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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6 13:15

공포 ㅈㅇ

스압 ㅈㅇ

 


키사라기 역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존재하지 않는 역에서의 행동 안내
분실하신 눈알 2개를 무료로 돌려드립니다.

 

 

 

 


 

 

늘 바라 왔던 둘만의 스위트라이프와는 살짝 차이가 있었지만 어쨌든 함께 지내게 될 두 사람이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함께 케이크를 먹는 일이었다.

 

실종된 이후, 죽어 버린 스마트폰을 살리지 못해 시간을 체감하기 어려웠던 아다치에게 있어서 쿠로사와를 통한 최근의 정보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자신이 사라진 지 5년이 지났다니…. 

그러나 아다치와 같은 공간에서 지내게 된다는 사실 자체가 감격스러워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쿠로사와는 아다치의 혼란과는 별개로 스스로 몰래 허벅지를 꼬집어 이것이 현실임을 자각했다.

그 와중에도 들고 온 케이크가 구겨지지 않도록 힘을 주지 않는 것에 신경 쓴 것은 물론… 그렇지, 케이크!

 

 

“아다치, 이미 지나 버렸지만… 생일 축하해.”

 

“… 에?”

 

“이거, 네 생일을 축하하려고 샀어. 부끄럽지만 올해는 같이 먹을 수 있겠다는 기대를 해 버려서. 아직까지 손도 대지 못했지.”

 

 

얘가… 뭘 잘못 먹었나? 내 생일을 네가 왜?

라고 눈으로 말하는 듯한 아다치의 표정에 쿠로사와는 이것이 충분히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해야 하나…. 다져진 영업 스킬도 이상하게 아다치의 앞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다행히 순식간에 어색해진 분위기를 환기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름대로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 사람은 쿠로사와 뿐만이 아니었기에 아다치 역시도 이 사실에 대해 깊게 짚을 생각은 아니었던 것.

 

 

“어, 아무튼 고마워. 그렇게나 시간이 지났는데…. 그런 걸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서.“

 

”… 난 믿고 있었어. 아다치가 분명 살아 있을 거라고. 결국 이렇게 만나게 됐잖아?“

 

”응, 그렇네. 믿어 줬구나. 뭔가 너무 오랜만이라고 할까, 여기서 지내는 동안 생일 같은 건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거든. 이렇게 사람과 제대로 대화를 나누는 일도.“

 

 

이전에도 크게 붙임성이 좋은 성격은 아니었으나 지금의 아다치는 훨씬 수줍은 느낌을 풍기는 듯했다.

물론 쿠로사와가 그런 아다치의 모습을 안 좋게 받아들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그러거나 말거나 쿠로사와는 분주하게 케이크의 포장을 열어 여전히 먹음직스럽고 귀여운 내용물을 꺼냈다.

 

 

 

 

쿠로사와가 알고 있던 아다치는 이전에 비해 확실하게 달라져 있었다. 기본적으로 조용하고 선한 분위기는 그대로였지만 회사에서 선배의 무리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거나 하는 우유부단함은 어느덧 자취를 감춘 것처럼도 보였다.

 

예를 들면… 터무니없이 무리한 입주 조건을 제시하는 관리소장을 향해 당돌하게 조정을 요구한다거나?

함께 머물 호텔에 향하는 동안 경찰관도, 아다치도 분명히 강조했었는데. 관리소장에게 무례하게 행동하지 말라고.

그리고 쿠로사와는 관리소장을 마주하자마자 느꼈다.

 

굳이 주의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예절을 갖추게끔 만드는 외모가 정말로 경악스러웠으니까.

인간의 형태를 하고는 있으나 보통의 인간이라면 견딜 수 없다. 쿠로사와는 그 모습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방사능에 노출된 인간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그 과정의 잔혹한 묘사를.

관리소장은 그러한 생김새를 하고서도 전혀 문제없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다. 심한 충격을 받고서도 오히려 담담한 표정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런 모순에서 느껴지는 상식적이지 않은 광경 덕분이었다.

 

 

“2인 이상 거주 시, 300만엔의 금전을 보증금으로 추가 지불하세요. 금전 대신 이에 상응하는 다른 대가도 좋습니다. 월세는 지금의 두 배로 책정하면 적당하겠죠.”

 

“300만엔은… 지금으로써는 너무 큰 금액이네요. 다른 대가는 어떤 게 있을까요?”

 

“전신의 피부 가죽입니다. 단, 상처를 포함해 감가상각이 필요한 사항이 발견된다면 다른 부위 일부로 대체하셔야 하고요. 다른 것으로는 혈액 5L가 있습니다.“

 

 

쿠로사와의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전신의 피부?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가.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히는 내용에 머릿속이 하얘진 쿠로사와는 어디서부터 문제인지 핀트를 잡기가 힘들어졌다. 피부의 가치가 300만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혈액 5L의 값이 그것밖에 안 되나?

그런 쿠로사와의 생각을 멈춘 사람은 아다치. 그는 관리소장의 기세에 말리지 않고 당당하게 의견을 주장했다.

 

 

”전신의 피부, 또는  5L씩이나 혈액을 제공하면 반드시 죽습니다. 이쪽은 생명을 걸어야 하는 만큼 타산이 맞지 않는다고 봐요. 100만엔은 지불할 수 있으니 200만엔에 해당하는 대가로 조정 부탁드립니다.“

 

”… 그렇다면 100만엔과 신체 나이 2년에 혈액 1L로 하죠.”

