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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6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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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 6차전, 마지막 경기를 앞둔 태웅은 백호와 영상 통화중이었다. 그새 못 봤다고 조금 더 자란 빨강머리가 눈에 띄게 복슬복슬해졌다. 화면 너머로 보이는 강백호의 얼굴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태웅은 말없이 그 모습을 눈에 가득 담아두고 있었다.

 

기왕 하는 거 우승까지 하고 와라. 그래야 이 천재에게 널 뛰어넘을 재미가 생기지.

……당연히 이기지, 멍청이.”

 

방금 씻고 나온 건지 수건을 두른 뽀송한 얼굴이 장난스럽게 씩 웃는다. 강백호가 이기라고 했으니 반드시 이길 것이다. 강백호가 아니라도 코트 위의 승부사라 불릴 만큼 호승심으로 똘똘 뭉친 서태웅에게 진다는 선택은 절대 없으나 이번만큼은 간절했다. 강백호를 위해서, 우리 아이를 위해서라는 그런 틀에 박힌 식상한 말은 하고 싶지 않으나 소중한 존재가 생긴다는 건 그런 힘이 있었다. 그런 틀에 박힌 식상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게 만드는 힘. 태웅은 화면 너머의 강백호와 눈을 맞추며 이야기했다.

 

우리 아이를 위해서 이길게.”

후누…….

 

태웅이 직접적으로 우리 아이라 말한 건 처음이었다. 정작 입 밖으로 단어를 꺼낸 당사자는 그저 평온한 얼굴인데 그걸 들은 상대방만 벌겋게 달아올랐다. 서태웅이 직접 우리 아이라 말할 줄은 몰랐던 모양인지 백호는 다른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얼굴을 붉힌 채로 별다른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태웅은 속으로 나지막이 생각한다. 귀여운 저만의 멍청이를 붙잡고 입을 맞추고 싶다고.

 

다들 웜업 들어갈게요.”

 

짧게만 느껴지는 영상 통화의 끝이 찾아왔다. 코칭스태프가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와 몸을 풀라며 선수들을 불렀다. 팀의 주력 멤버인 태웅도 예외는 없었다.

 

끊어야겠다. 잘 먹고 있어.”

어엉. , 서태웅. 잠깐만……!

 

끊으려는 찰나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화면을 돌아보니 화면 가득 다가온 강백호의 얼굴이 눈을 꼭 감고 입술을 쭉 내밀고 있었다.

 

, 빨리 해. 나 민망하니까!

……멍청이.”

 

진짜 이 멍청이를 어떡하면 좋을까 싶었다. 이런 모습을 혹시 다른 사람에게도 보여주는 건 아니겠지, 저만의 멍청이가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도 귀여워 보일까 태웅은 쓸데없는 걱정을 하면서 제 얼굴로 휴대폰을 가져다대었다. 강백호의 입술에, 정확히는 휴대폰 액정 위에 입술이 닿자마자 강백호가 한마디만 남기고 후다닥 전화를 끊어버렸다.

 

, 꼭 이겨야 한다! 우리 아기 여우도 응원한대!

 

 

* * *

 

 

25년만의 팀 우승, 파이널 MVP라는 새로운 역사를 쓴 서태웅은 경기가 끝난 뒤에 잡힌 인터뷰에서도 그저 평온하고 무던했으며 덤덤했다. 마치 당연하다는 것처럼 우승의 기쁨에 도취되지 않은 듯 차분한 그의 모습에 오히려 인터뷰를 요청한 기자가 더 당황한 듯했다.

 

서태웅 선수, 인터뷰 요청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파이널 우승과 함께 MVP까지 수상했는데요. 소감이 어떠세요?”

……기쁩니다.”

 

수려한 외모에 걸맞은 과묵한 언행과 태도는 그로 하여금 수많은 여성 팬들을 대거 생성하는 데는 한 몫 했으나 방송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이토록 큰 뉴스거리에 파이널 우승과 MVP 수상 소감이 그저 기쁘다, 그 한마디로 끝낼 일이라니. 더욱 당황한 기자가 잠시 말문이 막힌 듯 한참을 망설이다 다시 질문을 쏟아냈다.

