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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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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정대만이 이상하다.

본격적으로 이상해진 건 얼마 전 데이트 때 귀엽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했을 때부터인 것 같다. 아. 그런데 그것도 이유가 있었다. 양호열이 아무리 뒤에서는 광견이라고 불린다고 해도 이유 없이 애인한테 정색하는 미친놈은 아니거든. 
변명을 해보자면, 그 때의 양호열은 상당히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정대만과의 이별을 대비하려고 해도 점점 더 이별이 무서워지기만 하지 무감각해지지는 않더라고. 궁지에 몰린 양호열은 매일 밤 잠이 들기 전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정대만의 얼굴? 대만 군이 잘생기긴 했지. 웃음? 웃을 땐 또 엄청 귀여워. 애정 표현? 풍부하다 못해 넘쳐 흐르지. 음. 결론을 내보자면 아무래도 문제는 애정 표현인 것 같다. 그래. 이것도 너무 받는 습관을 들이면 나중에 없을 때 티가 날 거야. 그러니까 이제부터 받지 않는 습관을 들여야지. 같은 되도 않은 이기적인 생각을 좀 했더랬다.

그래서 양호열이 후회했냐고? 했다. 그것도 엄청나게 했다. 
정대만은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한 채로 애정표현이었노라 변명했었다. 꽤나 민망했는지 볼부터 시작해서 얼굴 전체가 벌개져서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은 미안하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사과했었다. 그 상처 받은 눈을 마주했을 때는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좀 더 부드럽게 거절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양호열은 버리고 버려지는 데에만 익숙했지, 상처를 어루만지는 방법 따위에는 그러지 못해서 결국은 또 정대만을 남겨두고 먼저 돌아섰다.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시선은 애써 무시했다. 사실은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빌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러는 순간 금이 간 관계를 인정하는 것이 되어버리잖아. 난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과 화해하는 법 같은 건 몰라. 차라리 모르는 척을 하면 이 관계를 더 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어리석은 양호열은 비겁하게도 회피하는 걸 선택했다. 졸업식이 아니라 지금 헤어지게 되면 양호열은 정말 엉엉 울어버릴 지도 모르니까.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변해버리는 건 예상 못했는데...
그냥 조금만 거리를 두고 싶었을 뿐이었다. 정대만이 양호열을 두고 떠나도 아, 어쩔 수 없지. 하며 웃어 넘길 수 있을 정도로만. 딱 그 정도로만. 하지만 계산이 틀렸던 걸까... 



정대만은 이제 밖에서는 양호열의 손을 잡지 않는다.

어쩌면 양호열도 마음 한 켠으로는 이미 계획과는 너무도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대만은 나란히 걷다가 서로의 손이 한 번 스치기라도 하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거리를 벌렸다. 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잡았던 손인데 이제는 한 번 잡으려 치면 정대만의 상처받은 얼굴이 자꾸 떠올라 양호열도 덩달아 머뭇거렸다. 그러다 한 번은 초조함을 견디지 못한 양호열이 먼저 용기를 낸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정대만은 어색하게 웃었고 잡힌 손을 몇 번 꼼지락 거리기는 해도 마주 잡아주지는 않았다. 양호열은 너무나 불안했다. 양호열의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진짜로 잃게 된다고. 그래서 양호열은 큰 맘을 먹고 대만 군.. 내가 예전에.. 하며 운을 뗐다. 하지만.


"어? 양호열!!"


운도 더럽게 없지. 여기는 백호군단이 주로 다니는 길도 아닌데 하필 저 멀리서 이용팔이 양호열을 발견해 목청을 높여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정대만은 많이 놀랐는지 헉! 소리를 내며 손을 뿌리치고는 


"호, 호열아... 나 갈게.. 그.. 나랑 있었던 건 어... 음... 내가 너한테 나쁜 말을 해서 그거 때문에 좀 싸웠다고 해. 알겠지?"


하고 허둥지둥 자리를 떠나버렸다.


"호열아? 저기 정대만 아니야? 둘이 또 싸웠냐?"


싸웠냐고? 정대만은 나를 좋아하고, 나도 정대만을 좋아하는데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아니..."


아. 나 때문이지 참.


"너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백호군단이 걱정을 가득 담아 물었다. 

