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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7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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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 틈새로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에 찰리 영은 기지개를 쭉 켜며 상쾌한 아침을 맞이한다. 아침이라는 단어 앞에 '상쾌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 있다는 것이 새삼 놀랍게 느껴진다. 피로에 찌들어 있는 뉴욕의 직장인 중 아침이 즐거운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을 테니까 말이다. 좋아하는 노래를 열창하며 샤워하던 찰리는 던컨에게 "드디어 네가 오늘 사직서를 낼 생각인가 보구나."라는 말을 듣는다. 그 정도로 오늘의 찰리는 잔뜩 들떠있다.





 

"정말이에요. 그 '비니 파지엔자'에게 스카우트 되었다니까요? 정확히는 선수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복싱 한 번 배워보면 어떻겠냐고 하는 제안이지만, 어쨌든 제 안의 재능을 알아본 거나 마찬가지죠."


"와우."




​​
 

하퍼가 눈을 땡그랗게 뜬 채 감탄의 한 마디를 내뱉더니 아이스 커피를 호록 마신다. 그 눈빛에는 '스트레스가 극에 치달아 현실도피를 할 생각인 것 같지만, 다 이해해요, 찰리. 사는 게 다 그렇죠, 뭐.'라는 생각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찰리는 그런 하퍼의 안타까워하는 반응도 눈치채지 못한 채 히죽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다.




 

"어쩌면 복싱 선수로서 데뷔를 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네요. 그때는 응원하러 와줘요. 지인 초대는 티켓이 조금 더 저렴하려나? 그건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멋진 모습을 보여줄 테니까요."




찰리가 허공에 주먹을 슉슉 날리며 폼을 잡자, 하퍼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웃는 얼굴로 "오늘 하루도 힘내요, 찰리. 월요일이 사람을 정말 망치기는 하네요."라고 말하며 커피가 담긴 텀블러를 허공에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쉽게 믿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하퍼마저 찰리가 고된 업무 때문에 정신을 놓은 사람인 것처럼 취급하고 있다. 굳이 하퍼가 아니어도 찰리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복싱 챔피언에게 복싱을 배우게 되었다!'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비슷한 반응을 보이겠지만 말이다.



하퍼가 돌아간 뒤, 찰리는 '비니 파지엔자'에 대해 검색을 해본다. 복싱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찰리로서는 막연하게 '복싱 챔피언'을 올림픽 국가대표랑 비슷한 느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복싱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알고 있는 인물이지만, 전혀 관심이 없다면 '그게 누구?'라고 되물어볼 정도의 위치. 하지만 그냥 찰리가 무지했을 뿐, 비니는 굉장한 사람이었다.




 

"헉...진짜? 와...세상에! 그게 가능해? 맙소사...천재인가? 와아..."


 



비니의 활약과 인기, 그가 복싱계에서 어떠한 위치의 선수인지에 대해 알아갈수록 찰리는 시트콤에서나 나올법한 극적인 감탄사만 내뱉게 된다. 이렇게나 대단한 사람을 두고 '유명한 복싱 선수'정도로 축약한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져 찰리는 뒷목이 땅겨오기 시작한다. 그런 굉장한 선수를 상대로 실수든 뭐든 주먹을 날린 것은 둘째 치고, 시답잖은 농담을 하거나 제 주먹의 위력에 대해 우쭐댔다는 사실이 민망했다. 실제로 비니에게는 졸다가 버스 창문에 이마를 '콩' 가볍게 부딪힌 정도의 충격밖에 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던컨이나 하퍼가 찰리의 말을 듣고 '헛소리' 취급을 하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비니, 어제 말했던 복싱 하기로 한 것 말인데요. 다시 생각해 봐도 될까요? 역시 저한테는 무리일 것 같아요.]




찰리는 점심시간 내내 머리를 감싸 쥐고 고민한 끝에 비니에게 문자 메시지 한 통을 보낸다. 복싱 챔피언에게 복싱을 배운다는 것은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찰리는 어디까지나 평범한 '직장인'일뿐이다. 괜한 생각일지 몰라도 그 '비지 파지엔자'에게서 복싱을 배운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인터넷에 신상이 퍼지는 것은 물론 언론이나 팬들에게 불필요한 관심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저 비실비실한 몸은 뭐야? 우리 같이 복싱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비니의 제자가 되지 못하는데 저 인간은 뇌물이라도 먹였어? 아니면 연줄이라도 있는 거야?'라든가 '비니 파지엔자의 안목이 끔찍하다는 사실만 알게 되었군요. 저 찰리 영이라는 사람은 운동 경험도 없는 평범한 직장인이더라고요. 그의 월급이 얼마인지 아시나요? 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같은 이야기가 흔히 돌아다닐지도 모르는 일이다. 찰리는 절대 그런 것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일상에서 소소하게 즐길 수 있는 자극으로 충분하지, 과도한 관심과 비난은 안 그래도 너덜너덜한 찰리를 무너뜨릴 것이 분명했다.



