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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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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내던 눈물을 쏟던 뭐라고 한바탕 퍼부어댈줄 알았는데 적비성과 방다병은 아무말도 없었어. 험학한 기세만이 두 남자에게 뿜어나오는데 하도 매서워서 불여우가 되려 불안하게 낑낑거렸어. 이연화는 꼬리를 흔드는 불여우가 제일 반가웠어. 사실 사람이야 알아서 잘 살아도 사람 손 타는 동물은 누군가 돌봐줘야 하잖아? 방다병은 다정하니까 잘 챙겨줄거라 생각했는데 윤기나는 털과 초롱초롱한 눈을 보니 마음이 놓였지. 손으로는 불여우를 쓰다듬으면서도 이연화는 둘을 흘끔 흘끔 쳐다봤어.
적비성 눈매 더러운거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방다병의 흉흉한 얼굴은 조금 낯설었지. 적비성은 더욱 속내를 알수가 없고 방다병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둘의 시선이 따가울정도로 박혀왔지만 이연화는 짐짓 모르는척 했어.
이연화는 별로 할말이 없었고 적비성과 방다병은 할말이 너무 많아서 셋 중 누구도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어. 그나마 불여우가 세 사람의 긴장감을 조금 누그러트려 줬지. 인간이야 무슨 생각을 하던 말던 개 한마리는 그저 제 주인이 반가울 뿐이었으니까. 불여우를 어르다가 그래도 사람이 찾아왔는데 뭔가 대접은 좀 할까, 이연화는 밥 먹겠냐고 물었어. 식탁에 시선을 돌렸는데 덩달아 두개의 시선이 따라왔지. 음, 맹주님과 공자님이 먹을만한 밥은 아니군. 이연화는 초라한 밥상을 흘끔 보고 머리속으로 먹을만한게 뭐 있나 빈약한 부엌 찬장을 곱씹어 봤어.
그저 부엌에 가려고 했던것 뿐인데 둘은 누가 먼저 할것도 없이 약속이라도 한듯 이연화를 붙잡아 앉혔어. 어깨에 얹힌 손에 다소 힘이 들어갔기에 이연화는 자기도 모르게 아이요 신음소리를 흘렸지. 그러자 손아귀의 힘은 약해졌지만 이연화를 놓지는 않았어.
- 그냥 부엌에 가려는것 뿐이야
투덜거리는 이연화에 방다병과 적비성은 그제야 손을 놓았지만 불신의 눈매는 여전했어. 방다병이 먼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품에서 약병을 꺼냈어. 그리고 소매를 걷어 이연화의 까진 팔에 금창약을 바르기 시작했어. 아직 핏기가 어려있는 붉은 생채기는 희고 마른 팔에 더욱 선명해 보여 보기만 해도 아파 보였어. 병약한 몸이고 헤어질때쯤 해서 더욱 상황이 악화되었기에 몸 상태가 좋지 않을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어. 하지만 그럼에도 실제로 보니 생각보다 더 충격이었어. 특히 크고 작은 상처를 달고 있는것을 보니.
이연화는 살이 내린 방다병의 턱선을 보며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 편하게 살라고 떠났던건데 그것조차 너에게 해가 됬구나. 고개를 푹 숙이고 약을 바르는 방다병을 보다가 얼굴에 닿는 손길에 이연화는 무의식중으로 피했어.
- 내가 할...
- 닥쳐, 빌어먹을 이연화.
처음으로 방다병에게 말이 터져나왔어. 정 많은 이에게서 나왔다고 믿기 어려운 사나운 말투였어. 강아지처럼 초롱초롱하고 순했던 눈망울과 뽀둥하던 볼은 살이 빠진듯 한층 더 각이 지고 날카로웠어. 빌어먹을 이연화, 방다병이 화가 날때마다 하던 말버릇이지. 이연화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얌전히 얼굴을 맞겼어. 조심스럽게 약을 펴바르는 손길은 성마른 말투와 다르게 다정하였어. 말은 그렇게 해도 착한 아이지. 버럭 화를 내도 결국 꽁했던 마음을 풀고 먼저 다가오는건 항상 방다병이었어. 이연화는 복잡한 마음이었지만 꼼꼼하고 세심하게 약을 바르는 손이 조금 반갑기도 했어. 아픔에 익숙한 몸이건만 약이 좋아서 그런가 오랫만에 받는 손길이라 괜히 더 기대고 싶기도 했어.
방다병이 약을 다 바르자 그때까지 아무말도 없던 적비성도 드디어 입을 열었어.
- 가자
적비성의 말이 신호이기라도 하듯 방다병은 이연화를 일으켰어. 약을 바르는 동안 뭐라 변명하며 두 사람을 보낼까 머리를 굴리던 이연화였어. 두 사람이 자길 찾아냈으니 쉽사리 자길 놔두지 않을거라는건 익히 예상하던 바였지만 지금 바로 이렇게? 이연화는 잠시 버둥거렸지만 잡힌 팔목은 꼼짝도 하지 않았어. 예전 같았으면 무력으로라도 팔을 뿌려쳤을텐데 이제는 그도 쉽지 않구나. 연약한 몸뚱아리를 원망하면서 이연화는 버텼어.
-잠깐, 어딜 간다는거야?
- 네 녀석을 가둘 곳
금원맹의 맹주가 뭐 그런 당연한걸 묻느냐는듯 내뱉었어. 가두겠다니. 원래 애둘러 말하는 법이 없긴 했지만 의도가 너무 적나라 하지 않아 적맹주? 이연화는 약간 기가 막혔어. 금원맹의 살벌한 감옥을 떠올리다 이연화는 작게 몸서리 쳤어.
- 내 집은 여긴데?
- 그래서?
