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2856811
view 670
2024.11.30 20:38
전편: https://hygall.com/612195235
그 애는 작고 말랐다.
어린 아이들 특유의 갈색의 얇은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풀어헤쳐 이따금씩 바람에 흔들렸고, 입고 있던 청자켓은 어딘가에 걸려 찢어졌는지 끝부분이 너덜거렸다.
그 나이대의 다른 아이들과 다른 점은 온몸에 묻힌 피였고,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자신보다 두배는 큰 성인 남성을 노려보는 그 강인한 눈빛이었다.
그 아이의 클로를 보았을 때, 로건은 한동안 제자리에 멈춰서서 인상을 잔뜩 구기며 자신이 본 것이 맞는지를 확인하는 듯했다.
긴 세월동안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존재가 눈 앞에 있었다.
나와 닮은 어린 소녀가.
그 아이가 자신을 로라라고 소개한 후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아이들 무리 속으로 들어갈때까지 로건은 로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누구시죠?”
그녀의 뒤를 이어, 나이가 조금 더 있어 보이는 소년이 앞으로 나섰다. 몸은 경계로 굳어 있었지만, 어린 동생들을 지키려는 의지가 그의 눈에 가득했다.
로건은 소년에게로 시선을 돌리곤 아무 말 없이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자 웨이드가 이런 상황에서 어김없이 나타나는 특유의 가벼운 태도로 대신 나섰다.
“음, 마침 지나가던 구원자라고나 할까?“
소년은 그런 웨이드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얼굴엔 긴장과 불신이 가득했다.
“구원자요?” 소년은 다시 물었다. “왜요?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당돌하네. 이봐, 어린 친구.”
웨이드는 주변에 쓰러진 검은 옷의 요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우릴 믿기 싫으면 말고. 하지만 우리 덕에 목숨 붙어 있는 건 인정해야 하지 않겠니?”
소년은 요원들의 시체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에 빠진 듯 보였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직 경계심을 완전히 풀지 않은 아이들이 로건과 웨이드를 번갈아 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들은 흩어진 짐을 주워 들고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디 가려고?”
로건이 건조하게 물었다.
“그건 왜?”
짐을 챙겨 작은 배낭을 뒤로 매던 로라가 여전히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날카롭게 되물었다.
“안 잡아먹어. 그러니까 그만 쏘아보지?”
로건은 로라를 한번 쳐다보곤 한숨을 내쉬며 피가 묻은 얼굴을 거칠게 닦으며 대꾸했다.
아이들은 잠시 웅크린 채 서로를 바라보다가 결국 남자아이가 작게 대답했다.
”…에덴이요.”
그 말에 로건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에덴이 뭐야?”
이번에는 웨이드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남자 아이가 웨이드의 질문에 또다시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캐나다에 있대요.” 그가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거기 가면 뮤턴트를 위한 마을이 있다고요.”
“뮤턴트를 위한…”
웨이드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뮤턴트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 이 작은 아이들을 통해 갑자기 선명히 현실로 다가왔다. 로건은 아이들의 얼굴을 말없이 지켜보며 아이들의 말 속에 담긴 희미한 희망과 그동안 겪어온 절망을 읽으려는 듯했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에덴.”
그는 그 단어를 천천히 발음하며 묵직한 눈빛으로 로라를 쳐다보았다.
“뭐가 됐든, 지금 죽고 싶지 않으면 숲 밖을 벗어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 말에 웨이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맞아. 저 무서운 아저씨들 봤지? 숲 밖으로 나가면 넓은 도로에서 너희를 찾는 건 완전 식은 죽 먹기라고.”
그들의 말에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 불안감이 서서히 퍼졌다. 눈길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거나 서로를 바라보며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남자아이가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럼 어떡해요.”
웨이드는 그의 반응에 미소를 지으며 총을 빙글빙글 돌렸다.
“숲 안으로 더 들어가야지. 저놈들이 못 찾게.”
그러자 남자아이는 로건과 웨이드를 번갈아 보더니 결단을 내린 듯 단호하게 말했다.
“앞장 서세요. 그럼.”
웨이드가 멈칫하며 눈을 크게 떴다.
“뭐?”
남자아이는 두려운 기색 하나 없이 똑바로 그들을 응시하며 말했다.
