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302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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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02 00:51
전편: https://hygall.com/612856811
“데드풀을 모른다고?”
“그게 누군데요.”
“너넨 만화책도 안보고 자랐냐.”
“봤어요.”
“근데 날 모른다고?”
“네.”
짧고 단호한 대답이 돌아오자 웨이드는 입을 벌리고 아이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의 충격이 절정에 달한 순간, 로건과 로라가 동굴로 들어섰다.
눈이 살짝 녹아 축축한 옷을 걸친 채로 로라와 로건은 조용히 웨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웨이드는 그들을 눈치채지 못한 채 아이들을 상대로 설교를 이어갔다.
“세상에, 너희는 인생을 헛산거야. 히어로계의 아이돌 데드풀을 모른다니? 내가 주인공인 만화책은 보긴 한 거야?”
로라는 로건을 올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저 사람… 정신 괜찮아?”
“아니.”
로건이 무덤덤하게 대답하며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 동안 자기 이름을 설명해도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하자, 웨이드는 기가 막힌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로건과 로라를 번갈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로건은 웨이드의 과장된 반응에 피곤한 눈길을 던지며 차키를 그의 쪽으로 휙 던졌다. 웨이드는 능숙하게 차키를 받아들곤, 한 손으로는 주머니에 쑤셔 넣고 다른 손은 허리에 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리 이 시기에 내가 활동을 안했다지만 이건 정말 수치라고.”
“애들 데리고 뭔 소리를 한거냐.”
“쟤네가 날 모른다잖아. 당신은 알고.”
로건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웨이드를 무시하고 로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치하긴. 애같이 굴지 말라니까.”
웨이드는 투덜대며 로건에게 손을 내밀었다. 로건은 별 말 없이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던졌고, 웨이드는 이를 받아 들고는 동굴 안쪽에 쌓아둔 낙엽 더미로 걸어갔다. 바람과 눈 때문인지 불은 좀처럼 붙지 않았지만, 몇 번의 시도 끝에 작은 불씨가 피어올랐다. 곧 불길이 낙엽을 태우며 따뜻한 온기를 뿜어냈다.
로라가 가져온 음식을 꺼내어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아이들은 눈앞의 간식을 받아들고는 웨이드가 만든 불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먹을 것을 손에 쥔 그들의 눈빛은 조금 전까지의 긴장감에서 벗어나 있었다. 웨이드는 그 모습을 보고 어깨를 으쓱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먹는 게 먼저지. 누가 뭐라하겠어.”
아무리 그들 앞에 데드풀과 울버린이라는 이름이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지금 이 순간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따뜻함과 배고픔을 달래는 것이었다.
로건은 한쪽 바위에 걸터앉아 아이들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침묵이 흐르는 동안 그의 시선은 잠시 불길에 머물렀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로라를 보고, 다시 아이들에게 눈길을 돌리며 무심하게 물었다.
“그래서, 캐나다 국경을 넘겠다는 거냐?”
아이들은 여전히 손에 들린 빵과 과자를 뜯어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로건의 물음에 누구 하나 선뜻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로건은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아이들 사이에서 가장 리더처럼 보이는 남자아이를 향해 턱을 들어 보였다.
“계획은 있어? 거기 너. 리더같이 생긴 애. 네가 얘기해봐.”
남자아이가 고개를 들어 로건과 시선을 마주쳤다. 말문을 열기 전에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릭터예요.”
“그래, 릭터.” 로건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휘적거리며 대꾸했다. “계획이 뭐냐고.”
릭터는 주변을 둘러보며 아이들의 눈치를 잠시 살폈다.
“그냥… 북쪽으로 가라고 하던데요.”
릭터가 간략히 말하며 입가에 빵 부스러기를 묻힌 채 멀뚱히 로건을 쳐다봤다. 로건은 잠시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다가 “허.” 하고 한숨 섞인 웃음을 내뱉었다.
“너네 진짜 대책 없다. 나도 그렇겐 안 살아, 임마.”