 

, 그래도 이번 시즌에 정말 대단한 기록을 세웠는데요. 혹시 팀을 우승으로 이끈 데에 원동력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이기라고 해서요.”

……?”

 

이번에도 알 수 없는 대답뿐이었다. 이제는 당황을 넘어 황당함에 물든 기자가 무슨 소리냐 되묻자 태웅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로선 아주 친절한 대답이었다.

 

강백호가 이기라고 해서 이겼습니다.”

 

그의 대답에 기자는 생각했다. 지난번에도 이런 인터뷰를 내놓아 그를 좋아하는 수많은 여성 팬들의 심금을 울렸던 것에 이어 이번에도 기어코 난리가 나겠구나, 라고.

 

 

* * *

 

 

팀의 우승으로 플레이오프가 막을 내렸다 해서 태웅의 일정도 끝이 난 건 아니었다. 경이로운 기록을 세운 만큼 쇄도하는 인터뷰 요청에, 몇 달 전부터 잡혀있던 자선행사 일정에, 새로 계약하게 된 명품 캠페인까지.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태웅에겐 할 일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 와중에도 태웅은 짬짬이 틈을 내 태섭에게 연락을 했는데, 그가 태섭에게 연락을 한 건 다름 아닌 이런 이유에서였다.

 

오냐, 슈퍼에이스. 네가 웬 일로 전화를 다 하냐.’

 

같은 미국에 있어도 연고지가 서로 달라 자주 만날 일도 적어 둘이 따로 만나는 건 일 년에 단 몇 번 정도였다. 그 중 하나는 한국에서 갖는 북산 멤버 모임이었고. 어쨌든 태섭은 오랜만에 걸려온 태웅의 전화에도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었는데, 태웅은 그 점에서 다른 선배보다 태섭을 더 편하게 여겼다.

 

선배, 저 멍청이랑 결혼하려고 하는데요.’

 

거기다가 태섭은 장거리 연애 선배이기도 했고, 그렇게 짝사랑하던 한나 선배와 내년 여름에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태웅이 조언을 구하기엔 아주 훌륭한 선배임에 틀림없었다. 그래서 태웅은 망설임 없이 제 계획을 털어놓았다. 강백호와 결혼하려 한다고.

 

그래서, 이건 어때.”

……모르겠어요.”

 

태섭 또한 플레이오프가 막을 내린 뒤 바쁜 일정들이 남아있었으나, 이제 곧 들려올 아끼는 후배들의 결혼 소식에 한달음에 태웅이 있는 곳까지 달려와 주었다. 태섭은 태웅에게 일단 반지부터 준비해야 하지 않겠냐 제안했고, 태웅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명품 주얼리샵에 들어왔는데……. 반지가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던 태웅의 예상과 달리 반지의 종류는 수십, 수백 가지였다.

 

프러포즈부터 할 거야?”

모르겠는데요.”

아무 계획도 없이 무작정 도와달라고 부른 거야?”

 

태웅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태섭은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으나 이 바보 둘을 결혼시키려면 제가 참아야했다. 태섭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한 번 물었다.

 

너희 커플링은 맞췄었냐.”

아뇨.”

 

이제와 돌이켜보니 사귄 지 5년을 넘는 기간 동안 제대로 된 커플링조차 맞춰본 기억이 없었다. 전에 한 번 그런 얘기를 나눠본 적도 있는 것 같았는데, 그때 강백호는 어차피 경기 때 끼지도 못할 거 뭐 하러 맞추냐 했고, 태웅도 그 말에 별 다른 말없이 넘어갔었다. 확실하게 못 박아두는 걸 좋아하는 강백호 성격으로서 그게 못내 서운했을 것도 같았다. 흐음……. 턱을 매만지며 홀로 고민하던 태웅의 눈에 들어온 반지 한 쌍이 있었다.

