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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9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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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알못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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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스텔스 파일럿이니 뭐니 하면서 투명인간 취급을 당했을 때가 나았다. 아웃소싱 업체로 견학을 나온 원청 소속 대리같은 기분을 꾸준히 느끼는 것보다는 말이다. 지금의 제이크 세러신은 로버트가 눈에 띌 때마다 무슨 RPG게임의 자석펫처럼 따라붙었다. 그리고 입을 열 때마다 그 명확한 발성과 또렷한 목소리로 그를 향한 칭송을 내뱉어댔다. 레파토리는 늘 비슷했다. 귀하신 몸, 미 해군의 빛과 희망, 미래의 4성 제독, 이 어두운 시대의 떠오르는 태양 등등. 천장을 향해 치솟은 입꼬리에는 흥미와 이죽거림이 잔뜩 묻어있었다. 로버트는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감고 최대한 그를 무시했으나 그럴 수록 미사여구는 더 늘어만갔다. 

신나게 깝족거리며 한 마디씩 얹는 모습이 꼴보기 싫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행맨을 직면할 수는 없었다. 이글거리는 녹색 눈을 볼 때마다 트라우마처럼 공동샤워실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그의 의지가 아니었으나 말만한 남정네(심지어 직전까지 서로를 향해 이를 갈았던)와 가슴을 맞대고 바,바밥,발기까지 하고 말았던 그 날의 끔찍한 기억이.

나는 변태인가.

기억하기도 싫은 그 날 로버트는 텅 빈 락커룸 벤치에 앉아 한참이나 좌절섞인 국가를 불러야 했다. 한숨처럼 흘러나오는 구슬픈 멜로디를 배경으로 그동안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수많은 센티넬을 겪었지만 가이딩 중 그가 발기한 전적이 있던가? 왕가슴과 가슴을 맞붙였다는 이유로 발기를 했던 적은? 그럴 리가. 가이딩을 위해 타인과 체온을 나눈 것이 수백번이요, 동기들과 컴뱃샤워를 위해 땀에 젖은 날궁둥이를 서로 모아붙이고 샤워기 아래를 후다닥 스친 적이 벌써 수십차례지만 여태껏 그가 아랫도리 문제로 곤란을 겪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왜 하필 그때, 왜 하필 그 인간과...

직전까지 서로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렸던 탓일까? 격투상황에 대비해 바짝 날이 선 교감신경이 오류를 일으키고 만 걸까? 그래, 전투태세로 돌입한 몸이 코뿔소가 뿔을 세우듯 성기를 세웠을 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수가 있나? 무슨 원시종족도 아니고?

이유야 어찌되었든 저 빤질한 얼굴을 무덤덤하게 마주할만큼 로버트는 뻔뻔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로버트는 혼란과 자괴감 속에서 제가 흔히 택하지 않는 대처방법을 택했다. 그건 바로 회피와 무시였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렀다. 제이크 세러신은 빈정거리면서 따라붙고 로버트는 불량배로부터 소중한 용돈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학생처럼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공들여 딴청을 부렸다. 그 어울리지도 않는 꼴을 바라보던 루스터가 말했다.


"밥, 너 행맨이랑 뭐 있냐?"


왁자지껄해야 마땅할 부대 내 카페테리아는 녹초가 되다못해 녹즙이 되어가는 장교들의 앓는 소리로 고요했다. 루스터 역시 여상한 목소리와 달리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카프리썬에 빨대를 꽂고 있었다. 루스터가 눈짓하는 곳에는 제이크 세러신이 있었다. 그들로부터 테이블 세 개 정도 떨어진 거리였다. 코요테와 마주 앉아 식판을 검지손가락으로 톡톡 건들며 뭔가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그는 다른 동료들과 달리 오늘도 멀끔한 차림새였다. 지독한 훈련따위 별 대수롭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로버트는 기계적으로 미트볼을 씹어삼키고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아니. 별 거 없는데."


꽤 자연스러워보였는지 루스터가 흐음, 콧소리를 내며 카프리썬 빨대를 자근자근 씹었다. 


"근데 왜 너한테 저렇게 굴지? 완전 특별대우잖아."
"특별대우?"
"적어도 가이드를 대하는 것 치고는?"