 

“신체 나이 5년, 혈액은 200ml.”

 

 

아다치와 관리소장의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겼다. 이들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쿠로사와는 혹시나 집주인이 아다치에게 어떤 해코지를 하는 게 아닐지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기분이었다. 거래의 품목도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고.

다행히 아다치가 네고를 시도한 조건이 적절하게 수지에 맞다고 느꼈는지 집주인은 제안을 승낙했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일. 그 이유는 머지 않아 알게 되었다. 쿠로사와 대신 돈을 낸 아다치, 금액을 확인한 관리소장이 쿠로사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쿠로사와 씨, 잠깐 팔을 내밀어 주시죠.“

 

”소장님? 쿠로사와는 아직 준비가… 제가 대신 드릴게요.“

 

”안 됩니다. 실제 입주 요청인은 쿠로사와 씨잖아요.“

 

 

아다치가 끼어들새라 관리소장은 굵은 주사기를 꺼내들어 가차없이 쿠로사와의 팔목에 쑤셔박았다.

이 정도의 굵은 바늘은 보통 마취 후에 삽입이 시작된다. 그러한 일련의 배려 없이 무자비하게 진행되는 채혈과 함께 느껴지는 고통에 쿠로사와가 비명을 지르려 하자 그보다 빠르게 접근한 아다치가 그의 입을 틀어막고 침착하게 말했다.

 

 

“… 미안, 쿠로사와. 저항하면 더 아파. 가만히 견디면 짧게 끝날 거야.”

 

 

그렇게 쿠로사와는 200ml의 혈액을 빨렸다.

작은 우유팩 하나 분량의 피였지만 빈혈과 같은 질환이 있는 이에게는 위험할 수도 있는 양이었기에 아다치는 순식간에 피를 빼앗긴 쿠로사와의 상태를 여기저기 살피기에 분주했다. 다행히 신체 건강했던 덕분인지 별다른 이상은 없었지만 그보다는 심리적인 충격이 더욱 컸다.

여담이지만 이후에 아다치가 겁에 질린 그를 달랜답시고 했던 말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신사적인 거라나. 아예 물어뜯어 직접 피를 빨아재끼는 놈들도 있고, 더 재수가 없으면 손목이 통째로 잘려나가 피를 쏟는 경우도 있다는 이야기에 쿠로사와는 자신이 꿈을 꾸는 줄 알았다.

이틀 동안 자신이 여기서 대가랍시고 내놓은 것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수중의 모든 돈, 고가의 제품…. 수명과 신체 나이는 당장 체감이 안 되니 그렇다 치더라도 혈액을 잃었다.

의복 중 넥타이와 재킷(역시나 고가 상품인)은 보호소의 이용 요금으로 내주었고.

 

동거에 앞서 이런 사건을 겪고 나니 쿠로사와는 자신의 앞에서 멀쩡하게 살아 있는 아다치가 더욱 믿기지 않았다.

말 그대로 눈 뜨고 코 베이는 세상, 사람의 목숨과 인체 훼손이 자연스러운 일상인 곳. 아다치는 이런 곳에서 자그마치 5년을 살아남은 것이다.
보통의 정신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겠지.

다소 순진하고 무른 면이 있다고 생각했던 아다치는 어쩌면 생각보다 강한 인물이었을지도 몰랐다.

 

 

 

둘은 케이크를 나눠먹으며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물론, 5년만에 케이크를 먹게 된 아다치의 엄청난 리액션에 쿠로사와는 자기도 모르게 행복한 웃음을 얼굴에 가득 띄우며 잔뜩 들뜬 것은 물론이었다.

달콤한 케이크의 맛이 그리도 감격스러웠는지 야무지게 퍽퍽 케이크를 퍼먹는 아다치의 모습은 쿠로사와의 입장에서는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스럽게만 보였다. 입가에 크림까지 묻혀가며 먹는 모습이 이렇게 귀여울 수 있을까.

이어서 아다치가 쿠로시와에게 활짝 웃음지으며 했던 말은 쿠로사와의 인생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남았다.

 

 

“쿠로사와, 나… 쿠로사와 덕분에 정말 행복해.”

 

 

심장을 부여잡을 뻔한 큰 위기. 그보다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다치가, 그동안 제대로 대화를 나눠 본 적도 없이 홀연히 사라졌던 아다치가 제 앞에서 덕분에 행복하다는 소감을 말했다.

이것 하나로 지금까지의 모든 슬픔과 고생이 해소되는 기분, 이 기분이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면 좋았을 테지만 쿠로사와로부터 자신의 근황과 그동안의 일을 질문받은 아다치의 얼굴은 다시 침체되기 시작했다.

쿠로사와의 짐작대로 5년의 세월 동안 험난한 고생을 많이 한 것처럼 보였고, 이내 시작되는 아다치의 이야기를 들으며 쿠로사와의 얼굴 또한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

 

 

 

 

 

 

당시 키사라기역에서 하룻밤을 무사히 보낸 첫날, 선로를 통한 탈출에 실패한 아다치는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스마트폰의 충전을 위해 마땅한 시설을 찾는 중이었다.

