렸다. 
 

정작 문제의 원인인 불알친구라는 새끼는 그날 이후로 명백히 절 피하고 있었다. 교실에서는 눈 한번 마주치질 않고, 쉬는 시간이 되면 제가 자리에 찾아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종이 치기 무섭게 교실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칠판 대신 한 시간 내내 남훈의 옆모습만 뚫어져라 쳐다봤는데도 한 번 돌아보지를 않는 걸 보니 역시 독한 새끼다 생각했다. 중간에 낀 윤식이라는 녀석만 안절부절못하는 게 미안해서 다음 교시부터는 일부러라도 눈길 하나 안주니 또 묘하게 이쪽 눈치를 살피는 꼴이 벌써 몇 번째 꼭지를 돌게 하는지 모르겠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정작 본인조차 모르고 어디 가서 얘기할 곳도 없는 고민을 안고 마지막 10대의 가을을 보내며 동준은 정말로 평생 거의 느껴본 적 조차 없던 홀로 된 듯한 기분을 느낀다. 이게 외로움이라는 걸까? 아니면 고독감이라는 걸지도 몰라. 나이를 먹고 성인이 되고 또 어른이 되면 익숙해질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동준에게는 평생 알 리 없던 낯선 감정이라 면역력이 없었다. 어딜 가서 어릴 때부터 알던 불알친구라는 녀석이 저 빼놓고 농구 안 한다고 해서 제가 속이 좀 많이 쓰리고, 솔직히 말하면 너무 섭섭하고, 그런데 막상 구질구질해지기 싫어 멀쩡한 척을 하고 있었는데 정작 제 친구는 자신을 이용한 것만 같고, 이제는 절 무시하기까지 하고, 의도적으로 피해 다니는 게 눈에 보이고. 그래서 열은 받는데 또 걱정은 된다고 말을 할까? 홀로 체육관의 문을 닫고 나온 동준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심란한 속도 까진 상처처럼 냅두면 알아서 풀리면 좋겠다. 하잘 것 없는 고민이라도 알아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해결되면 좋겠다. 따위의 생각을 하며 동준은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문뜩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돌아보니 야간 자율학습인지 뭔지로 불이 환한 삼학년 교실이 눈에 보였다. 남훈은 없는 교실이었다.
 

*

 

 

연습도 야자도 빼 먹고 동준이 향한 곳은 근처에 있는 큰 오락실이었다. 올여름까지만 해도 남훈과 동준, 대룡에 평일과 성호까지 자주 찾던 곳이었다. 몇 개월 만에 왔는데도 크게 변한 것 없는 전경이 익숙하다. 남훈과 점수 내기하던 농구 골대 모양 게임기가 셋. 요란한 색감으로 외계인에 맞서 싸우는 전사나 전투기로 적군의 함대를 부수는 파일럿 그림이 그려진 게임기가 몇 줄. 그 앞으로는 평일이 좋아하는 일대일 대전 게임이 또 두 줄. 우리 중에 제일 게임 좋아하는 게 평일이 녀석이다 보니 요즘 오락실에서 유행하는 게임도 귀신같이 먼저 하던 건 아니었나 싶었다. 국민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것 같은 남자애 열 명이 한 게임기에 붙어 있는가 하면 대학생도 훌쩍 넘어 보이는 난닝구 바람에 담배 꼬나문 형님들까지. 일대일 격투 게임이란 게 원래 이렇게 인기가 많은 건가, 생각하던 동준의 심기가 또 일 대 일이라는 단어에 살짝 긁힌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국민학교 어린 놈들의 새된 고함을 가르고 오락실 안쪽 주인 아재에게 보라색 지폐 두 장을 내밀자, 짜장면 한 그릇 값을 받아든 아재가 짤랑짤랑 덜커덩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린 돈통에서 동전 한 주먹을 되돌려준다. 다시 한번 주변을 돌아본 동준의 시선이 잠시 농구 골대 모양 게임에 머물렀다 곧 떨어져 나갔다. 혼자 오니 오락실이란 게 참 이렇게 할 게 없던가. 괜히 바꾼 동전을 주머니에서 잘그락거리던 동준이 몇 개 게임기 앞에 얼쩡거리다가 이내 어울리지 않는 곳에 초대된 사람처럼 바깥문을 향했다. 별일이 없다면 이대로 집에 돌아가 다리나 쭉 뻗고 자자. 어깨 쳐 진 티를 내지 않으려던 동준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 풍전고 똥통 새끼. 집이 약국한다고 거들먹거리는 새끼 있다 아이가."
 

