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53107761
view 3952
2023.07.12 20:57




1 2 3





26adbaf639cadbf338667ae581044174.jpg






 

[출장 잡혀서 토요일까지 도쿄에 있을 거예요. 다녀와서 만나요. 08:00]

 

 

 

어제 일이 그렇게 되었으니 오늘부터 뭔가 있을 거라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학교에 데려다준다고 하면 어쩌지, 점심 같이 먹자며 짬 내서 달려오면 어쩌지, 교사 식당에서 노부가 만들어 온 도시락을 먹게 되면 어쩌지, 교문 앞에 찾아와 학생들에게 케이는 내 애인이니까 다들 넘보지 말라고 헛소리하면 어쩌지. 하지만 노부는 얌전히 자기 삶을 살 모양이었다. 오늘 당연히 데이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 자신만 조금 우스워졌다. 꾸물꾸물 침대를 벗어나 거울 앞에 섰다. 괜히 안경을 썼다 벗었다, 가르마를 왼쪽으로 탔다 오른쪽으로 탔다, 평소엔 하지 않던 부산을 떨어 버렸다.

 

 

 

노부보다 다섯 살은 많아 보이지 않나.”

 

 

 

혼잣말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름이 돋은 마치다는 다시 안경을 끼고 서둘러 출근 준비를 했다. 버스 타고 출퇴근하는 교사는 마치다 뿐이었지만 겨우 네 정거장이면 되는 거리 때문에 차를 사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학교를 옮기게 되면 그땐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아니다. 오늘은 학교 근처 번화가에 들를 일이 있어 한 정거장 전에 내렸다. 지각하면 안 되니까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데 누군가 선생님이다!’하고 외치는 소리에 멈칫했다. 돌아보니 파란색 명찰을 달고 있는 2학년 학생이었다. 학년별로 명찰 색이 달라 구분은 쉬웠다. 선생님도 샌드위치 먹고 가시려는 거냐는 질문에 대충 그렇다고 얼버무렸다. 언젠가 이쪽 번화가에 유명한 샌드위치 가게가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원래의 목적은 샌드위치가 아니었지만 괜히 학생에게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주기 싫어 샌드위치만 하나 사서 학교로 향했다.

 

 

 

저기, 나 안경 벗으면 어때?”

? , ... 어색하긴 한데 안 이상해.”

안 이상... 하다고? 그게 다야?”

. 안경 안 끼고 다니게? 넌 어차피 이 학교 최고의 미남 선생이니까 노력하지 마.”

 

 

 

애들한테 잘생겨 보이려는 게 아니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책상에 놓인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중학생 때부터 줄곧 써온 안경을 벗어야겠다고 생각한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렌즈를 맞추려고 안경점까지 찾아간 건 처음이었다. 물론 학생에게 들켜 버려 구입은 못 했지만. 렌즈를 사더라도 노부를 만날 때만 착용할 것이기에 학생들 눈에 띄고 싶진 않았다.

 

 

 

퇴근 시간에 맞춰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노부유키라는 이름을 보고 주변을 살폈다. 오늘은 학생들보다 한참 늦게 학교를 나섰기 때문에 주변에 통화 내용을 엿들을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경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핸드폰 너머의 목소리가 너무 멀게 느껴졌다. 도쿄 기념품을 살까 했는데 생각해 보니 케이가 도쿄 출신이라 특별할 게 없을 것 같다는 둥, 도쿄 타워가 보이는 호텔이고 방이 아주 커서 혼자 있기 아깝다는 둥, 도쿄에서 제일 큰 제약 회사라서 그런지 구내식당 메뉴가 장난이 아니라는 둥, 낮은 목소리로 쉴 새 없이 떠드는 걸 들으며 마치다는 그냥 웃었다.

 

 

 

케이는 오늘 어땠어요?”

그냥 똑같았지. 올해는 담임을 안 맡아서 그런가? 스트레스 안 받는 대신 재밌는 일도 없네.”

역시 차이가 있구나.”

. 내년엔 아마 다시 담임 맡게 될 거야. 요즘 교사들 인력난이거든. 예전만큼 존경받지도 못하고 급여도 높지 않고 말이야. 분명 인기 없는 직업 1위일 걸? 내 친구가 초등 교사인데 요즘 애들은 장래 희망에 운동선수 아니면 유튜버만 적는대. 거의 7년 정도 됐다더라. 장래 희망에 선생님 적는 애들이 안 보이는 거.”

 

 

 

타야 할 버스를 눈앞에서 놓쳤다. 어차피 탈 생각은 없었다. 버스 안에서 통화하는 건 실례니까. 통화가 끝나면 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안해. 넌 이런 얘기 관심 없을 텐데.”

아니에요. 케이 일인데 당연히 관심 있죠.”

, 그래도. 넌 나한테 회사 얘기 안 하잖아.”

