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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9 14:32
 
공포 ㅈㅇ
스압 ㅈㅇ
 

키사라기 역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존재하지 않는 역에서의 행동 안내
분실하신 눈알 2개를 무료로 돌려드립니다.
외부에서 찾아오신 방문객을 위한 지침서

 




 


오전 7시, 요란하게 울려퍼지는 안내 방송이 달게 잠을 자던 두 남자를 깨웠다. 
방송의 정체는 관리소장이 아침의 시작을 알리는 모닝콜 겸 오늘 하루 동안의 공지 사항을 줄줄줄 읊어대는 소리다.
아다치는 이제 적응되었기에 비몽사몽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정신을 차렸으나 쿠로사와는 마이크가 켜지는 굉음부터 “히끅.”하는 소리와 함께 화들짝 잠에서 깨어났다.
계속되는 딸꾹질, 아침부터 심장이 떨어질 뻔했던 쿠로사와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앞으로의 식사 담당은 쿠로사와가 맡기로 했다. 아다치는 아는 레시피의 종류도 많지 않고, 아무리 노력해도 사실상 그럭저럭인 수준에서만 그치는 실력이었기에 이러한 고충을 알게 된 쿠로사와는 자처해서 요리를 맡겨 주길 부탁했다.
그때, 쿠로사와는 아다치에게 물었다.
 

“아다치, 특별히 먹고 싶은 메뉴 있어?“

 
쿠로사와의 물음에 잠시 멍한 얼굴이 되는 아다치. 이곳애서 지내는 동안 맛있는 음식이라곤 구경조차 못해 봤다. 오죽하면 스스로 만든 것이 그나마 먹을 만하고 안전할 지경이었으니 미각을 따져가면서 먹는 건 사치였다.
먹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던 날뿐이었던 지금까지의 나날, 먹고 싶은 것이 있냐며 물어오는 쿠로사와를 멍하니 응시하기만 하던 아다치는 대답을 고르다가 떠오르는 대로 일단 내뱉듯이 말했다.
오랜만에 먹는다기엔 너무나도 소박한 계란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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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말이는 달게, 짜게?”

“… 단 게 좋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다치는 보지 못했다. 쿠로사와의 손은 이미 설탕에 가 있었다는 것을. 5년 전에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아침 식사의 준비는 오래 걸리진 않았다. 흰쌀밥에 된장국과 계란말이, 소시지 몇 개와 간단한 야채절임 정도면 충분했으니까. 소박하지만 아주 정갈한 모양새의 차림이었다.
그마저도 아다치에게는 그립고도, 꽤나 훌륭한 밥상이었다. 하고자 하면 가능은 하겠지만 비주얼도, 맛도 그냥저냥 못 먹을 정돈 아닐 수준이니 크게 감흥은 없었을 것이다.
쿠로사와의 계란말이를 크게 한 입 베어 문 아다치의 반응은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놀라는 것부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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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어! 여관에서 먹는 것 같아. 이렇게 맛있는 밥은 정말 오랜만이야. 진짜 최고!“

”너무 과찬이네~“

 
쿠로사와는 내심 대만족이었다.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자신의 요리를 먹고 맛있다며 양 뺨이 볼록해지도록 밥을 밀어넣는 아다치의 모습은 정말 사랑스러웠다.
행여나 급하게 먹다 체할까, 아다치의 밥그릇에 찻물을 부어 주며 앞으로의 식사 시간마다 매번 기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소박하지만 정갈한 식사와 함께 짧은 여유와 평화를 즐긴 둘은 오늘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그러면서도 참으로 신기한 일. 전날의 재회부터 케이크도, 동침도, 아침 식사도, 지금의 이 순간도 아다치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따스하고 평온하게 느껴졌다.

이런 기분은 얼마만인지, 아다치는 추억의 향수와 함께 연달아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눈을 위해 수명까지 10년을 날린 쿠로사와에게 무한한 감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혹시라도 그가 조금이라도 상처받거나 잘못되는 일을 예방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빠르게 쿠로사와를 이 세상에 적응시켜야만 했다.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알려 주며 적어도 이 안에서는 다치는 일이 없도록.

 

큰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어떤 것부터 얘기해 주어야 할까 고민하는 아다치는 쿠로사와에게 있어서는 웃음을 참기 힘들 정도로 귀여웠다.

그러고 보니 아다치의 눈동자, 주인과 떨어져 있을 때는 그 어떤 생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무언가에 불과했는데 제 자리에 있으니 밤하늘의 별이라도 콕콕 심은 것처럼 아주 예쁘게 빛나고 있구나. 이런 생각들을 하며 감상하는 동안 아다치는 생각을 정리했는지 짐짓 무게를 잡으며 입을 열었다.

 

 

“… 먼저, 이곳의 주민이라는 것들 말인데…. 정확한 정체는 아직 모르겠지만 여기는 확실히 현실은 아닌 것 같아.”

 

“현실이 아니라는 건…. 뭔가 다른 세계라는 의미?”

 

“쿠로사와도 지금까지 경찰들이나 관리소장이라거나 몇 명의 주민들을 봤잖아. 그들은 인간을 닮았지만 어딘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느낌이 커.“

 

”응, 확실히 비현실적이었지. 무섭다는 기분도 들었고.“

 

”주민들은 다 그런 외모를 가지고 있어.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과 구분하기는 쉬울 거야. 본능적으로 저건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테니까.“

 

 

아다치는 이전에도 만화나 애니메이션, 게임을 즐기는 편이었다.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쿠로사와가 느꼈던 것만큼 기괴하다는 느낌을 덜 받았던 모양이지만 이전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놓은 이면의 세계라는 건 빠르게 납득할 수 있었다.

그 덕에 이세계라는 견적을 잡고 나자 비현실적인 모든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무슨 게임의 룰을 설명하는 것처럼 조잘거리는 아다치의 모습은 쿠로사와에게 퍽 재미있게 느껴졌다. 예전에는 이렇게나 말이 많은 줄도 몰랐으니까.

 

아다치가 당부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대다수의 주민들은 먼저 자극하지만 않으면 인간에게 관심이 없다. 큰 소리나 패닉에 빠져 소란을 일으키는 등 주의를 끌지 않도록 할 것.

단, 주민들 중 먼저 접근하는 개체는 정말 위험함. 

인사를 건네거나, 길을 묻거나, 도움을 요청하거나, 시비를 거는 등 다양한 수법으로 반응을 유도하니 무슨 일이 있어도 철저히 무시할 것.

 

그렇지 않으면 일방적인 살육전으로의 돌입.

 

 

2.

