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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2 00:08
"축하하오, 임신이오"

언젠가 푸줏간 주인에게 했던 말이 그대로 되돌아왔다. 그때 그치가 뭐라고 했던가. '말 같은 말을 해요!'였던가. 이연화는 푸줏간 주인처럼 화를 내기는 커녕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의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원은 이런 사람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 익숙하게 말했다.

"이미 넉달은 지난 것 같은데 그동안 전혀 짐작하지 못했소?"

이제야 정신을 좀 차린 연화가 의원에게 다시 물었다.

"저, 혹시 잘못됐을 리는 없을까요. 저는.. 그, 희락기도 한번 없었습니다만.."
"간혹 음인 중에 발현이 늦는 경우가 있다고는 들었소. 외관으로 보아 이립이 넘은 것 같으니 당황스러울 만도 하지만.. 그래도 음인이면 몸가짐을 조심해야지 열락기가 없다고 방심하면 되겠소."

아니, 제가 원래 양인이었어서요. 이연화는 차마 하고 싶은 말을 내뱉지 못하고 삼켰다. 양인으로 절세고수의 몸이었을 때는 내력으로 열락기를 다스릴 수 있어 난감했던 적이 없었고, 벽차지독에 중독된 후로는 음기에 잠식당해 음인으로 변화했다고 느끼긴 했지만 역시나 희락기 같은 건 한번도 찾아온 적이 없었다. 풍파로 인해 양인도 음인도 아닌 그저 반푼이가 되었구나, 싶었고 그 뒤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저잣거리 의원이 벽차지독에 당해 양인이었다가 음인으로 발현한 사내의 몸 상태에서 제대로 된 지식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길게 설명해봐야 몸가짐을 잘 하지 못했다고 면박만 더 들을 것 같아, 이연화는 인사를 하곤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신이라니, 아이라니. 태어나서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영역이었다. 이상이일 때는 절대고수가 되고 정의를 지키는 일만을 생각했고, 이연화가 되어서는 그저 불여우와 함께 세상을 돌며 이 한몸 조용히 살 일만 생각했다. 누군가와 가정을 이루고, 정착하고, 아이를 낳는다는 건 상상하지 못했다. 물론 내 몸으로 낳는다는 건 더욱 더. 

그 돌팔이 의원의 말이 사실일까. 오진일 리는 없을까. 이연화는 차분히 최근의 나날을 되짚어봤다. 벽차지독이 해독된 후 몸 상태가 안정적이지 않아서 많은 징후들을 놓쳤었다. 어쩐지 배가 조금씩 아프고 콕콕 쑤시는 것도 해독 후유증이라고 생각했고, 하루종일 잠이 쏟아지고 아무리 자도 피곤한 것도 해독 후 몸이 회복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시작된 메스꺼움과 두통은 아무래도 좀 이상했다. 관하몽이 올 때까지 기다릴까 싶다가, 토혈을 한 것도 아니고 이런 사소한  증상 정도야 저잣거리 의원 정도도 볼 수 있겠지 싶어 내려왔다가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이 아이를 낳는다? 연화는 막막한 마음에 품 안을 뒤적거렸다. 무언가 손에 잡혔다. 

'혹 아이를 원치 않는다면.. 그런 이를 위한 약재도 있소이다.'

일어나는 연화를 붙잡은 의원이 돈 몇 푼에 쥐어준 약재였다. 아이를 내 몸으로 갖는 것도, 낳는 것도, 그리고 키우는 것도 아무것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보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책임지지 못 할 생명이라면... 그리고 이 아이의 아비는.. 

"이연화! 이 시간까지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연화는 부리나케 약재를 품 안에 다시 집어넣었다. 방다병이었다. 저 녀석은 내가 서당 다니는 어린 아이도 아니거늘 해만 지면 저렇게 늦는다고 채근이었다. 

"그건 뭐야? 약이야?"

잽싸게 넣긴 했는데 황급했던 동작이 괜히 방다병의 시선을 끌어버린 모양이었다. 

"체기가 있어서 잠깐 의원 좀 보고 왔어."
"그럼 말을 하지, 의원 부르면 되는데. 줘 봐, 약 달여오라고 할게."
"방다병, 내가 거동 못 하는 병자도 아닌데 무슨 의원을 불러? 그리고 됐어, 오는 동안 체기가 내려갔는지 괜찮아졌네."
"아픈 데 있으면 숨기지 말고 꼭 이야기해, 관의원이 다음달에 들른다고 했으니까 혹시 안 좋으면 빨리 들르라고.."
"아이고, 괜찮다니까. 박소보, 그거 과잉보호야. 난 네 조카가 아니라 사부라고?"

태연한 척 했지만 목덜미 뒤로 땀이 올라왔다. 이연화가 되고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한낱(?) 방다병 앞에서 이렇게 진땀을 뺄 줄이야. 자신의 몸에 대한 주제를 돌려야겠다 싶어, 이연화는 재빨리 물었다. 
 