 

……이거.”

, 이거? 심플하니 괜찮네. 백호 머리색이랑도 잘 어울리고.”

 

태웅의 눈에 들어온 반지는 얇은 링 전체에 아주 작은 다이아몬드가 촘촘하게 박혀있었고, 중간 중간 강백호의 머리색을 연상시키는 빨간 루비가 박혀있었다. 태웅은 빈약한 상상력으로 이 반지를 낀 강백호의 손과 그의 얼굴을 상상해보았다. 분명 그의 머리색과 잘 어울리는 모습이리라. 태웅은 망설임 없이 반지를 가리켰다.

 

이걸로 할래요.”

 

 

* * *

 

 

시간은 빠르게 지나 벌써 7월 하순에 접어들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 밖으로 나오지 작열하는 한여름의 태양빛이 뜨겁다 못해 모든 걸 녹일 것 같았다. 강백호 같은 태양이 떴네, 태웅은 대수롭지 않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공항 택시를 잡아탔다.

한국에 다시 돌아오겠다며 예정된 일정을 짧은 기간 내에 모두 소화하느라 피곤하긴 했으나 마음만은 개운했다. 심지어는 설레기까지 하고 있었다. 기분 좋은 울림을 자아내는 심장께에 슬며시 손을 올려보던 태웅은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듣고 있던 노래를 재생시켰다. 리드미컬한 비트가 제 심장박동과 비슷하게 울리는 듯했다. 이제 얼마 뒷면 정말로 강백호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태웅은 생각했다. , ‘그때같네.

그러면서 태웅은 제 바지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그 안에 고이 잠들어있던 반지케이스를 손에 굴렸다. 별 고민 없이 단번에 고른 반지를 강백호에게 어떻게 전해주면 좋을까, 고민 없이 고른 것치고는 머리가 복잡했다.

 

…….”

 

고민은 끝이 없었고, 끝이 나지 않는 고민에 답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서태웅 평생 이런 고민을 해본 적이 있었던가. 서태웅은 스스로 반문했다. 당연히 없었지. 일평생 농구밖에 모르던 서태웅이 누군가를 고민해본 것 자체가 강백호가 처음이었는데, 그것 또한 그 나름대로 고민스러운 일이었으나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무작정 찾아가는 것으로 돌파해버렸으니까. 하지만 이건……. 이건 그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고민이었다. 여름의 녹음을 먹어 무성한 파릇함을 지나 고층 빌딩이 가득한 도시 숲으로 진입할 무렵, 태웅에게로 햇빛이 한아름 쏟아져 내렸다. 한여름의 열기를 한껏 먹은 태양은 뜨겁다 못해 모든 걸 녹아내릴 것처럼 강렬했으나 태웅은 그 강렬함이 싫지 않았다. 서태웅에게 태양은 언제나 강백호 같으니까.

 

…….”

 

태웅은 손에 굴리던 반지 케이스를 꺼내들었다. 뚜껑을 살짝 열자 보이는 한 쌍의 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의 서태웅은 그 방파제 길을 달려 강백호에게 꺾이지 않는 의지를 전해주려 했고, 지금의 서태웅은 강백호에게 제 평생을 전해주려 한다. 이제까지 있었던 내 모든 처음은 너였으니 이제부터 있을 내 모든 처음도 너에게 주겠다고. 그렇게 말하면 넌 뭐라고 답을 할까, 강백호. 살짝 열려있던 반지 케이스를 닫고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여전히 강렬한 태양은 태웅을 뜨겁게 비추고 있었다.

