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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5 22:46


“남편 모국언데 영원히 자장가로만 쓸 겁니까?”




시험이라는 말 따위와 아무 상관도 없어진지 오래였건만, 이 나이에 중간고사, 기말고사 같은 것에 일일이 영향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아내가 좀 어려야지.
 
얼굴 딱 한 번 보고 결혼한 늙은 서방이 도대체 뭐가 좋다고 곧잘 조잘조잘 떠들어대며 치대곤 하는 아내는 시험 기간이 되면 무섭도록 조용해진다는 것을 세자르는 알아버렸다. 그때 함부로 말을 걸면 피를 볼 수 있다는 것도. 예민하고 괴팍하기로 유명한 세자르 카살롱가가 다른 곳도 아니고 제 집에서, 제 나이 반밖에 안 되는 조그만 계집아이의 눈치를 보며 살게 되었다는 것은 그를 아는 누구도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었다. 게다가, 본인은 그게 딱히 싫지 않다고 느낀다는 기함할 사실은 더더욱.
 
평일에는 일하는 아주머니가 저녁을 해놓고 가시지만 주말에는 알아서 해야 했다. 주말에까지 가족 외 사람이 집에 드나드는 것은 불편할 것 같다는 아내의 의견에 따라서였다.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세자르였으나, 이것에 대해서는 복합적인 감정이 들어 미묘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좀처럼 내려오지 않았다. 
 
첫째, 아직 상호적인 신체 접촉이라고는 신혼여행에서의 손잡기가 전부인 어린 아내가 저를 ‘가족’으로 여긴다는 것에 대해 어찌 느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절대 싫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둘째- 요리의 요자도 모르면서 요리하는 사람을 치우자고 한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인지 아내는 모르는 것 같았는데, 결국 그건 배우자에게 모든 걸 떠넘긴 셈이 된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 없는 듯 하다는 것이었다. 이 역시 싫지 않다는 점이 스스로에 대해 놀라웠다. 짝이 염치 없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여겨지기보다는, 집사 사정은 됐고 어쨌든 긁어달라고 배를 까고 누워버리는 로잘리처럼 느껴졌다. 마냥 귀여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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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인 어젯밤 늦게 귀가했을 때는 아내가 이미 소파에서 꼬옥 저같은 알록달록한 담요에 아무렇게나 둘둘 감겨 정신없이 잠들어 있었다. 저녁을 먹은 흔적이 없어 염려가 되었지만 밤새 공부하던 걸 알아서, 일단은 잠이 더 급할 것 같아 조심스레 침대로 옮기고 이불만 고쳐 덮어주었다. (밥 먹고 다시 자라고 깨우면 지랄할까 무서워서가 절대 아니다.) 그런데 오늘은, 늦잠 자라고 두고 홀로 나가 장을 봐왔더니 엉망진창으로 말아 쑤셔놓은 이불만 덩그라니 남아있을 뿐 애가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 있을지는 뻔했다.
 
술 먹고 노래방 가고 넷플릭스 보고, 그 나잇대의 스트레스 해소법은 보통 그런 것 따위일 텐데 허니는 좀 독특했다. 그림을 그려서 푸는 것이었다.
 
돈이 넘쳐나는 처가 덕에 살고 있는 커다란 집에는 허니의 그림방이 있었다. 벽지에 마음대로 그리라고 천장까지 온통 흰 종이로 도배가 되어있는 것은 물론이고, 크고 작은 온갖 캔버스가 다양한 이젤에 얹혀 사방에 널려있었다. 미간이 평소보다 좀 좁아보인다 싶으면 어김없이 그 방 문이 닫히고 요란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허니.”
 
조심스레 두드렸는데 답이 없었다. 음악 때문에 안 들리나?
 
“허니, 어제도 끼니 거른 것 같은데 오늘은 먹어야죠.”
 
음성도 높이고 노크도 조금 더 힘줘서 했건만 여전히 아무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조금 망설였지만 하악질을 당할 것을 각오하고 문고리를 돌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이가 방바닥에 젖은 걸레마냥 쓰러져 있었다. 까만 머리칼이 사방팔방으로 퍼져 엉망진창이었다. 황급히 달려가 곁에 무릎을 꿇었다. 잠을 그렇게나 안 자더니 역시 심정지, 심정지인가? 일단 의식부터 확인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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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니! 여보, 여보!”
 
