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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31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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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썰 있음!!




영원히 너만을 사랑할게.


저 말을 처음 들었을 때가 언제였더라.

기억을 더듬어보니 언젠가 양호열의 원룸에서 다같이 늘어져 있던 도중에 이용팔이 불법 복제 비디오를 들고 와서는 이거 재밌다더라. 하며 비디오 플레이어에 집어 넣었었다. 원룸에 사치스럽게 무슨 비디오 플레이어냐 싶겠냐만은, 이건 백호군단이 '심심하면 빠칭코'라는 공식을 만들기 전에 무료함을 참을 수 없어 동네를 어슬렁거리던 와중에 전봇대 밑에서 주워온 것이었다. 깔끔쟁이 양호열은 우리가 가오가 있지 어떻게 쓰레기를 줍냐며 펄펄 뛰었지만 쪽수에는 당해낼 수가 없어 그 고물 비디오 플레이어는 양호열의 원룸 한 켠을 차지하게 되었다. 물론 그 때 양호열이 주먹을 휘두르며 조만간 너네를 다 죽여버리겠다며 소리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아무튼 한창 때의 중학생들이 그 비디오에 기대한 것은 아마 사랑, 로맨스 따위는 아니었을 거다. 분명히 이용팔도 '다른 재미'를 노리고 비디오를 가져왔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모두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비디오의 스토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는데, 촌스러운 클리셰 삼류 감성을 모두 때려부어 만든 신파극 그 자체였다.
양호열은 이용팔의 성의를 생각해서 저절로 감기는 두 눈에 힘을 잔뜩 줬다. 그 기특한 노력 덕에 영화의 절정 부분까지 용케 졸지 않고 볼 수 있었는데, 여주인공을 위해 악당에게 잡혀간 남주인공이 피를 질질 흘리며 딱 저 대사를 했더랬다. 그 대사를 듣고 중학생이었던 양호열이 어땠었냐면,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한 번 하고는 지-랄- 이라고 내뱉었었다.
솔직히 양호열은 그 때 다른 친구들도 같이 저게 뭐냐며 욕을 하고 낄낄거릴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조용하지 뭐람? 다들 자나 싶어서 뒤를 돌아보니 양호열을 뺀 네 명 모두가 눈물 콧물을 질질 짜며 도끼눈을 뜬 채로 양호열을 노려보고 있었다.

씨발. 너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감성적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양호열의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라는 노구식의 비난을 시작으로, 이용팔, 김대남, 심지어 강백호까지 호열이 네가 그렇게 감성적이지 못할 줄이야. 라며 한 마디씩 던졌으니까. 
양호열은 억울했다. 세상에 영원한 게 어딨냐, 얘들아.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의리 빼면 시체인 백호군단이 상처를 받을 게 분명했기 때문에 영리한 양호열은 입을 다물었다. 가진 게 없는 양호열은 상실과 부재가 싫었다. 없어지는 것 보다는 처음부터 없는 게 나았기에. 백호군단이야 어쩌다보니 없는 놈들끼리 뭉치게 되었다만은, 더 이상은 양호열의 인생에 의미 있는 게 생기는 건 사양이었다. 없는 것도 서러운데 받았다가 뺏기는 건 너무 좆같은 일이잖아.

분명 그랬을 텐데.


"나, 나 너 좋아하는데.. 나랑 사귀지 않을래..?"


이건 또 뭐람.

목까지, 어쩌면 온 몸 전체가 벌개져 있을 게 분명한 상태로 용케 양호열의 눈을 피하지 않고 덜덜 떨며 고백하는 이 잘생긴 남자는 정대만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삐딱하게 정대만을 올려다보는 양호열은 그 고백을 예견하고 있었냐고? 물론이었다. 정대만은 양호열의 매운 주먹을 맛 본 이후로 거짓말만 해대던 과거를 청산하고 늘 솔직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간 같잖은 플러팅을, 그걸 플러팅이라고 해도 되려나 싶지만은 어쨌든. 어느 양갈래 머리의 소녀가 했다면 귀엽고 깜찍했을지 모를, 하지만 키 184cm의 건장한 미남 정대만이 했기에 그냥 묻혀져버린 소극적인 호감 표시를 눈치 빠른 양호열은 알고 있었다.
왜 모르겠어. 괜히 밥을 사준다며 백호군단 전체를 불러내서는 양호열의 옆자리를 사수하기 위해 눈을 1분에 300번을 굴리는데.

