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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9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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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 채의진, 이곳 벽령호에는 수괴가 살고 있었다.

―살고 있었다.

다시 말해 지금은 없어졌다는 뜻으로, 수많은 인간을 꿀꺼덕 집어삼키며 소름 끼치게 비대해졌던 수괴의 몸은 기이하게도 단 하룻밤 새 재기불능의 고깃덩이가 되어 뭍에 올라와 있었다. 뒤늦게 탐문 조사를 하던 고소 남씨는 한 어민에게 그날 밤 거대한 전투의 목격담을 전해 들었는데, 밤보다 어두운 칠흑의 이무기께서 용맹하게도 수괴의 목을 단숨에 물어 끊으시고는 핏물로 오염된 호수를 깨끗이 정화까지 하신 뒤 홀로 먼 길을 떠나셨단다.

물론 이 수상한 목격담을 곧이곧대로 믿을 남씨들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남망기라면 특히 더더욱. 이미 한참 썩어 문드러진 수괴의 몸에 이무기라고 칭송하기엔 다소 난폭한 이빨 자국과 상당히 낯익은 검흔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는데, 검흔의 일은 남망기만이 알아차렸다.

오대 세가 어느 가문에도 구애받지 않고 눈앞에 선 상대를 그저 찢어발기는 이 검법, 어딘가에서 본 적 있었지 않나.

남망기는 수사들과 함께 부패한 수괴의 사체를 처리하고 운심부지처로 돌아가는 길을 재촉했다. 그런데 소문이라는 것은 한 번 퍼지면 누구도 걷잡을 수 없는 법.

쨍그랑!

벽령호를 구원하신 검은 이무기님의 소문은 난릉 선부의 높은 문턱을 넘어 금자봉의 귀에까지도 흘러 들어왔다. 긴 소매를 이제 팔뚝까지 걷어올려도 될 정도로 몸을 회복했던 그녀는 방금 막 매화꽃 접시 하나를 깬 참이었다. 연회상에 올릴 귀한 접시 중 하나였고, 금자봉은 어린 시녀들과 함께 그릇을 닦고 있었다.

“이무기라고?”

벽령호 일을 처음 언급한 시녀에게로 눈이 쏠렸다.

이런저런 소문에 다방면으로 귀가 튼 시녀 붕팔은 늘 조용하던 아가씨께서 먼저 말을 걸어오자 놀라서 얼떨떨했지만, 곧 태연하게 깨진 접시를 주워 담았다.

“예에, 아가씨. 이무기래요. 몸은 저 하늘의 신선께서 손수 먹을 갈아 그리신 듯 흑요석처럼 검었고, 그 못된 수괴를 처단하실 때 치켜뜬 두 눈은 꼭 태양 같았답니다.”

그건 이무기 따위가 아니라, 용이야.


붕팔의 말을 들으면서도 귀가 먹먹해진 금자봉은 턱밑에까지 올라온 그 말을 함부로 내뱉을 뻔했다. 진정하고자 숨을 힘차게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이무기께서 그 후 어디로 떠나셨는지, 이런 건 아무도 모르고?”

마침 깨진 조각을 다 주워 담은 붕팔이 고개를 들어 붙임성 있게 웃어보였다. 이 매화꽃 그림의 접시는 언뜻 보기엔 몹시 귀한 물건 같았지만, 물론 실제로 고작 한두 푼 나가는 물건은 아니나, 지체 높으신 난릉 금씨에서 그깟 접시 한 점 깨트렸다고 따져들 이는 없었다. 창고 어딘가 똑같은 게 수십 점은 더 있었다.

“그게요, 벽령호 물길이 어디 한두 곳 이어지나요? 제 친척이 근처 객잔에서 숙수로 일하고 있는데, 매년 해오던 풍어제에서 이무기님을 함께 기리자 말은 많은데 어느 방향으로 가셨는지 이걸 모르니 난항이라고 하더라고요.”

이에 금자봉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 모르는 게 당연하지. 저 푸른 하늘이 아니라 애먼 물길에서 그 사람을 찾고 있으니.

잘못하면 깊이 모를 나락으로 떨어진다.

자신의 꿈을 그저 나락이라고 부르던 상처투성이 용은 다행히 살아 있었다. 그 상처를 입고도 다행히 살아 있었다. 그녀와 함께 넓은 이 세상 어딘가에서.

언젠가 만날 수 있다는 희열로 가슴이 벅차오른 금자봉은 그만 선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금자봉이 깊은 안도감에 긴장이 풀려서 온몸을 바르르 떨자, 그 모습을 본 붕팔은 병이 도지신 줄 알고 착각하여 또 놀라서 이번에는 우렁차게 소리부터 꽥 질렀다.

