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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0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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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문 앞에 훤칠한 성인 남성이 서 있으니 여학생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무슨 소란인가 싶어 빠른 걸음으로 운동장을 가로질러 오던 마치다는 여학생들 사이 우뚝 솟아있는 노부를 발견하고 멈춰섰다. 평소 미남 선생님으로 불리던 마치다까지 등장하니 교문 앞은 그야말로 팬미팅 현장이었다.

 

 

 

다들 모여있지 말고 어서 집에 가.”

선생님 오늘도 버스 타고 가세요? 저희랑 같이 타요!”

아니... 선생님은 오늘 택시 탈거야.”

그럼 저희도 태워주세요!”

정신없으니까 빨리 흩어져. 집에 가.”

 

 

 

그래도 역시 모르는 미남 보다는 아는 미남이 좋은지 학생들이 곧장 노부에게서 시선을 떼고 마치다에게 몰려들었다. 노부는 잠자코 빠져있었다. 교문 앞이 한산해진 뒤에야 마치다는 노부에게 따라오라고 조용히 말한 뒤 한참 앞서 걷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잘 다니지 않는 뒷길을 통해 겨우 대로변으로 나왔다. 동네를 완전히 벗어나기 전엔, 아니 어디 실내로 들어가기 전엔 절대 입을 열지 않을 생각이었다. 노부를 쳐다보거나 나란히 걷는 것도 절대. 학생들은 어디에나 널려있다. 신호 대기 중인 버스 안에도, 2층 카페 창가 자리에도, 편의점 안에도. 게다가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는 학생들도 있어 어딜 가나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 아이들은 직접 본 것에 몇 배쯤 부풀려 부모님이나 친구들에게 말해 버리니까. 그런 처지를 알아서인지 노부도 말 한마디 없이 적정 거리를 유지한 채 뒤를 따랐다.

 

 

 

전철 한 정거장 거리를 걸어 도착한 가정식집은 학생들을 아르바이트로 쓰지 않는 고급 식당이었다. 테이블마다 공간 분리가 확실해 중요한 미팅이나 상견례 장소로도 안성맞춤이고 무엇보다 식사 중에 괜히 어슬렁거리는 직원이 없어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난 소고기 정식 먹을거야. ?”

난 장어요.”

 

 

 

마침 직원이 차를 내오고 있었다.

 

 

 

소고기 정식 하나, 장어 정식 하나 부탁합니다. , 그리고 소고기 정식엔 생강 절임 올리지 마세요.”

 

 

 

마치다가 생강 절임 냄새를 싫어하는 사실을 당사자 보다 노부가 더 잘 기억했다. 함께 식사를 할 때면 늘 노부가 그 부분을 신경 써서 주문했다.

 

 

 

알러지도 아니고 매번 그렇게 말 안 해도 돼.”

그렇다고 먹을 것도 아니잖아요. 생강 절임 묻은 부분은 수저로 푹 퍼서 버릴 거면서.”

 

 

 

식사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꽤 걸릴 거란 걸 알았다. 이런 고급 식당은 동네 카레집과 다르니까. 그게 이 가게까지 굳이 찾아온 이유 중 하나였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으면서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4교시까지는 어떻게 하면 노부를 피할 수 있을까, 곧 다가올 노부 생일에 무슨 핑계를 대고 가지 않을까에 대한 고민뿐이었다. 그런데 점심 도시락을 세 개나 먹고 나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배가 부르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달까. 차라리 툭 터놓고 말하는 게 나중을 위해서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이 어떻게 날지는 몰라도 마냥 피하기만 해서는 안 될 인연이었다. 12년 우정을 그렇게 버릴 수는 없다.

 

 

 

네가 먼저 말해.”

뭘요? 할 말은 케이가 있는 것 같은데.”

? 네가 먼저 학교로 찾아왔잖아.”

할 말이 있어서 온 게 아니에요. 들으려고 왔지. 나는 오늘 전화로 내 마음 다 말했잖아요.”

 

 

 

희한하게도 늘 대화의 주도권이 노부에게 넘어갔다. 실적 내기 어렵다는 제약 회사 영업사원이라 그런지 노부는 말을 참 잘했다. 그리고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것처럼 공감 능력도 뛰어났다. 최연소 과장 타이틀을 어떻게 쟁취했는지 알 것 같았다. 마치다는 괜히 젓가락을 흐트려 놓았다가 바로 놓기를 반복하며 할 말을 골랐다. 음식이 늦게 나오는 식당을 애써 골라놓고 얼른 직원이 나타나 주길 바랐다.

 

 

 

난 그 약속 말이야... 진지하게 생각한 적 없거든.”