이미 걸었던 길을 다시 걷는 동안에도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은 마주치지 못했기에 역시나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느끼며 의아해하던 중, 처음으로 들른 곳이 바로 편의점.

안으로 들어오니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안내 문구가 적힌 전단지였다. 창문에 붙어 있는 순백의 A4 용지에는 단순하게, 검은색 유성 매직으로 적은 듯한 글이 보인다.

 

 

[이 편의점의 점장은 대부분 부재 중입니다.

대단히 부끄럽지만 대면하여 일을 하는 것은 익숙하지 않으므로, 점원이 없을 때에 상품을 구매하신다면 적당한 값을 카운터에 두고 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건 뭐야…? 무인 편의점인가?

여러모로 아리송한 장소였다. 비어 있는 편의점을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며 둘러보던 아다치는 이내 “실례합니다~” 하는 인사를 조금 크게 외치며 가게의 책임자를 찾기 시작했다. 전기를 사용해야 했으므로.

이것이 아다치의 첫 번째 실수이자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기도 했다. 그러나 부름에도 별다른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편의점 안, 아다치는 천천히 내부를 돌아다니며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을까 둘러보다 마침 전날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아 몹시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향한 곳이 편의점 내 인스턴트 코너. 무언가라도 먹고 싶다는 생각에 천천히 둘러보던 아다치가 그것들의 정체를 깨닫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 혹시, 이것들…. 전부 사람의….”

 

 

어떻게 된 거야?! 경악한 아다치가 단말마를 내지르며 빠르게 뒤로 물러나 거칠게 숨을 내쉬며 미친듯이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어딘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됐다. 인육을 파는 편의점이라니, 제정신이 아니야. 

그러나 놀란 탓에 스스로 소란을 일으키게 된 것 또한 아다치가 맞이한 첫 번째 재앙의 이유였다. 

겁에 질린 아다치가 순식간에 파리해진 안색을 하고 주위를 둘러보다 다급하게 빠져나갈 준비를 하는 순간, 적막한 편의점에서 응답이 들려왔다.

 

 

“어서 오세요, 손님. 찾으시는 물건이 있습니까?”

 

“……”

 

 

일순간 모든 흐름이 멈추었다.

생각도, 움직임도, 모든 것이. 마치 저항할 수 없는 힘에 붙들린 것처럼 덜덜 떨리는 몸은 도무지 말을 듣질 않는다.

도망쳐야 하는데, 어서 이곳에서 나가야….

쉴 새 없이 비상 경보를 울려대는 머릿속,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직여지지 않는 몸은 어느덧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얼굴에 붙은 머리칼에 촉촉하게 물기가 스며들 때즈음 아다치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기분 나쁜 음성에 다시 한 번 몸을 움찔했다.

 

 

“… 손님, 점장입니다. 저를 찾으셨지요?“

 

”저, 그게…. 죄송합니다. 잘못 들어온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나가 볼게요.“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저건 사람이 아니라고. 

자신이 점장이라 밝히는 그를 마주하지 않기 위해 고개조차 돌리지 않으며 애원하듯 대답을 중얼거린 아다치는 처음 느껴보는 공포와 압박감에 덜덜 떨리는 몸을 어떻게든 움직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한 발자국을 내딛는 순간, 갑작스레 돋아오르는 소름과 오싹함에 덜컹 내려앉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그것을 진정시킬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아다치에게 거부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인간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바로 호기심이라고 했던가. 아니, 이성적으로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러나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돌아가는 고개는 피하고 싶은 진실을 마주하게끔 만들었다.

 

 

“봐 버렸네?“

 

 

점장은 아다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아니, 이목구비가 거꾸로 뒤집힌 그의 얼굴 특성상 입꼬리가 내려가고 눈초리가 올라가 있어야 웃고 있는 것이다. 이와 반대이니 화난 얼굴인 것이 맞겠지.

너무나도 기괴한 광경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린 아다치는 무어라 대답할 새도 없이 카운터에서 빠져나와 성큼성큼 다가온 그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 모든 게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갰다는 바람뿐,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너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다. 이렇게 중얼거리기 시작하는 점장은 그를 뿌리치고 도망가려는 아다치에게 절규하듯 소리쳤다. “나에 대해 떠들지 마!“ 

그와 동시에 비정상적으로 길쭉한 그의 손바닥이 아다치의 얼굴을 뒤덮었고, 그 손가락이 입술 새로 파고드는 것은 금방이었다. 순식간에 목구멍까지 찌르고 들어오는 손가락에 숨이 막혀 컥컥거리는 아다치의 반응 따윈 그에게 알 바가 아니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엄청난 공포가 아다치를 잠식했고, 이리저리 목구멍을 헤집는 기다란 손가락의 기분 나쁜 움직임을 구역질과 함께 막혀 버린 호흡은 그 공포에 괴로움을 더하기 충분했다. 저항하기 힘들 정도의 엄청난 힘과 숨이 모자라 찾아오는 질식에 의식이 희미해질 즈음, 아다치는 모든 것을 잊을 수밖에 없는 끔찍한 고통에 시달려야만 했다.

 

혀가 뽑혔다. 뿌리채로.

 

순식간에 목구멍과 입안에서 솟구치는 검붉은 피가 아다치의 얼굴을 뒤덮었다. 그러나 그런 것쯤은 일절 신경 쓰지 못할 정도의 고통은 그저 살아야만 한다는 본능에 모든 것을 쏟게끔 만들었다. 

