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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6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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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알못ㅈ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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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누구야, 스텔스 파일럿이로군."


와! 여기 땅콩 진짜 제대로다! 로버트는 기본안주로 제공되는 땅콩을 연신 입으로 집어나르며 희희낙락하게 생각했다. 씹자마자 입안에서 바삭하게 부스러지는 땅콩은 고소하고 짭쪼름했다. 햇땅콩인가? 원산지가 어디지? 벤자민 씨에게 여쭤보면 답해주실까? 그렇게 세상에 땅콩과 저 하나만 남은 듯 열중하고 있던 탓에 로버트는 발정기의 수컷비둘기떼처럼 가슴을 부풀리며 서로의 위세를 자랑하던 파일럿들이 어느새 조용해진 것도, 모두가 저를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도 뒤늦게야 눈치챘다.

기밀 미션에 어울리는 걸출하고도 쟁쟁한 인물들이 저를 둘러싸고 있었다. 당연히 제이크 세러신 대위도 거기 있었다. 그것도 맹수같이 사나운 올리브색 눈을 빛내면서. 그리고 하는 말이 저거였다. 스텔스 파일럿.

아는 척을 하리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보자마자 발음이 불분명할 정도로 이를 아득 깨물고 빈정거리리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어, 그러니까... 우리 서로, 좀, 도와준 사이 아니었나? 로버트는 당황스러움에 눈을 깜빡거리며 세러신과 시선을 마주했다. 설마 아직까지 그가 멋대로 가이딩한 일로 원한을 갖고 있는 걸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제이크 세러신은 정말 구제불가능한 수준의 소인배다.

둘 중 누구도 바란 적없지만 어쩌다 그렇게 되어버린 첫만남 이후 벌써 몇 달이나 지난 터였다. 로버트는 그 기간을 아주 바쁘게 보냈다. 진급, 훈련, 미션지원, 짧은 파병, 포상휴가, 훈련지휘 등등. 물론 그중에서 가장 인상깊은건 황송하기 그지없게도 워싱턴에서 열린 그의 진급식이었다. 

별, 별이 온사방에 떠있었다. 어디의 함장이며 사령관이며 군사잡지나 벽에 걸린 사진으로만 뵌 분들께서 직접 그의 소박한 진급식을 축복하러 모이셨다. 로버트는 중간에 졸도하지 않은 스스로가 아주 자랑스러웠다. 짙은 남색의 정복으로 감춰진 다리가 진급식 내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떨떨하게 서있는 그의 소매 수장을 교체해주던 부모님의 손 역시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들아, 네가 두줄따리 휘장을 달았을 때 온나라의 별이 너를 굽어보고 있었단다. 무슨 신화같은 말이었지만 그리 틀린 말도 아니었다. 고작 대위 진급을 펜타곤 국방부청사에서 치르는 이는 역사상에는 어떨지 몰라도 지금 당장은 저 혼자 뿐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로버트는 진급하자마자 귀하신 분 취급을 받으며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얼결에 윗분들의 눈에 들어 진급 패스트트랙에 오른 이답게 공사다망한 나날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지내면서 제이크 세러신 대위에 대한 생각은 저 멀리 과거의 기억으로 분류되어 세피아톤 회상씬처럼 퇴색되었다. 처음에 얼차려라도 받을까 긴장했던 것과 달리 놀랍게도 아무 일도 없던 덕에 망각은 쉬웠다.

아마 그토록 불결하게 여긴 제 미천한 육체비빔쇼가 그를 살리기 위한 응급조치였음을 그 고매하신 센티넬 두뇌를 굴려 알아내신 모양이었다. 서로 한번씩 살려주었으니 더 이상 원망할 것도 정산할 것도 남지 않았겠지. 다시 얼굴을 마주할 일이 생긴다해도 불편하기야 하겠지만 문제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잘난 제이크 세러신이 그렇게 오래도록 앙심을 품을 타입일리는 없으니까. 로버트는 대충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뭐람.
왜 제이크 세러신이 돈이라도 떼먹힌 사람처럼 저를 바라보느냔 말이다.