온갖 타격음에 기계로 만든 조잡한 총소리 사이를 가로지르던 동준의 발이 한 순간에 못 박힌 것처럼 멈춰선다. 삐용삐용, 레이저 빔 쏘는 사이 또다시 얼라 하나가 도둑 쫓는 개처럼 컹컹거리며 내지르는 고함 사이에서도 귓전에 뚜렷하게 쏘아 박히는 얍실한 목소리가 기어이 동준을 뒤돌아보게 만들었다. 렌즈 두꺼운 안경잡이 두 녀석이 평일이 즐겨하던 그 게임기에서 손을 털고 일어나고 있었다. 얼굴은 고사하고 교복조차 낯설었다.
 

물론 남들보다 배는 생각 많은 주제에 꼭지가 돌면 눈깔 돌아가는 것은 남훈이었다. 농구부 제일의 똘개이도 남훈이었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들의 시선대로 자신 역시 풍전의 미친개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게임기 사이를 다시 성큼성큼 되돌아 가 큰 손으로 안경잡이 녀석 하나의 멱살을 잡아 채자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풍전고 똥통 새끼가 누고."
 

늘 그렇듯 동준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단점이자 장점이었다. 

 

 

*

 

 

동준에게 멍 자국을 들킨 이후로 훈은 의도적으로 동준을 피했다. 집 근처는 물론 학교에서도 눈에 띄게 동준을 피하자 집요하게 달라붙던 동준 역시 어느새 포기한 듯 달라붙는 것을 멈췄다. 어차피 조금만 견디면, 자신이 조금만 견디면 다 끝날 일이었다. 기대도, 의무도, 그리고 지키지 못한 약속 탓에 접었던 순수한 애정도 다시 되찾을 날이 머지않았다. 그러니 교실 옆자리에서 맹렬히 자신을 향하는, 어딘가 상처를 받은 듯한 시선은 무시하기로 한다.
 

 어두운 시간을 홀로 견디던 훈은 언제부터인가 이 모든 일이 자신한테 내려진 벌이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잘못된 수단으로 우승을 꿈꿨기 때문에, 그래서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는 농구를 잘못된 방법으로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순수한 경쟁을 망가트렸기 때문에 받는 벌이 아닌가 하며 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동년배의 소년들을 애써 이해해보기로 했다. 
 

훈이 영산 고등학교는 커녕 종호와 함께 따돌림을 주도하는 다른 소년들이 다니는 학교가 어떠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 그들을 더욱 자극했는지도 모른다. 고작해야 똥통 학교에서 3년간 하고 싶은 것 다 하던 녀석이 뒤늦게 내내 열심히 공부해 명문고등학교에 들어온 자신들과 비슷한 선까지 올라오니 조바심이라는 게 자연스럽게 머리를 쳐든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경기 중에 비겁하게 굴던 녀석이 정작 명문이라는 자신들의 학교는 기억도 못하니 심사가 뒤틀린 건 또 아니었을까. 그러니 그 머릿속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잘못된 수단이었지만, 그조차 훈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훈은 이 모든 것을 속죄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부모님의 기대와 자신의 역할, 그리고 자기가 악명을 쌓아오기까지 짓밟고 온 수많은 팀들을 생각하면 마땅히 감내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어디 보자, 풍전 고등학교라고? 그래, 훈이. 이번 모의고사는 잘 봤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발판이 하나하나 무너지는 것과 같이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위장된 평온을, 훈의 인내로만 간신히 이어 나가는 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무리였는지도 몰랐다.
 

"아직은 좀 부족하긴 한데, 원래 추세라는 걸 봐야 하는기라. 추세가 좋다. 포기하지 말고 이대로만 가면 된다."

"예."

"그렇다고 자만하지 말고. 하 참, 머리도 좋고 끈기도 좋은 녀석이 와 고등학교는 잘못 들어갔노?"

"...."

"괜히 내 말 꼬아 듣지 말고. 아깝다 이 말이다. 어디 있든 자기만 열심히 하면 되는 거 아니겠나? 이대로만 해라 이대로만. 애 썼다."
 

고작해야 모의고사였지만 훈이 처음으로 목표하던 점수를 넘긴 어느 날이었다. 도착한 학원 교실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가라앉은 것을 눈치채지 못한 건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일 수도, 아니면 그런 사소하고 잡스러운 것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기엔 훈이 진작에 벼랑 끝까지 내몰려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나둘 이름이 불리던 학생들이 시험지 뭉치를 들고 상담실로 향했다가 어두운 얼굴로 돌아온다. 훈의 차례는 마지막이었다. 
 