왜. 내가 어떤 표정인데. 어떤 표정이길래 그렇게 걱정들을 해.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이 메여 대답하지 못한 양호열은 자기 얼굴이 궁금해졌다. 내가 그랬잖아. 비밀연애를 하자고. 정대만도 그에 맞게 행동해줬으니 웃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왜 자꾸 슬프냐, 용팔아. 

양호열은 멍하니 얼굴을 쓰다듬었다. 만져보지 않아도 입꼬리가 내려갔을 게 분명하지만 그냥. 그러다 문득 비어버린 손을 보았다. 온기가 떠난 손이 아프다. 당신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이렇게 아플 줄 알았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텐데. 

나는 내가 떠나보낸 당신이 그립다.



***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했던가.

양호열이 정대만과 염병천병을 떨며 깨를 볶든 냉기를 풀풀 흘리든 어쨌든 간에 지구는 잘도 돌았고, 따라서 세월도 잘만 흘러갔다. 지은 죄가 있는 양호열은 꼴에 양심이 있는지라 섣불리 먼저 찾아가지 못했고, 변덕쟁이 연하 남친의 마음이 언제 또 변할지 몰라 눈치만 살피고 있는 정대만도 양호열을 찾아가지 못했다. 남들이 양키니 뭐니 손가락질을 해도 우정 하나만큼은 뜨거웠던 백호군단이 양호열의 그런 불편한 심기를 알아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어떤 농담을 해도, 어떤 장난을 쳐도, 심지어 우연히 고백하다 차이는 남학생을 봐도 넋이 나가있던 양호열을 위해 백호군단은 주말에 양호열의 집에 깜짝 방문을 하기로 결정했다. 


"짜잔- 서프라이-즈-!!!"


네 돈, 내 돈이 없듯이 네 집, 내 집도 없는 백호군단인지라 양호열의 집 열쇠는 공공재가 된지 오래였다. 초인종도 누르지 않고 열쇠로 문을 따 시끌벅적하게 들어갔더니 집주인은 영 잠을 자지 못했는지 눈 밑이 까만 상태로 친구들을 맞이했다. 으.. 양호열 꼴 좀 봐라. 요즘 왜 저러냐 진짜. 생긴 거와는 달리 은근히 깔끔쟁이인 이용팔이 혀를 끌끌 찼다. 친구의 몰골을 도저히 그냥 볼 수 없었던 백호군단은 사람은 햇빛을 보고 살아야 한다는 명목으로 양호열을 강제로 집 밖으로 끌고 나왔다. 처음에야 왜 이렇게 사람을 못 살게 구냐며 투덜댔던 양호열이었지만 광합성이 기분 전환에 정말로 도움이 되었는지 우울하다 못해 절망적이었던 기분이 희망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덤으로 용기도 좀 얻었고.

월요일에는 대만 군을 찾아가서 사과하는 거야. 그리고 떠나지 말아달라고 부탁해야지.

생각도 긍정적으로 바뀌었고 최근 며칠간 끊었던 시덥잖은 농담도 몇 마디 주고 받으니 양호열의 기분이 점점 더 풀려갔다. 사과문의 시나리오를 짜고 몇 번 머리속으로 재생했더니 벌써 정대만이 용서라도 해준 것 마냥 기분이 들떴다. 그래서 웃었다. 백호군단이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괜히 이곳 저곳을 툭툭 쳐대고, 헤드락을 걸어대도 다 잘 될 것만 같아서.

그러다 머리에 있는 강백호의 손을 치우고, 목에 감겨있는 이용팔의 팔도 풀고 굽혔던 허리를 폈다. 입가엔 함박 웃음을 매단 채로. 즐겁잖아. 이렇게나 저를 생각해주는 친구들이 있고 월요일에는 좋아하는 사람과도 다 잘 될 테니까.

양호열은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머리와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좁은 골목에는 5명의 시커먼 남고생들이 내는 웃음소리만 가득했다. 딱 양호열과 정대만이 눈이 마주치기 전까지만.


"어어.."


당황스러움에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에서는 차마 문장이 되지 못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분명히 눈이 마주쳤었는데... 돌아서는 정대만을 본 양호열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야, 야!! 호열아!!! 숨 쉬어!! 너 왜 그래!!"