"너야말로, 나는 왜 찾아다녔는데?"
"아 그게.. 좋은 술이 들어와서 너랑 술 한 잔 할까 하고.."

그러고보니 방다병 한 쪽 손에 술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딱 봐도 고급 술인 티가 팍팍 나는 술병이었다. 천기산장 도련님이 좋은 술이라고 말할 정도면 말 다했지. 평소같았으면야 얼씨구나 했겠지만, 오늘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럴 마음도 안 들고, 그럴 몸도 아니고. 

"됐어, 미안하지만 오늘은 몸도 별로고 그냥 쉴게."

거절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방다병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 사부는 제자 같이 팔팔하지를 못해서 좀 쉬어야겠다. 다음엔 더 좋은 술 꼭 대령하도록' 분위기가 무거워지기 전에 이연화는 애써 밝은 척하며 방다병을 지나쳐 자신이 묵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이연화."
"......"
"언제까지고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피하긴 내가 뭘 피했다고."
"대답, 기다리고 있어."

바로 방다병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이연화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볼 용기를 냈을 땐, 이미 방다병은 사라진 후였다. 

아까보다 조금 더 무거운 발걸음으로 천천히 걸어 돌아오는데, 자신의 처소에 이미 누군가가 서 있었다. 사내의 기척을 느끼자마자 이연화는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적 맹주, 여기는 엄연히 천기산장의 일부이고 내 처소인데 네가 그렇게 참새 방앗간 드나들듯 오가면 내가 뭐가 되겠나."

적비성은 이연화의 타박에는 아랑곳않고, 미간을 찌푸린 채로 오히려 이연화를 추궁했다. 

"이 시간까지 수련은 안 하고 어딜 돌아다니는 거냐."
"아니, 내가 다섯살 먹은 애도 아니고 이놈이나 저놈이나 내 귀가 시간에 왜 이렇게들 관심이 많아!"

전 사고문 문주, 전 강호 일인자, 전 신의이자 이립이 넘은 성인 이연화는 결국 화를 참지 못 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벽차지독을 해독한 후 적비성은 이렇게 뻔질나게 찾아와 이연화가 수련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살피곤 했다. 해독을 했으면 얼른 기력을 회복하고 수련하여 다시 이전의 경지에 오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연화는 다시 수련해서 이상이와 같은 경지에 오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몇 번을 말해야 납득할 건데. 수련 안 해. 일인자, 그거 안 한다고. 강호에 깔린 게 고수이고 강자인데 싸우고 싶으면 그 쪽 가서 덤벼, 왜 애꿎은 날 볶는 건데!"
"10년 전 우리의 결투는 공정하지 못했고, 나는 너와 공정하게 제대로 겨루기 전까지는 결코 포기 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붙고 싶다는 일념 하에 금원맹까지 동원해서 이연화를 살릴 방도를 찾던 적 맹주였다. 쉽게 포기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이연화는 더이상 이상이처럼 하고픈 대로, 강함과 정의를 쫓으며 살 수만은 없었다.  오늘 밤도 또 아비와 지리한 버티기를 하겠구나, 싶었는데 적비성이 대뜸 이연화의 손목을 잡았다.

"너, 뭔가 좀 이상한데."
"...뭐가."
"기운이 바뀌었다."

역시 고수는 고수였다. 정확히 무슨 이유인지는 맞추지 못 했지만 이연화의 몸에 변화가 있다는 걸 기운만으로 알아채다니.. 아니, 아비는 평소에 나를 얼마나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는 거람.. 이연화는 황급히 손을 빼내며 뜨끔한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도리어 큰소리를 냈다. 

"벽차지독이라는 맹독을 해독하고 있는데 그럼 몸의 상태가 달라지는 거야 당연하겠지."
"아니, 뭔가.. 묘하게 바뀌었다. 내공이나 해독과는 다른.. 이게 뭐지?"
"뭐긴 뭐야. 나도 모르니 얼른 썩 꺼져라."

피곤하니 얼른 나가라고 이연화가 한참을 등을 떠밀고 나서야 적비성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조만간 다시 올 테니 그때까지 수련하고 있어라."
"아, 거참 수련 안한대도!"
"다음에 또 오지."

마치 스승님과 말썽쟁이 제자 같은 대화를 마지막으로 적비성이 사라졌다. 후유.. 드디어 혼자가 됐다. 혼자가 되었다고 해서 마음이 편해진 건 아니었다. 아직도 고민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좀 평범하게 살아보고 싶었는데, 내 팔자는 아무래도 그럴 팔자가 못 되는 모양이다. 이연화는 고개를 살짝 숙여 아직 티도 나지 않는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나도 나지만, 나 같은 사람에게 오다니 네 팔자도 기구하구나. 한숨이 더 깊어졌다.


다병연화 비성연화 연화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