"아."
 

의례적인 상담을 마친 훈을 코를 찌르는 악취가 맞이한다. 비강을 찌르는 것 같은 시큼하고 구릿한 냄새가 좁은 교실 가득했다. 그 냄새의 근원이 제자리, 책가방부터 의자, 가방까지 온통 적셔놓은 썩은 우유라는 걸 알아차리는 데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잠시 멍청한 얼굴로 문 앞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훈의 시선이 상담 전, 노골적으로 훈의 시험지를 쳐다보던 소년과 마주쳤다. 종호와 함께 훈을 주도적으로 괴롭히던 녀석도 아니었고, 적극적으로 훈에게 적개심을 드러내던 소년들 중 하나도 아니었다. 그제야 훈은 교실 전체가 제게 들이밀던 적의가 단지 소수의 것만은 아님을 깨닫는다. 
 

"왜...?"
 

늦은 깨달음의 대가는 처참했다. 풍겨오는 역한 냄새에 잠시 정신을 못 차리던 훈이 미끄러지듯 제 자리로 달려갔다. 노골적인 비웃음이 그 뒤를 따른다. 황급한 손길로 책상 옆 고리에 걸린 책가방을 들어보지만 충동적인 증오가 훈의 지난 몇 개월을 온통 망쳐놓았다는 사실만이 선명할 뿐이었다. 얇은 미색 지마다 허옇게 스며든 우유. 적어둔 필기 잉크는 온통 번졌고, 벌벌 떨리는 손으로 얼룩덜룩한 책장을 넘기려 해도 이미 액체에 한 덩어리가 된 탓에 소용이 없었다. 훈의 손안에서 젖은 종이가 뭉개져 찢어진다. 
 

"야, 하지 마라. 하지 마!"

"...!"
 

화를 내고 싶었다.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고 눈물을 보이고 싶었다. 통 현실감이 없기도 했다. 그 새를 놓치지 않고 축축한 악의가 다시금 액체의 형태를 띄고 훈의 머리 위에서부터 흘러내린다. 그나마 간신히 건진, 젖은 부분이 적었던 참고서 위로도 꼼꼼한 악의가 비처럼 내렸다. 그 참고서는 훈이 농구도, 동준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남은 여름방학을 오롯이 부어 만들었던 단권화 책이었다. 
 

"농구 잘 하는데 공부는 왜 할라 카노?"
 

눈물 대신 줄줄 흘러 내리는 우유로 양 뺨을 가득 적신 채 겨우 고개를 들으니 마치 세례하듯 제게 우유를 붓는 단정한 얼굴의 종호와 눈이 마주쳤다. 조소를 하도 욱여넣은 탓에 양 뺨이 터질 것 같았다.
 

"너 같은 아들 다 체육 특기생으로 가면 되는 거 아이가."

"...아니, 아니다. 내는,"

"그러려고 다른 팀 아들 죽어라 패고 다닌 거 아니었나?"

"맞나. 그래 놓고 답이 없다 싶었나. 하긴 쟤네도 조졌다 카드라. 어디 불러주는 데도 없었는갑지."

"아니다, 정말로...,"

"저 새끼가 농구를 좋아서 했겠나?"
 

철렁했다. 분노와, 아득한 절망과, 좌절과, 비관과, 체념이 차례로 훈의 의지를 앗아가다 지난날의 과오에 마지막 남은 변명조차 빼앗겼다. 그냥 양아치 새끼 인기라. 왜, 원래 예선할 때부터 어디지, 아 맞다 대영고. 거기에도 깨졌다 카든데. 진짜 농구가 하고 싶었으면 우승한 학교에 들어가야 했던 거 아이가? 다른 팀 에이스들 다 담그고 다니면서 대회 나가자마자 뭔 듣도 보도 못한 학교에 쳐발리고 오는 병신 학교 말고. 이제는 주인조차 가늠할 수 없는 날 선 말이 비수가 되어 날아와 꽂혔다. 만신창이가 되다 못해 너덜너덜하게 찢겨 나가는 것만 같았다. 
 

"니 농구 좋아서 한 건 맞나?"
 