아, 말로 통하는 사람이 아니었지. 적비성은 결심하면 무조건 행동하는 사람이니까. 어디로 갈지 모르지만 두 사람이 저를 데려간다면 절대 빠져나오기 쉬운곳이 아닐거야. 이연화는 무의식중에 배를 감쌌어. 끌려가면 몸을 고치겠다고 난리를 칠테고 그럼 아이를 가졌다는걸 두 사람에게 바로 들키겠지. 단단하게 버티고 선 적비성과 저를 여즉 붙잡고 있는 방다병을 번갈아 보며 이연화는 황급히 입을 열었어.
- 비...비 온다고. 지금 나가면 홀딱 젖을텐데 날 죽일 셈이야?
이연화에게만 집중하느라 몰랐는데 바깥을 가르키는 손가락을 보니 어느덧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어. 비는 제법 세차게 내렸고 낡은 지붕에 구멍이라도 뚫렸는지 집안 곳곳에도 빗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어. 적비성이나 방다병은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이연화를 끌고 가고 싶었지만 참았어. 이게 이연화의 구실임을 잘 알았지만 다 죽어가는 사람을 찬물에 흠뻑 젖게 만들면 없던 병도 더 걸리겠지. 이럴줄 알았으면 마차라도 끌고 왔어야 했는데.
방다병은 탐탁지 않다는 듯,흥 콧방귀를 뀌고 도로 앉고 적비성은 문간을 지키듯 자리했어. 자신을 감시하는 둘을 힐끔 보고는 이연화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말았어. 그리고 금이 간 사발과 물동이를 꺼내더니 익숙한듯 물이 새는 곳 밑에 놓았어. 빈 그릇 안에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퍼졌어.
- 뭐 하는거야?
- 물 받아 놔야지. 이러면 물 길러 안가도 되거든.
이연화의 태연자약한 모습에 방다병은 기가 막혔어. 우리가 너 데리고 떠나려고 했다는건 귓등으로 들었니? 하긴 이연화는 원래 남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든 편이긴 했어. 초라하고 아파보여도 여전히 자기가 아는 이연화라 그게 일견 기쁘기도 하면서 성질이 났지. 바지런 떠는 모양새가 어이 없어서 방다병은 다시 입을 꾹 다물었어.
좌우에 적비성과 방연화를 두고 이연화는 천연덕 스러웠어. 그러면서 불여우를 쓰다듬으며 살이 좀 붙었나? 간식 조금씩만 주지 그랬냐고 가볍게 타박하는 모양세는 마치 연화루에 있던 시절을 연상하게 했어. 삐그덕 거리는 탁상의 아귀를 맞추며 빙그레 웃는 모습은 그 시절 그대로였지. 집에 물이 세지 않고 비틀거리며 돌아다니는 낡은 옷자락만 아니었다면, 얼굴의 진한 멍자국만 아니었다면 지금 연화루에 있는거라고 생각했을거야. 방다병은 이연화의 실험 요리를 불평했을거고 적비성은 술잔을 채웠겠지. 불과 몇개월전의 일이었건만 어쩐지 아득한 느낌이 들었어. 이연화는 마치 제가 단 한번도 떠난적이 없다는듯 굴고 있었으니까.
이리저리 부산을 떨어봤자 작은 집이라 두세번 움직이고 나니 할일이 없었어. 적비성과 방다병이 어떻게 저를 노려보고 있던간에 이연화는 평소처럼 행동했어. 식사때였으니까 밥이나 먹지 뭐, 이연화는 마른 전병을 작게 찢어 입에 넣었어. 시장통에서 가난한 이들이 동전 두어개로 끼니를 때울수 있는 아무 맛도 없는 거친 전병. 빽빽하고 메마른것을 천천히 씹노라면 그냥 종이조각을 씹는것 같았지. 차 한잔 없이 우물우물하다 간신히 목구멍으로 넘기는 꼴을 지켜보자니 방다병은 부아가 치밀었어.
이연화의 손에 들린 전병을 낚아채 그대로 부엌으로 갔어. 양념이라고 할것은 하나도 없는 초라한 화덕을 보고 방다병은 또 화딱지가 나기 시작했지. 열 받은 손짓이라 애꿋은 솥만 탕탕 들었다 놨다 하는데 - 이연화는 솥 하나밖에 없는거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음- 물을 끓여 전병을 조각 내어 불리고 비상식량인 육포를 잘게 부서어 죽을 만들었어. 이연화는 방다병이 제 코앞으로 들이내미는 그릇을 받아들었어. 다시 제 옆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것을 보고 살풋 웃음이 흘러나왔어. 미각을 잃어 별다른 맛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따뜻한 죽 한그릇.
맛있네...작게 중얼거리는 이연화에 방다병의 굳은 얼굴이 그제야 조금 풀렸어.
이연화는 조용히 죽을 비우는 동안 침묵이 다시 세 남자 사이로 내려앉았어. 적비성과 방다병은 쏴아아 내리는 비를 보며 언제 비가 그칠까 바깥만 보았어. 사방이 물 떨어지는 소리인데 어느샌가 이연화의 기침소리가 섞어들었어. 적비성의 눈에 웅크린 어깨가 기침때문에 크게 흔들리는게 들어왔어. 비때문에 공기가 싸늘했으니 추위를 잘 타는 이연화에게 당연히 무리가 가는 날씨였어.
이연화는 이불이라도 두를까 하다가 침상쪽에도 새는 비를 보고 혀를 쯧쯧 찼어. 저긴 또 언제 구멍이 났담. 다른데는 적당히 피하면 되지만 저기 말고도 누울데도 없으니 지붕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연화는 바들바들 떨다가 제 몸위로 무언가 덮이는걸 느꼈어. 적비성이 자신이 입고 있던 장포를 이연화에게 벗어준거야. 사람의 체온이 묻은 장포덕에 따뜻해서 이연화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이 세어나왔어.