옆에서 웨이드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곤 로건을 쳐다보며 말을 덧붙였다.
“아니다, 대책 없는 건 당신이 더…”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로건이 째려보자 웨이드는 가볍게 손을 들며 물러났다.
로건은 로라와 함께 가져왔던, 동굴 바닥에 뒹굴고 있던 종이 지도를 집어 들었다. 낡고 군데군데 접힌 흔적이 남은 지도였다. 그는 그것을 펴더니 아이들 사이에 털썩 주저앉았다.
“잘 들어. 두 번 설명 안 할 거니까 똑바로 봐둬.”
그의 거친 말투에도 아이들은 자연스레 모여들었다. 몇몇은 빵을 입에 물고 오물거리며, 몇몇은 손에 음식을 들고 있었지만 모두 귀를 기울였다.
로건은 손가락 끝으로 지도를 짚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여기 우리가 있는 숲, 그리고 여기가 국경선.” 그는 손가락으로 경로를 따라가며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이 길은 피해야 돼. 순찰이 있을 거다. 그리고 이쪽으로는 절대 가지 마. 얼어 죽을 테니까.”
아이들은 입에 음식을 오물거리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릭터가 살짝 손을 들며 물었다. “그럼 어디로 가요?”
“여기.” 로건이 지도의 한 지점을 손끝으로 강하게 눌렀다. “여기가 국경으로 통하는 비탈길이다. 찾기 힘든 길이라 순찰은 없을 거다.”
온화한 어른의 모습은 아니고 인상을 쓴 채라 오히려 무서운 아저씨에 가까웠지만 로건은 한참을 그렇게 설명했다. 동굴 바닥에 앉아 주황색으로 일렁이는 온기 앞에서 모여있는 아이들과 로건의 모습을 웨이드는 가만히 다리를 꼬고 앉아서 바위에 몸을 기댄채 조용히 지켜보았다.
엑스맨 스쿨에 있었다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조용히 동굴 안 풍경을 찰스의 대저택으로 바꿔보았다. 땅바닥 대신 따뜻한 카펫이 깔린 나무 바닥으로, 아이들의 누더기 옷은 포근한 스웨터로 변했다. 로건의 자리는 찰스의 휠체어 옆, 그리고 찰스는 아이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웨이드는 상상의 한 구석에 자신도 포함시켰다. 아마도 소파 끝에 앉아 어깨를 기대며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겠지.
그 상상을 하며 웨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건의 열정적인 강의에도 긴 하루의 피로는 아이들의 작고 여린 몸을 서서히 잠식해갔다. 가장 어린 아이들 세 명은 이미 모닥불 옆에서 잠들어 있었고, 로라와 그녀의 친구도 눈꺼풀이 무거워졌는지 천천히 깜빡이며 졸음을 이겨내려 애썼다.
릭터만이 고군분투했다. 지도에 시선을 고정하고 로건의 말을 따라가려 했지만, 그의 작은 몸은 점차 온기에 이끌려 긴장을 놓아버렸다. 고개가 꾸벅꾸벅 떨어질 때마다 그는 움찔하며 잠을 쫓으려 애썼지만, 몸은 점점 무거워졌다.
로건은 그런 릭터를 잠시 지켜보다가 지도에서 손을 떼며 허리를 일으켰다.
“…그래. 너도 피곤하겠지. 이쯤하자. 중요한 건 다 얘기했으니까.”
로건의 말이 끝나자마자 릭터는 작게 “감사합니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자리에 풀썩 늘어졌다.
로건의 시선이 다시 아이들을 향했다. 로라와 그녀의 친구도 고개를 서로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모닥불 옆에서 아이들이 차례로 잠든 모습은 마치 작은 새들이 둥지에서 안도하며 잠든 것처럼 평화로웠다.
“끝났어?”
동굴 구석에서 웨이드가 느긋하게 물었다. 그는 바위에 기대 앉아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로건을 보고 있었다.
“응.”