“맙소사, 아가씨! 차가운 바닥에 그대로 앉지 마세요!”

그런데 이 아가씨는 어째, 힘이 풀려서 주저앉고도 기분 좋은 듯 실실거렸다.

그간 일부러 측근 시녀를 두지 않았던 금자봉은 오늘 처음으로 측근 시녀를 한 명 들였다. 벽령호 일뿐만 아니라 여러 소문에 귀가 통달한 붕팔이었다.

난릉 금씨와 운몽 강씨의 회합 날짜는 내일이었다.
 
 

***


 
운몽 강씨에서 청담회가 아닌 일로 이 먼 난릉까지 행차하는 건 상당히 드문 일이었는데, 그 때문인지 오늘 두연청의 꾸밈새는 기합이 꽤 적지 않게 들어갔다. 거기에다가 훗날 양 가문이 맺어지는 혼담이라는 귀중한 일로 찾아왔으니 손을 더하면 더했지 덜을 순 없었다. 한편 어젯밤까지 대왕의 일로 들떠 있던 금자봉은 운몽 강씨의 방문 행렬과 맞닥뜨리자 생판 딴 사람이 되어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해졌다.

쟁쟁한 귀빈들 사이에 위무선은 당연 부재했다. 자진하여서 불참했는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금광선은 영웅처럼 호탕한 척 껄껄 웃으며 운몽 강씨를 환영했는데, 오늘 가장 모셔야 할 귀빈인 강종주 부부의 바로 곁에서 어느 누군가 그녀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거리가 상당한데도 무척 강렬하게나. 얼굴 전체가 그의 시선에 찢겨버릴 듯 따가워졌다.

결국 금자봉은 고개를 들어 시선을 그와 마주했다.

방문 행렬의 제일 앞에서 늠름하게 선 강만음은 은실로 비룡 한 마리가 강렬하고도 생동감 넘치게 수놓아진 자색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 이 두 사람을 잠깐 눈여겨 보았더라면 마치 서로 첫 눈에 반한 줄 알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강만음의 눈은 명백하게 경고의 빛을 띄고 있었다. 그건 금자봉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다. 고개를 다시 천천히 숙여 내려뜨렸다.

한편 두연청의 안쪽에서 귀빈들께서 앉으실 곳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던 금광요는 문득 금자봉을 보고 고장 난 듯 뚝 멈춰 섰다. 선 자리가 힘겨운지 낯이 창백하게 질렸는데, 계속 지켜보자니 가여웠지만 금광요에게 도와줄 방도는 없었다. 사촌 누이보다 아버지의 명이 우선인 것도 있었다.

찰나였으나 고민에 고민을 더하던 금광요는 결국 뻣뻣하게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아예 외면했고, 그때 강만음이 금자봉의 바로 앞을 스쳐 지나갔다.

죄책감으로 바짝 긴장한 금자봉의 둥근 이마에서 땀 한 방울이 바닥으로 똑 떨어진 순간,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분명 화창했던 하늘에서 태곳적 짐승의 분노에 찬 포효 소리가 용맹하게도 울려 퍼졌다. 아, 그것은 다름 아닌 천둥.

뇌성벽력과 함께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모두 기겁하면서 회장 안으로 급히 뛰어서 들어갔는데, 유일하게도 금자봉만이 넋을 잃고서 먹구름이 낀 칙칙한 암흑색 하늘을 구슬픈 눈으로 올려 보았다.

전부 그 사람 때문이었다. 비가 내리면 어딘가에서 그 사람이, 나의 대왕께서 이 비를 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애틋한 감상은 그저 찰나뿐.

“젖고 있는데.”

흉터 가득한 커다란 손이 시야를 깜깜히 가렸다.

금자봉이 눈을 내리깔자 거센 장대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는 강만음의 두 어깨가 눈 속으로 들어왔다. 젖어 들어서 조금 탁해진 자색 비단이 어쩐지 음울해 보였다. 그 다음으로 여전히 자신을 지긋이 응시하는 눈.

“이만 안으로 들어가시죠.”

금자봉은 부러 강만음과 눈을 피했다.

“……감사합니다.”

그의 옷자락에 수놓아진 은색 비룡이 왠지 쏘아보는 것 같았다.

