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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4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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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 상하게 나는 그렇게 모진 말을 뱉어놓고도 유안이 좋았다. 눈에 띄지 말라는 말을 했지만, 하루에 수업이 두개 이상 겹치니 어쩔 수 없었고 우리의 사이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그나마 동아리 활동은 달라서 다행일까. 퀴디치 팀에 들어간 유안과 달리, 엄마에게 어려서부터 활 쏘기를 배운 나는 양궁 클럽에 들어가 있었다. 마음이 혼란스러운 날이면 활만 주구장창 쏘다가 겨우 과제를 하러 도서관에 가곤 했다. 활 때문에 짓눌린 턱과 손끝이 아팠지만 대충 내버려두었다.


"... 이거."


"이게 뭔데?"


"... 디터니 원액. 그거 내버려두면 흉 져."


"이걸 왜 나를 줘? 너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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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쓸만큼 더 있어. 너 나을만큼만 준 거니까 부담 안 가져도 돼. 눈에 띄어서 미안. 그래도 걱정 돼서."


간사한 뱀새끼가 불쌍한 눈 뜬다고 또 마음 주지 말라면서 펄펄 뛰던 오빠 말이 생각났지만, 디터니 원액은 만들기도 힘든데. 이 정도는 받아도 되지 않을까 싶어 나는 끄덕거리고 고맙다고 했다. 다행스럽게도 더 말을 붙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빚진 기분이라 영 가볍지는 않았다. 내가 쟤한테도 뭘 챙겨줄 땐 애정 한 톨이라도 더 받아먹고싶어서 한 건데, 쟤가 무슨 마음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이런 걸 주는 건 뭘 바라는 게 아닐까.


기숙사에서 바르면 리즈가 어디서 난 거냐고 캐물을테니, 혼자 바르는 게 낫겠다 싶어 천문탑으로 향했다. 상처가 생긴 손가락에 디터니 원액을 바르고, 묘하게 화끈거리는 느낌을 견뎌냈다. 멍하니 바닥에 혼자 앉아있자니 이 원액을 준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자연스레 흘렀다. 사귈 때도 내가 더 좋아한다는 느낌이 들었고, 돌려받고 싶은만큼 못 돌려받아서 그렇지 친절은 했다. 이건 친절인가?


"... 생각해봤자 뭐하냐."


겨우 약을 다 바르고 과제를 하러 도서관으로 향했는데, 부쩍 추워진 날씨에 움츠러들었다. 기숙사에서 겉옷을 들고 올걸, 하다가 그냥 옷을 더 여미고 말았다. 과제 빨리 끝내고 올라가면 되는거지, 따위의 안일한 생각이었다. 제일 가까운 오빠 오피스에 후드티 두고 간 거 있을텐데. 그거 입을까.


"뭔데."


"... 너 추워보여서."


"안줘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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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어주면 안돼? 보는 내가 추워서 그래."


이쪽을 노려보는 핀스 부인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내미는 가디건을 받고선 유안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턱짓을 했다. 내일모레까지인 과제니까 절반만 끝내도 되긴 하는데... 뭐 말이 길 것도 아니고.


"뭐야. 눈에 띄지 말란 말이 말 같지 않아?"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뭔데. 우리 헤어진지 한학기가 다 되어가는데 새삼 이제 와서 잡고싶은 건 아닐 거 아냐."


"맞아.. 내가, 내가 그땐 바보같아서, 사과할 줄 몰라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어. 그런데, 막상 우리가 진짜 헤어지고 네가 나를 싫어하니까... 나는 이제 네가 너무 좋은데, 너는 내가 미우니까... 무서웠어."


울먹거리는데 말을 끊고 듣기 싫다 할 수도 없고. 그런 애가 왜 나 울 땐 안 왔니, 내 입장은 하나도 생각 안했니, 하면서 따져물을 말이 한가득이었는데 앞의 애가 울기 직전이니까.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도 내게서 가디건을 뺏어서 내 어깨에 걸쳐주고 소매에 내 팔을 우겨넣으니까, 나는 또 마음이 한발짝 누그러져서. 그럼에도 나는 바보같은 판단은 하기 싫어서.



"그냥 너 졸졸 따라다니던 애가 없으니까 허전한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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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그런, 그런 말을 해.."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럴 법도 하지 않아? 여사친 감싸느라 싸워서 나랑 헤어졌던 전남자친구가 하는 말인 거잖아."


"그건, 우리는 걔가 사라지고 나면 화해해도 된다고 생각했어.. 걔는 나한테 아무 것도 아니니까.. 우리가 같이 보낼 날이 더 많다고 생각했어, 바보같이."


"내가 너한테는 당연한 사람이었다는 거네."


"그것보단... 그러고 싶었어. 무도회 때 파트너 일은, 진짜 미안해. 내가 너였어도 속상할 거 같아."


"그건 별 일 아니야. 그냥, 수많은...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보다 네가 나를 좋아하는 게 덜하다는 걸 증명해주는 것들 중에서 지극히 일부였어. 나는 이제 나를 더 좋아해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을 뿐이야."


유안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게 전부 사실이니까. 고백부터 시작해서 유안이 나를 점차 좋아하게 됐을지는 몰라도, 그게 우리 사이의 간극을 좁힐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 나는 고작 5학년이었지만, 그정도는 알았고- 우리가 헤어지게 된다면 그 이유는 반드시 이 간극을 좁히지 못했기 때문일 거라고 예상했다. 



