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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5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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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출퇴근 시간이 일정한 교사와 달리 회사원인 노부는 야근이 잦았다. 평소처럼 출근했다가 갑자기 12일 출장에 당첨돼 기차역으로 걸음을 돌려야 한다거나, 아침 7시에 긴급회의가 잡혀 면도도 못 하고 뛰어나가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면서도 케이에게서 라인이 오면 최대한 빠르게 답장했다. 물론 사귀기 전엔 늘 노부 쪽에서 먼저 보냈지만 이젠 제법 케이도 먼저 라인을 보내온다. 과장님이라고 뭐 다를까, 평범한 사원들과 마찬가지로 서류 더미 밑에 핸드폰을 숨겨 답장하거나 거래처와 급한 연락을 주고받는 척 중얼거리며 답장한다. 아무도 눈치 못 챈다.

 

 

 

회사에서 노부의 이미지는 승진 롤러코스터, 최연소 과장, P-제약회사 창립 이래 처음 있는 23회 연속 실적 1, 이 외에도 사적인 부분으로는 잘생긴 걔, 키 큰 걔, 결혼 안 한 걔, 남자 좋아한다는 걔, 야유회에서 노래 기가 막히게 부르던 걔, 등등이 있다. 대놓고 커밍아웃한 건 아니었지만 쉴새 없이 밀려드는 여자 사원들의 애정 공세에 지쳐있던 어느 날, ‘전 여자한테 관심 없으니 헛수고하지 마세요.’라고 말한 것이 하루만에 회사 건물 지하 2층부터 8층까지 쫙 퍼져 버렸다. 진짜 남자를 좋아하는 거냐는 질문을 한동안 받았고 그것 때문에 대리에서 과장으로 승진할 때 잡음이 있었지만 중요한 건 눈에 보이는 성과였다. 소란은 금방 멎었고 노부는 자기 실력에 따른 직급과 연봉을 얻었다. 제약회사 영업부서는 3년 이상 근무하면 독한 놈, 5년 이상이면 미친놈, 7년 이상이면 신으로 불릴 만큼 정신적 스트레스가 높았다. 하지만 그만큼 연봉이 높고 60세까지 꽉 채워 일하면 퇴직금 외에 사내 연금까지 20년 받을 수 있었다. 난다긴다하는 대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이 제약회사에 미친 듯이 이력서를 밀어 넣는 건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1년도 안 돼 나가떨어지는 게 보통이었고 노부와 함께 입사했던 동기들 사정도 비슷했다. 동기이자 동갑인 J는 이제 막 대리 직급을 달았는데 스트레스로 술을 너무 마셔 벌써 간이 안 좋아졌다. 노부 역시 대리 때까지는 술자리를 거절하지 못해 몸이 많이 상했지만 과장으로 승진한 뒤로 영업부 회식을 반으로 줄여 버렸다. 물론 윗사람이 부르는 자리엔 핑계 대지 않고 바로 달려간다. 그게 바로 회사원의 생존 법칙이니까. 그러니 아래 직원들은 술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자기 주량도 제대로 모른 채 이런저런 접대 자리며 회식 자리에 끌려다니는 20대 초중반의 사원들을 보면 마음이 안 좋았다.

 

 

 

카드 줄테니까 이걸로 마음껏 먹어요. 난 선약이 있어서 못 가요.”

 

 

 

평사원과 대리만 회식 자리를 마련해 주고 노부는 빠졌다. 충분히 끼어서 놀 만한 또래였지만 직책 차이가 주는 불편함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엔 저녁마다 데이트가 있기도 하고.

 

 

 

, 또 늦어 버렸다. 진짜 미안해요.”

괜찮아. 길 건너에 서점 있어서 책 좀 구경했어.”

오늘은 뭐 먹을까요? 우동 아니면 카레?”

둘 다 먹자.”

 

 

 

확실히 둘 다 잘 먹었다. 평범한 남자들보다 훨씬. 사람이 없는 거리에선 손을 잡고 걷다가 앞에서 누군가 걸어오거나 식당에 들어갈 땐 손을 놨다. 그러자고 말로 약속한 건 아니었지만 마치다가 먼저 그렇게 행동했고 노부는 묵묵히 따랐다. 아무래도 학교 선생님과 회사원은 입장이 다르니까.

 

 

 

우리 너무 만나면 먹기만 하는 거 아니에요?”