케이가 관심 없을 거 아니까요. 잘 모르는 분야여도 좋아하는 사람 직업이면 궁금하겠지만, 케이는 나 안 좋아했으니까.”

 

 

 

안 좋아했으니까-’라고 과거형으로 말하는 부분에서 마치다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회사 얘기 나한테 해도 돼. 해봐.”

정말이에요? 이번에 출장 온 이유가 개발 중인 치료제 후보물질에 문제가 생겨서거든요. 우리가 몇 년 전부터 도쿄 지사를 내려고 쏟아부은 노력이 있으니까 윗선에서 많이 예민한 상태예요. 계약 직전에 이런 이슈가 터져서... 듣고 있어요?”

. 듣고 있어. 그래서... 너 지금 도쿄에 가서 뭐 하는 건데? 하는 일이... 뭐야? 네가 그 약 만든 사람은 아니잖아.”

 

 

 

노부가 겨우 웃음을 삼켰다.

 

 

 

난 연구원이 아니니까 안 만들죠. 업계에서 우리 회사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지 않도록 신약 개발에 문제없다는 걸 증명하고, 또 도쿄 지사 내는 일에 차질이 생기지 않게 열심히 떠드는 일 해요. 물론 나 혼자 하는 일은 아니고요.”

뭔가 대단하다. 너 과장이지 벌써?”

확실히 운이 좋았죠.”

실력 있는 사람들이 꼭 운 좋았다고 하더라.”

케이한테 칭찬받으니까 기분 좋다.”

나도 너랑 얘기하는 거 좋아.”

 

 

 

바람이 갑자기 세게 불어 정장 자켓이 요란하게 펄럭였다. 너와 얘기하는 게 좋다는 말은 딱히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예전부터 느끼고 있었으니까. 노부의 마음을 전해 듣기 전부터, 이런 관계가 되기 전부터 느꼈다. 통하는 부분이 많고 대화 방식이 맞아 함께 있을 때면 확실히 즐겁다고. 전엔 무슨 얘기를 하며 그 오랜 시간을 통화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관계가 한 단계 더 발전했는데 할 말은 약간 줄어든 것 같다. 마치다가 통화하느라 버스를 여태 못 타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노부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장 라인을 보내왔다.

 

 

 

[보고 싶다고 말하는 걸 못 했어요. 토요일 오후엔 돌아가니까 그날 같이 저녁 먹어요. 괜찮죠? 일요일엔 케이가 좋아할 것 같은 영화 개봉하던데, 우리 그거 봐요. 20:01]

[영화 제목이 뭔데? 20:01]

[제목은 기억 안 나는데 사람 죽이고 그래요. 20:02]

[알았어. 재밌겠다. 토요일에 봐 그럼. 20:02]

[버스에서 내리면 우리 다시 통화하는 거 아니었어요? 20:02]

 

 

 

연애 초의 설렘, 장난 같은 집착 따위가 12년이나 알고 지낸 상대와도 가능하다는 게 놀라웠다. 서로에 대해 충분히 알면서도 이런 간지러운 태도 변화가 괜찮다니. 조금 더 투정이 많아진 듯한 노부가 귀여웠다. 집 앞 정류장에 내린 마치다는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못 하는 사람이라 노부와 전화 통화를 하며 제자리를 빙빙 돌았다. 걸음을 옮겨 집으로 가야 하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 봐야 두어 발짝 움직이고 멈춰서 구둣발로 바닥을 콕콕 찍는 게 전부였다. 마치다는 결국 11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갔다. 몸은 피곤했지만 정신적인 피로감은 없었다. 내일은 수업이 두 개뿐인 날이라 그런지 늦게 잠들어도 괜찮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수업이 두 개뿐이어서가 아니라 노부가 있어서, 피곤하면 피곤하다고 투정 부릴 만한 상대가 있어서 괜찮은 것일 수도 있다.










 

사흘 뒤인 토요일 오후 5시에 두 사람은 기차역 앞에서 만났다. 함께 술 한잔하자는 동료를 따돌리느라 아버지가 편찮으시단 거짓말을 했다는 얘기에 마치다가 깜짝 놀랐다. ‘그래도 그렇지 그런 거짓말은 하면 안 돼.’ 노부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 늘이며 웃었다.

 

 

 

케이 이럴 때 보면 정말 선생님 같다니까요.”

그게 아니라 그런 거짓말 하면 진짜 부모님이 아플 수도 있다고. 그럼 네가 죄책감 느낄 거 아냐.”

왜 그렇게 깊게 생각해요. 거짓말은 그냥 거짓말일 뿐이에요.”

 

 

 

노부가 어깨를 구부정하게 말아 마치다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누가 보면 키스라도 하려는 것처럼.

 

 

 

케이는 무슨 일 생길까 봐 거짓말도 못 하는 사람이겠네요 그럼. 진짜 그렇게 될 수도 있다고 믿는 사람이니까.”

, 그게 뭐.”

