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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4 02:18


잘 준비를 마친 아내가 신이 나서 책을 가져오는 것을 보고 세자르가 저도 모르게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진짜 이럴 겁니까.”
 
“아 왜요오. 귀찮으세요?”
 
금방 슬픈 강아지 눈을 하고선 시무룩한 목소리를 내는 게, 내는 시늉을 하는 게 가증스럽고 귀여워서 미소는 더 커지기만 했다.
 
“그런 말은 안 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영영 불어를 안 배우시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니에요오. 청해에 도움 된다구요, 청해에.”
 
세자르가 드디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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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청해가 전혀 안 돼서 좋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요.” 라며 아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에 세자르가 다시 한 번 웃었다. 진짜, 조그만 사람이 어쩜 이렇게 뻔뻔한지.
 
결혼식 전에 얼굴을 딱 한 번 본 게 전부인 정략결혼이었다. 엄청난 나이 차이도 그렇고, 사랑은 물론이고 인간적인 유대조차도 아무 기대도 없었고 상대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저 같은 집에만 사는 하우스메이트 같은 존재로 잡음만 없이 지내자는 쌍방 합의가 있는 거라고. 각자 연애는 알아서 하고.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조잘거리며 말을 걸어오는 신부에게 크게 당황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신혼여행을 아기자기하게 잘도 함께 즐기고 있었다. 작고 어린 까만 눈동자의 신부는 매사 호기심과 열의가 넘치는 사람이었고 손도 그쪽에서 먼저 잡았다. 열대의 섬에서는 흔한 풍경을 보고 홀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저기, 벤치 밑에 게가 있어요!”라며 손을 답싹 잡아당기는 것에 눈이 커진 채로 속절없이 끌려갔던 기억은 아마 어떻게 해도 잊을 수 없을 것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가 참 많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하루가 끝나면 일상을 공유하고 있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낮에도 틈틈이 연락을 해서 안부를 주고받고 있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저녁은 꼭 함께 먹고 있었다. 주로 기운 넘치는 아내가 뭔가를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진행했고 세자르는 어어어 하다가 따라가고 있었지만 그렇게 해서 다다른 곳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적이 없어서, 이제는 아내가 어떤 제안을 하면 일단 고개부터 끄덕이고 보는 패턴마저 자리잡혔다.
 
어린 아내는 고양이 같았다. 어떤 면에서는 로잘리보다도 더. 뭔가 궁금하면 꼭 자세히 살펴보고 기어이 건드려봐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무언가 해보고 마음에 들면 제멋대로 그것을 하루의 루틴으로 집어넣는 걸 보고 있자면 기가 막혀서 그저 웃음만 흘러나왔다. 동참해주지 않으면 난리가 나서 따라주어야 했다. 자기 전에 꼭 프랑스어로 된 책을 읽어주게 된 것도 그 중 하나였다.
 
이어폰을 꽂고 자다가 한 쪽을 잃어버렸다며 침대를 다 들어낼 것처럼 구는 것 옆에서 함께 네 발로 기며 물건을 찾아주는 게 몇 번을 넘어가자 물어본 바 있었다. 도대체 자기 전에 뭘 듣는 거냐고, 너무 시끄러운 게 아니라면 그냥 이어폰 없이 소리 틀어도 된다고. 쭈뼛거리다가 튼 것이 영 낯선 언어의 오디오북인 것에 세자르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독일어입니까?”
 
비슷하나 아닌 것 같았지만 일단 물어보았다. 허니가 제 폰을 집어들더니 스크롤을 조금 내렸다.
 
“아니요, 아프리칸스예요.”
 
“……아프리칸스?”
 
미국에서 평생을 보낸 동양계 미국인이 네덜란드어에서 파생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언어를 무엇 때문에 알고 있을지, 잠시 두뇌가 열심히 돌아가며 그 상관관계를 파악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내의 배경이며 전공이며 그 무엇도 남아공과의 어떤 관계가 보이지 않았다. 모국어인 영어와 그녀 부모의 언어 외에 이 사람이 구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미국인이라면 흔히 중고등학교 때 어설프게 배우는 스페인어 조금, 그 정도라고 알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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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할 줄 압니까?”
 
“할 줄 몰라요.”
 
아내가 해맑게 즉답했다. 세자르 카살롱가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하나 떴다.
 
“할 줄 몰라서 듣는 거예요.”
 
물음표가 늘었다.
 
“공부하려고 말입니까……?”
 
아내가 고개를 저었다.
 
“알아들으면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니까 잠드는 데 방해되잖아요. 그래서 일부러 하나도 못 알아듣는 걸로 골라서 듣는 거예요. 잘 자려고.”
 
세자르가 한참이나 할 말을 잃었다. 그것을 대화가 끝난 것으로 판단했는지 아내는 다시 배 위에 손을 깍지 껴서 모으더니 눈을 감았다. 그것도 제멋대로인 게 꼭 고양이라고 생각했다. 손을 뻗어 나직한 남성의 목소리로 재생되고 있는 오디오북을 멈추자 아내가 눈을 떴다. 제 손에 들려있는 책을 들어보인 건 어떤 충동이었다.
 
“그럼 불어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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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한 번 잘못 읽어주었다가 아내의 마음에 쏙 들어버려, 그 하루 루틴에 강제로 끼워졌다. 이제 아내는 씻고 얼굴에 뭔가 바르고서 베개를 팡팡 두드린 후 반드시 책을 가지고 왔다. 읽으라는 거다.
 