타닥거리는 모닥불 소리가 동굴 안을 채웠다. 불꽃은 작은 틈 사이로 숨을 내쉬듯 흔들리며 주황빛을 던졌다. 바깥에서 눈이 녹아 떨어지는 물소리가 간간이 들려왔고, 아이들의 고른 숨소리가 이 평화로운 순간의 배경음을 완성했다.
웨이드는 동굴벽에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켜세우고 천천히 걸어오는 로건을 향해 옆 자리를 툭툭 쳐보였다.
로건은 별 말 없이 옆에 앉았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근육이 뻐근해지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는 그였다.
그때, 일렁이는 불빛에 로건의 팔뚝에 남은 상처가 선명히 드러났다.
웨이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기울이며 손가락으로 상처를 가리켰다.
“뭐야. 언제 이랬어?”
로건은 상처를 힐끔 내려다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아까. 좀 긁혔나 봐.”
”회복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것 같네. 지금쯤이면 다 아물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별로 안 아파.”
로건이 천천히 셔츠를 당겨 상처를 덮자 웨이드가 고개를 젓더니 혀를 차며 비꼬는 소리를 냈다.
“네네. 그러시겠죠. 혼자 다 괜찮으시다니까.”
로건은 웨이드의 말을 대꾸하지 않고, 무심한 얼굴로 벽에 등을 기댔다.
웨이드는 그런 로건을 한 번 힐끗 보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돌렸다. 불빛이 그의 얼굴을 간질이며 비췄고, 그제서야 웨이드의 몸도 조금씩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 기대며 몸을 편히 맡겼다.
눈꺼풀이 서서히 무거워졌다.
바깥의 차가운 밤바람 소리도, 간간이 들려오는 눈 녹는 물소리도 배경으로 스며들었다. 동굴 안의 공기는 따뜻했고, 아이들의 고른 숨소리는 마치 작은 이들의 안식처가 된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조용한 밤이었다.
아침 햇살이 입구에서부터 쏟아져 들어오며 희미한 불빛 대신 동굴을 환하게 비추자 웨이드가 서서히 눈을 떴다. 그는 뻣뻣해진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둘러봤다. 낯선 고요함과 함께 어딘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모닥불은 이미 식어 재만 남은 상태였고 동굴 안은 어제와 다르게 허전했다.
“뭐야…” 웨이드는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밤새 이어진 피로에 잠겨 있었다. 눈길을 입구로 돌리자, 거기엔 로건이 서 있었다. 햇살을 등진 그의 모습은 어두운 실루엣처럼 보였다. 로건은 팔짱을 낀 채 동굴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웨이드는 몸을 일으키며 말을 걸었다. “애들은?”
로건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웨이드를 바라봤다. 얼굴은 늘 그렇듯 무표정했지만 어딘가 더 차갑고 피곤해 보였다. 짧은 침묵이 흐른 뒤, 로건이 입을 열었다.
“…갔어.”
“뭐?” 웨이드는 눈을 크게 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냥 보냈다고?!”
로건은 짧게 한숨을 쉬며 팔짱을 풀었다. “그랬겠냐.”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다. “일어나 보니까 이미 아무도 없던데.”
웨이드는 입을 다물고 동굴 안을 둘러봤다. 짐들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지만, 사람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주머니를 급하게 뒤적이기 시작했다.
분명 차키를 넣어놨던 주머니가 텅 비어 있었다.
“하!” 웨이드는 비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대단한 놈들이구만. 여섯이서 아주 똘똘 뭉쳐서 한 팀을 짜더니 뒷통수를 제대로 치네. 어디 가서 굶어죽진 않겠어. 아주 잘 살겠어!”
투덜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허탈해진 웨이드는 바닥에 놓인 작은 돌멩이를 힘껏 걷어찼다. 돌멩이는 동굴 벽을 이리저리 부딪히며 텅텅 울리는 소리를 내더니 저 멀리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로건이 아무 말 없이 왼팔을 만지작거렸다.
지난 밤 상처가 난 부분 위에 누가봐도 엉성한 손놀림으로 붙인 작은 밴드 세개가 줄지어 있었다.