자신의 앞애서 제 혀를 쥔 채 가지런한 이를 드러낸 점장의 앞에 무력하게 쓰러진 아다치는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괴로움에 짓눌렸다. 하지만 도망쳐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은 틀림없이 죽는다.

 

그러나 울컥울컥 피를 뱉어내면서도 혼신을 다해 몸을 일으켜 그앞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악하던 아다치는 안타깝게도 얼마 가지 않아 그에게 다시 붙잡혀 혀를 뽑혔다는 것 이상으로 끔찍한 일에 휘말려 버리고 말았다.

 

 

 

아다치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건 이전, 쿠로사와에게 경찰관이 조언했던 내용대로 운이 따라 준 덕분인지도 몰랐다.

스스로 생각이란 걸 할 수 있는 상황이었던가? 아니, 죽음은 확실했고 이러한 고통을 맞이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아다치는 이미 정신을 놓고 있었다.

그저 목숨줄만 끊어지지 않았을 뿐.

그랬던 그의 죽음을 막은 것은 저녁이 되기 전, 주변을 순찰하기 위해 돌아다니던 경찰관 한 명이었다. 점장은 그를 보자마자 황급히 도망쳤고, 아다치에게서 흩뿌려진 피로 낭자해진 아스팔트 바닥 위를 경찰관은 천천히 걸어왔다.

 

그 즈음, 아다치의 상태는 어땠을까.

경찰관은 사건이 벌어진 현장 주변을 둘러보더니 흩어진 아다치의 두 팔과 혀, 그리고 두 개의 다리를 주웠다.

그렇게 통째로 혀가 뽑힌 채 사지가 찢겨 달마 상태에 놓여 있던 아다치를 경찰관은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말을 걸었다.

 

 

“이봐요, 아직 살아 있어요?”

 

“……”

 

“… 그를 마주쳤을 땐 얼굴을 보려 하면 안 됩니다. 그냥 못 본 척 숨을 참고 있었어야죠. 그렇게 했다면 그는 그냥 물러갔을 겁니다.”

 

 

그르륵- 

목구멍을 메우기 시작하는 피로 인해 끓는 소리만이 새어나오며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아다치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힘없이 눈동자를 굴려 그를 응시하는 것뿐, 당장이라도 감길 것 같았지만 그것은 살고자 하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기가 막힌 일이지만 이것 또한 운이 따라 주었던 덕이다. 과다출혈로 인해 의식을 잃거나 충격과 고통에 쇼크사라도 했다면 지금의 아다치는 없었을 테니까.

경찰관은 아다치의 생존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태연하게 다시 말을 걸어왔다.

 

 

“당신, 외지인이군요. 신체는 회수했으니 치료를 받으면 고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래요?”

 

 

애초애 아다치에게는 거부권이 없다. 

그저 살고 싶다, 죽고 싶지 않다는 집념 하나로 생각할 시간조차 없이 고개를 끄덕일뿐.

경찰관은 남은 수명 중 30년을 달라고 했다. 그러나 아다치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고개를 다시 끄덕였다.

 

그 이후에 아다치가 눈을 뜬 곳은 어두운 병실의 침대였다.

 

 

 

쿠로사와가 느꼈던 것처럼 아다치 역시도 이것이 꿈이 아닐까 수없이 의심하고 혼란스러워했다. 

상반신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아도 그저 낯선 풍경, 조금의 소음도 없이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병실에 아다치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조차 없었다. 

혀도, 찢겨나갔던 두 팔과 다리도 멀쩡했으니까. 그렇지만 그 전에 겪었던 끔찍한 고문의 기억은 너무나도 생생했기에 아다치는 한동안 웅크린 채 벌벌 떨며 숨죽여 울음을 터뜨려야만 했다. 무서워, 어째서 그런….

그렇게 한참을 울던 아다치는 거칠어지는 호흡을 진정시키며 차분하게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제 머리맡에 놓여진 스마트폰과 한 장의 종이를 발견했다. 스마트폰은 이미 배터리가 거의 남지 않은 상태였고,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곱게 접혀진 종이의 내용이었다.

조심스럽게 종이를 펼치자 빼곡하게 적혀진 내용과 더불어 작은 알약 봉지가 붙어 있었다.

 

 

 

[외부에서 찾아오신 방문객을 위한 지침서]

 

안녕하십니까.

이 문서는 방문객의 건강과 행복을 책임지는 종합 병원 よみがえる(요미가에루)에서 작성되었습니다.

 

귀하께서는 병원 부근의 인접 장소에서 재기 불능의 신체적, 또는 정신적 피해를 경험하여 경찰 측의 현장 인계를 통해 적절한 조치를 시행받으셨음을 알립니다.

본 문서는 주민이 아닌 외부 지역의 대상자에게 배부되며, 파출소에서 공식적인 등록 절차가 이루어지지 않은 신원 미상의 인원에 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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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의 유출로 안해 일어나는 불이익은 귀하에게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피해 확산을 예방하기 위함이오니 꼭 숙지하시고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현재 귀하께서 위치하신 곳은 본 문서가 작성된 장소인 요미가에루 종합 병원입니다.

병원 측에서는 수술 후 환자의 안정을 위해 단기적인 입원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입원에 관련하여 비용은 별도로 청구하지 않고 있으니 안심하고 안정을 취하시기를 권장합니다.