공격을 당해 신체가 훼손될 경우, 목숨만 붙어 있으면 어떻게든 생존은 가능.

훼손된 신체는 되도록 온전한 모양을 유지하는 것이 좋으며 유실되지 않는 것이 중요…. 분실되면 아다치의 안구처럼 대개 편의점이나 마트의 식자재로 판매 중인 경우가 많으니 그것을 찾아내 구입해서 병원에 가야 함.

진열 시기는 랜덤인 듯하다. 운이 나쁘면 하염없이 기다리며 찾아 헤매도 소용없을 때가 있음.

 

그러나… 정말 더럽게 재수가 없을 시에는 다른 주민이 이미 구입해서 먹어 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이 경우에는 복구 불가, 영구적 장애 확정.

 

 

3.

사람의 신체는 기타 요인이 없다는 전제하에 손가락과 발가락이 각각 열 개(한 손에 다섯 개씩),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귀 두 개가 정상.

쿠로사와의 경우도 이러하니 갑작스레 이 사실에 의문이 든다면 바로 병원에 가서 약 처방을 받을 것.

 

무시하고 일상 생활을 지속하게 되면 의문이 드는 신체 부위를 스스로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지니 중요.

 

 

4.

금전 이외의 것으로 거래를 할 때는 자신의 목숨이나 필수 생활에 지장이 가지 않는 선에서 할 것.

종종 터무니없이 신체 나이 50년을 달라거나 수명을 100년을 달라거나, 심장, 폐, 뇌 등의 중요 장기를 요구하는 이들이 있음. 

이 경우, 어떻게든 거래를 회피하거나 조정할 것. 화를 내는 상인이 있겠지만 그럴 때는 거래 대상의 하자를 꼬투리 잡아 집요하게 후려쳐야 함.

의외로 상인들은 가스라이팅에 매우 취약하다.

 

참고: 신체 나이는 주는 만큼 어려진다. 수명과 헷갈려서는 안 되고, 반대로 받게 되면 그만큼 늙으니 주의.

 

 

5.

호텔에 있는 동안 관리소장이 아닌 다른 존재의 부름에 절대로 반응하지 말 것.

관리소장은 아침 7시부터 저녁 6시 사이에만 용건을 해결한다. 더불어, 그는 방문 전 반드시 인터폰을 통해 예고 통지를 하니 갑자기 방문한다면 절대 문을 열어서는 안 된다.

그는 관리소장이 아닐 것이며, 이 호텔에서 이웃과 소통하는 일은 절대로 없음.

 

그러므로 다른 세대로부터 소음이나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는 문제가 발생할 경우, 직접 찾아가지 말고 꼭 인터폰으로 관리소장에게 해당 사항을 전달해야 한다.

그가 알아서 해결해 줄 것.

 

특히 심야 시간에는 절대로 호실 밖에 나가지 말 것.

 

 

이외에도 당부한 것들은 많았다. 한 번에 외우기는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적어도 쿠로사와는 알 수 있었다. 아다치가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될 때까지 얼마나 치열한 나날을 보냈을지.

물론 아다치도 어느 정도의 운이 따라 주고 있었기에 살아남는 것이 가능했던 거겠지만 위험을 파악하고 대처 방법을 만들어 두는 것은 어지간한 강단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안타까워해야 할까. 아다치가 하나하나 전해 주는 모든 것들은 행여나 쿠로사와가 잘못되지 않았으면 한다는 바람이 너무나도 간절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런 아다치의 태도에 쿠로사와는 내심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처지에 놓여지게 되었는지 또다시 실감할 수 있었다.

 

 

 

 

쿠로사와는 뜻하지 않게 이직을 하게 되어 버린 아다치의 직장에 따라가기로 했다. 

아다치는 반대하려고 했으나 이것 또한 경험의 일환이 될 테니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입장 철회. 그렇게 간단하게 오전 산책을 하며 약간의 실전을 체험한 후 함께 출근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할 만한 것 같다면 이전처럼 같이 일하는 방법도 있으니까.

놀이공원 외에도 외지인이 일할 수 있는 곳은 여러 군데가 더 있었다. 도서관, 미술관, 아쿠아리움, 극장까지.

다만 다른 곳은 어떤 수준의 위험이 도사리는지까지는 아다치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섣불리 추천해 주기에는 어려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놀이공원은 많이 빡세다.

오늘의 체험 중, 쿠로사와가 무사할 수 있을지도 사실 장담이 어려울 수 있었으니까.

 

한편, 산책을 하던 도중에는 이전엔 마주치기 힘들었던 일련의 주민들이 한둘 정도 눈에 띄곤 했다.

아다치가 말한 대로였다. 저것들은 인간이 아니구나. 태연하게 그들이 아예 없다는 것마냥 평온하게 걷고 있는 아다치를 바라보며 긴장감을 느끼던 쿠로사와.

아다치는 그런 쿠로사와를 힐끗 바라보고는 마치 안심시키려는 듯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시선을 처리하는 게 곤란하다면… 차라리 날 계속 보는 것도 괜찮아.”

 

“… 그렇게 해도 돼?”

 

“응. 둘이 있다는 건 이런 점도 좋은 것 같네.”

 

 

쿠로사와는 미소와 함께 기꺼이 아다치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렇게 쿠로사와는 아다치와 함께했던 그 어느 순간보다도 오래, 길게 아다치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아다치 역시도 그의 따뜻한 시선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조금은 부끄러워지지만 그렇기에 제 옆에 쿠로사와가 함께 걷고 있다는 걸 매순간 인지할 수 있었고, 이전과는 달리 조금 더 편안해진 기분을 느꼈다.

 

산책을 하는 동안 겸사겸사 마트에도 방문했다. 앞으로는 두 사람이 함께 생활하는 만큼 식재료를 더욱 늘릴 필요가 있었으니. 식자재 코너를 둘러보다 육류 코너에서 간혹 누군지 모를 이의 잔해나 완전히 썩어 문드러진 것들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지만.

쿠로사와는 아직 이런 광경이 익숙지 않았다. 애초에 사람의 장기를 실제로 보고 사는 이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의료인이라면 몰라도 회사원을 포함한 많은 사회인들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 사항이다. 

아다치 또한 그랬을 것이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인간이 식용 가능한 식재료를 골라내 바구니에 담는 중이지만 그 역시도 이렇게 되기까지 수많은 역겨움을 견뎌냈겠지.

또한, 두 눈이 없어졌을 때엔 보이지 않아서 얻을 수 있던 것 대신 많은 걸 감수하며 지냈을 것이다.