몇개월만에 다시 마주한 얼굴은 첫만남 그대로였다. 젤을 발라 깔끔하게 넘긴 금발에 매끄럽게 관리된 턱선, 윤이 감도는 피부까지. 모래색의 해군 근무복은 그와는 사뭇 다른 핏으로 실팍한 몸에 바른 듯 들러붙어있었다. 세러신은 입가에 과장된 미소를 띄고 로버트를 노려보았다. 이글거리는 두 눈은 숫제 불이 붙을 지경이었다. 로버트는 잠시 대처를 고민하다가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모른 척 미소지었다.


"정확히는 무장관제사야."


그 태연한 답변에 제이크 세러신은 매끈한 얼굴을 무슨 종이포장지처럼 왁삭 구겼다. 그리고 재미없다고 중얼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로버트는 긴장이 풀려 한숨을 내쉬면서도 인상을 찌푸렸다. 모른척 말을 건 건 본인이면서 대체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는 동안 그의 프론트시터가 될 대위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에게 살갑게 말을 붙였다. 포식자처럼 여유로운 미소를 걸친 짙은 머리의 미인이었다.


"네가 내 백시터인가?"
"어, 그런 것 같은데?"
"처음 보는 얼굴인데, 뭐라고 불러?"


로버트는 우물쭈물 미소를 돌려주려 애쓰며 답했다.


"밥."
"이름 말고 콜사인말이야."
"어... 밥."


대화가 어색하게 끊어졌다. 대위를 둘러싼 다른 이들은 눈썹을 치켜들며 대놓고 의문을 표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전투기에 오를 노련한 파일럿은(세상에, 로버트는 벌써 그가 마음에 쏙 들었다) 그에게 이상한 눈빛을 보내는 대신 영민하게 눈을 굴렸다. 무언가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모양이었다. 곧 그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조근조근 말을 이어나갔다.


"밥, 밥이라... 콜사인은 생소한데. 소집일 전에 하드덱에 먼저 들른 것으로 보면 영락없는 탑건 출신에, 이번 미션에 참여하는 걸 보아 수석이었겠고 약장을 보면 갓 대위면서... 자기 파일럿도 없이 혼자 불려나왔다? 이봐, 밥. 근무지가 르무어인가?"

 
로버트는 그 말에 쑥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No way. 너 걔구나? 카피바라."

 
활짝 핀 미소와 함께 성큼성큼 다가온 그의 프론트시터가 주먹을 내밀어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인사를 건넸다.

 
"나타샤 트레이스. 콜사인은 피닉스야. 카피바라가 내 백시터라니 이거 영광인데?"
"로버트 플로이드. 나야말로 블랙 에이시스의 이그젬플 뒤에 탈 수 있어 영광이야."
"하하, 내 별명까지 알아? 오늘은 복권이라도 사야겠네."


굳은 악수를 나눈 뒤 피닉스가 그에게 들고있던 당구 큐대를 건넸다. 한 게임 할래? 그 소탈하고 친근한 태도에 로버트는 당구라곤 해본 적도 없으면서 고개를 주억거리고 일어났다. 그의 뒤로 소리없이 다가온 손에 곧장 큐대를 뺏겼지만 말이다.

손이 스쳤다. 뭔가 차가운 것을 만지다가 왔는지 끝이 차게 젖은 손가락이 그의 손등을 스치고 지나가 큐대를 움켜쥐었다. 세러신 대위가 그의 뒤에 바투 붙어있었다. 로버트가 놀라 몸을 곧추세우자 그의 날개뼈가 대위의 두툼한 대흉근에 슬쩍 닿았다 떨어졌다. 로버트는 접촉에 예민한 이 성격파탄자 대위의 심기를 거슬렀을까 놀라 몸을 움츠렸지만 대위는 아무 말 없이 당구대로 걸어가 몸을 굽히고 게임을 재개할 뿐이었다. 그 완전한 무시에 로버트가 어색하게 뒤로 물러났다.
 