 

덧붙여, 주의 사항과 함께 퇴원 후의 절차를 안내 드리고 있습니다. 참고하시어 올바른 행동 양식을 통해 건강한 신체를 보전하시기 바랍니다.

 

 

< 주의 사항 >

 

  • 병원의 운영 시간은 오전 8:00 부터 오후 18:00 사이입니다. 해당 시간 이외에 발생하는 응급 환자에 대해서는 진료를 포함한 모든 행위가 불가함을 알립니다.
  • 오후 18:00부터 오전 7:30 사이에는 병원의 모든 시설이 운영을 중지합니다.
    따라서 병원 내 입원 환자는 해당 시간 내에 외출, 또는 퇴원이 불가합니다. 
  • 병원의 모든 근무자에게 욕설 및 폭력 등의 언행을 금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환자에게 불이익이 주어질 수 있으며 병원 측에서 책임지지 않습니다.
  • 심야에도 병원의 내부는 대체로 안전합니다.
    단, 퇴근하지 않은 직원을 목격하실 수 있으나 민원 및 상담은 불가능하오니 병실에서의 취침을 부탁드립니다.
    시간 외 업무는 진행하지 않으므로 모든 용건은 반드시 운영 시간 내에 해결해 주시기 바랍니다.
  • 진료, 또는 수술 전 비용의 지불이 완료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퇴원 시에 청구하고 있습니다.
    영수증이 동봉되지 않았다면 수납이 완료된 상태이므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 병원의 내부는 소음을 방지하는 시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만, 다른 환자들을 위해 정숙한 이용을 부탁드립니다.
    * 병원의 외부에서 소음이 들릴 수 있습니다. 내부에는 이상이 없사오니 안심하십시오.
  • 공식 취침 시간은 21:00부터입니다. 취침에 어려움을 겪고 계신다면 동봉된 알약을 복용하셔도 좋습니다.
    충분한 수면은 빠른 회복에 도움이 됩니다.

 

 

< 퇴원 후 절차 >

 

  • 회복을 마친 환자분깨서는 1층의 안내 데스크에서 퇴원 신청이 가능합니다.
    장기 입원은 불가합니다. 처방된 입원 일수를 초과하여 시설을 이용하셔야 하는 경우에는 별도의 비용이 청구되오며, 적절한 사유가 없을 경우에는 강제 퇴실 조치가 취해집니다.
  • 퇴원 신청이 완료된 후, 병원 인근의 파출소를 꼭 방문하시기 바랍니다.
    파출소의 방문을 생략하실 경우, 앞으로의 병원 이용이 제한되며 병원 외 다른 편의 시설의 이용 역시 제약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 파출소의 경찰관에게 욕설 및 폭력 등의 언행은 삼가해 주세요. 그들은 귀하의 안전을 돕는 공무원입니다. 노고를 생각해 주시고, 배려 부탁드립니다.
  • 파출소를 통해 병원의 연계 시설인 黄色い(키로이) 호텔에 투숙 신청이 가능합니다.
    해당 호텔의 투숙객은 자동으로 정보가 이관되므로 재방문 시 일부 절차가 생략될 수 있습니다.

 

 

지침서의 내용을 천천히 읽어 본 아다치는 첫 번째로 얼떨떨함을 느꼈고, 두 번째로는 극도의 불안 증세를 느끼기 시작했다. 낮에 겪었던 일들은 거짓이 아니었다.

인육을 판매하는 수상한 편의점, 사람이 아닌 점장, 그에게 붙잡혀 잔혹하게 살해당할 뻔했던 자신, 그렇게 찢겨나갔던 신체 부위가 흔적도 없이 복구되어 있다는 것까지 전부 말도 안 되는 것들 투성이였다.

도대체 이 사실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다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이곳을 벗어나야만 했다. 안전을 위협받은 이상,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무엇보다 우선이 되어야 하는 목표였다.

 

이런 있을 수 없는 일들을 연달아 겪은 자신을 누가 알아 줄까, 회사에는 뭐라고 얘기해야 하나.

아다치는 혹시 모를 심정으로 스마트폰을 켰고, 시원하게 금이 죽죽 그어져 버린 액정을 터치해 가족과 회사의 관계자에게 통화를 시도했으나 역시나 연결은 되지 않았다.

그래, 인터넷으로라도 상황을 알리자. 어쩌면 아다치의 사정을 아는 누군가가 이곳으로 자신을 구하러 올 수도 있을 테니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떨리는 손가락으로 분주하게 타이핑을 시작했다.

문장을, 순서를 정리할 시간 따위는 주어지지 않는다. 스마트폰의 배터리는 고작 3%도 남지 않았다. 짧은 배터리 수명 안으로 최대한 많은 정보를 전달해야 했다.

 

1%가 남았을 때, 무심코 아다치가 지침서로 시선을 돌렸다.

이 지침서. 자신이 키사라기역에 도착했을 때 바로 인지할 수 있는 주의 사항이 있었다면 끔찍한 일을 예방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 내가 작성하자. 

혹시 모를 누군가가 키사라기역으로 오게 된다면 그 안내를 읽고 죽음을, 끔찍한 고통을 피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연이 닿아 함께 귀환할 수 있기를.

 

아다치는 자신의 바람을 담아 등록 버튼을 눌렀다.