 

제 눈앞에서 움직이는 아다치의 동그란 머리통을 바라보며 쿠로사와는 형언할 수 없이 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아다치가 사라지기 바로 전날, 야근을 하는 그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 도움을 주었다면 아마도 미래는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와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용기를 내서 다가가 함깨 남아 있었다면. 혹시나 하는 그런 기회가 제 손에 있었음에도 그것을 외면했던 게 아닐까. 스스로에 대한 아주 깊고 복잡한 실망감으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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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테마파크에 오신 것을 환영… 하지 않습니다.”

 

“하하….”

 

 

놀이공원에 입장한 뒤 아다치의 첫 대사였다.

겉으로는 휘황찬란하니 여느 놀이공원과 다를 바 없는 모양새였다. 그렇기에 쿠로사와는 내심 이곳에는 별다른 위험 요소가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감을 조금 품었으나 얼마 가지 않아 보기 좋게 박살났다.

 

처음에는 나쁘지 않았다. 명색이 놀이공원인 만큼 귀여운 기념품 가게도 있고, 아기자기한 시설들이 많았으니까.

둘은 기념품 가게에서 각자 동물귀 머리띠도 사서 썼다. 아니, 샀다기엔 그냥 그 자리에서 착용하고 아무렇지 않게 가게를 나왔다. 그때까지 기념품샵의 직원은 그저 멍하니 허공만 응시할 뿐, 둘에게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렇게 아다치는 토끼, 쿠로사와는 여우의 귀가 달린 머리띠를 쓰고 서로를 바라보며 잘 어울린다는 칭찬과 함께 한바탕 웃기도 했다. 

 

문제는 업무의 시작부터. 놀이공원의 제복으로 갈아입은 둘이 제일 먼저 향한 곳은 매표소였다.

기존의 품이 큰 정장이나 수수한 사복 차림이 아닌 제대로 제복을 차려입고 토끼 머리띠를 한 아다치의 모습은 쿠로사와로 하여금 꽤나 설레게 함직한 느낌이었기에 이때까지의 쿠로사와는 만족도 200%였다.

ZOO토피아의 주디 같잖아….! 귀여워!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픈 충동을 수도 없이 느끼며 아다치의 곁에 딱 붙어 다니던 쿠로사와는 아다치가 입장하는 이용객들에게 티켓 발권을 해 주는 순간부터 웃을 수 없게 되었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이용객이 직접 절단한 손가락 3개를 받아든 아다치가 티켓을 건네 주며 한 말이었다. 

마치 중중 당뇨병을 앓고 있는 듯 거뭇하게 썩어들어간 손가락 3개,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배치된 수납함에 넣으며 다음 손님을 맞이하는 아다치의 얼굴에선 비즈니스용 미소를 유지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손님의 생김새를 확인하려는 시도조차 없이 메마른 대처만 반복할 뿐.

그렇게 아다치는 인형처럼 같은 행동, 같은 대사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러한 반복된 움직임이 멈췄을 때는 신체 부위가 아닌 재대로 된 금전을 내는 이용객을 마주했을 때.

아다치가 슬쩍 눈을 치켜뜨고 금전을 지불한 고객을 확인하며 처음으로 다른 말을 꺼냈다.

 

 

“티켓 값이 부족합니다. 매표소 밖으로 나가 주세요.“

 

”여기서 놀고 싶어요.“

 

”나가세요.“

 

 

이용객은 머리가 반쯤 부숴진 채 뇌가 드러나 있던 상태였다. 아다치의 단호한 대답에 잠시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이용객은 이내 역방향으로 틀어진 자신의 팔과 다리를 절뚝대며 천천히 매표소 바깥으로 퇴장했다.

이러한 일은 티켓을 발권하는 동안 세네 번 가량 발생했다. 

쿠로사와는 함부로 끼어들지 않았다. 어째서 금전을 지불하는 이들만 입장을 막는 것인지는 몰라도 어떠한 기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묵묵히 지켜볼 뿐.

 

그렇게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티켓의 발권이 완료되고 매표소는 봉쇄되었다. 그와 함께 놀이공원 한가운데 가장 높이 솟아 있는 관람차 속 전광판에 의문의 숫자가 떠올랐다. 

 

‘72‘

 

72? 고개를 갸웃거리는 쿠로사와를 바라본 아다치가 가벼운 미소와 함께 설명해 주었다.

 

 

”저건 오늘의 총 입장객 수야. 매표소는 더 이상 운영하지 않으니까 저 숫자가 늘어나는 걸 주의하면 돼.“

 

”총 입장객 수가 더 늘어날 수도 있어?“

 

”응. 어제 말했던 부분이라고 할까… 흘러들어오는 사람들. 아까 금전으로 티켓을 사려고 했던 존재들도 그런 부류. 매표소에서 입장을 막아도 공원 내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경우가 있어. 그럴 때는 숫자가 바뀌니까 찾으러 가면 돼.”

 

 

인간이었구나…. 어떻게 그런 몰골을 하고 태연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거지? 쿠로시와의 의문은 여전한 듯했다. 아다치도 자세한 이유는 잘 모르는 모양.

티켓 발권이 끝나면 놀이공원 내를 돌아다니며 어트랙션을 작동시키면 된다. 보통은 자동으로 운행되지만 인기가 많은 기구의 경우는 그만큼 시설이 복잡하기에 안내 멘트를 들려 주는 것이 필수라고.

종종 어트랙션을 빠져나가지 못한 이용객들이 문제를 일으킨는 일들이 심심찮게 있기 때문도 있었다.

 

업무를 소화하기 위함인 것 이외에도 놀이공원에 입장한 뒤의 아다치는 묘하게 신이 나 보이는 것도 같았다.

어쩌면 놀이공원의 캐스트가 적성에 맞는 걸까? 그게 아니면 자신도 분위기에 이끌려 재미를 느끼고 있는 걸까. 정확히 말하자면 둘 다 아니었다.

 

 

“놀이공원에서는 모두가 기뻐하고 있으니까 과하게 텐션을 유지할 필요는 없지만 웬만하면 계속 웃고 있는 편이 좋아. 혼자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으면 이질감이 느껴져서.“

 

 

쿠로사와가 물어본 건 아니지만 아다치는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써서 조언을 해 주었다. 아무리 조심해도 사고에 휘말리기 일쑤이니 당연한 일이다.

아다치는 쿠로사와를 데리고 첫 번째 테마파크인 샤이닝 월드로 향했다. 이곳은 식당가와 상점들이 위주인 만큼 어트랙션은 따로 없기에 공원 내에서 위험도는 가장 낮지만 그렇다고 마냥 방심할 순 없는 일.