닿았던 손이 거짓말이었나 싶다. 만약 정말 손이 닿았던 거라면 저 예민한 센티넬이 가만있지 않았을 테니까. 아니, 가이딩 중이 아니면 접촉해도 상관이 없는 건가? 로버트는 물기가 옮아붙은 손등을 허벅지에 문질러닦으며 제이크 세러신을 바라보았다. 센티넬의 본성을 거스르고 저를 건든 가이드들을 공격해온 비정상센티넬이자 가이드를 공공연히 '피주머니'라고 불러대며 혐오하는 돌연변이. 나지막했던 르무어 사령관의 물음이 문득 떠올랐다.

'어떻게 그의 눈에 들고도 살아남았지?'

그 질문은 로버트의 머릿속에서 또 다른 의문으로 이어졌다.
제이크 세러신의 눈에 자신은 어떻게 보이는가. 그는 자신을 통해 무엇을 보았는가. 

과연 괴물은 괴물을 알아보는가.


 

-

 

 
"저, 개... 미,친놈."

 
턱 아래로 뚝뚝 방울져 흐르는 땀방울을 방치한 채 피닉스가 한 글자 한 글자 짓씹어 뱉었다. 푸시업은 벌써 180개째를 돌파하고 있었다. 구령에 맞추어 묵묵히 푸시업을 하고있던 로버트는 동조의 의미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서슬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맺혀있던 땀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백 개를 갓 돌파할 때까지만 해도 완벽한 삼각자의 형태였던 그의 자세는 이미 흐트러진 지 오래였다. 

그러는 동안 벌써 혼자 푸시업 200개를 마친 금일 훈련 실패의 주역 제이크 세러신은 거칠게 땀방울을 털어내며 일어나 샤워실로 향했다. 공연히 성질을 부리느라 걷어찬 헬멧이 빠각 소리를 내며 저 멀리 날아가는 것이 시야 가장자리로 들어왔다. 로버트가 절로 억울한 목소리를 냈다.


"쟤는 왜 짜증까지 내는 거야?"


피닉스는 끄응 힘을 주어 천근만근처럼 느껴지는 몸통을 들어올리며 답했다.


"낸들 알겠냐, 저 미친놈 머릿속을."


훈련 난이도는 극악이었다. 애초에 정규군만 34만명 규모인 미 해군에서 가장 우수한 자원들만 딱 열 두명 추려낸 것부터가 해당 미션의 위중함을 방증하긴 했다. 그러나 그 정예 장교 내에서도 훈련과 심사를 통해 절반을 걸러내야할 정도라고는 참여한 이 중 누구도 상상치 못했다. 미션 내용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있었다. 그들은 훈련기간동안 조종사로서뿐 아니라 군인으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한계를 시험받아야 했다. 오늘의 훈련은 애석하게도 팀워크를 시험하는 것이었고 로버트는 그 많은 사람들 중 하필이면 세러신 대위와 같은 팀으로 엮였다. 결과는 보다시피 실패였다. 


"...200!"


로버트는 후들후들 떨리는 팔로 혼도 준위의 구령에 맞춰 마지막 푸시업을 맞췄다. 그리고 곧장 뜨끈한 아스팔트 위에 드러누웠다. 피닉스가 끄으으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합류했다. 하늘은 푸르르고 볕에 달궈진 아스팔트는 땀에 젖은 등을 덥혔다. 로버트는 한없이 무겁게 느껴지는 팔을 들어올려 옆에 누운 피닉스의 얼굴 위로 그늘을 만들어주며 헥헥거렸다. 혹사당한 팔이 제멋대로 떨리는 통에 그늘은 이리저리 휘청휘청 움직여댔다. 피닉스가 피식 웃고는 로버트의 손을 잡아 내렸다.


"개미랑 같은 팀을 하기에는 너무 스윗한데."
"세상의 균형을 맞추는 거지."

 
그 말에 수건을 꺼내 내밀던 혼도 준위가 웃음을 터뜨렸다. 로버트는 수건을 받아 얼굴을 문지르며 멋쩍게 미소지었다. 고양이처럼 유연하게 기지개를 키던 피닉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우, 오늘 하체하는 날이었는데."
"내일로 미뤄둬. 내 조종사가 팔다리 모두 못쓰는 꼴은 보고싶지 않으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피닉스가 손을 내밀어 로버트를 일으켰다. 당기는 쪽이나 일어나는 쪽이나 모두 꼴사납게 팔을 발발 떨고 있었다.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이게 무슨 꼴이냐, 진짜"


피닉스가 새끼손가락으로 눈물닦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로버트는 어깨를 으쓱하고 답했다.


