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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6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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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를 타고 몇날 며칠을 달렸어. 수수한 마차는 겉모습과 다르게 안은 꽤 호사스러웠어. 푹신한 방석과 양탄자가 깔려있고 바로 차를 마실수 있게 작은 화로도 있었어. 대신 창에는 휘장을 내려 바깥을 전혀 볼수 없었지. 적비성과 방다병은 이연화을 사지를 구속하지는 않았지만 마차를 벗어날때면 대신 얇고 부드러운 천으로 눈을 가렸어. 이연화는 그럴 필요 없다고 한마디 하려다 조용히 쓴웃음을 지었어. 처음엔 어디로 가는지 바깥의 소리를 신경쓰고 어딜 어떻게 돌았는지 일일히 새어봤지만 곧 의미가 없다싶어 관뒀어. 어디로 가는걸 지금 알아서 뭐하겠어. 나중에 도망만 잘 갈수 있으면 되지. 게다가 아무리 편안하다 해도 마차는 마차, 쇠약한 몸으로 장시간 거리를 흔들리는 마차에 머무는게 적지않은 부담이 되어 여정 내내 반쯤 정신을 잃은 상태였고 어떤때는 눈을 떠보면 새로운 객잔의 천장을 마주하기가 일수였으니까.
마차 내부는 최대한 여행자의 편의를 위해 꾸며졌지만 이연화는 제대로 앉아있는것도 힘들었어. 두터운 어깨에 고개를 기대거나 부드러운 손길로 등을 다독이는것에 버텨봤지만 오늘도 덜컹거리는 마차에서 잠깐 기대었던것 같은데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었어. 흐릿한 눈을 몇번 깜빡였더니 누군가 익숙한 손길로 입술에 찻잔을 대어줬어. 한모금 받아마시고 나니 정신이 들었어.
- 이연화, 괜찮아?
밝아진 시야에 제일 먼저 들어온건 걱정스러움이 한가득한 방다병의 얼굴이었어. 괜찮다는 듯 이연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어. 몸을 일으키려하는데 힘이 안들어가 방다병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 앉아 주위를 둘러봤어. 오늘은 어떤 객잔이려나. 객잔에서 늘 최고급 방을 고른듯 비싼 티가 팍팍 방에서 머물곤 했는데 지금 있는 장소는 여행객을 위한 방과 달리 더 넓고 생활감있게 꾸며진 방이었어. 단촐하지만 세심하게 갖춰진 방은 포근한 분위기와 다르게 너른 창에는 어울리지 않게 단단한 창살이 박혀있었지. 이연화는 약간 혼란스러웠어.
- 여긴...?
- 앞으로 네가 지낼 곳이다
때마침 적비성이 문을 열고 들어왔어. 출입구 또한 일반적으로 쓰이는 나무 창살문이 아니라 감옥같이 튼튼한 강철로 만든거였어. 심지어 어른 손만한 두툼한 자물쇠도 달려있었어. 방안은 소박하니 군더더기 없이 편안하게 꾸며놨는데 창을 가로막는 살벌한 창살과 강철문이 부조화스럽게 어우러져 뭐든 다 부조리하게 느껴져어. 이연화는 어이가 없었어.
- 나 정말로 감옥살이 하는거야?
- 무슨 소리야, 널 살리려고 보호하는거지
이연화는 방다병을 째려보며 눈짓으로 창살을 가르켰어. 방다병은 뭐가 잘못됬는지 하나도 모르겠다는듯 뻔뻔한 얼굴이었어. 이연화의 눈썹이 꿈틀 올라가며 적비성도 쳐다봤는데 뭘 당연한걸 묻느냐는듯한 얼굴에 또 기가 막혀버렸지.
- 창살이 병도 치료할수 있는건지 몰랐네
- 바깥에서 객사하는건 막을수 있지
적비성이 바로 받아치는 말에 이연화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어. 어차피 죽을 몸 어디서 죽는게 무슨 대수냐고 이연화는 덧붙이고 싶었어. 두 사람앞에서 죽는것보다는 차라리 아무 길가에서 죽어버리는 편이 훨씬 낫다고. 표정없는 이연화를 보며 방다병은 나긋하게 말했어.
- 이연화 우린 그저 널 치료해주고 싶을 뿐이야...