로버트의 얼굴이 팍삭 구겨졌다. 원래도 바닥을 기던 입맛이 뚝 떨어졌다. 황당한 얼굴로 공감을 구하기 위해 옆자리의 피닉스를 돌아보자 피닉스는 입꼬리를 내리고 어깨만 으쓱했다. 루스터의 말에 어느정도 동의하는 눈치였다. 로버트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뭐, 저 백맨이 밥한테는 좀 특별히 색다르게 굴긴 하지."


피닉스는 말을 마치자마자 경악한 밥의 얼굴을 보고 푸하핫 웃음을 터뜨렸다. 루스터 역시 빨대로 로버트의 얼굴을 가리키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근육통때문에 괴롭다며 제 배를 끌어안으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아니, 네가 행맨이 평소에 하는 걸 못봐서 그래. 여기서 처음 만났으면 당연히 모르지. 안그래?"


간신히 웃음을 멈춘 피닉스가 로버트를 구슬렀다. 하긴, 맞는 말이었다. 그는 행맨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했다. 이번 미션 이전에 만났다고 해봐야 그게 몇 시간 되지도 않았고 말이다. 로버트가 입을 다물고 평정을 되찾자 루스터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이었다.


"나는 그 놈이랑 같은 함정을 탔었거든. 사용기체도 같고 둘다 센티넬이니까 함실도 나눠썼지. 근데 행정절차상 반드시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가이딩을 안 받더라고. 물어보니까 뭐라는 지 알아?"


로버트는 답을 알고 있었다. 징그럽고 더럽고 귀찮고, 뭐. 벌레를 설명할 때에나 붙을 만한 말을 꺼냈겠지. 그러나 예상보다 더 심한 수식어가 나왔다.


"혐오스럽대. 나약한 주제에 저도 능력자입네 질척하게 엉겨붙는게 싫다나."


그 말엔 피닉스도 질린 표정을 지었다.


"진짜 괜히 미친새끼가 아니구만."
"더한 건 또 따로 있어."


루스터가 큰 몸을 접어 식탁에 바투 붙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피닉스와 밥 역시 그를 따라하며 그의 말에 집중했다. 말만한 해군장교 셋이 테이블 위에 납작 엎드려 소근거리는 모양새가 남이 보기엔 우스웠으리라. 루스터는 괴이한 것을 진술하듯 인상을 찌푸리고 속삭였다.


"그때 공중지원 나갔다가 복귀해서 가이딩을 받았거든. 왜 단체로 그냥 건강검진처럼 받는거 있잖아. 꼭 받아야하는 거."
"그치. 그거 안 받으면 결격되잖아."

"근데 가이딩 받다말고 가이드 팔을 잡아 꺾더라니까? 그만 하라고 했는데 계속 붙어있었다고 말이야."


피닉스가 경악해서 입을 벌렸다. 로버트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피닉스가 쇳소리를 내며 다그치듯 물었다.


"가이딩 중에? 그게 어떻게 가능해? 자기 가이딩해주는 사람을 공격한다고? 센티넬이 그게 가능해?"


루스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전히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대신 입을 연 건 로버트였다.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등급차가 크고 매칭율이 낮으면 이론상 가능하긴 해."


그리고 충격에 빠진 얼굴들에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


"물론 매칭율이랑 상관없이 본성을 거스르는 거라 어렵긴 하지만."


그 말에 피닉스가 혀를 내둘렀다.


"본성을 거스를 정도의 인성이란 거야? 정말 놀라운 능력이네."


로버트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분위기가 다시 가벼워졌다. 루스터가 식탁에서 몸을 일으키며 키득키득 웃다가 덧붙였다.


"나도 A급이지만 나는 전혀 그럴마음이 안들던데."
"당연하지, 너는 그 미친놈이랑 다른데."


로버트는 키득거리며 떠드는 둘을 뒤로하고 흘끔 행맨의 테이블을 곁눈질했다. 코요테와 신나게 떠들던 행맨이 귀신같이 시선을 눈치채고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행맨의 입꼬리가 위로 비틀려올라갔다. 그는 곧 다분히 연극적으로 절하는 시늉을 했다. Your majesty, 거리상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입모양으로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로버트는 그를 무시하고 고개를 바로했다.