샤이닝 월드는 딱히 눈에 띄는 시설 같은 건 없었다. 다만 길거리 상인이 몇 명 있을 뿐이었고, 대체로 한산하니 다채로운 광경과는 다르게 이러한 모순에서 어쩐지 괴리감이 느껴지게끔 만들었다.

그러던 둘의 사이로 낯선 음성이 파고들었다.

 

 

”아저씨, 우리 엄마를 찾아 주세요.“

 

 

미아? 뒤에서 제 옷깃을 잡아채는 어린 소녀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쿠로사와가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이었다.

그보다 빠르게 쿠로사와의 손을 잡아채며 정신을 깨우는 아다치. 쿠로사와는 그제서야 ‘절대 반응하지 말라‘던 주의 사항을 떠올렸다.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 온몸에 퍼져나가는 긴장감, 잘못하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쿠로사와는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움직여 아다치의 손을 꼬옥 맞잡았다. 그렇게 서로 단단히 손을 맞잡은 채 그 누구도 한마디 말도 없이 꿋꿋하게 앞만 보며 걸었다.

 

 

“엄마가 없어졌어요. 무서워요.”

 

“….“

 

”혼자 있기 싫어요. 네?“

 

 

절대 반응하면 안 된다. 그러나 알면서도 혹시나 싶은 마음에, 정말 곤란에 처한 어린 아이일 수도 있다는 측은지심이 자꾸만 쿠로사와의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계속해서 뒤를 따라오는 여자 아이의 목소리, 아다치는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쿠로사와를 제게 집중시키려는 듯 아예 팔짱을 끼고 그를 이끌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쿠로사와에게 있어서 분명 설레는 순간이었을 텐데. 공포에 두근거리는 건지, 설렘에 두근거리는 건지 그것조차 알 수 없었다.

 

5분 정도 지났을까, 아이의 목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간신히 넘길 수 있었던 첫 번째 위험.

많이 두려웠는지 쿠로사와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숨결에도, 함께 팔짱을 끼고 있는 아다치에게도 전해지는 쿠로사와의 떨림. 아다치는 그의 심정을 이해했다.

 

 

”… 쿠로사와, 잘 이겨냈어.“

 

”대체… 뭐였던 거야? 그 아이는…. 난 평범한 미아인 줄 알고….“

 

”나도 깜빡 속았던 적이 있었어. 정말 감쪽같지? 조금만 방심하면 금방 이렇게….“

 

”아다치, 혹시… 그 아이한테 반응하면 어떻게 돼?“

 

 

인간의 호기심은 위험하다. 이 빌어먹을 호기심 때문에 아다치는 몇 번이고 생사의 갈림길에 서야만 했으니까.

쿠로사와도 인간이기에 그런 점은 다르지 않다. 겁에 질려 안색이 창백해진 쿠로사와의 얼굴을 마주하며 아다치는 침착하게 그의 물음에 대답해 주었다.

 

 

“그 아이는 두 다리로 걷는 사람을 싫어해. 하반신이 없는 자신과 똑같은 처지로 만들고 싶어하지.“

 

”… 아다치, 미안해. 괜히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나는 괜찮아. 이제 지난 일이기도 하고. 그것보다… 쿠로사와, 우리 약속 한 가지만 해.”

 

“응, 뭔데?”

 

 

걱정과 죄책감이 잔뜩 서린 쿠로사와의 얼굴에 아다치는 그저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쿠로사와의 질문에 아다치는 잠시 대답을 망설이다 이내 시선을 똑바로 맞추며 입을 열었다. 들려오는 내용에 굳어지는 쿠로사와의 반응에도 아다치에게 흔들림 같은 건 없었다.

 

 

”이제부터 쿠로사와에게 위험이 닥치면 전력으로 도망가. 내가 어떻게든 주의를 끌 수 있으니까. 도망쳐서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서 숨어야 해. 그리고 호출벨을 이용해 신고해 줘.“

 

”…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어떻게 널 두고 도망을….“

 

”이게 최선이야. 쿠로사와는 날 위해 이미 수명을 10년이나 희생했고, 이 이상의 피해를 입는 건 원하지 않아. 그리고, 둘 다 당해 버려서 함께 고난에 빠지는 것보다는 그 편이 더 유리하고. 응?“

 

”나도 같은 마음이야. 아다치가 더 이상 다치는 건 싫어. 내가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도 외면하는 짓은 이제 하지 않을 거야.“

 

 

두려움 이상의 결연함이 가득 담겨 있는 쿠로사와의 대답에 아다치의 눈빛이 떨리기 시작했다. 

쿠로사와는 어째서 이렇게까지 희생적인 걸까. 낯선 곳, 그것도 정상적이지 않은 이상한 장소에 떨어진 지도 오래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패닉에 빠지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나 의지를 불태울 수 있다니.

자신에게 있어서야 쿠로사와가 구원자 같은 사람이겠지만 쿠로사와의 입장에선 그 정도까진 아닐 수도 있었다. 단지 같은 회사에서의 동기. 뭐, 그런 것치곤 너무 다정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결국 쿠로사와의 강력한 의지를 꺾는 데엔 실패했다. 차라리 함께 조심하자고 결의를 다진다면 모를까, 혼자 도망가겠다는 대답은 절대로 하지 않았으니.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쿠로사와가 이에 절대 동의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있었다. 아주 간단한 이유가.

아다치가 고통을 겪는다면 그걸 나눠 가지고 싶었다. 그리고 아다치를 해하려는 위협에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는 것도 싫다. 마지막으로, 혹시라도 아다치를 잃고 자신만 도망쳐서 살아남는다면…. 이후에 목숨을 부지해야 할 의미가 없다.

 

 

 

두 번째 테마파크인 매직 랜드는 이름답게 마법사의 세계를 콘셉트로 한 장소였다. 이곳부터는 몇 가지의 어트랙션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해피 테마파크의 마스코트격 존재들을 목격할 수도 있다.

즉, 본격적으로 위험 수위가 급격하게 높아지는 구간. 이곳에서 마스코트들을 잘못 마주치면 그 결과는 장담할 수 없다.

마스코트들은 어트랙션에 탑승해 있는 녀석도 있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녀석, 가만히 멍 때리고 있는 녀석, 또는 다른 구간인 판타스틱 어드벤처에서 놀고 있는 녀석 등 행동 양식이 다양하며 모두 개별적으로 움직인다.