 

 

* * *

 

 

태웅은 익숙한 문 앞에 서있었다. 1, 강백호의 복귀 이후 제 집보다 더 자주 드나들었던 그의 집 앞에. 이사를 하면서 장소는 달라졌으나 어찌 됐든 서태웅에겐 강백호가 있는 집이 제 집과 다름없었다. 늘 품에 지니고 다니는 열쇠를 꺼내어 능숙하게 잠금 장치를 풀었다. 문고리를 돌려 현관문을 열자마자 익숙한 강백호의 옅은 체향이 훅 끼쳐왔다. 옅으나 서태웅만은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그 향은 내내 그리워하고 있던 향이었다. 태웅은 그 새삼스러움을 느끼며 캐리어를 끌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안은 온통 고요하고 적막했다. 조용한 게 싫다며 TV를 산 뒤엔 매일 습관처럼 틀어놓던 TV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집안, 태웅은 강백호의 흔적을 찾아 거실까지 난 복도를 따라 걸었다. 복도 중간에 난 방들의 문을 일일이 열어 확인해도 강백호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간 건가, 어렴풋이 나는 기억엔 오늘 일정이 있다고 했던 것도 같았고. 전화라도 걸어볼까 싶어 휴대폰을 꺼내드는 순간, 시야 한 구석에 걸린 모습에 태웅은 숨을 멈추고 말았다.

 

…….”

 

어느새 도달한 거실의 소파에 강백호가 곤히 잠들어있었기 때문이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잠이 든 강백호의 모습은 참으로 오랜만에 목도하는 광경이었다. 언제나 잠의 질이 좋지 않아 강백호는 낮잠을 청하는 일도 드물었다. 태웅은 그 자리에 캐리어를 내려놓고는 백호에게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옅은 숨을 새근대는 그의 얼굴 가까이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세상모르고 잠에 든 얼굴은 평소보다 한껏 풀려있어서 고등학생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래봤자 졸업한 지 이제 고작 3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강백호와 함께 한 6년이란 시간은 태웅의 인생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 짧지 않은 시간동안 꽤 많은 것들이 변했는데, 고등학교를 함께 졸업했고, 둘은 각자의 방법으로 프로 구단에 데뷔했다. 일상적으로 만나는 지인들이나 동료, 환경, 그 모든 것들이 변했으나 변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서로에 대한 마음이었다. 태웅은 강백호의 이마 위로 손을 올렸다. 어느새 이마를 덮을 만큼 자라난 빨간 머리칼을 쓸어넘기자 뒤로 넘어가는 감촉이 유난히 좋았다.

 

으음…….”

……깼어?”

 

머리칼을 쓸어넘기는 태웅의 손길을 느꼈는지 백호의 미간이 한껏 찌푸려지더니 뒤척이며 태웅 쪽으로 돌아누웠다. 돌아누워 다시 잠에 드는 줄 알았던 백호는 감겨있던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허공을 맴도는 듯 잠에 취한 눈동자가 잠시 갈 곳을 찾지 못하다가 태웅을 향했을 때, 그는 백호의 따끈한 볼을 쓸었다.

 

……, 여우다.”

 

여전히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듯한 목소리가 한껏 늘어졌다. 풀려있던 표정 그대로 배시시 웃는 강백호의 얼굴에 태웅은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대로 고개를 숙여 강백호에게 입술을 내렸다. 따뜻하고 촉촉한 감촉이 잔뜩 짓뭉개지며 꾹 눌렀다 떨어졌다. 태웅은 여전히 눈을 뜨고 눈앞의 이를 바라보고 있었고, 강백호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강백호.”

 

잠시 떨어졌던 입술이 조심스레 닿아왔다. 백호는 다시 눈을 감았다.

 

다녀왔어.”

 

입술을 머금은 채로 태웅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다녀왔어, 입술을 간지럽히는 그 간결한 네 글자에 백호가 웃으며 태웅의 뒷목을 붙잡아 제게로 끌어당겼다. 다시 꾹 눌렀다 떨어지는 입술.

 

어서와, 여우야.”