“아저씨들도 연루됐잖아요. 어차피 못 나가는 건 매한가지인데, 같이 가야죠.”
웨이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가 고개를 저으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 꼬맹이들이 똑똑하다고 칭찬을 해줘야 하나.”
로건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남자아이를 응시했다. 그 안에 서려 있는 결단과 성숙함이, 그가 이 아이들을 이끌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게 해줬다.
웨이드는 혀를 쯧 차며 고개를 돌려 로건을 바라봤다. 로건은 조용히 웨이드와 눈을 맞추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여덟 명의 발걸음이 숲속으로 사라지자,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눈밭에 널부러진 검은 옷의 요원들과 차가운 겨울바람뿐이었다. 그들 위로 쏟아지는 눈송이들이 싸늘한 침묵 속에서 천천히 쌓여갔다.
그들은 산 위쪽으로 방향을 잡아 몇 개의 언덕을 넘었다. 눈길을 헤치며 걷던 중, 드디어 바위에 가려진 동굴 하나를 발견했다. 크기가 그리 크진 않았지만, 아이들이 몸을 녹이고 쉴 만한 공간으로는 충분해 보였다. 바위벽이 바람을 막아주고, 눈도 피할 수 있었다. 적어도 오늘 하루를 보내기엔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다.
아이들이 하나둘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웨이드는 로건을 돌아보며 물었다.
“여기가 좋겠지?”
로건은 여전히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의 시선은 로라와 아이들을 쫓고 있었다. 그는 어딘가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웨이드의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동굴 입구를 한 번 살피더니, 짧게 대답했다.
“그래.”
웨이드와 로건의 허락이 떨어지자, 아이들은 안도한 표정으로 동굴 안에 자리를 잡았다. 평평한 바닥에 몸을 눕히며 긴장을 푸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들의 얇은 옷은 겨울의 차가운 기운을 막아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아이들은 몸을 웅크리며 떨었지만, 적어도 눈밭에서 헤매는 것보다는 나아 보였다.
웨이드는 동굴 속에서 무심히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로건에게 다가갔다. 로건은 팔짱을 낀 채 동굴 입구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아래에 놔둔 차에 불 피울 도구랑 음식 같은 거 있는데. 가져와야겠네. 차를 숨겨야 하기도 하고.”
웨이드는 로건에게 툭툭 말을 건넸다. 대답 없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일부러 경쾌한 목소리를 냈다.
“차 어딨는지 알지? 다녀와. 쟤랑.”
웨이드는 로건을 향해 턱짓을 하며 동굴 안쪽에 있는 로라를 가리켰다. 로라는 아이들 사이에서 이미 자리싸움에 한창이었다. 누가 더 좋은 자리를 차지했느냐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던 중, 웨이드의 목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로건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웨이드는 크게 손을 흔들며 로라를 불렀다.
로라는 얼굴에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바지를 툭툭 털며 천천히 걸어왔고, 걸음걸이 하나에도 짜증이 묻어났다.
“언덕 아래 우리가 타고 온 차가 있어.” 웨이드는 로라가 다가오자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 아저씨랑 가서 뭐 좀 들고 와.”
로라는 웨이드와 로건 사이를 번갈아 쳐다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웨이드는 그녀가 반항할 틈도 주지 않고 두 사람의 어깨를 툭툭 밀며 동굴 밖으로 내보냈다.
“자, 가서 좋은 거 많이 챙겨와. 우리도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냐?”
로건이 웨이드에게 밀려 한 발을 내딛다 멈춰 섰다. “야…” 그는 낮게 욕을 내뱉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려 웨이드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는 왜 이러냐는듯한 짜증과 피곤함이 묻어났다.
거의 동시에, 등을 떠미는 웨이드의 팔을 로라가 강하게 쳐내며 으르렁거렸다. 어린 소녀라고는 믿기 힘든 날카로운 반응이었다.
똑 닮았네.
웨이드가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멀어지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이 걷는 길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적막했다. 발밑에 쌓이기 시작한 눈이 밟힐 때마다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불어오는 찬 바람은 마치 살을 에듯 매서웠다. 얇은 옷을 입고 인상을 찌푸린 두 사람은 여전히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너무 멀지도, 그렇다고 가까워지지도 않는 어색한 거리였다.