자신을 둘러싼 날 선 물음이, 차마 반박조차 할 수 없는 저급한 말 가운데 도저히 넘길 수 없는 질문이 웅덩이에 가라앉아 있다 떠오른 침전물처럼 떠오른다. 농구를 좋아했냐고? 대답도 없이 홀로 되묻는다. 달싹거리는 입술 사이로 썩은 우유가 흘러 들어왔다. 혀 끝에 역함이 감돌았다.
 

누구보다도, 대영이나 이현수보다도, 산왕 보다도,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농구를 사랑했다.

비록 내 마음이, 내 방법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그 누구보다 농구를 사랑했다....
 

정수리부터 줄줄 흘러내리던 우유가 갈라진 머리카락 끝에서 방울져 구슬처럼 흩어져 떨어져 내렸다. 그게 꼭 비 같았다. 방울져 무릎 사이로 추락하는 우윳방울이 지난 여름을 가득 채운 장맛비가 체육관 지붕 끝에서 떨어져 내리다 바닥 가득 고여있던 웅덩이로 추락하는 모습을 닮았다. 부끄러움 뿐이었다 하더라도 농구를 사랑했던 것 만큼은 진심이었다. 소리 없는 대답을 마음속에서 되새기던 훈은 잠시 짧은 회상에 젖는다. 눈을 감자 빛을 등진 소년들 사이로, 흰색 액체에 젖어 눌러붙은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퍼지던 백열등의 빛이 눈꺼풀 안에 잔상처럼 남는다. 
 

"악, 아!"
 

그러나 푹 고개를 숙이고 있던 훈의 고개를 들린 것은 고르고 고른 고백도, 자백도, 혹은 훈을 둘러싼 가해자들도 아니었다.
 

"남훈!"

"선생님 불러라, 얼른!"
 

우당탕, 무언가 쓰러지고 바닥에 부딪히는 강한 소리와 함께 주변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둘러싼 비열한 조롱과 조소가 순식간에 놀람과 경악으로 바뀐 탓에 훈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눈앞의 익숙한 이와 시선을 마주한다. 
 

눈 앞에 동준이 있었다. 
 

푸른 빛이 감도는 교복도, 기스가 가득한 농구화도, 성이 잔뜩 나 사정없이 구겨진 미간과 잔뜩 올라간 짙은 눈썹 모두가 너무나 익숙한 동준을 천천히 바라보던 훈은 결국 답할 이 없는 물음을 홀로 던진다. 강동준이 왜, 어떻게 여기 있지? 대답은 없었다. 그 대신, 아니 대신이랄 것도 없이 썩은 우유를 잔뜩 뒤집어쓴 채 축축해진 남훈의 모습을 본 동준의 인상이 사정없이 구겨질 뿐이었다.
 

"니 지금 뭐하고 있노?"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억센 손으로 낯선 멱살을 잡고 있던 동준이 불현듯 주변 책상을 집어던지기 시작한다. 마치 폭탄이 터진 것만 같았다. 콰당거리는 시끄러운 파열음 사이로 다급한 뜀박질이 복도를 채우고, 조용했던 교실에 비명과 욕지거리가 난무했다. 뜻밖의 삭막함만 가득했던 학원에 갑자기 찾아 든 난장에 외면으로 자신을 지키던 구경꾼들이 너도나도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동준은 아랑곳 않는다. 아직도 우유가 뚝뚝 떨어지는 훈의 책상과 의자를 교실 한 가운데로 집어던지더니, 마치 미친 사람처럼 훈을 방관하던 보습반 학생들의 책이나 참고서, 가방을 사정없이 던지고 찢기 시작했다. 동준의 손아귀 안에서 두꺼운 참고서며 시험지, 교과서 따위가 종잇장처럼 찢겨나가더니 지는 낙엽처럼 흩날렸다. 순식간에 난장판이 된 교실 위로 동준의 거친 숨소리가 토막토막 쌓여나갔다. 
 

"...!"
 

야차같은 꼬락서니였다. 그리고 움직임은 그보다 빨랐다. 괴롭힘이 지독해봤자 새장 안의 모범생으로 살던 샌님들이었던 탓일까. 훈을 괴롭히던 소년들은 아무런 말이나 행동도 하지 못한 채 난입한 이방인을 바라보기만 했다. 동준이 생전 처음 보는 목적도, 방향도 없는 순수한 분노를 발화하며 그들의 공간을 침범해도, 그들이 앞서 훈에게 한 것과 같이 지난 노력의 결실을 사정없이 난도질을 해도, 말리려는 헛된 시도가 날아드는 참고서 나부랭이에 가로막힌 후로 소년들은 불과 몇 분 전의 모습이 무색하게 꼬리를 내리고 입을 닫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한심해 할 새도 없었다. 한 차례 교실을 엉망으로 만든 동준의 눈이 친구들 사이 숨어있던 종호에게 향했다. 니가 점마한테 저랬나. 동준이 어금니를 뿌득거리며 성큼성큼 돌진하자 종호도, 그리고 동준이 멱살을 잡고 끌고 온 소년도 새된 소리를 내뱉으며 도망갈 곳을 찾기 바빴지만 동준의 손이 더 빨랐다. 
 