다급하게 부르면서 예전에 교육받은 적 있는 심폐소생술의 단계를 떠올리며 양 어깨를 세게 두드렸다. 911을 부르려고 정신없이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다가 놓치는 순간 허니가 부스스 눈을 떴다.
 
“으응…… 여보……?”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있던 세자르가 호흡을 탁 뱉으며 뒤로 주저앉았다.
 
 
 
 
 
 
 
귀신 산발이었던 머리를 조금 정리하고 묶은 채로 식탁에 앉아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허니였다. 그 맞은편에는 앉지도 못하고 한 손으로는 의자 등받이를 짚고 한 손으로는 끊임없이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는 세자르가 있었다. 안경은 의자를 붙든 손의 약지에 간신히 걸린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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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마비로 죽이려는 겁니까?”
 
“……멋대로 착각하신 거잖아요.”
 
“그런 꼴로 바닥에 구겨져 있으면 누구라도 착각합니다!”
 
잘못해놓고 어디서 말대꾸냐는 의미가 명백한 어조로 세자르가 음성을 홱 높였다. 허니가 겁을 먹고 어깨를 옴츠리고서도 몇 박자 후에 종알종알 지껄였다.
 
“하지만 항상 그림 그리다 말고 그렇게 쉰단 말이에요.”
 
“자랑입니까? 아니 애초에 귀한 몸을 그렇게 함부로 아무데나-”
 
말을 하다 말고 무언가 생각나 우뚝 멈춘 세자르가 백번째로 한 손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고보니 침실을 합치게 되었을 때도 이랬었다. 밤중에 물이 마시고 싶어져 침대에서 다리를 내리는 순간 뭔가가 발끝에 몰캉 밟혔고, 밟힌 이와 둘이 함께 기겁해서 소리를 질렀으며, 불을 켜보니 어린 아내가 베개와 담요를 끌고 와서 남의 침대 밑 맨바닥에서 자고 있었다. 대체 뭐하는 짓이냐고 물으니, 제 방에 큰 벌레가 나왔단다. 벌레 잡는 스프레이를 뿌렸는데 사라졌단다. 어디로 간 건지 몰라서 더 무섭다고, 자다가 얼굴에 떨어지면 어떡하냐고, 그래서 이리로 왔다고 했다. 그때도 마른세수 백 번을 했었다. 아니 이 집에 방이 몇 갠데, 라는 말을 삼키고 벌레가 나오면 언제든 잡아준다는 약속을 했다가 침대를 합치고 얼레벌레 여기까지 온 바였다.
 
아무튼 아무데나 곧잘 눕는 애라는 거였다.
 
“뭐하세요?”
 
“침대 주문합니다. 그 방에 놓을 겁니다.”
 
“필요 없어요!”
 
남의 폰을 답싹 붙잡는 손을 엄하게 내려다보자 조금 옴츠라들면서도 허니가 또박또박 말했다. 마치, 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는 듯이.
 
“물감 천지인 방에 침대를 놓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진짜 기가 차서 바로 대꾸도 못하고 꼬맹이 아내를 힘껏 노려보던 세자르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몸보다 침대가 귀합니까? 물감 묻으면 닦고 빨면 됩니다. 이것 놓으시죠.”
 
“……마누라 말 되게 안 듣는다.”
 
잔뜩 불어터져가지고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을 가볍게 무시하며 세자르가 결제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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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말이야말로 강아지똥 취급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어디서든 바닥에서 자고 있는 거 내 눈에 띄면 각오해요.”
 
“아 무슨 각오요.”
 
“몹시 혼날 각오죠. 알겠습니까?“
 
아주 작게 “쳇.”이라는 소리를 냈다가 남편의 도끼눈 빔을 맞고 허니가 목을 옴츠렸다. 폰을 집어넣고 안경을 쓴 세자르가 한쪽에 걸린 앞치마를 목 위로 쓰고 허리 뒤의 끈을 묶었다.
 
“먹고 싶은 게 있습니까?”
 