세러신의 힘. 그건 A급의 힘이 아니었다. 규격 안에 가둘 수 없는 그 외의 어떤 것이었다. 심상도 마찬가지다. 제이크 세러신은 그 어떤 센티넬과도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센티넬이 아닌 것은 아닌데 대체 그는 왜, 그리고 어떻게 가이드를 공격할 수 있는 것일까. 그 황량했던 심상과도 관련이 있는 걸까? 곰곰이 생각하던 로버트는 고개를 젓고 식판 위에 있는 주스를 챙겨 일어났다. 미션에 하등 쓸모도 없을 불필요한 생각으로 너무 애먼데 에너지를 쏟고있다는 자각이 든 것이다. 미션이 우선이다. 개인적인 호기심은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뒤로 미뤄놔도 괜찮을 것이다.

아니면 뭐, 평생 묻어둬도 괜찮고.




-




이번 훈련은 단좌기와 복좌기가 같이 페어를 이루어 공중전을 벌이는 훈련이었다. 탑건 스쿨에서 배운 것과 비슷했다. 제공권을 장악하기 위해 적기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훈련의 골자였다. 일반적인 도그파이트 훈련과 다른 점은 상대를 죽이지만 않는다면 센티넬 능력을 개방해도 무방하다는 것과 그렇다고해서 능력으로 직접 격추를 시켜서는 안된다는 점뿐이었다. 그들을 상대할 적기 역할로는 단 한 명이 나왔다.

대령 피트 매버릭 미첼.

그 이름만으로도 최전성기를 달리는 미 해군 최고의 엘리트 조종사들을 압도하기엔 충분했다. 미국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전설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저 양반이 아직 현역이었어?"


이쑤시개를 질겅이던 행맨의 잇새로 감탄인지 탄식인지 알 수 없을 것이 흘러나왔다. 무의식적으로 나온 말 같았다. 그러나 행맨이 평소의 시끄러운 존재감으로 바로 옆자리에서 휘파람을 불든말든 로버트는 입을 꾹 다문 채 부들부들 떨고있을 뿐이었다. 왜냐면, 세상에 그! 피트 미첼! 그 매버릭이! 내 눈 앞에! 있다니! 이 기적같은 일을 믿을 수가 없었으니까. 로버트는 속으로 끌어오르는 비명을 참느라 죽을 지경이었다. 그의 관사 한 귀퉁이를 차지한 유리 장식장에는 매버릭을 메인 기사로 둔 해군사보와 그가 접근 가능한 한도에서 있는대로 긁어모은 작전보고서, 매버릭이 전설적인 미션에서 사용했던 기체의 모형 등이 가득 들어있었다. 당장 매버릭에게 사인을 부탁하고 싶어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그러나 로버트는 엄숙하게 표정을 관리하며 입술을 안으로 말아물었다. 그의 우상에게 얕보일 수는 없다. 팬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은 그를 격추시킨 이후로 미뤄야 한다. 로버트는 피닉스에게 고개를 돌리고 강건한 목소리로 말했다.


"피닉스. 내가 보조할게. 폭주해도 괜찮다는 각오로 덤벼."


그 엄숙한 말에 피닉스가 눈썹을 들어올리며 웃었다. awwww, 모양좋은 눈썹이 팔자로 휘었다.


"밥, 이런... 내가 사인 받아다 줄까?"
 

젠장, 들켰다. 

여하튼 살아있는 전설 매버릭과 맞붙는 이런 기념비적인 훈련에 행맨과 같은 팀이 아니라 여러모로 다행이었다. 이번 훈련의 파트너는 코요테였다. 코요테는 친구보는 눈은 별로여도 제법 의리가 있고 소통이 잘 되는 성격이라 합을 맞추기 좋은 상대였다.