 

 

 

 

 

 

 

***

 

 

 

 

 

 

연달아 케이크를 큼직하게 떠서 두 번이나 입안에 밀어넣은 아다치가 어두운 얼굴로 우물대다 꿀꺽 삼켰다.

쿠로사와는 아다치가 이곳에서 겪은 이야기를 듣고 나자 두 손이 덜덜 떨려 오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나타나 수많은 메시지를 연달아 등록하던 아다치는 사라져 있던 시간 동안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의 끔찍한 일을 경험한 뒤에 나타났던 것이다.

자신이 겪은 경험을 토대로 적어 둔 아다치의 안내가 없었더라면 여지 없이 잔인한 최후를 맞이했겠지. 그러한 생각이 들자 쿠로사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어렵사리 짧은 대답만을 전할 수 있었다.

 

 

“… 아다치, 고마워. 네가 놓아 두었던 수첩 덕분에 위험을 피할 수 있었어.”

 

“응, 정말 다행이야. 혹시나 쿠로사와가 여기로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의미가 없는 일은 아니었다니까 어쩐지 뿌듯하기도 해.”

 

“누구라도 큰 도움이 됐을 거야. 분명 무서웠을 텐데… 이후에 찾아올 사람을 배려해 줬구나.”

 

 

입가에 크림을 묻힌 아다치가 멋쩍게 미소지었다. 쿠로사와는 무심코 그에게 손을 뻗어 엄지로 닦아내 주었고, 아다치는 흠칫 놀라는 기색이었지만 이내 큰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다 대답했다.

 

 

“… 쿠로사와는 상냥하구나.”

 

“응?”

 

“예전에도 말이야. 정말 대단한 사람인 것 같아서.”

 

“뭐야, 그게….“

 

”일도 잘하고, 주변에서 신뢰도 받고 있잖아.“

 

 

갑자기 왜 칭찬을 하는 거야? 애써 부끄러워지는 기색을 숨기며 묻는 질문에 아다치는 민망한 듯 웃어 보일뿐이었다.

그 웃음에 안아 주고픈 충동을 느낀 것은 물론, 새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한 모습으로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아다치를 보니 5년 전의 순간으로 되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예전의 기억, 그래 봤자 몰래 지켜보기만 했던 모습들이지만 그럼에도 쿠로사와는 행복했다. 

동기로라도 곁에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아다치를 잃었던 시간 동안 절절하게 체감했으니.

 

 

이후로도 주욱 이어진 아다치의 근황들은 하나같이 전부 범상치 않은 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경찰관들 앞에서 엉엉 울었다가 사탕을 받고 진정했더니 그 사탕이 사실은 눈알이었다거나…. 문제의 자판기 속 체리맛 음료. 달달하고 상큼한 맛을 기대했더니 썩었는지 비린내가 잔뜩 올라오는 피였다. 그 자리에서 모두 토해 버렸던 아다치는 후에 경찰관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음료, 돼지피라서 영 맛이 별로예요. 기분 나빠.”

 

 

그 다음 날에는 근방의 음식점에서 끼니를 해결해 보려고 했는데, 가츠동을 주문해서 신나게 먹다가 고기에서 머리카락과 치아로 보이는 무언가를 씹었다. 그리고 바로 귀가해서 또 토하고 엉엉 울었던 일.

이후로는 마트에서 섭취 가능한 식재료를 직접 구매해서 요리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 했더니 쓸데없이 건강은 좋아지더라는 씁쓸한 소감은 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면서 조금이나마 이곳의 생태에 대해 알아갈 때 즈음, 키사라기역에 찾아갔다가 대처를 잘못해서 역무원과 전력으로 추격전을 벌이기도 했었다.

역무원의 대처법은 이 과정을 몇 번 정도 반복하고 나서야 알아낼 수 있었으며, 그는 몇 번이고 마주쳐도 늘 처음 보는 것처럼 아다치를 대한다는 여담도 있었다.

그 이후, 이곳의 모든 주민들이 위험하다는 인식이 박힌 아다치는 어느 날 역에서 노파를 마주쳤다.

겁에 질려 울먹이며 벌벌 떨던 와중, 그녀가 다정하게 물려준 쿠키를 먹고 나서부터 친해지기 시작했다. 주민 중 병원 관계자와 경찰, 호텔의 관리소장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존재였던데다 무서운 외모와는 달리 위협도 되지 않아 의지하는 주민이라고.

 

수첩에 조금이나마 내용을 채워 보관함에 넣어 둔 것도 그때쯤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더 지나게 되자 가지고 있는 돈만으로는 장기 생활이 불가능해졌다. 돈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귀환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난처해진 상황.

아다치는 관리소장의 소개를 받아 다른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새로 얻은 직업은 인근의 놀이공원에서 캐스트로 근무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어트랙션의 조작이나 상태 파악은 물론, 이용 고객들에게 위치 안내를 해 주는 등 업무의 내용이 꽤 다양했다. 그러나 이것들 이외 가장 중요한 업무가 있었으니.

 

 

“… 중요한 업무가 따로 있었어?”

 

“응. 우리 같은 사람들을 찾아내서 돌려보내는 거야. 종종 영문도 모르고 흘러들어온대.”

 

“만약 발견되지 않으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거야?”