"비 맞은 생쥐꼴?"


피닉스는 그 말에 땀으로 푹 젖어 색이 변한 제 티셔츠를 내려다보고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래. 으, 완전히 젖었네. 얼른 씻으러가자."

 
관사를 향해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는 피닉스를 배웅한 로버트는 공용 샤워실로 발을 옮겼다. 통상적인 훈련시간과 어긋나게 짜인 스케줄 덕분에 탈의실은 텅 비어있었다. 환기를 위해 열어둔 배연창을 통해 후덥지근한 공기가 들어왔다. 로버트는 삐걱거리는 철제 캐비넷에 갈아입을 옷을 집어넣은 뒤 곧장 G수트를 벗었다. 손목과 발목에 맞게 조여있던 벨크로를 풀자 안에 고여있던 땀이 아래로 쏟아졌다. 우, 역겨워. 로버트는 인상을 찌푸리며 부대 패치를 떼어내고 수트를 공용헴퍼에 쑤셔넣었다. 

샤워장 역시 텅 비어 있었다. 행맨은 곧장 관사로 간 것인지 타일에 물기 하나 없는 말끔한 상태였다. 로버트는 샤워기 아래 서서 차가운 물을 끼얹으며 몸을 떨었다. 뜨거운 물로 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부상을 막기 위해 훈련으로 달아오른 근육과 관절을 식혀야 했다. 물론 센티넬이라면 근육이 뜨겁든 차든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의 육체는 일반인과 다를 바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작전 중에 버금갈 속도로 컴뱃샤워를 마친 로버트는 커다란 타월을 하체에 두르고 샤워실을 나섰다. 그 사이 씻으러 온 건지 좀 전까지만 해도 텅 비어있던 락커룸에 누군가 앉아있는 게 보였다. 안경을 벗어 흐리게 번져보이는 시야에 그 누군가는 꼭 살색 덩어리같이 보였다.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생각하며 로버트는 침착하게 허리에 두른 수건을 좀 더 힘주어 묶었다. 그 사이 흐릿한 인영이 말을 걸었다.


"늦네."


로버트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익숙한 목소리다. 칼칼하고 조음이 분명한 목소리. 누구였지, 고민하며 눈을 끔뻑거리는데 살색 덩어리가 앉아있던 락커룸 중앙 벤치에서 몸을 일으키며 한 번 더 말을 걸었다.
 

"너무 늦다고, 군기 다 빠진 거 아니야?"
 

빈정거리는 톤에 그제야 눈치했다. 제이크 세러신이다. 로버트가 눈썹을 들어올리며 되물었다.

 
"행맨?"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로버트는 젖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훔쳐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날 기다렸어?"
"오 그럼, 물론이지."
 

세러신이 천천히 그를 향해 걸어오며 답했다.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들수록 물에 번진 듯 흐렸던 인영이 선명해졌다. 제이크 세러신은 로버트와 마찬가지로 허리 아래 샤워타월을 두르고 있었다. 살갗이 여즉 젖어 있는데다 어깻날에서는 뜨끈한 훈김이 피어오르는 모양새가 온천욕이라도 즐기고 온 모양새였다. 그의 가슴팍에는 역광에도 차갑게 빛나는 군번줄이 두 개 걸려있었다.


"숨바꼭질은 이제 끝이네?"

 
행맨이 제 목에서 군번줄 하나를 빼내며 빈정거렸다. 그리고 보란 듯 군번줄을 로버트의 눈높이로 들어올렸다. 그의 시력으로 군번줄에 적힌 글씨가 보일 리 만무했으나 로버트는 알았다. 그건 그의 군번줄이었다. 로버트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숨바꼭질?"