"강동준. 하지 마라!"

"놔라."
 

더 이상 지켜만 보고 있을 순 없었다. 순식간에 종호의 멱살을 잡은 동준이 움켜쥔 주먹을 치켜들기 무섭게 남훈이 동준의 오른팔로 달려든다. 뒤에서 양 팔을 감싸듯 묶어 놓으려니 뿌리치는 손길이 너무 단단했다. 고작해야 몇 개월 데면데면했을 뿐인데 말리는 것만 해도 힘이 들었다. 오른손을 묶여 꼭지가 돈 동준의 왼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자 종호가 캑캑거리는 사이가 훈과 동준 사이를 가른다. 얼핏 종호의 발이 살짝 뜬 것 같기도 했다. 
 

"내려놓고 나랑 얘기해라. 뭐 하는 건데, 남의 학원에서!"

"남훈. 니 맞고 다니나."
 

높이 치켜든 동준의 팔도, 양손으로 치켜 든 오른손과 멱살 잡은 왼손을 단단하게 틀어 쥔 훈의 손도 팽팽한 악력에 부들부들 떨리길 잠시, 결국 동준이 팔을 내렸다. 손을 탁탁 털어내자 종호가 뒷걸음질 치다 볼썽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잠깐의 대치로 아주 조금 평온을 되찾은 동준은 고개를 몇 번 까딱이며 숨을 고를 뿐이었다. 그게 동준의 화를 참는 오래된 습관인 것을 훈은 안다. 
 

"맞고 다니는 거 숨기려고 나랑 농구 하자고 한 기가."

"...."

"왜 쳐맞고 다니는데. 니가 에이스 킬러라고 저 새끼들이 때린기가."

"...그런 건 아니다."

"뭐가 그런 게 아닌데! 오는 길에 다 들었다. 니가 병신새끼가?"

"그런 거 아니라고. 아무 것도 모르면서 나오는 말이라고 하지 마라."

"니 혼자 그 지랄 했나. 어?"
 

정말 울고 싶은 건 자신이었는데 먼저 얼굴을 일그러트린 것은 동준이었다. 그 모습이 국민학교 시절부터 변한 게 하나 없었다. 숨을 고르던 동준이 이내 목청을 높인다. 자기 화를 못 이겨서 얼굴은 시뻘게진 채로, 참 못나게도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기 시작한다.
 

"그래. 우리가 경기 하면서 다른 아들 치고 다녔고, 졸라게 비겁했다. 내도 안다."

"...."

"그렇다 해도 잘못했다고 해야 하는 게 점마들이가."
 

그렇지 않았다. 훈이 사죄를 해야 하는 대상은 종호도, 영수도, 훈을 괴롭히던 학원의 소년들 그 누구도 아니었던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입이 뚫렸으면 말이라도 좀 해봐라, 니가 무슨 성자가. 그래 가 고행하듯이 다 감내해야 하는기가."

"...."

"니 혼자 쳐맞고 다니라고, 점마들이 너 패고 다녀도 된다고 누가 정했는데?"
 

사과해야 하는 게 하는 게 저새끼들이가. 아니면 김수겸이든 서태욱이든 우리가 팬 새끼들이가. 대답 없는 훈을 마주 세우고 소리치던 동준은 결국 기어이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저도 부끄러움은 아는지 걷어붙인 소매로 눈가며 코를 벅벅 문지르는 모습이 제법 꼴사나웠는데, 사실 제일 볼품없고 꼴사나운 건 가장 친한 친구한테조차 할 말이 없는 자신이었다. 덩달아 가득 고인 눈물을 떨구기 싫어 고개를 든다. 동준의 뒤로 흩날리는 수많은 조각난 책장과 학습지, 종이 쪼가리들이 백열등의 빛을 받아 희게 빛나는 모습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그 모습이 꼭 봄날에 흩날리는 꽃 같았다.
 

"그러면 내는, 내는 뭐가 되는데..."
 

썩은 우유 냄새가 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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