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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07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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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금원맹 요새 사과 농사지어..?"

이연화는 처소 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사과를 보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적비성 뒤로 또 한 대의 사과 수레가 들어오자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사과 소동을 일으킨 주인공은 마당 가득 찬 수레를 보며 '이 정도면 되겠군'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약마가 그러더군. 지금 제대로 먹을 수 있는 건 사과뿐이라고."

그렇긴 한데 이 많은 사과를 어느 세월에 먹어? 아무리 요새 하루종일 사과를 먹고 있다지만 이 정도 양이면.. 보관을 위해 사과 창고라도 하나 새로 지어야 할 판인데.  난감한 표정으로 사과 산을 보고 있는 이연화에게 적비성이 다가왔다. 한 손에는 잘 익은 사과 하나를 들고.

"먹어"
"지금? 나 지금은 배가 안 고픈... 알겠어."

사과를 먹기 전엔 움직이지도 않을 것 같은 얼굴에, 결국 이연화는 어색하게 웃으며 사과를 베어물었다. 이연화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적비성은 그제서야 만족했다는 듯 인상을 풀었다. 

"고마워, 아비."

이연화는 진심으로 말했다. 아이를 지키기로 결심했을 때는 채 몰랐지만, 회임은 참 버거운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몸의 변화에 감정적으로 기댈 곳도 없던 이연화에게, 적비성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었다. 매일 약마의 진맥을 통해 아이와 자신의 몸 상태도 확인할 수 있었고 이렇게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기까지 하니 이보다 고마울 수가 없었다. 

"번거로웠을 텐데, 고생을 시켰네."
"번거롭지 않다. 나는 번거로운 일따윈 안 해."
"그건 그렇긴 하지.."

이 세상 그 누가 중원의 대마두 적비성에게 번거롭고 귀찮은 일을 시킬 수 있겠는가. 적비성의 부모, 아니 조부가 되살아나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니 더욱 고마운 일이었다. 일생 누군가를 챙겨본 일이 없는 아비가 이연화가 먹는 것, 입는 것까지 이토록 세심하게 신경쓰고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 부모에 대한 기억이 없는 이연화로서도 이런 대가 없는 친절을 받아본 일은 드물었기에 더욱 그랬다.  

"아직도 그 애송이는 모르는 거냐."
"...방다병은 그냥 둬, 아비."
"결국 말을 안 할 셈이군"
"모르는게 나아."

알릴 수 없었다. 혼약으로 맺어진 인연 사이에서 예정된 관계로 생겨난 아이였다면 좋았을 테지만, 수박이는 불행히도 그렇지 못 했다. 방다병과의 그날 일은 사고였을 뿐이었다. 이연화가 술을 더 마시지 않았다면, 이연화가 무사히 도망갔다면, 방다병이 쫓아오지 않았다면, 없던 일이었을 사고. 불의의 사고 하나 때문에 앞길이 창창한 청년을 망칠 수는 없었다. 

그건 임신하기 전에도, 임신한 후에도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너는. 너는 그러고 싶은 거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어차피 난 방소보 앞길에 방해만 될 뿐이야."
"그 애송이야말로 네 앞길에 방해가 되고 있어."
"어차피 너랑 방소보 덕에 덤으로 얻은 목숨이야. 천하제일이 되겠다는 마음도 없고, 천하제일이 되어서도 안 돼. 내 출신 때문에 조금이라도 튀면 황제의 눈총을 피하지 못할 거야. 그저 이번 생은 조용히 살다가려했어. 수박이 때문에 조금 변동은 생겼지만.." 

못마땅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적비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수박이..?"
"아, 아이 태명이야. 약마가 태명을 지어 불러주는 게 좋다고 하더라고."

방금까지 심란해보이던 이연화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었다. 그는 평화로운 얼굴로 아직 부르지 않은 배 위에 손을 슬며시 얹었다. 확실히 임신한 후부터 이연화는 좀 더 부드러워졌다. 신체의 변화 때문에 곤욕을 겪고 있긴 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안정감 같은 게 느껴지곤 했다. 

"수.."
"수?"
"수..박이"

풉.. 다른 사람 입에서 아이의 태명이 불리는 걸 듣는 건 처음이었는데다가 심지어 그 주인공이 적비성이라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연화의 웃음소리까지 듣자 민망했는지 아비의 귀가 약간 붉어졌다. 