전투기에 오르기 전 활주로에서 몸을 푸는 그들에게 매버릭이 직접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그는 중키에 단단한 체격을 지닌 중년남자였는데, 무시무시한 타이틀과는 달리 서글서글한 미소와 아직 소년같은 장난기로 빛나는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다. 로버트는 그가 소탈한 태도로 내민 손을 맞잡으며 넋을 놓고 씰룩씰룩거리는 제 입꼬리를 단속했다. 장갑을 끼고 있어 다행이었다. 그의 손을 흥건하게 적시는 땀이 매버릭의 손에 묻을 염려가 덜했으니까. 피닉스는 그의 바로 옆에서 모두 알고있다는 듯 눈썹을 휘며 웃음을 참았다.

그의 뻣뻣한 모습이 긴장의 산물이라고 생각한 매버릭이 소형 설치류처럼 둥글게 말리는 입꼬리로 장난스럽게 농담을 걸었다.


"어렵겠지만 죽이지 않도록 노력할테니 긴장하지 않아도 되네, 대위."


그러자 행맨과 같이 다니더니 싸가지며 간덩이를 모두 어딘가에 따로 보관하는지 코요테가 이를 드러내며 대신 답했다. 


"본인이나 조심하시죠. 여기 모인 사람들이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을 거라서."


코를 찡긋하며 미소로 마무리하긴 했으나 대놓고 호전적이었던 코요테의 발언에 매버릭은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눈썹 한쪽을 꿈틀거린 코요테가 낮게 읊조렸다.


"매버릭, 좌향좌."


그러자 매버릭이 마치 위병이라도 된 듯 정확한 각도로 왼쪽을 향하여 돌아섰다. 매버릭의 눈에 흥미와 솔직한 놀라움이 스쳤다. 코요테는 것보란 듯 거만하게 웃어보였다. 오호, 몸이 언령의 제어에서 풀리자마자 매버릭이 감탄하며 웃었다.


"그 능력 정말 대단한데?"


코요테가 겸양이라도 떠는 듯 가슴에 한 손을 올리고 고개를 까닥 해보였다. 매버릭이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여기 제독도 인정한 거지만, 마침 내 능력이 남의 말 안 듣는 거라서 말이야."


마주보고 활짝 웃음짓는 둘 사이에서 불꽃이 튀는 듯했다. 해군 파일럿들 사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설마하니 전설 속 인물에게까지 기싸움을 걸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말이다. 파일럿들의 에고란. 로버트는 한숨을 참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기싸움이라면 평소 질색하는 것이었지만 매버릭이 하니 어쩐지 청춘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매버릭이 먼저 등을 돌리고 F/A-18F를 향해 걸어갔다. 로버트는 꿈꾸는 듯한 얼굴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의지가 불타올랐다. 로버트는 코요테와 악수를 나누며 당부했다.


"혹시 가이딩이 필요할 것 같으면 바로 무전해. 피닉스가 포탈을 열어줄거야. 그 틈으로 내가 가이딩할게."
"든든하네, 고마워 밥."


기특하다는 듯 어깨를 툭툭 친 코요테가 헬멧을 쓰고 제 기체를 향해 걸어갔다. 로버트는 피닉스와 시선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인 뒤 헬멧을 쓰고 복좌기에 올랐다. 

매버릭이 먼저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다음은 피닉스와 밥의 차례였다. 거의 바로 뒤이어 출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안정고도에 올랐을 때 이미 매버릭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긴장한 로버트에게 뒤이어 이륙한 코요테의 무전이 들려왔다.


[밥, 매버릭 보여?]
[네거티브. 레이더에도 안 잡혀.]
[괜찮아, 내가 맡을게. 매버릭. 모습을 보이세요.]


코요테의 깔끔한 목소리가 무전을 타고 흘렀다. 그러자 저 멀리서 매버릭이 탄 기체가 순식간에 그들의 앞으로 쇄도해왔다. 능력을 이용해 레이더 전파를 튕겨내고 있었는지 그 와중에도 레이더에는 그가 탄 기체가 전혀 잡히지 않았다. 쩐다, 로버트가 소리없이 입모양만으로 중얼거렸다.


[매버릭 멈ㅊ-]


기세등등하게 다음 언령을 내리던 코요테의 목소리가 갑작스러운 지지직 소리와 함께 끊겼다.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매버릭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유용한 능력이긴 한데, 목소리가 안들리면 아무 소용 없잖아 대위.]