적비성이 좀 더 체격이 크긴하지만 자신의 겉옷에 파묻힌 모양세를 보고 이마를 찌푸렸어. 원래 이렇게 작았나, 그러다 적비성은 그제야 생각났다는듯 이연화의 손목을 낚아채 맥을 짚었어. 현재 이연화의 모습이 충격적이어서 잠깐 잊었는데 지금 이연화의 몸은 어떤 상태이지? 관하몽은 거의 확정하듯 이연화의 목숨은 한달정도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어. 그런데 삼개월이 넘도록 살아있는거라면 희망이 있는건가. 방다병도 적비성이 맥을 짚는것을 보고 이제야 이연화의 목숨에 생각이 미쳤어. 방다병 또한 이연화의 다른 손목을 잡고 맥을 짚는데 이연화는 아무렇지 않은척 했지만 다소 불안했어.
규칙하게 뛰는 맥은 미약하기 짝이 없어 반송장이나 마찬가지였어. 그런데 뭔가 평소와 좀 다른 기운이 느껴졌는데 정체를 알수 없었어. 비차지독의 영향인가? 좀 더 깊이 재보려는데 이연화가 드 팔을 빼냈어.
- 뭘 그렇게 재봐. 나 아직 안죽었어.
추워서 입술이 파랗게 질렸는데도 입심은 있으니 적비성은 그 점에서 조금은 안심이 됬어. 투덜거리며 적비성의 옷을 움켜잡는데 여전히 추운지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게 여전히 보였어. 방다병은 허리춤에서 술병을 꺼내 내력으로 덮혔어.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나니 한모금 마시면 딱 좋을것 같은데 뱃속의 아이를 생각하니 술을 마실수가 없었어. 이연화는 고개를 저었어.
- 왜? 마시면 도움이 되잖아
이연화의 얼음장 같은 손에 방다병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계속 권했지만 이연화는 몸이 안좋아 술이 안받노라며 거절했어. 순한 눈망울에 한층 더 그림자가 드리우는것을 보니 조금 켕기긴했지만 뭐 아예 거짓말은 아니니까...그러다 갑자기 또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이 덮쳐왔어. 한독이 발작하기 시작한거지. 방다병은 재빨리 양주만을 이연화에게 주입하기 시작했어. 양주만의 양기가 몸속에 들어오니 속이 뒤집히며 가슴을 쥐어짜는 통증이 점차 줄어들었지만 몸속의 독기로 이연화는 여전히 피를 한웅쿰 토해냈어. 기운이 딸려 쓰러지려는것을 적비성이 받아냈어. 숨을 헐떡이며 입가에 피가 흐르는 모습을 보니 지난날 망천화를 넘기고 쓰러졌던 모습이 떠올라 방다병은 이연화에게 계속 양주만을 불어넣었어.
-...이제 괜찮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기는 좀 남아있어 몸은 계속 바들바들 떨렸어. 혀를 차며 적비성은 이연화를 제 품에 끌어 안았어. 졸지에 안긴꼴이 되어 이게 무슨짓인지 싶어 이연화는 몸을 일으키려 했어.
- 얌전히 있어라
한차례 발작을 하고 난 뒤라 기운이 없는탓도 있었지만 적비성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온기에 이연화는 저도 모르게 파고들었어. 기혈이 막힌 몸은 여전히 냉랭해서 적비성도 내력을 돌려 몸의 체온을 더 올렸지. 기댄 이연화의 미간히 한결 더 편안해지자 겨우 안심이 됬어.
이연화는 늘 혼자서 견뎌왔어. 지금도 너무 기대면 안되는데, 빨리 떠나야 하는데 머리속으로 끊임없이 되내였지만 몸안에 도는 방다병의 양주만과 겉에서 감싸주는 적비성의 체온이 너무 따스해서 이연화는 가물가물 눈이 감겼어.
****
-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고 했지...
방다병은 기절한 이연화를 보며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어. 파리한 낯의 굳은 미간은 쉬면서도 별로 편안해 보이지 않았어. 적비성과 방다병은 누가 먼저라고도 할것없이 한숨을 푹 내쉬었어. 사람 찾겠다고 몇번을 들락날락 거리던 도성이었어. 겨우 몇발자국만 나서면 보이는 곳에 있을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적비성은 불현듯 각려초를 피할때 신방에 숨어들었던게 떠올랐고 이제야 그걸 기억해낸 자신을 탓했어. 이연화가 얼마나 능구렁이같은지 뻔히 알면서...마음이 조급해서 이리라.
둘은 다시 가만히 이연화의 맥을 잡아봤어. 온 몸에 기혈이 막히고 음기가 형형해 뼈속까지 독이 녹아들어있는데 미약한 내력으로 단전을 보호하고 있는데 그때문에 목숨줄이 이어지나, 온통 혼란스럽기 그지 없는 몸상태였어. 아무튼 어떻게 여전히 살아있는지는 부차적인거고 살아있어 다행이지만 이걸 살아있는걸로 쳐야하나 싶은거지. 정말 바람앞의 촛물처럼 깜빡깜빡이는 생명줄이라 지금 당장 꺼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어. 창백한 낯은 핏기 하나 없고 드리내린 속눈썹이 더욱 버겁게 달려있어. 이런 몸에 달고 있는 검푸은 멍은 마치 죽음의 손길처럼 스며들어있어 더욱 마음을 무겁게 했어.
- 일단 찾았으니까 됬다
방다병은 눈시울이 뜨거워 두 눈을 깜빡깜빡 거리며 고개를 끄덕였어.
- 그래, 살아있을줄 알았어. 봐 내가 그랬지. 이연화는 얄미워서 저승사자도 안데려갈거라고
적비성은 피식 웃었어. 품안의 이연화는 기억하는것 보다 더 작고 가벼워 그저 종이 인형을 안고 있는것 같았지. 미약한 숨이 없었다면 창백한 얼굴은 이미 죽은 사람이라 여겨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것 같은데 자신들을 보고 능청떨던 이연화를 보니 그도 맞는것 같았지. 적비성은 이연화를 안은 팔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어. 십년의 기다림도 겪어봤어도 불과 몇개월의 기다림이 더욱 힘들었어. 두번다시 놓치지 않으리라.
이연화가 깨지 않도록 목소리를 죽이며 방다병과 적비성은 앞으로의 일을 논의했어.