로건은 살짝 앞서 걷는 로라를 내려다봤다. 작고 마른 소녀가 씩씩하게 걸음을 옮기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단단해 보였다. 그러나 그 손끝에 묻은, 아직 닦이지 않은 핏자국은 어딘가 묘하게 서늘한 느낌을 주었다.
잠시 고민하던 로건이 낮게 입을 열었다.
“…그거.”
로라가 앞만 응시하며 뒤에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듯 말없이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꺼낼 때 아파?”
로라의 걸음이 한 박자 느려지더니,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별로 느낌 없어.”
“…다행이네.”
“아저씨는? 아파?”
“…아니.”
거짓말이었다.
딸일지도 모르는 애가 처음으로 묻는 말에 답한 게 거짓말이라니.
헛웃음이 났다.
오래전에 잊었던 찰스의 말이 떠올랐다.
일주일을 내리 정신없이 헤매던 찰스가, 오랜만에 이전처럼 맑고 총명한 눈빛으로 그의 손을 꼭 붙잡고 중얼거렸던 장면이 생생히 머릿속에 그려졌다.
“자네한테 가족이 남아있어.”
로건은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늘 의아했었다. 찰스가 무엇을 보고 그런 결론에 이르렀는지, 그가 무슨 희망을 읽어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땐 그게 찰스를 의미하는 줄 알았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해졌다.
하나가 사라지니 하나가 생기는겁니까.
세상이 참 잔인하네요. 찰스.
“…그 사람들은 너희를 왜 쫓는 거냐.”
로건은 앞서가던 로라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질 뻔하자 팔을 잡아채며 물었다.
로라가 그런 그를 처음으로 올려다보았다. 잠시 로건을 응시하던 그녀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실험으로 만들어졌어.”
로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사람들을 죽이길 원했는데… 우리가 거부하니까…”
로라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눈을 깜박이며 침을 삼켰다.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는 듯, 그녀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쓸모없는 뮤턴트가 됐대. 그래서… 죽어야 한대.”
그녀의 마지막 말은 희미하게 울렸다. 동물처럼 생존만을 강요당했던 어린 소녀가 입에 담기엔 너무도 가혹한 단어였다.
로건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목 안에서 뱉어진 낮은, 씹어 삼킨 욕이 공기를 갈랐다.
“…씨발.”
로건은 이마를 짚었다.
눈앞의 현실은 묵직한 망치로 가슴을 내리치는 것처럼 그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
뮤턴트가 살아갈 곳은 줄어들고 줄어들어, 세상은 이제 아이들에게조차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지금까지 찰스만 보며 살아온 지난 몇년간, 로건이 애써 외면했던 현실이 무엇보다 참혹한 광경으로 눈 앞에 펼쳐진 기분이었다.
눈앞에 서 있는 소녀, 로라. 그녀의 존재는 차갑고 단단한 진실을 끌어올렸다.
그는 처음으로 그녀를 본 순간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입술 끝에서 더듬거리며 꺼냈다.
“너는 그럼… 그러니까… 누구… 아니,… 부모가…”
로건이 답지 않게 더듬거렸다. 입을 열었음에도 나오지 않는 말이 있다는 게 이런걸까.
로라는 그를 힐끔 쳐다보더니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말을 꺼냈다.
“엄마는 나 낳고 죽었다고 했고, 아빠는 누군지 몰라. 안 알려줬어.”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담담했다. 마치 이 이야기를 수없이 반복해서 되뇌인 듯한 태도였다. 로건은 그 단호한 목소리와 로라의 태도에서 자신을 보았다. 젊은 시절, 상처와 고통을 외면하며 그것을 덤덤함으로 위장했던 자신의 모습을.
로건이 할 말을 잃고 침묵하자, 로라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근데, 필요 없어. 친구들 있으니까.”
그녀의 말에 로건의 눈빛이 흔들렸다. 모든 게 불확실한 상황이지만 이 소녀는 혼자 살아가겠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은 단순한 위안이나 강한 척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가 살아온 삶과 결단을 반영하는 담담한 진실이었다.
“아, 저 차 맞지?”