네가 너무 바쁘잖아. 맨날 일도 늦게 끝나서 저녁도 이렇게 9시에나 먹고.”

그건 그렇지만... 난 저녁 먹고 더 늦게까지 놀 수 있는데 케이가 다음날 수업에 지장 있다고 빨리 가버리잖아요.”

그러는 넌 주말에 상사랑 골프친다고 시간 없잖아. 난 주말 이틀 통으로 비는데.”

원래 영업 사원은 주말에 더 바빠요.”

 

 

 

마치다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우동 국물을 들이켰다. 유치하게 말다툼하거나 그렇게나 바쁘면서 왜 사귀자고 했느냐 따질 마음은 아니었기에 이런 상황이 껄끄러웠다. 직장 다니는 성인이 바쁜 건 당연한 건데. 매번 1520분씩 늦기는 해도 회사 끝나면 바로 만나러 와주는 게 고맙기도 안쓰럽기도 했다.

 

 

 

회사 많이 바빠?”

영업부니까 아무래도 그렇죠... 미안해요. 맨날 기다리게 해서.”

괜찮다니까. 그래도 자기 생일엔 안 늦겠지.”

 

 

 

바로 내일이 노부의 생일이었다.

 

 

 

직원들한테 미리 말해놨어요. 내일은 일찍 나와서 내가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러니까 미리 나오지 말고 꼭 정시에 와요. 알겠죠?”

. 혹시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내가 선물을 사긴 했는데. 너 특별히 갖고 싶은 거 있으면 그것도 줄게.”

선물 안 줘도 되는데 뭐하러 샀어요. 난 케이만 있으면 되는데.”

 

 

 

마치다는 징그럽다며 고개를 젓고 남은 국물도 후루룩 마셨다. 목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가게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마치다는 노부 셔츠 깃에 붙은 먼지를 떼어 바닥에 버렸다. 입술에 묻은 크림을 닦아준 것도 아니고 입바람으로 눈을 후 불어준 것도 아닌데 괜히 얼굴이 뜨거워졌다. ‘내가 왜 그랬지. 그냥 둘 걸.’ 다 먹은 그릇을 괜히 박박 긁어대는 마치다를 보며 노부는 씨익 웃었다.

 

 

 

그러면 복 달아나요.”

, ...”

나갈까요? 케이는 내일만 힘내면 되니까 나랑 좀 걷다가 가요. 산책 정도는 같이 해줄 수 있죠?”

. 내가 낼게.”

아니에요. 내가 낼게요.”

어제도 네가 샀잖아.”

내일 내 생일이니까 맛있는 거 사줘요. 비싼 거.”

그래.”

 

 

 

남자친구가 계산하는 동안 뒤에 서 있는 기분은 묘했다. 그 시간이 왜 그렇게 길게 느껴지는지 꼭 벌 받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장기자랑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전에 사귀던 남자도 곧잘 데이트 비용을 냈는데 그 사람은 연상이라 그런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하지만 노부는 연하니까 조금 미안하달까. 그래도 확실히 교사보다는 많이 버니까 괜찮을지도.

 

 

 

.”

 

 

 

노부가 손을 내밀자 마치다가 주변을 휙 둘러보고 잡았다. 자기보다 키가 크고 어깨도 넓은 건 예전부터 알았지만 손이 이렇게 큰지는 최근에야 알았다. 며칠 전 처음으로 손을 잡았을 때 깜짝 놀라 아래를 내려다봤을 만큼, 어릴 적 아빠 손처럼 크고 두꺼웠다. 특히 손가락이 굵어 얘는 반지를 몇 호 낄까?’하는 순수한 궁금증이 생겼다. 커플링 따위를 생각한 건 아니고. 예쁜 공원을 가로질러 길쭉하게 뻗은 가로수길로 향했다. 마치다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나 집까지 데려다 주지 말고 저기까지만 갔다가 가.”

방에 불 켜진 것 까지 보고 갈건데요?”

우리가 10대도 아니고, 느끼한 구석이 있다니까.”

“30대도 집에 잘 들어갔는지 궁금하거든요?”