양호열은 해동중 광견이라는 소문과는 달리 얼굴이 제법 준수했고 웃을 때는 또 꽤나 귀염상이라 종종 몇몇 여자애들한테 고백을 받은 적이 있기는 했다. 그런데 고백한 애들의 공통점은 167cm의 양호열보다 작았고 다들 차였다는 거? 그래서 양호열은 자기보다 17cm나 큰 남자가 덜덜 떨며 고백해오는 게 좀 신선했다.

운 좋게도 정대만에게는 나이스 타이밍이었다. 그 날의 양호열은 좀 변덕쟁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양호열이 내심 구마가 완료된 정대만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있었기도 하고. 아무래도 정대만의 3점슛은 누가 봐도 끝내줬으니까. 그간의 방황을 상쇄하기 위한 성실함은 말할 것도 없었고. 게다가 마침 백호군단 중 하나가, 그것도 핵심 인물이 자기 길을 찾아 떠나려 하고 있었고, 양호열은 티는 내지 않았어도 꽤나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받아줬다. 비록 그 연애는 고작 몇 개월 밖에 남지 않은 정대만의 졸업식 날에 끝이 나겠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받아준 건지도 모른다. 끝이 있어야 양호열의 마음이 편하거든. 정대만에게는 안 됐지만 뭐, 어느 정도는 정대만도 예상하고 있을 거다. 설마 자기 졸업 이후도 생각 안 하는 바보겠어?

대신에 조건이 붙었다. 백호군단을 포함한 모두에게 비밀로 할 것. 양호열의 긍정에 활짝 웃고 있던 정대만의 미소에 살짝 금이 갔다. 하지만 이건 꼭 지켜줘야겠어. 양호열은 아무리 기약이 있더라도 어쨌든 상실은 싫었고, 누군가가 그 상실을 눈치 채는 것도 싫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부터 비밀 연애를 하는 거야. 알겠죠, 대만 군? 

정대만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로 양호열은 몇 번 정대만과 데이트를 했다. 사실 별 기대가 없었는데 의외로 정대만과의 데이트는 재미있었다. 정대만은 아무래도 찌르면 찌르는대로, 아니 그의 몇 배로 반응을 돌려주는 사람이라 같이 있으면 양호열의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 게다가 불꽃 남자라는 별명에 걸맞게 얼마나 저돌적인지. 웬만하면 평정을 잃는 일이 없는 양호열 마저도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애정을 퍼부어댔다. 
정대만의 사랑은 16세의 외로운 청소년 하나가 애정의 늪에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이것 만큼은 아무리 눈치 빠른 양호열이라도 예견하지 못했다. 아니, 예견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눈치조자 못 챘다. 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이 정대만을 보며 미소 짓고 있는 게 아닌가. 심지어 정대만은 딴 곳을 보고 있는데도! 아. 이거 좀 곤란한데. 이건 상실에 대한 대비에 도움이 전혀 안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좀 거리를 둬야 해. 미안해, 대만 군. 하지만 어차피 우린 몇 개월 후에 헤어질 예정이니까 대만 군한테도 좋은 일일거야.


***


따끔.

양호열의 양심이 따끔했다. 양심인지 심장인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가슴께가 따끔했다. 그렇게 매몰차게 손을 쳐내려는 건 아니었는데. 다만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져서 빠르게 손을 떼어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뿐이었다. 어찌나 세게 손을 쳐냈는지 팍! 하는 소리가 났던 것 같다. 소리가 큰 만큼 동작도 커서 근처에 있던 강백호의 얼굴에 물음표가 그려지는 걸 시작으로 모두의 시선이 정대만과 양호열에게 집중되었다. 

아. 좆됐네. 

체육관에는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 모두의 표정을 보아하니 화해한 거 아니었어? 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양호열은 눈알을 굴려 정대만을 힐끗 쳐다보았다. 당황한 얼굴, 갈 곳을 잊은 손. 어쩌지. 실수라고 말해야 하나.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민하는 사이에 이미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무마할 타이밍은 지나 버렸다. 할 수 없지.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도록 내버려두는 수 밖에. 그치만 이런 일이 반복되면 다음 번에는 빨개진 얼굴을 감출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양호열은 정대만에게 조심하라고 경고하고는 자리를 떴다. 정대만은 지금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까. 상처 받았겠지. 상처 받았을 거야. 하지만 진짜 어쩔 수가 없었다. 표면적으로 양호열과 정대만은 아무것도 아닌 사이로 남아야만 했다. 손을 거부해도 딱히 상처 받지 않고,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은 그런 사이로. 
왜냐고? 둘이 특별한 관계라는 걸 모두가 알게 되었다 치자. 그러면 그 다음은? 정대만이 떠난 다음에 남겨진 양호열은? 대놓고 동정 받을까? 아니면 쉬쉬할까? 어느 쪽이든 싫었다. 남겨진 사람이 되는 건 이제 그만 하고 싶었다.