.”

그런데 너한텐 진짜였던 거지? 처음부터.”

내 마음이 진짜였냐고 묻는 거라면, 맞아요. 그런데 내 말이 진짜였냐고 묻는 거라면 모르겠어요. 촛불 앞에서 그 말을 뱉었을 때 케이가 진지하게 듣기를 원했거나 그 말을 10년 뒤에 꼭 지켜주길 원한 건 아니었을걸요. 그땐 그냥 장난처럼 말했을 거예요. 케이 당황하는 얼굴이 좋아서. 그 말이 내 진심이었단 걸 깨닫기까지는 나도 오래 걸렸어요.”

 

 

 

예상보다 더 확고한 대답에 그만 바보 같은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고만 말았다.

 

 

 

, 그래서.”

케이.”

“......”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노부는 마치다가 자꾸만 갖고 노는 젓가락을 더이상 만지지 못하도록 조용히 빼앗아갔다.

 

 

 

왜 딱 잘라 거절 안 해요?”

?”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할 수 있잖아요. 없던 일로 충분히 만들 수 있는 일을 왜 자꾸 확실하게 하려는 거예요? 내가 진심이라고 했는데도 피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해요.”

 

 

 

테이블 아래로 내린 두 손이 움찔거렸다.

 

 

 

? 그거야 당연히... 우리가 이런 일로 어색해지는 게 싫으니까 그렇지. 확실한 게 좋잖아. 앞으로 계속 잘 지내려면... 서로 하고 싶은 말 하고 다 털고 가자 이거지...”

이럴수록 확실해지는 건 내 마음뿐인데도요? 이건 털고 갈 수가 없는 건데. 나 혼자 간직하든가 케이가 받아주든가 둘 중 하나예요.”

 

 

 

직원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고 노부는 조금 전 빼앗았던 젓가락을 마치다 앞에 다시 놓았다. 음식을 놓으며 소고기와 장어의 원산지 따위를 설명하는 직원의 목소리가 듣기 싫어졌다. 보통의 마치다였다면 열심히 일하는 직원을 보고 상냥하게 미소지었을 테지만 오늘은 그냥 윤기 나는 소고기만 내려다봤다.

 

 

 

일단 먹어요.”

.”

 

 

 

직원의 발소리가 멀어지다 못해 안 들릴 때까지 음식만 내려다보던 마치다는 젓가락을 드는 대신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런데 넌 이미 말했잖아 나한테. 그럼 혼자 간직한다는 건 이미 물 건너간 건데. 내가 받아주지 않으면 나랑 절교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내가 케이 협박하는 거 아니잖아요 지금.”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내가 이미 아는 이상 어떻게 예전처럼 지낼 수 있는데 우리가.”

 

 

 

유리컵에 물을 한 잔 따라 마치다 앞으로 밀어준 노부는 미지근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없던 일로 하는 건 쉬워요. 내 연기만 흐트러지지 않으면 되니까. 내가 마음만 먹으면 몇 년 후엔 정말 없던 일이 될 수도 있어요. 10년 좋아한 마음을 어떻게 단숨에 없애겠어요. 그건 케이가 나한테 시간을 좀 줘야죠.”

나 나쁜 사람 만들지 마.”

케이는 나한테 무슨 짓을 해도 나쁜 사람 아니에요.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말고 밀어내요. 한마디면 돼요. 다시는 이딴 얘기 꺼내지 마, 라고 말해주면 돼요.”

 

 

 

마치다도 안다. 고백을 거절한다고 해서 노부가 인연을 끊으려고 하거나 나쁘게 굴지 않을 것이란 걸. 솔직히 말하면 노부만큼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상대도 없었다. 핀잔을 줘도 성가시다며 연락을 씹어도 노부는 늘 웃는 얼굴로 다시 다가왔으니까. 정말 다시는 이딴 얘기 꺼내지 말라고 해도 내일이면 평소 같은 얼굴일 것이다.

 

 

 

못 하겠어.”

뭘 못해요.”

너한테 그런 말 못 하겠어.”

여지 주지 말고 딱 잘라 거절해요. 내가 아무런 희망도 갖지 못하도록. 그럼 다 괜찮아진다니까요.”

 

 

 

너무 이상한 말이었다. 자기 마음을 거절하고 모질게 말해주면 다 괜찮아진다니.

 

 

 

네가 나 때문에 상처 받는 거 싫어.”

“......”

거절당하는 건 비참하잖아.”

“받아줄 것도 아니면서 시간만 끄는 게 더 비참해요.”