 

 

 

 

끝내 집 앞까지 함께 걸어온 노부는 마치다가 아담한 단독주택으로 들어가 거실 불을 켤 때까지 대문 앞을 지켰다. ‘나중에 결혼하면 이런 단독주택이 좋겠지? 아이라도 입양하게 되면... 아무래도 마당이 있는 편이 좋으니까. 물론 요즘은 아파트 공원도 잘 되어있긴 하지만, 집 마당에서만 만들 수 있는 추억 같은 게 있잖아.’ 가로수길을 되돌아오면서 노부는 혼자 많은 생각을 했다. ‘아빠가 두 명이라고 아이가 혼란스러워 할 때 뭐라고 말해주면 좋으려나... 차라리 케이랑 미국 가서 살까. 여기보다는 나을 거 아냐. 하지만 회사 때문에 좀 그렇네...’ 생일 전날인 것 치고는 이런저런 기대감이 없었다. 이미 원하던 걸 얻었기 때문일까. 케이와 연인 사이가 되니 별로 갖고 싶은 것도 특별히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저 케이와 배불리 먹고 방바닥에서 뒹굴뒹굴하다 잠들고 싶었다.

 

 

 

다음날 오후 6. 마치다는 진작 노부의 생일 선물을 들고 번화가 앞에 나와 있었다. 아무래도 회사원이니까 셔츠와 넥타이가 무난할 것 같았다. 회사원들은 각자 고집하는 브랜드나 꽂혀있는 색상이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며칠을 유심히 봤다. 노부는 늘 D브랜드의 하늘색이나 흰색 셔츠를 입었고 넥타이 브랜드는 모르겠지만 짙은 푸른색 아니면 검은색 넥타이에 심플한 무늬가 들어간 걸 즐겨 했다. 똑같은 걸 사기는 좀 그래서 D브랜드의 연분홍색 셔츠와 짙은 붉은색 넥타이를 샀다. 아무래도 선생님보다는 더 다양하게 입을 수 있을 것 같아 고르는 재미가 있었다. 예쁜 구두도 있었는데 신발 선물은 연인 간에 하는 게 아니란 소리를 듣고 내려놨다.

 

 

 

오후 7. 만나기로 한 시간은 615분이었다. 노부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고 전화도 받지 않았고 나타나지도 않는 중이었다. ‘오늘도 역시 늦네.’라고 생각한 건 645분까지였다.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연락 없이 늦은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노부 무슨 일 있어? 약속 잊은 건 아닐테고... 나 아직 기다리는 중이야. 분수대 앞에 있어. 언제 오는지라도 알려주면 좋을 것 같은데... 19:32]

 

 

 

분수대 앞에 서 있는 동안 전화 번호를 알려줄 수 있느냐 묻는 여자가 두 번, 혹시 백수면 우리 가게에서 일 해보지 않겠느냐 묻는 호스트빠 삐끼가 한 번 말을 걸어왔다. 9시가 되니 거리는 점점 술에 취한 사람들로 붐볐다. ‘회사에 급한 일 생겼나 보다. 종일 바빠 핸드폰 충전을 못 해 그렇겠지, 연락할 방법이 없어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을 거야, 교통사고라도 난 건 아니어야 할 텐데.’ 누군가를 한자리에서 이토록 기다려 본 건 처음이었다. 내일 주말이긴 해도 피곤이 몰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연락해 보고 답이 없으면 그냥 집에 돌아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신호음이 한참 이어지다가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안내음성이 흘러나왔다. 마치다는 크게 한숨을 쉬고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집에 도착해서도 몇 번이나 라인을 보냈지만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병원에 있을 거라고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과로로 쓰러졌거나 약속 장소로 나오다 교통사고를 당했거나. 아니면 요즘 뉴스에 나오는 질 나쁜 10대들에게 폭행을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12년을 알고 지내오면서 이렇게까지 연락이 안 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같이 사는 것도 아닌데 마치다는 괜히 집 앞에 나가 봤다. 왠지 노부가 늦게라도 찾아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자기 생일이니까. 잊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자정이 되기 직전, 손에서 진동음이 길게 울렸다. 노부유키라는 이름을 보자마자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전화를 걸어온 게 경찰이나 병원 관계자일까봐 무서웠다.

 

 

 

여보세요? 노부? 어떻게 된 거야.”

... 미안해요... 지짜 미안해요...”

뭐야... 너 설마 취한 거야...?”

 

 

 

긴 정적이 흘렀다. 그게 아니라는 말을 빨리 해줬으면 했는데 노부 입에선 그게 아니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술 마신 거지? 우리 만나기로 했잖아.”

그러니까요... 미안해요... 아 지짜 어떡하지...”