****
이연화는 간만에 푹 잔것 같았어. 밤에는 늘 기침 때문에 잘 자지 못하곤 했어. 그래서 낮에 자주 조는데 그냥 기력이 딸려 잠깐잠깐 정신을 놓는거라 제대로 된 수면도 아니었지. 여전히 머리가 어질한데 개운한 느낌이 있어 왠일인가 의아해하며 기지개를 피려는데 팔에 묵직한 무언가가 걸렸어. 이게 뭐지? 흐릿한 시야를 몇번 껌뻑이며 힘을 주니 제 팔목을 감고있는 것이 보였어.
..구속구?
튼튼해 보이는 수갑이 양 팔목을 단단히 감고 있었어. 순간 또 납치 당했나? 경계심을 올리며 날카롭게 주변을 둘러봤는데 여전히 허름한 제 집이었어.
- 깼어?
방다병이 일어나려는 이연화의 등을 받쳐주며 따뜻한 물 한잔을 건넸어. 이연화는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되어 길게 한숨을 내쉬었어. 양팔의 구속구는 힘으로 부술수 없을정도로 단단했지만 안쪽에는 부드러운 헝겊이 덧대어져 연약한 피부를 보호하게 되있었어. 손을 움직이기 불편해 방다병이 먹여주는 물로 마른 목을 축이다가 욱하는 마음이 들었어.
- 너네 정말 이러기야?
끌려갈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할줄은 몰랐는데. 둘이 어떤 작당을 했는지 몰라도 아주 단단히 작심했나 보지. 쉽게 빠져나가기 어렵겠어... 조용히 한탄하는데 그 생각을 읽는듯 적비성을 말했어.
- 네 업보라고 생각해라
짜증을 팍팍 내는 이연화에 방다병은 당연한거라는 듯 적비성의 곁에서 고개를 주억거렸어.
- 니네가 언제부터 친했다고 한마음 한뜻이야
- 네가 떠난날 부터
음울하게 덧붙이는 방다병에 이연화는 속으로 움찔했어. 적비성의 무뚝뚝한 얼굴이야 이골이 났지만 방다병의 처진 모습은 은근한 죄책감을 가져왔어. 이연화는 시선을 돌리며 팔을 들어올렸어.
- 이 꼴로 어떻게 밖으로 나가
적비성은 한쪽에 벗어놨던 자신의 장포를 다시 이연화에게 덮어줬어. 큰 옷품으로 가리니 몸이 쏙 들어갔지. 미약한 저항이었고 씨알도 안먹히는 반항이었다. 이연화는 씩씩거리며 일어났어. 무거운 팔을 이끌고 집을 정리하고는 낡은 문이지만 문단속도 꼼꼼하게 했어. 적비성과 방다병은 결코 이연화를 이 집으로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지만 그냥 내버려뒀어. 볼품없었어도 이 집 또한 이연화를 품고 있었던 장소였으니까.
***
도성의 객잔에 무안이 마차를 준비해 놨다고 했어. 비는 그쳤지만 날이 저물어 가기에 거기서 하룻밤 쉬고 다음날 출발 하자고 했어. 걸어가는 내내 숨이 차다느니, 걷기 힘들다느니, 토 할것 같다느니 온갖 핑계를 다 대가며 걸음을 멈추고 호시탐탐 빠져나갈 기회를 봤지만 적비성과 방다병은 이연화의 옆에 딱 붙어 한 발자국, 아니 반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았어. 심지어 불여우도 뒤에 바싹 따라붙으며 어서 가라는 듯 제 주둥이로 이연화의 다리를 밀곤 했어. 이 배은망덕한 강아지 같으니라고!
자길 어디로 데려갈건지 이연화는 계속 캐물었지만 두 사람을 별 다른 단서를 주지 않았어. 머리를 굴리건데 분명 금원맹이나 천기산당의 숨겨진 별채일테고 빠져나가기 힘든 곳이겠지. 천기산당은 기관으로 유명했고 금원맹도 별 기상천외한 사파의 기술이 있어. 만약 도망 가려면 오늘 밤 묶을 객잔이 마지막 기회겠지. 하늘이 종일 꾸물꾸물해서인가 객잔에 거의 다 도착했을즘에 또다시 비가 쏟아져 내렸어. 세 사람다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 객잔에 도착했지.
적비성과 방다병은 건강하고 또 내력을 돌려 몸을 말릴수있어 괜찮았지만 이연화는 덜덜 떨면서 방으로 들어섰어. 방안에 화로를 들이고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었지만 몸에 뿌리 박힌 한기는 겨우 덮혀졌던 몸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놨어. 방다병이 양주만을 또 불어넣어 줬지만 이번에는 별로 효과가 없는것 같았어. 이연화가 이를 딱딱 부딪히며 겨우 입을 열었어.
-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면 좀 괜찮을 것 같아..
파랗다 못해 보라색으로 질리는 입술의 이연화에 방다병은 점소이를 찾아 밖으로 뛰어나갔어. 적비성은 양주만이 듣지 않는걸 보고 비풍양백을 넣어봤어. 다급한 상황일때는 양주만 보다는 더 낫긴 해서 한숨 돌렸는데 그래도 떨림이 멈추질 않았어. 이연화가 마른 기침으로 숨을 헐떡이니 적비성은 찻잔을 가져오기 위해 몸을 돌렸어.
기회는 한번뿐. 적비성이 찻물을 준비하는 동안 이연화는 기민하게 움직였어. 지금 가장 골치 아픈건 이 양 손목의 구속구야. 이런걸 하고서야 어딜 가도 눈에 뛸뿐더러 움직이기에도 용이하지 않지. 하지만 자신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아주 꽉 조이지도 않을뿐더러 안에 헝겁이 대어져 있으니 조금의 틈만 있어도 뺄수 있지. 두 사람의 연민을 이렇게 이용하는데 약간 미안했지만 이연화는 입술을 꽉 깨물며 자신의 엄지 손가락에 힘을 줬어. 관절이 툭 빠지는 소름 끼치는 느낌과 근육이 빠지는 고통이 퍼졌지만 이연화는 다시 이를 악물고 왼쪽 엄지 손가락도 똑같이 빼내었어. 빠진 관절덕에 두 손은 무리없이 구속구를 빠져나왔어.