 

지이잉-



 

핸드폰이 울리고 찰리는 화면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곧장 "여보세요?"하고 전화를 받는다. 찰리에게 걸려 오는 전화의 90%가 릭이었으므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곧장 받는 것이 보통이고 당연했다. 하지만 그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예상치도 못한 챔피언의 목소리였다.



 


 

"찰리? 지금 많이 바빠요?"
 

"비니?? 어, 아뇨. 지금...잠깐이라면 전화할 수 있어요."
 

"그럼 잠시만 저랑 이야기할래요?"
 

"잠깐만요. 자리 좀 옮기고요."




찰리는 급히 비상구의 계단으로 달려 나온다. 지금 당장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전화를 받을 수 있는 곳은 그곳뿐이었다. 찰리는 두근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지만, 차분하게 "조용한 곳으로 왔어요. 무슨 일이에요?"하고 되묻는다. 사실 비니가 무슨 일로 전화했는지는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까짓것 복싱 배워보죠!'하고 패기 넘치게 대답해 놓고, 날이 밝자마자 '역시 저한테는 무리일 것 같아요'라고 문자를 보냈으니까 말이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것만큼 치사한 것은 없지만, 어제의 찰리는 신중하지 못했다.




 

"문자 보고 걱정되어서요. 무슨 일 있어요?"
 

"네? 아뇨. 그냥 어제는 너무 성급했던 것 같아서요."
 

"저 이미 화면 캡처해서 배경 화면으로 해뒀는데..."
 

"미안해요, 비니. 이왕이면 재능 있고 훌륭한 복싱 선수를 가르치는 게 어때요? 바쁜 시간 쪼개면서 저를 가르치는 것보다는 좋을 거예요."
 

"왜 그런 말을 해요?"
 

"네? 으음...비니는 바쁘잖아요? 훈련도 해야 하고, 컨디션 관리도 해야 하는데 누군가를 가르칠 거라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 선수를 육성하는 쪽이..."
 

"찰리, 저는 미래의 챔피언을 만들기 위해 누군가를 가르치려는 게 아니에요. 저는 찰리가 '취미'로 복싱을 즐겨봤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걸요? 복싱 챔피언이 굳이 자기 시간을 써서 한 사람의 취미 복싱을 가르친다니 누가 믿겠어요."
 

"찰리, 이건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온전히 제 선택일 뿐이에요. 제가 찰리에게 복싱의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서 그래요. 길게 붙잡아둘 생각은 없어요. 그냥...잠깐이라도 좋아요."




 

전화 너머로 들리는 비니의 목소리에 찰리의 마음이 다시 흔들린다. 타고나길 귀가 얇은 탓도 있지만, 저 목소리를 듣고 어떻게 냉정히 '아뇨, 전 안 할래요'라고 할 수 있겠는가. 분명 비니의 전생은 사랑스러운 강아지였을 것이다. 낑낑대며 품에 파고들고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원하는 것을 어떻게든 얻어내는 강아지. 물론 그 두툼한 앞발에 한 대 맞으면 엄청 아프겠지만 말이다. 찰리는 엉뚱하게도 복싱 글러브를 앞발에 끼운 강아지의 모습을 상상하며 히죽 웃는다. 하지만 이내 이어지는 비니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이번 주 토요일 저녁에 경기가 있어요. 보러 와줄 수 있어요?"
 

"네? 아, 챔피언 벨트 방어전이 있다고 했죠."
 

"찰리가 응원해 주면 기쁠 것 같아요."
 

"으음, 저는 복싱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는데..."
 

"때리고 막고 쓰러트리고. 이 세 가지만 알아도 충분해요. 초대석 티켓을 드릴게요. 경기 한 번만 보고 다시 생각해 보면 안 될까요? 그러니까 찰리..."




 

또다시 찰리의 머릿속에 울망울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강아지의 모습이 비니와 고스란히 겹친다. 복싱 챔피언은 이렇게 정신 공격도 할 수 있는 것일까? 찰리는 작게 앓는 소리를 한 번 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완전한 K.O패였다.