행맨은 대답 대신 군번줄을 손아귀 안으로 다시 말아쥐며 사납게 웃었다. 그리고 로버트에게 조금 더 다가왔다. 이제 로버트의 시야에는 제이크 세러신의 굵직한 복근과 배연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어렴풋한 후광처럼 빛나는 체모, 두툼한 가슴팍에 송글송글 맺힌 물기가 들어왔다. 로버트는 그의 몸에 시선을 두지 않으려 애쓰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래, 숨바꼭질."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제이크 세러신이 흥얼거리며 다가왔다. 어느새 둘은 손을 뻗으면 닿을만한 거리였다. 행맨은 로버트의 헐벗은 어깨 언저리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들어올려 눈을 맞췄다. 그리고 바투 붙어 들고있던 군번줄을 로버트의 목에 걸었다. 금속판끼리 부딪치며 잘각거리는 소음을 냈다. 이미 하고 있는데. 로버트는 우물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숨바꼭질이라니 무슨..."

 
긴장으로 숨까지 살짝 멈추고 있던 로버트가 잠긴 목으로 간신히 물었다. 행맨이 피식 웃었다.

 
"모르는 척까지. 대단하네."

 
행맨은 처마 밑에 달린 풍경을 건드리는 것처럼 두 개의 군번줄을 손끝으로 훑었다. 


"그동안 피해다니느라 고생했겠어. 이렇게 다시 만나게되어 아주 실망했겠는데?"

 
그렇게 말한 행맨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 로버트의 뺨을 꼬집었다. 단단히 굳은살이 배긴 엄지와 검지가 젖살이 동그랗게 붙은 볼을 쭉 잡아 늘렸다. 그 친밀한 접촉에 놀라 잠시 굳어있던 로버트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손을 쳐냈다.


"뭐하는 짓이야."
"상부는 어떻게 구슬렀지?"
 

움트던 짜증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사그라들었다. 로버트는 인상을 찌푸린 채 뺨을 문지르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제이크 세러신은 그 말에 하나도 우습지 않은 얼굴로 하하. 작위적인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군번줄의 얇은 판을 검지로 콕콕 찍었다.

 
"시치미를 떼겠다?"
"아니 진짜 무슨 소리냐고."
"이 씨발새끼가 진짜 누구를 개병신으로 보네."

 
행맨이 이를 악무는 것과 동시에 인식표를 찌르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금속판에 새겨진 음각을 피부 위로 옮기기라도 할 것처럼 거센 압력에 로버트가 이맛살을 구기고 군번줄을 잡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힘을 주어 끊어냈다. 그 탓에 쓸린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올랐으나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로버트는 차가운 눈으로 세러신을 마주보며 이죽거렸다.


"뭣같으면 한 대 치든가."

 
그 말에 제이크 세러신이 우뚝 동작을 멈추었다. 로버트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느리게 열중쉬어 자세를 취했다. 그의 하악에 울툭하게 근육이 불거졌다.

 
"그래, 뭐. 머리 박을까요 대위님? 참고로 긴급가이딩은 군법위반이 아니지 말입니다."

 
행맨의 얼굴에 다시 작위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한쪽 입꼬리만 가까스로 올린 채 노려보는 것도 미소라고 분류할 수 있다면 말이다. 로버트가 한숨을 내쉬고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이제는 직위도 같으니 지난 작전시의 일로 하극상이나 명령불복종을 거실 수도 없죠. 분풀이를 원하신다면 몇 대 맞아드리기야 하겠습니다만 중요한 작전을 앞두고 사사로운 감정으로 전력을 훼손하신다면 저도 가만있진 않겠다는 점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옹졸하게 쌓아뒀다가 남 괴롭히지 마시고요."

 
그 불퉁한 으름장에 제이크 세러신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이가 없다는 듯 터져나온 하,에서 시작된 웃음은 락커룸을 채웠다. 로버트는 긴장을 풀지 않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전미에서 손꼽히는 전력이자 별명마저 개미인 이에게 기싸움을 건 대가가 과연 어떨지 모르겠지만 호락호락하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적어도 군대에서 장교로 살아남는 법은 그랬다. 그러나 제이크 세러신은 주먹을 들고 응하는 대신 즐거움 가득한 낯을 들고 물었다. 그러는 중에도 로버트의 얼굴을 샅샅이 훑는 눈은 흉흉하게 날이 서 있었다.


"그거였어? 상부까지 동원해서 흔적을 지워가며 날 피한 이유? 처 맞을까봐?"