로건이 한동안 밴드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서서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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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풀을 모른다고?”
“그게 누군데요.”
“너넨 만화책도 안보고 자랐냐.”
“봤어요.”
“근데 날 모른다고?”
“네.”
짧고 단호한 대답이 돌아오자 웨이드는 입을 벌리고 아이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의 충격이 절정에 달한 순간, 로건과 로라가 동굴로 들어섰다.
눈이 살짝 녹아 축축한 옷을 걸친 채로 로라와 로건은 조용히 웨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웨이드는 그들을 눈치채지 못한 채 아이들을 상대로 설교를 이어갔다.
“세상에, 너희는 인생을 헛산거야. 히어로계의 아이돌 데드풀을 모른다니? 내가 주인공인 만화책은 보긴 한 거야?”
로라는 로건을 올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저 사람… 정신 괜찮아?”
“아니.”
로건이 무덤덤하게 대답하며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 동안 자기 이름을 설명해도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하자, 웨이드는 기가 막힌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로건과 로라를 번갈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로건은 웨이드의 과장된 반응에 피곤한 눈길을 던지며 차키를 그의 쪽으로 휙 던졌다. 웨이드는 능숙하게 차키를 받아들곤, 한 손으로는 주머니에 쑤셔 넣고 다른 손은 허리에 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리 이 시기에 내가 활동을 안했다지만 이건 정말 수치라고.”
“애들 데리고 뭔 소리를 한거냐.”
“쟤네가 날 모른다잖아. 당신은 알고.”
로건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웨이드를 무시하고 로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치하긴. 애같이 굴지 말라니까.”
웨이드는 투덜대며 로건에게 손을 내밀었다. 로건은 별 말 없이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던졌고, 웨이드는 이를 받아 들고는 동굴 안쪽에 쌓아둔 낙엽 더미로 걸어갔다. 바람과 눈 때문인지 불은 좀처럼 붙지 않았지만, 몇 번의 시도 끝에 작은 불씨가 피어올랐다. 곧 불길이 낙엽을 태우며 따뜻한 온기를 뿜어냈다.
로라가 가져온 음식을 꺼내어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아이들은 눈앞의 간식을 받아들고는 웨이드가 만든 불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먹을 것을 손에 쥔 그들의 눈빛은 조금 전까지의 긴장감에서 벗어나 있었다. 웨이드는 그 모습을 보고 어깨를 으쓱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먹는 게 먼저지. 누가 뭐라하겠어.”
아무리 그들 앞에 데드풀과 울버린이라는 이름이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지금 이 순간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따뜻함과 배고픔을 달래는 것이었다.
로건은 한쪽 바위에 걸터앉아 아이들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침묵이 흐르는 동안 그의 시선은 잠시 불길에 머물렀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로라를 보고, 다시 아이들에게 눈길을 돌리며 무심하게 물었다.
“그래서, 캐나다 국경을 넘겠다는 거냐?”
아이들은 여전히 손에 들린 빵과 과자를 뜯어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로건의 물음에 누구 하나 선뜻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로건은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아이들 사이에서 가장 리더처럼 보이는 남자아이를 향해 턱을 들어 보였다.
“계획은 있어? 거기 너. 리더같이 생긴 애. 네가 얘기해봐.”
남자아이가 고개를 들어 로건과 시선을 마주쳤다. 말문을 열기 전에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릭터예요.”
“그래, 릭터.” 로건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휘적거리며 대꾸했다. “계획이 뭐냐고.”
릭터는 주변을 둘러보며 아이들의 눈치를 잠시 살폈다.
“그냥… 북쪽으로 가라고 하던데요.”
릭터가 간략히 말하며 입가에 빵 부스러기를 묻힌 채 멀뚱히 로건을 쳐다봤다. 로건은 잠시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다가 “허.” 하고 한숨 섞인 웃음을 내뱉었다.
“너네 진짜 대책 없다. 나도 그렇겐 안 살아, 임마.”
옆에서 웨이드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곤 로건을 쳐다보며 말을 덧붙였다.