 

정신없이 일에 치이며 여기저기 구르던 찰리에게 토요일이 찾아왔다. 이른 아침부터 릭에게 '월요일까지 저번에 부탁했던 서류 메일로 보내둬.'라는 문자를 받았지만, 찰리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핸드폰 화면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물론 서류 작성은 절반 정도 미리 끝내뒀다. 찰리는 복싱 경기를 보러 갈 때 입을 옷을 신중하게 고르기로 한다. 하퍼가 야구 경기를 보러 갈 때 정장 차림의 찰리를 보며 질색했던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정장 정도면 잘 차려입은 것 아닌가?' 싶어서 옷장 안에서 셔츠 몇 장을 꺼내는데, 던컨이 "지금부터 만날 사람이 네 철천지원수라면 적절한 선택이야. 너와 함께 나란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평판은 바닥을 찍을 테니까."라고 말하며 꺼내둔 셔츠를 옷장 깊숙한 곳에 처박아 버린다.



 

결국 던컨 픽의 심플한 폴로셔츠와 어두운 색의 청바지를 입은 찰리는 택시를 타고 비니가 알려준 경기장으로 향한다. 꽃다발 같은 것을 사가야 하나 잠시 망설였지만, 괜히 민망한 상황이 연출되지 않도록 빈손으로 가기로 했다. 관중석에 앉을 때까지도 찰리의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응원하는 것은 괜찮던가? 상대 선수에게 야유하는 것은 비매너일 것 같은데. 심판에게 항의하는 것은 코치만 할 수 있었나? 이럴 거면 사전에 록키라도 몇 편 보고 올 걸 그랬다. 찰리는 잔뜩 긴장한 채 주위를 둘러본다. 의외로 복싱을 보러 온 관객들은 평범해 보였다. 당연히 우락부락 터프한 인상의 사람들만 보러 올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비니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인기 있는 복싱 챔피언임을 새삼 느끼며 찰리는 링 위를 바라본다.



 

잠시 후, 아나운서의 인사말과 함께 비니와 상대 선수가 링 위에 오른다. 비니를 상대할 선수 역시 슈퍼 미들 웨이트급의 선수이지만, 어째서인지 훨씬 체격이 크고 묵직해 보인다. 아슬아슬하게 라이트 헤비급에는 도달하지 않는 선수일까? 찰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비니를 바라본다. 그리고 곧장 그와 눈이 마주쳐 화들짝 놀란다. 비니는 씩 미소를 짓더니 그를 향해 윙크했다. 근처에서 달콤한 한숨 소리가 연달아 터지는 것을 보면 팬 서비스인 것일까? 역시 복싱 챔피언은 이런 쪽으로도 프로인 것 같다. 찰리는 응원하는 의미로 작게 파이팅 포즈를 취했고, 비니는 그것을 본 것인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 똑같은 자세를 한다.



 

이윽고 '대앵-' 하고 시합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경기장에 울린다. 찰리는 주먹을 꽉 쥔 채 숨을 죽이고 비니의 승리를 바라며 시합에 집중한다. 상대 선수의 주먹이 비니의 뺨이나 턱을 칠 때마다 찰리는 저도 모르게 "악!"하는 소리를 내지른다. 하지만 근처에 있던 관객들 역시 "안돼!"라든가 "막아!"같은 말을 내뱉는 걸 보면 이 정도의 반응은 보통인 모양이었다. 역으로 비니가 상대 선수에게 멋진 스트레이트를 날렸을 때, 찰리는 몸을 들썩이며 손뼉을 치거나 자기가 한 방 먹이기라도 한 것처럼 주먹을 흔들며 뿌듯해한다. 



 

퍽, 하고 제법 묵직한 공격이 비니의 왼쪽 뺨을 후려치고 비니는 휘청이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선다. "으악, 비니!" 찰리가 비명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종소리가 울리고 비니는 링 코너에 준비된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주먹이 잘못 스친 것인지 비니의 뺨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 찰리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며 초조하게 그를 바라본다. 어디 크게 다친 것은 아닐까? 시합은 왜 멈춘 거지? 비니가 진 건가?





 

"1라운드는 조금 밀리는 것 같은데..."
 

"괜찮아. 파지엔자는 후반부에 폭발하는 타입이잖아. 지금 적당히 상대방을 견제하면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는 중일걸?"
 

"녹아웃만 당하지 않으면 이길 수 있다는 건가?"
 

"녹아웃? 비니 파지엔자가? 어지간해서 그럴 일은 없어. 뭐, 굳이 저쪽이 이길 가능성을 보자면 판정승 정도겠지."





 

찰리는 귀를 기울이며 근처 관객의 이야기를 듣는다. 룰을 잘 모르는 탓에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비니가 질 리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조금 안심이 된 찰리는 목소리를 높여 "비니! 지지 마요! 파이팅!!"하고 외친다. 평소였으면 주변의 눈치를 봤겠지만, 잔뜩 달아오른 경기장의 분위기 때문인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그 목소리가 닿은 것일까. 비니는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한쪽 주먹을 들어 올려 흔들었다. 우레와 같은 함성과 함께 종소리가 울리고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루스터행맨 루행크오 비니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