갑자기 숨을 쉬지 못해 새파랗게 질린 양호열 때문에 백호군단은 황급히 등을 두드거나 팔을 주물럭 거렸다. 덕분에 숨통이 트여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내뱉었지만 양호열의 안색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대만이 떠난다. 아직 떠날 때도 아닌데.

주마등이 스치듯 양호열의 눈 앞에 누군가의 등이 스쳐 지나간다. 엄마, 아빠, 고모, 할아버지.. 그리고 정대만..


"엥?! 양호열! 너 우냐?!"


중학생 때 홀로 고등학생 7명을 상대하다 팔다리가 부러져 병원에 입원했을 때조차 우는 일이 없었던 친구의 눈물을 본 노구식이 경악을 하며 소리쳤다. 덩달아 옆에 있던 나머지 백호군단들도 허둥거렸다. 본디 양호열의 입은 백호군단의 몸무게를 합친 것보다 더 무거워서 쉽사리 열리는 법이 없었다. 힘들면 어련히 알아서 얘기해주겠지 하고 기다렸던 게 잘못이었을까. 네 쌍의 눈동자가 서로 눈치를 보며 지진이 일어난 듯 흔들렸다.


"구식아, 내가 너무 잘못했는데 어떡하지.. 이대로 진짜 가버리면 난 어떡하냐.."


아프다.
애써 부정하려 했던 잘못이 입 밖으로 나와 버리자 너무도 아팠다.


"가긴 누가 가는데?"

"우리 모르는 새에 실연 당했나.."

"뭔 소리냐, 이게..."

"..."


또 다시 넋이 나가 정대만이 떠난 빈자리만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는 양호열을 본 백호군단이 어쩔 줄을 몰라하며 쑥덕거렸다. 양호열의 양손이 덜덜 떨렸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더니 그건 다시는 날 보지 않겠다는 말이었어? 

정대만이 양호열을 두고 떠난다. 아직 이별에 대한 어떤 준비도 하지 못했는데. 

그 와중에 강백호의 표정이 묘했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의 눈물인지라 잠시 당황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답지 않게 금방 평정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숨이 가빠 헐떡이는 양호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백호는 난데없이 양호열의 등짝을 짝-! 갈겼다.


"배, 백호야..!!!!"

"야.. 너 왜 그러냐... 안 그래도 얘 상태도 안 좋은데..."


골목을 가로지르는 파열음에 혼비백산한 백호군단이 강백호를 말렸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강백호는 양호열의 양 어깨를 붙들고는


"양호열!!!! 나 너 그렇게 비겁한 놈으로 안 봤다. 잘못했으면 빌어!! 떠날 것 같으면 붙잡아!! 질질 짜고 있는다고 뭐가 달라지냐!"


하며 양호열을 노려보았다. 여기서 더 지체하면 당장이라도 박치기를 해버릴 것처럼.
아무리 넋이 나가 있어도 무시할만큼 작은 고통은 아닌지라 양호열은 정신이 번뜩 들었다.


"만만이 그렇게 모진 사람 아니야.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서 빌어."


강백호의 입에서 의외의 이름이 나오자 백호군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만만이? 정대만? 정대만이 갑자기 왜? 둘이 뭐 있었어? 강백호와 양호열을 제외한 나머지는 서로 의문이 가득 담긴 눈빛을 주고 받았다. 다른 건 다 차치하고서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둘의 관계를 강백호 혼자 알고 있었다는 게 꽤나 충격이었다. 역시.. 야생적인 본능..!

강백호의 일갈을 들은 양호열은 옷소매로 눈물을 벅벅 닦았다. 그러고는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미안하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정대만이 사라진 곳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 시간.

정대만은 털레털레 왔던 길을 되돌아 가는 중이었다. 괜히 울컥하는 가슴께를 벅벅 긁으며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말이다. 뭐, 원래 양호열의 우선순위 리스트에서 자기 자리가 상위권에 있지는 않은 건 알고 있었으니 이것도 그냥 하나의 에피소드로 치부하면 되겠지 싶었다. 그래도 아는 척이라도 할 걸 그랬나. 혹시 반가워 해줄지도 모르고.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니니까... 에이. 괜히 그랬다가 또 한 소리 들을라. 접자, 접어. 