 

 

아다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른 이용객에게 들켜서 죽든가, 어트랙션에 탑승 후 정식으로 이곳의 주민이 되거나, 운이 매우 좋다면 어떻게든 살아남아…. 아직까지 후자의 경우는 없었기에 죽는 것밖에 답이 없다고 볼 수 있었다.

초반에는 이런저런 실수도 많이 했던 탓에 위험한 상황도 꽤 있었지만 그때마다 어떻게든 극복해서 견뎌냈다. 당시에는 동료로 일하던 외지인도 딱 한 명 있었기에 그와 친하게 지내며 아다치는 점점 공포에 무뎌져다 보니 언제부턴가는 농담까지 꺼낼 수 있을 정도로 이러한 일들에 무감각해졌다.
좀 다르게 표현하자면 말 그대로 겁대가리를 상실하게 됐다.

 

어쩌다 팔이 또 뜯겨도, 입이 찢어져도, 복부가 관통을 당해 내장이 쏟아져도, 하반신이 잘려도, 정신 오염에 노출되어 정신줄을 놓아도 필사적으로 수습하고 극복했다. 감각에 장애가 생겨 손가락의 개수가 헷갈리게 되어 스스로 잘라내기도 했다. 하지만 매번 살아남아 결국에는 적응했다.

정확히 말하면 싫어도 익숙해져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목숨을 포기해야 한다는 최악의 결말밖에 남지 않으니.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이 같은 고초를 겪는 것도 수없이 목격하며 그를 반면교사 삼는 일이 빈번했다.

이러한 사정들 탓에 돈을 많이 벌어도 모으기는 힘든 때가 반복됐지만 차차 적응하다 보니 병원에 재방문을 하는 일이 점점 줄어들면서 수입도, 소비도 안정되었다.

 

다만, 이후 수첩의 내용을 업데이트하고자 결심하고 있던 찰나…. 업무상의 문제로 인해 산 채로 두 눈을 뽑혀 버리는 참사가 벌어지고 말았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찾는 것도 불가능, 답이 없는 상황에서 별수 없이 시각을 포기한 채 여태까지 지내 왔다. 그로부터 약 2년을.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 말이야, 생각보다 훨씬 불편하더라. 먹는 것도, 씻는 것도, 걷는 것도 무엇 하나 쉽지가 않았거든. 인생 자체가 무너지는 기분이었어. 정말로 괴로워서…. 차라리 죽는 게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는 심정뿐이었고.“

 

”… 응, 정말 괴로웠을 것 같네. 하루 아침에 시각을 잃어버리면 누구라도 그럴 거야.“

 

”하지만 좋은 점도 있었어. 시각이 원인인 위협에서는 자유로워졌고, 끔찍한 것들을 보지 않아도 됐으니까.“

 

 

덤덤하게 털어놓는 아다치를 바라보며 쿠로사와는 안타까움과 슬픔을 넘어 경외심마저 들기 시작했다.

자신이라면 견뎌낼 수 있었을까? 아다치는 대답을 잇지 못하고 떨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쿠로사와를 향해 그저 웃어 주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는 쿠로사와가 걱정돼. 어떻게든 지금까지 버티고 있지만… 새로 시작하는 쿠로사와의 입장에서는 위험한 일들이 정말 많을 거야.”

 

“… 그건 알고 있어. 하지만 나는 반드시 아다치와 함께 돌아갈 거야.“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꼭 같이 돌아가자. 무사히.“

 

 

쿠로사와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다치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케이크는 걱정이 무색하게도 깔끔히 비워졌다. 정작 쿠로사와는 별로 손을 대지 않았음에도 아다치가 워낙 열심히 먹었던 덕분이었다.

어찌나 싹싹 긁어 먹었는지 닦아낼 크림이나 빵가루조차 나오지 않을 듯한 모양새였다.

그것을 깨달았는지 아다치의 뺨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 미안해, 쿠로사와. 내가 다 먹어 버린 것 같네.”

 

“괜찮아. 아다치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샀던 케이크니까. 맛있게 먹어 줘서 기뻐.”

 

 

쿠로사와의 대답에 아다치는 어쩐지 가슴께가 간질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자신의 생일을 기억해 주어서일까, 다정한 태도에 부끄러워진 탓일까.

어느 쪽이든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저 쿠로사와가 자신과 함깨 있어줌으로서 지금까지 자신을 힘들게 했던 외로움이 거짓말같이 사라졌으니까.

물론 쿠로사와에게 큰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쓸 셈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꽤나 의지하게 될 것 같다는 예감도 들었다.

 

 

 

 

 

 

기나긴 회포를 풀고 나서 잠자리에 들기 전, 아다치는 쿠로사와에게 자신과 같은 침대에서 잘 것을 제안했다.

쿠로사와는 당황했다. 당연히 여분의 이불을 이용할 줄 알았는데 아다치 쪽에서 먼저 권유를 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혹시나 싶은 마음에 예의상 한 번 정도 거절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같은 침대에서 함께 잔다는 사실 자체에 가슴이 미친듯이 두근거렸다.

 

 

“아다치가 불편하지 않을까 해서. 나 때문에 그럴 필요는 없어. 나는 괜찮아.”

 

“그래도 이왕이면 편하게 자는 게 좋으니까. 이 침대, 사이즈도 충분하고. 혹시… 같이 자는 게 불편한 거라면 내가….”