 

 

“마스코트들은 총 네 마리가 있어. 이 녀석들은 뭐라고 할까…. 인형탈? 응, 인형탈처럼 생겼으니까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을 거야. 이름은 해피, 호프, 피스, 조이. 이 정도야.“

 

”네 마리나 있구나…. 이 애들을 전부 피해서 다녀야 하는 거야?“

 

”응. 눈치도 빠르고, 꽤 똑똑해서 한 번 걸리면 따돌리기도 까다롭거든. 상당히 집요하기도 하고.“

 

”뭔가, 술래잡기 같네.“

 

 

아주 살벌한 술래잡기…. 살인마를 주제로 한 슬래셔 영화에라도 출연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술래가 될 마스코트들은 각각 다른 생김새와 성격을 지니고 있다. 잔혹함에 대한 차이도 존재하기에 상대적인 주의도도 달라 각 개체마다의 대처법도 따로 있었다.

매직 랜드에 진입하기 전, 아다치는 쿠로사와에게 다시 한번 조심할 것을 당부한 뒤에야 그곳으로 이어지는 오솔길로 들어섰다.

입구에는 4마리의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각각 파란색 펭귄 해피,하얀 북극곰 호프, 붉은 늑대 피스, 검은 고양이 조이였다. 아다치는 이와 같이 생긴 인형탈이 보이면 죽어라 튀는 것만이 생존 방법이라 일러 두었다.

 

이곳의 어트랙션은 별다른 조치가 필요하지는 않다. 어차피 목적지는 판타스틱 어드벤처이기 때문에 길게 체류할 필요는 없고, 그저 전광판의 숫자가 바뀌면 확인하러 오는 정도.

그러나 자주 오는 구간이 아님에도 아다치에게 많은 스트레스를 주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 이유는 함께 걸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휘파람 소리가 들리면서부터 알게 되었다. 

 

 

“쿠로사와, 지금 휘파람 소리 들려?“

 

”응, 우리 말고 누가 있는 걸까?“

 

”해피. 해피가 주변에 있으면 휘파람 소리가 들리거든.“

 

 

둘은 서로의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조심스레 파악한 뒤, 발소리가 크게 나지 않도록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해피는 청각이 민감하니 발소리가 들린다면 즉시 눈치채고 추격해 올 것이므로. 휘파람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살금살금 이동하던 둘은 근처의 수풀 속에 숨어 있었다.

적어도 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을 때까지 둘은 아무런 대화도, 소리도 내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있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리고 쿠로사와는 휘파람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 멀리서 밀짚모자를 쓴 채 휘파람을 불며 낫을 들고 뒤뚱거리는 펭귄 한 마리를 목격했다.

만약 잡히기라도 했으면 저 낫에 목이 날아갔을지도.

 

 

“아다치, 나 아까 해피를 봤어. 농부의 복장을 하고 있는 펭귄이지?”

 

“응. 해피는 한 번이라도 마주치면 놀이공원이 폐점할 때까지 계속 쫓아와. 나도 아직은 해피와 정면으로 마주친 적은 없어.”

 

“또 무서워졌어. 의외로 쉽게 마주칠 수 있구나.”

 

“그래서 늘 심장이 조마조마해. 해피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세 마리에게 쫓겨 본 적도 있고.“

 

 

혹시나 해피가 또 찾아올까 소근소근 대화를 나누던 둘은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다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사실 똑바로 걷기만 한다면 통과하는 데에 그리 오래 걸리진 않는다. 그럼에도 번거로운 이유는 시설 내를 돌아다니는 마스코트들 때문. 

방금 해피에게 걸릴 뻔하고 정신이 바짝 든 둘은 이전보다 훨씬 신중하게 다닐 수밖에 없었다. 마치 서로를 의지하기라도 하듯 가까이 밀착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조용하게 속삭이며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회전목마를 지날 때 즈음, 둘은 다시 한번 심장을 부여잡으며 후다닥 다른 곳으로 달려야만 했다. 

자신의 모형 검을 용맹하게 치켜든 채로 하얀 말에 탑승해 있는 피스를 목격했기 때문. 다행히 마스코트들은 어트랙션에 탑승 중일 땐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들도 즐기느라 바쁘기 때문에 주변에 신경을 쓰지 않으니 어트랙션의 운행이 끝나기 전에 피하면 되니까.

피스와의 만남은 그걸로 끝이었다. 회전목마를 즐기느라 별다른 깊은 인상은 남기지 못했으나 차라리 그가 말을 타느라 바쁜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둘을 발견하자마자 하울링을 내지르며 미친듯이 쫓아왔을 테니까. 그의 하울링을 들은 다른 마스코트들이 합세하면 그때는 지옥의 시작이었다.

 

범퍼카와 대관람차는 이상 없음. 전광판의 숫자는 아직 그대로였다. 이대로라면 순조로운 편이었고, 둘은 긴장을 놓지 않은 채 계속해서 마지막 테마관인 판타스틱 어드벤처로 향했다. 도중에 갑작스레 휘파람 소리가 또 들리는 바람에 굉장히 식겁하긴 했지만.

 

 

 

 

 

 

드디어 매인 테마파크인 판타스틱 어드벤처. 이곳은 본격적인 어트랙션이 위치해 있는 만큼 신경 쓸 거리가 많다. 사실상 근무 시간의 대부분을 소요하는 곳. 그만큼 위험하다.

아직 등장하지 않은 마스코트는 호프와 조이. 이들은 앞서 나타났던 두 마스코트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매직 랜드까지와는 달리 북적북적한 내부에 쿠로사와는 그제서야 놀이공원에 온 듯한 기분을 느꼈다.

드디어 본격적인 근무가 시작되는 타이밍이기도 했고.

 

 

수동 조작과 함께 안내가 필요한 롤러코스터에는 방문객 전부가 몰린 듯 꽤나 붐비고 있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친절하게, 표정은 심드렁하게.

롤러코스터에 탑승해 있는 이용객들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엄청난 속도로 중얼중얼 랩을 하듯 긴 안내 멘트를 아주 빠르게 끝마친 아다치는 가차없이 출발 버튼을 누른다.

쿠로사와는 여태까지 놀이공원을 이용하며 들어 본 캐스트의 멘트 중 가장 성의 없고 가장 빠른 멘트였다고 생각했다. 아마 평범한 놀이공원에서 저렇게 일을 했다간 너무 빨라서 못 알아듣겠다는 민원이 폭주할지도 모른다는 감상은 덤.

문제의 롤러코스터는 하루에 4번만 운행한다. 수많은 이용객들이 몰리는 만큼 별의별 일들이 일어나는 건 물론이고 위험 수위도 배로 증가한다.