정대만은 고개를 몇 번 흔들고 쓸 데 없는 잡념을 털어내고는 그래도 둘만 있을 때는 잘 해주니까 다음 주에는 요즘 무슨 일 있냐고 한 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괜히 슬퍼하며 머리 싸매고 있는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고.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았다. 애초에 양호열이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타입도 아니었고, 어쨌든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니 자신과 사귀겠거니 치부했다. 원체 회복력이 좋은 정대만인지라 이제는 아예 콧노래까지 부르며 마침 근처에 있던 편의점에 들렀다. 그래도 양호열 덕분에 저녁 산책 했네 따위의 생각이나 하며.

늘 마시던 이온음료를 고르고 계산대로 가려 하니 정대만의 눈에 매대 한 켠에 있는 랜덤 열쇠고리 뽑기 코너가 눈에 띄었다. 검은색의 토끼 캐릭터가 마침 누구를 연상시키는 바람에 정대만은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통을 들었다 놨다 하며 신중히 2개를 골랐다.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조금 놀랐지만 내일 양호열이랑 같이 뜯어봐야지 하는 생각에 신나게 비닐봉지를 휘두르며 편의점 문을 열고 나왔다.

응..?
아니, 잠시만. 내가 눈이 어떻게 됐나...

정대만은 쥐고 있던 비닐봉지를 손목에 걸고 두 눈을 거칠게 비볐다. 그리고 또 깜빡깜빡 눈을 깜빡이다가, 또 눈을 비비고.. 하지만 양쪽 2.0의 시력이 잘못되었을 리는 없으니 아무리 봐도 편의점 앞에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은 양호열이 맞았다.


"양호열!!!!!"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양호열이라는 걸 인식한 순간 정대만은 비닐봉지를 내팽개치고 양호열에게로 달렸다. 그 양호열이 저렇게 울다니,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어디가 아픈 걸까. 안 좋은 일이 일어난 건 아닐까. 아무리 가오를 잡고 싸움질이나 하고 다닌대도 고작 16살짜리일 뿐인데...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무슨 일이야!!"


정대만이 양호열의 몸 이곳저곳을 주무르며 다친 데는 없는지 확인했다. 양호열은 얼마나 울었는지 눈 근처가 온통 벌개져서는 짓무르기 직전이었다. 초점 없던 양호열의 눈동자가 정대만을 향하자 발간 눈에서는 더욱더 많은 눈물을 쏟아냈다.


"무슨 일이냐니까!!!!!"


평소 양호열의 눈치를 보느라 주눅 들어있던 정대만 답지 않게 목소리가 커졌다. 그도 그럴 것이, 양호열이잖아. 약한 모습을 보일 바에는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양호열이라고. 말 없이 눈물만 흘려대는 양호열이 답답했던 정대만이 축 처진 어깨를 잡고 흔들며 다그치자 땀에 젖은 몸이 잠시 휘청거렸다. 그에 깜짝 놀란 정대만은 양호열을 품에 끌어 안았다.


"무슨 일인데, 대체!!"

"대만 군..."

"왜, 왜!! 어디 아파?! 병원 갈까?!"

"나.. 나..."

"뭔데!!!"

"흑.. 내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 그딴 짓 다시는 안 할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날 떠나지 말아요..."


양호열이 끝내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정대만은 잠시 눈 앞이 아득해졌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 맞는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그러니까 지금 내 품 안에서 울고 있는 이 생명체가 아무도 없을 때는 잘 해주다가 누구 한 명이라도 있으면 모르는 사람보다 더 매몰차게 구는 양호열이 맞는 거지..?
버퍼링이 걸린 정대만이 말이 없자 겁에 질린 양호열은 더욱 세게 정대만을 끌어안고 미안하다며 잘못을 빌었다.


"자, 잠깐만 호열아.."


정대만은 차분한 대화를 위해 양호열과 살짝 거리를 벌렸다. 그랬더니 기겁한 양호열이 팔에 잔뜩 힘을 주고 정대만의 품을 더 파고들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이제 정대만의 등에는 식은 땀이 줄줄 흐르고 두 눈에는 동공 지진이 일어나고 있었다.


"야, 야.. 잠시만. 잠시만..!"