“아니다, 대책 없는 건 당신이 더…”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로건이 째려보자 웨이드는 가볍게 손을 들며 물러났다.
로건은 로라와 함께 가져왔던, 동굴 바닥에 뒹굴고 있던 종이 지도를 집어 들었다. 낡고 군데군데 접힌 흔적이 남은 지도였다. 그는 그것을 펴더니 아이들 사이에 털썩 주저앉았다.
“잘 들어. 두 번 설명 안 할 거니까 똑바로 봐둬.”
그의 거친 말투에도 아이들은 자연스레 모여들었다. 몇몇은 빵을 입에 물고 오물거리며, 몇몇은 손에 음식을 들고 있었지만 모두 귀를 기울였다.
로건은 손가락 끝으로 지도를 짚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여기 우리가 있는 숲, 그리고 여기가 국경선.” 그는 손가락으로 경로를 따라가며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이 길은 피해야 돼. 순찰이 있을 거다. 그리고 이쪽으로는 절대 가지 마. 얼어 죽을 테니까.”
아이들은 입에 음식을 오물거리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릭터가 살짝 손을 들며 물었다. “그럼 어디로 가요?”
“여기.” 로건이 지도의 한 지점을 손끝으로 강하게 눌렀다. “여기가 국경으로 통하는 비탈길이다. 찾기 힘든 길이라 순찰은 없을 거다.”
온화한 어른의 모습은 아니고 인상을 쓴 채라 오히려 무서운 아저씨에 가까웠지만 로건은 한참을 그렇게 설명했다. 동굴 바닥에 앉아 주황색으로 일렁이는 온기 앞에서 모여있는 아이들과 로건의 모습을 웨이드는 가만히 다리를 꼬고 앉아서 바위에 몸을 기댄채 조용히 지켜보았다.
엑스맨 스쿨에 있었다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조용히 동굴 안 풍경을 찰스의 대저택으로 바꿔보았다. 땅바닥 대신 따뜻한 카펫이 깔린 나무 바닥으로, 아이들의 누더기 옷은 포근한 스웨터로 변했다. 로건의 자리는 찰스의 휠체어 옆, 그리고 찰스는 아이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웨이드는 상상의 한 구석에 자신도 포함시켰다. 아마도 소파 끝에 앉아 어깨를 기대며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겠지.
그 상상을 하며 웨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건의 열정적인 강의에도 긴 하루의 피로는 아이들의 작고 여린 몸을 서서히 잠식해갔다. 가장 어린 아이들 세 명은 이미 모닥불 옆에서 잠들어 있었고, 로라와 그녀의 친구도 눈꺼풀이 무거워졌는지 천천히 깜빡이며 졸음을 이겨내려 애썼다.
릭터만이 고군분투했다. 지도에 시선을 고정하고 로건의 말을 따라가려 했지만, 그의 작은 몸은 점차 온기에 이끌려 긴장을 놓아버렸다. 고개가 꾸벅꾸벅 떨어질 때마다 그는 움찔하며 잠을 쫓으려 애썼지만, 몸은 점점 무거워졌다.
로건은 그런 릭터를 잠시 지켜보다가 지도에서 손을 떼며 허리를 일으켰다.
“…그래. 너도 피곤하겠지. 이쯤하자. 중요한 건 다 얘기했으니까.”
로건의 말이 끝나자마자 릭터는 작게 “감사합니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자리에 풀썩 늘어졌다.
로건의 시선이 다시 아이들을 향했다. 로라와 그녀의 친구도 고개를 서로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모닥불 옆에서 아이들이 차례로 잠든 모습은 마치 작은 새들이 둥지에서 안도하며 잠든 것처럼 평화로웠다.
“끝났어?”
동굴 구석에서 웨이드가 느긋하게 물었다. 그는 바위에 기대 앉아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로건을 보고 있었다.
“응.”