 

롤러코스터의 운행을 한 번 끝냈으니 다음은 다른 캐스트가 와서 관리할 것이다. 그 즈음, 전광판의 숫자도 바뀌었다.

74, 갑자기 두 명이 증가했다.

그것을 확인한 둘은 분주하게 롤러코스터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제일 어렵고도 힘든 일이지만 판타스틱 어드벤처부터 뒤져야 하는 것이 옳았다. 다른 구역으로 가는 길도 쉽지 않을뿐더러 이곳에서는 생존율이 얼마 안 되니까.

아다치와 쿠로사와는 함께 지도를 펼쳐들고는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빠르게 이동이 불가능한 만큼 효율적으로 장소를 골라내야 이곳에 숨어든 사람을 구해낼 수 있다.

 

그리고 지도를 가만히 응시하던 쿠로사와가 아다치에게 물었다.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

 

 

“… 아다치, 혹시 마스코트 중에서 말야. 유난히 인간을 잘 찾아내는 개체가 있어?”

 

“응? 어, 음…. 내 경험으로는 아무래도 조이가 잘 찾는 것 같아. 식인 습성이 있어서.”

 

“이건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마스코트를 이용하는 방법은 어떨까 해. 특정한 장소로 이동 중인 모습을 보인다면 방향만 파악해도 대충 어느 시설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다치는 여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걸리면 죽음뿐, 무조건 도망다녀야 하는 존재로만 여겼으니까.

그러나 생각해냈더라도 실행은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혼자니까 굳이 위험 부담을 늘릴 필요도 없고. 지금의 아다치는 쿠로사와의 곧은 눈빛을 바라보며 이 계획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 중이었다.

서로 도와줄 파트너가 있다면 한 번 정도는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음, 너무 바보 같은 계획일지도 모르겠네. 게다가 위험하고.”

 

“… 해 보자, 쿠로사와!”

 

 

그리고 남성이 여성에 비해 단명하는 비율이 높은 이유이기도 했다. 함께 어울릴 사람이 있다면 모험심과 용기가 치솟기 마련이니까. 마스코트에게 걸릴지도 모른다는 건 일단 그때의 운에 맡기는 것이다.

둘은 새롭게 목표로 삼은 조이를 찾아다니기로 했다. 검은 고양이의 인형탈이 어디에 있을까, 그가 주위에 있다면 틀림없이 배가 고파지기 시작할 테니 그 징후만 파악한다면 바로 대처할 만한 방법이 있었다.

 

예상 외로 두 사람이 먼저 찾아낸 마스코트는 호프였다. 하얀 북극곰 인형탈이 활짝 웃으며 느릿느릿 걷는 모습은 전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가 주변에 있을 때의 부작용으로 인해 갑작스레 두드러기에 시달리는 것은 전혀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아다치는 영문도 모르고 “뭐야?” 하며 제 팔뚝을 긁기 시작하는 쿠로사와를 이끌고 조용히 호프에게서 멀어졌다.

 

 

“호프가 주위에 있으면 피부 질환이 생기더라. 이제 괜찮을 거야. 예전에 잡혔을 땐 얼마나 놀랐는지….”

 

“잡혔었어? 혹시 심한 일을 당했다거나….”

 

“… 그건…. 다짜고짜 내 엉덩이를 때리더니 그냥 가더라고.”

 

 

호프는 웃고 있을 땐 그렇게 위험한 마스코트가 아니다. 화났을 때 눈에 띄면 큰일나니까 문제지. 당시에도 기분이 좋았기에 단순한 장난만 치고 넘어갔던 것이 아다치에게 있어서는 천운이었다. 얼얼한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잠시 어리둥절했던 아다치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했다.

아다치의 대답을 들은 뒤 안도감과 함께 할 말이 없어진 쿠로사와는 입을 닫고 조이를 찾는 데에 집중했다. 

 

 

조이는 애니멀 시설인 비스트킹덤 근처를 배회 중이었다. 

단순히 얼쩡거리는 게 아니라 어딘가 목적지가 있는 것처럼 제대로 이동 중이었으니 그 모습을 멀찍이서 확인한 두 사람은 조이보다 빠르게 이동하는 루트를 계산했다.

그렇게 둘이 선택한 방법은…. 별것 없었다. 뭔가 타고 다닐 만한 게 있는 것도 아니고, 달리는 것 밖에 더 있겠는가.

그래도 아다치는 이런 순간이 예전만큼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쿠로사와가 함께라는 것이 이렇게나 큰 힘이 될 줄이야. 오히려 약간은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두 사람이 죽어라 달려서 비스트킹덤에 입장했을 때, 우리 안에서 둘을 발견한 굶주린 짐승들이 무섭게 포효하며 철창을 부술 듯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 광경에 화들짝 놀란 쿠로사와가 주저앉을 뻔했으나 “쿠로사와, 저기야!” 하는 아다치의 목소리에 하찮은 꼴을 겨우 면할 수 있었다.

턱끝까지 차오른 숨을 갈무리하기도 전에 아다치는 다급하게 생존자의 주의를 자신에게로 돌렸다. 

 

 

“여기는 위험해요. 바로 옆에 포춘레이크가 있을 테니 그곳에서 배를 타고 최대한 멀리 가세요. 호수의 끝에 출구가 있어요.”

 

 

아다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생존자에게 지도를 쥐여 주며 그가 향해야 할 곳을 급하게 안내해 주었다. 그러자 이내 정신 차린 생존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내대로 비스트킹덤의 밖으로 달려나가 사라졌다.

비스트킹덤의 옆에는 쪽배를 타고 모험을 떠나는 놀이시설인 포춘레이크가 위치했기에 아다치는 한 시름 놓을 수 있었다. 쪽배를 타고 계속해서 호수를 건너다 보면 그는 이 놀이공원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간신히 한 명의 생존자를 구출했다. 거칠어진 호흡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다른 한 명의 생존자를 구해내야만 하는 상황. 원래대로라면 아다치는 죄책감을 삼키고 다른 한 명은 포기할 때가 많았다. 운이 좋다면 다른 캐스트에게 발견되어 구해질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쿠로사와에게 그 방식을 제안하고 싶지는 않았다.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외면하지 않겠다고 단언하는 그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어쩌다 보니 쿠로사와를 놔두고 생존자에게 달려오긴 했는데, 아다치가 근처에서 숨을 고르던 쿠로사와에게 돌아가려던 찰나였다.

 

 

“… 아다치?“

 

 

갑작스레 아다치의 손을 잡고 그를 돌려세운 한 명의 여인이 있었다. 새빨간 드레스를 걸친 아름다운 여자가.