한바탕 눈물을 쏟아붙고 난 이후 방다병의 태도는 한층 더 평소의 방다병 같아졌어. 조르기도 하는것 같고 애원하는것 같기도 하는것 같고. 거기서 드러나는 진심이 이연화의 심장을 옥죄었어. 맑은 눈동자는 사심없는 간절함만이 담겨있어 이연화는 시선을 마주할수가 없어 고개를 조금 돌렸어.
- ... 갇혀있는게 별로 도움을 안될것 같은데
작게 투덜거리는 것에 방다병은 금새 얼굴이 밝아졌어.
- 아냐, 밖에 나가고 싶으면 얼마든지 나가도 돼. 그냥 혼자만 나가지 말라는거지...
이연화의 시선이 다시 창살과 자물쇠로 향하니 방다병은 멋적은듯 머리를 긁었어. 그러니까 어쨋든 절대 혼자는 못나간다는 말이군. 이연화는 손바닥 아래 감기는 보드라운 이불의 감촉을 느껴봤어. 단순하고 소박해 보이는 방안의 물건은 전부 다 그냥 봐도 딱 고급품인걸 알수 있었어. 아주 호화로운 감옥이야... 속으로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지금은 일단 고분고분하게 굴어야겠다고 생각했어. 목 마르다고 차나 달라는 말에 방다병은 또 차를 직접 먹여주려 했지만 이연화는 아직 자기 안죽었다며 살짝 짜증을 내며 찻잔을 받아들었어. 향기로운 찻물이 목구멍을 훌어내리니 약간 심신이 느긋해 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몸이 편한만큼은 마음은 불편하기만 했어.
- 참, 그리고 관형이 곧 도착할거야
그 소리를 듣자마자 이연화는 마시던 차를 뿜어버렸어. 사례가 걸려 콜록이는것에 방다병은 등을 다독거려주며 사색이 됬어. 적비성이 다시 차를 따라주는 동안 방다병은 이연화가 자기때문에 병이 도지기라도 한것처럼 안절부절 못했어.
- 왜 그래? 혹시 또 독이 발작했어?
관하몽이 온다니! 물론 독을 치료하겠다고 납치 감금한거니 - 이연화는 이 두 단어에 다시 머리가 아파왔음, 아닌게 아니라 이거 정말로 납치 감금이잖아!- 의원을 불러올거야 당연한거고 그렇다면 형질이 변한건 물론이요 아이까지 탄로나는건 시간 문제였어.
-큼...콜록콜록, 아니 그냥 사례 걸렸어. 관..협의가 온다고?
방다병은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어. 여기로 향할때 전서구를 보내놨으니 곧 도착할거라고. 방다병은 관하몽이 하루빨리 오기만을 바랬어.
오는 내내 이연화는 거의 먹지도 못하고 툭 하면 각혈을 하고 깨있을때보다 정신을 잃을때가 더 많았어. 살이 쑥 내린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 함께 있어도 현실감이 없는것 같았지. 바람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워 보이지만 아직까지 살아있는걸 보면 분명 희망이 있는거라고 방다병은 믿었어. 동해 바다에서 관하몽은 이연화의 죽음을 단언했지만 지금 이연화는 잘만 살아있잖아? 그러니 어서 뭐든 치료를 시작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어.
이연화는 그저 차만 들이킬뿐 별다른 말을 덯지 않았어. 방다병은 이연화가 내켜하지 않는다는걸 잘 알고 있었어.
- 무슨 생각해?
이마를 살짝 찌푸리다 이연화는 한마디 툭 내뱉었어.
- 배고파
- 어..?
- 배고프다고
일단 이연화가 무슨 생각인지는 접어두고 뭐든 두세숫갈을 넘기지 못하던 이연화가 음식을 찾으니 방다병은 벌떡 일어났어. 기왕지사 이렇게까지 된거 포기하고 우리 뜻에 따라준다는거겠지? 신선한 닭고기가 있다며 맛있는 계탕을 끓여주겠다고 방다병은 신나서 밖으로 달려나갔어.