로라가 비탈 아래 덩그러니 놓여 있는 차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리고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곧장 뛰어 내려갔다.
로건은 이제 그녀의 삶에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움이 가득한 얼굴로 로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단호함 속에서 그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이 아이는 어쩌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할지도 몰랐다.
웨이드로건 덷풀로건
그 아이의 클로를 보았을 때, 로건은 한동안 제자리에 멈춰서서 인상을 잔뜩 구기며 자신이 본 것이 맞는지를 확인하는 듯했다.
긴 세월동안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존재가 눈 앞에 있었다.
나와 닮은 어린 소녀가.
그 아이가 자신을 로라라고 소개한 후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아이들 무리 속으로 들어갈때까지 로건은 로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누구시죠?”
그녀의 뒤를 이어, 나이가 조금 더 있어 보이는 소년이 앞으로 나섰다. 몸은 경계로 굳어 있었지만, 어린 동생들을 지키려는 의지가 그의 눈에 가득했다.
로건은 소년에게로 시선을 돌리곤 아무 말 없이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자 웨이드가 이런 상황에서 어김없이 나타나는 특유의 가벼운 태도로 대신 나섰다.
“음, 마침 지나가던 구원자라고나 할까?“
소년은 그런 웨이드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얼굴엔 긴장과 불신이 가득했다.
“구원자요?” 소년은 다시 물었다. “왜요?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당돌하네. 이봐, 어린 친구.”
웨이드는 주변에 쓰러진 검은 옷의 요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우릴 믿기 싫으면 말고. 하지만 우리 덕에 목숨 붙어 있는 건 인정해야 하지 않겠니?”
소년은 요원들의 시체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에 빠진 듯 보였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직 경계심을 완전히 풀지 않은 아이들이 로건과 웨이드를 번갈아 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들은 흩어진 짐을 주워 들고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디 가려고?”
로건이 건조하게 물었다.
“그건 왜?”
짐을 챙겨 작은 배낭을 뒤로 매던 로라가 여전히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날카롭게 되물었다.
“안 잡아먹어. 그러니까 그만 쏘아보지?”
로건은 로라를 한번 쳐다보곤 한숨을 내쉬며 피가 묻은 얼굴을 거칠게 닦으며 대꾸했다.
아이들은 잠시 웅크린 채 서로를 바라보다가 결국 남자아이가 작게 대답했다.
”…에덴이요.”
그 말에 로건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에덴이 뭐야?”
이번에는 웨이드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남자 아이가 웨이드의 질문에 또다시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캐나다에 있대요.” 그가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거기 가면 뮤턴트를 위한 마을이 있다고요.”
“뮤턴트를 위한…”
웨이드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뮤턴트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 이 작은 아이들을 통해 갑자기 선명히 현실로 다가왔다. 로건은 아이들의 얼굴을 말없이 지켜보며 아이들의 말 속에 담긴 희미한 희망과 그동안 겪어온 절망을 읽으려는 듯했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에덴.”
그는 그 단어를 천천히 발음하며 묵직한 눈빛으로 로라를 쳐다보았다.
“뭐가 됐든, 지금 죽고 싶지 않으면 숲 밖을 벗어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 말에 웨이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맞아. 저 무서운 아저씨들 봤지? 숲 밖으로 나가면 넓은 도로에서 너희를 찾는 건 완전 식은 죽 먹기라고.”
그들의 말에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 불안감이 서서히 퍼졌다. 눈길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거나 서로를 바라보며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남자아이가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럼 어떡해요.”
웨이드는 그의 반응에 미소를 지으며 총을 빙글빙글 돌렸다.
“숲 안으로 더 들어가야지. 저놈들이 못 찾게.”
그러자 남자아이는 로건과 웨이드를 번갈아 보더니 결단을 내린 듯 단호하게 말했다.
“앞장 서세요. 그럼.”
웨이드가 멈칫하며 눈을 크게 떴다.
“뭐?”
남자아이는 두려운 기색 하나 없이 똑바로 그들을 응시하며 말했다.
“아저씨들도 연루됐잖아요. 어차피 못 나가는 건 매한가지인데, 같이 가야죠.”
웨이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가 고개를 저으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 꼬맹이들이 똑똑하다고 칭찬을 해줘야 하나.”