한참을 조용하길래 침묵 시위를 하는 줄 알고 혼내려고 했는데 허니가 의외롭게도 대답을 했다.
 
“있어요. 해주시려고요?”
 
“그럼 직접 할 겁니까? 전자렌지 돌릴 줄밖에 모르면서.”
 
“왜 시비야.”라고 조그맣게 꿍얼거리더니 (지금 뭐라고 했느냐고 야단치려다가 세자르가 기력이 없어 관두었다) 허니가 후라이팬을 고르려고 달그락거리는 남편 뒤에서 가만히 말했다.
 
“프렌치 토스트, 프렌치 프라이, 프렌치 드레싱.”
 
뿜을 뻔했다.
 
얼마 전, 자기 전에 나눴던 대화가 있었다. 어쩌다 그런 주제까지 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아마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도란도란 떠들다가 랜덤 착륙했던 곳 같았는데, 도대체 미국인들은 왜 멀쩡한 남의 나라 이름을 상관도 없는 것들에 함부로 붙이냐는 것이었다. 프렌치 토스트는 미국 음식이고, 프렌치 프라이는 벨기에 것이며, 프렌치 드레싱 또한 미국에서 태어난 것이거늘 대체 무슨 짓인지, 게다가 정치적으로 마음에 안 든다고 프렌치 프라이를 프리덤 프라이라는 해괴한 이름으로 개명한 것(*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프랑스가 반대한 것이 원인으로, 2003년에 잠시 유행했다가 사라짐)은 또 무슨 짓인지. 당시에는 “뭐, 미국이 이상한 짓 한두 개 하나요.”라고 깔깔거리며 가볍게 넘겨 놓고선-
 
그러니까 이건, 그야말로 시비였다는 것이다. 이것저것 혼내는 남편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었다.
 
“쓰읍-”이라고 눈을 치켜뜨려는데 뒤돌아보니 요 조그만 것은 이미 호다닥 튀고 없었다. 정말이지 어이가 없어서, 후라이팬 손잡이를 잡고 한참을 내려다보며 입술만 적셨다. 20년 전, 아니 5년 전의 자신에게, ‘너는 마흔이 넘어서 네 나이 반절짜리 콩만 한 계집애와 결혼해서 결혼인지 육아인지 모를 삶을 살게 된다’고 알려주면 과거의 자신이 도대체 뭐라고 반응할지가 몹시 궁금해졌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설탕을 찾고 계란을 꺼내서 풀고 있다는 것은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프렌치 토스트(하!), 그래 뭐 먹고 싶다는데 해드려야지. 비록 시비 털려고 종알거린 말이겠지만, 어쨌든 폭신폭신하게 구우면 먹기야 먹겠지. 그 병아리 조동아리 같은 입으로.
 
 
 
 
 
 
 
세자르너붕붕 스완아를로너붕붕 스완너붕붕
 
+) 남편이 진짜로 프렌치 토스트를 구운 걸 보고 농락당하는 기분에 허니는 앞니를 화난 로잘리마냥 격하게 내보이며 입술을 깨물었지만 세자르의 예상대로 결국 우물우물 잘 먹었다. 그 옆에서 로잘리도 평소처럼 밥을 챱챱 잘 먹었다. 둘에게 차례대로 물을 따라준 세자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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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5 22:5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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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너무좋아서광대가 하늘로 승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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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5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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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억나더!!!! 너무 귀야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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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5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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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고양이 둘 키우는 집사 일기인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심지어 로잘리가 말 더 잘 듣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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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5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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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남편이야 냥집사얔ㅋㅋㅋㅋ 하 센세 진짜 지우지마 그리고 삼나더 사나더 기다리고 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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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5 23:3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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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나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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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5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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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커여워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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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6 00:1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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냥집사이자 애처가가 따로 없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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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6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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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진짜 넘 ㄱㅇㅇ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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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6 03:4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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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ㄱㅋ 허니 진짜 고양이같네ㅋㅋㅋ 냥집사 세자르ㅋㅋㅋㅋㅋㅋ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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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6 17:5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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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재밌닼ㅋㅋㅋㅋㅋ저는 프렌치 억나더요(뻔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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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7 16:4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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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사랑해 아 로잘리가 되고싶다 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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