다정하고 느긋한 목소리였다. 코요테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로버트도 곧 알게 되었다. 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헬멧과 연결된 무전기의 헤드폰에서 스파크가 튀어올랐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로버트가 헬멧 겉면에 부착된 무전수신기의 케이블을 황급히 떼어냈다. 케이블은 이미 반쯤 녹아 고무타는 냄새를 풍기며 진득하게 눌어붙어 있었다. 단 한번의 공격으로 WSO에게서 목소리를 빼앗다니. 로버트는 이 노련한 센티넬의 창의성과 정교한 조절능력에 감탄했다. 그러나 고작 그 정도도 대비를 못할 만큼 피닉스와 밥이 호락호락한 페어는 아니었다.


"밥, 다치진 않았어?"


헬멧 내부에 생긴 초소형 포탈로 피닉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무전을 통하는 게 아니다보니 엔진음이 섞여 시끄러웠지만 직접 귀에 대고 말하는 만큼 오히려 음질은 더 나았다. 로버트는 방사가이딩을 풀며 피닉스에게 감사를 표했다. 피닉스의 심상은 그의 콜사인에 걸맞게 일렁이는 불꽃이었다. 로버트는 낼름거리며 타오르는 주홍색 불꽃에 마른 장작을 밀어넣으며 미소지었다.


"좀 놀랐지만 괜찮아."
"코요테, 넌 어때?"
"와. 포탈로 이런 것도 할 수 있는 거였어?"
"밥의 아이디어였지."
"너무 초반부터 과하게 달리는 건 아니고?"
"걱정마, 코요테."


코요테는 보지 못할테지만 로버트는 엄지를 치켜들고 말했다.


"피닉스한테는 지금 보조배터리가 있으니까."
"밥, 스스로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줄래?"


피닉스가 작게 투덜거리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매버릭은 어느새 다시 시야를 벗어나 있었다. 레이더가 무용지물인 상황에서 백전노장이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 몰라 그들은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코요테가 물었다.


"피닉스, 지금 우리한테 한 것처럼 매버릭과 내 사이에 포털을 만들 수 있어?"
"할 수야 있지만 포털을 건널 수 있는 건 물리적으로 실체가 있는 것들뿐이야. 네가 아예 매버릭의 기체 안으로 고개를 집어넣어서 말하는 게 아닌 이상..."
"언령은 전달이 안된다는 거네. 이해했어."


둘의 대화를 끊으며 로버트가 꽥 소리쳤다.


"피닉스, 7시방향! 위!"


귀에 대고 직접 지르는 소리에 피닉스가 무의식적으로 목을 움츠렸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주저없이 능력을 사용했다. 매버릭이 탄 기체 바로 앞에 전투기 세 대 쯤은 넉넉히 들어갈만큼 커다란 대형포털이 생겨났다. 수은처럼 빛을 내며 일렁거리는 연보랏빛 포털은 채 방향을 바꾸지 못한 매버릭을 한순간에 집어삼켰다. 포털이 이어지는 곳은 코요테의 앞이었다. 


"코요테, 네 차례야."
"Roger that."


피닉스가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말하자 코요테가 웃음기 배인 목소리로 답했다. 


[이런, 너희 의외로 합이 잘 맞는구나?]


아직 파손되지 않은 피닉스의 헬멧을 통해 매버릭의 즐거운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여전히 위기감이나 긴장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였다. 위치상 코요테의 공격을 피할 수 없음이 분명한데도 그랬다. 피닉스가 불길함에 이를 악물었다. 그 사이 코요테가 미사일 요격버튼을 눌렀다.


[하하하.]
"이런! 조종간이 말을 안들어!"


불발이었다. 콕핏 내부의 모든 기계장치가 빛을 잃었다. 회로타는 냄새가 포털을 타고 로버트와 피닉스의 헬멧 안으로 쏟아져들어왔다. 대체 언제 벌어진 일인지 감도 오지 않았다. 피닉스는 코요테를 대피시킬 요량으로 서둘러 포탈을 열었다. 그러나 그 안으로 뛰어든 것은 코요테가 아닌 매버릭이었다. 