양호열은 품에 안고 있던 음료수 병을 노구식에게 떠넘기고 도망치듯 체육관을 벗어나 뒷편에서 심장께를 어루만졌다. 놀란 가슴은 진작에 진정되었으나 다시 체육관에 들어가기에는 정대만을 볼 자신이 없었다. 미안해요. 실수. 라고 하면 분명히 정대만은 그랬냐며 웃어주었을 테지만.. 겁쟁이는 먼저 돌아서는 법 밖에는 모른다.

양호열은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정대만의 졸업식은 앞으로 고작 7개월 남짓. 
문득 담배가 고팠다. 정대만과 사귄 이후로는 의도치 않게 담배를 피우지 않게 되었다. 아무래도 주변에 스포츠맨이 둘이나 있으니 저도 모르게 자제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혹시나 싶어 교복 자켓을 더듬어 담배갑을 찾아 봤지만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게 벌써 버릇이 든 건지 빌어먹게도 만져지는 건 없었다. 교복 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온 건 고작 라이터 한 개였다. 언젠가 정대만의 교복 실밥이 삐져나와 있길래 한 번 지져준 적이 었었다. 그 때 정대만이 담배 따위 백해무익한 줄 알았는데 라이터는 꽤나 쓸모가 있구나! 하며 와하하 웃었었다. 그 이후로 양호열은 담배는 신경도 쓰지 않은 주제에 라이터만은 꼭 챙겨 다녔다. 연상 주제에 꽤나 손이 많이 가는 어떤 사람의 교복 실밥이 또 삐죽 튀어나와 있을지도 모르잖아. 빤히 라이터를 바라보던 양호열은 괜히 부싯돌을 딸깍 거리며 불을 켰다 껐다 손장난을 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금연을 하고 있었구나. 그러면 7개월 후의 나는 다시 담배를 피우게 되는 걸까? 그럼 나는 당신 때문에 두 번이나 바뀌게 되는 건가... 
그렇다면 부탁이야, 대만 군. 더 이상 나를 바꾸지 말아 줘. 

양호열은 딱 20분을 더 밖에 서 있다가 체육관으로 향했다. 그 20분은 만약 정대만이 상처를 받았다면 뭐라고 해야할 지를 고민하는 데에 썼다. 음. 만약에 시무룩한 얼굴이면 밤에 전화라도 한 통 해줘야 하나. 아니면 주말에 맛있는 걸 사줘도 되고. 아마도 정대만은 입을 삐쭉 내민 채로 그건 너무 심했다며 투덜거릴지도 모른다. 그러면 정대만이 좋아하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잡아줘야지. 한 번 깊게 심호흡을 한 양호열이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가 정대만을 눈으로 좇았다. 하지만 고민이 무색하게도 정대만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모두에게 웃고, 양호열에게도 웃어주고, 인사해줬다. 문득 양호열은 허탈해졌다. 그래도 다행이겠지. 

...다행인 거.. 맞겠지..? 

오늘은 농구부의 회의가 있는 날이라서 양호열은 오랜만에 혼자 하교했다. 때로는 강백호와, 때로는 백호군단과, 때로는 정대만과 같이 가는 길이 오늘따라 낯설었다. 손을 거부당한 정대만, 아무렇지 않은 정대만, 그러길 바랐던 양호열. 다행히도 양호열이 바랐던 대로 정대만은 아무렇지 않아 했다. 튀지 않은 관계가 되고 싶었던 건 양호열인데 오히려 그렇게 되니 양호열의 마음이 더 불편했다. 정대만은 진짜 괜찮았을까? 그렇게 사랑한다는 남자친구가 손을 뿌리쳐도 상처받지 않았을까?

양호열의 심장이 다시 따끔거렸다.




양호열 대신 변명을 해보기 위해 이번엔 썰말고 진지하게 풀어봄

호댐 호열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