로건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남자아이를 응시했다. 그 안에 서려 있는 결단과 성숙함이, 그가 이 아이들을 이끌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게 해줬다.
웨이드는 혀를 쯧 차며 고개를 돌려 로건을 바라봤다. 로건은 조용히 웨이드와 눈을 맞추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여덟 명의 발걸음이 숲속으로 사라지자,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눈밭에 널부러진 검은 옷의 요원들과 차가운 겨울바람뿐이었다. 그들 위로 쏟아지는 눈송이들이 싸늘한 침묵 속에서 천천히 쌓여갔다.
그들은 산 위쪽으로 방향을 잡아 몇 개의 언덕을 넘었다. 눈길을 헤치며 걷던 중, 드디어 바위에 가려진 동굴 하나를 발견했다. 크기가 그리 크진 않았지만, 아이들이 몸을 녹이고 쉴 만한 공간으로는 충분해 보였다. 바위벽이 바람을 막아주고, 눈도 피할 수 있었다. 적어도 오늘 하루를 보내기엔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다.
아이들이 하나둘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웨이드는 로건을 돌아보며 물었다.
“여기가 좋겠지?”
로건은 여전히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의 시선은 로라와 아이들을 쫓고 있었다. 그는 어딘가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웨이드의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동굴 입구를 한 번 살피더니, 짧게 대답했다.
“그래.”
웨이드와 로건의 허락이 떨어지자, 아이들은 안도한 표정으로 동굴 안에 자리를 잡았다. 평평한 바닥에 몸을 눕히며 긴장을 푸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들의 얇은 옷은 겨울의 차가운 기운을 막아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아이들은 몸을 웅크리며 떨었지만, 적어도 눈밭에서 헤매는 것보다는 나아 보였다.
웨이드는 동굴 속에서 무심히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로건에게 다가갔다. 로건은 팔짱을 낀 채 동굴 입구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아래에 놔둔 차에 불 피울 도구랑 음식 같은 거 있는데. 가져와야겠네. 차를 숨겨야 하기도 하고.”
웨이드는 로건에게 툭툭 말을 건넸다. 대답 없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일부러 경쾌한 목소리를 냈다.
“차 어딨는지 알지? 다녀와. 쟤랑.”
웨이드는 로건을 향해 턱짓을 하며 동굴 안쪽에 있는 로라를 가리켰다. 로라는 아이들 사이에서 이미 자리싸움에 한창이었다. 누가 더 좋은 자리를 차지했느냐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던 중, 웨이드의 목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로건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웨이드는 크게 손을 흔들며 로라를 불렀다.
로라는 얼굴에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바지를 툭툭 털며 천천히 걸어왔고, 걸음걸이 하나에도 짜증이 묻어났다.
“언덕 아래 우리가 타고 온 차가 있어.” 웨이드는 로라가 다가오자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 아저씨랑 가서 뭐 좀 들고 와.”
로라는 웨이드와 로건 사이를 번갈아 쳐다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웨이드는 그녀가 반항할 틈도 주지 않고 두 사람의 어깨를 툭툭 밀며 동굴 밖으로 내보냈다.
“자, 가서 좋은 거 많이 챙겨와. 우리도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냐?”
로건이 웨이드에게 밀려 한 발을 내딛다 멈춰 섰다. “야…” 그는 낮게 욕을 내뱉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려 웨이드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는 왜 이러냐는듯한 짜증과 피곤함이 묻어났다.
거의 동시에, 등을 떠미는 웨이드의 팔을 로라가 강하게 쳐내며 으르렁거렸다. 어린 소녀라고는 믿기 힘든 날카로운 반응이었다.
똑 닮았네.
웨이드가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멀어지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이 걷는 길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적막했다. 발밑에 쌓이기 시작한 눈이 밟힐 때마다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불어오는 찬 바람은 마치 살을 에듯 매서웠다. 얇은 옷을 입고 인상을 찌푸린 두 사람은 여전히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너무 멀지도, 그렇다고 가까워지지도 않는 어색한 거리였다.
로건은 살짝 앞서 걷는 로라를 내려다봤다. 작고 마른 소녀가 씩씩하게 걸음을 옮기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단단해 보였다. 그러나 그 손끝에 묻은, 아직 닦이지 않은 핏자국은 어딘가 묘하게 서늘한 느낌을 주었다.