"어디로 보냈어!?"
"여기로 부터 3키로 지점!"
"보인다! 하향 11시방향!"


로버트와 피닉스가 다급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 사이 코요테가 탄 기체는 조종능력을 상실하고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다급한 숨소리와 어금니가 갈리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로버트가 인상을 쓰고 외쳤다.


"코요테! 기체를 포기하고 탈출해!"


코요테가 헐떡이며 답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젠장, 장갑이 조종간에 붙었어!" 


가죽으로 만들어진 파일럿용 장갑 손바닥면이 조종간에 녹아붙은 모양이었다. 손 모양에 딱 맞게 개인제작된 장갑은 조종간을 움켜쥔 자세에서는 벗겨지지도 않았다. 피닉스의 헤드셋으로 매버릭의 의아한 무전이 들려왔다.


[마차도 대위가 왜 아직도 탈출하지 않았지?]
"Sir, 마차도 대위의 장갑이 조종간에 눌어붙었다고 합니다."


절로 이를 악문 목소리가 나왔다. 지상에 가까운 포털을 열어봤자 상공을 시속 1천키로가 넘는 속도로 날던 전투기를 안전히 착륙시킬 방법은 없었다. 센티넬의 질긴 생명력으로 어떻게 살아남는다고 해도 코요테는 죽음에 가까운 부상을 입게될 것이다. 그때 곰곰히 생각에 잠겼던 밥이 별안간 외쳤다.


"피닉스, 탈출레버!"
"뭐?"
"소형 포털을 열어서 코요테의 탈출레버를 대신 당겨!"


도박에 가까운 제안이었다. 상공에 떠있기는 그들도 마찬가지라 조종사인 피닉스가 조종간을 놓는다면 어떤 끔찍한 사고가 벌어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로버트는 주춤거리는 피닉스의 파동을 쓰다듬으며 이번엔 코요테에게 말을 걸었다.


"코요테, 운이 좋다면 좌석이 사출될 때 조종간도 같이 뽑히겠지만 아마 네 팔이 먼저 뽑히거나 부러질거야. 그래도 그게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낫지?"


긴장으로 히스테릭해진 목소리가 건조한 웃음기를 머금고 답했다.


"장난하냐? 당연하지. 어서 살려줘."
"들었지, 피닉스? 살려주자."


피닉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긴장으로 온몸을 굳힌 상태였다. 피닉스가 정지비행을 하며 잇새로 읊조렸다.


"매버릭 오나 잘 보고 있어, 밥."


그리고 조종간을 놓았다. 조종석 뒤에 앉은 로버트의 시야에는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탈출레버를 대신 당기는 데에 성공한 모양이었다. 저 멀리 코요테의 기체에서 좌석이 사출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짧게 귀를 울렸으나 피닉스가 코요테와 연결된 포탈을 전부 닫은 덕에 곧 고요해졌다. 코요테의 낙하산이 펼쳐지는 것까지 확인한 피닉스가 다시 조종간을 잡았다. 다행히 그 사이 이상기류에 휘말리거나 매버릭에게 격추당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피닉스는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이 눈에 들어가지 못하게 눈썹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소형포탈이라고 해도 여러개를 동시에 관리하는 것은 무리였다. 계속 이어지는 밥의 가이딩이 아니었다면 이미 진즉에 폭주하거나 조절능력을 상실했으리라. 피닉스가 헐떡이는 것을 가만히 듣던 로버트가 가이딩을 한 층 더 진하게 풀었다. 척추가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에 피닉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방사만으로 이정도라니, 카피바라의 명성은 평가절하된 감이 있다. 피닉스가 자세를 바로세우며 입을 뗐다.


"이제 우리만 남았네, 밥."
"우리면 충분하지."


로버트가 단호하게 답했다. 그때 피닉스의 헬멧 안으로 매버릭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제군들. 정말 수고많았어. 자네들이 아니었으면 정말 위험할 뻔했네.]


자상한 목소리에는 명백한 안도가 서려있었다. 그러나 곧 분위기가 바뀌었다. 매버릭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꾸중하듯 덧붙였다.


[그런데, 훈련 중엔 뒤를 조심해야지.]