긴 말총머리를 흔들며 뛰어가는 뒷모습이 꼭 꼬리를 흔들며 뛰어가는 불여우같아서 이연화는 조금 웃음이 났어. 그러다 문득 문이 그대로 열려있다는걸 깨닫고 열린 문틈 사이로 재빨리 바깥을 훔쳐봤어. 소담한 돌길과 녹음이 져있는 정원이 눈에 들어왔어. 모양세를 보니 그리 큰 규모의 가옥은 아닌것 같은데 겉으로 보기엔 그저 평범해 보이기만 했지. 주변이 조용한데 저 멀리 아련하게 새 우는 소리가 들리는것을 보니 아무래도 어디 산속이지 싶었어. 개 짓는 소리는.. 불여우겠지? 와중에 또 불여우는 잘 챙겨준것 같아 그건 좀 마음이 놓였어. 녹나무가 보이는것 같은데 남쪽으로 왔나... 그것만 보고는 당최 여기가 어디인지 알수 없었지만 이연화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어.
- 천기산당과 금원맹의 합작 기관을 경험해 보고 싶다면 얼마든지 나가라
뒤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이연화는 움찔 했어. 문은 열려있었지만 적비성은 퍽 여유로운 자세로 앉아 있었어. 첫째로 이연화의 몸상태로 무리라는걸 알고 있고 둘째로 지금의 이연화를 제압하는건 개미 한마리 잡는것 보다 쉬웠으니까. 적비성이 잘 아는것을 이연화가 모를까.
- 내가 언제 나간다 그랬어?
뾰루퉁하게 답하는 이연화에 적비성은 콧웃음을 쳤어. 혼자서는 잘 걷지도 못하면서 깨어나자 마자 하는 짓이 방안의 상태를 살피고 바깥의 현황을 살피는 주제에 그런 생각이 퍽이나 없겠나. 여긴 천기산당의 별채중 하나인데 원래 새로 개발한 기관을 실험하던 곳이었어. 그래서 이런 저런 장치가 이미 잔뜩 설치되 있었는데 거기에 무안을 시켜 방다병과 상의해서 금원맹의 기술로 보완할 곳은 보완하고 필요한걸 더 더해놨지. 거기다 밖에는 기문둔갑까지 펼쳐놨으니 적비성 조차도 만약 자신이 여기 감금됬다면 매우 애를 먹을 정도로 튼튼한 감옥이 되었지.
방다병은 이연화가 이제 순순히 협조한다고 생각하는것 같았지만 적비성은 여전히 긴장감을 놓치 않았어. 이상이때는 고목처럼 단단한 성정이라 꺽일줄 몰랐고 이연화가 되서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 같아도 중심을 잃는 법이 없었어. 그는 한번 결심한것에 있어서 물러섬이 없고 기어코 제 뜻을 관통하곤 했지. 5년의 휴전 협정도 사실 당시 적비성은 맹이 무너지던 말던 별 상관은 없었지만 이상이가 끈질기게 밀어붙였기에 이루어진 협상이기도 했어. 아련한 옛일이 떠오르니 문득 햇살 아래 찬란하게 빛이 부서져내리던 문경이 떠올랐어. 그 휘날리던 광채에 시선을 뺏긴적이 있었지. 그 빛을 제 손으로 움켜쥐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십년을 버텨왔는데 이젠 하얀 재만 남아 흐트러지려 하는 이연화가 더 신경쓰였어.
잘거라며 다시 드러눕고 보란듯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팍 올리는 이연화의 모습에 시선을 떼지 않았어. 말은 저래도 여전히 여긴 어디고 어떻게 자신과 방다병을 때어낼까, 어떻게 여길 빠져나갈까 머리를 굴리고 있겠지. 이미 방다병을 가지고 한차례 협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결심을 기어코 관통하려고 하겠지. 적비성의 얼굴은 미묘하게 굳어졌어. 그만한 고집을 부릴 정도로 기새가 있는것은 좋은 일이나 그것이 죽을 길을 재촉하는건 전혀 반갑지가 않았어.
이연화는 곧잘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냐고 적비성을 타박하곤 했어. 누가 더 융통성 없게 구는건지 알수가 없군. 적비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어.
****
훨씬 더 좋은 잠자리에, 좋은 음식에, 따뜻한 방에 육신은 호사스럽기만 하지만 이연화의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해져만 갔어. 철창방에 가둔것도 모자라 적비성과 방다병은 아예 같이 지냈어. 한명이 밖에 나가면 반드시 한명은 이연화의 곁에 있었어.