로버트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상부를 동원했다는 말을 계속하시는데 그게 무슨 말씀인지 알 수가 없지 말입니다. 저는 대위님을 피한 적 없습니다. 찾지 않으신 건 대위님이지 말입니다."

 
그 말에 제이크 세러신의 얼굴에서 웃음이 싹 걷혔다.

 
"내가 안 찾았다고? 너를?"
"예 그렇습니다."
"내가 너를...?


그 굳어버린 얼굴에 로버트가 눈썹을 구기다가 물었다.

 
"혹시 제가 직접 대위님 부대로 찾아가야하는 거였습니까?"


제이크 세러신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생각에 빠진 듯 제 턱을 두드리며 저 멀리 어딘가에 시선을 두던 그가 별안간 이를 갈았다.

 
"이 새끼들이... 저울질을 했다 이거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행맨은 진심으로 분노한 기색이었다. 로버트는 한숨을 내쉬고 한 손을 들어 제 뺨을 톡톡 건들였다. 


"그건 뭔 소린지 모르겠고, 말했다시피 한 대는 맞아드릴테니 얼른 하고 가시지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 뒷짐을 지고 눈을 감았다. 당연히 이도 악물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주먹이 날라오지 않았다. 슬쩍 눈을 떠보니 일그러진 표정의 제이크 세러신이 그를 무슨 희귀 생명체 바라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너 미친놈이냐? 센티넬한테 때리라고 얼굴을 내미네?"


로버트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자 과장된 몸짓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까지 했다.


"저러니까 그랬구만. 말 잘듣고 똘똘하고 두루두루 매칭율까지 높은데 지들처럼 또라이라서. 고작 A급 센티넬 하나한테 갖다붙이긴 아깝다 이거군?"
"......"
"...씨발, 저울질에서 지긴 처음이네."


짜증이 난 듯 머리를 벅벅 긁던 행맨이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로버트는 다가올 타격에 대비하기 위해 반사적으로 목을 움츠렸다. 그러나 제이크 세러신은 주먹을 날리는 대신 그의 허리를 감싸고 제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수건 한 장으로 가린 헐벗은 반나신이 마찬가지로 헐벗은 상체에 폭삭 안겼다. 생리적인 거부감으로 로버트가 기겁을 하며 버둥질을 쳤다.


"으악, 왜 이러십, 왜 이래!"
"안 때릴테니까 긴장 풀어."


로버트가 발버둥치지 못하게 그의 상체를 꽉 끌어안으며 행맨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주 가까이에서 들리는 그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소름이 끼쳐 로버트가 고개를 저어댔다. 
 
 
"한번 확인해보고싶은게 있어서 그런 거니까 가이딩풀어봐. 그럼 원한은 잊어주지."
"이거 놔!"


맨가슴이 비벼지는 느낌이 너무도 징그러워 로버트는 몸서리를 쳤다. 제이크 세러신은 조용히 협박했다.


"너 가이딩 안풀면 지금 상태 그대로 아래에 묶은 수건 풀어버린다?"


아, 신이시여. 그것만은...
눈을 질끈 감은 로버트가 가이딩을 시작했다. 그리고,

 
"...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푸르게 물든 옥수수밭이 바로 눈 앞에 있었다. 작물이 어찌나 실하게 여물었는지 그의 키를 상회할 정도로 웃자란 탓에 시야에는 온통 푸른 옥수수대 뿐이었다. 한때 부옇게 먼지가 일어나던 황폐한 대지는 고슬고슬한 검은 흙으로 덮여 있었다. 심상이 바뀔 수가 있어? 당황한 로버트가 눈을 떴다. 흐린 시야로 캐비넷이 보였다. 어깻죽지에 뜨겁고 습한 숨결이 느껴졌다. 제이크 세러신은 이제 로버트의 어깻날에 고개까지 파묻고 있었다. 등허리를 덮은 손이 어찌나 뜨겁고 우악스러운지 가만히 내버려두면 손가락이 살갗 안으로 파고들 것 같았다.


"집중해, 대위."