얼핏 쿠로사와도 정신을 빼앗길 만큼 눈부신 미모를 자랑하는 그 여자는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아다치에게 무어라 말을 걸었고, 아다치는 이전과는 다르게 그것을 뿌리치지 않고 여인의 이야기에 반응히는 중이었다.

아다치는… 역시…. 자신의 짝사랑이 성공할 거라는 기대 같은 건 애초에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서 아름다운 이성에게 웃음을 보이는 아다치를 목격하는 건 생각보다 훨씬 끔찍한 일이었다.

망연자실해 있던 것도 잠깐, 쿠로사와는 멈칫하며 아다치의 경고를 떠올렸다. 절대로 반응하지 말랬잖아….

 

당장 아다치를 해칠 생각은 없어 보이긴 하나, 생존자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행색이 멀끔하고 이용객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사람 같다. 어느 쪽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느낌.

잠시 숨을 고르던 쿠로사와는 정답게 대화를 나누는 둘의 모습을 지켜보다 이내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을 내렸다.

 

 

쿠로사와는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려 비스트킹덤으로 향하는 중이던 조이를 마주쳤다.

원래대로라면 당장 피해야 하는 상황이 맞다. 그러나 급격한 허기를 느낀 쿠로사와는 오히려 조이를 찾아냈고, 헐떡이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미소를 띄운 채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는 조이를 쿠로사와는 똑바로 마주보았다.

그리고 이내 자신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하는 조이에게서 뒤돌아 다시 비스트킹덤으로 향했다. 자신은 절대 잡히지 않을 것이다. 아다치를 구해내야만 하니까.

 

조이와의 추격전을 시작한 쿠로사와는 뒤에서 빠르게 들려오는 둔탁한 발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침착하게 아다치만을 생각하며 비스트킹덤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 즈음의 아다치는 빨간 드레스의 여인을 따라가려는 듯 그녀와 이동 중이었고, 쿠로사와는 힘겹게 그를 뒤쫓아 가까스로 낚아채 품에 안고 뒹굴어 떼어놓을 수 있었다.

그와 함께 표독스럽게 변하는 여인의 얼굴에 쿠로사와는 역시나 사람이 아니었다 판단한 제 직감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바짝 뒤쫓아온 조이가 끼어들었다.

빨간 드레스의 여인은 조이의 등장에 한 발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마치 악귀와 같은 모습으로 쿠로사와를 노려본 뒤 빠르게 사라졌고, 이제는 조이가 남았다.

 

무언가에 홀린 듯 비몽사몽한 채 멍하니 힘이 빠져 버린 아다치를 끌어안은 쿠로사와는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그를 이끌고서 조용히 사라지려 했다. 그러나 완전히 힘이 빠져 늘어진 성인 남성을 홀로 옮기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고, 그렇게 조이는 여전히 미소지은 얼굴을 하고 두 사람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조이와 쿠로사와의 대치 상황, 여유가 가득 느껴지는 조이와 속이 쓰려올 정도의 공복감에 괴로움까지 겪는 중인 쿠로사와는 너무나도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쿠로사와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조이를 똑바로 노려보며 물었다.

 

 

“… 뭘 원하는 거야?“

 

”….“

 

”죽일 거라면 나만 죽이고 이 사람은 놔 줘.“

 

 

숨이 차는지 여전히 호흡이 거친 쿠로사와를 빤히 내려다보던 조이는 거침없이 다가와 쿠로사와의 팔을 잡아 붙들었다.

그리고 쿠로사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어 보는 격렬한 고통에 신음하며 아다치를 꼬옥 끌어안았다.

잡아먹힌다. 산 채로 온몸을 뜯어 먹히게 될 것이다.

공포에 잠식되기 시작하는 그의 몸이 벌벌 떨려 오기 시작했고, 이내 스쳐지나가는 그동안의 기억과 함꼐 눈물이 차올랐다. 그런 그의 시야에 가득 보이는 것은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아다치의 얼굴뿐이었다.

 

자신은 몰라도 부디 아다치만은… 아다치만은 무사하길.

 

 

 

 

 

 

 

 

***

 

 

 

 

 

 

 

아다치가 정신을 차렸을 때, 부자연스럽게 끊겨 버린 기억과 함께 깨질 것 같은 두통이 밀려들어왔다.

어떻게 된 거지, 생존자를 구했을 때까지는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후로는 희미하기만 하고 떠오르는 무언가가 존재하질 않았다.

자신은 생존자를 보내고 나서 쿠로사와에게 돌아가려고 했었다. 어떤 이유에 의해 기절한 게 아니라면 쭉 쿠로사와랑 함께하고 있었을 텐데.

 

맞다, 쿠로사와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낀 아다치가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쿠로사와는, 쿠로시와는 어디에 있지?

 

 

“쿠로사와!”

 

“아다치, 나 여기 있어. 괜찮아? 다친 곳은?”

 

 

자신의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쿠로사와의 얼굴은 다소 땀에 절어 있긴 했지만 그런 대로 말끔한 모습이었다.

다친 곳이 있어 보이지도 않고…. 적어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 모양. 아다치는 긴장감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황금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아름답고 광활한 수면.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곳은 작은 배의 위였다. 다시 확인한 쿠로사와는 쪽배가 잘 나아갈 수 있도록 노를 젓고 있었다.

 

 

“… 그게, 다치진 않은 것 같아. 쿠로사와, 어떻게 된 거야?”

 

“다행히 별일은 아니었어. 여기라면 조금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현재 둘의 위치는 비스트킹덤의 옆인 포춘레이크였다. 별다른 위험 요소가 없기에 생존자를 탈출 시키는 수단 중 하나로 이용하는 시설이며, 쪽배를 타고 있는 동안에는 습격을 받을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 점을 악용해 여기서 농땡이를 부렸다간 놀이공원의 총책임자가 직접 잡으러 온다.

아다치는 어떻게 된 일인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저 지쳐 버린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잠시 한숨을 돌릴뿐.

그러던 아다치의 눈에 노를 젓고 있는 쿠로사와의 손이 들어왔다.

 

 

“잠깐, 쿠로사와. 손이… 도대체…..”

 

“아, 난 괜찮아. 이 정돈 별것 아냐. 상태는 좀 어때?”