좀처럼 혼자 있을 기회가 없어 이연화는 방안을 제대로 살펴볼수도 없었어. 그나마 눈대중으로 드문드문 확인한 것은 벽이나 창은 몹시 튼튼하여 왼만한 내공이 없으면 부술수도 없고 방안에 놓여있는 가구도 어떤 장치가 되있는것 같았어. 개미 한마리 들어올수 있는 틈조차 없이 빈틈없이 맞물려있는 공간은 정말 그 자체로 완벽한 감옥인것 같았어.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음인의 본능이 양인을 갈구하기 시작했다는 거야. 열성음인이라 형질이 옅을텐데 어째서 이런 욕구가 떠오르는지 알수가 없었어. 하루종일 내내 양인과 붙어있으니 딱히 향을 퍼트리지 않더라도 은연중 피어나는 기운때문인 걸까? 이제야 깨달았는데 단지 편안한 생활때문에 몸이 조금 개운한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적비성과 방다병의 존재때문인것 같았어. 우성양인이 둘이나 있으니 양인의 부재때문에 괴로웠던 음인의 몸이 조금 더 안정이 된거지. 그런데 이제는 그것보다 더 긴밀한것을 원하는것 같아 큰일 났다 싶었어. 이연화는 자신이 왜 이런 상태가 되가는지 알수가 없었어.
아이때문인가? 하지만 둘의 아이가 아닐텐데? 이때쯤해서 이연화는 뱃속의 아이는 적비성이나 방다병의 아이가 아닐거라고 확고하게 생각을 굳혔어. 그럴수 없으니까. 그래서는 안되니까. 필사적으로 계속 되내였고 이제 이연화 자신조차도 그것이 사실이라고 뇌리에 새겨넣었어.
*****
제발 오지 말라고 수십 수백번을 빌었지만 결국 그 날이 오고 말았어. 별로 반갑지는 않았지만 이연화는 아무렇지 않은척 인사를 건넸어. 오히려 관하몽이 눈에 뛰게 동요한 모습이었어. 늘 깍듯하게 예의를 차린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인사조차 허둥거렸어.
관하몽은 수척한 이연화를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어. 벽차지독은 해독제가 없는데다가 그나마 남아있던 내력도 제 수명을 깎아먹으면서 써대서 이연화의 생명력은 깨진 독의 물 마냥 줄줄 새어나가고 있었거든. 높게는 황실의 태의이던 낮게는 작은 마을의 의원이던 의원이라면 모두 이 사람이 염라대왕의 대문에 발 하나를 척 하니 걸티고 있는 상태라걸 모두 동의할거야. 여태까지 쌓아온 의학적 지식과 경험이 몽땅 깨지는 느낌이었어.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호기심이 치솟았지. 유연신침의 명예를 걸건데 절대 환자를 흥미로 대하지 않았어. 하지만 명백하게 이연화의 수명은 한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었는데 석달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숨이 붙어 있다니. 의원으로서 지적 호기심이 조금 일어나기도 했어. 또한 혹시 이연화를 치료할수 있다면 벽차지독에 대한 해결방안도 생기는거니까.
관하몽은 미적미적 팔을 내미는 이연화을 손목을 급하게 붙잡았어. 숨을 고르며 신중하게 맥을 잡기 시작했어.
적비성과 방다병은 관하몽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어. 둘의 눈에는 기대와 희망이 서려있었고 이연화는 가만히 고개를 떨구었어. 향이 하나 탈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두 눈을 지긋이 감고 있는 관하몽의 미간이 깊은 골이 파였어. 마른 팔목의 손가락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는데 그 모습을 보며 방다병과 적비성은 속이 타들어가는것 같았어.
눈을 뜬 관하몽에게 경악이 어려있었어. 방다병은 조급히 외쳤어.
- 관형 관형, 왜 그래요, 말 좀 해봐요 네?
관하몽은 섯불리 말을 하지 못했어. 심각하게 굳어진 얼굴엔 혼란스러움이 드러났어. 이연화의 시선에선 어떤 감정도 묻어나지 않았어. 관하몽은 이연화를 한번 보고 그의 몸을 훑어보고 다시 맥을 집었지. 적비성은 초조함에 뒤짐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이 잔뜩 들어갔어. 방다병이 계속 보채자 관하몽은 겨우 입을 열었어. 어렵게 입을 연 관하몽의 말은 최악을 각오한 적비성과 방다병에게 그 보다 더한 충격을 안겨줬어.
- 이문주는.... 임신을 했습니다
연화루 비성연화 다병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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