이연화는 재빨리 창가로 몸을 날렸어.
연화루 비성연화 다방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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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비성 눈매 더러운거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방다병의 흉흉한 얼굴은 조금 낯설었지. 적비성은 더욱 속내를 알수가 없고 방다병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둘의 시선이 따가울정도로 박혀왔지만 이연화는 짐짓 모르는척 했어.
이연화는 별로 할말이 없었고 적비성과 방다병은 할말이 너무 많아서 셋 중 누구도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어. 그나마 불여우가 세 사람의 긴장감을 조금 누그러트려 줬지. 인간이야 무슨 생각을 하던 말던 개 한마리는 그저 제 주인이 반가울 뿐이었으니까. 불여우를 어르다가 그래도 사람이 찾아왔는데 뭔가 대접은 좀 할까, 이연화는 밥 먹겠냐고 물었어. 식탁에 시선을 돌렸는데 덩달아 두개의 시선이 따라왔지. 음, 맹주님과 공자님이 먹을만한 밥은 아니군. 이연화는 초라한 밥상을 흘끔 보고 머리속으로 먹을만한게 뭐 있나 빈약한 부엌 찬장을 곱씹어 봤어.
그저 부엌에 가려고 했던것 뿐인데 둘은 누가 먼저 할것도 없이 약속이라도 한듯 이연화를 붙잡아 앉혔어. 어깨에 얹힌 손에 다소 힘이 들어갔기에 이연화는 자기도 모르게 아이요 신음소리를 흘렸지. 그러자 손아귀의 힘은 약해졌지만 이연화를 놓지는 않았어.
- 그냥 부엌에 가려는것 뿐이야
투덜거리는 이연화에 방다병과 적비성은 그제야 손을 놓았지만 불신의 눈매는 여전했어. 방다병이 먼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품에서 약병을 꺼냈어. 그리고 소매를 걷어 이연화의 까진 팔에 금창약을 바르기 시작했어. 아직 핏기가 어려있는 붉은 생채기는 희고 마른 팔에 더욱 선명해 보여 보기만 해도 아파 보였어. 병약한 몸이고 헤어질때쯤 해서 더욱 상황이 악화되었기에 몸 상태가 좋지 않을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어. 하지만 그럼에도 실제로 보니 생각보다 더 충격이었어. 특히 크고 작은 상처를 달고 있는것을 보니.
이연화는 살이 내린 방다병의 턱선을 보며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 편하게 살라고 떠났던건데 그것조차 너에게 해가 됬구나. 고개를 푹 숙이고 약을 바르는 방다병을 보다가 얼굴에 닿는 손길에 이연화는 무의식중으로 피했어.
- 내가 할...
- 닥쳐, 빌어먹을 이연화.
처음으로 방다병에게 말이 터져나왔어. 정 많은 이에게서 나왔다고 믿기 어려운 사나운 말투였어. 강아지처럼 초롱초롱하고 순했던 눈망울과 뽀둥하던 볼은 살이 빠진듯 한층 더 각이 지고 날카로웠어. 빌어먹을 이연화, 방다병이 화가 날때마다 하던 말버릇이지. 이연화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얌전히 얼굴을 맞겼어. 조심스럽게 약을 펴바르는 손길은 성마른 말투와 다르게 다정하였어. 말은 그렇게 해도 착한 아이지. 버럭 화를 내도 결국 꽁했던 마음을 풀고 먼저 다가오는건 항상 방다병이었어. 이연화는 복잡한 마음이었지만 꼼꼼하고 세심하게 약을 바르는 손이 조금 반갑기도 했어. 아픔에 익숙한 몸이건만 약이 좋아서 그런가 오랫만에 받는 손길이라 괜히 더 기대고 싶기도 했어.
방다병이 약을 다 바르자 그때까지 아무말도 없던 적비성도 드디어 입을 열었어.
- 가자
적비성의 말이 신호이기라도 하듯 방다병은 이연화를 일으켰어. 약을 바르는 동안 뭐라 변명하며 두 사람을 보낼까 머리를 굴리던 이연화였어. 두 사람이 자길 찾아냈으니 쉽사리 자길 놔두지 않을거라는건 익히 예상하던 바였지만 지금 바로 이렇게? 이연화는 잠시 버둥거렸지만 잡힌 팔목은 꼼짝도 하지 않았어. 예전 같았으면 무력으로라도 팔을 뿌려쳤을텐데 이제는 그도 쉽지 않구나. 연약한 몸뚱아리를 원망하면서 이연화는 버텼어.
-잠깐, 어딜 간다는거야?
- 네 녀석을 가둘 곳
금원맹의 맹주가 뭐 그런 당연한걸 묻느냐는듯 내뱉었어. 가두겠다니. 원래 애둘러 말하는 법이 없긴 했지만 의도가 너무 적나라 하지 않아 적맹주? 이연화는 약간 기가 막혔어. 금원맹의 살벌한 감옥을 떠올리다 이연화는 작게 몸서리 쳤어.
- 내 집은 여긴데?
- 그래서?
아, 말로 통하는 사람이 아니었지. 적비성은 결심하면 무조건 행동하는 사람이니까. 어디로 갈지 모르지만 두 사람이 저를 데려간다면 절대 빠져나오기 쉬운곳이 아닐거야. 이연화는 무의식중에 배를 감쌌어. 끌려가면 몸을 고치겠다고 난리를 칠테고 그럼 아이를 가졌다는걸 두 사람에게 바로 들키겠지. 단단하게 버티고 선 적비성과 저를 여즉 붙잡고 있는 방다병을 번갈아 보며 이연화는 황급히 입을 열었어.