 

다녀왔어, 어서와. 앞으로 둘의 일상의 인사가 될 말들을 주고받으면서 태웅은 백호에게 다시 한 번 입술을 내렸다. 사랑스러워 마지않는 짧은 입맞춤과는 달리 이번엔 길고도 깊게 내려앉았다. 둘의 마음처럼 맞닿는 입술이 다른 때보다 유난히 더 포근하게 느껴졌다. 그 포근함에 태웅은 백호의 볼 한쪽을 감싸며 고개를 비스듬히 꺾어 더 깊게 맞추었다. 눈앞에 있는 이의 입술을 단숨에 삼켜버릴 듯 크게 머금었다가 살짝 도톰한 아랫입술을 물며 떨어졌을 때에 태웅은 비로소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마주치는 강백호와의 시선. 좀 전까지 그를 덮치고 있던 잠기운은 어디 간 건지 강백호는 아주 말똥한 눈으로 태웅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아…… 여우야.”

, 멍청아.”

 

지그시 마주치는 시선에 애틋한 마음이 심장을 넘쳐 온몸으로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타고 올라왔을 무렵이었다.

 

왜 혀는 안 넣냐?”

 

정말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얼굴에 목구멍까지 타고 올라왔던 말들이 채 튀어나오지 못하고 다시 쑥 내려간 그 애틋한 마음들. 그리고 얼마간의 정적이 그들 주변을 감돌았다.

 

……멍청이.”

 

잠시 말문이 막혔던 태웅이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정말, 이 멍청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태웅은 순식간에 난감해진 기분에 이마를 덮고 있던 머리를 쓸어올렸다. 부러 혀를 섞는 입맞춤을 하지 않은 것은 태웅 나름대로의 합당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강백호는 그저 산뜻한 얼굴로 태웅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 키스하자.”

안 돼.”

?”

 

제 양 볼을 감싸 끌어당기는 강백호의 손을 붙잡아 제지했다. 안 된다고 단호히 거절하자 강백호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왜긴 왜야, 그야……. 태웅은 시선을 내려 제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그야 당연히 여기서 더 나가면 자제할 수 없을 게 분명하니까. 3때 고백을 받은 적이 있었다. 같은 학교 여자애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당시 서태웅은 농구 말곤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거절했었고, 그 여자애는 태웅에게 그렇게 물었다. 혹시 무성애자냐고. 그 말을 듣고 태웅은 덤덤하게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열다섯, 폭발하는 성적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을 그 나잇대 남자애가, 그것도 운동부에 속해있으면서 그 나이가 될 동안 성욕을 한 번도 풀어본 적 없었으니까. 물론 강백호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지. 강백호와 조금이라도 살결을 맞대고 있으면 항상 감질난다. 조금 더 닿고 싶고, 조금 더 만지고 싶고, 마침내는 가장 깊숙한 곳까지 서로의 몸을 겹치고 체온을 느끼고 싶다. 결국 서태웅은 무성애자가 아니라 강백호성애자가 아닐까, 태웅은 스스로 우스운 생각을 해본다.

 

뭔 생각 하냐.”

네가 멍청이라는 생각.”

 

저를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는 태웅을 눈치 챘는지, 좀 전에 떼어냈던 손이 다시금 태웅의 얼굴을 붙잡아 제게로 고정시켰다. 무슨 생각 하냐며 뾰로통하게 변한 얼굴에 태웅은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강백호의 속을 살살 긁는 답을 내놓으니 얼굴이 단번에 불그죽죽해진다.

 

우씨, 그래서 할 거야, 안 할 거야!”

안 한다고 했다.”

 

결론은 이 이상은 안 된다는 말이었다. 미국에 있을 때에도 강백호 생각에 혼자 성욕을 푸는 것도 한두 번이지, 곁에 없다는 그리움과 아쉬움만 더 짙게 감돌아 그냥 훈련이나 더 하자 싶었던 서태웅이었다. 물론 그때와 지금은 아주 크나큰 차이가 있지만. 임산부는 무리하면 안 된다니까. 예전에 큰 누나가 임신했을 때 임산부가 하면 안 될 것에 대해 태웅에게 일장연설을 늘어놨던 것이 생각이 나서였다. 물론 강백호가 제 큰 누나보다 훨씬 건장하지만 말이다.