타닥거리는 모닥불 소리가 동굴 안을 채웠다. 불꽃은 작은 틈 사이로 숨을 내쉬듯 흔들리며 주황빛을 던졌다. 바깥에서 눈이 녹아 떨어지는 물소리가 간간이 들려왔고, 아이들의 고른 숨소리가 이 평화로운 순간의 배경음을 완성했다.
웨이드는 동굴벽에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켜세우고 천천히 걸어오는 로건을 향해 옆 자리를 툭툭 쳐보였다.
로건은 별 말 없이 옆에 앉았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근육이 뻐근해지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는 그였다.
그때, 일렁이는 불빛에 로건의 팔뚝에 남은 상처가 선명히 드러났다.
웨이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기울이며 손가락으로 상처를 가리켰다.
“뭐야. 언제 이랬어?”
로건은 상처를 힐끔 내려다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아까. 좀 긁혔나 봐.”
”회복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것 같네. 지금쯤이면 다 아물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별로 안 아파.”
로건이 천천히 셔츠를 당겨 상처를 덮자 웨이드가 고개를 젓더니 혀를 차며 비꼬는 소리를 냈다.
“네네. 그러시겠죠. 혼자 다 괜찮으시다니까.”
로건은 웨이드의 말을 대꾸하지 않고, 무심한 얼굴로 벽에 등을 기댔다.
웨이드는 그런 로건을 한 번 힐끗 보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돌렸다. 불빛이 그의 얼굴을 간질이며 비췄고, 그제서야 웨이드의 몸도 조금씩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 기대며 몸을 편히 맡겼다.
눈꺼풀이 서서히 무거워졌다.
바깥의 차가운 밤바람 소리도, 간간이 들려오는 눈 녹는 물소리도 배경으로 스며들었다. 동굴 안의 공기는 따뜻했고, 아이들의 고른 숨소리는 마치 작은 이들의 안식처가 된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조용한 밤이었다.
아침 햇살이 입구에서부터 쏟아져 들어오며 희미한 불빛 대신 동굴을 환하게 비추자 웨이드가 서서히 눈을 떴다. 그는 뻣뻣해진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둘러봤다. 낯선 고요함과 함께 어딘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모닥불은 이미 식어 재만 남은 상태였고 동굴 안은 어제와 다르게 허전했다.
“뭐야…” 웨이드는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밤새 이어진 피로에 잠겨 있었다. 눈길을 입구로 돌리자, 거기엔 로건이 서 있었다. 햇살을 등진 그의 모습은 어두운 실루엣처럼 보였다. 로건은 팔짱을 낀 채 동굴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웨이드는 몸을 일으키며 말을 걸었다. “애들은?”
로건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웨이드를 바라봤다. 얼굴은 늘 그렇듯 무표정했지만 어딘가 더 차갑고 피곤해 보였다. 짧은 침묵이 흐른 뒤, 로건이 입을 열었다.
“…갔어.”
“뭐?” 웨이드는 눈을 크게 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냥 보냈다고?!”
로건은 짧게 한숨을 쉬며 팔짱을 풀었다. “그랬겠냐.”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다. “일어나 보니까 이미 아무도 없던데.”
웨이드는 입을 다물고 동굴 안을 둘러봤다. 짐들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지만, 사람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주머니를 급하게 뒤적이기 시작했다.
분명 차키를 넣어놨던 주머니가 텅 비어 있었다.
“하!” 웨이드는 비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대단한 놈들이구만. 여섯이서 아주 똘똘 뭉쳐서 한 팀을 짜더니 뒷통수를 제대로 치네. 어디 가서 굶어죽진 않겠어. 아주 잘 살겠어!”
투덜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허탈해진 웨이드는 바닥에 놓인 작은 돌멩이를 힘껏 걷어찼다. 돌멩이는 동굴 벽을 이리저리 부딪히며 텅텅 울리는 소리를 내더니 저 멀리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로건이 아무 말 없이 왼팔을 만지작거렸다.
지난 밤 상처가 난 부분 위에 누가봐도 엉성한 손놀림으로 붙인 작은 밴드 세개가 줄지어 있었다.
로건이 한동안 밴드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서서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웨이드로건 덷풀로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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