“남편 모국언데 영원히 자장가로만 쓸 겁니까?”
 
서로 간간히 생사만 확인하는 하우스메이트가 되자고 마음 먹었던 것은 어디로 갔는지. 세자르가 스스로 조금 민망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부드럽게 항의했다. 허니가 입술을 비죽였다.
 
“저는 스페인어도 충분히 힘들었다구요. 프랑스어는 더 어렵다면서요. 그리고 영어로 의사소통 다 되잖아요.”
 
“밥 먹자, 자자 이런 피상적인 말이야 다 되겠죠. 하지만 영어를 쓸 때의 저와 프랑스어를 쓸 때의 저는 다른 사람인데, 다른 한 명의 세자르도 만나고 싶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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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관심을 보여 달라고, 애정을 달라고 구걸하는 꼴이 되어버렸다는 자각이 한발짝 늦게 들어 얼굴로 피가 몰렸다. 다행히 허니는 공부하기 싫다는 마음에 눈을 굴리며 딴청을 피우느라고 거기까지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게 따지면 여보도 영어 쓰는 허니 한 명밖에 모르잖아요.”
 
“아닌데.”
 
「저는 누구랑 달라서 공부했거든요.」라고 그녀 부모의 언어로 완벽하게 말하자 아내의 까만 눈이 휘둥그레졌다.
 
“치사해! 언제 했어요?”
 
‘치사하다’는 말이 이 상황에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아 세자르가 소리내서 웃었다.
 
“혹시 원래 할 줄 알았던 거예요?”
 
“아니요. 결혼하고 나서부터 공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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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라고 물으려던 허니가 입만 벙긋거리다가 조용히 다물었다. 잘 모르겠지만 그것을 물으면 어쩐지 뭔가, 뭔가 큰일이 날 것 같았다. 무슨 큰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귓가에 정체 모를 열이 오르는 게.
 
“흥, 몰라. 책이나 읽어줘요.”
 
“그래요. 청해 연습에 도움 되길 바랍니다.”
 
“안 할 거거든요.”
 
“한다면서요.”
 
“아 공부 강요하지 마세요옥-!” 이라는 하악질을 당하고서 어깨를 떨면서 소리없이 웃으며 세자르가 안경을 고쳐 쓰더니 어제까지 읽은 곳에서부터 이어서 낭독을 시작했다. 남편의 나지막한 음성을 자장가 삼아 가물가물 잠이 들어가는 허니가 끝까지 몰랐던 것은, 제 옆에 누워있는 여자가 두 팔을 치켜들고 베개 밑으로 어린아이처럼 손을 집어넣은 모습이 어떤지, 이불 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릴 때마다 같은 이불을 덮은 이에게 전달되어 오는 간질간질한 감각이 어떤지, 그리고 앞뒤 안 맞는 일관성 제로의 말들로 삐약삐약 우겨대는 것이 얼마나 흡사 로잘리 동생 같은지- 그런 내용들은 세자르 카살롱가의 손에 들려있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프랑스어판에는 그림자 한 조각도 나오지 않는 내용이라는 것이었다.
 
 
 
 
 
 
 
 
세자르너붕붕 스완아를로너붕붕 스완너붕붕
 
*로잘리는 Dans l'ombre에서 세자르가 키우는 고양이

어나더
삼나더
사나더
 
2024.04.14 02:2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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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알아듣는 말로 애정표현하고있는거네( o̴̶̷̥᷅⌓o̴̶̷᷄ )센세 억나더!!
[Code: 8b75]
2024.04.14 02:5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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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달달하다.. 혼자서 쉬지 않고 줄줄 말할 수 있을 만큼 애정이 넘친다는 거 아냐
[Code: a86a]
2024.04.14 04:0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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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문단 읽고 달달해서 죽을것 같은데요 센세!!! 붕붕이가 불어를 영원히 몰랐으면 좋겠으면서도 알았으면 좋겠고!!! 센세 도대체 이 새벽에 뭘 주신 겁니까!!!!!
[Code: b8a3]
2024.04.14 04:0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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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달달하다 ㅠㅠㅠㅠㅠ 와중에 허니 언어까지 배운거 너무 스윗한거 아니냐고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제발 억나더 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f278]
2024.04.14 05:5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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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허니비 언어도 배웠어 부모의 언어까지…!!!!
사랑이야 사랑
[Code: d853]
2024.04.14 07:1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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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다 ㅠㅠㅠㅠㅠㅠ
[Code: ef15]
2024.04.14 07:35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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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개설렌다 센세 나를 책임져 이렇게 아침부터 설레게 해놓고ㅠㅠㅠㅠㅠㅠ
[Code: 5fef]
2024.04.14 10:0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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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야ㅜㅜㅜ프랑스어로 고백이나 절절하고있다니 진짜 사랑스러워 ༼;´༎ຶ۝༎ຶ༽
[Code: 07ec]
2024.04.14 11:1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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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존나 스윗하다.. 사랑이다..
[Code: ed37]
2024.04.14 13:3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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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ㅊ 허니비 유 네버 노우 하우 머치 세자르 러브 유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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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4 13:4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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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좋다
[Code: b169]
2024.04.14 23:4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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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아아아 더줘요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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