 

……뭐야.”

 

팔을 붙잡아 끌어당긴 뒤 태웅의 등허리 위로 한쪽 다리를 올린 강백호의 행동은 명백히 성적인 의미를 함유하고 있었다. 낮게 묻는 태웅의 시선을 차마 맞추지 못하던 백호가 입술을 삐죽 내밀어 양 팔로 목을 감싸 안았다.

 

그냥 하자, 여우야.”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귓가로 다가온 목소리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살짝 높은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간질거리는 달콤함에 취해있었다.

 

나 이제 안정기라 해도 된대.”

 

태웅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 * *

 

 

몇 차례 절정 끝에 기절하듯 잠이 든 강백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때는 새벽이었고, 결혼 전 마지막이길 기원하는 재회의 밤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태웅은 여전히 시차 때문에 잠에 들질 못하고 그저 하릴없이 강백호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동틀 무렵인지 해가 가물가물 떠오르려 하는 것을 보고 태웅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가 벗어던진 바지를 주워들었다. 여전히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반지 케이스를 꺼내 뚜껑을 열자 똑같은 반지 한 쌍이 어렴풋한 어둠 속에서도 빛을 내고 있었다. 사이즈가 비슷하지만 저보다 살짝 큰 호수의 반지를 꺼내어 잠이 든 강백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곁에 바투 앉아 고요하게 놓인 왼 손을 끌어왔다. 저항 없이 끌려온 손엔 아무것도 없었고, 태웅은 강백호의 약지를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당사자가 깨어있을 때 주는 게 나을까 잠시 생각했지만 태웅은 그냥 제 방식대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강백호 앞에선 고민이란 건 아무 소용없다. 싫다고 불만하고 툴툴대도 강백호는 서태웅 나름의 방식을 사랑했고, 서로를 믿어주었다. 누군가 NBA 파이널 때 떨리지 않았느냐고 물었는데, 웬걸. 태웅은 지금 이 순간이 어느 때보다 더 긴장되는 듯했다. 두 손가락으로 반지를 쥐고 천천히 강백호의 약지에 끼웠다. 걸리는 것 없이 마침내 제 자리를 찾은 반지는 끼워지지 않았던 때보다 더 영롱하게 빛나는 듯했다. 태웅은 그 반지가 끼워진 백호의 손을 지그시 바라보다 반지 케이스에 홀로 남겨진 제 몫의 반지를 꺼내들었다. 강백호가 일어나면 직접 끼워달라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내려놓고는 다시 강백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손에 깍지를 껴 맞잡았다. 사이로 얽어드는 손가락 속에서 덜그럭거리는 감촉이 유난히 기분이 좋았다. 걸리적거리지만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쾌했다. 태웅은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워 백호 쪽을 바라보았다. 깨어나서 이 반지를 발견하고 강백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쁜 쪽으로는 걱정이 되지 않으니 그저 설레고 그 순간이 기다려졌다. 깨어나면 네게 반지를 끼워달라고 해야지. 그러니까 빨리 일어나줘.

 

네가 빨리 일어났으면 좋겠다. 강백호.”

 

꿈길까지 닿지 않을 말을 허공으로 흩날리면서 태웅은 마침내 잠에 들었다.

 

 

* * *

 

 

7월 하순, 한여름의 태양은 이른 아침부터 쨍하게 방 안을 밝혀왔다. 차마 모두 치지 못한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온 햇빛이 백호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었다. 그 따뜻한 밝음에 곤히 잠들어있던 백호의 미간이 점차 불쾌함으로 찡그려지고 있었다.

 

으음……. 눈 부셔…….”