어떻다는 게 아니라. 우리 연애에 참고하려고요. 케이는 나쁜 일로는 절대 거짓말 안 하는 사람이라는 거. 기억할게요.”

 

 

 

그렇다고 거짓말을 아예 안 하고 사는 사람은 아니라서 조금 찔리는 기분이었다. 도쿄에서부터 기차를 타고 온 노부도, 저녁 데이트를 기다리며 한 끼도 먹지 않은 마치다도 배가 많이 고파서 가까운 식당에 불쑥 들어가 앉았다. 가게 주인 입에서 일행이 더 오느냐는 소리를 들을 만큼 많은 양의 음식을 주문하고 둘은 멋쩍게 웃었다. 다 먹을 수만 있다면 문제없는 거라고 서로 통하는 말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음식이 나오길 기다렸다. 막내인 마치다와 달리 장남인 노부는 척척 물을 따르고 물수건을 건넸다. 어쩌다 보니 챙김 받는 포지션이 된 마치다가 어색한 기분으로 손을 닦았다.

 

 

 

오늘은 꼭 네가 형 같다.”

왜 그런지 알아요?”

역시 넌 장남이고 난 막내니까 그렇지.”

난 일 끝나고 막 와서 정장 차림인데 케이는 쉬는 날이라 캐주얼하게 입었잖아요.”

, 듣고 보니 그렇네.”

안경 벗으니까 귀여워요.”

? 아니, 딱히... 안경이 부러져서 급하게 렌즈 꼈을 뿐이야. 거의 18년을 끼고 다니다가 안 끼니까 너무 허전하고 어색하다. 얼른 안경 고쳐서 끼고 싶어.”

 

 

 

노부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입꼬리를 씰룩이다 끝내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리 내 웃었다.

 

 

 

왜 웃어. 그렇게 안 어울려...?”

케이는, 정말 거짓말 못 하네요. 거짓말하기 싫은 게 아니라 못해서 안 하는 거였어요. 그쵸?”

무슨 말이야 갑자기.”

그냥 나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렌즈 꼈다고 해도 돼요. 그렇게 말해주는 편이 더 기분 좋아요 나도.”

아니거든? 내가 너한테 잘 보이려고 안경을 벗은 거라면 당연히 네가 눈치챌 테고, 지금처럼 이렇게 놀릴 텐데 내가 바보야? 먹잇감 되길 자처하게? 진짜 안경 부러진 거니까 이상한 얘기 하지 마. 귀엽다느니 그런... 나 서른둘이야 멍청아.”

 

 

 

테이블 밑으로 노부의 무릎이 맞닿았다. 마치다가 뒤로 조금 빠져 앉았더니 노부가 앞으로 당겨 앉아 또 무릎을 닿게 만들었다.

 

 

 

케이가 나한테 멍청이라고 말하는 것도 처음인 거 알아요? 친한 사이여도 말 가려서 하는 사람이잖아요. 내가 두 살 어려도 항상 존중해 줬고.”

, 미안. 나도 모르게...”

그래서 너무 좋아요. 난 그동안 케이가 너무 예의 차려서 서운했거든요. 세상에서 가장 친한 사람 같다가도, 묘한 벽이 느껴져서. 근데 이젠 조금씩 그 벽도 허물어지는 것 같아 좋아요. 진심으로.”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어물쩍대는 사이 직원 두 명이 접시를 잔뜩 들고 다가왔다. 음식을 보는 순간 두 사람 모두 감탄사를 뱉으며 젓가락을 잡았다.

 

 

 

첫 데이트에 분위기 못 챙겨서 미안한데 저 너무 배고파요. 일단 먹어요 우리.”

. 나도 배고파.”

 

 

 

정신없이 음식에 달려드는 와중에도 노부는 마치다가 좋아하지 않는 아스파라거스를 쏙쏙 골라 자기 접시로 옮겨갔다.

 

 

 

그러고 보면 넌 편식도 안 하지? 네가 나보다 더 어른 같은 구석이 분명 있다니까.”

케이는 오늘 내가 엄청 섹시한가 보다. 그쵸.”

 

 

 

밥알이 목에 걸려 캑캑대는 마치다의 등을 두드리며 노부는 웃음을 참았다. 이렇게 허술하고 귀여운 사람인 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동생들에겐 늘 점잖은 모습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그의 무드를 깨고 싶지 않아 모른 척 해왔다. 이젠 마음껏 귀엽다고 말할 수 있어서, 옆에서 직접 챙겨줄 명분이 생겨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해졌다. 겨우 진정하고 물 한 컵을 꼴깍꼴깍 마시는 모습도 사랑스러웠다. 등을 두드려 준 김에 은근슬쩍 어깨도 한 번 쥐어보고 목덜미도 쓰다듬어 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함께 할 날은 앞으로 많으니까.

 

 




7362283c2399b7ddcd3fe8285cecc415.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