- 비...비 온다고. 지금 나가면 홀딱 젖을텐데 날 죽일 셈이야?
이연화에게만 집중하느라 몰랐는데 바깥을 가르키는 손가락을 보니 어느덧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어. 비는 제법 세차게 내렸고 낡은 지붕에 구멍이라도 뚫렸는지 집안 곳곳에도 빗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어. 적비성이나 방다병은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이연화를 끌고 가고 싶었지만 참았어. 이게 이연화의 구실임을 잘 알았지만 다 죽어가는 사람을 찬물에 흠뻑 젖게 만들면 없던 병도 더 걸리겠지. 이럴줄 알았으면 마차라도 끌고 왔어야 했는데.
방다병은 탐탁지 않다는 듯,흥 콧방귀를 뀌고 도로 앉고 적비성은 문간을 지키듯 자리했어. 자신을 감시하는 둘을 힐끔 보고는 이연화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말았어. 그리고 금이 간 사발과 물동이를 꺼내더니 익숙한듯 물이 새는 곳 밑에 놓았어. 빈 그릇 안에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퍼졌어.
- 뭐 하는거야?
- 물 받아 놔야지. 이러면 물 길러 안가도 되거든.
이연화의 태연자약한 모습에 방다병은 기가 막혔어. 우리가 너 데리고 떠나려고 했다는건 귓등으로 들었니? 하긴 이연화는 원래 남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든 편이긴 했어. 초라하고 아파보여도 여전히 자기가 아는 이연화라 그게 일견 기쁘기도 하면서 성질이 났지. 바지런 떠는 모양새가 어이 없어서 방다병은 다시 입을 꾹 다물었어.
좌우에 적비성과 방연화를 두고 이연화는 천연덕 스러웠어. 그러면서 불여우를 쓰다듬으며 살이 좀 붙었나? 간식 조금씩만 주지 그랬냐고 가볍게 타박하는 모양세는 마치 연화루에 있던 시절을 연상하게 했어. 삐그덕 거리는 탁상의 아귀를 맞추며 빙그레 웃는 모습은 그 시절 그대로였지. 집에 물이 세지 않고 비틀거리며 돌아다니는 낡은 옷자락만 아니었다면, 얼굴의 진한 멍자국만 아니었다면 지금 연화루에 있는거라고 생각했을거야. 방다병은 이연화의 실험 요리를 불평했을거고 적비성은 술잔을 채웠겠지. 불과 몇개월전의 일이었건만 어쩐지 아득한 느낌이 들었어. 이연화는 마치 제가 단 한번도 떠난적이 없다는듯 굴고 있었으니까.
이리저리 부산을 떨어봤자 작은 집이라 두세번 움직이고 나니 할일이 없었어. 적비성과 방다병이 어떻게 저를 노려보고 있던간에 이연화는 평소처럼 행동했어. 식사때였으니까 밥이나 먹지 뭐, 이연화는 마른 전병을 작게 찢어 입에 넣었어. 시장통에서 가난한 이들이 동전 두어개로 끼니를 때울수 있는 아무 맛도 없는 거친 전병. 빽빽하고 메마른것을 천천히 씹노라면 그냥 종이조각을 씹는것 같았지. 차 한잔 없이 우물우물하다 간신히 목구멍으로 넘기는 꼴을 지켜보자니 방다병은 부아가 치밀었어.
이연화의 손에 들린 전병을 낚아채 그대로 부엌으로 갔어. 양념이라고 할것은 하나도 없는 초라한 화덕을 보고 방다병은 또 화딱지가 나기 시작했지. 열 받은 손짓이라 애꿋은 솥만 탕탕 들었다 놨다 하는데 - 이연화는 솥 하나밖에 없는거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음- 물을 끓여 전병을 조각 내어 불리고 비상식량인 육포를 잘게 부서어 죽을 만들었어. 이연화는 방다병이 제 코앞으로 들이내미는 그릇을 받아들었어. 다시 제 옆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것을 보고 살풋 웃음이 흘러나왔어. 미각을 잃어 별다른 맛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따뜻한 죽 한그릇.
맛있네...작게 중얼거리는 이연화에 방다병의 굳은 얼굴이 그제야 조금 풀렸어.
이연화는 조용히 죽을 비우는 동안 침묵이 다시 세 남자 사이로 내려앉았어. 적비성과 방다병은 쏴아아 내리는 비를 보며 언제 비가 그칠까 바깥만 보았어. 사방이 물 떨어지는 소리인데 어느샌가 이연화의 기침소리가 섞어들었어. 적비성의 눈에 웅크린 어깨가 기침때문에 크게 흔들리는게 들어왔어. 비때문에 공기가 싸늘했으니 추위를 잘 타는 이연화에게 당연히 무리가 가는 날씨였어.
이연화는 이불이라도 두를까 하다가 침상쪽에도 새는 비를 보고 혀를 쯧쯧 찼어. 저긴 또 언제 구멍이 났담. 다른데는 적당히 피하면 되지만 저기 말고도 누울데도 없으니 지붕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연화는 바들바들 떨다가 제 몸위로 무언가 덮이는걸 느꼈어. 적비성이 자신이 입고 있던 장포를 이연화에게 벗어준거야. 사람의 체온이 묻은 장포덕에 따뜻해서 이연화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이 세어나왔어.
적비성이 좀 더 체격이 크긴하지만 자신의 겉옷에 파묻힌 모양세를 보고 이마를 찌푸렸어. 원래 이렇게 작았나, 그러다 적비성은 그제야 생각났다는듯 이연화의 손목을 낚아채 맥을 짚었어. 현재 이연화의 모습이 충격적이어서 잠깐 잊었는데 지금 이연화의 몸은 어떤 상태이지? 관하몽은 거의 확정하듯 이연화의 목숨은 한달정도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어. 그런데 삼개월이 넘도록 살아있는거라면 희망이 있는건가. 방다병도 적비성이 맥을 짚는것을 보고 이제야 이연화의 목숨에 생각이 미쳤어. 방다병 또한 이연화의 다른 손목을 잡고 맥을 짚는데 이연화는 아무렇지 않은척 했지만 다소 불안했어.