 

정면으로 닿아오는 햇빛에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한 채 몸을 반쯤 일으키자 옆에 잠들어있는 태웅이 보였다. 잠으로 어룽진 시야 사이로 보이는 서태웅은 아주 세상모르고 잘도 잠들어있었다. 잘도 자네. 이 이상 햇빛이 들어오면 서태웅이 깰까 커튼을 치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

 

언제부터 이렇게 깍지를 껴 맞잡고 있던 건지, 서태웅의 손에 붙잡혀있던 제 손을 발견했다. , 이것 좀 놔봐. 잠든 서태웅의 손을 살살 털어내려 맞잡은 손을 뒤집었을 때 백호는 제 눈을 의심했다. 이게, 뭐람……? 제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 때문에.

 

……, 서태웅.”

……, 청이.”

 

이게 언제 끼워져 있던 건지, 분명 잠들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낀 기억이 없는데. 혹시 제가 잠든 사이에 서태웅이 끼워놓은 건가 싶어 옆에 잠든 이의 어깨를 흔들었다. 다행히 잠이 깊게 들었던 건 아닌지 태웅은 눈을 부스스 떴고, 백호는 태웅을 불렀다.

 

이거…… 뭐냐……?”

…….”

 

아직 영문 모를 반지의 정체를 묻는 백호의 모습에 태웅은 그제야 몸을 일으켜 앉았다. 뒤통수엔 까치집을 얹어놓은 채로. 침대 옆 협탁에 놓인 무언가를 집더니 뚜껑을 여니 제가 낀 것과 똑같은 반지가 하나 더 들어있었다. 백호는 입을 벌린 채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끼워줘.”

……내가?”

, 내 거야.”

 

백호는 얼떨떨한 얼굴로 태웅에게 반지를 받아들었다. 제게 왼손을 내미는 태웅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내려 그의 왼손에 고정했다. 여전히 백호의 입술을 옅게 벌려져있었다.

 

나랑 결혼해줘, 강백호.”

……?”

날 받아줄 수 있다면 끼워줘.”

 

결혼이라는 단어를 들었으니 막연히 결혼을 하겠구나 생각만 했을 뿐, 프러포즈에 대해선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50번의 러브레터를 쓰고, 연인과 손을 잡고 등하교를 하는 게 꿈이었던 답 없는 로맨티스트인 그 강백호가 말이다. 반지를 든 채로 그대로 굳어버린 백호를 흘끗 바라본 태웅이 백호의 왼손을 잡아끌어 약지 위로 입을 맞추었다.

 

꿈이 생겼다고 했잖아.”

…….”

 

반지를 낀 위로 스쳐지나가는 입술 점막이 그저 생경하게만 느껴졌다. 백호는 태웅의 정수리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네가 내게 꿈을 만들어줬어.”

…….”

네가 내 꿈이야, 강백호.”

 

저는 기억하지도 못하는, 아마도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을 추억 하나를 꺼내들며 태웅은 제게 꿈에 대해 얘기했었다. 농구선수로서의 삶도 강백호가 꿈꾸는 삶이 맞았지만 실은 가족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서태웅과의 열네 시간의 시차와 몇 번 엎어진 미국 진출에의 꿈에 가족을 소망하던 강백호 조차 희미하게 잊고 있었던 그 꿈을, 서태웅이 다시 끄집어내주었다. 네가 내 꿈이야, 그 말에 백호는 울지 않으려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그래, 꿈을 이루기 위해선 우리가 없으면 안 되지.

 

그러니까 나랑 결혼해줘.”

 

강백호에게도 서태웅이 곧 제 꿈이었다. 너를 뛰어넘는 것도, 너와 함께 하는 것도, 너와 가족을 만들어가는 것도 전부 강백호의 꿈이었다. 그래서 강백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들고 있던 서태웅 몫의 반지를 그의 왼손 약지에 끼워주면서.

 

……그럴게, 여우야.”

 

짧지만은 않았던 이 장거리 연애의 종지부를 찍게 된 순간이었다.

 




끝까지 읽어조서 코맙

슬램덩크 루하나