그 말에 밥이 퍼뜩 고개를 뒤로 돌렸다. 피닉스가 밥과 신경이라도 연동된 것처럼 기체 뒤쪽으로 포탈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매버릭은 이미 한번 당한 것은 두 번 당하지 않는다는 듯 아주 부드럽게 기체를 빙글 돌려 포털을 피했다. 포털을 몇 개나 만들어도 마찬가지였다. 매버릭이 탄 슈퍼호넷의 뾰족한 노즈콘이 그들의 옆구리를 향해 곧장 다가왔다. 매버릭이 부드럽게 을렀다.


[미안하지만 자네들은 방금 나한테 죽었어.]


곧 콕핏 내부 경고등에 불이 들어오며 타 전투기의 미사일레인지에 들었다는 알람음이 울렸다. 훈련이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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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제탑에서 전해듣기로 코요테는 양팔이 부러졌지만 다행히 사지가 다 붙은 채 복귀했다고 했다. 그들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기지에 복귀했다. 훈련에서 낙제한 이들에게는 푸시업이 벌칙으로 고정되어있었다. 피닉스와 밥이 G수트를 걷어부치고 엎드리려는 찰나 매버릭이 구보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밥은 얼른 피로한 몸을 곧추세우고 정석적인 차렷자세를 했다. 피닉스가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쿡 찍으며 웃음을 참았다. 매버릭은 방금까지 몇 G나 되는 중력을 받으며 비행했던 사람답지 않은 산뜻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마차도 대위를 구해줘서 고맙네."
"아닙니다, sir."


그렇게 말하면서도 밥은 황송하게 손을 마주잡았다. 맨손으로 느껴지는 매버릭의 손은 그에 비해 작았으나 단단했다. 로버트는 너무 징그럽게 굴지 않으려 애쓰면서 반 걸음 뒤로 물러났다. 피닉스는 코를 찡그리고 웃으며 매버릭의 손을 힘있게 흔들었다.


"동료를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매버릭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오늘은 내가 자제력을 잃고 너무 몰입했어. 앞뒤 생각없이 자네들을 위험에 빠뜨렸지. 그러니 벌칙은 내가 받도록 하겠네."


아, 만인의 롤모델이란 이런 것인가. 지덕체 모든 것을 갖춘 인간이란 이런 것일까. 로버트는 눈이 부셔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피닉스가 매버릭을 만류하려 손을 내저었다. 그 훈훈한 순간에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규칙은 그게 아니지 않나? 서로 죽이지만 않으면 전력을 다해 덤비는 게 원칙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행맨이었다. 피닉스가 미간을 있는대로 찌푸리고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뒤돌아봤다. 밥 역시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원위치시켰다.


"소프트 올드 맨. 기밀미션에 내보내려고 애들을 훈련시키는 건데 이렇게 감상적이셔서야."


행맨은 G수트의 상의부분을 벗어 허리에 묶고 딱 달라붙는 검정티를 입은 상태였다. 아마도 다음 훈련을 준비하는 중이었던 모양이다. 그 공사다망하신 와중에 친히 여기까지 찾아오시다니, 하나도 안 고마워라. 행맨은 입에 물고있는 이쑤시개를 혀로 돌리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피닉스가 눈을 굴렸다. 그러나 싫어 죽겠다는 표정으로도 그의 입에서는 행맨의 발언을 수긍하는 말이 나왔다.


"맞습니다, sir. 규칙은 규칙이니 지키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어쩔 수 없이 밥도 거들었다.


"적기가 상공에 있는데 한눈을 판 것은 저희의 불찰입니다. sir."


매버릭은 감탄한 기색이었다. 반짝거리는 눈동자에 아쉬움과 기특함을 반반 담고 입꼬리를 들어올린 그가 곧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푸시업이 그렇게까지 소원인 줄은 몰랐는데."
"다음부터는 이럴 기회도 없을 테니까요. 저희가 대령님을 반드시 격추시켜 드릴테니 푸시업은 그때 해주시죠."


피닉스의 자신만만한 너스레에 매버릭이 웃음을 터뜨렸다. 애정어린 눈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매버릭이 한쪽 눈썹을 들어올리며 인사했다.