제이크 세러신이 귀신같이 속삭였다.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 탓에 뒷덜미의 솜털이 모두 곤두섰다. 로버트는 소름끼치는 감각에 주먹을 쥐었다폈다 하면서 이를 악물고 다시 가이딩에 집중했다. 눈 앞에 또 한번 푸른 옥수수밭이 펼쳐졌다. 로버트는 고개를 숙이고 옥수수대 아래에 쪼그려 앉았다. 그가 손을 뻗자 흙이 닿기도 전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스프링쿨러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마에 와닿는 차가운 빗방울이 얼마나 생생한지 로버트는 거의 펄쩍 뛰어올랐다. 굵직한 빗방울이 아프도록 쏟아져내렸다. 입을 맞춘 것도 아닌데 끼워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파장이 맞물렸다. 빨려들어가는 느낌조차 없어 얼마나 가이딩이 되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통제감을 잃고 공포에 질린 로버트가 가이딩을 멈췄다.

다시 눈을 뜨니 제이크 세러신은 어느새 정면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어떤 표정도 없는 얼굴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무감해보였다. 시선이 직사광선처럼 꽂혔다.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확인, 끝났으면... 놔."


어색해진 로버트가 주춤주춤 말을 꺼내자 제이크 세러신이 고개를 약간 옆으로 기울였다. 가까운 거리 탓에 둘은 꼭 키스 직전의 연인처럼 보였다. 뜨거운 숨이 섞였다. 로버트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입술을 말아물었다. 코끝이 서로 맞닿기 직전에야 제이크 세러신은 멈추어섰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몸을 떼어내더니 얼굴을 완전히 일그러뜨렸다.


"이거 봐. 징그럽지 않잖아 너는."
"......"
"씨발."


그리고 로버트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아무 전조도 없이 능력을 써 사라졌다. 로버트는 빈 락커룸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허."


멋대로 끌어안기고 욕까지 들어먹은 작금의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짓던 그에게 열린 캐비넷 안의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거울 안에 보이는 것은 목덜미에 벌겋게 쓸린 생채기를 달고 어정쩡한 자세로 서있는 남자 하나. 그리고 그의 하체에 둘둘 감긴 수건 위로는 미약하나 분명한 윤곽이 드러나 있었다.

곧 텅 빈 공용샤워실 안에서 누군가의 절규가 공허하게 울려퍼졌다.
당연한 일이지만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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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기발기
행맨밥 파월풀먼 #행맨밥센티넬가이드  
2023.10.30 20:40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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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크 아직 지 맘 정의 못내려서 여전히 밥한테 쌍욕 때려박는 혐성상태인거ㅋㅋㅋㅋ 밥 필요해서 찾아다니긴 했는데 매번 수포로 돌아간 빡침이 더 큰거 존웃ㅋㅋㅋㅋㅋ 그리고 밥은 행맨과의 접촉에 거부감이 들었는데요? 밑에 사정은 또 다른가 봅니다?? 상태인거ㅋㅋㅋㅋㅋㅋ 아 관계성 진짜 존잼ㅠㅠ센세 천재인가 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쫠깃한 관계와 대사를 만들어내냐고요ㅠㅠㅠ
[Code: 8044]
2023.11.03 17:1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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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진짜너무재밋는데요 센세 진자로
[Code: 191f]
2023.11.04 01:1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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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는 어떻게 이런 글을 쓰는거야 너무 재밌고 천재적이야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c48d]
2023.11.04 01:1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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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자의로 만나고 싶어도 만날수 없게 이미 높은 곳에서 손을 쓴 상태였다니이이이이ㅠㅠㅠㅠㅠㅠㅠㅠ 타겟이 누구였을까????? 누구를 더 숨기고 싶어서 그런걸까??? 아아아아아아악 궁금해 나 여기서 기다릴거야 센세ㅠㅠㅠㅠㅠ
[Code: c48d]
2023.11.05 07:49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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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재밌다ㅠㅠㅠㅠㅠㅠ센세 필력이 어마어마하시다ㅠㅠㅠ
[Code: eb38]
2024.06.20 00:32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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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기발기ㅋㅋㅋㅋㅋㅋㅋ비옥한 옥수수밭 풍경 묘사 너무 좋다 증말...
[Code: d97a]
2024.06.30 21:3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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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텐오진다~~~~~
[Code: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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