그때 붕팔이 영특하게도 우산 두 개를 챙겨서 뛰어왔는데, 먼저 하나는 아가씨에게 씌워드렸고, 남은 하나는 강만음에게 올려바쳤다. 강만음이 선뜻 받아주자 인사말은 금자봉이 대신했다.

“공자께서도 서둘러 비를 피하시지요. 날이 찹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이걸로 고작 세 번째.

사실 금자봉은 아직까지 강만음을 보고 있노라면 어떤 묘한 기시감에 깊이 휩싸였으나, ‘감’이라는 말 그대로 그저 그런 느낌일 뿐. 거기에 사실은 없었다. 무릇 사람을 말 몇 마디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지만 그와 자신은 첫 단추를 지나치게 잘못 꿰지 않았나.

알던 사이였어도 모른 체 하고 싶겠지.

금자봉은 문득 몰려오는 피로감에 먼저 물러났다. 그때 붕팔이 염려하듯 말을 붙여왔다.

“저어, 아가씨. 안색이 굉장히 안 좋아 보이시는데.”

우산을 쓴 두 사람은 그새 두연청의 턱을 넘어섰다.

“아아, 괜찮아.”

금자봉은 곧 얼굴빛을 마치 가면처럼 바꿔 끼웠다. 그 모습에 붕팔은 멍하니 제 아가씨를 올려 보았다. 붕팔 대신 우산을 접어서 물기를 톡톡 턴 금자봉은 다시 우산을 붕팔의 손에 들려주었다.

“난 이곳에서 늘 괜찮아야 하는 사람이니까, 괜찮아.”

미소를 지어 뺨을 자연스레 붉히는 게 방금 핀 오월 작약이었다. 한데 어쩐지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이 위태로워 보였으나, 감히 노비가 상전에게 이를 물어볼 수는 없었다.

성대한 연회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금자봉은 명을 전달하여 고금 연주가를 예정보다 앞당겨서 회장 한가운데 앉혀놓았다. 줄기찬 빗소리 사이로 악기 연주가 어우러지니 장내 분위기는 오히려 더 그윽한 운치를 풍겼다. 곧 뒤따라서 따뜻한 술과 요리가 함께 나오자 모두가 조금 전 암울한 날씨는 잊어버리고 곤두세웠던 눈썹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런데 이 고금 연주가는 꽤 특이한 운지법을 놀려 갑작스러운 비 소식으로 어수선했던 좌중의 마음을 일제히 사로잡았다. 그의 아름다운 연주곡에 귀를 가까이 기울이고 또 기울일수록 좌중은 점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어쩐지 영문도 모르고 끌려 들어가는 것 같다는 괴상한 느낌이 들 즈음, 금자봉은 몽롱해진 눈을 느리게 한 번 깜빡이다가 쏟아지는 잠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만 저 바닥으로 툭 쓰러졌다. 사실 그녀뿐 아니라 이 넓은 두연청 내 좌중 모두가 고금 연주에 흠뻑 취하여 푹 고꾸라져 잠들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단 한 사람은 제외되었다.

“대왕, 간만에 제 연주를 들으신 소감은 어떠신지요?”

고금 연주가는 이제 인간 행세를 그만두었고.

“경박해졌다.”

강만음 또한 그러하였다.

“애석하군요. 어쩌면 조금 서운하다고 할 수 있을지.”

어느새 고금 연주가의 마른 등 뒤에는 거대한 날개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자태는 영락없이 검은 까마귀였다. 사내의 이름은 두 글자, 만겁이었다. 한때 누구보다 충직하게 요왕의 뒤를 맹목적으로 따랐던 요괴.

“대왕이라는 말에 흔쾌히 응해주신 건 당신이 여전히 우리의 대왕이시란 말씀입니까?”

“물으려는 게 고작 이따위 수준인 것도 경박스럽고.”

망월은 심기의 불편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그러니까 넌, 죽고 싶어서 내 앞으로 찾아온 것이냐?”

용에게는 이제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정말이지 꼭, 간절히 지키고 싶었던 단 한 존재가. 그리하여서 잿더미가 된 혼을 어렵사리 끌어모아 인간의 몸을 빌려서까지 소생시켰다. 한데 간신히 살려놓으니 이번에는 또 독화살을 맞아 쓰러졌다. 용은 소녀를 가둘 수 있다면 기꺼이 가두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갑갑하지는 않게, 그 애는 아침 햇살을 좋아하니까 큰 통창을 뚫어서 바깥을 볼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물론 담장은 높이 쌓아서. 괜한 말썽이나 피우면서 황제 못지않은 삼시 세끼 밥만 축내다 바깥 세상을 잊는 것이다. 세상의 일은 그 어떤 것도 몰라도 된다. 손에 꼭 쥐고 결코 놓아주지 않으리라.