"그럼, 제군들."


기지를 향해 발을 옮기는 매버릭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밥이 피닉스에게 슬쩍 주먹을 내밀었다. 피닉스가 조용히 주먹을 맞대왔다. 둘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럴 거면 단좌기를 타는 게 낫지 않아?"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초를 치는 발언에 금방 사라져버렸지만. 이쑤시개를 아무렇게나 뱉어낸 행맨이 눈을 이글거리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나운 미소에 건치가 드러났다. 그 안에서 나오는 게 독설에 빈정거림 뿐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만큼 산뜻한 얼굴이었다.


"목숨달린 미션을 딴 놈 구하려다가 생으로 날리는 건 대체 어떤 병신같은 정신머리에서 나온 생각일까?"
"행맨."
"그것도 한 명 비상착륙시키겠다고 두 명의 목을 건다? 트레이스 대위는 혹시 산수를 못하나? 혹시 해군사관학교엔 기부입학이라도 한 건지?"


이죽거리던 행맨이 보조개가 쭉 패일만큼 길게 입꼬리를 늘려 웃음지었다. 그리고 눈길을 돌려 그를 말없이 노려보고 있는 로버트를 쳐다보았다. 마주친 시선에서 그 누구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행맨은 진득하게 느껴질 만큼 로버트의 눈을 깊게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귀한 몸 모셔놓고 다른 놈한테 한눈 팔지 말라고."


피닉스는 별 다른 대꾸를 하는 대신 중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행맨은 로버트를 바라보느라 그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결국 뜨거운 시선을 독차지하던 로버트가 입을 열었다.


"여기 남아서 우리한테 시간 낭비하는 대신 네 유일한 친구 코요테한테 가봐야하지 않아?"


제이크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입을 다물었다. 웃음이 사라진 얼굴은 낯선 침묵에 잠겨 있었다. 고요히 로버트를 노려보던 그가 콧잔등을 찌푸리며 피식 웃었다.


"이제야 그 귀한 목소리를 들려주는군."


히죽 웃은 제이크 세러신이 덧붙였다.


"안 그래도 그럴 예정이었어. 다들 즐거운 얼차려 받으라고."


그리고는 전조도 흔적도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피닉스는 찌푸린 얼굴로 로버트를 돌아보았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에 로버트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없이 바닥에 엎드렸다. 아직 푸시업 200개가 남아 있었다.






늦어서 미안하조우 (›´-`‹ ) 앞으로 제깍제깍 오겠음
행맨밥 파월풀먼 #행맨밥센티넬가이드

2023.11.10 09:48
ㅇㅇ
"귀한 몸 모셔놓고 다른 놈한테 한눈 팔지 말라고."

하 행맨 진짜.... Your majesty, 귀한 몸, 귀한 목소리 다 비꼬는거 같아도 피닉스나 루스터말대로 밥한테만 특별대우하는거맞네 혐오스럽다고 자기한테 들러붙는 가이드도 패는 놈이 로버트 목소리 한번 듣자고 굳이굳이 찾아와서 시비거는거 아니냐ㅠㅠㅠㅠㅠㅠㅠ 진짜 너무 재밌어 센세 이런 귀한글은 얼마가 걸려도 기다릴테니 와주기만 하면 돼ㅠㅠㅠㅠ
[Code: 3bc3]
2023.11.10 20:2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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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아아아아아악 켈록켈록 내센세실화냐
[Code: b89e]
2023.11.12 01:08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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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맨 진짜 인성백맨 참뒤틀린 성격일세 질투는 나는데 괜히 심통부리고 어휴~~~매버릭 존경하는 귀요미 밥ㅋㅋㅋㄱㅋㅋ재밌다재밌어!
[Code: f245]
2023.11.18 13:0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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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존나재밌어ㅜㅜ 센세 글 너무 좋아서 꿈에도 나왔아요..
[Code: d3f2]
2024.06.20 17:3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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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닉스 심상 불꽃인데 거기에 장작 넣는거 미친 개좋아 센세 존나 천재아니야???
[Code: eec9]
2024.06.30 21:5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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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바라 밥에 나까지 포곤해진다~~~
[Code: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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