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90666160
view 15036
2024.04.12 00:44


1편 / 2편 / 3편 / 4편 / 5편 / 6편 / 7편 / 8편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자, 다시 힘 주시고!"
"으으윽..!! 하아..하아... "

이연화는 서까래 아래로 늘어진 무명천을 구명줄처럼 잡고 힘을 주었다. 이연화의 고운 얼굴이 흐트러졌다. 혀나 이가 다칠까 입에 물려둔 무명천이 흘러내렸고, 창백한 입술이 드러났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는 아직도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천을 잡고 있던 이연화의 팔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오랜 시간 이어진 진통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자신도 모르게 벌어진 입에서는 거친 숨이 새어나왔다. 자꾸만 눈이 감기고 정신이 아득해져왔다. 

"이연화, 안 돼! 정신 차려야 해!"

익숙한 목소리가 이연화를 깨웠다. 간신히 눈을 떠보니 흐릿했던 방다병의 얼굴이 또렷해졌다. 잔뜩 초조한 얼굴의 청년은 이연화의 한쪽에 앉아 떨군 이연화의 손을 꼭 잡았다. 맞잡은 손으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방소보.. 안, 안돼.. 못하겠어.."
"무슨 소리야, 할 수 있어! 이연화, 조금만. 조금만 더..!"

방다병이 이연화의 손에 입을 맞추며 애원했다. 이연화는 짧은 숨을 내쉬며 다시금 무명천을 잡았다. 

"하아...으으흑...으읍!!"

이연화는 한번 더 안간힘을 썼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혀있던 땀이 또르륵 흘러 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 자신의 눈가와 이마를 닦아주는 것이 느껴졌다. 

"...아비?"

살짝 돌려 확인한 곳엔 적비성이 손수건을 들고 앉아있었다. 너무 힘들어 알아채지 못 했지만 전부터 계속해서 자리를 지켜온 듯 했다. 그는 평소처럼 묵묵했지만 꾹 다문 입과 얼굴에서 걱정스러움이 묻어났다. 그는 말없이 이연화의 얼굴에 맺힌 땀을 살살 눌러 닦았다. 적비성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 섬세하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자, 한번 더, 한번만 더 힘 주세요..!"

약마 할아범이 더는 지체할 수 없다며 재촉했다. 이연화는 다시 양손의 무명천을 잡고는 벌어진 다리 사이로 힘을 주었다. 
.
.
"흡...!"

이연화는 자리에 누운 채 눈만 굴려 이리저리 살폈다. 꿈, 꿈이었다. 산처럼 부른 배로 진통을 겪고 있던 꿈 속과는 달리 아직 자신의 배는 판판하기만 했다. 꿈과 같은 거라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다는 것 뿐이었다.

자신이 잠들었던 천기산장의 처소 천장과 가구, 집기들을 확인했는데도 아직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이런 괴이한 꿈이라니, 심지어 현실처럼 생생해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출산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이런 꿈을 꾼 건가. 방다병까지는 알겠는데, 아비는 대체 왜 거기 있었던 거지? 

창문 너머 보이는 밖이 아직도 훤했다. 한참 자고 일어났는데 여전히 해가 지려면 멀었다. 요새 낮잠이 부쩍 늘은 탓에 이런 일이 잦았다. 

약마 할아범은 이것도 일종의 증상 중 하나라고 말했다. 아이가 모체의 양분을 흡수하며 커가는 과정에서 피로감을 느끼고 잠이 늘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이다. 다만.. 아이가 크려면 양기와 음기 모두가 필요한데 지금 이연화의 경우 양기가 턱없이 부족했고 그때문에 모체에 부담이 오는 것 같다고 했다. 뒤늦게 나타난 입덧이나 피로함, 늘어난 낮잠도 그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럼, 양기는 어떻게 받아야 하는 것이요?'
'일반적으로는.. 아이의 아비와 관계를 갖는 것이 가장 좋사옵니다만.. 불가할 경우 하다못해 가벼운 접촉만으로도 도움이 됩니다.'
'...꼭 아이의 아비여야 하오?'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다른 양인의 경우 아이가 거부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드물게 괜찮은 사람들도 있다고 하지만.. 일단 아이의 아비가 가장 좋겠지요..'

약마와의 대화를 떠올리곤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이에게 필요하다는 이유로 지금 이 시점에서 방소보와 관계를 가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연화!"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처소 앞에서 방다병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일으켜 나가보니 방다병이 흰 털로 만든 외투를 들고 있었다. 방다병의 모습을 본 순간 방금 전 꿈 속의 방다병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몸은 괜찮아? 안색이 안 좋은데.."
"좀 피곤해서 한숨 잔 거 뿐이야. 이제 괜찮네."

꿈자리 떄문에 뒤숭숭하긴 했지만 그래도 한숨 잔 덕에 정말 몸이 한결 낫긴 했다. 별 이상 없어 보이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방소보는 외투 몇 벌을 내려놓았다. 

"이제 날이 쌀쌀해졌더라고.. 추위 잘 타잖아"

이연화는 고맙다고 답하며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한독 발작에 시달리던 것은 벽차지독 때문이었고 지금에야 벽차지독을 해독했지만, 아직도 이연화는 추위에 약했다. 몸의 형질마저 바꿔놓을 정도로 강한 음기인데 오죽할까. 이연화가 추위 탈까봐 찬바람 불기 무섭게 외투를 챙겨온 방다병은, 오늘도 참 다정했다. 다정도 병이라고 하더니, 그래서 방다병인가. 쓸데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비가 다녀간 거야?"
"보시다시피.."