정말 딱 하나, 살아가기를, 바란 건 오직 그것뿐인데.

왜 이 세상은 유독 네게만 가혹하여서, 그저 다만 널 보호하려는 일조차 쉬이 흘러가지 않고 이렇게나 방해받을까.

망월이 드디어 만겁을 직시한 그 순간, 탐스러웠던 만겁의 날개가 갑자기 저 홀로 뒤틀려 우두둑, 우두둑우두둑 비명을 질렀다. 한편 망월은 앉은 자리에서 느긋하게 일어나 만겁의 생생한 고통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만겁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저 꺽꺽거리며 회장 바닥에 나뒹굴었다.

볼품없는 날갯죽지에서 끈적한 피가 흘러나오자 망월은 그때 비로소 뼈 아픈 고통을 멎게 해 주었다.

“오합지졸들을 어찌저찌 끌어모아 오합지졸 군을 만들었으니 그래도 한때 장군이었다는 게 이 모양 이 꼴이구나.”

그가 왼손을 들어 가볍게 한 번 내젓자 회장 바닥의 불결한 피는 완벽하게 사라지고 없다.

“돌아가는 길은 살려주마. 인간의 말로 옛정을 봐서.”

망월은 허공의 한편에 문을 열었다. 사실 문이라고 하기에는 구덩이에 더 가까웠는데,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자니 깨끗하게 처리하기가 좀 난감했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그의 누이가 얌전히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여 만약의 만약이지만 깨웠다가는 미안하므로 만겁의 몸은 일단 지금 당장 생각나는 곳에 냅다 던져 버리려는 심산이었다.

망월은 겨우 손짓으로 처참하게 으스러진 만겁의 몸을 가뿐하게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구덩이 속에 떨어트리기 일보 직전.

“그때 대왕께서 이르시길, 허귀인 따위, 그저 간편한 놀이 상대라 하셨었지요. 이 몸 똑똑히 기억합니다. 제 어찌 대왕의 말을 감히 잊겠습니까.”

어느새 허공에 거꾸로 매달린 만겁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제 스스로 쏟아낸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하지만 전 이미 옛날부터 알았습니다. 대왕께서 손수 허귀인을 데려오셨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고요. 알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부디 아니길 바랐었지요, 어리석게도.”

“해서, 지리하게 굴지 말고 짧게 본론만.”

으르렁 우는 망월의 낮은 목소리에도 만겁은 계속 킥킥거렸다.

“빌어먹을 사랑, 당신께서 사랑 따위를 하실 줄이야.”

“……뭐?”

허나 망월은 가장 중요한 부분을 듣고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요괴들에게 사랑은 곧 번식, 단순히 자손을 남기는 행위였기에 다시 말해 사랑이란 말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그들 사이에서 번식 대신 구태여 꼭 사랑이라 명명함은, 인간들처럼 행동한다는 업신여김의 표현이었다.

이를 망월이 모를 리 없었고, 만겁도 당연히 알았다.

“내가, 왜…… 그런.”

“그걸 고작 저 따위가 어찌 알겠습니까? 인간들처럼 저속한 행위를 하시는 건 당신이신데.”

망월은 눈에 띌 정도로 크게 동요했다. 인간들처럼, 사랑이라고?

그럴 리 없어. 이 내가, 그깟―

“그래, 네가 이제 하다하다 나를 능멸하는 것이렸다! 훌륭하구나!”

망월의 우렁찬 일갈과 함께 만겁의 으스러진 피투성이 몸은 곧 구덩이 속으로 꿀꺼덕 빨려 들어가며 사라졌다.

거짓말쟁이 까마귀가 추방당했으니 장내의 모두도 조만간 깨어나리라. 남은 흔적들을 정리하고 자리로 돌아온 망월은 분함과, 어쩐지 수치스러움, 또 약간의 알 수 없는 감정 때문에 꽤 오랜 시간을 씩씩거리며 앉아 있었다.

인간들처럼 사랑이라니. 감히 나에게.

그때 잠들었던 사람들이 마치 한 꿈을 나누어 꾼 듯 거의 동시에 눈을 떴는데, 만겁의 연주가 어찌나 황홀했으면 모두 잠에서 깨고도 한참 얼떨떨하게 앉아 있었다.

잎이 떨어지던 한창 가을, 이날의 일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이는 인간들의 틈바구니 속에 거대한 몸을 은밀히 숨긴 한 마리의 용뿐이시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