"흑.. 대만 군.. 나.. 나 밀어내지 마.. 나보고 어리다고... 끅.. 했잖아... 귀엽다고 했잖아... 흑... 그걸로 봐주면 안 되는 거야..?"

"아니.. 그러니까 얘기를 좀 하자고.. 누가 밀어냈다고 그러냐..."


양호열은 자신과 정대만의 사이에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정대만은 양호열이 진정될 때까지 등을 토닥여 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마 최소 편의점에 손님 열 명 정도는 들락날락 했을 거다. 그다지 뻔뻔하지 못한 정대만은 아무리 양호열이 오열중이더라도 길 한복판에서 시커먼 남자 둘이 안고 있는 모습을 보여줄 생각은 없었기에 조심스럽게 골목으로 이동했다. 양호열은 걸어가는 와중에도 정대만과 조금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서 결국은 둘이 얼싸안은 채로 슬금슬금 움직였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도 이 때는 조금 웃음이 났는데, 눈치 없고 웃음 많은 정대만이지만 분위기 파악 정도는 할 줄 알아서 볼 안 쪽을 씹으며 필사적으로 참았더랬다.

정대만의 쇄골께와 가슴팍이 축축하다 못해 명치 너머까지 젖어들어갈 때 쯤, 들썩거리던 어깨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되어가는 듯 했다. 벽에 기댄 채로 양호열의 등을 토닥이던 정대만은 어쩐지 가오에 살고 가오에 죽는 양호열이 우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본인 입으로 직접 들어야겠지.


"이제 왜 우는지 말해주면 안 되냐."

"..."

"더 울고 싶으면 더 울어도 되고."

"..."


정대만이 토닥이던 걸 멈추고 양호열을 꽉 끌어안았다.


"난 너랑 안고 있는 거 좋으니까."


그 말에 양호열이 멈칫했다. 그리고 눈물이 식어 차가웠던 정대만의 가슴팍이 새로운 눈물에 또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아. 내가 괜한 말을... 정대만이 한숨을 삼켰다.


"..미안해요..."


한참을 더 울던 양호열이 드디어 입을 뗐다. 코가 잔뜩 막혔는지 코맹맹이 소리에다가, 킁 하며 간헐적으로 코 먹는 소리에 더해 훌쩍거림까지.. 정대만은 이제 양호열의 울음도 그쳤고 하니 웃어도 되지 않을까 싶어 스물스물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출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유일하게 그걸 볼 수 있는 양호열은 정대만의 가슴팍에 파묻혀 있으니까. 그리고 무게 잡기 바빴던 연하 남친이 좋아하는 마음이 버거워서 엉엉 울고 있는데 웃음이 안 날리가.


"너 이래놓고 귀엽다고 하지 말라고 하면 그건 반칙 아니냐?"

"..그 말은 취소할게요... 미안해요...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양호열이 한 번 더 훌쩍였다.


"이제 말해 봐. 왜 울었는지."

"..."

"더 울 거야?"

"아뇨.."

"그럼?"

"..."

"말 할 때까지 기다리지 뭐."


정대만의 다정한 목소리에 양호열은 입술만 달싹였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 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물론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말해줄 거지만 조금이라도 덜 못나 보이고 싶어 첫 마디를 떼는 것 조차 버거웠다.

그 때였다.


"너 정말 날 좋아하는 구나."


머리 위에서 웃음기가 가득 담긴 목소리가 들렸다. 
아, 내가 또 실수를 했구나. 다른 어떤 말보다 이 말을 먼저 했어야 했는데. 그러고 보면 당신은 늘 나보다 빨랐지. 고백했던 것도.. 늘 먼저 다가왔던 것도.. 이렇게 비겁한 내가 뭐라고.
자책하던 양호열은 눈물을 닦고 드디어 정대만의 가슴팍에서 얼굴을 떼고 정대만과 눈을 맞췄다. 애정이 넘실대는 두 눈이 올곧게 양호열을 직시했다.


"대만 군... 내가.. 정말 많이 좋아해요..."


그랬더니 양호열의 불어터진 얼굴을 본 정대만은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아하하 폭소를 터트리고는 눈가에 입을 맞추며 "응. 그리고?" 하며 물었다.


"대만 군이 싫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당신이 날 떠나는 게 너무 무서워서..."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널 왜 떠나?!"