 

 

 

이틀 연속으로 노부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진 않았지만 의도와 달리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노부는 그 눈물을 보고도 선뜻 손을 내밀지 않았다. 지난밤 모텔에서처럼 눈물을 닦아주며 다 괜찮다고, 이젠 괜찮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마치다는 기억도 하지 못하는 한밤의 입맞춤도, 포옹도.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음식은 벌써 온기를 잃었고 노부는 약간 지친 얼굴이었다.

 

 

 

내일 일찍 외근있어서 먼저 일어날게요. 계산하고 갈 테니까 다 먹고, 조심해서 가요.”

 

 

 

노부는 점잖게 일어나 핸드폰과 주문서를 챙겼다. 마치다를 데리고 나가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의자를 밀어 넣었다. 그렇게 마치다의 옆을 지나쳐 나오려던 순간, 테이블 모서리에 걸리기라도 한 듯 소매가 당겨졌다.

 

 

 

가지 마. 나만 두고 가지 마... 노부.”

화난 거 아니에요. 먼저 갈게요 그냥.”

미안해.”

케이가 나한테 사과하면 우리가 여태 나눈 이야기가 아무 의미가 없어져요... 내 진심마저도. 난 케이한테 뭘 부탁한 게 아니에요... 우리 중 누군가 잘못을 했다면 멋대로 내 마음 전해버린 내 잘못이죠.”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는지 노부는 소매 끝에 매달린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떼려는 그때, 이번엔 소매가 아닌 손을 잡는 마치다였다. 12년을 알아 왔어도 손을 잡은 건 처음이었다.

 

 

 

그저 피부끼리 닿았다는 사실 그 이상이었다. 노부는 생각했다. ‘이 사람이 내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했구나.’ 손이 아니라 삶 전체를 붙잡힌 느낌이었다.

 

 

 

지금 하는 행동에 아무 책임도 지지 않을 거라면... 실수하는 거예요. 정말 나쁜 짓이에요 이거. 내 마음 받아줄 생각도 없으면 이렇게...”

아니야. 노부...”

뭐가 아닌데요 또.”

, 받아줄게. 책임질게.”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제대로 따져봐야 했다. 하지만 노부는 지금 지쳐있었다. 진심을 증명하는 일은 너무나 외롭고 고통스러운 것이란 걸 새삼 깨닫는 중이었다. 천천히 손을 뻗어 마치다의 뺨을 감싸고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을 닦아주었다.

 

 

 

마지막으로 기회 줄게요. 방금 한 말도 진심 아니면... 그저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뱉은 거짓말이면... 당장 사과하고 이 손 놔요.”

 

 

 

마치다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젖은 눈으로 노부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손끝에 힘을 주었다.

 

 

 
"거짓말 아니야. 믿어줘. 솔직히 말하면 지금 조금 혼란스럽지만... 그냥 하는 말 아니야 나도."



확실히 대충 둘러대는 표정은 아니었다. 마치다의 그런 표정은 노부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동시에 날 좋아한다는 기적 같은 거 난 안 믿어요. 그래도 내가 노력하면... 케이가 조금씩 따라와 줄 거로 생각하고, 그럼 나도 힘내볼게요. 내가 한참 앞서 있어서 내 마음 따라오긴 멀겠지만 아주 느려도 좋아요. 일단 그냥 같이 가봐요. 나중에 이 손 놓게 되더라도, 일단은 시작해보는 거예요. 그거면 돼요.”

.”

그게 다예요?”

그럼 뭐라고 해...”

 

 

 

노부는 그제야 비싼 음식이 아깝다느니 싱거운 소리를 늘어놓았다. 깊은밤 함께 손을 잡고 걸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다. 어젯밤 모텔에서 나눈 짧은 입맞춤은, 마치다는 언제까지고 모를 것이다. 노부는 마치다에게서 우리의 첫키스를 빼앗기 싫을 테니까.

 

 

 

아참, 가방에 케이 팬티 있어요.”

그걸 왜 들고 와.”

돌려주려고요. 지금 입을래요? 춥지 않나?”

솔직히 말해. 우리 어제 잤어...?”

맞춰봐요.”

 

 

 

노부는 괜히 짓궂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알 길이 없는 마치다의 얼굴이 빨개지고 금방 일그러졌다.

 

 

 

내가 그랬을 리가 있어요?”

그치? 취한 사람 상대로 그러면 쓰레기지.”

좋아하는 사람한테 그러면 쓰레기죠.”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소중했던 경험이 있었을까, 마치다는 어딘가 억울하면서도 몽글몽글해진 마음을 숨기려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지만 까만 하늘을 보는 마치다의 눈동자가 크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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