잠시 고민하던 로건이 낮게 입을 열었다.
“…그거.”
로라가 앞만 응시하며 뒤에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듯 말없이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꺼낼 때 아파?”
로라의 걸음이 한 박자 느려지더니,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별로 느낌 없어.”
“…다행이네.”
“아저씨는? 아파?”
“…아니.”
거짓말이었다.
딸일지도 모르는 애가 처음으로 묻는 말에 답한 게 거짓말이라니.
헛웃음이 났다.
오래전에 잊었던 찰스의 말이 떠올랐다.
일주일을 내리 정신없이 헤매던 찰스가, 오랜만에 이전처럼 맑고 총명한 눈빛으로 그의 손을 꼭 붙잡고 중얼거렸던 장면이 생생히 머릿속에 그려졌다.
“자네한테 가족이 남아있어.”
로건은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늘 의아했었다. 찰스가 무엇을 보고 그런 결론에 이르렀는지, 그가 무슨 희망을 읽어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땐 그게 찰스를 의미하는 줄 알았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해졌다.
하나가 사라지니 하나가 생기는겁니까.
세상이 참 잔인하네요. 찰스.
“…그 사람들은 너희를 왜 쫓는 거냐.”
로건은 앞서가던 로라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질 뻔하자 팔을 잡아채며 물었다.
로라가 그런 그를 처음으로 올려다보았다. 잠시 로건을 응시하던 그녀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실험으로 만들어졌어.”
로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사람들을 죽이길 원했는데… 우리가 거부하니까…”
로라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눈을 깜박이며 침을 삼켰다.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는 듯, 그녀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쓸모없는 뮤턴트가 됐대. 그래서… 죽어야 한대.”
그녀의 마지막 말은 희미하게 울렸다. 동물처럼 생존만을 강요당했던 어린 소녀가 입에 담기엔 너무도 가혹한 단어였다.
로건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목 안에서 뱉어진 낮은, 씹어 삼킨 욕이 공기를 갈랐다.
“…씨발.”
로건은 이마를 짚었다.
눈앞의 현실은 묵직한 망치로 가슴을 내리치는 것처럼 그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
뮤턴트가 살아갈 곳은 줄어들고 줄어들어, 세상은 이제 아이들에게조차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지금까지 찰스만 보며 살아온 지난 몇년간, 로건이 애써 외면했던 현실이 무엇보다 참혹한 광경으로 눈 앞에 펼쳐진 기분이었다.
눈앞에 서 있는 소녀, 로라. 그녀의 존재는 차갑고 단단한 진실을 끌어올렸다.
그는 처음으로 그녀를 본 순간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입술 끝에서 더듬거리며 꺼냈다.
“너는 그럼… 그러니까… 누구… 아니,… 부모가…”
로건이 답지 않게 더듬거렸다. 입을 열었음에도 나오지 않는 말이 있다는 게 이런걸까.
로라는 그를 힐끔 쳐다보더니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말을 꺼냈다.
“엄마는 나 낳고 죽었다고 했고, 아빠는 누군지 몰라. 안 알려줬어.”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담담했다. 마치 이 이야기를 수없이 반복해서 되뇌인 듯한 태도였다. 로건은 그 단호한 목소리와 로라의 태도에서 자신을 보았다. 젊은 시절, 상처와 고통을 외면하며 그것을 덤덤함으로 위장했던 자신의 모습을.
로건이 할 말을 잃고 침묵하자, 로라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근데, 필요 없어. 친구들 있으니까.”
그녀의 말에 로건의 눈빛이 흔들렸다. 모든 게 불확실한 상황이지만 이 소녀는 혼자 살아가겠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은 단순한 위안이나 강한 척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가 살아온 삶과 결단을 반영하는 담담한 진실이었다.
“아, 저 차 맞지?”
로라가 비탈 아래 덩그러니 놓여 있는 차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리고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곧장 뛰어 내려갔다.
로건은 이제 그녀의 삶에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움이 가득한 얼굴로 로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단호함 속에서 그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이 아이는 어쩌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할지도 몰랐다.
웨이드로건 덷풀로건
[Code: 9a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