 

 

 

어눌한 발음으로 사과만 반복하는 게 너무 듣기 싫어 귀에서 핸드폰을 뗐다. 믿을 수가 없었다. 남자친구라서가 아니라, 누구든 이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일 끝나자마자 밥도 안 먹고 종일 분수대 앞에 서서 남자친구를 기다린 자신이 한심했다. 종일 정장 구두를 신고 있었더니 발바닥도 아프고 혹시 늦게라도 찾아올지 모르니 여태 굶고 있어 배가 미친 듯이 고팠다. 이 모든 상황이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못 오면 못 온다고 연락이라도 미리 줬어야지. 멋대로 선약 깨고 다른 사람 만난 것도 싫지만 연락조차 없었다는 게 너무...”

케이... 미안해요...”

난 네가 사고라도 당한 줄 알았어.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남 바람맞힌 적 없는 애라는 거 아니까.”

 

 

 

 

다른 것보다, 노부가 병원에 있을 거라고 확신했던 그 시간이 너무 힘들었다. 마치다는 노부가 아픈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가 술에 취한 목소리에 무너졌다.

 

 

 

다른 거 다 떠나서... 다른 사람 바보 만드는 짓은 하지 말아야지. 네가 뭔데 내가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해? 그렇게 생일 생일 노래를 부르더니 결국 이거야?”

케이... 내가 엄청 좋아하거든요...”

좋아하는 사람한테 무슨 이런 짓을 해. 끊을게.”

 

 

 

똥차였던 예전 남자친구도 이런 적은 없었다. 어려서 그런가 싶다가도, 그래도 서른이잖아. 마치다는 화나고 허탈한 마음에 더 배고픈 기분이 들었다. 집 앞에 나와 있던 김에 그대로 편의점으로 향해 군것질거리를 잔뜩 골랐다. 새로 나왔다는 맥주도 사고 동료 교사가 입에 달고 사는 감자칩도 샀다. 운동을 다니지는 않지만 평상시에 군것질을 안 하는 것으로 나름 몸 관리를 하던 사람이 오늘은 그냥 다 놔버리고 싶어졌다. 거실 탁자에 과자와 맥주를 늘어놓고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틀었다. 집중해서 보지 않아도 돼 좋아하는 작품이었다.

 

 

 

[케ㅔ잉... 미안해료 진짜 도저히 거절할수없 는 접대0가 잡혀ㅛ서... 라인 ᅟᅩᆸ내려고 여러 버ㅓㅓㅓㅓ 시도해6는데 실패했ㄹ호요. 아 토할것강 아 00:21]

 

 

 

그러든가 말든가. 너만 사회생활 하냐. 뭐 라인 보낼 시도 했는데 실패해? 말이 돼? 핸드폰 뺏기지 않은 이상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고. 누굴 바보로 아나. 변명하는 것도 최악이야.’ 핸드폰을 뒤집어 놓고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켰다. ‘내가 왜 이런 기분으로 주말을 맞아야 하는 거야... 이래서 연애는 할 필요가 없다니까. 내 생일이냐고, 지 생일이지. 웃기지도 않아 정말.’ 그렇게 노부의 첫 생일은 엉망으로 지나갔다.

 

 

 

미친 새끼. 죽어라 죽어.”

 

 

 

새벽 6, 화장실에서 눈을 뜬 노부는 자기가 마치다에게 보낸 라인을 보며 소리질렀다. 약속 장소에 나가지도 않고 연락도 못 받고, 구구절절 변명까지 최악이었다. 다른 제약회사에서 파견 왔다던 영업부 직원이 알고 보니 노부의 과장 자리를 꿰차기 위해 윗선에서 내려보낸 인물이란 걸 알게 됐다. 같은 과장급들 중 까맣게 어린놈과 비슷한 연봉을 받는 게 불쾌하단 무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들에겐 눈에 보이는 성과는 중요하지 않았다. 파견 왔다던 그 직원은 노부 보다 아홉 살이나 많아 다른 과장급들과 얼추 나이대가 맞았다. 윗선에 아부 떠는 데에 진심이라는 점까지 그들과 수준이 잘 맞는 인물이었다. 자신이 어떤 무리에게 눈엣가시라는 사실을 안 이상 노부도 안 하던 짓을 해야만 했다. 평소라면 단호하게 거절하고 빠졌을 술자리에 제발로 들어간 것이다. 전무 이사는 노부의 등장에 화색이 돌았다. 우리 회사를 이끌어갈 젊은 인재라며 미친 듯이 술을 따라줬다. 술잔이 빌 새가 없었다. 방에 들어가기 전 마치다에게 라인을 보내려고 했지만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는 순간 다른 과장이 노부를 끌고 들어가는 바람에 기회를 놓쳐 버렸다. 그 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전화를 받을 수도, 걸 수도.

