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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6 22:37
전편: 태웅명헌 서태웅은 규칙적인 사람이다




 *

 이명헌은 농구만으론 살 수 없는 사람이다.

 

 명헌은 한국 최고의 가드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명헌의 위시 리스트는 농구에 한정되지 않았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명헌은 전국에서 본인만 쓰는 어미를 갖고 싶었다. 고교에 진학한 명헌은 장기자랑에서 모두의 눈을 의심케하는 퍼포먼스도 뽐내고 싶었고, 학년에서 납땜을 가장 예술적으로 하는 학생이 되고 싶었으며, 사람 하나는 묻을 기세인 산왕의 합숙훈련을 째고 공범자들과 라멘도 먹으러 가고 싶었다. 대학에서는 기타를 배우고 싶었고, 어떻게든 오프를 긁어모아 몽골의 별을 보러 떠나고 싶었으며, 자취방에서 물고기도 키우고 싶었다. 프로가 된 이후 명헌은 끝내주는 어항을 꾸미고 싶었고, 자동차엔 못생긴 물고기 캐릭터 방향제를 놓고 싶었다.

 명헌은 초봄에는 해수욕장이 열리기 전 조용한 바다에 가고 싶었고, 봄이 끝날때쯤엔 비명이 난무하는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고 싶었으며, 가을에는 붉은 단풍이 진 어드메에서 차박을 하고 싶었다. 겨울에는 집 주변에 있는 모든 트럭의 풀빵을 먹어보고 싶었고, 여름에는 그 해 처음으로 나오는 천도복숭아를 맛보고 싶었다. 그러면서 어미를 갈고 닦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용.

 

 명헌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이루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최고의 가드였다. 부지런하게 특이하다는 평을 달고 사는. 

 

 그리고 명헌은 초여름 퇴근길에 대뜸 사온 첫 복숭아를 한 알 받아먹을 애인도 필요했다. 여름 저녁 집 앞 공원에서 키스를 나누다 대뜸 복숭아 맛있더라, 말을 건네는 애인을 상상했다.

 

 이건 이룰 수 없었다.
 

 첫째. 복숭아가 나오는 초여름, 그의 애인인 우성은 항상 미국에 있었다. 플레이오프, 서머 리그, 드래프트, 트레이닝 캠프, 장소도 다양했다. 사실 초여름에 한정하기 민망했다. 우성은 일상적으로 일상에 없었다.
 

 둘째. 명헌은 커밍아웃을 하고 싶지 않았다. 우성을 끌고라면 더더욱. 절대로. 우성이 아웃팅을 당하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죽고 싶었다.

 

 

 

 *

 “형 이 침대에 외간 남자 뉘이면 절대 안돼요. 현철이 형도 안돼요. 동오 형도 안돼요. 후배도 선배도 감독님도 안돼요. 여자라고 된다는거 아니에요!”

 “외간 강아지는용?”

 “강아지는.. 저만!”

 

 베개를 하나 더 들고 돌아온 명헌은 침대 한쪽에 누운 태웅을 바라봤다. 외간 고양이니까 할 말 없겠지용.

 

 침대는 농구선수 두 명이 눕고도 넉넉할만큼 넓었다. 명헌은 이 침대를 함께 골랐던 농구선수를 떠올렸다. 이놈의 강아지는 머리 속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제 발언권도 없는 주제에.
 

 태웅은 졸린지 눈을 천천히 깜빡이고 있었다. 깜빡깜빡. 껌뻑껌뻑. 인형같네용. 에이스는 다 눈이 예쁜가용. 예쁜 눈은 감고 뜨는데 일반인의 배가 걸리는 듯 했다. 눈이 커서 그런가용. 에이스는 다 눈이 커서 시야가 넓은 걸까용.

 

 명헌이 왔음을 확인한 태웅은 눈을 감았다. 

 명헌은 태웅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누가 봐도 아름다운 조형이었다. 10대가 뽑은 잘생긴 운동선수, 20대가 뽑은 사귀고 싶은 운동선수, 뭐 그런 각종 앙케이트에서 밥먹듯 1위를 차지하는 얼굴. 명헌은 태웅의 완벽한 머리칼, 눈썹, 눈, 콧대와 콧망울, 턱과 입술을 새삼스럽게 바라본다. 어제도 그제도 훈련장 조명 아래서 새빠지게 본 얼굴이지만 잘생겼군용. 하지만 오늘 유독 새삼스러운건,

 조도가 낮은 오랜지색 조명에 빽빽한 속눈썹 아래로 섬세한 그림자가 져 있다.

 아. 이건 좀 감탄이 나왔다.

 태웅은 속눈썹이 기네용. 여름숲마냥 울창하게. 예쁘네용.

 ...이건 우성과 달라용.

 

 명헌은 눈을 돌려 협탁 옆 조명을 껐다. 최악. 침대 위에서 옛 에이스와 새 에이스 비교? 전남친과 직장동료 비교? 너무 별로인 생각이었어용. 침대 속으로 들어간다. 태웅은 구석으로 몸을 옮기고 모로 누웠던 자세를 반듯하게 바꿨다. 어둠과 함께 일순 정적이 찾아왔다. 빗소리가 공간을 메웠다. 비는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빗소리 사이로 눈을 말똥말똥 뜬 명헌이 입을 열었다.

 

 "태웅. 고마워용." 

 "네."

 "이유는 안물어보나용? 왜 천둥 운운하며 전화를 했는지?"

 "..? 네."

 "그래용...."

 "…."

 "태웅. 그냥 장난이었어용. 잠을 깨웠다면 미안해용. 내가 생각이 짧았어용. 태웅도 내가 아무리 주장이라지만 이런말까지 들을 필욘 없어용."
 "...."
 "앞으로 이런 장난 치면 그냥 끊어버려용."

 "괜찮아요."

 "...."

 "...."

 

 우르릉. 정적사이로 한 번의 번개 후 천둥이 쳤다. 태웅이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장난 매일 쳐요."






+ 다음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