 

 

쿠로사와의 양 손은 손톱이 모조리 뽑혀 있었다. 그 자리에서 흘러나온 피로 인해 불그스름하게 범벅이 되어 있었고, 힘을 쓰느라 지혈이 힘들었는지 옷 여기저기에 핏자국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것을 멍하니 보던 아다치는 불현듯 치미는 두려움에 자신의 옷을 제대로 바라보았고, 역시나 여기저기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아다치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변했다. 그것을 본 쿠로사와가 허둥지둥 제 손을 숨기며 그를 달래기 위해 다가왔으나 대충 어떤 상황이 있었는지 머릿속에 그려진 듯 아다치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떨어져 흘러내렸다.

 

 

“아다치, 난 정말 괜찮아. 더 심한 일이 아닌 것에 감사하고 있고, 너도 무사하니까.”

 

“… 쿠로사와, 부탁이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줘.”

 

 

훌쩍이며 애처로운 눈빛으로 자신에게 질문하는 아다치를 쿠로사와는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착잡한 표정으로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이던 쿠로사와는 이내 최대한 차분한 어조를 유지하며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빨간 드레스를 입은 여성에게서 아다치를 구해낸 직후, 조이와의 대치에서 팔을 붙들렸던 쿠로사와는 아가리를 쩌억 벌리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던 모습을 보자마자 제 삶이 끝날 것임을 직감했다.

조이는 쿠로사와의 손가락을 핥더니 이내 손톱 끝을 거칠게 물었고, 악력으로 인해 손톱이 들려 버린 쿠로사와는 겪어 본 적 없는 아픔에 신음해야만 했다.

그러한 과정이 반복되는 동안 조이는 쿠로사와의 손톱을 물어뜯어 억지로 뽑아내 삐적삐적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꼭꼭 씹어 먹고 있었다. 다섯 개의 손톱을 먹고 나선 가차없이 쿠로사와의 다른 팔을 집어들어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그동안 쿠로사와는 그에게 끌려다니며 눈을 질끈 감은 채 참지 못한 눈물로 범벅이 된 제 얼굴을 느낄 새도 없이 반복되는 격렬한 통증과 몰려오는 죽음의 공포에 당장이라도 정신을 놓아 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손톱을 모두 먹어치운 조이가 제 손부터 팔, 그리고 나머지 신체를 뜯어 먹는 끔찍한 미래를 기다리며 벌벌 떨던 쿠로사와는 예상 외로 순순히 자신의 팔을 놓아 주는 조이의 행동에 순식간에 머릿속이 백지가 되었다.

고통과 두려움에 잔뜩 일그러졌던 쿠로사와의 얼굴은 영문을 모르겠는 상황에 당혹스러움으로 바뀌었고, 조이는 피로 얼룩진 자신의 입가를 스윽 닦아낸 뒤 여전히 웃음을 지은 채 후련하게 뒤돌아 경쾌한 발걸음으로 사라졌다.

 

 

위기에서 벗어났다. 조이가 자신을 왜 그냥 놓아 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신도, 아다치도 살았다.

쿠로사와는 생존했다는 기쁨을 느낄 새도 없이 다른 위협에서 아다치를 보호하기 위해 힘껏 그를 둘러업고 비스트킹덤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조이가 사라진 것을 눈치챈 여인이 혹시라도 다시 찾아올까 봐. 또는 다른 마스코트가 자신들을 발견할까 봐.

힘겨워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극복해야 했다. 아다치는 여전히 의식이 없고, 그를 보호할 수 있는 존재는 쿠로사와뿐이었으니까. 워낙 정신이 없던 상황인지라 호출벨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만약 호출벨을 사용했더라도 경찰들은 큰 도움이 되지 못했으리라. 자신의 손톱은 이미 조이에게 먹혀 버렸고, 그들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습격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다.

 

쿠로사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아다치가 생존자에게 안내했었던 포춘레이크로 이동했다. 

무리해서 힘을 쓰는 동안, 손톱이 있던 자리에서는 화끈하고 격렬한 통증이 계속해서 느껴졌다. 아무리 닦아내도, 닦아내도 멈추지 않는 피가 줄줄 흘러내려 제 손을 적시고 옷을 더럽혔다. 아다치에게 이런 걸 묻히고 싶지 않았는데.

통증 같은 건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견디니 나름대로 참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쿠로사와는 조심조심 아다치를 쪽배 위에 눕힌 다음에 자신도 함께 탑승했다.

 

 

 

 

쿠로사와를 통해 정황을 전해듣던 아다치는 말문이 막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 아다치에 쿠로사와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정말 괜찮다는 듯이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는 아다치를 지켜보던 쿠로사와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그를 천천히 끌어안았다.

얌전히 안겨 있는 아다치, 쿠로사와는 차분하게 미약하게 떨려오는 그를 안심시켜 주려는 듯이 계속해서 머리와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얌전하게 안겨 있던 아다치가 떨림이 채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 쿠로사와, 왜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거야.”

 

“……”

 

“그렇게까지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됐는데. 그냥 두고 혼자 도망갔어도… 차라리 그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는데.”

 

 

쿠로사와는 천천히 아다치에게서 떨어져 다시금 눈물젖은 그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복잡한 감정을 담고 오가는 시선, 쿠로사와는 5년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아다치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입술을 달싹이다 가볍게 숨을 들이키고 허심탄회하게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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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치, 나…. 사실은 널 좋아해.”

 

“… 뭐?”

 

“너를 잃었던 5년 전부터 주욱 후회하고 있었어. 좋아하고 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고, 차라리 그때 손을 내밀었다면 많은 것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 게다가… 지금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까. 두 번 다시 너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어.”

 

“쿠로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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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 않게 당황한 듯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아다치, 쿠로사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이 그리 쉽게 아다치에게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그저 같은 회사의 동기에 불과한 사이였으니까. 그럼에도 마침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 순간, 놀라우리만큼 편안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끔찍한 고통을 겪으며 죽어갈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공포감. 직접 겪어 보니 알 것 같았다. 이곳에서는 언제 죽는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차라리 한 번 정도는. 딱 한 번 정도는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설령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해도.

 

 

“뭐, 그런 마음도 있었지만 일단은 같이 돌아가기로 약속했잖아? 난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아다치와 함께 돌아가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야.“

 

”… 쿠로사와, 나는….“

 

 

쿠로사와는 다소 심정이 복잡해 보이는 듯한 아다치의 어깨를 쓸어내려 주며 고개를 저었다.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시그널이었다.

아다치는 끝내 자신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판단하지 못했고, 쿠로사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아다치를 격려할 뿐이었다.

”이제 돌아가자. 이용객 수도 원래대로 돌아왔어.“ 씩씩한 쿠로사와의 목소리에 아다치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이 타고 있던 쪽배는 방향을 틀어 다시 놀이공원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마치아카 쿠로아다 동정마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