 

“아니야, 그렇지 않아. 아다치만 괜찮다면 나는 좋아. 전혀 상관없어.”

 

 

쿠로사와는 내심 깨달았다. 아다치, 밀당 잘하는구나. 

아다치가 홀로 내려와서 자는 꼴은 죽어도 볼 수 없던 쿠로사와는 행여나 낚싯줄이 거둬질까 덥썩 미끼룰 물었고, 보기 좋개 낚였다.

그렇게 나란히 눕게 된 둘, 평범하게 회사에 다니고 있을 때만 해도 이런 순간이 오게 될 줄은 둘 중 누구도 몰랐던 일이었다. 아니,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너무나도 생생한 꿈 같아서… 차라리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까지 뭉게뭉게 피어날 정도였다.

편하게 잠을 이루기엔 아다치도, 쿠로사와도 각자 들떠 버린 마음 탓에 이상하게도 눈이 말똥말똥했다. 함께할 사람이 생겼다는 것에 위안을 받은 덕분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아다치,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꿈에 그리던 짝사랑 상대와 동거를 하게 되어 자꾸만 설렘에 빠져드는 쿠로사와.

 

잠이 오지 않는지 조금씩 꾸물거리던 아다치가 이내 쿠로사와를 향해 돌아누웠고, 그를 느낀 쿠로사와 역시 심장이 크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 저기, 쿠로사와. 자고 있어?”

 

“응? 아니, 아직. 왠지… 잠이 오질 않아서.”

 

“나도 그래. 이상하게 잠이 안 오네.”

 

 

쿠로사와는 참지 못하고 아다치를 향해 돌아누웠다. 그렇게 나란히 누워 마주보게 된 두 사람.

짙푸르게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서로의 얼굴을 잠시 동안 응시하던 둘은 이내 어색해지는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동시에 실소를 터뜨렸다.

뭔가, 괜찮네. 쿠로사와의 기억 속 인상깊게 각인된 아다치의 한마디가 다시 들려왔다. 그때와 똑같은 목소리로.

그리고 이번에도 쿠로사와는 적절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단지 설레는 마음을 숨기고 예전처럼 의문을 표했을뿐.

 

 

“… 쿠로사와, 지금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응, 뭔데?”

 

“음, 역시 곤란하려나. 그게….”

 

 

좀처럼 시원하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쭈뼛거리던 아다치는 자신을 따스하게 바라보는 쿠로사와의 눈을 마주치자 잠시 할 말을 고르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속삭이듯 본론을 꺼냈다.

 

 

“안아 봐도… 돼? 잠깐이면 되니까.“

 

”어?“

 

”뭔가, 실감이 잘 안 나서. 내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게.”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보는 아다치, 쿠로사와는 대답 대신 먼저 그를 껴안아 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아다치가 자신에게 특별한 감정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아다치가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을지 순식간에 체감이 되었다고 할까. 여태까지 혼자서 모든 고난을 견디며 기약 없는 귀환만을 바라는 그 마음이 얼마나 고독하고 지옥 같았을지 느껴진 탓이었다. 지금은 그뿐이었다.

빈틈없이 자신을 꼬옥 안아 주는 쿠로사와에 아다치 역시도 이내 마주 껴안아 왔다. 그리고 그제서야 아다치는 실감할 수 있었다. 이 온기, 이 안정감. 이제 자신은 혼자가 아니었다.

 

쉽사리 진정이 되지 않는지 아다치는 쿠로사와를 놓지 않은 채 그렇게, 계속해서 온기를 느꼈다. 그리고 그의 어깻죽지에 얼굴을 묻으며 오랜 시간 동안 삼켜 왔던 심정을 토로했다.

 

 

“나, 쿠로사와가 보고 싶었어. 우라베 선배도, 후지사키 씨도, 롯카쿠도, 친구인 츠게도, 가족들도…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어. 돌아갈 수 없게 된다면,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다시 만나고 싶었어.“

 

 

갈수록 뭉개지는 아다치의 말 속에선 절절한 괴로움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홀로 낯선 곳에 떨어져 슬퍼할 여유도 없이 살아남기에만 급급했던 나날, 위협이 사라지면 지독한 고독함이 덮쳐 왔다. 그마저도 혼자 삼키고, 삭이다 보니 이전의 추억들과 평범했지만 나름대로 행복했던 과거는 점점 멀어져 괴리감을 더해만 갔다.

쿠로사와의 등장은 아다치의 과거 추억들이 꿈도, 거짓된 환상도 아니라는 증거 그 자체였다. 그랬기에 쿠로사와가 자신을 위해 준비했다는 케이크와 생일 축하에 더없이 감사했다.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도, 같이 돌아가자는 짧은 그 한마디를 아다치는 오래도록 기다렸으니까. 아주 사무치게.

 

쿠로사와는 제 품에 얼굴을 묻고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하는 아다치를 그저 인내심 있게 안아 줄뿐이었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한참을 묵묵히 그의 등을 토닥여 주고 쓰다듬어 주며 기꺼이 그의 심정을 나누었다. 그리고 속삭여 주었다. 이제 전부 괜찮다고, 꼭 함께 예전으로 돌아가자고.

 

… 응. 잔뜩 울음섞인 대답이 들려오고 나서도 한동안 흐느끼는 소리는 잦아들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밤은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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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아카 쿠로아다 동정마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