"몇 달만 있으면 대만 군이.. 졸업.. 해버리니까..."

"뭐?! 너 내가 졸업하면 헤어질 생각이었던 거야?!"


정대만이 배신감 어린 눈으로 양호열을 책망했다. 요 쬐끄만한 머리로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니... 그래서 비밀연애 어쩌고 했던 건가? 내가 사라지면 애초에 없었던 일로 하려고?!


"야! 너 진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난 졸업 후에 너랑 같이 살 집도 알아봤는데! 뭐, 물론.. 내가 위로 가버리면 당장은 무리지만... 그래도 너 졸업하면 같이 살려고 했단 말이야!"

"..."

"그리고... 난 너 엄청 좋아해서 절대 헤어지기 싫은데... 넌 아니냐..?"


양호열은 멍하니 정대만을 바라보았다. 정대만은 자기가 말하고도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마치 고백했던 그 날처럼. 또 다시 울컥해 눈물이 차오르려 했으나 양호열은 애써 꾹꾹 눌러 담았다. 그리고는 또 "미안해요.." 하며 정대만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우리 그럼 이제 비밀연애 아닌 거지?"

"응..."

"나 너 귀엽다고 막 머리 만지고 그런다?!"

"응... 볼 때마다 해도 돼..."


정대만이 양호열을 끌어안은 채로 또 귀엽다며 와하하 웃었다.



그리고 양호열이 어렸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니까 이번엔 대만이가 눈물 찔끔해서 호열이가 달래줬다네요. 


 



<소소한 에필로그 1>

"야, 근데 백호야. 너 호열이랑 대만 군이랑 그렇고 그런 사인 거 어떻게 알았냐?"

"그러게. 너 진짜 천재, 뭐 그런 거냐?"

"핫핫핫! 당연히 이 몸은 천재지!!!"


강백호는 영원히 천재로 남기 위해 양호열과 정대만이 체육관 뒷편에서 입을 맞추고 있는 걸 봤다는 얘기는 평생 비밀로 남겨두었다.



<소소한 에필로그 2>

"으.. 이거 깨진 건 아니겠지.."

"뭔데요?"

"오! 안 깨졌네. 짠! 이거 봐봐!! 너 닮았지 않았냐?"

"..."


정대만이 검정색 토끼가 그려진 플라스틱 통을 자랑스레 내밀었다. 
대만 군의 눈에는 내가 이렇게 귀엽게 보이는 걸까. 그렇게 못되게 굴었는데도.


"너랑 까보려고 두 개 샀는데 지금 까볼까?!"

"응. 좋아요."

"좋아. 앉아 봐. 자, 깐다?! 하나, 둘, 셋!! 엥?"

"음.. 토끼가 울고 있네..."

"하하하! 야 이거 딱 넌데?! 내가 가져야지~"

"다음 거 까 봐요. 뭐 나오나."

"이건 네가 까 봐."

"음... 하트하는 토끼네."

"이건 너 가져라. 열쇠 줘 봐."


양호열이 스쿠터 열쇠와 집 열쇠가 달려 있는 열쇠고리를 내밀었다. 정대만은 인상을 쓰며 짧은 손톱으로 열심히 링 사이를 벌려 열쇠를 끼워 넣었다. 그러고는 검지 손가락에 링을 끼우고 빙글빙글 돌리며 또 히죽 웃었다.


"임마. 나 없어도 대신 얘가 계속 사랑한다 말하는 중인 거다. 알겠냐?"

"응..."


대만 군은 보기보다 로맨티스트구나. 부끄러운 말을 잘도 하네.
양호열이 얌전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소소한 에필로그 3>

월요일부터 갑자기 양호열이 정대만한테 들이대기 시작해서 백호군단 제외한 북산고 애들이 전부 또 둘이 한 판 뜨는 거 아냐?! 이 생각에 긴장타고 있었는데
양호열은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대만 군~" 하면서 정대만 불러대고, 정대만은 얼굴 벌개져서 실실 웃으며 그거 받아주고 있어서 다들 속으로 커퀴벌레는 다 꺼지라고 욕을 했다나 뭐라나...



자고로 우는 양호열은 불어터져야 제 맛!

호댐 호열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