규칙하게 뛰는 맥은 미약하기 짝이 없어 반송장이나 마찬가지였어. 그런데 뭔가 평소와 좀 다른 기운이 느껴졌는데 정체를 알수 없었어. 비차지독의 영향인가? 좀 더 깊이 재보려는데 이연화가 드 팔을 빼냈어.
- 뭘 그렇게 재봐. 나 아직 안죽었어.
추워서 입술이 파랗게 질렸는데도 입심은 있으니 적비성은 그 점에서 조금은 안심이 됬어. 투덜거리며 적비성의 옷을 움켜잡는데 여전히 추운지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게 여전히 보였어. 방다병은 허리춤에서 술병을 꺼내 내력으로 덮혔어.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나니 한모금 마시면 딱 좋을것 같은데 뱃속의 아이를 생각하니 술을 마실수가 없었어. 이연화는 고개를 저었어.
- 왜? 마시면 도움이 되잖아
이연화의 얼음장 같은 손에 방다병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계속 권했지만 이연화는 몸이 안좋아 술이 안받노라며 거절했어. 순한 눈망울에 한층 더 그림자가 드리우는것을 보니 조금 켕기긴했지만 뭐 아예 거짓말은 아니니까...그러다 갑자기 또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이 덮쳐왔어. 한독이 발작하기 시작한거지. 방다병은 재빨리 양주만을 이연화에게 주입하기 시작했어. 양주만의 양기가 몸속에 들어오니 속이 뒤집히며 가슴을 쥐어짜는 통증이 점차 줄어들었지만 몸속의 독기로 이연화는 여전히 피를 한웅쿰 토해냈어. 기운이 딸려 쓰러지려는것을 적비성이 받아냈어. 숨을 헐떡이며 입가에 피가 흐르는 모습을 보니 지난날 망천화를 넘기고 쓰러졌던 모습이 떠올라 방다병은 이연화에게 계속 양주만을 불어넣었어.
-...이제 괜찮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기는 좀 남아있어 몸은 계속 바들바들 떨렸어. 혀를 차며 적비성은 이연화를 제 품에 끌어 안았어. 졸지에 안긴꼴이 되어 이게 무슨짓인지 싶어 이연화는 몸을 일으키려 했어.
- 얌전히 있어라
한차례 발작을 하고 난 뒤라 기운이 없는탓도 있었지만 적비성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온기에 이연화는 저도 모르게 파고들었어. 기혈이 막힌 몸은 여전히 냉랭해서 적비성도 내력을 돌려 몸의 체온을 더 올렸지. 기댄 이연화의 미간히 한결 더 편안해지자 겨우 안심이 됬어.
이연화는 늘 혼자서 견뎌왔어. 지금도 너무 기대면 안되는데, 빨리 떠나야 하는데 머리속으로 끊임없이 되내였지만 몸안에 도는 방다병의 양주만과 겉에서 감싸주는 적비성의 체온이 너무 따스해서 이연화는 가물가물 눈이 감겼어.
****
-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고 했지...
방다병은 기절한 이연화를 보며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어. 파리한 낯의 굳은 미간은 쉬면서도 별로 편안해 보이지 않았어. 적비성과 방다병은 누가 먼저라고도 할것없이 한숨을 푹 내쉬었어. 사람 찾겠다고 몇번을 들락날락 거리던 도성이었어. 겨우 몇발자국만 나서면 보이는 곳에 있을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적비성은 불현듯 각려초를 피할때 신방에 숨어들었던게 떠올랐고 이제야 그걸 기억해낸 자신을 탓했어. 이연화가 얼마나 능구렁이같은지 뻔히 알면서...마음이 조급해서 이리라.
둘은 다시 가만히 이연화의 맥을 잡아봤어. 온 몸에 기혈이 막히고 음기가 형형해 뼈속까지 독이 녹아들어있는데 미약한 내력으로 단전을 보호하고 있는데 그때문에 목숨줄이 이어지나, 온통 혼란스럽기 그지 없는 몸상태였어. 아무튼 어떻게 여전히 살아있는지는 부차적인거고 살아있어 다행이지만 이걸 살아있는걸로 쳐야하나 싶은거지. 정말 바람앞의 촛물처럼 깜빡깜빡이는 생명줄이라 지금 당장 꺼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어. 창백한 낯은 핏기 하나 없고 드리내린 속눈썹이 더욱 버겁게 달려있어. 이런 몸에 달고 있는 검푸은 멍은 마치 죽음의 손길처럼 스며들어있어 더욱 마음을 무겁게 했어.
- 일단 찾았으니까 됬다
방다병은 눈시울이 뜨거워 두 눈을 깜빡깜빡 거리며 고개를 끄덕였어.
- 그래, 살아있을줄 알았어. 봐 내가 그랬지. 이연화는 얄미워서 저승사자도 안데려갈거라고
적비성은 피식 웃었어. 품안의 이연화는 기억하는것 보다 더 작고 가벼워 그저 종이 인형을 안고 있는것 같았지. 미약한 숨이 없었다면 창백한 얼굴은 이미 죽은 사람이라 여겨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것 같은데 자신들을 보고 능청떨던 이연화를 보니 그도 맞는것 같았지. 적비성은 이연화를 안은 팔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어. 십년의 기다림도 겪어봤어도 불과 몇개월의 기다림이 더욱 힘들었어. 두번다시 놓치지 않으리라.
이연화가 깨지 않도록 목소리를 죽이며 방다병과 적비성은 앞으로의 일을 논의했어.
****
이연화는 간만에 푹 잔것 같았어. 밤에는 늘 기침 때문에 잘 자지 못하곤 했어. 그래서 낮에 자주 조는데 그냥 기력이 딸려 잠깐잠깐 정신을 놓는거라 제대로 된 수면도 아니었지. 여전히 머리가 어질한데 개운한 느낌이 있어 왠일인가 의아해하며 기지개를 피려는데 팔에 묵직한 무언가가 걸렸어. 이게 뭐지? 흐릿한 시야를 몇번 껌뻑이며 힘을 주니 제 팔목을 감고있는 것이 보였어.