방다병이 마당에 산더미처럼 쌓인 사과를 보며 물었다. 안그래도 하인들이 처소에 창고를 하나 지어야겠다고 하더라고. 이미 언질을 듣고 왔는지, 방다병은 이게 창고 하나 정도로 될 일인가 가늠해보며 마당을 요리조리 둘러봤다. 

"아무튼 아비도 한결같이 융통성이 없어요. 이 많은 사과를 어느 세월에 먹어?"
"가져가서 어머니 좀 드려. 그러고보니 진작에 그럴 걸 생각을 못 했네."

여기서 몇 개 가져간다고 티도 안 날 것 같은데.. 방소보는 소쿠리 하나를 들고 부모님께 드릴 사과를 고르기 시작했다. 방다병 말대로 소쿠리가 아니라 나중에 사람을 불러 수레 단위로 가져가라고 하는게 나을 것 같았다. 그떄 이연화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 하나가 스쳤다. 

"방소보, 할래?"
"..뭐?"

이연화의 뜬금없는 제안에 방다병이 들고 있던 소쿠리에서 사과가 굴러떨어졌다. 

"너 몸 괜찮겠어?"
"괜찮으니 하는 소리야. 오랜만에 좀 하고 싶은데 어때?"
"...그럼 아비한테는 비밀이다."
"당연하지, 둘 다 금원맹에 끌려갈 일 있나."

이연화는 괜히 주변을 한번 둘러보곤 검을 꺼냈다. 자칭 제자 씨, 사부랑 검 맞대보는 건 처음 아닌가? 이연화가 본격적으로 검까지 꺼내들자 방소보도 얼떨떨해하며 검을 찾았다. 

방다병은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이연화는 자신이 연모하는 정인이기 앞서 자신의 사부이자 가장 동경하는 무인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무공에는 문외한인 샌님인 줄 알았고, 전 강호일인자 이상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아버지의 원수인 줄 알고 심경이 복잡했었다. 이연화와 함께하기로 마음 먹은 후로는 벽차지독 때문에 다 죽어가는 바람에 검을 맞댈 일은 더더욱 없었고. 해독하고 나서 검을 안겨줘도 자신은 더이상 무술에 뜻이 없다며 검 손잡이 한번 제대로 쥐는 꼴 한번 보질 했다. 10년도 전에 제자 삼겠다고 공수표 날려놓고 검 한번 마주쳐주지 않은 사부였거늘, 기회도 이런 기회가 없었다.  

- 챙챙

두 사람의 검이 처음으로 맞부딪쳤다. 몇 번 초식이 오간 후에 이연화는 속으로 조금 놀랐다. 방다병이 최근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일취월장으로 성장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만인책의 고수들을 쓰러트렸다는게 알려지면서부터는 방다병이 만인책 1, 2위를 다툰다는 소문까지도 돌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풋내 나던 그 도련님이 이렇게까지 실력이 늘다니. 물론 자신의 몸 역시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해독은 되었지만 한번 손상을 입은 내력을 되찾은 건 아니었기에 예전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정도라니. 

'사부 노릇하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겠어.'

사부 노릇을 얼마나 할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아비와의 비무가 대결을 갈구하듯 묵직하게 밀어붙이는 느낌이라면, 방다병의 비무는 또 달랐다. 청년의 검은 약간의 허세는 들어가있었지만 그만큼 좀 더 섬세하고 좀 더 활기가 넘쳤다. 이래서 젊음이 좋다고 하나. 스무살즈음의 나도 저랬을까. 옆에서 보는 것과 검을 맞부딪쳐 보는 건 또 달랐고, 방다병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된 거 같아 새삼 신기한 이연화였다. 

'툭툭'

제 아비의 검이 마음에 드는지 아직 티도 나지 않는 뱃속에서 수박이가 톡톡 치며 반응을 해왔다. 처음 태동을 느끼던 날 얼마나 놀랐던가. 적비성과 함께 배에 손을 올린 채 놀라 굳어있던 그날밤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제는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작은 콩콩거림을 즐기는 경지에 이르렀다. 핏줄은 못 속이는지 유난히 검 맞부딪치는 소리에 반응하는 수박이었기에, 방다병과 비무를 시작하자마자 느껴지는 태동이 제법 귀엽기까지 했다. 

"제자의 솜씨가 나쁘지 않으신지?"
"어쭈, 아직 말할 여력이 있었나?"

몇 번 위험했던 순간을 간신히 넘기고 상이태검을 펼친 후에야 우위에 든 상태로 비무를 마칠 수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전력으로 버텨야해서 하마터면 꼴사나운 꼴을 보일뻔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어찌 제자에게 질 수 있겠쏘냐. 

물론 이연화가 이 비무로 노리고 있는 건 수박이의 태동뿐만이 아니었다. 잠깐의 비무였지만 검을 맞부딪힌 것만으로도 최근 이연화를 괴롭히던 피로와 통증들이 사라졌고 한층 개운해졌다. 양인인 아이의 아버지와 접촉하는 시간을 늘리면 괜찮아질 거라는 약마의 말이 맞았던 모양이다. 검을 부딪히는 것도 접촉으로 치는 건가. 방다병과 함께 있는 시간을 조금 늘리려고 댄 핑계였지만, 효과는 생각보다 좋았다.  

'그렇다고 매일 비무를 하자고 할 순 없고..'

그래도 어찌 한 고비는 넘겼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든 것도 잠시. 이 효과가 얼마나 갈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아직은 갈 길이 멀었다. 





다병연화 비성연화 연화루


너무 늦게 왔으면서 분량도 애매하네..ㅠㅠ 일단 졸리니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