"흠, 그 수박인지 참외인지랑 살 집이 필요하다면 금원맹에 마련해줄 수 있다."
"....."

이연화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아비를 돌아봤다. 입은 벌어졌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진심이야?"
"난 농담을 즐겨하지 않는다. 너도 알 텐데."

알고 말고요. 금원맹주 적비성과 농담이라니 이보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또 있을까. 

언젠가 임신 사실을 들키기 전에 천기산장을 떠나야 했다. 어디로 갈 지는 미정이었다. 전처럼 혼자였다면 어디든 훌쩍 떠나면 그만이었지만, 이제는 조금 달랐다. 자신과 수박이의 상태도 규칙적으로 확인해야 했고, 출산도 해야했고, 몸 푼 후에 젖먹이를 키울 안정적인 공간도 필요했다. 안 그래도 이 문제는 이연화에게 큰 숙제였다.

그런데 지금 적비성이 자신이 그 모든 걸 해결해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친우였지만, 대외적으로 전 사고문주 이상이와 금원맹주 적비성은 철천지원수 사이였다. 그리고 자신의 숱한 기억들을 되짚어봤을 때 이연화가 금원맹 어딘가에 있다는 소문이라도 퍼지면 자칫 사고문과 금원맹의 불화 내지 싸움까지도 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있었다. 그런 위험성을 아비가 모를 리 없었다. 그렇다고 아비가 자신을 품음으로써 얻는 게 있느냐. 글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모든 걸 감내하겠다는 것이다. 

"아비, 진짜 네가 내 아비라도 되는 줄 알아?"

이연화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생에 이렇게 얻는 것 없이 베풀어주는 관계는 드물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부모님 또는 사부님 정도? 내 사부가 되고 싶은 건 아닐테니 내 보호자라도 하려는 걸까.  

"아버지?"
"죽어간다니까 약초 구해다 먹이고, 굶는다니까 사과를 산처럼 구해오고, 나 상처받을까봐 걱정해주고, 갈 곳 없을까봐 거둬주는데 그럼. 거의 아버지 아니야?"

이연화의 말을 듣곤 적비성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뭔가 곰곰히 되짚어보는 듯 했다. 그 시간은 제법 길었고 이연화가 괜한 말을 했다 싶은 생각이 들 무렵..

"이런 게 부성애인가?"

아비가 평소처럼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진짜 내 아버지면 좋겠네. 금원맹주면 뒷배 든든하고 배곯을 걱정도 없고."

물론 정말 금원맹으로 갈 생각은 없었다. 이상이가 금원맹에서 머문다니, 이 사실이 퍼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이상이가 사고문을 배신하고 변질했다, 금원맹과 손을 잡고 사고문을 치려 한다, 금원맹이 이상이를 고약한 술법으로 묶어두고 있다, 이상이가 납치된 거다 등등 아마 온갖 소문이 돌 것이고, 황궁에서 펼쳐졌던 싸움 이후 금원맹과의 암묵적인 평화는 산산이 깨어지고 말 것이다. 

그래도 얼마나 고맙고 든든한가. 남은 건 실패뿐이었던 이상이였지만, 그래도 이연화는 인생을 잘못 살진 않은 모양이다.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나, 이상이."
"오랜만이네, 네가 그렇게 부르는 거."

벽차지독을 해독하기 전 이연화는 적비성에게 더 이상 이상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상이는 죽었고 이제 나는 이연화라고. 네가 이상이라고 부를 수록 사고문은, 세상은 아직도 날 이연화가 아닌 이상이로 대할 거라고. 이 독을 해독하고 나면 정말 이연화로 살고 싶다고 말이다. 물론 적비성이 뭐라고 부르던간에 사람들은 제가 보고싶은 대로 보겠지만. 아비가 이상이에 대한 미련을 잊고 이제 그만 자신을 이연화로 보아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때 만난 건 이상이였으니까. 붉은 장포를 두르고 상이태검을 펼치는 모습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웠다. 반드시 저걸 내 손으로 꺽어 내 옆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 나는 그 이상이를 꺾고야 말 것이다. 그러니까 너는 다시 일어서야만 한다." 

적비성은 평소답지 않게 긴 말을 마치곤 몸을 돌려 사라졌다. 이연화는 적비성이 사라진 뒤에도 한참을 마당에 서 있었다. 생각에 잠긴 이연화 주변에는 사과 향이 가득 맴돌았다.



다병연화 비성연화 연화루 


우리 연화 언제 도망가지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