 

 

 

노부는 망설임 없이 택시를 타고 마치다의 집으로 향했다. 초인종을 여러 번 누르자 안에서 불이 켜졌다.

 

 

 

케이! 나 왔어요! 문 좀 열어줘요! 내가 진짜 죽을죄를 지었어요!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돼요? 아니 용서 안 해도 되니까 얼굴 좀 보여줘요! 케이!”

 

 

 

문을 열고 얼굴을 내민 마치다는 군것질을 잔뜩 하고 잠들어 퉁퉁 부어있었다. 슬리퍼를 신고 작은 마당을 지나 대문 앞에 섰다.

 

 

 

동네 사람 다 깨울 일 있어? 조용히 해.”

케이 진짜 미안해요... 진짜 진짜 미안해요. 내가 미친놈이에요. 때릴래요? 화 풀릴 때까지 때려도 돼요. 무릎 꿇을까요? 케이가 일어나라고 할 때까지 무릎 꿇고 있을게요.”

목소리 좀 낮추라니까.”

 

 

 

마치다는 대문을 열었다. 열린 틈으로 몸을 급하게 집어넣는 노부 때문에 하마터면 입술이 스칠 뻔했다.

 

 

 

뭐라고 말해도 다 변명일 뿐이라 할 말이 없어요. 나 많이 기다렸죠. 몇 시까지 있었어요?”

11시까지 있었는데?”

 

 

 

거짓말을 조금 보탰다.

 

 

 

왜 그랬어요. 그냥 일찍 가버리지. 아니 그렇다고 내가 지금 케이를 탓하는 건 아니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요. 미안해요.”

널 오래 기다린 게 화난 게 아니라, 난 네가 사고 났을까 봐 걱정했었어. 거의 여섯 시간 만에 연락이 닿았는데, 술 취해서 발음도 제대로 못 하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내 기분이 어땠을 것 같아?”

“......”

네가 아무렇게나 누구 바람맞힐 사람이 아니란 거 아니까 더 걱정했단 말이야.”

 

 

 

노부는 고개를 푹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마치다가 발언 기회만 준다면 미안하다고 다신 안 그러겠다고 백 번 천 번 말하고 싶지만 섣불리 입을 열었다간 더 화나게 할 것 같았다. 마치다가 하는 말이 전부 옳았다.

 

 

 

그냥 잠이나 푹 자고 일어나서 전화하면 되지 뭐하러 여기까지 와...”

, 케이 보고 싶어서... 어제 만나기로 했는데 못 만났으니까 나 때문에...”

술 냄새... 너 씻지도 않고 왔어?”

, 미안해요. 술 냄새 많이 나요?”

진짜 심해. 일단 들어가서 좀 씻어. 오늘 출근 안 할 거 아냐.”

 

 

 

노부는 마치다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예전에 몇 번 온 적 있었다. 그땐 잠깐 들러 만화책을 빌리거나 했을 뿐이라 새삼 느낌이 달랐다. 현관을 지나 거실로 들어서니 마치다 특유의 냄새가 났다. 섬유유연제와 디퓨저 냄새.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깔끔하고 향기로웠다. 냄새나는 상태로 대화하기 싫어 욕실을 빌렸다. 칫솔 한 개, 면도기 한 개. 언젠가 이것들이 두 개로 늘어나는 날을 자기도 모르게 상상해 버렸다. 잔뜩 혼나고 들어온 주제에.

 

 

 

욕실 안에서 물소리가 들려오고 마치다는 냉장고에서 먹을만한 걸 찾기 시작했다. 술 마신 다음 날엔 뜨끈한 국물 요리가 최고니까 전에 사둔 전골 재료를 꺼냈다. 사실 술 때문에 속이 거북한 건 마치다도 마찬가지였다. 버섯과 두부를 자르고 고기도 깔끔하게 꺼내놓으면서, 지금 이 그림이 꼭 신혼부부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귀 끝이 뜨거워졌다.

 

 

 

좋아서 해주는 거 아니야. 나도 먹으려고 하는 거지... 겸사겸사.”

 

 

 

듣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찔려서 중얼거렸다. 욕실에 수건이 없다는 걸 이때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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