..구속구?
튼튼해 보이는 수갑이 양 팔목을 단단히 감고 있었어. 순간 또 납치 당했나? 경계심을 올리며 날카롭게 주변을 둘러봤는데 여전히 허름한 제 집이었어.
- 깼어?
방다병이 일어나려는 이연화의 등을 받쳐주며 따뜻한 물 한잔을 건넸어. 이연화는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되어 길게 한숨을 내쉬었어. 양팔의 구속구는 힘으로 부술수 없을정도로 단단했지만 안쪽에는 부드러운 헝겊이 덧대어져 연약한 피부를 보호하게 되있었어. 손을 움직이기 불편해 방다병이 먹여주는 물로 마른 목을 축이다가 욱하는 마음이 들었어.
- 너네 정말 이러기야?
끌려갈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할줄은 몰랐는데. 둘이 어떤 작당을 했는지 몰라도 아주 단단히 작심했나 보지. 쉽게 빠져나가기 어렵겠어... 조용히 한탄하는데 그 생각을 읽는듯 적비성을 말했어.
- 네 업보라고 생각해라
짜증을 팍팍 내는 이연화에 방다병은 당연한거라는 듯 적비성의 곁에서 고개를 주억거렸어.
- 니네가 언제부터 친했다고 한마음 한뜻이야
- 네가 떠난날 부터
음울하게 덧붙이는 방다병에 이연화는 속으로 움찔했어. 적비성의 무뚝뚝한 얼굴이야 이골이 났지만 방다병의 처진 모습은 은근한 죄책감을 가져왔어. 이연화는 시선을 돌리며 팔을 들어올렸어.
- 이 꼴로 어떻게 밖으로 나가
적비성은 한쪽에 벗어놨던 자신의 장포를 다시 이연화에게 덮어줬어. 큰 옷품으로 가리니 몸이 쏙 들어갔지. 미약한 저항이었고 씨알도 안먹히는 반항이었다. 이연화는 씩씩거리며 일어났어. 무거운 팔을 이끌고 집을 정리하고는 낡은 문이지만 문단속도 꼼꼼하게 했어. 적비성과 방다병은 결코 이연화를 이 집으로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지만 그냥 내버려뒀어. 볼품없었어도 이 집 또한 이연화를 품고 있었던 장소였으니까.
***
도성의 객잔에 무안이 마차를 준비해 놨다고 했어. 비는 그쳤지만 날이 저물어 가기에 거기서 하룻밤 쉬고 다음날 출발 하자고 했어. 걸어가는 내내 숨이 차다느니, 걷기 힘들다느니, 토 할것 같다느니 온갖 핑계를 다 대가며 걸음을 멈추고 호시탐탐 빠져나갈 기회를 봤지만 적비성과 방다병은 이연화의 옆에 딱 붙어 한 발자국, 아니 반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았어. 심지어 불여우도 뒤에 바싹 따라붙으며 어서 가라는 듯 제 주둥이로 이연화의 다리를 밀곤 했어. 이 배은망덕한 강아지 같으니라고!
자길 어디로 데려갈건지 이연화는 계속 캐물었지만 두 사람을 별 다른 단서를 주지 않았어. 머리를 굴리건데 분명 금원맹이나 천기산당의 숨겨진 별채일테고 빠져나가기 힘든 곳이겠지. 천기산당은 기관으로 유명했고 금원맹도 별 기상천외한 사파의 기술이 있어. 만약 도망 가려면 오늘 밤 묶을 객잔이 마지막 기회겠지. 하늘이 종일 꾸물꾸물해서인가 객잔에 거의 다 도착했을즘에 또다시 비가 쏟아져 내렸어. 세 사람다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 객잔에 도착했지.
적비성과 방다병은 건강하고 또 내력을 돌려 몸을 말릴수있어 괜찮았지만 이연화는 덜덜 떨면서 방으로 들어섰어. 방안에 화로를 들이고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었지만 몸에 뿌리 박힌 한기는 겨우 덮혀졌던 몸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놨어. 방다병이 양주만을 또 불어넣어 줬지만 이번에는 별로 효과가 없는것 같았어. 이연화가 이를 딱딱 부딪히며 겨우 입을 열었어.
-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면 좀 괜찮을 것 같아..
파랗다 못해 보라색으로 질리는 입술의 이연화에 방다병은 점소이를 찾아 밖으로 뛰어나갔어. 적비성은 양주만이 듣지 않는걸 보고 비풍양백을 넣어봤어. 다급한 상황일때는 양주만 보다는 더 낫긴 해서 한숨 돌렸는데 그래도 떨림이 멈추질 않았어. 이연화가 마른 기침으로 숨을 헐떡이니 적비성은 찻잔을 가져오기 위해 몸을 돌렸어.
기회는 한번뿐. 적비성이 찻물을 준비하는 동안 이연화는 기민하게 움직였어. 지금 가장 골치 아픈건 이 양 손목의 구속구야. 이런걸 하고서야 어딜 가도 눈에 뛸뿐더러 움직이기에도 용이하지 않지. 하지만 자신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아주 꽉 조이지도 않을뿐더러 안에 헝겁이 대어져 있으니 조금의 틈만 있어도 뺄수 있지. 두 사람의 연민을 이렇게 이용하는데 약간 미안했지만 이연화는 입술을 꽉 깨물며 자신의 엄지 손가락에 힘을 줬어. 관절이 툭 빠지는 소름 끼치는 느낌과 근육이 빠지는 고통이 퍼졌지만 이연화는 다시 이를 악물고 왼쪽 엄지 손가락도 똑같이 빼내었어. 빠진 관절덕에 두 손은 무리없이 구속구를 빠져나왔어.
이연화는 재빨리 창가로 몸을 날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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