"... 지금은 내가 더 좋아하잖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뚝 떨어진 눈물에 나는 망토 주머니를 뒤적거려 손수건을 꺼내줬다.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지난 반년간 아팠던 내 자신을 위해서 이 정도 눈물은 봐야 속이 후련하겠다는 생각도 든 건 사실이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꾹꾹 찍어내며 한번만 안아보면 안되냐는 말에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대신 손을 내밀었다. 안기고 나면 익숙하다 못해 기억에 박혀버린, 우디한 향수 냄새를 맡게 되면 내가 배알도 없이 좋다고 할 것 같았다.



"... 기회를 줘." 



내가 머뭇거리자 유안은 덧붙였다. 제발. 그 애 입에서 그렇게 절박한 말을 들어본 건 처음이라 나는 멍해졌다. 여전히 애절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주억거리고서는 자리를 피하고 싶어져서 과제를 하러 가겠다고 했다. 가디건은 내일 수업 때 주겠다니까 자기도 손수건은 그때 주겠다는 말에 대충 알겠다고 대꾸하고 나는 도서관으로 다시 발걸음을 향했다. 다시 기회를 주는 건 어떻게 하는 건데. 방법을 알지도 못하면서 알겠다고 한 건 좀 어리석은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내일, 호그스미드 안 갈 거면  나랑 피크닉 가자."


금요일 수업이 끝나고, 가디건을 돌려주고 나서 응당 손수건을 돌려받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주라는 손수건은 주지 않고 건네는 말에 나는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러자 했다. 도시락은 저가 챙겨오겠다고 하기에 그러라고는 했지만 기껏해야 순혈 가문 도련님인 그 애가 어떤 집요정을 괴롭혀서 도시락을 싸오려나 정도 생각했던 거 같다. 야식이나 챙길 요량으로 들린 주방에는, 그 애가 집요정에게 귀를 기울이며 뭔가를 열심히 같이 만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눈에 띄지 않으려 구석에서 먹을 걸 챙기려고 두리번거리는데, 나를 좋아하는 집요정 스푸키가 허니, 스푸키가 허니가 좋아하는 단호박 파이 챙겨놨어요! 하며 조용히 챙겨주었다. 나는 스푸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어 항상 챙겨다니던, 스푸키가 좋아하는 허니듀크 사탕 몇 개를 쥐어주었다. 부엌에서 나오면서 집요정이 뭐라고 군소리를 하는데도 해맑게 웃는 그 애 모습이 낯설어서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단둘이 좋은 분위기에 있는 건 꼬박 반년만의 일이라, 나는 조금 어색할 거라 생각했는데 유안이 분위기가 어색해지지 않도록 꾸준히 말을 걸어준 탓에 분위기는 썩 나쁘지 않았다. 그 애의 눈색깔과 비슷한 하늘색 텀블러에 커피를 담고 책을 챙겼다. 걔랑 나랑 피크닉을 가면 항상 패턴은 비슷했다. 뭔가를 먹고, 하늘 구경을 하다가 걔는 잠들고 나는 책을 읽곤 했다. 그게 할 말이 없어서 생긴 일이라는 건 헤어지고 나서야 알 만큼 나는 멍청.. 아니, 그 애에게 푹 빠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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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가져왔네?"


"아... 너 낮잠 잘 때 읽으려고."


"... 안 잘 거야."


자도 상관 없는데. 결의에 찬 표정을 보고 그러라 했다. 썰린 모양이 엉성한 샌드위치에, 어디서 들은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단호박 파이는 좀 짰고- 커피는 그래도 용케 산미없는 걸로 한바가지를 챙겨왔더라. 등산 가니? 하고 핀잔을 주고 싶다가도 애썼다 싶어 입을 다물었다. 마음이 있었으면 네가 이렇게도 할 수 있는 애였구나, 싶어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허니, 저기 네가 좋아하는 다람쥐... 울어?"


허둥지둥 제 손수건을 건네주다가, 어설프게 안아줘도 되냐고 묻기에 고개를 내젓자 걔는 내 옆에서 어쩔 줄 모르다가 내가 눈물을 닦아내고 있지 않은 손을 양손으로 잡았다. 뭔지 모르지만 미안해, 내가 기분 상하게 했어? 나 때문이지? 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게 몇달 전 내 모습일 거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좀처럼 그치질 않았다.



"울지 마,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해..."


불쌍한 표정으로, 빠져들고도 남을- 내가 유독 취약한 파란 눈으로 날 바라보는데 그게 꼭 먹이를 응시하는 뱀같아서 나는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어 그 시선을 피했고, 유안은 내 곁으로 다가와 어깨를 감싸고 토닥거렸다. 이 피크닉은 망했다. 그럼에도 걔는 피크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도 내 옆에 꼭 붙어서 퉁퉁 부은 내 눈가를 조심스럽게 눌러주거나, 기숙사로 들어가는 내게 들어가서 먹으라며 단호박 파이를 챙겨주었다.



짭짤한 단호박파이는 저녁에 다시 그 애를 마주칠 생각에 연회장에 가기 싫어져 저녁을 떼우느라 사라졌고, 모순적이게도 그와 함께 유안 때문에 맺혀있던 내 응어리도 조금 사라진 듯 했다.










유첼너붕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